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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Ein Traum von der Grenzuberschreitung in Wim Wenders Der Himmel uber Berlin 빔 벤더스 <베를린 천사의 시>에 나타난 분단시대 경계 넘기의 꿈*
  • 비영리 CC BY-NC
ABSTRACT
Ein Traum von der Grenzuberschreitung in Wim Wenders Der Himmel uber Berlin

독일의 분단시대 끝자락에서 빔 벤더스는 베를린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만든다. 어디를 가나 조금만 가면 막다른 골목인 베를린에서 영화예술가 벤더스는 그 경계에 직면하고 그것을 넘고자하는 욕망을 영화에서 실현한다. 이 논문에서는 빔 벤더스가 페터 한트케와 스태프들과의 긴밀한 협업으로 어떻게 경계를 문제 삼으며 그것을 넘으려는 열망을 예술적 백일몽으로 승화시키는지 천착하였다. 우선 이 논문에서는 벤더스가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 벤야민의 ‘역사의 천사’ 등의 선텍스트를 창조적으로 수용하여 천사의 개념을 형성하고 천사를 영화의 주인공으로 설정한 것에 주목하였다. 벤더스는 시공을 초월하여 역사의 난장을 바라본 존재 즉 천사를 영화의 주인공으로 삼으면서 사람들을 그 시각으로 형상화는 방법을 활용한다. 그리하여 이 영화의 시각은 천사의 시각 그리고 천사에 관한 시각으로 압도한다. 그러기에 카메라의 시각은 상승과 하강을 자유자재로하고 벽들과 장애물을 넘나들게 된다. 그리고 시각적으로만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존재로 천사를 설정함으로써, 영화는 전지전능한 시점을 확보하게 된다. 경계로부터 무한히 자유로울 수 있는 천사의 시점으로 경계로 가득한 베를린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고립과 고독 그리고 삶의 허무를 묘사함으로써 경계넘기의 열망을 관객과 함께 강화시켜 나간다. 천사 카시엘이 인간의 역사에 거리를 취하고 관찰자로 머무는 반면, 다미엘은 인간에게 깊게 공감하고, 유한하고 고통스러운 순간적 삶에 깊이 매료되어있다. 그리하여 다미엘은 결국 천사의 영원성을 포기하고, 인간의 세계 역사 속으로 뛰어 든다. 영화는 다미엘이 인간의 삶에 공감을 드러내며 변증법적 변화를 하는 과정에 관객도 감정이입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리하여 너무나 익숙한 관객 각자의 삶을 천사의 시선으로 새롭게 조망할 수 있게 한다. 마리온은 분열되고 고립되어 있는 인간 모두를 대변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곡예사로서의 그녀의 몸은 유한한 인간존재의 물질성과 아름다움을 그 자체로 빛나게 드러낸다. 광장 가득 같은 소망으로 모여 있는 이들을 대표하여 마리온은 다미엘과 공동의 불멸의 이미지를 생성한다. 이들이 제시하는 미래의 이미지는 영화 전체에서 산발적으로 묘사되고 있던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를 통합하는 완성점으로 작용한다. 벤더스는 영화가 그러한 사랑과 평화의 서사시를 완성할 수 있는 통합의 매체임을 <베를린의 하늘>에서 명시한다.

KEYWORD
Wim Wenders , Der Himmel uber Berlin , Die Mauer in Berlin , Grenzuberschreitung , Performance des Kameras
  • 1. 머리말

    빔 벤더스(Wim Wenders)는 1987년 7년간의 미국생활에서 독일로 귀국하면서 베를린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만든다. 전쟁과 분단의 상처를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었던 베를린은 미국, 소련, 영국 그리고 프랑스군이 분할해서 관리하고 있었고, 동서로 나뉘어 있던 베를린 중에서도 서베를린은 동독 속에 있는 섬과 같은 장소였다. 한쪽은 도시를 동서로 가르는 장벽이 있었고 나머지는 동독의 땅과 접해 있었던 서베를린은 도처에 막다른 골목과 허가 없이는 넘을 수 없는 경계들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벤더스는 귀국하면서 서베를린의 장벽에 위치한 크로이츠베르그에 거처를 정하고 영화를 찍는다. 이때 만들어진 영화가 <베를린의 하늘(베를린 천사의 시) Der Himmel über Berlin>1)이다.

    경계들로 둘러싸인 꽉 막힌 곳, 분단의 도상 기호 자체인 베를린을 영화의 중심에 가져다 놓고 빔 벤더스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역사적이고 공간적인 경계들은 그것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사는 인간들의 삶의 방식 속에 체화되어 무수한 경계들로 확산되게 마련이다. 벤더스는 그 무수한 경계들에 대한 문제의식과 그것들을 뛰어넘으려는 사회적 열망을 예술적으로 승화하여 이 영화에 드러낸다.

    분단시대의 끝자락에서 통합을 향한 열망을 영화 속에서 실현한 <베를린의 하늘>은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대의 빔 벤더스의 문제의식과 열망이 지금 우리의 것과 상당부분 겹치기 때문이다. 커다란 결핍은 강한 열망을 낳고, 그 열망을 예술적 백일몽으로 승화시켜 수용자들과 함께 공동의 꿈이 되도록 하는 일이 예술가의 역할 중 하나라는 점은 이미 프로이트가 지적한 바2)이다. 예술작품이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소망을 안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자연보호공원”3) 같은 것이라 할 때, 그러한 공간이 바로 <베를린의 하늘>이다.

    이글에서 나는 빔 벤더스가 페터 한트케(Peter Handke)와 긴밀한 협업으로 어떻게 영화텍스트를 생성해나가고 어떤 카메라 퍼포먼스에 의해 무수한 경계들에 의한 분열들을 가시화하는가 천착해내려 한다. 그리고 1987년 당시로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던 경계넘기의 꿈이 영화 속에서 어떻게 승화되어 실현되는지 분석하려 한다.

    1)Der Himmel über Berlin은 우리나라에서는 <베를린 천사의 시>로 의역하여 상영되었고 이 제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논문 제목에서는 이 번역을 사용하되, 이후 본문에서는 빔 벤더스의 의도가 집약되어 드러나는 <베를린의 하늘>로 통일하여 지칭하기로 한다.  2)프로이트, 지그문트, 정장진 역, 「작가와 몽상」, 『프로이트 전집. 예술, 문학, 정신분석』, 열 린책들, 2004(1996), 156쪽.  3)Pietzcker, Carl, “Grenze und Grenzüberwindung. Überlegungen zur literarischen Form”, Germanica, 1990/7, Universitè Charles de Gaulle, Lille III., s.49.

    2. 선텍스트와 천사개념의 형성

       2.1. 베를린, 하늘 그리고 천사

    벤더스는 베를린이 “진실의 역사적 장소 ein historischer Ort der Wahrheit”4)라 하였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의 중심지였고, 그로인해 전쟁의 폐망과 함께 철저하게 파괴되었던 도시인 베를린은 폭력과 반폭력의 역사적 이미지와 흔적을 간직한 채, 분단의 장벽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두 번의 세계대전이 일어났던 폭력적 20세기를 대표할 수 있는 장소로서 그 분열은 단순히 한 도시의 현상이 아니라, 동시대 세계의 분열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5) 벤더스는 한트케와 협업하기 이전에 이미 세상에서 가장 저주 받은 공간으로 베를린을 설정하고 있다.

    그러기에 이 영화에서 포착하고 있는 주요 공간은 장벽자체이며 그곳에 인근한 막다른 골목들, 다리와 거리, 장벽 근처 폐허가 되어버렸던 포츠담 광장,6) 그 근처에 있는 국립도서관 등이다. 영화가 천사 다미엘이 반쯤 파괴되어 있는 기억의 교회(Gedächtniskirche)의 첨탑에서 베를린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전후에 독일은 연합군에 의해 파괴된 이 교회를 재건할 것인가 전쟁의 비참함을 그대로 기억하고 교훈으로 삼기 위해 남길 것인가 토론하다, 후자를 선택하였다한다. 그 역사적 상징물 위에 천사가 서 있는 것이다. 이는 베를린의 역사를 담겠다는 영화의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 왜 ‘하늘’인가?

    두 개의 도시로 갈라진 베를린이 당대에 공유하는 것이 있다면 하늘뿐이기 때문이다.7) 땅 위에 경계들로 둘러싸인 저주 받은 베를린에서 벤더스는 그 모든 역사의 난장을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는 하늘을 포착한 것이다. 무수한 경계들로 가득한 베를린에서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뛰어 넘고자 하는 열망이 강화될 수밖에 없다. 벤더스는 그러한 열망을 표현하기 위해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는 하늘을 포착하고, 하늘의 시각을 구체화할 수 있는 천사의 존재를 고안해내기에 이른다. 영화는 축제처럼 환상이 뛰어 놀 ‘울타리’가 되어,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소망들을 발현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당대의 금지된 욕망을 영화 안에서 실현하기 위한 장치가 바로 시공간을 넘나들 수 있는 천사라는 존재인 것이다. 벤더스가 이 영화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처음부터 지니고 있었던 아이디어는 다음과 같다.

    이 아이디어는 한트케와 다른 스탭과의 협업으로 영화텍스트를 완성해가면서 조금씩 발전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천사 카시엘은 비교적 이 처음의 아이디어와 맞닿아 있고, 다미엘은 그로부터 거리를 취하며 스스로 변화해가는 존재로 형상화된다.

    영화에서 천사 다미엘과 카시엘이 승전탑(Siegesseule)위의 금빛 여신상의 날개에 앉아 베를린을 내려다보고 있다. 방사형 중심가가 내려다보이는 승전탑의 꼭대기는 베를린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브란덴부르그토어(Brandenburg Tor)를 중심에 두고 동쪽의 운터 덴 린덴 거리(Unter den Linden)가 서쪽으로는 6.17 도로(Strasse von 6.17)와 이어져 있는 긴 거리가 베를린 장벽으로 분절되어 있는 모습을 내려다볼 수 있는 이곳은 베를린의 분단을 한 눈에 포착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금빛으로 장식한 승리의 여신상이 놓인 승전탑이 세워진 것은 1874년 프로이센의 승전과 독일통일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을 다시 나치가 1939년에 베를린의 중심에 옮겨다 놓았다 한다.9) 이 승전탑의 꼭대기 여신상의 금빛 날개에서 검은 외투를 입은 날개도 없는 천사 다미엘과 카시엘이 우울한 표정으로 조각난 베를린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통일과 승전을 기념하는 금빛 날개의 여신상에 베를린에 추방된 천사가 앉아 ‘진정한 평화의 천사’10)가 되기를 꿈꾸는 아이러니가 이 영화의 근간이다.

       2.2. 선텍스트의 수용

    <베를린의 하늘>의 천사의 개념은 빔 벤더스가 영화의 기본개념으로 지니고 있던 것을 페터 한트케와의 긴밀한 교감과 선텍스트들과의 상호작용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그리고 촬영감독 앙리 알레칸 Henri Alekan과 다른 스텝들과의 협업과 토론으로 천사가 구체화된다.

    천사의 개념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선텍스트는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와 벤야민의 ‘역사의 천사’이다.

    벤더스는 미국에서 오랫동안 독일어를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귀국하면서 가장 아름다운 독일어라고 생각되는 릴케의 시를 지속적으로 읽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두이노의 비가>는 벤더스가 천사의 개념을 설정하는데 중요한 영감을 준다. 릴케는 죽음과 삶, 영원과 순간을 가로지를 수 있는 완벽한 존재로서 천사를 설정한다. 이승도 저승도 없는 통일된 열린 세계 속의 영원한 존재로서 천사11)는 덧없는 인간 존재와 대비된다. 그러나 제한된 시각의 덧없는 존재인 인간 중에서 시인은 “하찮은 것을 위대한 것으로, 눈에 띄지 않는 것을 빛나는 것으로 변용”시킬 수 있다. 그리하여 릴케는 시인이 그의 노래를 통해 인생의 무상함을 극복하고 “이 세상에 존재함은 찬란”12)한 것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고 본다.

    <두이노의 비가>에서 영감을 얻은 벤더스는 <베를린의 하늘>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경계를 넘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그리움을 천사의 개념에 포함시킨다. 그리하여 벤더스의 천사는 시공을 초월한 영원한 존재여서 엄청난 양의 기억을 저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유자재로 시공을 넘나들 수 있는 존재로 형상화된다. 영화에서 천사 다미엘과 카시엘은 그들이 이곳에 온 것은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기도 전임을 대화로 명시하면서 태고의 이미지를 영상으로 제시한다. 그 이후 생명들이 생겨나고 드디어 인간이 나타나는 것을 본 존재로서 천사가 형상화된다.

    이렇게 태초부터 생명의 생성, 인류의 탄생과 발전 그리고 비극적인 전쟁의 역사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으며 시공을 초월해 모든 것을 본 존재로 천사 다미엘과 카시엘이 형상화되고 있다.

    릴케가 시인이 하찮을 것을 위대한 것으로 변용시키는 존재라고 보았다면, 벤더스는 영화에 그러한 시인의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 릴케에게 시인이 천사와 닮은 존재라면, 벤더스에게는 영화가 바로 천사인 것이다. 영화가 시를 쓰는 천사로 시작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우연한 일이 아니다. 카메라를 천사의 시선으로 포착하거나 천사에 관해 포착하는 것도 천사는 카메라 즉 영화라는 입장을 대변하는 기법이다.

    <베를린의 하늘>의 천사의 개념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준 또 하나의 선텍스트는 벤야민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Über den Begriff der Geschichte」 에서 파울 클레의 그림 앙엘루스 노부스 (신천사:Angelus Novus)를 해석한 부분이다. 벤야민이 파울 클레의 그림에 나오는 천사에 대한 언급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역사의 재앙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진보라는 폭풍에 휩쓸려 미래로 내몰리는 천사의 슬픈 모습이 이 그림에 담겨 있다고 벤야민은 묘사하고 있다. 역사의 천사는 역사적 재앙 속에 내려가 죽은 이들과 부상당한 이들을 보듬고 싶은 마음을 실현하지 못한다. 그의 날개가 폭풍에 붙잡혀 내려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엄청난 재앙의 소용돌이를 바라보기만해야 하는 천사의 운명을 자신의 것과 동일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그는 망명생활 내내 서재를 옮길 때마다 이 그림을 가져다 달았을 것이다. 엄청난 재앙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데, 그 재앙의 소용돌이를 바라보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지식인의 초상을 벤야민은 역사의 천사에서 본 것이다. 현대기술의 진보는 매체를 변화시키고 무기를 혁신시켰고, 그를 바탕으로 파시즘이 등장하였을 때, 벤야민은 모든 것을 알고 예감하면서도 진보라는 이름의 돌풍에 휩싸여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지식인으로서 클레의 앙엘루스 노부스의 절망에 동일시했던 것이다.

    벤야민의 그러한 절망적인 상황인식을 빔 벤더스와 페터 한트케는 물려받는다. 영화의 도서관 장면에서 열람실에서 독서하는 사람의 내면의 소리로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파울 클레의 그림을 해석한 사실을 인용함으로써 벤야민의 개념과의 직접적인 연관을 드러낸다(23쪽). 뿐만 아니라 영화의 대부분의 장면에는 역사적 분단의 상징물인 장벽과 황량한 장벽 근처의 폐허에 놓인 차가운 현실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 안에 개인들은 고독한 공간 속에 분리되어 갇혀 있고, 불안과 고통과 허무에 찌들어 있다. <베를린의 하늘>에서 천사는 인간의 고통에 찬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깊이 관여하고 도와줄 수는 없다. 천사는 관찰자로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다.

    돌풍에 날개를 접을 수 없었던 벤야민의 역사의 천사와는 다르게, 벤더스의 천사는 날개를 접고 인간에게 내려와 동행하며 때로는 작으나마 위안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이들이 도울 수 있는 일은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하며 대부분은 할 일 없이 인간 주변을 맴돌며 부유하는 ‘실업자’일 뿐이다. 벤더스는 현대를 “천사가 이제 임무가 더 이상 없는 시대”15)로 간주한다. 천사는 기꺼이 인간을 도우려하지만 인간은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 유럽센터 위에서 자살하는 청년도 천사의 소리를 듣지 않고 워크맨으로 로리 엔더슨만 듣고 있기 때문에 카시엘이 구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천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실업자가 되고 만 것이다.16)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천사와 인간을 대비되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즉 천사의 시각이 시공을 초월해 넘나들 수 있는 자유로움을 지닌 대신에 흑백의 차원으로 형상화되고, 인간의 시각은 제한되어 있지만 총천연색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좀 더 면밀히 살펴보면 이 두 개의 대비된 존재가 다른 차원에 속하지만 두 차원이 아주 유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교감의 통로가 미미하지만 열려 있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미엘이 슬픈 얼굴로 절망하고 있는 한 중년남자에게 다가가 어깨동무를 하거나, 응급차에 실려 가는 임산부의 배에 손을 얻으면 그들은 잘해낼 수 있으리라 희망을 갖는다. 마리온이 사랑을 갈망하며 침대에 앉아 있는 장면에서 다미엘은 그녀의 어깨선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훑어 내리자, 마리온은 느낌을 갖고 그쪽으로 고개를 기울인다. 다미엘이 인간이 되기 전날 밤, 잠자는 마리온의 품에 고개를 묻자, 꿈속에서 그 둘은 깊은 교감을 나눈다. 다미엘이 인간이 된 직후에 카시엘이 그 곁에서 어깨에 손을 얹으면, 다미엘은 그 느낌을 받으며 어깨에 손을 올린다. 이렇게 천사와 인간 사이의 미세한 교감들이 영화의 도처에 있으면서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그런가 하면 다미엘이 천사일 때도 순간이지만 총천연색을 느끼는 인간의 시각을 지닌다. 뿐만 아니라 서커스단이 도산했다는 보고를 듣고 마리온이 연습을 중단하고 서커스장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다미엘이 동행할 때, 서커스 동료가 마리온을 보고 “아, 천사가 지나가네!”하고 이야기하자 다미엘이 깜짝 놀란다. 이러한 경계무화는 천사이면서도 인간일 수 있고, 역으로 인간이면서도 천사일 수 있는 공통분모를 제시하는 것이다.

    영화의 전체적인 구조를 포괄하면 그 공통분모는 영화전체에 깔려 있는 전제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다미엘의 시선을 대변하는 카메라는 우선 인간들 중에서 아이들과 마주한다. 천사의 시선을 대변하는 카메라를 바라보며 아이들은 손짓하며 웃음을 짓고 이야기를 건넨다. 여느 인간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존재로 등장하는 천사들을 아이들은 알아보고 자연스럽게 교감할 수 있는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이 둘 사이의 유사성이 제시된다. 이는 다시금 역사와 일상의 그늘에 감추어져 있는 아이의 순수성을 되찾는다면 인간 누구나 천사와 소통할 수 있고 결국 하나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벤더스는 천사가 “아주 현명하면서도 아이로 머물러 있는 사람에 대한 메타포”17)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천사에게 내포되어 있는 인간성, 인간에게 이미 내포되어 있는 천사성을 드러냄으로써 결국 공(空)과 색(色)의 세계가 포개질 수 있음을 전제한다. 그러기에 다미엘이 인간이 되는 시점을 중심으로 전반은 흑백의 화면이 압도하고, 후반은 총천연색의 화면이 압도하지만, 전반부에도 빛나는 색의 순간이 삽입되고, 후반부에는 흑백의 이미지가 나름의 아우라를 지니고 포함된다.18) 이러한 인간성과 천사성의 오버랩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강화된다.

    요컨대, <베를린의 하늘>의 천사의 개념은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에서 천사의 영원성을 벤야민의 역사의 천사에서는 현대의 비극적 상황을 지켜보며 괴로워하지만 영향을 줄 수 없는 관찰자로서의 천사를 가져 온다. 그러나 벤더스는 그러한 천사와 인간의 소통가능성 내지는 둘을 아우르는 공통분모를 설정함으로써 통합되며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영화에 함축시키고 있다.

    4)Wenders, Wim, Die Logik der Bilder, Frankfurt.a.M., Verlag der Autoren, 1988, s. 94.  5)vgl. ibd, s.94-97.  6)여기서 과거형을 사용하는 이유는 통일이후 포츠담 광장은 쏘니센터를 비롯한 가장 최신식의 건물들로 재건되어 폐허와 정반대의 이미지로 탈바꿈되었기 때문이다.  7)vgl. ibd. s.97.  8)ibd., s. 99.  9)베를린 승전탑(Siegesseule) 박물관 안내문. 이 논문을 위해 필자는 영화가 촬영된 베를린의 장소들을 2010년과 2012년에 직접 답사하였다.  10)Wenders, Die Logik der Bilder, s. 101.  11)릴케, 라이너 마리아, 김재혁 역, <두이노의 비가>, 『릴케 전집 2』, 책세상, 2000, 448쪽 참조  12)김용민, 「인간의 상상력이 도달한 드높은 경지.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3』, 휴머니스트, 2006, 147쪽.  13)Wenders, Wim, u. Handke, Peter, Der Himmel über Berlin, Frankfurt a. M., Suhrkamp, 2005(1987), s.83-84. 이후 시나리오 인용은 본문에 쪽수만 밝히겠음.  14)Benjamin,Walter, Über den Begriff der Geschichte, Hsg.Raulet,Gérard, Berlin:Suhrkamp, 2010, 19ff.  15)Künzel, Uwe, Wim Wenders, Freiburg: dreisam, 1989, s.212.  16)vgl. ibd., 212-213f.  17)ibd., s.201.  18)인간이 된 다미엘이 마리온과 밤을 보낸 다음 날 마리온의 공중곡예를 줄을 잡고 하나임을 확인하는 총천연색의 화면의 한쪽에 카시엘은 흑백으로 나타나지만 그 주변은 아우라로 빛난다.

    3. 천사들의 산책과 카메라 퍼포먼스

    영화의 시작에 구름 사이로 하늘이 조금 드러나는 장면이 있고 이어서 하나의 눈이 익스트림 클로즈업되어 나타난다. 그리고는 비행촬영으로 하늘에서 본 베를린 시가를 극단적인 새의 시점으로 오버랩시킨다. 이어서 이미 언급한 기억의 교회 첨탑에서 천사 다미엘이 내려다보는 시선을 하이앵글로 잡아 거리를 지나는 아이와 버스에서 천사를 올려다보는 아이들을 보여준다. 그리고는 크레인을 이용해 카메라 시점을 하강시켜 인간의 눈높이에서 아이를 업고 지나가는 남자, 자전거를 타고 가는 여자를 잡고 그들의 내면의 소리를 포착하여 관객에게 들려준다.

    즉 시공을 넘어 모든 것을 본 초월적인 천사의 눈이 베를린 시를 내려다보고, 그보다 조금 하강한 지점인 기억의 교회에서 베를린의 인간들을 바라본다. 그러면서 그 시선은 시공을 넘나들 뿐 아니라, 인간의 사고의 흐름까지도 들을 수 있는 전지적 존재임을 드러낸다. 베를린을 극단적인 새의 시점으로 포착하던 카메라의 시각은 줌 인하여 그 중 한 낡은 건물을 포착하고 창문을 통과하고 벽들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그 안에 고립된 인간들을 묘사하고 그들의 내면의 소리를 들려준다.

    이렇게 카메라는 천사와 동행하면서 그 시각을 천사의 시점과 일치시켜서, 천사의 초월성을 획득하게 된다. 비행촬영과 크레인 활용을 통해 카메라의 시각은 수직적인 하강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날라 다니고 모든 장애물들과 벽들을 통과하며 어디에나 존재하는 신의 시점을 닮게 된다. 영화는 천사의 시각을 활용하면서 동시에 거기에 인간의 내면까지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함으로써 전지적 시점의 소설의 서술자의 역할까지 수행해낸다. 카메라는 천사의 시점을 대변하면서 때때로 천사 자체를 포착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영화에서 카메라는 대부분은 천사 카시엘과 다미엘의 시선을 대변하면서 나란히 동행하는(Pararelle Kamerafahrt) 카메라 워크가 압도적이고 때때로 천사 카시엘과 다미엘이 세상을 바라보며 유영하는 모습을 비춘다. 천사들은 세상에 하강하여 세상 속에서 산책하며 인간들과 인간들의 삶을 관찰하고 기록하거나 그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동행한다. 따라서 “카메라의 움직임도 때로는 유영하듯 부드럽게 흘러가다 때로 멈추어서”19) 피사체인 인간을 가까이 포착하고 위무하기도 하며 때로는 사랑의 욕망을 담아내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때로는 절망하는 시선으로 불안하게 흔들리고 추락하기도 한다. 이러한 카메라의 퍼포먼스는 천사들의 심상과 움직임과 일치되어 일정한 리듬과 호흡을 드러낸다.

    카시엘과 다미엘은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 카시엘은 영원한 정신적 존재로서 인간의 삶과 역사를 거리를 지니고 관찰하려는 태도를 견지하고 때로는 인간의 고통에 개입하여 도울 수 없음에 절망하고 흔들리기도 한다. 벤더스는 벤야민이 해석하고 있는 앙엘루스 노부스의 이미지를 넘겨받은 영화 제작 초기의 개념을 카시엘에게 부여하여, 인간의 비극적 역사를 통시적으로 관찰하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으로 등장시킨다. 반면 다미엘은 정신적 존재로서의 천사의 임무로부터 벗어나 인간의 삶을 함께 경험하고 느끼려는 태도로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가 동행하고 점점 깊이 들어가 결국 인간의 역사와 삶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체화한다.

       3.1. 카시엘: 통시적 시점

    카시엘의 시선을 대변하는 카메라의 시각은 인류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영원으로부터 현재까지 인류의 역사를 바라보고 증거해 왔던 천사의 소명을 카시엘은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일어나도록 놔두고 거리를 지키고 영혼으로 머물러야하는 천사의 소명을 카시엘은 영화에서 시종일관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표정에는 갈등과 고통이 드러난다.

    인류가 나타나기 전부터 베를린에 있었던 천사 카시엘은 베를린의 현재의 이미지뿐 아니라, 그곳에 잠재해 있는 과거 역사의 흔적들도 함께 바라보기 때문에 시간적 제약을 벗어 던지게 된다. 특히 카시엘의 시선을 대변하는 카메라가 되살려내어 현재의 이미지와 중첩시키는 과거의 역사적 이미지들은 2차 대전 중의 처참함이다. 현재 베를린에 있는 분단과 분열 그리고 상실의 아픔과 과거 전쟁 중의 이미지가 병치되어 몽타쥬를 형성함으로써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상흔이 연결되어 심화된다.

    카메라는 현재 베를린에 살아가는 인간들의 고독, 상실감 그리고 공허 등을 하나하나 묘사해나간다. 추운 날 지하철역 앞에서 매춘을 하려 서성대는 한 소녀의 고독과 슬픔을 묘사하던 카메라는 카시엘이 타고 있는 차의 운전수의 음성으로 현대 독일인들의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들을 명시하면서 카시엘의 시선으로 2차 대전 중의 황량한 거리를 비춘다. 매춘하는 소녀의 심상과 운전사의 내면의 소리 그리고 카시엘의 회상으로 역사의 상흔이 연결되어 몽타쥬를 이루며 그 안에 고립되어 있는 인간들의 황폐함을 공감각적으로 제시한다:

    철길 밑의 음습한 포츠담가를 지나는 차 속에서 웅얼거리는 위와 같은 사유의 소리는 앞서 영화가 보여주었던 개개인의 고립이 역사적 사건임을 나타낸다. 어디에나 나와 너를 가르고 있고, 넘어서는 순간 통과료를 물거나 철조망에 걸려 죽을 수 있는 역사적 경계들, 개개인은 마치 호박 속의 파리와 같은 존재이며, 암호를 대야만 겨우 통과가 가능한 경계 속에 갇혀 있다. 이러한 분열은 단순히 지금 여기의 사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임을 영화는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쟁의 포화 속 폐허가 되어 버린 다큐멘타리를 삽입함으로써 그 의미망을 확장한다. 현재의 분열된 상황과 전쟁당시의 다큐가 병치되는 몽타쥬를 바라보며 관객들은 개인 뿐 아니라 사회가, 현재 뿐 아니라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경계로 둘러싸인 분열의 역사 속에 있음을 상기하게 된다.

    카시엘은 또한 호머라는 인물의 수호천사로 등장한다. 인류의 역사 즉 문학을 대변하는 늙어 버린 호머와 동행하며 그의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 호머가 폐허가 된 포츠담광장을 거닐며 전쟁 전의 번화한 광장에서 여러 사람들이 어울려 함께 지냈던 기억을 떠올리며 “내 생각에, 여기… 이건 포츠담 광장일 리가 없어!”(58쪽)라고 부정할 때, 전후의 폐허가 된 건물들의 잔해가 퇴색한 붉은 빛을 띠며 되살아난다.

    카시엘에 의해 포착되는 또 다른 절망은 천사라 하더라도 누구도 도울 수 없다는 것이다.

    유럽센터는 서베를린의 중심(Zooligischer Garten)에 있는 고층건물이고 그 위에는 서독 자본의 부를 과시하는 거대한 벤츠 로고가 ‘비정하게’(unerbittlich, 91쪽) 돌아가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한 청년이 뛰어내려 자살을 하는 장면을 영화는 담는다. 두서없는 사고의 흐름 속에서 얼핏 그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넘어온 청년임을 읽어낼 수 있다.20) 그것이 다른 웅얼거림에 뒤섞여 묻혀버리기는 하지만, 벤츠 로고와 함께 서쪽의 자본주의에서 소외된 개인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이 장면은 거대한 자본주의 속에서 소외되고 결국 파멸하는 개인의 운명을 함축하고 있다. 카시엘은 그러한 인간을 구원하고 싶지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절망에 차서 “아니야(Nein)!!”라고 외친다. 이 비명에 가까운 카시엘의 외침은 거대한 자본 속에 파멸하는 개인과 그것을 구원할 수 없음 모두에 대한 강한 부정을 내포한다. 이때의 절망을 카메라는 급속하게 추락하며 불안하게 흔들리는 카시엘의 주관적 시각으로 묘사한다. 거리에서, 공중전화 박스 안에서, 내 던져져 있는 절망하는 각각의 개인들을 몽타쥬 화면으로 담아내다가 부부싸움과 폭력 속에서 공포에 질린 아이가 울음을 터뜨릴 때, 전쟁의 포화로 연결된다. 이때 카메라 시각의 급속한 흔들림과 추락은 빠르고 불안한 배경음으로 이어지다가 아이의 울음소리와 연결되는 싸이렌 소리와 폭격소리에 의해 폭발한다. 그리하여 개개인의 분열들은 바로 역사적 분열 속에 깊이 연루되어 있음을 강조하여 보여준다.

    영화는 이렇게 분단의 상처들을 직접 드러내는 당대의 이미지만 형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카시엘의 시선을 통해 때때로 그 현재의 이미지에 ‘잠재해 있는’ 과거의 흔적 즉 2차 세계 대전 중의 대량학살과 참상을 몽타쥬로 엮어 내어 시간의 깊이를 더한다. 이렇게 시대를 초월한 천사의 시선21)을 활용하여 베를린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분열의 역사를 공감각적으로 심화시켜 형상화한다. 뿐만 아니라 천사의 영원성을 흑백의 화면이나 퇴색한 화면으로 처리함으로써 일정한 거리를 창출할 뿐 아니라 베를린이란 공간의 역사적 진실의 암울한 분위기를 감각적으로 제시한다.

       3.2. 다미엘: 변증법적 지양(Aufheben)22) - “세계 역사 속으로”

    역사적 분열들은 개개인의 삶 속에 체화되어 나와 너 사이에 처진 무수한 경계들로 확장된다. 그리고 그 경계 속에 갇혀 있는 개인들은 고독하고 소외되어 있으며 각자의 고통으로 찌들어 있다. 그리하여 삶은 허무하고 텅 비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인간들을 영화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때로는 동행하고 어깨동무하며 사랑하기에 이른다. 이는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다미엘의 시선을 통해 형상화된다.

    하늘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던 다미엘의 시각은 차츰 하강하며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상념들을 포착한다. 그 시선은 인간에게 다가가 동행하는 카메라워크로 실현된다. 그리고는 삶의 공간들을 넘나들며 고립되어 있는 인간들의 삶의 근심들, 슬픔, 상실, 결핍 등을 보여주며 동시에 그들의 생각들을 읽어 내어 관객들에게 들려준다. 영화는 거리의 행인이나 지하철에 앉아 자신들의 상념들에 젖어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함께 생각의 소리들을 들려준다. 이렇게 천사 다미엘의 시각은 인간들의 모습을 공간의 제약 없이 살필 수 있고, 내면의 소리까지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이 모든 작은 영웅들의 이야기들이 노정되어 관객과 공유할 수 있게 된다. 지하철 안에서 삶의 바닥에서 절망하고 있는 한 중년남자에게 다미엘이 다가가 어깨동무를 하는 장면을 보면 다음과 같다.

    다미엘이 다가가 가만히 어깨동무를 하면 마치 마술지팡이를 두드릴 때처럼 소리가 나고 ‘슬픈 남자’는 위의 밑줄 친 부분의 생각을 하며 숙였던 고개를 들어 주위를 돌아본다. 그리고 그 순간 사유의 전복이 일어난다. 자기부정의 고리에서 벗어나 자신의 존재 자체 그리고 자신의 의지를 신뢰하며 그 남자는 희망의 끈을 발견해간다.

    카시엘이 자살하는 청년을 도울 수 없었던 것과는 달리, 다미엘은 공감의 작용을 통해 작으나마 인간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 작은 영웅들의 모습들과 이야기들은 바로 관객들 자신의 것이고, 거기에 다미엘은 공감하는 시선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영화가 진행되면서 관객도 차츰 다미엘의 시선에 합류하게 된다.

    일상과 역사의 그늘 속에 가려져 있지만 그 안에 모두 아이의 순수함 즉 천사성을 지닌 인간들이 다미엘의 시각을 통해 하나하나 드러난다. 카메라는 각자의 일상의 그늘에 잠겨 있는 인간들을 하나하나 애정 어린 눈과 귀로 담아내어 각각의 존재들의 소중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인간들에 대한 공감은, 지금· 여기의 인간의 삶을 경험하고 싶은 열망으로 확대되어 나타난다.

    노동 후의 여유와 아무것도 아닌 신문 읽기 심지어 열이 나는 고통까지도 다미엘의 시선을 통해 보면 삶의 아름다운 순간으로 비추어진다. 유한한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천사 다미엘의 이러한 시선은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재발견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아무런 고통도 위험도 없이 자유롭게 시공을 넘나들며 영원히 살 수 있는 천사가 인간의 유한한 삶을 긍정하는 순간, 일상의 소소함과 작은 욕망들 그리고 고통까지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역설의 공간이 확보되는 것이다.

    이러한 다미엘의 입장은 헤겔적 관점에서 보면 즉자(an sich)적인 자신이 아니라, 자신과 대립하고 있는 대자(für sich)적인 존재23)임을 드러낸다. 즉 그는 자신의 속성인 영원성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 안에서 모순을 발견하고 있다. 인간은 고통스러운 삶이지만 매 순간을 통감각으로 인지하는 존재인 반면, 천사는 감각하고 행위하는 것 같지만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벤더스와 한트케는 이 역설을 도서관 장면 묘사에서도 명시한다.

    즉 다미엘이 한 음대생의 연필을 손으로 집어 가도 “‘연필 자체’는 거기에 놓여 있는데, 다미엘은 그 ‘모사된 이미지(Abbild)’만을 가져간다.”(28쪽). 다미엘이 마리온의 방에서 작은 조약돌을 가질 때에도, 조약돌 자체는 남아 있고 그가 손에 쥐는 것은 역시 이미지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의 삶은 실체이고, 천사의 것은 그것의 그림자로 전복시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다미엘은 천사 자신의 영원성 안에 내포되어 있는 허상을 부정함으로써 새로운 인식과 행동의 차원으로 이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 안의 모순을 직시한 대자적 존재가 된 다미엘은 결국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창출하기 위해 실체인 ‘세계 역사 속으로(Hinein in die Weltgeschichte)’ 온몸을 던질 각오를 한다.

    이는 시간성을 뛰어넘어 세상을 내려다보는 초월적 시각을 포기하고, 인간의 세계로 하강하여 인간의 눈높이에서 모든 것을 함께 체험하며 인간의 제한된 시간성의 흐름 속에 합류하겠다는 결단이다. 마티아스 간터는 인간의 수고와 노력의 삶의 방식인 ‘쟁취와 인내(erstreiten, aushalten)’라는 단어가 천사에 의해 기꺼이 사용됨으로써 부정적인 뉘앙스가 긍정적으로 전환된다고 한다.24) 역사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은 다시 말해 시간의 흐름 속으로, 죽음의 여울에 온몸을 던지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Hinein in die Furt der Zeit, die Furt des Todes! 시나리오 124쪽)

    여기서 이러한 다미엘의 결단이 바로 베를린 장벽 앞에서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결단 후에 다미엘과 카시엘은 투명인간처럼 ‘장벽을 통과한다’. 그리고 동베를린의 경계지역인 프랜쯔라우어 베르그 (Prenzlauer Berg)25)로 화면이 이어진다. 로뮐렌 다리를 장벽이 가르고 있고, 장벽 너머로 바로 동베를린 시민들이 사는 아파트가 보이는 이 공간은 장벽이 얼마나 인위적인지를 보여준다. 그 경계 하나로 두 공간의 삶이 다르게 제한되며 상이하게 주조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 장소에서 이 영화의 근본적인 욕망이 실현된다. 다미엘이 죽음의 역사 속으로 온몸을 던질 결단을 하는 순간, 수직적인 경계 넘기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동서를 가르는 역사적 경계의 무화도 가능함을 이미지를 통해 관객에게 각인시킨다.

    다미엘이 인간이 되어 떨어지는 곳은 티르 노어(Thierry Noir)26)가 인간들의 모습을 색색으로 그려 놓은 발데마 거리에 있는 서쪽 장벽 앞이다. 노어는 자신의 그림을 “순간의 시학”으로 압축해서 표현하면서 “생의 기쁨을 발산하”27)려 했다고 한다. 장벽 그림의 이데올로기는 다미엘의 시각을 통해 영화가 보여주려는 의미와 일치한다.

    다미엘은 하늘에서 던져 준 청동 갑옷에 의해 이마에 상처를 입는다. 다미엘은 인간으로 역사적 공간에 이마에 상처를 입고 던져진다. 그러나 다미엘은 고통을 울음으로써가 아니라 웃음으로 전복하며 일어선다. 갑옷을 가지고 걸어가며 그는 피를 맛보며, 맛있다고 한다. 그리고 천사일 때 잠시 감각했던 색(色)의 세계에 열중하며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땅 위에 두발을 딛고 그 눈높이에서 세상을 ‘감각’하며 걸어간다.

    역사 속으로 온몸을 던져, 경계를 넘어 인간이 된 다미엘은 헤겔의 개념에 의하면 새로운 단계로 지양되어 ‘즉자 및 대자의 총합’을 이루게 된다. 인간 아이가 된 다미엘은 그러나 세상이 모두 하나라고 믿었던 즉자적인 아이가 아니라, 세상과 자신 안의 분열을 자각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새롭게 경험하며 통합할 ‘아이’로 태어난 것이다. 이는 일찍이 지니고 있었던 신성성, 천사로서의 자신의 속성을 간직하면서 새로운 단계로 지양(Aufheben)28)되는 것이다.

    다미엘을 통한 변증법적 지양은 영화의 골격으로 작용하는 페터 한트케의 시 <아이의 노래 Das Lied vom Kindsein>라는 시에서도 은유적으로 제시된다.

    시가 구분하고 있는 세 가지 단계는 ‘세상과 하나인 아이- 세상과 대결하는 아이- 세상과 재통합한 아이’이다. 즉 영화의 서두에서 “자신이 아이라는 걸 모르고,/ 모든 것이 그에게 영혼을 불어 넣고,/모든 영혼은 하나라고 생각”(4쪽)하던 때 즉 즉자적 단계가 다미엘의 목소리와 그의 쓰는 몸짓으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다음 대자적 단계는 아이였을 때와 지금을 구분하면서 아이일 때는 “천국을 명징하게 상상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허무에 짓눌려 있다”(78쪽)고 부정적 인식을 하는 단계이다. 이는 베를린의 분열된 역사와 그 안의 사람들의 고립된 일상이 나열되다 아이들을 위한 서커스공연에서 역시 다미엘의 목소리로 흘러나온다.

    마지막 통합의 단계는 아이일 때처럼 지금도 여전하다고 나열하면서 “아이가 아이였을 때,/ 막대기를 창 삼아서 나무에 던졌는데/ 그 창은 아직도 떨리고 있다.”(133쪽)고 인식하는 것이다. 즉 경험과 인식과정을 통해 아이로서의 속성을 간직하고 있는 자신을 재발견하여 새로운 단계로 지양됨을 드러낸다. 이 마지막 소절은 장벽 주변의 어수선한 오라니엔가와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전철이 달리는 스칼리처가 밑을 인간이 된 다미엘이 의기양양하게 걸어갈 때 그의 목소리로 흘러나온다. 그는 천사의 기억과 경험을 지닌 채 분단과 분열 그리고 삶의 고통이 있는 역사의 현장에 뛰어들어 ‘아이’처럼 온몸으로 체험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러한 다미엘의 삶의 시작을 카메라는 동행하면서(Parallele Kamerafahrt) 형상화한다.

    영화의 대부분은 다미엘의 시각이 압도적이고, 다미엘이 인간의 삶에 감정이입하며 공감구도로 나아가기 때문에 관객도 그의 시각에 차츰 합류하게 됨을 이미 언급한 바 있다. 특히 다미엘이 인간이 되어 인간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배우며 감각하는 순간부터 영화의 이상적 관객은 그에게 깊이 감정이입하여 그의 시각으로 관객 자신의 삶을 새롭게 바로 보게 된다. 아이처럼 자신의 머리에서 흐르는 피를 맛보며 맛있다고 하거나, 장벽의 그림을 보며 색깔을 하나하나 익히는 그의 시선으로 관객도 세상을 새롭게 관조하게 되는 것이다. 그가 일찍이 피터 포크에게서 배운 일상의 기쁨을 재현하는 장면 - 추운 날 간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두 손을 비비는 장면-에서 관객은 늘상 있어 왔던 삶의 순간을 새롭게 감각하게 된다.

    19)정미경, 「대립과 공존의 미학. 포스트모더니즘 시각에서 본 <베를린 천사의 시>」, 『독일문학』 97집, 한국독어독문학회, 2006, 200쪽.  20)“몇시지? 해가 벌써 졌네. 당연하지 여긴 서쪽이니까. 적어도 이제 서쪽이 어딘지는 알겠네. 집으로 가려면 언제나 전철을 타고 동쪽으로 갔지 … 사실 베를린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야. … 하벨이 강이었나 바다였나? 전혀 알지 못했지. 저쪽 뒤로는 베딩인가? 동쪽인가? 사실 도처에 동쪽이 있지. (91쪽)”  21)과거 잠재된 이미지를 불러내는 역할을 카시엘이 주로 하지만, 피터 포크가 등장하는 영화 촬영 장면에서는 다미엘의 시선에 의해 이루어지기도 한다.  22)Hegel.G.W.F., Phänomenologie des Geistes,, Hamburg, Felix Meiner Verlag, 1988, s.121.  23)vgl. Hegel.G.W.F., Phänomenologie des Geistes, 116ff.  24)Ganter, Matthias, Wim Wenders und Jacques Derrida. Zur Vereinbarkeit des Films von Wim Wenders mit Jacques Derridas dekonstruktiver Literaturtheorie, Marburg, Tectum Verlag, 2003, 64f.  25)이 부분에서 조망하고 있는 서베를린의 크로이쯔베르그Kreuzberg나 동베를린의 프랜쯔라우워 베르그Prenzlauer Berg는 음습한 동서의 장벽근처이기 때문에 베를린 시민들이 살기를 선호하는 지역이 아니었다. 그래서 집세가 싸기 때문에 서쪽에는 외국인 이주노동자나 학생 그리고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 살게 되었다. 특히 동베를린의 프란츠라우어 베르그에는 체제에 동조하지 않는 대안 예술가들이 모여 살던 곳이어서, 통일 후 그곳의 예술가들이 주목을 받았다.  26)Es ist die Poesie des Augenblicks, die Poetik der Sekunde, die Ironie des Momentanen, um die es mir geht“, so Noir 1996. Thierry Noir는 1958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예술가로 1982년 베를린으로 이주해서 거리예술로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1984년부터 Christoph Bouchet와 Kiddy Citny와 함께 베를린 장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위험이 따르는 작업이었고 실제로 장벽에 그림을 그리다 동베를린의 군인에 의해 잡혀갈뻔 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서쪽 장벽근처 크로이쯔베르그 주민들이 이 그림을 훼손시키기도 해서 그림을 반복해서 다시 그리기도 했다. 그러다 점점 예술적 반향을 얻으면서 통일 후에는 동쪽 장벽 겔러리 (East-side Gallery)에 그의 그림이 보존되고 있다. wikipedia에서 인용.  27)ibd. 그렇다고 티르 노어가 장벽을 넘으려다 목숨을 잃었던 사람들을 잊고 미화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한다. 때때로 깨어나 사람을 잡아먹고 다시금 잠에 빠져 드는 피로 얼룩진 괴물로 그는 장벽을 인식하고 있다.  28)Hegel.G.W.F., Phänomenologie des Geistes, s.121.

    4. 큰 사랑의 이야기

       4.1. 현상학적 존재로서의 마리온

    영화는 수많은 인간들의 이야기들을 병렬적으로 보여준다. 무제한한 천사들의 시청각과는 달리, 인간들은 땅 위에서 자신의 위치에서 제한된 것만을 보고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인간들은 각자의 몸에, 자신의 공간 안에 고립되어 있다. 천사들의 무시간성과 영원성과는 달리, 인간은 죽음을 전제로 한 순간을 살아 가고 있다. 시간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특성은 오토바이 사고로 죽어가는 남자에게서 드러난다. 아직 많은 것을 해야 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도둑처럼 들이 닥치는 그의 죽음을 통해 인간의 삶이 죽음을 전제로 함을 단적으로 형상화한다. 그가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순간에 떠오르는 삶의 빛나는 순간들은 몇 개의 단어로 압축된다. “첫 번째 빗방울 자국, 태양, 빵과 포도주, 한발로 뛰기, 부활절, 나뭇잎 줄기, 바람에 흔들리는 풀, 돌의 빛깔, 개울 바닥의 조약돌, 야외의 하얀 식탁보, 집에 대한 꿈, 옆방에 잠자는 이웃, 일요일의 휴식, 수평선, 방의 불빛, 정원, 밤비행기, 손 놓고 자전거 타기, 아름다운 미지의 여인, 나의 아버지, 어머니, 아내, 아이.” (54-55쪽)

    그런 인간들의 삶이 산발적으로 묘사되다가, 다미엘의 눈이 마리온에게 닿는 순간 카메라는 밀착되어 그녀를 포착하게 된다. 마리온의 내면의 독백은 아주 상세히 전달될 뿐 아니라 자주 클로즈업되거나 풀샷으로 화면 가득 확대되어 형상화된다. 많은 인간군상들 중에서 마리온이라는 인간에게 포커스가 맞춰지고, 현상학적 존재인 인간들의 특성이 그녀를 통해 집약되어 형상화된다. 다미엘이 아직 천사일 때 영화의 화면은 흑백으로 이루어지지만, 그 중에서 선명한 총천연색으로 빛을 발하는 두 개의 장면은 영화 속에서 강한 방점으로 작용하는데 그것도 모두 마리온에 대한 것이다.

    첫 번째는 마리온이 서커스에서 연습하면서 공중에서 닭 날개를 달고 불평하며 날고 있는 장면이다. 서커스 단장은 마리온에게 집중해서 잘 날으라고 밀어붙이고 동료들은 정신 차리라고 충고를 하는 장면이다.

    위대한 영웅의 과업 성취 같은 비상한 상황이 아니라, 삶의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주어진 일을 해내며 투덜대는 마리온의 일상적인 상황에서 다미엘은 인생의 빛나는 순간을 발견한다.

    두 번째의 칼라화면은 마리온의 방에서 마리온이 알몸으로 앉아 사랑에 대해 열망할 때 나타난다. 벤더스가 빛의 마술사라 평가하는 촬영감독 앙리 알레칸 Henri Alekan은 마리온의 작은 방을 비추기 위해 40개의 조명기를 사용했다고 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은 조명기를 동원한 장면이라 한다.29)그리하여 방에 있는 마리온과 모든 사물들이 각자 빛을 발할 수 있도록 하였다. 마리온의 삶의 순간들을 포착한 사진들, 작은 소품들, 침대, 방안을 비추는 작은 등들, 거울 그리고 음반 등등 방안의 모든 존재가 현현하는데 빛의 예술이 기여한 것이다. 그 공간은 닉 케이브 Nick Cave의 록음악 30)의 생생한 소리성으로 채워져 있다. 이는 천사들의 대표적 공간으로 제시되고 있는 도서관이 마치 대성당처럼 성가코러스로 가득 찼던 것과 대비된다. 이렇게 마리온의 공간과 그녀의 존재는 변화하는 생명으로 이루어진 물질성의 셰계를 대변한다.

    마리온의 곡예와 그녀의 세계에 영화는 포커스를 집중하고 있고, 천사 다미엘은 왜 이에 열광하는가. 이는 마리온의 공연에서 확인된다. 즉 하늘도 땅도 아닌 그 중간에서 곡예사 마리온이 위험천만한 공중그네를 타고 있다. 조금만 균형을 잃고 발을 잘못 딛는 순간 땅으로 떨어져 목이 부러져 부상을 당하거나 죽을 수도 있는 곡예는 인간들의 삶에 대한 메타포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서커스단은 공연기간이 끝나면 임시천막을 걷어 어디론가 떠난다. 게다가 마리온이 속한 알레칸 서커스단은 도산하여 곧 해체될 것이다. 이 영화의 아름다움의 정점으로 마련된 마리온의 곡예는 서커스단이 해체되기 전날 밤, 마지막 공연에서 이루어진다. 그것도 공연이 있기 전 마리온은 “불안. 죽음에 대한 공포”(98쪽)를 느낀다. 그런 그림자를 딛고 드디어 보름달이 뜬 날밤 싸이렌으로 분한 마리온이 벌이는 약 4분간의 곡예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마리온으로 분한 배우 도마틴 Dommartin의 팽팽하게 균형 잡힌 몸은 현상학적 몸 그 자체이다. 다미엘의 시선을 대변하는 카메라는 그 몸을 갈망하며 올려다본다.

    공연이 끝나고 밤이 지나면 서커스단은 흩어질 것이고 마리온은 더 이상 곡예사가 아니며, 현현하는 사물들로 채워져 있는 마리온의 방도 해체될 것이다. 그러한 있음과 없음의 경계에서 마리온은 예술가의 꿈과 사랑에 대한 열망을 간절히 드러낸다. 갈망이란 결핍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그녀는 삶이 ‘고독’하고 ‘허무’하다고 한다.(44-45쪽) 마리온과 마리온의 방 그리고 그안의 사물들은 색(色)의 세계 즉 물질성의 세계를 집약적으로 형상화한다. 이는 곧 사라질, 다시는 반복될 수 없는 일회성의 세계, 생노병사의 고통 속에 변화의 과정에 위치한 인생을 은유한다. 아우라로 빛나는 마리온의 곡예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삶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운 순간으로 빛남을 역설적으로 형상화한다. 그러기에 고통도 위험도 없는 무한한 존재인 천사 다미엘이 자신의 영원성을 포기하고 인간의 삶을 선택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4.2. 천사와 인간의 사랑의 변증법: “나는 안다, 어떤 천사도 모르는 것을”

    다미엘이 지니고 있었던 인간이 되고자 하는 열망은 영화의 처음부터 드러나지만, 그의 육화에 결정적인 흡인력으로 작용하는 것은 마리온이라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가 인간의 삶을 시작하면서 맞이하는 첫 번째 스승도 바로 마리온이다. 이 영화에 대한 많은 평가 중에 천사 다미엘과 인간 마리온의 사랑이 지나치게 상투적이라는 비판이 주목된다.31)

    그러나 다미엘과 마리온의 사랑은 단순한 개인적인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영화 전체의 구조와 맥락에서 파악될 필요가 있다. 영화 전반의 특징은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각자의 이야기가 병렬적이고 독자적으로 진행되어 왔다는 점을 다시 환기해보자. 비행기에서 그림을 그리던 소녀의 이야기부터 아이들의 놀이에 끼지 못하고 홀로 떨어져 함께 하길 바라며 슬퍼하는 소년, 길거리를 지나가던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차안에서 길의 방향을 잃고 당황하는 노부인, 남편의 배신을 슬퍼하며 절규하는 아내, 매춘하는 거리의 소녀, 공동 빨래방에 앉아 집안 살림을 걱정하는 터키 부인, 지하철의 사람들... 그들 모두가 각자의 이야기가 있고, 카메라는 그 이야기들은 훑어가면서 단편적이고 불연속적으로 나열한다. 그 산발적이고 파편화된 이야기들은 두 개의 커다란 이야기에 의해 통합된다. 하나는 인류의 이야기꾼 호머의 이야기 즉 평화의 서사시를 쓰기 위한 이야기32)이고, 다른 하나는 다미엘과 마리온의 사랑이야기이다.

    영화 전반이 분단과 분열 그 안에 고립되어 고독하고 불안하고 허무한 인간들이 부유하는 천사의 시선으로 묘사되었다면, 그 인간들을 대표한 하나의 인간이 마리온이다. 인간의 삶의 군상들이 병렬적으로 진행되다, 마리온에게 오면 스포트라이트가 주어지면서 카메라가 긴 호흡으로 확대하여 면밀히 묘사하기 때문에 인간을 대표하는 존재로 관객에게 각인된다. 이는 마리온의 대사를 통해서도 이 둘의 만남이 ‘둘만’의 것 이상임이 강조된다.

    지금까지 영화가 포착해온 사람들이 바로 마리온이 이야기하는 광장에 모인 사람들에 다름 아니다. 같은 소망으로 광장 가득 모여 있는 이들을 대표해서 지금 다미엘과 마리온이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두 남녀의 이야기보다 더 큰 이야기는 없다고 마리온은 단정한다. 갈래갈래 갈라져 고독과 허무에 지쳐있는 이들에게 내릴 화합의 단비가 바로 다미엘과 마리온의 완전한 사랑의 결합으로 형상화된다.

    천사 다미엘이 인간 남자가 되어 인간을 대표하는 가이아인 마리온과 결합하는 이 사건을 <베를린의 하늘>는 개인적인 남녀의 사랑으로 한정시키지 않고 변증법적으로 한 차원 지양되는 것으로 승화시켜 형상화한다. 다미엘은 천사일 때에도 이미 인간적인 시각을 내포하고 있었고, 영원으로만 머무는 천사성에 대해 거리를 나타낸다. 헤겔의 변증법에 의하면, 자신 안의 모순을 발견하는 순간 자기인식이 시작되는 것이다.33) 마리온은 인간이지만 아이였을 때의 질문을 잊지 않고 있다. 그녀가 다미엘과 교감하는 꿈속에서 “아이가 아이였을때, 왜 나는 나이고, 네가 아닐까? 왜 나는 여기에 있고, 저기에는 없을까? 언제 시간이 시작되었고, 어디서 공간은 끝나는가? 태양 아래 삶은 단지 꿈이 아닐까?”(118-119쪽)라는 질문을 계속하고 있다. 그녀가 현상학적 존재로서 물질성의 세계를 대표하면서도 천사라 불리우며 지상과 하늘의 중간에 떠서 그네를 타는 모습은 그녀의 이중적 특성을 형상화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는 강렬한 붉은 색의 의상을 입고 귀에 흰색 날개 귀고리를 한 마리온의 모습을 매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붉은 빛은 생명의 원천 즉 에로스를 함축하고 흰색 날개의 귀고리는 신성성 즉 천사성을 내포한다. 두 가지의 모순된 특성이 다미엘과 마리온이라는 두 존재 모두의 동력을 작용하다가 이 둘의 만남에 의해 새로운 단계로 지양됨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그리하여 이 둘의 사랑의 결합은 보통의 인간적인 삶의 윤회 속에 합류하는 것이 아니라 광장에 모인 모든 이들의 꿈을 선취하여 보여주는 “새로운 조상”이 되도록 한다. 인간이면서 동시에 천사인 다미엘과 마리온이 앞으로 이어갈 사랑은 에로스를 내포한 아가페적인 것이다. 이 땅에 발 딛고 세계의 역사 속에서 어떤 인간도, 어떤 천사도 몰랐던 “불멸의 공동의 이미지”(167쪽)를 창출할 큰 사랑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지점이 바로 지금껏 영화가 산발적이고 병렬적으로 보여주었던 분단과 분열의 역사 그리고 그 속의 작은 영웅들의 이야기를 통합하는 완성점34)인 것이다.

    위의 긴 독백의 마지막 부분에 클로즈업된 마리온은 카메라를 직시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준비되었어요./ 이제 당신 차례에요./ 당신 손에 달려 있어요./지금 아니면 영원히 아니지요/”(162쪽)라고 마리온은 지금 당장 결단을 내릴 것을 다미엘에게 요청한다. 이는 허구의 내부적 소통구조 안에서는 다미엘을 향한 것이지만, 마리온이 카메라를 직시함으로써 내부적 소통구조를 넘어 외부적 소통구조로 향하기 때문에 현실에 속한 관객에게 결단을 요청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광장의 모든 이들 뿐 아니라 관객들과 함께 이어갈 커다란 사랑의 이야기를 향해 이 영화의 결말은 열려 있다.

       4.3. 평화와 통합의 매체, 영화

    마리온과 다미엘의 이야기와는 다른 각도에서 또 하나의 강조되는 큰 이야기는 호머를 중심에 놓은 매체의 역사이다. 도서관 장면에서 힘겹게 계단을 올라와 층계참의 의자에 앉아 안경을 쓰는데도 어렵게 여러 번 시도를 해야 하는 노인으로 호머가 등장한다. 그 자신의 대사 속에 “이제는 늙고 목소리도 쉬어버린” 존재로 자신을 규정한다. 벤더스는 <베를린의 하늘>에서 호머라는 인물을 통해 문학 장르의 운명을 규정하고 있다. 둥그렇게 모여 앉아 공동체를 이루며 문학을 향유했던 청자들은 이제 뿔뿔이 혼자 흩어져 앉아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여하지 않게 된 문학의 역사를 호머는 아쉬워한다. 호머는 폐허가 된 포츠담 광장에서 장난감 손풍금을 연주하면서 청자들은 떠나버리고 목소리를 잃어 이야기의 천사에서 멸시받고 조롱받는 황무지의 악사로 전락한 자신을 “가엾은 영원한 이야기꾼”이라 불러 달라고 한다. 아무런 힘이 없는 늙어버린 존재이지만 가슴 속에서는 여전히 이야기가 솟아오르는 호머는 지금까지 누구에게서도 완성되지 않은 “평화의 서사시”를 열망한다. 청자들이 떠나버려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이야기꾼이지만, 자신이 포기하면 인류가 유년시절을 잃어버리는 것이므로 포기할 수 없다고 한다. 벤더스는 이렇게 현대사회에서의 문학의 위치를 호머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독자가 없는 낡은 매체로서 문학을 규정하면서 그러나 이야기에 대한 열망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샘솟는 이율배반의 상황을 극복할 매체로서 영화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서사시가 전쟁의 서사시였다면, 앞으로 완성해야 할 것은 평화의 서사시임을 명시한다.

    그러한 호머의 열망을 영화예술가로서 벤더스는 이제 영화가 물려 받아야할 인류의 유산임을 <베를린의 하늘>에서 다각도로 드러내고 있다. 힘겹게 도서관 계단을 올라와 층계참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호머를 지켜보며 다미엘은 이층에서 아래로 내려가다 조우한다. 그런가 하면 호머의 가슴 속의 이야기는 카시엘이 수호천사로서 동행하며 전수받고 있다. 영화가 대부분 천사 다미엘과 카시엘의 시선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벤더스는 영화가 천사일 수 있다고 간주한다. 이에 대해서 짜하리츠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다미엘이 마리온에 의해 온전히 인간이 되어서 “불멸의 공동의 이미지”를 낳았다고 한 것은 그들이 만들어갈 미래의 사랑의 이미지뿐 아니라, 영화의 임무를 내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벤더스는 이 영화에서 샘솟는 이야기를 담아낼 젊은 매체로서의 영화, 아직 완성되지 않은 평화의 서사시를 이어 쓸 매체로서의 영화를 전제하고 있다.

    영화의 맨 마지막에 속편이 이어진다는 자막이 올라갈 때, “상선(上船)했다”는 호머의 목소리가 들린다. <베를린의 하늘>은 끝났지만, 이제 호머의 영혼의 울림을 담아 이어갈 또 다른 영화가 탄생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피터 포크가 영화배우로서 끊임없이 인간들을 포착해서 그려내는 작업은 벤더스가 카메라로 사람들을 하나하나 묘사해내는 것과 같은 작업이다. 피터 포크가 예찬하는 그림그리기는 영화 자체에 대한 예찬인 것이다. 영화의 처음과 끝에 다미엘의 목소리로 <아이의 노래> 시가 들려오고 소리 뿐 아니라 그의 손으로 시를 쓰고 있는 행위를 카메라로 포착함으로써 영화 안에서 문학의 문자성과 소리성 그리고 그림성이 통합될 수 있음을 강조하여 보여준다. 이는 또한 영화 자체가 시이며 또한 릴케가 예찬해 마지않는 시인의 역할을 영화가 할 수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피터 포크는 영화 속 허구적 인물이지만 동시에 그는 영화 배우 피터 포크라는 현실적 차원에 걸쳐 있는 인물이다. 내부적 소통과 외부적 소통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는 이 인물의 이중성은 허구적 차원에서 심화된다. 그는 인간이지만 전직 천사로서 다미엘의 육화를 촉진시키고, 그 과정에서 인간으로서의 삶이 얼마나 맛나는 일인지 관객에게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그는 인간이면서 천사인 것이며, 다미엘의 선배인 것이다. “현명하면서도 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지닌 존재가 천사”라면, 피터 포크라는 인물처럼 우리 주변에 다수가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영화는 일깨운다. 실제로 포크는 인간이 된 다미엘이 찾아왔을 때, 자신과 같은 전직 천사가 “아주 많음”(139쪽)을 명시한다. 그 뿐아니라 벤더스는 영화를 끝내면서 <베를린의 하늘>을 “모든 전직 천사들 특히 야스지로, 프랑소와, 안드레이에게 바친다”(170쪽)고 밝힘으로써 존경하는 오즈, 튀르포, 타르코프스키 등의 영화작가를 포함한 아름다운 인간들을 전직 천사로 호명하고 있다.

    이렇게 <베를린의 하늘>은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가 불멸의 공동의 이미지를 지닌 천사와 같은 매체임을 다각도로 드러낸다. 벤더스는 그러한 매체를 통해 관객이 자신 안에 이미 내포하고 있는 ‘아직도 떨리는 있는 창’을 발견함으로써 자신이 피터 포크나 다미엘과 같은 전직 천사임을 일깨우려 한다.

    29)vgl. Wenders, Die Logik der Bilder, s.136, <베를린의 하늘> 감독판.  30)마리온은 이 장면에서 케이브의 노래 를 따라 부른다. “And no one saw the carny go, the weeks flew by 'til they moved on the show, leaving his caravan beheind...." 시나리오 46-47쪽. 나중에 호텔 Esplanade의 Nick Cave와 Bad Seeds의 콘서트에서 인간이 된 다미엘과 마리온이 만날 때에도 이 노래가 연주된다.  31)정미경, 「대립과 공존의 미학. 포스트모더니즘 시각에서 본 <베를린 천사의 시>」, 『독일문학』 97집, 한국독어독문학회, 2006, 212-214쪽 참조. 이 논문에서 정미경은 기존연구를 인용하여 종합하면서 다미엘과 마리온의 사랑의 서사가 이 작품의 문제의식을 진지하지 않게 만드는 요소라고 지적하고 있다.  32)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겠다.  33)Hegel.G.W.F, Phänomenologie des Geistes, 115f.  34)폴커 클로츠가 개방희곡의 특성을 제시하면서 산발적으로 제시되는 다양한 극적 행동들을 통합하는 장치로서 중심적 자아, 은유적 고리 그리고 완성점을 제시하였다. 그 중에서 <베를린의 하늘>에서는 은유적 고리로서 <아이의 노래>라는 시가 활용되었고, 다미엘과 마리온의 에로스를 포함하며 아가페적 차원으로 승화되는 사랑의 결합이 완성점으로 작용한다. 클로츠, 폴커, 송윤엽 역, 『현대희곡론. 방희곡과 폐쇄희곡』, 탑 출판사, 1981, 107-119쪽 참조.  35)Zschachlitz,Ralf, “Angelus Novus-Angelus Postnovus: Der Himmel über Berlin”, Weimarer Beiträge 40(1994), s.36f.

    5. 맺음말

    빔 벤더스는 페터 한트케와 스탭들과의 긴밀한 협업을 통해 <베를린의 하늘>을 형성하면서 천사의 시각으로 분단의 역사와 그 안의 분열되어 고립되어 있는 인간들을 치열하게 묘사해낸다. 천사의 시각은 일단 역사와 일상을 거리를 가지고 포괄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외부의 시선을 창출한다. 천사의 시선은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현재에 잠재되어 있는 역사적 이미지를 살려내어 시간의 깊이를 창출할 수 있으며 또한 날라 다니거나 공간적 제한들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자유로움을 확보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종래의 영상이미지로는 형상화하기 어려운 인간의 내면의 소리들도 들을 수 있도록 하여, 무소부재하며 전지전능한 신의 시점을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외부적이고 전능한 시점을 지닌 천사 다미엘이 인간에게 공감하고 결국 인간이 됨으로써, 유한하고 고통스러운 인간의 삶을 찬란한 순간으로 바라보게 한다. 또한 전쟁과 분단, 분열과 고통 그리고 허무로 가득 찬 역사적 삶의 경계들을 넘으려면, 자신 안에 내포된 천사를 발견하고 새로운 사랑의 조상이 되는 일에 동참하는 것임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그러한 ‘선교’는 영화라는 통합매체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고 그리하여 누구도 완성하지 못한 평화의 서사시를 완성할 매체로서 벤더스는 영화를 설정하고 있다. 이는 영화 작가로서 영화에 보내는 무한한 긍정이기도 하다.

    베를린 장벽을 투명인간처럼 통과하던 다미엘과 카시엘의 퍼포먼스는 1987년 당시 분단국가에 살아가던 독일 사람들의 경계넘기의 꿈을 영화라는 축제적 공간에서 실현해 본 것이었다. 영화가 상영된 2년 후인 1989년에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어 그들의 퍼포먼스는 역사적 현실로 실현 된다. 이는 한 예술가의 꿈에 여러 사람이 공감함으로써 사회적 꿈으로 확장될 때 현실적 동력의 일부로 작용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물론 독일의 통일이 세계정세에서부터 오랜 정치적 노력, 경제적 차원의 접근 등 복합적인 상황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은 자명하다. 그렇지만 예술로 사회적 열망을 통합하여 공동의 이미지를 창출할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아직도 분단된 국가에 살고 있는 연구자에게 이 영화는 실현되지 않는 꿈을 꾸게 하는 축제의 공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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