디지털 미디어 시대, 공연의 커뮤니케이션*

Die Ebene der Kommunikation des Theaters in der digitalen Medienz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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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모든 예술이 그렇듯, 현대 공연예술에서도 현실에 대한 모방과 재현의 담론이 설득력을 상실하면서, 이제 예술의 중심은 점차 작가 내지 작품이 아닌 관객으로 옮아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관객의 지각과 관련된 참여 또는 인터랙션의 문제가 보다 중요한 미학적 화두로 자리잡았다. 참여, 특히 인터랙션에 대한 요구 및 그 내용은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인해 현실에 대한 상 또는 범주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급기야 디지털 미디어의 등장으로 실재 자체가 무한대로 확장, 변용되는 정도가 심화되는 것과 비례한다. 본 논문은 관객의 ‘본다’라는 행위 및 직접적인 신체적 개입과 연관지어, 디지털 인스톨레이션까지 포함한 동시대 공연예술에서 참여와 인터랙션의 내적 지형을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다.

    현실에 대해 통합된 담론이 가능했던 시대의 경우, 공연예술에서 눈의 역할은 단지 작가가 제시한 현실의 상(像)을 보고 수용하는 일종의 창문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특히 중반 이후 관객의 시각은 수용적 매체라기 보다는 타자, 즉 보여지는 대상과의 역동적이고도 대등한 상호작용 속에서 본 것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구성하고 정립하는 반성적 매개체이자 하나의 사회적 행위로 인식되고 있다. 오늘날 무대가 일체의 의미화의 맥락을 거부하고 탈 기호적인 이미지들로 공간을 채우는 것은, 이를 통해 관객의 시각을 교란시키고 당혹하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관객의 시각에 역동적이고도 능동적인 동기를 부여하려는 일종의 연출적 전략이다.

    공연에서 몸을 통한 참여의 방식 역시 시대적 환경의 변화와 맥을 같이 하며 달라져왔다. 근대연극의 공간이 철저하게 관객을 객석의 어둠 속에 묻어두었던터라, 신체적 참여자체가 불가능했다면, 20세기 이후 무대와 객석의 이분법적인 마주보기 구도를 해체하려는 실험적 시도가 증가하면서 공연의 과정에 관객이 직접적으로 개입, 참여하는 경우도 증가했다. 미래주의와 다다로부터 시작된 이러한 시도는 50,60년대 플럭서스나 헤프닝 등을 통해 발전되었고 오늘날에는 소위 ‘장소특정적 공연’을 비롯해 극장이라는 관습적 공간을 벗어나 진행되는 다양한 실험들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참여의 방식은 시각에 기반한 참여의 방식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직접적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80년대 이후 디지털 미디어의 등장은 예술의 지평 자체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디지털 퍼포먼스가 지향하는 사이버스페이스라는 확장된 비물질의 공간 속에서 관객(사용자)은 한때 전통적 예술에서 작가가 지녔던 절대적 권한을 완벽하게 넘겨받았다. 그는 기존 공연에서 무대 또는 극장에 해당되는 사이버스페이스 앞에 마주한 사람이 아니라, 그 공간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이고, 단지 사변적으로 생각하고 지각하거나 반동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이 아니라, 작품의 틀 자체를 바꾸고 변경하는 사람이다.

    시각의 차원이건, 몸의 차원이건 이처럼 오늘날 공연의 중심이 관객으로 넘어갈 뿐 아니라, 그와 소통하는 방식 역시 보다 역동적이고 다층적으로 변화하는 것은, 예술이 현실에 대한 윤곽이 불투명하다고 느끼는 것과 비례한다. 어느 시대에나 공연이 사회에 대한 타자로서 그 정체성을 유지했다는 것을 상기해보면, 오늘날 공연미학에서 관객의 지각 문제, 즉 참여와 인터랙션의 방식이 중요 화두가 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Seitdem die ästhetische Forderung nach der Repräsentation von der Wirklichkeit ihre einstige Überzeugungskraft verloren hat, verschiebt sich das Zentrum der Künste von Künstler zu Publikum, beziehungsweise von Produzent zu Wahrnehmende. Partizipation und Interaktion in den heutigen Performance werden entsprechend die wichtigste Probleme, mit denen sich alle Regisseure beschäftigen.

    Die künstlerischen Verlangen nach Partizipation und Interaktion stehen im Verhältnis mit der Erkenntnis, daß man durch der Entwicklung der Technik seit dem Anfang des 20. Jahrhundert nicht mehr über einer Wirklichkeit oder einer Wahrheit sagen kann. Wir sind in der sogennante Postspektakuläre Zeit, wann die Unterschied zwischen Real und Simulacre verschwindet ist und die kritische Unruhe darüber selbst bedeutungslos ist. Statt geschlossenen Werke zu schaffen, beschäftigen sich die Künstler deswegen zunehmend mit der ästhetischen Ereignis. Sie meinen, dass diese Ereignis den Zuschauer Anlaß finden läßt, an dem Werk aktiv teilzunehmen und aus dessen Botschaft seine eigene Denkweise selbst zu konstruktieren.

    Dieser Aufsatz entwickelt die aktuellen Tendenzen der Partizipation und der Interaktion auf deren Bezüge zu den technologischen und kulturellen Ebene seit der Verbreitung des Internet, also der digitalen Technologie. Es handelt sich deswegen darum, die verschiedenen Weise des Partizipation und des Interaktion in der heutigen Performance zu untersuchen. Erstens wird die Partizpation und Interaktion in den verschiedenen Inszenierungen untersucht, die es sich mit dem performativen Blick des Zuschauers handelt. Hier sind Zusehen des Zuschauers nicht die passive Aufnahme der Bühnewelten, sondern die aktive konstruktive Handlung. Zweitens wird die Interaktion im Verhältnis zu den Technolgien, beziehungsweis digitalen Medien untersucht. In diesen Inszenierungen funktioniert der Körper des Zuschauers nicht mehr als Wahrnehmungsort sondern als eine Schaltung, die die Rahmen des Werkes verändert.

    Dieser Aufsatz will daraus folgen, dass die Veränderungen der Form und Weise der Partizipation und Interaktion in der Relation zu der Veränderung der Medien und auch zu der Ängste über der Verfall der Subjekt stehen. Um ihre Identität als kritische Andere gegen die Gesellschaft wieder aufrechtzuhalten, versuchen die heutigen Inszenierungen die verschieden Formen der Interaktion zu entwickeln.

  • KEYWORD

    관객 , 참여 , 인터랙션 , 시각 , 몸

  • 1. 서론

    연극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할 경우 가장 일반적으로, 일차적으로 가져오는 키워드는 그리스어 “dran”과 “theatron”이다. 어떤 행위가 일어나고 동시에 이것을 지켜보는 장소라는 이 정의는 연극이 타 예술과 변별되는 지점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짚어준다. 하지만 지난 연극의 역사 속에서 행해졌던 작업과 이론은 엄밀히 말해 대부분이 ‘dran’, 즉 무대에서 일어나는 행위에 거의 모든 초점을 맞추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그것을 보는 관객의 존재는 논의에서 상대적으로 배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새로운 시각 테크놀로지가 부상하면서 근대의 절대적인 지각의 통로였던 ‘본다’는 것에 대해 다른 관점들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관객 및 지각 문제가 무대 위의 ‘표현’의 문제 못지않게 중심화두로 부상한 것도 이 무렵이다.

    본 논문은 이처럼 연극에 대한 전통적 관점들이 해체되기 시작한 이후 100여년이 지난 오늘날, 특히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맥락 안에서 이루어지는 공연들이 관객과 어떤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며 이들을 공연의 과정에 참여시키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관객의 지각은 어떻게 변화, 수행되고 있는가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이때 ‘참여(participation)’ 또는 ‘인터랙션(interaction)’은 본 논문이 때로는 동일한 연장선 위에서, 때로는 또다른 차별화의 차원에서 무대와 관객의 관계 및 커뮤니케이션의 방식, 그에 따른 현대 공연예술의 미학적 화두를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될 것이다.

    오늘날 CD-ROM, 웹, 그리고 날로 진화하는 디지털 게임 등과 같은 멀티미디어 어플리케이션 및 디지털 아트 그리고 비디오 인스톨레이션의 경우 인터랙션의 지평은 작품과 수용자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지금까지의 모든 예술적 실험 정도를 뛰어넘는다. 그래서 혹자는 디지털 기술에 의한 인터랙션, 무엇보다 ‘역동적인 직접 경험’을 동시대 포스트모더니즘 미학의 핵심으로 꼽는다. 그들은 이제까지 예술 안에서 이루어졌던 인터랙션은 의미가 되었건 시스템이 되었건 예술가가 미리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터랙션이 아닌 제한적 인터랙션이라고 분명하게 선을 긋기도 한다. 그러나 참여와 인터랙션이라는 화두는 소위 예술과 테크놀로지의 연계 속에서, 특히 디지털 아트만의 전유물로만 볼 수 없다. 일례로 사회학 내지 커뮤니케이션 심리학에서는 인터랙션을 컴퓨터의 유무와 상관없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 관계로 보고 있다. 마찬가지로 모든 예술이 그 작품을 보는 관람객 내지 관찰자와의 만남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예술에서도 인터랙션은 컴퓨터와 상관없이 일차적으로는 예술작품과 수용자/관객이 서로에 대해 맺는 관계, 양자 사이에서 진행되는 커뮤니케이션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행위 주체들이 서로 얼마만큼의 동등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 무엇보다 예술작품을 수용하는 주체가 지각의 과정에서 어느 정도까지 능동성과 자율적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가 등의 정도는 인터랙션의 내적 지평을 다시 차별화해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1)

    따라서 본 논문은 현대공연예술에 있어 참여 내지 인터랙션의 문제를 테크놀로지의 사용유무를 떠나, 오늘날 급속히 변화하는 현실에 대해 예술이 대응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로서 제시하고자 한다. 거대담론이 사라지고 실재와 가상의 구분 또한 증발해버린 사회에서, 오늘날 예술은 더 이상 구속력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덕적이고 교육적인 상위 심급이 아니라, 관객 스스로가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윤리적 단초로서 의미가 있다. 예술의 중심은 작가와 작품으로부터 수용자인 관객으로 옮겨졌고, 무엇보다 예술을 대하는 관객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결정권이 강조되고 있다. 참여와 인터랙션은 바로 이러한 관객의 능동적 결정권을 적극 신뢰하고, 이를 통해 관객을 현실에 대한 관점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공연의 주요 기반이다. 본 논문은 공연예술에서 참여와 인터랙션의 방식을 다음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배우와 관객이 마주보는 전형적인 시각구도를 유지하는 공연에서 행해지는 참여와 인터랙션의 방식이다. 이 경우 ‘관객이 무대를 본다’라는 행위가 대상을 응시하는 사변적 차원을 넘어서서, 관객 스스로 새로운 지각을 능동적으로 구성하는 참여행위로서 행해지는 것에 대해 논할 것이다. 둘째, 극장이라는 제도적 공간을 벗어난 다양한 장소에서 행해지는 일종의 관객 참여형 공연 및 한걸음 더 나아가 일련의 디지털 퍼포먼스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는 공연에서 행해지는 참여와 인터랙션의 방식이다. 이들 공연에서는 무엇보다 관객 내지 사용자의 몸이 인터랙션의 주요 매개체가 된다. 이 몸은 구체적인 경험의 장소이자, 더 나아가 예술의 틀을 주도적으로 바꾸는 변화의 주체로서 새로운 지각의 장소가 된다. 이처럼 현대의 공연에서 행해지는 다양한 인터랙션의 방식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21세기 예술의 동시대적 역할은 무엇이며 이때 예술가의 정체성은 무엇인지를 논의하고자 한다. 물론 이러한 논의는 의미의 구성체 내지 결정체로서 관객의 역할을 재고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1)그렇게 본다면 17세기 이후 근대연극에서 현대적 의미의 인터랙션의 문제를 논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이 시기 관객은 매우 아이러니한 존재였다. 그의 몸은 물리적으로 분명 그 자리에 있지만, 지각의 작동,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주체적으로 지각하고 능동적으로 사유한다는 점에서는 사실 없는 자나 마찬가지였다. 기껏해야 무대가 재현하는 극적 환상에 몰입하는 자, 무대가 자신에게 호소하는 바에 진심어린 마음으로 귀기울이고 관찰하는 자로서의 존재가 고작이었다. 관객은 그저 응시하는 주체이며, 무대는 스펙터클, 즉 시각의 대상으로 환원된다. 근대 연극에서 무대와 객석 사이의 구분이 구체화된 것은 그 때문이다.

    2. 본론

       2.1. 눈의 인터랙션 : 시각장의 파괴와 재구성

    2.1.1. 시각의 사회성 : 행위, 개입, 퍼포먼스

    19세기 이후 ‘본다는 것’에 대한 새로운 질문이 시작되었다. 눈은 신체 기관 중 하나가 수행하는 지각행위를 넘어서는 것, 무엇보다 절대 선을 인식하는 독자적인 이성적 기관이 아니라 그때그때 사회의 문화적 내용들에 의해 매개되는 것으로서, 이를 통해 사람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일정한 ‘보는 방식 way of seeing’이 구성된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었다. 그 연장에서 심리학의 여러 이론은 본다는 것은 이미 있는 것을 그대로 감각하는 수동적 과정이 아니라 일정 정도의 심리적 작용이 개입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사회문화적인 영향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라캉이 본다는 행위가 주체의 형성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임을 강조한 것도 그때문이다. 그런가하면 푸코는 시선은 지식의 산물이자 권력의 산물이라 이야기하고 있으며, 조나단 크래리(Jonathan Crary)와 같은 비평가 역시도 17세기 이후 매체의 역사를 논하면서, 본다는 것의 사회적 과정에 이들 매체들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밝힌 바 있다.2)

    20세기 후반 이후에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시각 자체의 능동성과 자율적 결정권을 강조하는 견해가 사회학과 철학, 예술사, 정신분석학 등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다. 시각 행위의 중심은 더 이상 보여지는 대상에 있지 않았다. 그보다는 서로 호소하고 반응하는 시선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내는 시선의 동적인 기능이 강조되었다.3) 이처럼 본다는 것, 시각의 동적이고 구성적 기능을 강조하는 것은, 20세기 이후 계속해서 시각 테크놀로지에 기반을 둔 자본과 권력, 대중 매체가 만들어내는 과잉 이미지들이 삶의 모델이 되고, 인간이 한갓 ‘수동적인 수용자’로 전락해가고 있는 상황과 관계가 있다. 일례로 기 드보르(Guy Debord)는 그의 『스펙타클 사회』에서 산업혁명, 분업, 대량생산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상품이 우리의 사회적 삶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풍요 속의 결핍을 조장하는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은 대중매체와 결탁하여 상품에 대한 지속적인 환상을 만들어내면서 대중의 소비욕구를 조장하는데, 문제는 이 허위의 이미지들이 “엄청나게 긍정적인, 반박 불가능하고 접근 불가능한 것”4)으로서 오직 수동적인 수용만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다시 수십 년이 지난 오늘의 관점에서 본다면, 기 드보르 등이 제시했던 이런 생각들은 어느 새 하나의 낭만적인 문제제기 수준에 불과한 것이 된 것은 아닌가 싶다. 한때 통제와 억압의 기제로 비판받았던 사회 경제적 시스템이 이제는 도리어 개인의 자유와 자발성, 창조성과 관련한 무결점의 환상을 앞장서서 완벽하게 만들어내는데 앞장서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시스템에 대한 기존의 비판은 더 이상 아무 설득력이 없다.

    이제는 스펙타클이 가상이며 권력과 자본의 산물임을 알지만 그에 대해 우려하고 문제를 제기를 하는 것이 무의미해졌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과 사고를 채우고 있는 모든 담론이나 상황들이 진실이 아닌 허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것을 비판할 근거도 딱히 없다. 사람들은 이처럼 스펙타클에 대한 비판 조차 무의미해진 시대를 ‘포스트 스펙타클 사회’이라고 말한다.6) 따라서 이 과잉의 스펙타클 내지 시뮬라크르 속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아무 것도 예감하지 못하고,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 구경꾼의 입장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비판적 대안은 이제 더 이상 외부로부터 주어질 수 없다. 무엇을 보고, 어떻게 접근하며, 그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의 문제는 내 안에서, 다른 사람과의 역동적 상호관계 속에서, 내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오늘날은 대립담론에 기대어 비판하면서 다른 대안을 제시하기 보다는, “주체를 자기성찰로 안내하는, 상호작용으로 이끄는, 무엇보다 우리가 움직일 수 있고 행동할 수 있으며 생각할 수 있는 유희의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다.7)

    20세기 후반 이후 시각의 능동성과 자율적 결정권의 문제가 적극 부상한 것은 바로 이러한 시선의 수동성, 무력감에 맞서기 위한 것이다. 사람들은 특히 시선이 주체와 주체 사이의 행위와 반응을 결합시키는 독특한 방식을 힘주어 강조한다. 한스 벨팅(Hans Belting)이 “시선은 행위이자 개입, 표현이고, 퍼포먼스”8)라고 말하면서 예술에서 시선의 수행적 역할을 강조한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예컨대 어떤 것을 본다는 행위에는 늘 그것을 보는 사람의 개인적 기억이나 경험, 이념 등이 개입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메를로 퐁티나 라캉 등도 강조했듯, 시선의 방향은 절대 일방향적 통행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사물이 되었건, 사람이 되었건 우리가 바라보는 그 대상 역시 타자의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보는 자인 동시에 보여지는 대상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관심을 끌고 우리의 시각장 안으로 개입해 자신들의 시선과 대면하게 하면서 질문을 던진다. 이 과정에서 보는 사람의 위치는 계속해서 탈중심화된다. 그런 점에서 ‘본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과 그것을 보는 사람 사이에서 이뤄지는 특별한 상호작용, 즉 지속적인 변용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때의 눈은 정신적인 눈, 사변적인 눈이 아니라 구체적인 몸과 결합된 현상학적 눈이다. 그래서 비비언 소브체크(Vivian Sobchack)는 “나는 본다, 고로 체현된다(I see, therfore I am embodied)”라고 말하면서9), 데카르트의 코기토의 환영에 사로잡힌 근대의 시각 주체와 냉정하게 선을 긋는다.

    오늘날 보기의 과정(Sehprozess)은 대상과 개인, 내지 개인과 개인, 몸과 몸 사이의 상호적인 응시의 사건으로서, “가장 완벽한 사회적 행동과 커뮤니케이션의 상호작용에 기여”한다.10) 그렇게 볼 때 공연은 어느 예술 보다 이 ‘본다’는 행위를 예술적 차원에서 더없이 구체적으로 실현시키는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극장은 배우의 몸과 관객의 몸, 그리고 이 둘의 시선이 서로 만나는 장소였다. 공연의 차별적 미학을 현상학적 몸 및 시선과 연결한다면, 몸과 몸 사이에서 이뤄지는 극장에서의 시선은 말 그대로 체현된 시선(verkörperte Blick)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공연에서는 시선과 시선의 단순한 만남을 넘어서서 역동적인 지각의 인터랙션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화두로서 미학적 차원에서 실험, 실천될 수 있는 이유다. 즉 기타 다른 이미지들과 더불어 몸과 몸, 정적인 이미지로 고정되지 않는 살아있는 몸으로 인해, 공연에서의 시선, 시선의 인터랙션은 더더욱 사회적 행위로서, 동적인 생산과 변용의 과정으로서 주목받고 있다.

    2.1.2. 참여하는 눈, 구성하는 눈

    극장은 처음부터 배우의 몸과 관객의 몸, 그리고 이 둘의 시선이 서로 만나는 장소였다. 그러나 전통적인 공연, 특히 연극은 관객의 시선 자체는 기본적으로 미숙하다는 전제 하에, 이 눈을 순수 이성의 이상이나 에토스를 지향하는 정신적인 눈이 되도록 거듭 훈련시키고자 했다. 반드시 봐야 할 것을 항상 언어로, 말로 다시 쓰고 설명하며 의미를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명시하고자 했던 것도 사실은 기본적으로 눈, 시선 자체를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순수 이성의 절대 명제를 위해 관객과 관객이 바라보는 대상 간의 관계를 얼마만큼 매끄럽게 일치시키고, 이를 통해 관객에게 이성의 존재를 발견하는 미적 충일감을 제공하는가하는 것이 곧 예술가의 능력이었다. 전통적 연극에서 관객의 ‘보기’가 불편하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다.

    20세기 이후에는 관객을 어두운 객석에 앉은 수동적인 관음증자의 위치로부터 끌어내려는 많은 시도들이 있었다. 그런데 다소 변형적인 실험들을 제외하면 21세기인 오늘날에도 공연의 대부분은 여전히 무대와 객석이 마주보고 있는 전통적인 극장 구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동일한 물리적 조건 속에서 오늘날 연극이 초점을 겨누고 있는 것은, 다다의 실험이 그랬던 것과 같이 무대의 전통적 관습을 도발적으로 소란스레 파괴하면서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또한 브레히트 등의 연극이 그랬듯 현실의 문제점에 대해 다른 이상적 대안을 정해놓고 이를 은유적 차원에서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현대연극의 많은 실험들은 관객이 객석에서 순간적으로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지, 무엇을 봐야할지 모를 정도로 시각장 자체의 구도를 계속해서 교란시킨다. 도저히 하나의 의미로 수렴되기에는 과도한, 때로는 지극히 적은 기표적 이미지들을 현시함으로써, 그 낯설고 당혹스런 경험을 통해 일상 속에서 길들여진 관객의 시각장을 의도적으로 파괴하는 것이다. 하이너 괴벨스(Heiner Goebbels)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극장이 정신적 사유의 장소 내지 감정적 연대의 장소이기를 그만두고, 문제를 제기하되 그 논쟁의 한가운데로 관객을 적극 끌어들여 스스로 비판적으로 대면하도록 하는 장소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2011년 LG 아트센터에서 공연되었던 그의 <그 집에 갔지만 들어가지 않았다> 역시 선형적으로 전개되는 서사는 물론이고 그에 상응하는 사건이 없으며, 음향, 빛을 포함한 모든 오브제의 물리적 윤곽 또한 구체적이지 않다. 한 마디로 이들 작품 안에는 관객인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중심 같은 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2006년 비인 부룩테아터에서 공연된 크리스토프 슈링엔지프(Christoph Schlingensief)의 <제 7 구역(Area 7)>은 연극과 오페라, 영화와 인스톨레이션 등 모든 영역을 거침없이 넘나드는 전방위적 예술가의 작품답게 수많은 오브제와 미디어, 퍼포먼스로 채워진 혼종의 극단에 선 공연이었다. 막이 오르면 브룩테아터 무대 위에 20여개의 작은 방들이 미로처럼 복잡하게 들어서 있고, 관객은 제한된 인원으로 나뉘어 관계자의 안내에 따라 이 방을 둘러본다. 그 방안에는 슈링엔지프의 예술적 스승이라 할 죠셉 보이스, 헤르만 니취, 앤디 워홀을 비롯, 마이클 잭슨이라는 대중적 아이콘의 흔적에서 부터, 부패하는 토끼의 영상, 끓는 물에 삶아지는 계란, 유모차, 심지어 슈링엔지프 본인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실로 엄청난 양의 오브제들로 채워져 있다.

    이들 무대 위의 이미지들은 말 그대로 “재현의 강박”12)에서 완전히 벗어나있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견주어 세상을 해석할 수 있는 나레이션도 딱히 없고, 무엇이라 비판을 시도할 근거도 찾을 수 없다. 관객은 당연히 뭔가 빠진 듯한, 뭔가 결핍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이 시각장의 중심이라는 환상에 싸여있던 근대의 관객에 비한다면, 이런 공연에 참여한 오늘날의 관객은 유례가 없을 만큼 많은 것을 보고 있지만 정작 무엇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는 “형편없는 목격자(ein schlechter Zeuge)”에 가깝다.13) 그런 점에서 본다면 2013년 페스티벌 봄 해외 초청작이었던 윌리엄 포사이즈(William Forysthe)의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 만큼 관객으로 하여금 공연 시간 동안 무언가를 보긴 했으나 정작 무엇을 보았는지 모르는 당혹감을 안겨준 공연도 드물 것이다. 무용수들은 성남아트센터의 메인 무대 및 무대 뒤 작은 방 등 두 장소를 쉬임 없이 드나든다. 그로 인해 관객 역시 이 두 장소를 번갈아 오가야 한다. 하지만 두 장소를 동시에 볼 수 없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볼 수 없는 다른 방에서 그 순간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다. 관객의 동선은 보다 많은 것을 보고자 하는 욕망과 비례하지만, 그럼에도 한 시간여의 공연 동안 그가 본 것은 말 그대로 그가 본 것 만큼이다. 이 공연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까지도 정신의 눈으로 볼 수 있다고 믿었던 근대적 주체개념을 무력하게 만든 대표적 예이다.

    이런 공연을 보는 대부분의 관객은 한편으로 무언가를 계속해서 놓치고 있다고 있다는 불안감과, 다른 한편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은 것을 보고 있다는 부담감 사이를 쉬지 않고 오간다. 그러나 이처럼 무대 위 몸과 이미지가 하나의 의미로 수렴될 수 있는 일체의 상징적, 은유적 근거를 제거해 버릴 때, 관객은 불안과 혼란, 단절의 상태를 경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식으로건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입장을 취해야 할 것 같은 일종의 의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기억 등을 동원해 그 이미지들의 시선에 대응하고 스스로 자신의 위치를 조절하며 자신만의 서사를 구축할 필요성을 자기 안에서 감지하고 실행하는 것이다. 이처럼 탈기호화된 움직임과 이미지들로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불편하게 하게 하는 공연의 전략은, 다른 한편으로 무대 위 배우들이 말 그대로 자신을 보는 관객의 시선에 맞서서 노골적으로 관객을 바라보는 경우에도 생겨난다. 예를 들어 2013년 페스티벌 봄의 해외초청작이었던 제롬 벨의 <장애극장(The Disabled)>은 열 명의 장애배우들이 한 사람씩 무대 앞쪽으로 걸어나와 간단히 자신을 소개한 뒤 각각 약 1분여의 시간 동안 객석의 관객을 빤히 바라보다가 퇴장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특별한 행위나 서사가 전개되기는 커녕, 배우가 역할이 아닌 본래의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고 말없이 관객을 빤히 응시하는 것이 10여분 이상 반복되는 것이다. 이로써 이 공연은 기존까지 절대시되었던 관객과 퍼포머의 역할구분을 무화시켜버린다. 바라보는 주체인 동시에 바라보여지는 대상이 되는 이 불편함은,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이 보는 것, 볼 수 있는 것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게 만든다. 우월적 관음증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관객의 시선에, 지금까지 그 대상 가운데 하나였던 배우의 시선이 동등한 힘으로 충돌할 때, 여기에서 제 3의 관점이 불러내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지각틀을 해체하고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을 만들어준다.

    하나의 내러티브, 즉 소실점을 중심으로 위계적 질서를 갖추고 배열된 전통적 연극의 시각장과 달리, 오늘날 공연의 무대는 실로 많은 이미지들로 채워져 있을 뿐 아니라 이것들을 배열한 기준이나 중심이 달리 주어져 있지 않다. 그 이미지들 안에서 무엇을 가져가 의미화할 것인가에 대한 최종적 결정권은 오로지 그것을 보는 관객의 몫으로 남겨진다. 오늘날 연극이 추구하는 것은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의미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 의미를 ‘발견’하고 이에 대응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작가나 연출가는 설명하고 설득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제기하고 질문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하나의 공간, 시간 속에서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 사이의 대등한 인터랙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대등한 시각, 그리고 소실점이 없는 무대는 이처럼 무대와 객석 사이에서 역동적인 상호주관적 관계를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새로운 지각의 공간을 만드는 결정적 촉매제다. 작가나 연출가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설명하려는 본래의 욕망을 거두고, 관객의 시선을 통한 무대와의 인터랙션을 가장 최대치로 끌어올릴 수 있는 연출적 전략을 구성하는 것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 이때 대상을 단순히 응시하고 수용하는 눈이 아니라, 대상을 자신의 지각장 안으로 끌어들여 다시 구성하는 관객의 이 시선은 행동하는 눈이다.

       2.2. 몸의 인터랙션 : 객석에서 직접 작품 속으로

    2.2.1. 몸의 증발, 몸의 귀환

    60년대 이후 문화와 예술의 주요 화두가 감각의 부활과 인터랙션의 문제로 집중되었던 것은, 서구의 이성중심적 사고가 몸의 존재를 폄하하면서 기형화된 역사를 낳았다는 20세기 초부터 지속된 반성의 연장이었다. 이후 계속된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몸 자체가 탈물질화되어 증발되고 있다는 불안감을 더더욱 확산시켰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테크놀로지가 갖고 있는 무한한 매체적 가능성은 작품 내지 작가가 절대적 중심이었던 기존 예술의 틀로부터 벗어나 소위 새로운 예술을 실현하고자 하는 예술가들의 욕망을 더더욱 자극하면서 예술의 지평을 확장시켰다. 따라서 20세기 중반 이후 예술에서의 인터랙션은, 한편으로는 테크놀로지의 매체적 가능성을 예술적으로 적극 수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시각테크놀로지, 특히 대중적 매체의 범람 속에서 증발되어 버린 고유한 가치, 즉 존재의 기반으로서의 ‘몸’을 다시금 회복해야 한다는 요구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그 중에서 ‘몸’과 관련해 이들의 작업에 이론적 단초를 제공한 사람은 메를로 퐁티였다. 그는 ‘몸이란 몸성(Leiblichkeit)과 사회성(Sozialität)이 만나는 단면’이라 이야기하면서 지각과 몸, 정신과 몸의 연관성을 강조했다. 게르노트 뵈메(Gernot Böhme)가 “지각이란 사람이 자신의 몸으로 어떤 것, 어떤 사람, 아니면 환경에 놓여있는 방식”14)이라 이야기하고, 베른하르트 발덴펠스(Bernhardt Waldenfels)가 “몸은 항상 있기 때문”에15) 우리가 이러저러한 것과 만나는 접근방식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 것도, 모두 메를로 퐁티를 이어 몸과 정신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몸의 사회성을 강조하면서 날이 갈수록 일상 속에서 커져가는 소외의 경험에 맞대응한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소위 ‘수행적 전환(performative turn)’이라는 새로운 문화 패러다임으로 나타났고, 20세기 후반 퍼포먼스 예술에서도 이와 맞물려 재현의 도구로서의 몸이 아니라, 몸 자체가 갖는 물질성을 적극 현시하는 수행적 공연이 대거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공연은 몸과 몸이 만나는 사이의 장소이다. 이 몸과 몸의 만남을 통해 연극의 공간은 나와 대상을 분리시킬 뿐 아니라 나 자신을 지금까지의 나로부터 분리시키는 낯선 공간, 즉 제 3의 지각 공간이자 끊임없이 생성 중에 놓인 사회적 공간이 된다. 예술가들은 의미의 맥락에서 벗어난 낯설고 불편하며 때로는 끔찍하기까지 한 퍼포머을 통해 관객의 상식적 감각을 자극하고, 이를 통해 관객의 참여를 적극 유도함으로써, 극장의 공간을 사변적 해석이 아닌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직접적 경험의 장소로 만들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는 미래주의와 다다에서 시작되어 억압된 몸, 고통받는 몸을 통해 공연을 서구의 이성 중심의 역사 및 권력과 자본에 저항하는 장소로 보여주었던 60, 70년대 소위 모든 행위예술의 근간이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최근 디지털 아트의 맥락 속에서는 몸과 인터랙션의 문제가 이와 다른 미학적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애초 각종 군사시스템에 적용되었던 컴퓨터 테크놀로지는, 과학기술과 인간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의식을 변화시키고 기억을 확장시켰으며 심지어 지능을 확대시켰다. 그리고 이제 그것은 디지털이라는 이름으로 정보와 커뮤니케이션, 산업 및 제조분야를 비롯하여 산업화된 세계의 일상생활을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디지털 이미지는 이전의 기술적 이미지들과 달리 철저히 비물질적인 특성을 지닌다. 예를 들어 사진이 대상을 이미지로 재현해 그 상태로 보관했다면, 디지털 이미지는 디지트(digit)의 형태로 저장되어, 수정되고 또 무한 배포되는 가운데 사이버 스페이스(Cyber Space)라는 엄청난 이미지들의 생산 공간을 만들어낸다. 디지털에 의해 기술적으로 제어되는 가상이라는 의미의 ‘cyber’에 고전적 의미의 ‘공간’이 합쳐진 이 공간은 디지털 정보와 인간의 지각이 만나는 지점이다. 그것은 어느정도는 현실에서 가능하고, 어느 정도는 여전히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모든 기술의 혼합에 의존하는 바, 그 안에서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얼마든지 결합되고 부착될 수 있다. 이곳은 단순히 인간과 기술이 만나는 곳을 넘어서서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이 만나는 곳이고, 이성과 신비가 혼재하는 곳이며 인간이 제 2, 제 3의 자신과 만나는 곳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디지털 이미지에서는 “표면과 깊이, 가상과 진리 사이의 긴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16) 그런데 이러한 이미지가 지금과 여기라는 현실성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을 느끼는 몸의 주체, 즉 수용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모든 것이 무한 확장하고 변용되지만, 이것이 의미하는 상황이 무엇이고 이 결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나아가 상황과 조건 자체를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사용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이버스페이스는 철저히 사용자가 중심이 되는 시스템이다. 즉 이 공간에서는 고정된 이미지를 수용자가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인 창조자가 되어 계속해서 이미지를 변형시키고 이를 통해 매번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즉 의미는 이미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링크, 융합, 이식 등, 시스템과 사용자 사이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결과이며, 또한 유동적인 상태에서 계속해서 변화하고 변형 중에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사용자의 선택이 없으면 시스템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에, 사이버스페이스에서는 우리 몸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많은 장치들이 개발되고 실험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용자를 통해 그 자체로는 지극히 비물질적인 디지털 환경은 비로소 시간과 공간, 의미의 물질성을 확보하게 할 수 있게 된다. 인간에 대한 것이건 세계에 대한 것이건 지금까지 모든 정보나 대상이 인간 밖에 있었다면, 이제 인간은 정보와 대상 안으로 직접 들어간다. 이로써 이미지와 관찰자, 대상과 주체의 관계는 전복된다. 이미지 앞의 인간은 더 이상 사유하는 주체도, 시각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구성하는 지각의 행위자도 아니다. 그는 직접 시스템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미지를 합성하고 변형시키며 심지어 틀 자체를 결정하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행위자이다.

    2.2.2. 참여하는 몸, 변형하는 몸

    앨런 캐프로(Allan Caprow)는 그의 1965년 선언문 <해프닝을 위한 무제의 지침서>에서 예술은 절대 이상적 창조물이 아니라 관람객의 능동적인 참여로 실현되는, 그것도 항상 진행 중에 있는 작업임을 강조한다. 존 케이지 등 당시 많은 예술가들이 그랬듯이, 그에게도 수동적인 관객이 모여 앉아있는 기존의 연극 공간은 한마디로 죽은 공간에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이벤트를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들에게 사과를 던진다거나 떼지어 몰려다니게 해서 그저 건성으로 참가하는 차원을 넘어 심지어 거부감이나 악의, 파괴적인 반응을 끌어내는 것은 ‘참여’라고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한때 미래주의나 다다 등이 그랬던 것처럼 극단적 도발을 통해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등의 작업에 대해 분명히 선을 그었다.

    이러한 캐프로의 생각은 이후 많은 연출가들에 의해 각각의 방식으로 실천되었다. 관객을 강제적 상황으로 몰아가 참여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의 공간을 만들고 자발적으로, 선택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장(場)을 만드는 것이다. 소위 ‘장소 특정적 공연(cite-specific performance)’이나 ‘일상의 전문가 연극’ 등이 직간접적으로 이 범주에 들 수 있는데, 리미니 프로토콜(Rimini Protokoll)이나 쉬쉬팝(SheShePop) 등이 아마도 캐프로의 이런 생각을 현대적으로 실천하는 대표적 예술가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극단의 작업은 일반인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공연의 맥락 속으로 가져와 배우를 대신해 보여준다는 특징도 있지만, 리미니 프로토콜의 (2005)나 쉬쉬팝의 , (2004) 등은 그들이 말하는 ‘일상의 전문가 연극’ 보다는 일반 관객들의 직접적이고 즉흥적인 참여에 근거해 만들어가는 과정 중심적 공연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20세기 후반 이후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공연예술의 지형도에 또다른 변화를 가져왔다.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이나 로베르 르빠쥬(Robert Lepage), 빌더스 어소시에이션(Builders Association)과 같은 일련의 무용 및 퍼포먼스 그룹이 디지털 이미지들을 자신들의 무대에 적극 수용하고 있지만, 이제는 그 단계를 넘어서서 디지털 매체가 기존의 퍼포머를 대신하는 다양한 인터랙티브 인스톨레이션이 또 하나의 공연 양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예술, 특히 공연과 시각예술이 자신들의 미학적 효과와 스펙타클의 감각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테크놀로지를 수용, 적용해 왔다는 것을 상기해 보면, 비디오 아트를 넘어선 일련의 디지털 아트를 예술의 범주에 포함시킬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이제 무의미해보인다. 20세기 이후 예술이 지속적으로 추구해왔던 것이 예술과 삶의 경계 허물기였다면,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의해 전적으로 삶과 현실이 구성되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보면 예술과 삶, 테크놀로지는 이제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이 연극, 공연의 범주가 대체 무엇인가를 놓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기존의 시각에 정면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50,60년대 이후 이미 백남준이나 부르스 나우만(Bruce Naumann), 댄 그레이험(Dan Graham) 등이 커다란 공간에 설치된 모니터를 이용해 관객의 모습을 비롯한 여러 이미지들을 2차원 평면으로부터 끌어내어 다각도로 입체화하고 그 사이에 관객을 위치하게 하는 일종의 관객 참여형 공연을 선보였었다. 텔레비전 시청자가 전화기와 버튼을 가지고 쇼의 진행에 직접 개입하는 더글라스 데비스(Douglas Davis)의 (1972) 역시 디지털 매체가 부상하기 이전의 기술적 환경 속에서 인터랙션의 지형을 모색한 초기의 시도중 하나다. 그런가 하면 커밀 어터백(Camille Utterback)과 로미 아키터브(Romy Achituv)의 <텍스트 레인(Text Rain)>(1999)은 갤러리 내부에 통로를 만들어 놓고 커다란 두 개의 평판 스크린을 설치한 작품으로서 흔히 디지털 인스톨레이션의 전환기를 마련한 작품이라 널리 평가된다. 50, 60년대의 작품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전의 작업, 이를 테면 요하임 샤우터(Joachim Sauter)와 디르크 뤼제브링크(Dirk Lüsebrink)의 (1992)나 모니카 플라이쉬맨(Monika Fleischmann)과 볼프강 슈트라우스(Wolfgang Strauss)의 (1993)과 같은 작업들이 시도한 인터랙션이 여전히 미리 정해진 프로그램 안에서 관객의 움직임과 참여를 유도했던 것이었다. 반면 이 <텍스트 레인>은 철저히 관객의 몸의 움직임에 의해 프로그램 자체가 그때그때 만들어지는 공연이었고, 그런 점에서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관객(사용자) 중심의 인터랙션 퍼포먼스였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공연에서의 인터랙션 지평은 이처럼 기존의 폐쇄회로 시스템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이처럼 관객이 그때그때 자발적으로 취하는 동선 및 선택 여하에 따라 작품이 무한대로 변형되는, 일종의 우연성을 근간으로 그 지평을 무한히 확장하고 있다. 2003년 런던에서 초연된 ‘블라스트 씨오리(Blast Theory)’의 는 예술과 일상, 작품과 공간, 그리고 디지털 미디어를 적극 결합한 전혀 차원이 다른 관객 참여형 공연이었다. 관객 중 일부는 60분이라는 주어진 시간 동안 로이의 사무실을 찾아내라는 미션을 받고 핸드 컴퓨터를 들고 공연의 장소인 거리로 나간다. 그러면 나머지 관객은 인터넷으로 같은 장소를 3D 버전으로 탐색하면서 로이가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 그 사이 로이는 SMS로 자기가 있는 위치를 우회적으로 암시하는 메시지를 보낸다. 온라인 사용자는 거리에 있는 관객에게 그 장소를 유추 지시를 내린다. 물론 거리에 있는 관객은 온라인 관객의 정보가 정확한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안내하는지도 알 수 없다. 게다가 누가 자기처럼 공연에 참여한 관객인지 아니면 그냥 일반 시민인지도 알 수가 없다. 모든 것을 본능에 맡기고 상황을 직접적으로 체험해나가는 수 밖에 없다. 현재 다양한 미디어 테크놀로지를 활용하여 행해지고 있는 수 많은 인터랙션 퍼포먼스들을 놓고 보면, 이제는 이런 실험 조차도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공연은 연극과 가상현실, 컴퓨터 게임과 실제 현실을 결합하는 가운데, 무엇보다 관객이 참여하는 과정에서 작품의 방향성이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결정되는 새로운 인터랙션 개념의 퍼포먼스를 보여준 대표적 경우라 할 수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 일련의 공연들이 기대고 있는 사이버 스페이스의 환경적 특징은 단순히 기계적으로 만들어지고 변형된 이미지들의 공간이 아니라, 신체의 움직임이 전제된 하나의 시뮬레이션의 공간이다. 즉 사이버 스페이스는 인간의 다양한 현실을 가상에 옮겨 놓고 관객이 거기에 완벽히 몰입해 새로운 방식으로 경험하게 함으로써 절대적 현실을 체험하도록 유도한다. 그것이 바로 흔히 말하는 ‘몰입적 환경(immersible Enviroment)’이다. 여기에서 관찰자는 눈으로만 영상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무엇보다 자신의 행위에 의해 이미지를 새롭게 획득해 나간다. 이를 공연의 맥락으로 옮겨 생각할 경우, 퍼포머는 그나마 완벽하게 사라지고 그 자리를 관객(사용자)이 대신하게 되는 셈이다. 즉 사용자(관객)는 퍼포머인 동시에 관찰자이고, 또한 예술가이다. 그런 점에서 사이버스페이스 안에서 이미지를 수용하는 관객은 더 이상 “이미지 앞에 선 존재(Vor-der-Bild-sein)”가 아니라 “이미지 세계 안에 있는 존재(In-der-Bildwelt-sein)”19)다. 이때 관객들의 움직임으로 자기 앞에 있는 이미지들이 계속해서 움직이고, 형태가 들어지며 이미지가 변형된다. 그런 점에서 그 몸은 단순히 현상학적 지각의 차원을 넘어서서 직접 움직이며 세계를 변형시키는 훨씬 구체적이고 실재하는 몸이다. 관객(관찰자), 특히 관객의 몸은 이제 자신의 움직임으로 자기 앞에 있는 이미지들이 계속해서 움직이고, 형태가 만들어지며 이미지를 변형시키는 일종의 “기어박스(schifter)”20)와 같은 것이 된다. 아울러 예술작품은 하나의 놀이가 되면서 관찰자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가 된다.21)

    그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 인터랙티브 아트에서의 ‘인터랙션’과 60년대 공연예술의 ‘참여’를 구분한다. 예컨대 기존 공연에서의 참여가 사변적이건, 신체적, 지적이건 이미 만들어진 완결된 예술작품과 관객 사이의 관계를 말한다면, 인터랙션은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의 완벽한 쌍방향적인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터렉티브 아트는 이미지와 텍스트, 사운드를 포함한 일련의 데이터의 흐름 및 인공지능, 환경, 네트워크에 관찰자가 개입해 흐름에 영향을 미치고 구조를 변경하고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내지는 네트워크를 조종하면서 변형과 창조의 행위에 직접적으로 참여한다. 그리고 이런 참여는 심지어 작품의 프레임과 내용까지 관객이 변경시킬 수 있게 만든다. 이로써 닫혀진 예술작품이라는 개념은 더 의미가 없어졌다. 예술작품은 work가 아닌 text, 그것도 지각의 차원에서의 구성적인 개입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신체적으로 입력을 할 것을 요구하고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을 요구하는 하나의 이용가능하고, 성찰적인 장치다. 관객은 더 이상 연출에 의해 프로그래밍된 공연의 바깥에서 공연을 바라보는 자가 아니라, 가상적인 연극의 시뮬레이션 안으로 직접 들어온다. 이로써 무대와 객석이라는 공간은 완벽하게 제거된다. 오늘날 인터랙티브 미디어 아트는 “관객을 그의 해석적 내지 감정적 참여라는 의미에서의 위치로부터 완전히 분리”22)시킨다. 그래서 인터랙티브 인스톨레이션이 기존의 관객을 관객이 아닌 유저(user), 사용자로 지칭하는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인터랙티브 아트의 경우 관객은 멀리 떨어져 사변적으로 바라보던 자리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육체적 참여자로서 주목을 받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스토리보드 컨트롤러, 공동저자 내지 자기 자신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퍼포머이다.

    2)Jonathan Crary, Techniken des Betrachters, Sehen und Moderne, Dresden: Verlag der Kunst, 1996, S. 34 이하 참조.  3)사람들은 이것을 기존의 언어학적 전환과 비교하여 “그림적 전환(the pictorial turn)” 또는 “시각적 전환(the visual turn)”이라 부른다.  4)기 드보르, 이경숙 옭김, 『스펙터클의 사회』, 현실문화연구, 1996. 14쪽.  5)S. Žižek, “Die Politische Suspension der Ethischen”, Frankfurt am Main 2006, S.11f. in: Eierman, André, Postspektakuläres Theater: Die Alterität der Aufführung und die Entgrenzung der Künste, Bielefeld: transkript, 2009. S.16에서 재인용.  6)André Eierman, 앞의 책, 24쪽 이하 참조..  7)Dirk Baecker, Studien zur nächsten Gesellschaft, Frankfurt am Main: Suhrkamp, 2007, S. 8 ff.이처럼 실재에 대한 믿음이 갈수록 희박해지면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보기의 필요성이 더더욱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바, 이 점에 대해서는 지젝 또한 강하게 강조한 바 있다. “우리는 우리가 허구라고 경험하는 것 속에서 실재의 단단한 핵심, 우리가 허구화해야만 유지할 수 있는 그 핵심을 분간해낼 줄 알아야 한다. 요컨대 우리는 현실의 어떤 부분이 환상을 통해 ‘기능 변화’ 되는지, 그래서 그것이 현실의 일부임에도 허구적인 방식으로 지각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실재’ 현실에서 허구인 부분을 알아보는 것은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 허구라고 고발/폭로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슬라보예 지젝, 이현우․김희진 옮김,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자음과 모음, 2011, 34쪽.  8)Hans Belting, “Zur Ikonologie des Blicks”, in: Christoph Wulf/Jörg Zirfas (Hrsg.): Ikonologie des Performativen, München: Fink 2005, S.50-58, hier 50.  9)Vivian Sobchack, The Address of the Eye; A Phenomenology of Film Expierence,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2, p. 304.  10)Georg Simmel, “Soziologie der Sinne”, in: Ders, Soziologische Ästhetik, Darmstadt 1988, S. 135-149, hier S. 138f.  11)Heiner Goebbels, <그 집에 갔지만 들어가지 않았다> 공연프로그램북, LG 아트센터 2011.  12)Jean-Francois Lyotard, “Das Erhabene und die Avantgarde”, in: Ders., Das Inhumane, Plaudereien über die Zeit, Wien: Passagen, 2006, S.179.  13)Florian Malzacher, “There is a Word for People like you: Audience”, in: Jan Deck und Angelika Seiburg(Hrsg.), Paradoxien des Zuschauens, Bielefeld: transcript, 2008, S. 41~54, hier S.48.  14)Gernot Böhme, Die Atmosphäre. Essays zut neuen Ästhetik.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95, S.47f.  15)Bernhard Waldenfels, Das leibliche Selbst. Vorlesungen zur Phänomenologie des Leibes, Frankfurt am Main: Suhrkamp, 2000, S. 31.  16)Norbert Bolz. Eine kurze Geschichte des Scheins, München: Wilhelm Fink, 1991, S. 118.  17)앨런 캐프로, 「해프닝을 위한 무대의 지침서」, in: 랜덜 패커, 캔 조던 엮음, 『멀티 미디어. 바그너에서 가상현실까지』, 나비 프레스 2004, p.469~p.482, p.473.  18)Andrea Zapp, “net.drama://myth/mimesis/mind_mapping/, 77, in: Steve Dixon, Digital Performance. A History of New Media in Theater, Dance, Performance Art, and Installation, Cambridge: The MIT Press, 2007. p.563에서 재인용.  19)볼프강 벨슈, 심혜련 옮김, 『미학의 경계를 넘어』, 향연 2005. p. 321.  20)Susan Melrose, “Bodies without Bodies”, in: Susan Broadhurst u. Josephine Machon(Hrsg.), Performance and Technology: Practices of Virtual Embodiment and Interactivity,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07. p. 1-17, p.8.  21)그런 이유로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의 전통적인 구분 또한 무의미해졌다. 그러나 애초 실재와 몸이 증발된 비물질적인 공간에서 관찰자의 몸과 물질성을 회복하려던 디지털 미디어 퍼포먼스의 애초 시도가 과연 일관되게 진행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비판적 관점에서 논의가 필요하다. 즉 또다른 환영의 스펙타클 속에서 관객은 어쩌면 물리적으로는 능동적으로 참여하지만 지각의 방식에서는 또다른 의미에서의 수동적 수용자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 말이다.  22)Annette Hünnekens, Der bewegte Betrachter, Köln: Wienand Verlag & Medien, 1997, S. 19.

    3. 결론

    예술에서 참여, 특히 인터랙션이라는 개념이 화두가 된 것은 19세기 중엽 전기 매체를 비롯해 사진과 영화, 텔레비전과 같은 시각 테크놀로지, 그리고 오늘날 디지털 테크놀로지까지, 예술이 가용할 수 있는 기술들이 그만큼 발전된 것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20세기 이후 계속해서 제기되어온 또 다른 문제, 즉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인해 인간이 갈수록 수동적 소비자의 위치로 격하되고 있는 상황에 대한 불안과도 연관이 있다. 테크놀로지의 급속한 발달에 따라 실재(The Reality)에 대한 인식의 틀이 바뀌면서 시대의 전반적 지평에 변화가 왔다면, 그에 대한 예술의 대응 방식 또한 당연히 달라져야 한다는 것, 그러면서 동시에 현실에 대한 또 다른 비판적 타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20세기 이후 예술이 계속해서 화두로 가져갔던 자기 고민이었다. 그것은 내용이나 형식 모두에서 일체의 재현적 내러티브를 거부하는 실험으로 이어졌다. 하나의 의미에 대한 믿음도 희박해졌거니와, 무엇보다 한 사람의 작가 내지 예술가가 그 의미에 대한 전권을 갖고 있을 만큼 보편적 존재라고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관객의 자율성과 능동성이 강조되었는데, 이것은 예술이 작가 중심의 의미론적인 재현이라는 폐쇄적인 닫힌 틀로부터 벗어나는가에 따라 수용자/관객이 눈을 통한 지각의 차원이건 몸으로 직접 개입하는 물리적 차원이건 그 작품에 참여하여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그만큼 커졌다.

    이 흐름은 80년대 이후 디지털 매체의 등장으로 다시 한번 변침을 경험했다. 무엇보다 지금껏 예술이 가용했던 모든 매체들의 표현력을 넘어서는 디지털만의 특수한 매체적 속성 자체를 중심에 놓고,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인터랙션의 문제가 논의되었다. 그 과정에서 무엇보다 관객이 예술의 과정에 참여하되, 그에게 ‘얼마만큼’ ‘어떤 식으로’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권한이 부여되는가에 따라 인터랙션의 범주가 다시 세분화되었다. 예를 들어 로베르토 쉬마노프스키(Roberto Simanowski)는 우리가 흔히 인터랙션과 연관지어 생각하는 디지털 인스톨레이션의 인터랙션의 범주를 크게 “폐쇄적 인터랙션 시스템”과 “개방적 인터랙션 시스템”으로 구분한다.23) 그 중 폐쇄적 인터랙션은 예술가가 관객이 어떤 행동을 해야할지 그리고 어떤 체험을 할지를 면밀하게 미리 규정한 경우이다. 앞에서 언급했던(1993)처럼 은 소위 폐쇄회로 인스톨레이션(Closed-Circuit Intstallation)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경우 관객에게는 작품을 바꿀 권한도 없으려니와 예술가가 만든 틀 바깥에서 움직일 수도 없다. 이러한 틀은 의식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이 틀에 의해 관객의 행동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가 결정된다. 반면 개방적 인터랙션은 사용자에게 매우 강렬하면서도 여러 개의 풍부한 대안을 갖춘 참여를 제공한다. “특정 메시지를 전달하는 대신에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이 오히려 메시지가 된다.”24) 그런가 하면 스티브 딕슨(Steve Dixon)은 시스템의 개방성 및 사용자 대화방식(User interaction)의 수준이나 깊이 정도에 따라 공연의 커뮤니케이션을 다시 “네비게이션(Navigation)”과 “참여(participation)”, “대화(conversation)” 그리고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으로 구분한다.25) 이러한 구분을 비단 인터랙티브 아트 뿐 아니 한걸음 나아가 예술 전체로 확장시킬 때, 우리는 예술의 본래적 바탕으로 관습적으로 논의하곤 했던 인터랙션 자체의 기준과 틀이 다시 한번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이 경우 작품, 내지 예술가 중심이었던 기존의 예술은 이들이 말하는 ‘통속적’(Ascott)이거나 ‘참여(participation)’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폐쇄적 인터랙션 시스템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물론 이러한 기준에서 본다면 부르주아적 예술의 관습을 깨드리고자 20세기 초반의 미래주의나 다다가 행했던 실험은 물론이고 극장, 내지 무대라는 공간 속에서 행해지는 오늘날의 공연들 또한 예외일 수는 없다. 그것이 아무리 관객의 시각장을 해체하고 이를 통해 관객의 참여를 적극 유도한다고 해도 여전히 예술가가 설정한 ‘바깥 틀’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제한적인 인터랙션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예술을 포함해 현대 예술의 흐름을 ‘참여’ 내지 ‘인터랙션’의 문제를 중심으로 논의한 이유는, 이제 예술의 중심은 작품 내지 작가로부터 관객 내지 수용자로 그 축이 점차로 옮겨지고 있음을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아울러 이것은 시각을 통한 참여건, 몸을 통한 참여건, 아니 인터랙션이건, 여기에는 시대적 환경, 즉 거대담론이 소멸되었다는 것에 대한 애도 조차 무의미할 정도로, 정치, 경제, 사회, 심지어 일상의 전 영역에서 가상이 오히려 실재를 압도해버린 시대에 인간을 스스로 주체로 세우려는 예술적 시도임을 말하고자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공연들이 현실 못지 않게 무의미한 과잉의 이미지들을 현시하는 차원에서 그치거나, 디지털 인스톨레이션의 경우가 그렇듯 관객(관찰자)의 놀이적 욕망에 기댄 소모적이고 일회적인 이벤트로 그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대중성과 놀이성을 예술이란 이름으로 교묘히 포장하고 있는 이들 예술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자 한다.

    그러나 매체의 환경이 바뀌면서 인간의 지각구조 또한 변화되었고, 이러한 변화들이 공연에서 관객과의 소통방식에 영향을 미쳤음을 상기해 본다면, 이제까지의 흐름에 의거해 향후 공연예술의 방향을 가늠해볼 가능성 또한 있다. 오늘날 시장 자본주의 하의 정치, 경제적 담론이나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인간에게 그만큼 사유의 공간을 앗아가버린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예술은 언제나 사회적 타자로서 그때그때의 사회에 대응해왔던 바, 이제 오늘날 예술은 리얼리티를 제시하기 보다 관객 스스로 리얼리티를 발견할 수 있게 스스로 자신의 형식적, 내용적 지반을 바꾸고 있다. 이제는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고 전달할 것인가 보다, 관객의 굳어진 지각을, 소멸된 몸을, 그리고 증발된 감각을 부활시키기 위해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가 예술의 화두가 되고 있는 것이다.

    23)로이 애스콧(Roy Ascott)은 관객이 어떤 식으로 참여할 것인가의 형태가 미리 정해진 인터랙션과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낳는 개방적 시스템에 의거한 인터랙션을 구분하고 전자를 통속적인 것으로, 후자를 통속적이지 않은 것이라 말했다. 그런가하면 프랭크 포퍼(Frank Popper)는 참여와 인터랙션을 구분한다. 이때 참여는 기존의 예술작품에서 행해지던 참여의 방식을 말하는 것이며, 인터랙션은 아직 결정되지 않는 작품, 다시 말해 과정에 관객이 강렬하게 개입하는 것을 말한다. 인터랙션에 대한 쉬마노프스키의 구분은 이 두 사람의 구분과 맥락을 같이한다. Roberto Simanowski, Textmaschinen Kinetiche Poesie Interaktive Installation. Zum Verstehen von Kunst in diegitalen Medien, Bielefeld: Transcript, 2012, S. 117ff. 참조.  24)위의 책, p. 118.  25)물론 이 네 개의 범주는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데, 중요한 것은 오늘날 미디어 아트의 경우 기존의 이미지가 움직이는 방식에서 벗어나 관객이 직접 움직이는 것으로 그 중심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Steven Dixon, 위의 책, p. 563이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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