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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상호매체적 공연에서 배우의 역할 구현의 문제* Actors and Roles in Intermedial Performances
  • 비영리 CC BY-NC
ABSTRACT
상호매체적 공연에서 배우의 역할 구현의 문제*

Actors, roles and the imagery of roles are long lasting issues of actors' arts. When creating a fictional character, actors utilize the personal life and experiences as a natural person and their own physical characteristics, whether in large or small amounts, or whether assertively or passively. Stanislavsky's 'System', which explored this and established psychological realism acting techniques, was challenged in the 20th century by the Epic Theatre of Brecht. His acting technique appeared to be a theory that stood at an antipole of Stanislavsky and they were deemed to be two different approaches to acting techniques. However, in the age of mixed reality and augmented reality that breaks down the borders of the real and virtual, the clear division of these two realms also crumbled down. This is because theater in this age where the virtual reality made by digital technology and the actual reality that can be physically sensed by us cannot be explained simply by the dichotomy of the real(reality) and virtuality(imitation). Furthermore, the existence of actors on stage that are sometimes self-referencial or self-reflectional cannot be clearly defined as role(character) and role playe (actor).

This issue becomes clearer in intermedial theater that mixes the virtual with the real, and especially in interactive performances made by different mediums revealing its media features in one performance to weave and collide with each other. In post-drama theater, sometimes physical bodies and heavy bodies as unclear mediums come to the forefront. This is when life, stage, reality and art loses their boundaries and phenomenologic bodies rather than semantic bodies, and physical bodies rather than cognitive bodies come to the forefront. If a traditional actor has a character of immediacy characterized by transparency that erases the actor as a medium, that actor will then have a character of hypermediacy characterized by opacity. And when existing on stage as a hypermediacy of opacity, the actor will be able to emphasize his personality or his body as it is. Character as immediacy and character as hypermediacy are not conflicting. The medium is continuously remediated.

When performances today reveal their mediacy, it does not simply mean revealing the features and differences of the media. In performing arts, different media criticizes each other and remediate with each other. At the center of this issue is the body of the actor. In this study, these points are examined to research the following. First is the issue of the actor's mediacy shown in performing arts in an age where recreation is impossible and an age of digital media. Second, this was reviewed in detail focusing on Jan Lauwers' <Isabella’s room>. While examining the meaning of anti-narrative, anti-genre, anti-central features in <Isabella’s room> from a formative thematic view, the issues of configuring actors and roles in the age of the new media will be examined.

KEYWORD
얀 라우어스 , <이사벨라의 방> , 상호매체적 공연 , 배우 , 역할 , 자기반영성 , 재매개
  • 1. 문제제기

    플라톤 이래 연극은 모방의 예술이었으며 배우는 그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대리하는 기호였다. 명확한 목표와 훈련 하에 자신을 지우고 다른 인물로 위장하는 배우의 연기술은 연극예술의 핵심이었고, 배우는 일종의 매개체로서 자신이 구현해야 하는 인물의 성격, 행동, 의미를 관객에게 전달하였다. 배우술이 지닌 이러한 특징은 르네상스 시대를 지나면서 더욱 공고해졌는데, 프로시니엄 극장의 등장과 함께 발전하기 시작한 연극 관습과 기술의 도움으로 연극은 완벽한 무대 환상의 구현을 욕망하기 시작했고 그 안에서 배우는 투명한 매체에 가까워졌다. 매체를 은폐하고 무대 환상을 극대화하려는 욕망의 정점은 사실주의 연극이었다. 사실주의 연극은 매개한다는 사실과 매개의 작동방식을 감춘 채, 관객이 메시지에만 집중하도록 강제하는 은폐된 규칙들과 극적 관습을 발전시켰다. 극예술의 오랜 역사를 통해 완성된 논리성과 합리성에 입각한 서사 규칙, 사실을 사실로 보이도록 하기 위한 여러 가지 극적 장치들이 사실주의 연극에 있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러한 ‘규칙과 장치의 은폐’이다. 바로 그 은폐가 무대를 진실에 가깝다고 믿게 만드는 사실주의 연극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그 정점에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과 심리적 사실주의 배우술이 함께 했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의 상호매체적 연극에서 배우연기는 더 이상 이러한 관점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만들어내는 가상의 현실과 우리가 물리물질적으로 감각할 수 있다고 여기는 실제 현실이 뒤섞이는 시대, 즉 증강현실 혹은 혼합현실로 표현되는 오늘날의 연극은 단순히 실제(현실)와 가상(모방)의 이분법으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아가 종종 자기참조적이거나 자기반영적적인 무대 위 배우의 존재 또한 역할(캐릭터)과 역할 수행자(배우)로 명확히 구별하기 어려워졌다.

    배우와 역할의 관계, 그리고 역할의 형상화 문제는 배우술의 오랜 과제이다. 허구의 인물을 구축함에 있어서 배우는 많든 적든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간에 자신의 개인적 삶과 경험, 그리고 신체적 특징들을 활용한다. 이 관계를 적극적으로 연결하고 나아가 역할과 배우가 무대 위에서 합일되는 것을 꿈꾸었던 것이 스타니슬랍스키의 시스템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기술은 곧 20세기 초 새로운 연극성의 탐색과 함께 도전을 받는다. ‘연극의 재연극화’, ‘형식주의 연극’, ‘극장주의 연극’, ‘아방가르드 연극’ 그리고 무엇보다도 ‘브레히트의 서사극’으로 대표되는 움직임들이 모두 스타니슬랍스키로 대표되는 심리적 사실주의 연기에 도전한 것이다. 특히 스타니슬랍스키와 브레히트의 연기술은 배우와 역할의 관계 문제에 있어서 서로 대척점에 선 이론처럼 보였고, 배우술에 접근하는 서로 다른 두 갈림길로 여겨졌다. 그러나 재현 불가능의 시대로 불리는 오늘의 연극에서 이 두 영역 간의 명확한 구분과 경계는 사실상 무너진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오늘의 새로운 연극과 배우술의 문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타니슬랍스키와 브레히트가 자신들의 작업에서 최초로 제기한 문제와 탐구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다만 접근 방법과 관점, 그리고 잠정적 결론으로서의 강조점이 달라진 것이다. 한스-티스 레만(Hans-Thies Lehmann)이 자신의 저서에서 포스트드라마 연극을 논하면서, 드라마적 연극에 대하여 브레히트가 했던 문제제기의 연장선상과 극복지점을 동시에 염두에 두며 포스트드라마 연극을 ‘포스트브레히트 드라마’로도 지칭했던 것처럼1), 오늘의 배우술도 배우와 역할 간의 거리두기에 초점을 둔 브레히트의 문제제기와 탐구 과정으로부터의 ‘저항’과 ‘계승’이 동시에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말하자면 ‘브레히트 이후의 연기’인 것이다.

    새로운 연극이 제기하는 배우예술에서도 여전히 주목해야 할 고전적인 문제는 창조하는 주체(예술가로서의 배우)와 재료(표현의 매체로서의 몸)가 일치한다는 점이다. 배우를 역할을 전달하는 투명한 매개로 만들고자 한 스타니슬랍스키 역시 허구의 세계와 실제의 세계가 동일한 출처를 지닌다는 것을 인지하고 이에 주목했다. 배우예술의 도구는 배우 그 자신이다. 실제 세계에 속한 그 자신의 몸과 마음, 그 자신의 개인적 체험과 대단히 사적인 이력, 나아가 그가 사는 시대와 역사와 문화가 새겨진 몸이 그 자신의 예술을 위한 도구/재료가 된다. 몸은 모든 것이 새겨진 장소이자 출발점이다. 이야기가 자의적이고 꾸민 것이라고 느낄 수 있는 요소, 매개되고 있다고 여겨지는 요소를 모두 지우고자 한 노력은 물리적 현존으로서의 몸과 배우의 개성에 의해서 오히려 지울 수 없는 배우의 존재를 강조하고 자연인으로서의 제 자신을 각인시키며 전면에 드러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매체로서의 배우의 문제는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고 전통적 의미의 서사구조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포스트드라마 연극에서 전면에 등장한다. 기호적 몸이 아닌 현상학적 몸, 인식론적 몸이 아닌 물리물질적 몸이 오늘날 연극의 중심과제가 된 것이다. 특히 서로 다른 매체들이 하나의 공연 안에서 제 자신의 매체특정성을 드러내며 교직하고 충돌하여 만들어지는 상호매체적 공연에서 이 문제는 더욱 두드러진다.

    새로운 매체와 기존 매체의 상호관계를 재매개(remediation)로 설명하는 볼터(J.D. Bolter)와 그루신(R. Grusin)의 이론은 매체로서의 배우를 이해하는 데에도 주효하다. 전통적인 배우술이 매체로서의 자신을 지우는 투명성의 비매개(immediacy)로서의 성격을 지녔다면 이제 배우는 역할을 수행하는 매체로서의 제 자신을 지우지 않는 불투명성의 하이퍼매개(hypermediacy)의 성격을 더 강하게 드러내게 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불투명성의 하이퍼매개로서 무대 위에서 존재하게 될수록 배우는 그 자신, 즉 아무것도 매개하지 않는 투명한 제 자신으로 되돌아온다. 즉, 오늘날의 공연에서 자신을 지우고 다른 이를 대리하고 매개하는 고전적인 배우의 특성과 역할과의 거리를 만들고 매개하는 그 자신을 드러내는 브레히트 배우의 특성은 더 이상 이분법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브레히트 이후의 배우는 그 두 가지 배우의 특성 사이를 오가며 무대 위에 존재한다. 볼터와 그루신은 그것이 올드 미디어이든 뉴미디어이든 오늘날 존재하는 모든 미디어는 상호 간의 관계 속에서만 파악될 수 있으며 서로를 재매개한다고 말한다. 더불어 재매개는 오늘날의 미디어가 지닌 중요한 특성이며 불투명성의 하이퍼매개적 특징과 투명성의 비매개가 상호대립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둘 사이에서 진동하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볼터와 그루신의 재매개 이론을 원용하여 오늘날의 상호매체적 공연에서 매체로서의 배우, 배우와 역할의 관계를 검토하고자 한다. 연구는 세부적으로 다음의 구성을 지닌다. 첫째는 재현 불가능성의 시대이자 디지털미디어의 시대의 공연예술에서 제기되는 새로운 매체성의 문제를 배우를 중심으로 하여 검토한다. 둘째는 상호매체적 연극에서 매체로서의 배우와 역할 구현의 문제를 얀 라우어스(Jan Lauwers)의 <이사벨라의 방(Isabella’s room)>을 중심으로 하여 논한다. 탈서사, 탈장르, 탈중심의 특징이 <이사벨라의 방>에서 형식적 주제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살피고, 이러한 새로운 조건 하에서 배우의 역할 구현의 문제를 고찰한다.

    1)한스-티즈 레만, 김기란 역, 『포스트드라마 연극』, 현대미학사, 2013. 61-62쪽.

    2. 상호매체적 공연에서 배우의 ‘매체성’의 문제

    재현의 문제, 즉 우리 앞에 다시 세우는 것(re-presentation), 다시 나타나도록 하는 것(再現)은 세계 혹은 세계의 본질과 우리 앞에 현현된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것은 ‘무엇을’에 대한 문제인 동시에 ‘어떻게’에 대한 문제이다. 그런데 한스-티스 레만이 포스트드라마 연극이라고 명명한 오늘날의 연극은 더 이상 세계의 재현과 모방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여 이러한 재현의 불가능성, 재현의 위기가 곧바로 재현의 포기나 재현의 무용(無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고 생각되었던 여러 체계들에 대한 믿음과 신뢰에 의문이 제기되면서 명료한 언어와 논리의 서사구조로는 세계를 정확히 전달할 수도 세계의 본질에 다가갈 수도 없다는 문제제기에 다다른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모방적 재현으로는 현실에, 현실의 본질에 다가갈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다. 재현의 위기로 지칭되는 이와 같은 문제제기로 인해 오늘날의 연극은 재현보다는 무대 위 현전 그 자체에 방점을 찍기 시작했다. 매개의 현전성, 매개 작업의 과정과 반응의 현전성, 해석과 소통의 현전성이 오늘날 공연예술의 특징이자 공연예술의 새로운 매체특정성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매개 너머의 의미와 진실을 추구했던 19세기적 환영연극과도, 또 매체 그 자체에 집중했던 20세기 초 모더니즘 연극과도 모두 구별되는 지점이다. 작품이 보여주는 세계의 재구성은 더 이상 창작자(작가, 연출가, 배우 등)가 제시하는 것도, 그렇다고 향유자(관객, 독자)가 오롯이 완성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찰나의 현현이며 그곳에 있었다고 여겨지는 (감각되는) 사건이며 그에 대한 공통의 경험과 기억이다. 이렇듯 변화된 예술 환경은 배우의 문제에도 여러 가지 논점을 제시하는데, 그 중 가장 먼저 가시화되는 것은 비물질적 디지털 가상현실과의 충돌과 교호 작용 속에서 강조되는 물리물질적 배우의 현존 문제, 즉 배우의 몸의 문제이다.

    한스-티스 레만은 포스트드라마 연극이 정신적이고 지적인 구조로부터 격렬한 신체성의 노출로 방향을 선회하면서 신체는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고 말한다. 신체는 모든 담론을 제 안으로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러저러한 충동을 몸짓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현존을 통해 집합적 역사를 기입하는 장소로서 스스로를 분명히 드러낸다”2)고 그는 설명한다. 텍스트처럼 읽히고 해석되었던 배우의 움직임은 이제 물리물질적 현존 그 자체로서 하나의 리얼리티가 된 것이다.

    레만은 의미를 허용하지 않는 이러한 현존의 연극이 때로는 관찰자들에게 성찰의 반향 없이 그저 단발적 감탄사만을 자아내게 하는 위험에 빠지게도 만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드라마 연극에서 신체는 그 시작이자 끝이라고 강조한다. 전면에 나선 신체의 문제는, 문학적 캐릭터나 의미의 뒤에 은폐된 채 매개하는 자로서의 배우의 문제를 부차적인 것으로 위치 지웠던 것을 재검토하게 한다.

    전통적으로 배우는 문학적 캐릭터를 제 자신의 몸을 재료로 하여 구현해왔다. 배우술에 대한 체계적 학문적 접근을 한 최초의 이론가 중 한 명은 디드로이다. 그는 열정과 감성에 사로잡혀 무대에서 제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배우들에 반대하며, 관객을 감동시키는 역할의 이상적 구현은 배우가 얼마나 냉철한 정신과 이성으로 제 자신을 표현의 도구로 활용할 수 있는가에 있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저서 『배우의 역설』에서 디드로는 “위대한 배우, 아마도 모든 위대한 자연의 모방자들은 대개 그들이 누구건 간에 아름다운 상상력과 위대한 판단력과 섬세한 촉각과 매우 확실한 취향을 부여받고 있으며 또한 가장 덜 감성적인 사람들”4)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관객의 정서를 흔들고 감성을 자극하는 위대한 배우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덜 감성적인, 차가운 이성의 존재라는 점이다. 위대한 예술가로서의 배우에게는 상상력과 판단력이 요구되는데 이것의 발현은 세계에 대한 세심한 관찰력과 분석력을 지닌 이성을 통해서이다. 그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배우의 천재적인 자질은 ‘심장이 아닌 머리가 하는 일’5)이라고 말하며, ‘강하게 느낀다고 해서 그것을 표현할 줄 아는 것은 아니’6)라고 말한다. 디드로는 자신의 저서 여러 곳에서 재료인 제 자신을 준비하고 훈련하고 계산하여 그 결과로서 역할을 창조하는 배우의 연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한 배우만이 역할을 구현하여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하는 ‘매개’로서의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디드로는 배우의 존재론에 대해서만 논했을 뿐 구체적으로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에까지 나가지는 못했다. 매개로서의 제 자신을 명확히 인지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체계화한 것은 스타니슬랍스키의 시스템이다. 그는 배우가 지닌 모든 요소를 이용하여 역할을 구현하기를 바랐는데, 때문에 시스템은 배우가 제 자신의 신체를 장악하고 제 자신의 개인적 체험과 상상력을 인물 구현에 항시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길이었다. 때문에 그는 시스템을 잠재의식적인 창조에 도달하는 의식적인 길로 여겼다.7) 시스템을 ‘의식적인 길’이라 지칭한 것은 배우술이 체계적 훈련이 필요한 영역이라는 점, 예술가이자 창조자로서의 배우가 그 재료인 제 자신을 다루는 방법을 익히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막연히 제 자신이 극중 인물이라 믿어버리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라는 점을 끊임없이 자각하며 내면의 눈으로 자신을 관찰하면서 재료이며 도구로서의 제 자신이 지닌 모든 것, 즉 자신의 육체뿐 아니라 개인적인 경험, 정서, 정신까지도 훈련으로써 통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8) 그런 훈련의 결과는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를 지우고 역할 그 자체만이 남겨지는 것, 그리하여 관객이 구현된 역할을 ‘진실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 다시 말하면 매개한다는 사실이 은폐되는 것이다. 스타니슬랍스키에게도 역할과 관객 사이를 매개하는 배우에 대한 인식은 분명했다. 다만 그에게 훌륭한 배우는 매개한다는 사실, 배우의 매체성을 성공적으로 지우는 자였다.

    이러한 배우의 매체성을 처음으로 무대에서 드러낼 것을 주장한 이는 브레히트였다. 그는 배우가 자신의 배역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지녀야 하고, 배역의 대사를 의심하면서 반대 의견을 표명하는 자세로 그것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배우는 무대 위에서 자기가 연기하는 인물로 완전히 변화하지 않는다. 그는 리어왕이나 혹은 슈바이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인물들을 연기해 보여(zeigen)준다.”9)(강조 원문)고 말한다. 나아가 배우는 자신이 연기하는 작품의 작가와도 반대의 입장을 취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배우는 작가의 세계관과는 반대 입장을 취함으로써 작가의 세계의 한계를, 그 세계의 본질과 반론 가능성을 얻는다. 작가의 세계에 대해 동작으로 표현되는 그의 태도는 놀라워하는 태도이며, 그는 이와 같은 놀라워하는 태도를 관중에게도 심어주어야 한다.”10) 잘 알려진 것처럼 브레히트가 이러한 배우연기술을 주장한 것은 소격효과를 위해서이며 당연히 여겨왔던 것을 회의의 대상이 되도록 만들어 관찰하고 분석하기 위함이었다.

    브레히트의 연극이 그랬듯 매개하는 자로서의 배우 그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오늘날의 연극이 보여주는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러나 재현의 위기가 가져온 매체성의 드러냄은 드라마적 연극을 거부한 브레히트의 접근과는 구별된다. 브레히트가 은폐된 작동 방식을 드러내려 했던 것은 몰입을 거부하고 감정이입을 막기 위함이었다. 관객을 드라마적 연극이 제공하는 환각적 수동성으로부터 구해내어 객관적이고 지적인 판단을 내리는 능동적인 존재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연극은 브레히트가 지향했던 그 목표를 특별히 지지하지 않는다. 그것은 더 이상 주요 관심사가 아니다. 더불어, 매개한다는 사실을 드러내어 몰입이 저지, 혹은 지연됨에도 불구하고 정서적 반응과 감정이입이 여전히 일어나기도 한다. 오늘의 연극에서는 매체가 그 자신을 지우는 비매개의 투명성과 매체가 그 자신을 드러내는 하이퍼매개의 불투명성은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작용하지 않는 것이다.

    볼터와 그루신은 미디어의 흔적을 지우는 투명성의 비매개와 미디어의 존재를 전면적으로 드러내는 불투명성의 하이퍼매개가 동시에 작동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비매개의 논리가 표상행위를 지우거나 자동화하도록 유도한다면 하이퍼매개는 다중적 표상행위를 인정하고 미디어를 인식하도록 하는데, 이 둘의 관계가 서로 모순되고 배타적인 관계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항상 함께 작동하는 재매개의 이중논리라는 것이다. 이들 간의 진동과정이 바로 재매개의 과정이다. 그들은 “진동은 한 미디어가 선행 미디어들이나 다른 동시대적 미디어들을 어떻게 개조하는지를 이해하는 열쇠”11)라고 설명한다. 또 이러한 재매개가 항상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으로 올드미디어에게만 작용하는 것도 아니라고 강조한다. “현재의 모든 미디어가 재매개체로 작용할 수 있으며, 뉴미디어가 올드미디어를, 반대로 올드미디어가 뉴미디어를 재매개할 수 있다”12)는 것이다.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제공하는 가상의 세계는 비물질성을 기본 속성으로 한다. 때문에 물리물질적 실재를 중요한 존재 기반으로 하는 배우의 몸은 즉각적으로 서로 다른 질서에 속한 리얼리티의 충돌을 가져온다. 때로는 그 반대의 상황, 즉 물리적으로 현존하지 않은 채 등장하는 배우도 존재하는데, 예컨대 영상 이미지나 3D로 구현된 가상의 배우가 등장하기도 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제시되는 자료가 캐릭터와 캐릭터의 이미지를 대신 구현하기도 한다. 실제 배우와 3D 홀로그램으로 영사되는 가상의 배우가 한 공간에서 연기하게 되는 크리에이션 4D 아트(Creation’s 4D Art)의 <오르페오(Orfeo)>(미셸 르미유(Michel Lemieux), 빅토르 필론(Victor Pilon) 구성ㆍ연출, 2000년 엘지아트센터 공연), <아니마(Anima)>(미셸 르미유, 빅토르 필론 구성ㆍ연출, 2004년 엘지아트센터 공연), 실제하는 장소의 영상을 배우의 몸의 현존과 충돌시킴으로서 새로운 의미를 구현했던 테아트로 리네아 데 솜브라(Teatro linea de sombra)의 <아마릴로(Amarillo)>(호르헤 바르가스(Jorge Vargas) 구성ㆍ연출, 2010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공연), 엑스 마키나(Ex Machina)의 <안데르센 프로젝트(Andersen Project)>(로베르 르파주(Robert Lepage) 작ㆍ연출, 2007년 엘지아트센터 공연), 무대 위에서 지울 수 없는 배우의 현존조차도 각종 이미지(영상 뿐 아니라 언론이 만들어내는 이미지까지 포함하여)로 대체해 버린 <슐라이만 실종사건(원제 : Looking For A Missing Employee)>(라비 무레이(Rabih Mroue) 작ㆍ연출, 2004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공연), 실존하는 배우를 실시간 라이브 영상, 혹은 CCTV 영상 등으로 매개했던 <모티베이션 대행>(하타케야마 히로유키(예명 네지 피진 구성ㆍ안무ㆍ연출, 2012년 페스티벌 봄 공연), 갑 스쿼드(Gob Squad)의 <키친(Kitchen)>(앤디 워홀의 필름을 모티브로 갑 스쿼드 재구성, 2011년 뉴욕 언더더레이더 페스티벌 공연) 등의 작품들은 이러한 문제를 잘 보여준다. 이들 작품들은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제공하는 가상현실과 실재하는 물리적 현실을 뒤섞는 다차원적 리얼리티(혹은 혼합 현실 mixed Reality)를 만들어 내는데, 이질적 리얼리티의 충돌과 혼합 속에서 강조되는 것은 이러한 현실을 매개하는 매체들의 특징, 매체성 그 자체이다. 특히 이 점은 배우의 물리적으로 현존성, 무엇보다 배우의 몸을 통해 더욱 강조되어 나타난다.

    예를 들어 <오르페오>나 <아니마>와 같은 공연에서는 실재하는 배우가 아닌 3차원 영상 홀로그램으로 만들어진 배우가 등장한다. 디지털 영상으로 구현된 배우는 실제 배우가 그러한 것처럼 3차원적 가시성을 지닐 뿐 아니라 실제 배우와 상호작용하며 연기하기도 하는데, 바로 이 순간 강조되는 것은 가상현실과 실재현실의 충돌이 빚어내는 이질성이며, 비물질성의 세계(시각 중심 이미지의 세계)와 물질성의 세계(질량과 부피로 다가오는 몸의 세계)의 대비로 인해 강조되는, 두 세계를 각각 매개하고 있는 매체 그 자체의 전면화이다. 파리의 지하철, 파리 오페라 극장의 무대, 공중전화 박스 등 실제 존재하는 공간을 촬영하여 그 장소들을 영상으로 제시하는 <안데르센 프로젝트>에서도 동일한 문제가 제기된다. 삼차원적 무대에 이질적으로 삽입된 ‘사진적 리얼리티’는 오히려 지시적 의미의 전달 외에는 엉성한 건축적 무대도구들보다도 환영과 몰입을 제공하는 데 적절치 않아 보이는데, 그 순간 장소의 실제성보다 오히려 강조되는 것은 ‘(순간 포착된)고정성’, ‘모사’, ‘평면성’이라는 사진의 매체적 특성이다. 2차원적 평면의 사진과 3차원적 무대공간의 충돌, 순간적 현실 모사를 특징으로 하는 사진의 매체특정성과 상징과 은유를 특징으로 하는 연극의 매체특정성의 대비, 그리고 무엇보다도 복제된 이미지와 실재하는 배우의 몸성의 충돌이 이러한 각 매체의 특징과 상호 이질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의 공연에서 배우 현존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꼭 테크놀로지에 의한 가상현실의 개입으로 인한 이질적 리얼리티간의 충돌로만 제기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은 단순히 테크놀로지의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미디어의 등장이 가져온 사고 체계, 가치관, 소통방식 변화의 문제이다. 예를 들어 배우의 물리적 현존 대신 신문 자료, 경찰 기록, 사진 슬라이드 등을 통해 인물을 드러내는 <슐라이만 실종 사건>에는 화려한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없지만 그로 인하여 촉발되고 가속화된 이미지 중심 사회, 그것이 제기하는 문제가 전개된다. 이 작품은 슐라이만에 대한 작품이지만 실제 슐라이만은 이 공연에 등장하지 않는다. 나아가 이 작품에는 그 어떤 배우도 등장하지 않는다. 작품을 만든 라비 무레이는 ‘배우가 존재하지 않는 공연이란 것이 있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정면으로 다룬다. 무대에 존재하는 것은 세 개의 스크린에 투사되는 슐라이만에 대한 각종 정보들이다. 작품은 실종된 재경부 근로자인 슐라이만 라팟의 실체, 또는 그의 실종 사건의 진실에 다가서려는 노력이다. 그러나 스크린을 통해 관객에게 제공되는 매스 미디어가 만들어낸 정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란 그에 대한 모호한 이미지뿐이다. 정보가 넘쳐나면 넘쳐 날수록 자료가 축적되면 축적될수록 사건은 더욱 비논리적이고 허무맹랑하게만 느껴지고, 우리는 점점 더 슐라이만의 실체로부터 멀어진다. 슐라이만이라는 존재의 등장대신 그에 대한 무성한 이야기와 이미지만이 난무하는 이 공연은, 우리 시대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무너진 오늘날 공연예술이 처한 조건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작품이 공연으로서 가능한 것은 인물의 이미지가 제시되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인물의 부재’가 갖는 물리적 현존성 때문이다. 빈 무대에는 공연시간 내내 ‘빈 의자’가 놓여 있는데 그것은 ‘존재하지 않음’, 혹은 ‘비어있음’을 강조한다. 관객이 실시간으로 체험하고 공유하는 그 부재의 현존성이 공연예술로서의 이 작품의 중요한 조건이 되고 있다.

    ‘부재’와 ‘물리적 현존’의 이중적 관계의 문제는 네지 피진의 <모티베이션 대행>과 갑 스쿼드의 <키친>에서도 제기된다. <모티베이션 대행>에서 네지 피진은 자신이 일하는 편의점의 CCTV를 이용하여 녹화한 영상으로 자기소개를 시작한다. 이 장면은 실제로 그가 아르바이트를 한 편의점의 CCTV를 이용하여 촬영했다고 한다. 다른 영상물과는 달리 CCTV의 영상이 함의하는 바는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사실의 증명이다. 동시에 CCTV의 영상은 감상을 위한 것이 아닌 감시를 위한 것이다. 이 영상은 네지 피진이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위해 물리적으로 묶여있다는 사실, 그가 무용수로서 무대에 서기 위해서는 그 시간 그 장소에 그가 하는 일을 대신할 다른 사람이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즉, 그가 여기인 무대에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거기인 현실이자 일상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CCTV를 통해 소개되는 아르바이트생 네지 피진과 무대에 현현하는 부토 무용수 네지 피진은 동일인물이지만 완전히 다른 아이덴티티로 상호 이질적인 시공간에 속하는 인물이다. 네지 피진은 이러한 제 자신의 물리적 존재 문제를 통해 무대와 일상을 충돌시키고 중첩시킨다.

    한편 라이브 필름 쇼를 표방하는 갑 스쿼드의 <키친>13)에서 관객이 보는 것은 실제 공연 중인 배우가 아닌 공연의 라이브 영상이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관객은 객석에 착석하기 앞서 배우들의 안내를 받아 무대 위에 설치된 스크린의 뒤쪽을 구경하게 된다. 그곳에는 부엌과 작은 침실로 꾸며진 공간이 있다. 공연이 시작되면 관객은 실제 배우들 대신 그들이 스크린 뒤쪽에서 벌이는 상황을 촬영하여 실시간으로 스크린에 영사하는 필름을 보게 된다. 무대에는 배우가 아닌 배우의 복제 이미지만이 있는 것이다. 그 장소와 그 배우들의 존재를 확인했기에 우리는 그들이 스크린 뒤에서 실시간으로 연기하고 있을 것이며 스크린에 영사된 장면들은 분명 실제이고 라이브일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어느 순간 녹화된 영상을 틀어놓은 채 무대 뒤에서 배우가 쉬고 있더라도 우리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는 현장성이 있다. 공연 전 목격한 무대 뒤의 상황으로 인해 인지하고 있는 그곳에 배우가 존재한다는 바로 그  사실, 혹은 그에 대한 관객의 강한 믿음 때문이다. 갑 스쿼드의 <키친>이 흥미로운 또 다른 지점은 이 작품에서 공연과 상연이라는 두 개의 다른 예술 형식을 교차시키면서 각각 그것이 지닌 고유의 매체특정성을 거스르거나 적어도 재맥락화한다는 점이다. 필름은 라이브 매체가 아니다. 필름은 기록의 매체이다. 그것을 갑 스쿼드는 라이브 매체‘처럼’ 사용한다. 본디 라이브 매체가 아닌 기록의 매체인 필름은 제 자신의 모습을 기록하여 후에 볼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그러나 라이브 필름에서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 스크린 밖으로 건너와 스크린을 바라본다고 하여도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제 자신을 제외한 동료들뿐이다. 이것은 라이브 필름 쇼이기 때문이다. 라이브 공연의 참여자는 절대로 그 자신을 다른 사람들, 즉 관객이 즐기는 방식으로 즐길 수 없다. 녹화된 필름을 나중에 보거나, 제가 맡은 역할을 다른 배우가 하는 공연을 보는 것이 고작이다. 배우가 거기(무대)에 있다는 것은 여기(현실)에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네지 피진이 그랬던 것처럼 둘 중 한 곳에 있기 위해서는 그곳에서의 나의 역할을 해줄 대리인을 찾아야 한다(물론 라이브 무대에서 이것은 아이러니이다). 그런데 <키친>은 실제로 그 일을 시도한다. 하나 둘 스크린 너머 객석 쪽으로 건너온 배우들이 제가 맡았던 역할을 관객 중 누군가에게 부탁하여 대체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은 그들 대신 객석에 앉아 스크린을 구경한다. 이런 방식으로 모든 배우가 관객으로 대체되고 갑 스쿼드의 모든 멤버가 스크린을 감상할 수 있게 되면 공연은 종료된다. 이 공연은 각각의 예술형식들이 지닌 매체적 특징들을 논쟁적으로 사유하게 만든다. 공연은 지금 여기 관객의 눈앞에 현존한다는 자신의 매체특정성을 라이브 필름을 만나 재맥락화하고, 필름은 기록하여 재연한다는 자신의 매체특정성을 라이브 공연을 만나 재맥락화한다. 이 작품에서 각 매체의 매체특정성은 시험대 위에 오르고 논쟁된다.

    미디어 학자 볼터와 그루신은 그 어떤 미디어도 독립적으로 기능할 수 없으며 고립적으로 파악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현재의 모든 미디어가 재매개로 기능하며 재매개는 기존 미디어에 대한 해석 수단도 아울러 제공해 준다고 주장한다. “미디어는 지속적으로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고 서로를 재생산하고 서로를 대체하며, 이런 과정은 미디어의 절대적 구성요소다. 미디어가 미디어로 기능하려면 서로를 필요로 한다”14)고 설명한다. 새로운 매체는 기존 매체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고 논평할 수 있는 가능성이 된 것이다. <아마릴로>에서 기록의 매체인 영상 촬영과 사운드 녹음의 매체성은 재매개된다. 갑 스쿼드의 라이브 필름처럼 이들 매체를 공연 안에서 라이브 매체로 만드는 것이다. 필름과 오디오는 이 작품에서 실시간 촬영, 녹음, 재생되고 실시간 믹싱된다. <아마릴로>에서는 눈앞에 실존하는 배우의 신체가 실시간으로 촬영되어 스크린 역할을 하는 벽 위에 영사되는데, 그 영상은 이미 사전에 기록된 이미지들과 섞여 시간 차를 두고 재배열되거나 믹싱되면서 재구성된다. 이럴 때 눈앞에 현존하는 신체는 촬영을 위한 오브제이며 동시에 믹싱과 재구성을 위한 데이터이다. 공연은 눈앞에 실재하는 것(라이브로 촬영된 것)과 실재하지 않는 이미지들(사전 촬영된 것)을 실시간으로 합성하여 제공한다. 무대에 실존하는 몸, 그것의 영상, 그리고 다시 재조합된 이미지가 끊임없이 겹쳐지는 것이다. 공연은 종종 관객의 육안만으로는 알아채기 힘든 몸의 한 부분을 확대하여 강조하기도 하고, 극의 내용상 인물들(기차의 지붕에 올라탄 채 불법으로 국경을 넘는 사람들)의 신체에 가해졌을 수 있는 물리적 위험을 실재하는 배우의 몸에 가해진 물리적 위험으로 ‘재현’하여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위험은 재현이 아닌 실제이다. <아말리로>는 법의 눈을 피해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가기 위해 달리는 기차에 위태하게 매달린 채 국경을 넘는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다큐멘터리적 공연이다. 사전 촬영된 영상 속의 기차에 위험하게 매달린 사람들의 몸은 실제 관객의 눈앞에서 3미터가 넘는 극장의 벽에 매달린 배우의 위태한 몸과 겹쳐진다. 달리는 기차의 영상은 ‘지금-여기’에 현존하지 않는 이미지이지만, 벽에 매달린 배우의 몸은 현존하는 실재이다. 때문에 이를 보면서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관객은 이것이 허구로부터 온 감정인지 실제로부터 온 감정인지 모호해 진다. 이 작품에 배우의 몸의 현존은 강렬한 심리적 효과를 만들어낸다.

    오늘날의 공연이 매체성을 전면에 드러낸다는 것은 단순히 매체의 특성과 서로 간의 차이를 드러낸다는 의미가 아니다. 비물질성의 디지털 매체와의 교호가 공연예술 고유의 매체특정성의 문제를 새로운 차원에서 다시 문제제기하는 동시에 재매개하고 있는 것이다. 뉴미디어 시대의 공연예술에서 이질적 매체들은 서로를 논평하고 서로의 매체성을 재매개한다. 그리고 이 문제의 중심, 혹은 이질적 매체의 충돌의 사이에는 현존하는 배우의 몸이 있다. 볼터와 그루신의 재매개 이론은 오늘날 연극에서 배우의 몸을 비롯하여 무대 위 물리물질적으로 현존하는 것과 소통의 현장성, 수행성이 가장 중요한 쟁점으로 떠오른 이유를 설명해준다.

    2)위의 책. 180쪽.  3)위의 책, 178-179쪽.  4)디드로, 주미사 역, 『배우의 역설』, 문학과지성사, 2001. 26쪽.  5)위의 책, 26쪽.  6)위의 책, 117쪽.  7)스타니슬라프스키, 강량원 역, 『나의 예술인생』, 이론과실천, 2000. 468쪽.  8)스타니슬랍스키는 배우예술이 피아니스트나 바이올린 연주자와 같이 훈련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때 배우의 악기는 제 자신이라 생각했다. 스타니슬라프스키, 강량원 역, 『나의 예술인생』, 이론과실천, 2000. 406쪽., 426-428쪽, 465-466쪽.  9)베르톨트 브레히트, 김기선 역, 『서사극 이론』, 한마당, 1989. 71-72쪽.  10)위의 책, 100쪽.  11)볼터, 그루신, 이재현 역, 『재매개: 뉴미디어의 계보학』, 커뮤니케이션북스, 2006. 18쪽.  12)위의 책, 같은 쪽.  13)갑 스쿼드의 키친은 앤디 워홀의 영화 <키친>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작품이다. 앤디 워홀의 영화 <키친>은 워홀의 영화에서 음향을 담당해주던 버디 워트샤프터(Buddy Wirtschfter)의 실제 부엌에서 촬영되었는데, 워홀의 영화가 자주 그러하듯 상황만 정해놓은 채 시나리오 없이 촬영된 즉흥적인 것이었다. 갑 스쿼드의 라이브 필름쇼인 <키친>은 워홀의 영화 <키친>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 작업이다. 자세한 리뷰는 졸고, 「뉴욕의 겨울, 그리고 페스티벌 Under the Rader –2011」(『연극비평집-오해』, 태학사, 2013.) 378-381 참조.  14)볼터, 그루신, 앞의 책, 66쪽.

    3. <이사벨라의 방>에서 배우와 역할 구현

       3.1. 탈주와 경계의 미학

    <이사벨라의 방>은 벨기에의 연출가이자 화가인 얀 라우어스(Jan Lauwers)가 1986년 창단한 니드컴퍼니(Needcompany)의 ‘행복한 얼굴/슬픈 얼굴(Happy Face/Sad Face)’ 삼부작 <이사벨라의 방>(2004), <랍스터 가게(The Lobster Shop)>(2006), <사슴의 집(Deer House)>(2008) 중 첫 번째 작품으로 2004년 7월 아비뇽 페스티벌 기간 중 초연되었다. 서울에서의 공연은 2007년 3월 엘지아트센터에서 이루어졌다.

    이 작품은 연극, 무용, 뮤지컬, 전시회 등이 뒤섞인 복합장르적, 혹은 탈장르적 공연인데, 이러한 경계의 해체는 작품의 형식이기도 하지만 또한 주제이기도 하다. 작품은 ‘우리의 모든 실존은 거짓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명제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산 자와 죽은 자, 환상과 현실, 거짓과 진실, 역사와 기억, 과학과 몽상은 경계를 허문다. 흰 색의 미니멀한 공간에는 5,800여 점의 아프리카와 이집트 등에서 수집한 수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것의 실제 소유자는 얀 라우어스로, 그는 그것을 인류학에 조예가 깊었던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고 한다. 얀 라우어스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이 이국적 유물들을 보면서 현재로부터 격리된 채 밀봉되어버린, 그리하여 제 자신의 가치와 목적을 잃은 것들로 느꼈다고 한다.

    얀 라우어스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기억)를 하기 위하여 이사벨라의 이야기(허구/환상)를 만들었고 그 안에 폭력과 약탈로 점철된 20세기의 식민주의와 전쟁의 역사를 담아냈다. ‘기억’, ‘역사(사실)’, ‘환상(허구)’은 이 작품의 서사 안에서 끊임없이 변주되는 키워드이다. 그런데 극의 논쟁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명확히 다른 개념으로 생각했던 ‘환상과 현실’, ‘거짓과 진실’, ‘역사와 허구’가 생각처럼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또 이것은 윤리적 문제이기도 한데, 그렇다고 하여 어느 한쪽이 이 문제에 있어서 더 우위에 있는 것도 아니다. 폭력과 거짓의 역사를 유산으로 물려받은 우리 세대들에게 얀 라우어스의 <이사벨라의 방>은 이 문제를 질문한다.

    작품은 연출가이자 작가이기도 한 얀 라우어스가 흰 양복을 입고 등장하여 등장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그는 자신을 흰 양복을 입은 남자 역할이라 말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아흔 네 살의 이사벨라 모란디로 벨기에의 국민배우라 불리는 비비안 드 뮌크(Viviane De Muynck)가 연기한다. 그녀는 늙고 시력도 잃었지만 삶과 행복을 추구하려는 열정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 세계대전과 히로시마 원폭, 극우 청년단의 득세 등 20세기의 모든 비극을 겪어낸 그녀의 삶은 그녀 개인의 것이기도 하지만 20세기 서구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런 그녀의 곁에는 ‘사막의 왕자’(줄리앙 포레(Julien Faure) 분)가 있다. 라우어스는 그가 거짓말에서 태어났다고 소개한다. 그 거짓말은 이사벨라의 아버지 아서(베누아 곱(Benoît Gob) 분)가 만든 것인데, 자신의 폭력과 그로 인한 비극을 감추기 위한 것이다. 이사벨라의 어머니 안나의 역할은 아네케 보네마(Anneke Bonnema)가 맡았는데 그녀는 대본의 일부를 쓰기도 했다. 이사벨라의 일생의 연인인 알렉산더 역할은 한스 페터 달(Hans Petter Dahl)이 맡았는데 그는 이 작품의 작곡가이기도 하다. 또 다른 작곡가인 마텐 시거스(Maarten Seghers)는 이사벨라의 손자이자 연인인 프랭크를 연기한다. 이 작품에는 기쁨의 자매(Sister Joy)라고 불리는 이사벨라의 좌뇌(루이즈 페터호프(Louise Peterhoff) 분)와 악의 자매(Sister Bad)라고 불리는 이사벨라의 우뇌(티젠 로턴(Tijen Lawton) 분)도 등장한다. 그들은 4막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설명하는데, 우뇌는 오래된 정보의 순서를 재조합하는 창조적인 역할을, 좌뇌는 그 정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인지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공연의 대부분에서 그녀들은 대사를 말하기보다는 주로 춤을 추며, 좌뇌는 드럼을 연주하기도 한다. 해설자 역할은 미샤 다우니(Misha Downey)가 맡았는데, 그는 또한 이사벨라의 성감대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무대 위에는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다. 시력을 잃은 현재의 이사벨라가 참여하고 있는 시각장애인 과학실험의 일환으로 카메라를 통해 그녀의 두뇌로 투사되는 이미지를 이 스크린을 통해 볼 수 있다고 설명된다.

    이사벨라의 삶은 폭력과 거짓으로부터 생겨났다. 그녀의 아버지 아서는 안나를 몹시 사랑했고 어느 날 감정을 억제치 못하고 그녀를 강간한다. 임신을 하게 된 안나는 이사벨라를 낳아 수녀원에 버리고, 아서가 상처받은 자신을 구해준 친구라고 생각하며 그와 결혼한다. 각각 마음에 큰 비밀을 간직한 채 부부가 된 아서와 안나는 수녀원에서 이사벨라를 데려다가 입양하고, 아서는 그녀에게 진짜 아버지는 ‘사막의 왕자’이며 자신들은 그녀의 양부모라고 알려준다. 아서의 거짓말은 그녀를 환상 속에 살게 했고 미래를 추동하게 만든다. 극에서 아서는 거짓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아서는 술에 취하면 종종 “나는 부당통(Budhanton)이다”라고 외치곤 한다. 부당통은 부처(Buddha)와 로마의 장군 안토니우스(Antony)를 합성한 단어로 명상(contemplation)과 열정적 지배(impassioned control)를 동시에 의미한다고 극 안에서 설명된다. 약 한 세기동안 살아가면서 20세기의 모든 비극을 담담히 지켜본 노년의 이사벨라는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말한다.

    폭력과 거짓은 계속해서 그녀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이다. 그녀는 알렉산더가 실수로 쏜 총에 맞아 총상을 입고 그를 만난다. 그가 평생 꿈꾸었던 아프리카에 실제로 갈 수 있었던 것은 서아프리카에서 테러로 생명이 경각에 달한 프랭크를 이송하기 위해서다. 아서의 거짓말은 진실을 은폐하고 그럼으로써 제 자신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결국 그 자신을 구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사벨라에 의하면 그것은 거짓 때문이 아니다. 에필로그의 대사에서 이사벨라는 아서가 “죄의식에 무너졌고 울부짖는 늑대마냥 일생 동안을 비틀거렸다”고 말한다. 이것이 부당통이 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아서의 비극이다. 시력을 잃고 그녀를 세상과 연결해 주었던 카메라마저 모두 꺼져버린 순간, 이사벨라에게 분명히 보이는 것은 오로지 사막의 왕자 펠릭스(Felix 행복)이다. 아서가 만들어 낸 거짓말, 이사벨라가 키워낸 환상뿐인 것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행복이란 거짓과 환상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삶이 고통과 슬픔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고통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그 고통과 슬픔 속에서 비틀거리는 것이다. 진실과 거짓이 이분법적인 것이 아니듯, 고통과 행복도 이분법적인 것이 아니다. 그녀는 ‘언제나 내일이 있으며’ ‘오늘은 슬픔으로 충만하다.’고 말하며, 그렇기에 우리는 그저 계속해서 살아나가야 하며(이 주제는 계속 반복되는 멜로디와 가사 “we just go on and on and on....”에도 담겨 있다)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야 말로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강조한다. 알렉산더가 이사벨라에 대하여 말했듯 삶에 대한 ‘순수한 열정’만이 ‘거짓의 독재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인 것이다. 때문에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한 삶의 궤적을 반추하면서도 이사벨라를 비롯한 무대 위 모든 배우들은 대단히 명랑하고 행복한 톤으로 삶은 계속될 것임을 계속 노래할 수 있다.

    얀 라우어스는 <이사벨라의 방>과 같이 모두가 함께 노래 부름으로써 정서를 공유하며 나아가 각자의 감정을 변화시키는 작품에서 현대적 제의성을 본다. 이러한 제의성은 작품이 이성이 아닌 감성에, 로고스적 언어가 아닌 음악과 같은 비로고스적 언어에 기댐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재현적 언어와 체계가 사라진 공간, 중심이 사라진 공간에 남은 것은 비로고스적 요소이며 파편화되어 제시되는 주변부들이다. 이것은 로고스적 언어로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을 전달하고 감성과 에너지를 전달한다. 매체에 대한 이런 방식의 접근은 라우어스의 상호매체적 연극이 단순히 새로운 매체와 테크놀로지를 연극 안으로 가지고 들어온 작품들과 어떤 차이를 보이는가를 잘 말해준다.

    중심을 지우고 대신 여러 개의 주변부를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하는 장면 연출은 얀 라우어스 작품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자 그가 자신의 작품에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는 이유이다. 라우어스는 존 케이지가 이야기한, ‘좋은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다섯 개의 각기 다른 에너지원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언급하면서, 자신도 무대 위 단 하나의 중심을 해체하고 여러 개의 주변부를 만들어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에 동의한다고 말한다.20)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연기방식과 등장인물을 구현하는 방법, 그리고 인물들 간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이사벨라의 방>에서 인물들 간의 관계와 상호작용은 전통적 의미의 극작술이 요구하는 바처럼 잘 구성되고 배열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서로를, 서로가 관객에게 말하는 바를, 서로가 전통적 의미에서 역할을 재현하도록 충분한 공간과 집중을 보장 받는 것을 방해한다. 예컨대, 다른 인물이 말하는 도중에 우연이거나 실수인 것처럼 끼어들기도 하고, 동시적으로 대화를 진행하기도 하며, 사건이 진행되는 도중 소리를 지르거나 넘어지기도 하며, 갑자기 노래를 합창하기도 하면서 서사를 방해하기도 한다. 이러한 장면 구성은 전통적 드라마, 즉 순차적이고 구성적인 이야기를 지닌 연극의 서사적 추동력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추동력이다. 이것은 유기적이지만 다소 기이한, 혹은 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한 유기성이다. 레만은 이런 방식의 장면 구성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막의 시작은 좋은 예이다. 작가로서의 얀 라우어스가 등장하여 이 작품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누가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 등을 관객에게 소개하는 서설이 끝나면 내레이터의 안내와 함께 본격적으로 공연이 시작된다. 이제 아흔 네 살의 이사벨라가 관객들에게 1910년부터 1999년까지 약 한 세기에 걸친 그녀의 전 생애를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자신이 수녀원에 버려진 아이라는 것, 처음으로 기억하는 것은 포도주 저장실에서 차가운 물에 머리를 감던 수녀들의 모습이었다는 것, 아서와 안나 부부에게 입양되었다는 것 등, 그러나 관객은 그녀의 이야기에만 온전히 귀 기울일 수 없다. 그녀가 이야기를 막 시작하자마자 바로 옆에 앉은 한스 페터 달이 노래를 시작한 것이다. 그가 이 공연의 음악을 담당한 한스 페터 달로서 노래하는 것인지, 혹은 알렉산더 역할로서 이야기에 개입하는 것인지는 모호하다. 여기에 더해 아서 역할을 맡은 베누아 갑이 미끄러지듯 춤을 추며 들어온다. 그의 등장에 겹치듯 이사벨라의 이야기는 양아버지 아서가 다섯 시 이후에는 늘 술에 취해 있었다는 것에 이른다. 아서의 춤에 안나가 호응하듯 가세한다. 이사벨라는 참으로 즐거웠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하는 중이다. 이즈음이 되면 한스 페터 달이 시작한 노래는 무대 위에 있는 모두의 합창이 된지 오래다.

    이 작품에서 춤과 음악과 텍스트는 하나의 중심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일반적인 음악극에서처럼 서사를 강조하거나 장식하기 위해 춤과 음악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각각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서로를 조응한다. 때로는 서로를 방해하고 거스르기도 하며, 때로는 서로를 논평하기도 한다. 1막의 마지막 장면은 이에 대한 좋은 예시이다. 안나가 죽은 후 비탄에 빠져있던 아서는 이사벨라를 버리고 섬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섬을 떠나면서 그는 삶에 대한 절망을 토로하게 되는데, 분노와 절망의 목소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절규가 된다. 그가 만들어내는 거친 포효에 답하듯 혹은 논평하듯 안나가 노래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해설자의 춤이 가세하고 곧 무대 위의 모두가 춤을 춘다. 이사벨라가 이 모든 에너지를 이어받아 노래한다. 이러한 상황을 보는 관객이 텍스트에 귀를 기울일지 음악 혹은 노랫말에 귀를 기울일지는 오로지 각자의 선택의 문제이다.

    <이사벨라의 방>은 탈중심성, 탈경계성을 장르, 미장센, 주제 등 공연의 모든 부분에서 구현한다. 작품은 추상과 구상, 관념과 실체의 경계를 허물고 무대적 현실(연극적 리얼리티)과 일상의 현실(현실의 리얼리티)의 경계를 해체한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언어 체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던 문제를 관객에게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3.2. 자기반영적 역할 구현의 의미

    재현 불가능의 시대에 배우와 배우의 역할 구현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그것은 그저 부정되는 것일까. 혹은 다른 차원의 의미를 갖는 것일까. 혹자는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비재현성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면서 이러한 방식의 연극은 현실비판 능력도 상실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러한 연극이 지닌 배우의 자기반영적 표현은 배우 연기술도 모두 부정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자기반영성, 자기지시성은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배우에게서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지난 시대의 배우가 수행했던 강한 현실인식과 이를 통해 전달했던 분명한 메시지도 오늘의 연극에서는 모호해졌다. 그러나 그것이 그저 부정적인 것일까.

    오늘날의 연극에서 배우는 종종 그 자신으로서 무대에 선다. <이사벨라의 방>에서 ‘흰 양복을 입은 자’인 얀 라우어스는 가장 대표적이다. 그는 이 작품의 창작자 얀 라우어스 그 자신이다. 그런데 설사 제 자신으로서 무대 위에 선다할지라도 이는 매 공연 반복적으로 ‘재현된 제 자신’이다. 그가 자신에게 ‘흰 양복을 입은 자’라는 역할의 명칭을 붙인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무대 의상과 무대 역할이 있는 것이다. 배우가 제 자신을 재현하는 자기준거적 역할 수행은 포스트드라마 배우예술의 지배적 특징 중 하나이다. 사실 오늘날의 ‘재현할 실재가 모호해진 시대의 재현’에서 사실 모든 기호는 자기준거성을 갖으며 모든 예술은 자기반영적이 된다. 예술이 예술 그 자체의 조건, 성질, 작품 과정과 의미 발생의 수행성 등 제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이를 작품에 투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자기반영적 작업은 오늘날 예술이 처한 조건에서 어찌 보면 필연적이기도 한다. 더불어 이것은 여러 차원의 중층의 현실들이 교차하는 것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인식의 예술적 반영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연극은 우리에게 있어 예술(또는 진리, 모든 종류의 리얼리티, 텍스트의 의미)은 텅 빈 것이며, 그것은 다만 찰라의 현존에서만 감각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자기반영적, 자기준거적 역할 구현은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내레이션이 갖는 특징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레만의 표현에 의하면 얀 라우어스의 내레이션은 ‘무(無)드라마적 텍스트’의 내레이션이며 포스트서사적 내레이션(postepische narration)이다. 그는 라우어스의 작품의 내레이션에 대해 “포스트서사적 내레이션 연극에서는 이미 파편화된, 그리고 다른 물질성과 뒤섞인 극행동이 단지 보고의 상태로 자주 나타난다. 말하자면 설명되고 보고되고 덧붙여 전달되는 것이다.”22)라고 설명한다. 논리적 추동력을 지니는 전통적 방식의 극행동과는 다른 극행동을 지니는 포스트드라마 연극을 레만은 ‘상태의 연극’이며 ‘무대의 역동적 형상’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상태란 이야기보다 형상을 제시하는 연극의 심미적 형상 구조이다’라고 덧붙인다.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서술자는 서사극으로부터 차용한 듯 보이지만 그 역할은 서사극과는 사뭇 다르다. 서사극은 관객에게 무대와 객관적 거리를 확보하게 만들기 위해, 극적 환영에 몰입하고 감정이입을 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관객을 객관적 이성적 합리적 판단자로 만들기 위해 서술자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포스트 서사적 내레이션에서 서술자는 그저 그 자신을 드러낸다. 레만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서술자의 사적(私的)인 존재를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곧 접촉의 자기지시적 강렬함이 중요하다. 이는 가까이 있는 것과 거리를 두려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거리에서 가까이 살펴보려는 것이다.”23) 전통적 서술자의 서사와는 달리 <이사벨라의 방>의 서술자는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설명하고 정리하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관객의 개입, 혹은 참여의 여지가 생기는데, 이것은 브레히트적 의미의 정치적 참여보다는 우선적으로 정서적 개입, 정서적 참여이다. 관객은 인물과 객관적 거리를 두고 이성적으로 그를 판단하고 논평하지 않는다. 서술자의 사적 존재성은 듣는 이의 사적 존재성을 자극하기에, 관객은 자신과 같은 ‘한 개인으로서’의 그 인물을 정서적으로 느끼고 가까운 대화 상대자로 여기고 그에게 관심을 갖고 관찰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사적 존재성의 강조나 자기준거성, 자기반영성이 연극 소통을 그저 개인적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도록 만드는 것은 아니다. 배우의 자기준거적, 자기반영적 역할 구현은 배우를 연극의 내적인 프레임 안에만 머물도록 만들지 않는다. 연극 외적인 프레임에서의 그의 존재, 특히 사회적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상징적 관념적 차원의 사회적 존재가 아니다. 실제 영역, 일상 영역에서의 사회적 존재이다. 실제가 허구세계에 개입, 혹은 난입하는 순간이며 견고한 허구의 프레임이 구멍 뚫리는 순간이다. 수잔 베넷이 새로운 관객의 문제에 접근하면서 규정했던 공연 내적인 영역(실제 공연이 이루어지는 영역)과 공연 외적인 영역(관객과 그 사회문화적 맥락까지를 포함하는 영역)이라는 두 부분의 영역24)이 오늘의 연극에서는 명백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과 관련하여 레만은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허구와 미메시스의 원칙을 압도함으로써 부각되는 자신만의 ‘지각의 현상학’을 현실화한다고 설명한다.25) 공연이란 한 순간 생산되는 구체적 사건이며, 지각의 논리와 지각하는 주체의 지위도 근본적으로 변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더불어 재현의 불가능성은 실제적인 것과 허구적인 것에 동등한 권리를 부여한다고 말한다. 이런 방식으로 포스트드라마 연극에서는 실제적인 것이 허구의 세계 안으로 난입하게 되는데, 그때 그것은 ‘실제적인 것’으로서 존재한다기보다는 그것의 ‘자기반영적 사용’이며, 바로 이러한 실제와 허구 사이의 전통적 관계의 해체와 전복이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미학을 특징짓는다는 것이다.

    현실에 실재하는 것과 허구적으로 구성된 것의 상호 간의 지속적 전복은 때때로 관객석에 사회적 책임과 태도에 대한 윤리적 문제도 제기한다. 예를 들어, 얀 라우어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약탈된 물건들은 무대소품(허구적 구성물)이 아니다. 그것은 진품이자 관객의 눈앞에 존재하는 움직일 수 없는 역사의 증거물이다. 이들의 현존은 무대 밖의 현실에서 존재하는 모든 약탈물들을 무대 안으로 끌고 들어온다. 포스트드라마 연극에서 무대 안으로 실제가 난입한다는 것이 윤리적, 역사적, 정치적 의미를 지니는 것은 바로 이런 순간이다.

    한편, 배우의 역할 구현에 있어서의 자기준거성은 배우로서의 매체성의 드러냄과도 연관되어 있다. <이사벨라의 방>에서 배우는 역할을 매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는다. <이사벨라의 방>에서 배우는 역할을 나누어 맡고 이것을 구현하지만, 그것이 꼭 모사적으로 구현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제자신을 역할의 가면으로 가리려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가면을 들고 서 있는 격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역할로부터 분리되거나 역할에 대해 객관적인 것도 아니다. 그들은 배역을 부정하지도 배역과의 감정적 일치를 거부하지도 않는다. 배우들은 공연 내내 무대 위에 머무르며 벌어지는 사건과 다른 인물들을 관찰하는데, 이에 대해 반응할 때 역할의 입장에서 역할의 정서로 반응한다. <이사벨라의 방>에 등장하는 서술자의 존재나 서사의 전개와 상관없이 항상 무대 위에 머무르는 배우들은 즉각적으로 브레히트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것은 외연적으로는 브레히트와 유사하되, 공연 미학적으로는 다르다. 브레히트의 서술자와 배우들은 관객과 극 사이를 의도적으로 매개함으로써 직접적 정서적 접촉을 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라우어스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서술자와 배우의 매개성의 드러냄은 선형적 논리적 방식으로는 제대로 전달할 수 없을 서사를 다른 형식으로 전달하고 파편화하고 논평하고 설명하고 반복하기 위함이다.

    안나의 장례식 장면을 일례로 살필 수 있다. 여럿의 장정들이 마치 관을 운구하듯이 안나 역할을 맡은 아네케 보네마를 머리 위로 들어올린다. 안나는 긴줄의 마이크를 들고 자신의 슬픈 삶을 거의 울부짖듯 노래한다. 그녀의 노래는 일종의 추도사다. 일반적으로 살아있는 이가 말해야 하는 추도사다. 그러나 이 공연에서는 안나를 맡은 아네케가 진심으로 안나의 삶을 가슴 아파하며 노래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배우 제 자신의 살과 피와 결점투성이의 무거운 몸으로 역할에 동화되고 이를 구현하는 ‘과정’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것, 이것이 서사적 배우를 지향한 브레히트의 문제제기로부터 시작되었으되 완전히 다른 전망을 제시하는 라우어스 배우들의 연기이다. 즉, 라우어스의 <이사벨라의 방>에서 배우들은 제 자신이 맡은 역할이기도 하고 동시에 제 자신이기도 하다.

    라우어스는 현대인들은 인터넷, 텔레비전 등 온갖 종류의 미디어를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실제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마치 사람들이 유리벽 너머에 서 있기라도 한 것처럼 접촉의 방법을 잃어버린 것이다. 바로 이것을 극복하는 길이 연극이라고 말한다.

    <이사벨라의 방>의 배우들은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역할 뒤로 숨는 대신 ‘무겁고 약점 많은 신체’ 제 자신의 물질적 존재를 드러낸다. 이것은 영상과 무대 위에 전시된 ‘물리적 집적물들’ 사이를 부유하며 그 ‘사이에서’ 의미를 형성한다. 그들은 배우에게 부여되어 온 고전적 전통적 매체특정성, 즉 역할 재현하기를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 배우는 자신이 맡은 역할을 정서적으로 공감하고 재현한다. 그리고 재현한다는 사실, 자신의 개성과 정서를 통해 매개한다는 사실 그 자체도 드러낸다. 이는 브레히트처럼 자신의 배역에 대해 논평하기 위해서도 역할과 배우, 관객과 무대 사이의 거리를 만들어 이성적 관객을 만들기 위해서도 아니다. 또 매체성이 표면으로 드러난다고 하여 환상과 몰입이 철저하게 파괴되는 것도, 감정 이입이 불가능해 지는 것도 아니다. 라우어스 공연의 ‘거리’는 역설적으로 ‘가깝게 관찰하기’, ‘정서적으로 공감하기’를 가능하게 한다. 레만은 라우어스의 공연이 지니고 있는 이와 같은 모형에 대하여 “관객들은 얀과 그의 친구들과 함께(함께 하지 못하고) 어느 날 밤을 보내고 있는 것”29)이라고 말한다. ‘함께/함께 하지 못하고’있는 상태는 우리들이 그들을 관찰하고 지켜보며 그들이 왜 웃는지 왜 우는지를 공감하게 만들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들 속에 물리적으로 함께 섞여 있는 것은 아니다. 거리는 정서적 동질감을 위한 것이며 내 자신이 그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기 위한 것이다. 레만이 얀 라우어스의 1991년작 <불패자(Invictos)>에 대해서 말한 다음의 논평은 <이사벨라의 방>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시, 무용, 음악, 연극 등이 뒤섞인 라우어스의 작품에서 각각의 요소들은 하나의 목표를 지니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의 주제를 향하여, 혹은 각 장면에서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협업하지 않는다. 그들은 느슨하게 대화한다. 느슨하게 연결된 예술 형식과 표현들은 그들의 매체 특정성을 전면에 등장시키면서 그 각자의 예술적 동기를 드러낸다. 배우는 배우대로, 전시물은 전시물대로 자신의 물질성을 드러내며, 음악과 에피소드들도 제 각각의 내면적 동기를 지닌다. 그 요소들은 서로를 교란하는 동시에 협업한다. 그러나 그것은 중심으로 수렴되지 않는 협업이다. 그것들은 각각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유기적이다. 느슨하게 대화하는 목소리들과 하나의 중심을 갖지도 않는 극 구성 속에서 관객도 그 대화와 논쟁에 참여할 여지를 얻게 된다. 무대 위에도 중심이 없듯 이 과정에도 중심은 없다. 관객은 끊임없이 자신이 본 것을 논평하고 해석하지만 그것은 항상 잠정적인 것일 뿐이다. 공연 내내 의미는 부여되었다가는 다시 철회되고, 지워졌다가는 다시 복원되기를 반복한다. 하나로 수렴되는 중심이나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결론은 그저 잠정적인, 가능한 여럿 중의 ‘하나의’ 결론이 된다.

    오늘날 역할 뒤에 제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은폐하지 않는 배우의 현존은 관객으로 하여금 제 자신의 현존을 맞닥뜨리게 한다. 제 자신의 현존을 성찰하게 만드는 것은 공연에 대한 관객의 적극적 개입과 참여를 더욱 촉진시킨다. 그러나 관객의 참여는 과거의 연극처럼 강제되는 것이 아니다. 참여는 그저 객석에 앉는 바로 그 선택을 한 순간부터, 그곳에 물리적으로 자리했다는 현존으로부터 느슨하게 시작되는 것이다. 관객은 거리를 갖고 무대를 관찰하며 동시에 제 자신을 관찰한다. 관객은 물리적 정서적으로 강제되지 않기 때문에 공연에 자발적으로 개입할 수 있고 적극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 또한 관객은 자신이 물리적 정서적으로 강제되지 않는 거리를 보장받기 때문에 공연에 자발적으로 개입할 수 있고 적극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 이것이 오늘의 연극이 지니는 미학적, 정치사회적 특징이며, 그 변화를 견인하고 있는 배우의 자기반영적 역할구현이 지니는 의미이자 의의이다.

    15)T’Jonk, Pieter, ‘Because Women Are Tremendously Important’, De Tijd, 21 September 2004. cite at second hand from Reinelt, Janelle, ‘Jan Lauwers: Performance realities – memory, history, death’, Contemporary European Theatre Directors, Routledge, 2010. p. 205.  16)이하 대사 인용은 엘지아트센터 공연 자막(번역 : 김윤정)을 참고함.  17)엘지아트센터 <이사벨라의 방> 공연 프로그램 북. 8쪽.  18)Melillo, Joseph V., ‘Interview with Jan Lauwers’, programme for the BAM performance of Isabella’s Room, December, 2004., cite at second hand from Reinelt, Janelle, ‘Jan Lauwers: Performance realities – memory, history, death’, Contemporary European Theatre Directors, Routledge, 2010. p. 208.  19)엘지아트센터 <이사벨라의 방> 공연 프로그램 북, 13쪽.  20)위의 자료. 21쪽.  21)한스-티스 레만, 앞의 책, 129쪽.  22)한스-티스 레만, 앞의 책, p.208  23)위의 책, p.212.  24)Susan Bennett, 『Theatre Audience』, Routledge, 1997. 참조.  25)한스-티스 레만, 앞의 책, 183쪽.  26)위의 책, 189쪽.  27)Erika Rundle, ‘Image of Freedom: interview with Jan Lauwers’, Theatre Vol.33, Duke Univ. Press, 2003 Winter., 재구성 수록, 엘지아트센터 <이사벨라의 방> 공연프로그램 북, 21쪽.  28)위의 자료, 13쪽.  29)한스-티스 레만, 앞의 책. 209쪽.  30)위의 책, 같은 쪽.

    4. 결론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서사는 탈선형화, 탈드라마화, 탈위계화 되어 간다. 이러한 속에서 기존의 19세기적 현실에 대한 감각은 변화될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공연에서는 선형적 서사가 주는 리얼리티와는 다른, ‘순간의 현전’에 대한 감각에 방점이 찍히는데, 이럴 때 특히 강조되는 것은 디지털 미디어의 시대의 일련의 비물질적인 매체들 사이에서 물리물질적인 몸의 현존이다.

    새로운 미디어 시대의 연극에서 배우는 사전에 녹화되거나 현장을 스크린에 중계하는 비디오 이미지, 혹은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은 전통적인 연극의 매체성, 특히 신체의 물리적 현존의 리얼리티와 관계를 맺으며 무대 위에서 현존한다. 전통적인 역할의 모사적 재현보다는 역할 제시를 수행하는 배우에게 오늘날 매체 현실이 가지고 온 서로 다른 매체 간의 상호작용 혹은 상호저항은 중요하게 작용한다. 제 자신을 은폐한 채 역할로서만 존재하는 배우, 치밀한 미장센과 선형적 구성으로 구축된 서사와 의미, 텍스트에 이미 잠정적으로 존재하는 모범적 해석은 오늘날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무대 위에 올라오기 전 이미 모든 것이 리허설되었던 공연은 이제 무대 위에서 그것을 수행한다. 물론 이 과정에는 관객도 포함된다. 관객은 거리를 둔 채 관찰하고 논평하며 의미를 부여했다가는 지워버리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참여한다.

    오늘날의 공연에서 가장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배우의 몸과 현존이다. 배우의 자기참조적이고 자기반영적인 역할 구현은 제 자신의 몸과 현존을 더욱 강조한다. 그들은 제 각자의 사적 영역을 그대로 지닌 채 무대 위에 선다. 역할 뒤에 제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은폐하지 않는 배우의 현존은 관객으로 하여금 제 자신의 현존을 맞닥뜨리게 한다. 그리하여 이제 이 문제는 가상과 실재, 거짓과 진실, 허구와 현실의 모호한 경계 속에서 존재하는 현 시대 관객의 현존 문제가 된다. 이것은 오늘의 연극이 20세기의 모든 정치적 미학적 시도와 문제제기를 계승한 부분인 동시에 그로부터 벗어나는 부분이며, 오늘날의 공연과 배우 연기술이 갖는 새로운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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