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뮬라크르로서의 이미지에서 가상의 디지털 이미지로

De l’image comme simulacre a l’image numerique du virt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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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La technologie numérique transforme la méthode de la compréhension du monde. Pour Baudrillard, l’image numérique produite par la technologie numérique n’est pas le simulacre. Elle n’est pas ce qu’elle était, mais elle est l’image virtuelle. Baudrillard a défini l’époque postmoderne comme celle de simulacres et simulation. Il a aussi anticipé ‘la fin de l’âge d’or du simulacre’.

    L’image comme simulacre a exercé sa force et sa fascination, alors même qu’il n’est encore que peu question du règne du numérique et du virtuel. Mais comment comprendre le destin actuel de l’image dans le passage inexorable de l’analogique au numérique?

    Pour Baudrillard, le virtuel, ce sont les images numériques, le digital, les multimédias, l’internet et les manupulations génétiques, bref toutes les techniques qui permettent de rendre le monde numérisable, codable. Le virtuel, c’est l’operationnel, la mise en réseau de toutes les fonctions. Selon l’expression de Baudrillard, “on peut faire toutes les opérations qu’on veut, on est dans un monde opérationnel.” C’est la raison qu’on peut rendre toutes les images possibles. C’est la raison qu’on peut numériser toutes les images.

    Surtout dans ces derniers temps de progrès technologique ultrarapide, il est né l’idée absurde de libérer le réel par l’image, et de libérer l’image par le numérique. Mais c’est un grand choc au point de vue de l’acte photographique.

    Quand le digital l’emporte sur la forme, quand le logiciel l’emporte sur le regard, peut-on encore parler de photographie? Avec ce virage du numérique, c’est toute la photographie analogique qui est sacrifiée. Donc, on peut confondre la photo avec une prolifération des images, on s’éloignera du secret et du plaisir de la photo.

    On prétend, à travers le numérique, ouvrir la voie à l’image intégrale, libre de toute contrainte venue des confins du réel. Plutôt que cette prétention, il sera nécessaire de former une nouvelle vision du monde par l’image numérique.

  • KEYWORD

    Image comme simulacre , Image numerique , Virtuel , Analogique , Numerique , Technologie , Photographie

  • 1. 서론

    들뢰즈는 현대를 ‘시뮬라크르의 시대’라 정의하였고, 보드리야르는 자신이 탈근대라 부르는 현대를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의 시대’라 명명하였다. 들뢰즈와 보드리야르는 이 시뮬라크르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들뢰즈와 보드리야르에게 시뮬라크르는 전통적인 대상 개념을 대체한다. 들뢰즈가 시뮬라크르를 유사성이 없는 이미지, 동일성보다는 차이의 모델에 근거한 이미지로서 고유한 자율성을 지니는 것으로 파악한 반면,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를 어떤 실재와도 아무런 관계를 갖지 않고 자율적 독립성을 획득하는 이미지로 이해했다.

    들뢰즈는 자신의 철학 속에서 시뮬라크르를 핵심적인 개념으로 삼고 그것을 끝까지 사유했을까? 그의 사유는 ‘이미지의 사유’에서 ‘이미지 없는 사유’로 발전하면서 어떤 형상이나 형식도 전제하지 않는 사유로 나아간 듯하다. 실제로 『천 개의 고원』에 이르면 들뢰즈에게 시뮬라크르는 점점 더 까마득하게 잊혀져버린다.

    이런 들뢰즈와는 달리,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 이론으로 탈근대의 세계에 많은 반향과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시뮬라크르 개념에 접근했던 현대 사상가들 중에서 그의 시뮬라크르는 지배적인 개념으로 자리매김했다.

    지금까지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시뮬라크르의 지배력, 시뮬라시옹 현상을 중심으로 논의되어 온 반면, ‘시뮬라크르로서의 이미지’를 논의하는 경우는 영화의 분야를 제외하면 비교적 드물었다. 보드리야르 자신은 때때로 이미지에 관한 글들을 발표해오면서 최근의 글에서 ‘이미지의 운명’을 언급한 바 있다. 이미지 세상이 엄청나게 바뀌었다는 것이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이행을 완료함으로써 이미지를 다른 차원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통해 이미지를 실어나르면 되고, 가상의 이미지(디지털 이미지)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여전히 시뮬라크르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보드리야르는 우리가 이미 ‘시뮬라크르의 황금시대의 종말’에 접어들었으며, 가상이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1) 오늘날 우리의 물질적 환경은 디지털, 디지털 이미지, 멀티미디어, 인터넷, 유전자조작 등에 의해 산출되는 가상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현실을 구성하는 가상들의 거미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가상의 찬란한 색은 디지털 기술로 우리의 현실을 표백시켜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디지털 기술이 만들어놓는 가상의 디지털 이미지가 일상적 삶에 깊숙이 침투하여 현실을 사라지게 하거나 다른 현실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상과 디지털의 지배가 아직 문제시되지 않을 때, 말하자면 시뮬라크르의 지배가 여전히 유효할 때 시뮬라크르로서의 이미지는 어떤 양상을 띠고 실재나 현실과 어떤 관계를 나타냈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보드리야르가 시뮬라크르로서의 이미지에서 가상의 디지털 이미지로 점차 전환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실재와 이미지의 관계를 어떻게 영화와 텔레비전의 이미지와 관련지어 설명하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는 실재를 초과실재로, 현실을 초과현실로 만들면서 실재나 현실의 모델이 되는 시뮬라크르로서의 이미지를 해석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영화라는 매체는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실재를 구성하면서 시뮬라크르로서의 이미지를 생산하는 반면, 보드리야르 자신이 이미지와 실재와 관계있는 매체들 속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텔레비전은 더이상 이미지가 아니며, 하나의 스크린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텔레비전의 이미지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견해가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의 견해와 충돌하는 점을 논의할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루게 될 핵심적인 논의, 즉 시뮬라크르로서의 이미지에서 가상의 디지털 이미지로의 전환에 대한 논의는 들뢰즈, 플루서, 보드리야르 같은 현대 철학자나 사상가들이 어떻게 가상을 정의하고 사유하는지를 비교 검토하는 것으로 시작될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플루서는 왜 디지털 가상을 대안적 세계로 간주하는지, 보드리야르는 왜 아날로그 이미지에서 디지털 이미지로의 이행을 완료한 후 발생하는 ‘현실의 사라짐’을 이미지가 처해 있는 현재의 운명에 연결하는지를 분석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보드리야르가 디지털 세상의 분석 대상으로 삼은 디지털 사진에서 보여지는 디지털 이미지는 과연 세계를 보는 새로운 관점이 될 수 있는지, 그것이 현실의 해방과 이미지의 해방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점검해 볼 것이다.

    1)Jean Baudrillard, Le Pacte de lucidité ou l’intelligence du Mal, Galilée, 2004, pp. 58-59(약호 PLIM).

    2. 시뮬라크르로서의 이미지

    디지털과 가상의 지배가 아직 문제시되지 않을 때, 보드리야르에게 ‘사물’에서 ‘기호로서의 사물’로의 이행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는 교환가치와 사용가치에서 기호가치로의 이행처럼 사물들이 기호와 코드들과 교환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사물들이 현실성을 상실한다 할지라도, 기호로서의 사물들은 여전히 지시대상의 현실과 어떤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물들은 점점 더 추상적인 코드에 따르는 기호들이기 때문이며, 존재론적으로 재현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비의 거대한 기획으로 움직이는 소비의 사회는 사물들의 과잉과 증식을 초래하게 되고 이미지로 사물들을 삼키기에 이른다. 이미지는 사물들에게 치명적인 것이 된다. 말하자면 이미지는 ‘대량파괴의 무기’이다. 이미지의 파괴력은 시뮬라크르를 만들어내고 실재와 모델, 실재와 시뮬라크르 사이의 혼동을 현실화한다. 이미지들은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으며, 스크린에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대상들조차 재현하지 않는다. 이로써 ‘기호로서의 사물’에서 ‘시뮬라크르’로, ‘재현’에서 ‘시뮬라시옹’으로 이행이 가능해진다.

    요컨대 시뮬라크르로 전환되는 것은 바로 이미지인데, 그것은 광고의 이미지, 영화의 이미지, 텔레비전의 이미지, 컴퓨터의 이미지 등이다. 이들 이미지와 관련하여, 이미지와 실재의 관계, 본질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현실의 영역과 이미지의 영역 사이의 혼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선 이미지의 흡수, 이미지를 둘러싼 혼동, 이미지의 유혹 등에 관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이미지의 전략인데, 이 전략에 의해 이미지들이 항상 현실 세계와 실제 대상들과 관계되는 것처럼 보이며, 또한 논리적으로 그것들 이전의 무엇인가를 재현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다.2) ‘시뮬라크르로서의 이미지들’은 실재와 그 복제의 인과 관계를 전도시킬 정도로 실재를 능가한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벤야민은 이미 ‘실재의 복제’의 가능성을 통한 (현실이나 의미의) 생산 영역에서의 이 근대적 혁명을 예리하게 지적했다. 여기서 벤야민이 말하는 ‘실재의 복제’는 곧 보드리야르가 기술하는 (재현과는 정반대인) ‘시뮬라크르’를 가리킨다.

    보드리야르의 작업에서 이미지를 이해하는 열쇠는 이미지가 재현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이미지는 현실이나 실재를 재현하지 않는다. 이렇게 재현의 차원에서 벗어난 이미지에 걸린 문제는 이미지의 살해하는 힘, 즉 자신의 모델을 살해함으로써 실재를 살해하는 이미지의 힘이라고 보드리야르는 말한다.3) 모델과 실재의 혼동을 현실화하는 보드리야르의 작업은 모델을 통한 실재의 흡수에 이르는 이러한 혼합의 예증으로 넘쳐난다. 가령 광고의 이미지가 사회적인 것을 사회적인 것의 시뮬라시옹 속으로 끌어들이는 실재와 모델의, 사물과 기호의 일반화된 교환의 영역에서 작용한다면, 영화의 이미지는 줌(zoom)·이동·특수효과의 수단으로 현실과 가상 혹은 실재와 가상을 구별할 수 없게 만든다.

       2-1. 영화의 이미지

    영화의 이미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보드리야르는 코폴라(Coppola)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 Apocalypse Now」를 예로 든다. 이는 현실이 영화 자체의 제작이자 표현이며, 적어도 이 같은 영화가 어떻게 시뮬라크르가 실재보다 우월하고 실재를 앞서며 실재를 구성하는지 보여 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코폴라는 영화 이미지의 힘을 시험하는 것, 특수효과의 엄청난 기계류가 되어버린 영화의 영향을 시험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 이 때 시뮬라크르로서의 이미지는 실재를 초과실재로 만들고 현실을 초과현실로 만들며 실재나 현실의 모델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그래도 끝나지 않는 전쟁의 연장이자 그 극치이다. “전쟁은 영화가 되었고, 영화는 전쟁이 된다.”4) 전쟁과 영화는 ‘과잉의 기술’을 통한 양자의 공통의 표현에 의해 서로 결합된다.

    일반적으로 이미지는 실재의 반영이나 재현 혹은 실재의 복제로서의 그 자체의 역할 속에서도 우리의 관심을 끌긴 하지만, 이미지가 현실이나 실재를 초과현실이나 초과실재로 만들고 현실이나 실재의 모델을 만들 때도, 이미지가 현실이나 실재를 왜곡하기 위해 현실이나 실재에 따를 때도, 차라리 이미지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현실이나 실재를 점유할 때도, 이미지가 현실을 예상할 때도 우리에게 흥미로운 것이다.

    이미지의 이런 역할과 관련하여 열거된 예들 중에서 ‘이미지에 의한 현실의 예상’에 우리의 눈길을 돌려보자. 제임스 브리지스(James Bridges)의 영화 「차이나 신드롬 China Syndrome」이 이에 해당된다. 핵재난에 관한 이 영화가 개봉으로부터 불과 몇 주 후 ‘실제의’ 핵발전소 사건이 해리스버그에서 발생했다. 이 영화는, 텔레비전화한 사건이 가능성도 없어 보이고 어떤 점에서는 상상적으로만 남아 있는 핵사건보다 우위에 있음을, 말하자면 시뮬라크르로서의 이미지가 어떤 추정되는 현실이나 실재보다 우위에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이 영화에서 핵재난의 시뮬라크르를 생산하기 위해 실재는 영화의 이미지에 따라 정돈된다. 영화의 이미지에 따라 「차이나 신드롬」속에서 실제 사건을 보고 해리스버그에서 그 시뮬라크르를 보기 위해서는 우리의 논리를 뒤엎을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영화에서 핵의 실재가 텔레비전의 효과로부터 비롯되는 것과, 해리스버그가 현실 속에서 「차이나 신드롬」이라는 영화의 효과에서 비롯되는 것은 동일한 논리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5)

    하지만 「차이나 신드롬」은 해리스버그의 본래적인 원형이나 모델이 아니다. 해리스버그는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세 번째 질서의 시뮬라크르이다. 그러니까 어딘가에 시뮬라크르의 연쇄반응이 있고, 이 연쇄반응은 오늘날 우리를 현혹한 모든 폭발들보다도 훨씬 더 치명적이다. 물론 이 연쇄반응은 인과관계의 논리에 의한 것이 아니고, 실재를 시뮬라크르에 연결하는 전염과 인접관계에 의한 것이다. 이 때 실재와 이미지의 관계 속에서 이미지는 어떤 논리를 갖는가? 이미지는 그 자체의 내재적이고 덧없는 논리, 선과 악 혹은 진실과 허위를 넘어선 비도덕적 논리, 메시지가 매체의 영역에서 사라지는 의미의 내파(implosion)의 논리를 갖는 것처럼 보인다.6) 이미지는 더 이상 실재를 반영하고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위협하는 시뮬라크르이다.

       2-2. 텔레비전의 이미지

    말이 나온 김에, 보드리야르가 이미지와 관계있는 매체들 속에 텔레비전을 포함시키지 않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영화가 강렬한 상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여전히 이미지의 위상을 갖는 반면, 텔레비전은 그런 이미지가 출현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매혹하는 스크린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텔레비전의 ‘차가운 빛’7)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 텔레비전의 차가운 빛은 우리의 상상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이 빛이 더 이상 어떠한 상상적인 것도 운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더 이상 이미지가 아니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텔레비전의 이미지는 강렬한 상상을 운반하는 영화에 대립된다. 영화는 텔레비전에 의해 점점 더 오염되긴 하지만, 영화는 여전히 이미지이다. 즉 영화는 스크린과 시각적 형태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신화이다. 복제, 환상, 거울, 꿈 등의 성격을 아직 지니고 있는 것이다. 텔레비전의 이미지에는 영화의 이러한 모든 것이 전혀 없다. 보드리야르의 말대로 그것은 아무것도 환기하지 않고 매혹하며, 자화효과(effet magnétique)를 갖는다. 텔레비전의 이미지는 하나의 스크린일 뿐이다. 그것조차도 아니면 우리의 머릿속에 즉각적으로 축소된 단말장치(terminal) 같은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가 스크린이고, 텔레비전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텔레비전은 자신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드러낸다. 그것은 다른 세계의 이미지로서 근본적으로는 아무에게도 말 걸지 않으며, 자신의 이미지를 구별없이 전달하고, 자신의 메시지에조차 무관심하다.8) 어떻게 보면 그것은 우리 머리의 모든 신경회로망(neurone)을 트랜지스터로 만들어서 그 속을 마치 자화된 테이프(bande magnétique)를 통과하듯이 통과한다. 그것은 테이프이지 영화의 이미지 같은 이미지가 아니다.9)

    그러면 보드리야르의 지적처럼 텔레비전은 실제로 상상을 운반하지 못하는 매체이며 이미지가 아닌 것일까? 보드리야르의 이런 견해에 대해,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는 전혀 다른 시각을 드러내 보인다. “텔레비전 코드는 상상적임과 동시에 구상적인 지각을 허용한다. 이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상황이다. 곧, 이 상황에서는 모든 과정들이 ‘상상될 수 있고’ 모든 상상들이 ‘과정화될 수 있다’.”10) 플루서는 텔레비전에서 ‘상상하고 구상하는’ 인지 형식의 가능성이 열리고, 그것이 미래에 완성되고 정교하게 다듬어질 수 있다고 전망한다. 게다가 그는 텔레비전은 거의 배타적으로 일종의 영화로 다루어질 수 있다고 기술한다. 말하자면 재현 형식이 아니라 상상 형식으로 다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존재론적으로 실재의 재현과 상상은 당연히 분리될 수 없다. 이미지는 실재를 인지하는 방법이고, 이미지는 실재로서 인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재의 차원들을 구별하고, 실재 그 자체와 이미지를 구별하는 것은 존재론적인 문제이다. 따라서 텔레비전의 ‘차가운’ 빛, 즉 텔레비전의 이미지가 더 이상 이미지가 아니라는 보드리야르의 역설은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의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이론의 여지가 있다고 여겨진다.

    이 지점에서 보드리야르와 플루서의 텔레비전 이미지에 대한 사유를 정리해 보면, 보드리야르는 실재와 이미지의 변증법적 관계를 고려하는 반면, 플루서는 실재와 이미지의 존재론적 관계를 성찰하는 듯하다.

    하지만 가상과 디지털의 지배가 거의 문제되지 않는 전제 아래 이미지 일반(매체 이미지, 기술적 이미지)과 관련하여 이미지의 비밀은 어디서 찾아내야 할까? 보드리야르의 견해로는, 이미지의 비밀은 실재와 이미지의 구별이나 이미지의 재현적 가치 속에서 찾아서는 안 되며, 그와 반대로 이미지를 실재 속으로 끼워넣는 것, 이미지와 실재를 단락시키는 것, 결국 이미지와 실재의 내파 속에서 찾아내야 한다. 더 이상 재현의 여지가 없는 실재와 이미지를 구별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와 일상적 삶, 스크린과 일상적 삶 사이의 이러한 공모는 가장 흔한 방식으로 경험될 수 있다. 특히 현대의 대도시들은 이미지들의 끊임없는 스크린을 연출한다. 스크린을 통한 이미지의 매혹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이해되는 꿈이나 상상의 매혹이 아니다. 물론 영화, 회화, 연극이나 건축의 이미지들과 같은 다른 이미지들은 꿈꾸게 하거나 상상하게 할 수 있다. 실제로 현대의 매체 이미지들에 특유한 것 이상의 무언가가 존재한다. 만약 이미지들이 우리를 그토록 매혹한다면, 이미지들이 의미와 재현을 생산하는 장소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그것들이 의미와 재현을 사라지게 하는 장소, 우리가 현실의 어떤 판단은 별도로 하고 사로잡혀 있는 장소, 실재와 현실원칙을 부정하는 숙명적 전략의 장소이기 때문이다.11)

    따라서 현대의 일상적 삶에 침투하여 확산되는 이미지들, 말하자면 무한히 증식하는 시뮬라크르로서의 이미지들은 실재를 끊임없이 위협한다. 이로써 이러한 이미지들은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고 저항할 수 없는 연쇄반응과 전염과 인접관계를 통해 무한히 증식하여 어떠한 초월성도 궁극 목적성도 지니지 않게 되는데, 이들 이미지들에 의해 현대 세계는 실제로 무한해지고 오히려 지수함수적이 되었다. 이는 곧 현대 세계가 가상과 디지털의 세계로 전환되었거나 전환되고 있음을 알리는데, 현대 세계가 가상의 디지털 이미지에 의해 강조될 뿐인 강렬한 매혹에 사로잡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2)Jean Baudrillard, The evil demon of Images, Power Institute of Fine Arts, University of Sydney, Series No. 3, 1987, p. 13(약호 EDI ).  3)Jean Baudrillard, Simulacres et Simulation, Galilée, 1981, p. 16(약호 SS).  4)같은 책, p. 89.  5)같은 책, p. 84.  6)EDI , p. 23.  7)텔레비전의 본질적인 부분은 스크린 뒤에 있는 음극관이다. 텔레비전의 본질은 새로운 종류의 창이다. 이 때 무엇보다도 음극관은 자체에서 발산하는 빛을 통해 창문과 구별된다. 음극관의 빛은 단 한 번도 간접적으로 태양에서 유래하지 않은 지구상의 얼마 안 되는 빛들 중의 하나다. 따라서 이 빛은 하나의 다른, 곧 ‘차가운’ 특성을 지니고 있다(빌렘 플루서, 『피상성 예찬』, 김성재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04, p. 197 참조).  8)Jean Baudrillard, Amérique, Grasset, 1986, p. 100.  9)SS, p. 80 참조.  10)빌렘 플루서, 같은 책, p. 200.  11)EDI , p. 29.

    3. 가상의 디지털 이미지

    니콘(Nikon)이 디지털 리플렉스 카메라를 출시한 것은 1999년의 일이었다. 이로써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이행은 디지털 사진의 출현과 함께 현대의 일상적 삶과 문화에 획기적인 변화를 초래한다. 이미지가 가상과 디지털의 현실 속으로 빨려들어가면서, 이미지의 운명은 바뀌게 되었다. 2001년에 자신이 출간한 『타자라는 파편에 대하여 D’un fragment l’autre』에서, 보드리야르는 이 가상과 디지털의 세계를 ‘완전한 현실 réalité intégrale’이라 부른다. 이 완전한 현실은 전혀 새로운 세계이다.

    그러면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완전한 현실’의 개념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 보드리야르는 현실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현실효과만이 있다고 말한다.12) 그의 상상력 속에서 우리가 어떤 원칙을 만들었던 현실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현실을 지시대상이나 가치로 되살리고자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현실원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로써 현실의 사라짐 뒤에서 목격되는 것은 바로 가상현실, ‘완전한 현실’의 잠재적 상승이다. 보드리야르는 “끝없는 조작적 계획으로 세계에 범죄를 저지르는 것, 즉 모든 것이 현실적이 되는 것, 모든 것이 가시적이고 투명하게 되는 것, 모든 것이 해방되는 것, 모든 것이 실현되고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을 완전한 현실”13)이라고 정의한다.

    보드리야르에게 이 완전한 현실은 기술적으로 실현된다. 말하자면 원칙과 개념으로서의 현실이 현실의 기술적 실현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현실의 과잉으로 인해 사람들은 더 이상 현실을 믿지 않는다. 현실과 현실세계가 기술적 포화상태에 이르며, 가능성이 넘쳐나고 욕망의 실현이 넘쳐난다. 현실의 생산이 기계적인 것이 되어 버린 이상 어떻게 현실을 믿어야 하는가?

    현실은 현실의 과잉으로 마비된다. 이로써 온갖 형태의 현실의 과잉은 견딜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면 현실의 과잉으로 현실은 사라질 수밖에 없는가? 아니면 현실은 존재하는가? 보드리야르는 이를 현재의 우리 문화의 중요한 주제로 본다.

    보드리야르는 최근의 책들에서 현실과 현실세계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현실’은 속임수이다. 확인할 수 없다면, 세계는 근본적인 환상이다.”14) “우리 시대의 진짜 속임수는 이러한 맹목적 집착, 즉 ‘현실’과 현실원칙의 이러한 이스테레지(hysteresie) 속에 있다.”15) “사람들이 현실이 사라졌다고 말할 때, 이는 현실이 물질적으로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이 형이상학적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16) 그렇다면 현실은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인가?

       3-1. 가상의 사유

    철학사의 전통은 현실을 가상(virtuel)으로 간주한다. 플라톤은 ‘현실이 감각에 비친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참된 실재는 이데아의 세계이며, 현상계의 현실은 이데아의 세계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관념론자인 플라톤처럼 유물론자인 데모크리토스도 현실을 가상으로 보았다. 현실은 단순히 ‘감각에 비친 이미지’라는 것이다. 위대한 철학자들의 사유에 따라 현실도 거짓이라면, 플루서의 도발적 물음대로 이 세계에서 “속이지 않는 것도 있는가? 왜 가상은 원래 속이는 것인가?”17)

    현실도 가상도 ‘거짓’이거나 ‘속이는 것’이라면, 그것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실제로 가상이라는 말은 긴 역사를 가진다. 플라톤에게 가상은 실재와 비실재의 관계 속에서 비실재(irréel)로 간주되었다. 스콜라 철학에서는 가상은 실행 상태가 아니라 잠재된 힘의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현대에 이르러 가상은 실재적(réel)이 되거나 현실적(actuel)이 되는 것, 즉 잠재적인 것(potentiel)을 나타내었다. 니체는 가상을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관계 속에서 사유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들뢰즈의 철학이다. 그의 사유는 잠재적인 것(virtuel)과 현실적인 것(actuel)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물론 이 관계 사이에는 현실화(actualisation)가 작용한다. 들뢰즈에게 잠재적인 것은 실재적인 것에 대립하지 않는다. 다만 현실적인 것에 대립할 뿐이다. 잠재적인 것은 그 자체로 어떤 충만한 실재성을 지니며, 잠재적인 것의 절차는 현실화이다.18) 말하자면 잠재적인 것은 현실화를 통해 현실적인 것이 된다.

    들뢰즈가 말하는 ‘잠재적인 것이 지니는 실재성’과 ‘현실화’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잠재적인 것이 지니는 실재성’은 “성취해야 할 어떤 과제의 실재성이고, 이는 마치 해결해야 할 어떤 문제의 실재성과 같다.”19) 여기서 들뢰즈의 ‘잠재적인 것’, 즉 ‘가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허위적이고 허망한 것과는 거의 관계가 없으며, 실재의 반대 개념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그것은 “풍요롭고 강인한 존재 방식이며, 창조 과정을 확장하고 미래를 열어주는”20) 것이다.

    그리고 들뢰즈에게 잠재적인 것의 절차는 현실화인데, 이 현실화는 어떤 문제의 해결책으로 보인다. 이때의 해결책이란 문제의 형성 과정 속에 미리 포함되지 않았던 것이다. “현실화는 창조, 즉 힘과 목적성의 역동적인 구성으로부터 어떤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21) 이러한 과정에서 가상을 키워주는 진정한 생성 같은 것들이 발생한다.

    들뢰즈의 이런 사유와 관련하여 플루서는 가상을 어떻게 이해할까? 그에게 가상과 관계있는 것은 실재가 아니라 현실적인 것(actuel)이다. 플루서에게서 가상은 아직 현실화하지 않은 것, 즉 잠재적인 것으로 정의된다. 그에게 중요한 문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대안적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대안적 세계는 앞으로 도래할 미래에 있는 가상으로서 현실화를 통해 창조될 수 있다. 플루서는 이 현실화를 기획 projekt으로서 인간의 능동적 활동으로 파악하고, 테크놀로지를 통해 이 기획을 실현하려고 한다.22)

    이들 철학자나 사상가들과는 달리, 보드리야르는 어떻게 가상을 사유할까? 질 리포베츠키(Gilles Lipovetsky)는 ‘공허의 시대’를 수반하는 현실의 사라짐에 빗대어 “우리는 가상의 동굴에 갇힐 것이다”23)라고 말한다. 보드리야르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통해 가상(virtuel)의 출현은 현실의 사라짐을 나타낸다고 지적한다. 현실이 자신의 과잉과 증대로 마비되면, 현실은 온갖 형태의 가상을 허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가상(잠재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actuel)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는 진부한 철학적 의미로부터 벗어난다.

    이제 보드리야르에게 가상은 현실을 대신하는 것이며, 세계의 결정적인 현실을 통해 세계를 완성하는 동시에 해체함에 따라 현실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이 된다.24) 가상은 잠재적인 현실이 아니다. “궤도의, 그리고 탈 궤도의 가상은 더 이상 현실 세계와 일치할 수 없다. 원형을 흡수한 후, 그것은 결정불가능한 세계를 만들어낸다.”25) 가상현실은 완전히 등질화되고 디지털화되고 조작화될 수 있는 것이다. 가상현실은 비현실적이 아니다. 그것은 초과현실(hyperrealite)보다 더 현실적이다. 말하자면 “가상현실은 매우 완전하기 때문에 우리가 시뮬라크르로서 정당화했던 것보다 더 현실적이다.”26)

    따라서 보드리야르의 입장에서 가상은 기호나 이미지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가상은 기호나 이미지를 살해하기 때문에 더 이상 시뮬라시옹이 아니다. “만약 시뮬라시옹의 단계가 실제로 실재를 살해하는 단계라면, 가상은 기호나 이미지를 살해하는 단계이다.”27) 가상의 영역에서는 아무것도 재현될 수 없다. 이로써 가상은 실재와 재현의 변증법을 끝내는 치명적 무기이다. 보드리야르에게 이제 디지털과 합성 이미지는 시뮬라크르가 아니다. 거기서 기호나 이미지는 더 이상 과거 그대로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기호나 이미지가 되는 ‘실재’가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드리야르의 말대로 가상은 실재를 청산하는 것이자 실재의 역설적인 완성처럼, 실재의 사라짐처럼 실재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이 된다.

    지금까지 논의된 철학자들의 ‘가상의 사유’는 가상과 현실의 변증법이나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대립으로부터 출발하는 어떤 사유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하지만 가상은 현실화를 통해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이 두 차원을 융합하거나 미확정 짓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가상은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것으로 여겨진다.28)

    철학자들의 가상의 사유는 그들 사이에 다소의 차이를 보여주긴 하지만, 가상은 넓은 의미에서 ‘창조’와 ‘해결책’이라는 개념을 수반하고 있다. 요약 정리해 보면, 가상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지니며 ‘창조 과정을 확장하고 미래를 열어주는’ 것(들뢰즈), 도래할 미래에 ‘창조’되어야 할 ‘대안적 세계’(플루서), 새로운 세계로서 ‘현실이나 실재에 대한 궁극적 해결책’(보드리야르)으로 규정되고 있다.

       3-2. 가상의 디지털 이미지

    플루서는 「디지털 가상」이라는 탁월한 글을 발표한 바 있다. 그가 말하는 ‘디지털 가상’은 스크린 위의 합성 이미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오늘날 모든 것이 디지털 가상이 될 수 있음을 암시했다. 이 디지털 가상이 만들어내는 디지털 이미지는 회화·사진·컴퓨터그래픽뿐만 아니라 뉴런·나노·게놈 같은 미립자의 조합과 합성을 통해 만들어진 것까지도 포함한다. 이러한 이미지는 가상이 현실로 되는 기술적 마술을 실현한다. 이런 점에서 플루서는 “가상은 현실만큼 실재적이고, 현실은 가상만큼 섬뜩해질 것”29)이라고 지적한다. 이로써 현실의 개념 자체도 달라진다. 왜냐하면 디지털 시대의 현실은 플루서의 말대로 주어지지 않고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에는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의해 모든 것이 실현된다. 가상은 기술에 힘입어 현실이 된다. 디지털 이미지는 기술을 통한 복제가 아니라 조작·생성 혹은 합성 이미지이다. 가령 디지털 사진은 현실의 복제가 아니다. 디지털 카메라·휴대폰·컴퓨터로 만들어진 “합성 이미지는 우리의 현실을 열등하게 재현한 것이 아니라 다른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것이다.”30)

    이렇듯 디지털 사진은 성격이 전혀 다른 새로운 매체이다. 디지털 사진에는 아날로그 사진의 피사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복제 이미지가 과거(우리의 현실)를 향한다면, 합성 이미지는 미래(다른 현실)를 향한다. 예전에 비해, 가상의 지위가 달라진 셈이다. 말하자면 가상은 미리 존재하는 현실을 자신의 원형이나 모델로 삼지 않는다. 플루서가 말하는 대안적 세계인 디지털 가상은 도래할 미래에 있는 것이다.31)

    디지털 가상, 디지털 이미지에 대한 플루서의 이런 사유와는 달리, 보드리야르는 가상의 디지털 이미지를 어떻게 사유할까? 보드리야르는 디지털 기술이 만들어내는 가상과 가상현실 뒤로 현실이 사라졌다고 본다. 그는 이 ‘현실의 사라짐’을 이미지가 처한 현재의 운명에 연결지어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미지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이동을 완료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디지털 이미지는 현실을 가상의, 디지털의, 컴퓨터화된, 수치적인 현실로 바꾸어놓고 있다. 결국 이미지의 운명은 이런 혁명의 일부분일 따름이다.

    보드리야르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이동을 보여주는 좋은 예로 디지털 사진을 든다. 디지털 사진은 음화(négatif)와 현실세계로부터 단숨에 해방되는 동시에 아날로그 사진에 고유한 피사체가 사라짐으로써 피사체를 디지털적으로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 행위의 유일한 순간도 끝나게 되는데, 이미지가 즉각적으로 사라지거나 재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32) 아날로그 사진은 세계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이다. 그것은 피사체에서 나온 빛과 시선에서 나온 빛의 수렴으로 간주되는 이미지이다. 아날로그 이미지는 이미지를 그 자체로서 그리고 현실세계와는 다른 환상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한다.

    반면 디지털 이미지는 완벽한 조작과 합성이 가능한 이미지이다. “디지털 이미지는 스크린에서 바로 생겨난 이미지로서, 스크린에서 생겨난 다른 모든 이미지들의 무리 속에 잠겨버린다. 디지털 이미지는 흐름의 계열에 속하고, 기기의 기계적인 조작 기능에 갇혀 있다.”33) 디지털 사진은 무엇이든 놀랍도록 간편하고 쉽게 이미지를 만들고 재생하고 합성할 수 있다.

    보드리야르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전환 이후 “이미지의 상상 자체, 그 근본적인 환상은 끝났다”34)고 말한다. 디지털 합성작용에서는 지시대상(재현)이 완전히 사라지고, 실제 대상이 이미지의 기술적 프로그램화 속에서 사라지면서 현실 자체가 가상현실로 즉각적으로 생성되기 때문이다. 디지털 이미지는 이제 순수한 인공물인 이미지를 사라지게 하고, 상상될 수 있는 현실을 사라지게 한다.

    디지털 사진은 그저 사진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그래픽이어서 현실을 기록하거나 재현하지 못한다. 이는 ‘원본적 매체(médium orginal)로서의 사진’을 불가피하게 사라지게 한다. 말하자면 디지털의 과잉과 쇄도로 인해 아날로그 이미지와 함께 사라진 것은 사진의 본질적 특성이다. 실제로 아날로그 이미지를 특징짓는 것은 아날로그 이미지 안에서 어떤 형태의 사라짐, 거리나 정지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반면에 디지털 이미지에서는 더 이상 음화도 없으며, 나중으로 연기된(différé) 것도 없다. 디지털 이미지에서는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예전과는 달리, 오늘날 이미지 제작의 기술적 조건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지를 제작하는 디지털 기술이 가상의 세계와 관계되며, 이 세계는 조작과 네트워크와 회로만을 허용한다는 것을 뜻한다. 마치 가상의 완벽한 음악이 컴퓨터 상에서 구성될 수 있는 기술적 조작과 회로 속에서 프로그램화되듯이, 디지털 이미지도 어떤 프로그램의 실현이자 결과일 뿐이고, 한 매체에서 다른 매체로 자동적으로 전달되면서 시각적 흐름속에서 이어진다. 이미 오래 전에 디지털화를 완료한 컴퓨터, 인터넷, 휴대폰, 텔레비전 스크린 등이 갖춘 네트워크의 자동성이 이제 이미지 제작의 자동성에 호응하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기술의 비물질성 이면에는, 즉 디지털과 스크린의 비물질성 이면에는 맥루언이 텔레비전과 매체의 이미지 속에서 이미 알아낸 바 있는 상호작용의 몰입이 숨어 있다. 몰입·내재성·즉각성은 디지털 가상이 지니는 특성들이다. 디지털 가상에는 더 이상 시선도, 거리도, 상상도, 환상도, 외재성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아닌 완전히 디지털 기술에 의해 실현된 세계에 접근한다.35)

    어떻게 보면 보드리야르의 말대로 “우리는 기술적 조작에 의해 단순해졌다. 이러한 단순화는, 우리가 디지털 기술의 조작에 이르게 되면, 어떤 미친 듯한 흐름을 탄다.”36)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디지털 기술의 조작에 의한 가상은 현실을 자동적으로 대체한다. 가상이 현실로 되는 기술적 마술을 실현하는 이런 상황에서, 이미지는 어떤 과정을 거치며 어떤 양상을 띠는가?

    이미지는 디지털 기술의 조작과 합성과 수정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미지의 이미지로 끝없이 이어지는 이미지의 재생 속에 갇힐 수 있는데, 현실세계는 이미지의 재생 없이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이미지의 연속이 게놈의 연속적 배열과 닮아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디지털 사진 속에서 우리는 자동적으로 한 이미지에서 다른 이미지로 이동하는 이미지의 연속성(sérialité)을 볼 수 있을까? 우리는 아날로그 사진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매체인 디지털 사진이 연속적으로 이미지들을 만들어내는 과정 속에서 완성된 형태의 연속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디지털 카메라를 통해 포착된 이미지들을 총체적으로 하나의 무한한 계열(série)로 간주할 수 있다. 아날로그 세계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모든 것, 즉 이미지의 조작·합성·수정·재생의 모든 가능성과 함께 말이다.37)

    이것은 마술적 환상과 이미지의 유일한 사건을 산출했던 결정적인 순간에 찍은 즉각적이고 생생한 사진의 종말이다. 아날로그 이미지는 찍는 순간 그 장면(피사체)과 함께 거기에 있다. 바르트에 따르면 아날로그 사진은 오로지 한 번만 존재했던 것을 증명했다. 디지털 사진은 그 장면(피사체)이 그때 거기에 있을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디지털 사진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이미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준다. 디지털 이미지 속에서는 아날로그 이미지에서 보이는 순간의 존재적 측면이 없다.

    이런 점에서 디지털 이미지는 아날로그 이미지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 차이는 ‘물리적 특성’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인다. 일정한 정보량을 가진 디지털 사진은 무한한 정보량을 가진 아날로그 사진과는 달리 픽셀의 한계에 부딪힌다. 보드리야르는 “디지털 이미지는 일반적인 픽셀화(pixellisation)의 우발적인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시선이나 거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38)라고 말한다. 보드리야르에게 디지털 이미지는 세계를 보는 새로운 관점으로 이해된다. 달리 말하면 모든 것을 하나의 동일한 프로그램에 따르게 하고, 모든 것을 하나의 동일한 계열(série)에 따르게 하는 새로운 기술적 매체로 이해된다. 하지만 보드리야르가 지적하듯이, 이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전환을 단순한 기술적 진보로, 나아가 현실의 해방과 이미지의 해방으로 간주하는 커다란 착각을 낳을 수 있을 것이다.

    12)Jean Baudrillard, Mots de passe, Pauvert, 2000, p. 51(약호 MP).  13)PLIM, p. 11.  14)Jean Baudrillard, L’Échange impossible, Galilée, 1999, p.11(약호 EI )  15)같은 책, p. 29. 이스테레지는 의학 전문 용어로 원인 뒤에서 결과가 좀처럼 진행되지 않는 것을 뜻한다. 보드리야르가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미디어에 의한 사건의 즉각적인 유포, 20세기 말에 일어나는 급격한 사회적 사건, 사건의 끊임없는 증가를 기술하기 위해서이다.  16)PLIM, p. 12.  17)플루서, 앞의 책, p. 290.  18)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 p. 455.  19)같은 책, pp. 456-457.  20)Pierre Lévy, Qu’est-ce que le virtuel?, La Découverte, 1995, p. 12.  21)같은 책, p. 15.  22)진중권, 『이미지 인문학1』, 천년의 상상, 2014, p. 107.  23)François L’Yvonnet, L’Effet Baudrillard, Editions François Bourin, 2013, p. 68.  24)MP, p. 52.  25)EI , p. 25.  26)MP, p. 52.  27)Jean Baudrillard, Les Exilés du dialogue, entretien avec Enrique Valiente Noailles, Galilée, 2005, p. 92.  28)Ludovic Leonelli, La Séduction Baudrillard, E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beaux-arts, 2007, p. 71.  29)빌렘 플루서, 앞의 책, p. 290.  30)레프 마노비치, 『뉴미디어의 언어』, 서정신 옮김, 생각의 나무, 2004, p. 266.  31)진중권, 앞의 책, p. 109.  32)Jean Baudrillard, Pourquoi tout n'a-t-il pas déjà disparu?, L'Herne, 2007, p. 24(약호 PTD).  33)같은 책, p. 25.  34)같은 책, p. 30.  35)Le Gai Savoir de Jean Baudrillard, lignes 31, février 2010, p. 80.  36)PTD, p. 44.  37)같은 책, p. 38.  38)같은 책, p. 39.

    4. 결론

    디지털 기술은 이미 우리의 시대를 조직하고 우리의 환경이 되었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디지털화된 오늘날, 디지털은 우리의 일상적 삶이 되었다. 이렇게 디지털 가상이 아날로그 현실을 대체한 상황에서 디지털 매체의 본성은 은밀히 감추어진다. 하지만 디지털 세계는 찬란한 가상 아래 여전히 펼쳐지고 있다.

    디지털 기술은 분명히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변화시킨다. 보드리야르에게 디지털 기술이 만들어내는 합성 이미지, 즉 디지털 이미지는 시뮬라크르가 아니다. 디지털 이미지는 더 이상 과거 그대로의 이미지가 아니며, 가상의 이미지이다. 현대를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의 시대’로 규정했던 보드리야르. 그 역시 ‘시뮬라크르의 황금시대의 종말’을 예상했다. 말하자면 그는 가상을, 시뮬라시옹의 단계를 넘어선 새로운 단계와 관련지어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가 앞서 논의했듯이, 가상과 디지털의 지배가 아직 문제시 되지 않을 때, 다시 말해서 시뮬라크르의 지배가 여전히 유효할 때, 시뮬라크르로서의 이미지는 자신의 힘과 매혹을 발휘할 수 있었다.

    여기서 쟁점을 이루는 것은 보드리야르가 텔레비전 이미지는 더 이상 이미지가 아니라고 지적한 점이다. 말하자면 영화 이미지가 시뮬라크르로서의 이미지의 양상을 띠면서 상상을 불러 일으키고 (아날로그) 사진 이미지가 매우 설득력 있고 매우 특이한 가치를 갖는 반면, 텔레비전 이미지는 엄밀히 말해서 이미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텔레비전 이미지는 시각적인 것에 속하고, 다른 것이고, 다른 영역이다.39) 우리가 일련의 끊임없는 이미지들, 즉 서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이미지들을 갖는 순간부터, 그런 이미지들은 더 이상 이미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미지의 힘을 가질 시간도 이미지의 상상을 위한 시간도 없다면, 이미지와의 최소 거리도 없다면, 그런 이미지들은 이미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이런 견해는 매체의 존재론적 차원에서 텔레비전을 일종의 영화로 간주하는 플루서 같은 사상가들에게는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우리는 모든 이미지들을 일반화할 수 없겠지만, 실제로 이미지란 무엇인가를 엄밀하게 재정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관계하고 있는 대부분의 이미지들을 배제할 필요는 없다. 보드리야르의 말대로 그것들 역시 다른 것이며 다른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시뮬라크르로서의 이미지’에서 ‘가상의 디지털 이미지’로의 전환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보드리야르에게 시뮬라크르나 가상은 현실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파악하려는 표현 방식이나 시도들이다. 가상은 현실과의 단절이 아니며, 우리가 현실로 간주하는 무한한 인공물이나 매트릭스를 완성하는 데 있는 어떤 과정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40)

    따라서 보드리야르에게 가상은 현실이나 실재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이 되고 있다. 반면 우리가 앞서 논의했듯이, 들뢰즈에게 가상은 ‘해결해야 할 문제’로서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고 ‘미래를 열어주는’ 것이며, 플루서에게 가상은 ‘미래에 창조되어야 할 대안적 세계’가 되고 있다.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보드리야르에게 가상은 전혀 새로운 세계라는 점이다. 가상은 디지털, 디지털 이미지, 멀티미디어, 인터넷, 인공지능, 동일증식, 유전자 조작 등으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가상은 세계를 디지털화하고 코드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기능들을 조작화하고 네트워크화할 수 있다. 보드리야르의 말대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조작을 할 수 있으며, 조작적 세계 속에 있다.”41) 이는 디지털 기술 속에서, 조작적 세계 속에서 오늘날 어떤 이미지도 가능한 이유이다. 이는 디지털 작용 속에서 대체가능한 어떤 것처럼 어떤 것도 디지털화될 수 있는 이유이다. 디지털 가상은 이미지를 증식시키고 확산시키는 기술적으로 진보된 새로운 매체에 다름 아니다.

    보드리야르는 최근 초고속으로 실현된 디지털 기술 진보의 시기 동안, ‘이미지를 통해 현실을 해방하기’, ‘디지털을 통해 이미지를 해방하기’라는 터무니없는 발상이 생겨났다고 지적한다. 물론 현실의 해방과 이미지의 해방은 이미지의 증식과 확산에, 즉 이미지의 황홀경에 효과적이라고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진적 행위의 관점에서는 엄청난 충격이다.

    디지털이 형태에 우선하고, 소프트웨어가 시선에 우선할 때 우리는 여전히 사진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보드리야르의 견해에 따르면, 아날로그 사진 전체가 디지털로의 전환과 함께 희생될 것이라는 것이 예상된다. 이와 더불어 디지털이 이미지에 대해 그러하듯이, 디지털 합성 작용은 모든 현실의 생산과 집적을 초래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진을 무수한 이미지들과 혼동하게 될 것이며, 사진의 비밀과 즐거움으로 멀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근의 아날로그 사진이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오히려 디지털 사진의 전략을 적극적으로 차용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디지털 이미지의 선명함 그 자체가 새로운 미적 감정을 만들어내는 것에도 주목해야 한다. 보드리야르는 이 점을 간과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디지털을 통해 현실세계의 모든 한계에서 벗어나 완전한 이미지로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물론 완전한 이미지로의 길을 여는 것을 열망하는 것은 실제로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열망에 집착하기보다는 오히려, 플루서의 말대로 현실은 주어지지 않고 만들어진다는 사유로부터 현실을 대체하는 디지털 가상의 새로운 전략을 끊임없이 창조하고, 나아가 디지털 이미지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형성하는 것이 요청된다.

    39)텔레비전 이미지를 연출의 표면적 이미지, 산산조각으로 깨어진 파편적 이미지, 덧없는 순간에 적합한 파동적 이미지로 보는 시각도 있다.(Anne Sauvageot, Jean Baudrillard : La passion de l’objet, Presses Universitaires du Mirail, 2014, p. 28.)  40)SB, p. 72.  41)Jean Baudrillard, D’un fragment l’autre, entretiens avec François L’Yvonnet, Albin Michel, 2001, p.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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