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미디어와 연극 언어의 재매개*

New Media and Remediation of Thea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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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네트워크 된 컴퓨터 기반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가져온 변화를 ‘미디어 혁명’ 혹은 ‘디지털 혁명’으로 부르는 이유는, 이것이 단순히 문명의 편리함을 증대시키는 기술적 혁신을 넘어 문명 전반에 걸친 변화를 촉진시켰기 때문이다. 예술계 역시 다르지 않아서 20세기 후반부터 예술계에서 가시화되고 있는 장르 간 경계의 해체, 미적 가치 규범의 변화, 예술의 창조와 향유, 유통 방식의 변화에는 디지털 혁명, 미디어 혁명으로 불리는 테크놀로지의 혁신과 이에 따른 변화가 자리하고 있다. 뉴미디어가 가져온 예술 환경의 변화는 연극 언어와 문법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무대 위에 구현되는 것과 같은 기술적 가시적 변화도 있겠으나, 그보다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뉴미디어의 영향으로 인해 변화되고 있는 우리의 예술개념과 지각 방식의 변화이며, 이에 따른 연극 언어와 문법의 변화이다.

    그런데 뉴미디어가 예술계 전반에 커다란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에는 모두들 동의하면서도, 뉴미디어를 어떻게 정의하고 바라보는가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학자들 간에 다소 견해 차이를 보인다. 더불어 오늘의 세계는 기술 혁신이 가져온 새로운 세계의 출현이면서 동시에 이미 자리 잡은 올드 미디어들이 뉴미디어와 혼종을 이루는 세계이기도 하다. 때문에 뉴미디어의 고유 속성을 구별한다는 것은 생각처럼 용이하지 않다.

    어떤 미디어도 고립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올드미디어와의 관계 속에서만이 우리는 뉴미디어와 뉴미디어가 가지고 온 변화를 파악할 수 있다. 때문에 뉴미디어를 둘러싼 담론을 예술 환경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살피고, 올드미디어와 뉴미디어와의 관계와 상호 영향 속에서 이러한 변화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연극 속에서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본 연구는 이러한 뉴미디어 환경, 혹은 뉴미디어 조건하의 연극 문법과 연극 언어의 변화를 검토하고자 한다. 특히 연극에 하이 테크놀로지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로베르 르파주(Robert Lepage)의 작업을 분석함으로써 구체적으로 논의한다. 르파주의 연극은 상이한 차원의 리얼리티의 혼재, 미디어 테크놀로지와 현존하는 배우의 몸과의 관계, 전통적인 연극 관습의 재매개, 뉴미디어를 이용한 공간의 편집 분할 등, 뉴미디어 시대의 연극의 변화와 특징을 잘 드러낸다. 본 연구는 로베르 르파주가 2005년 초연한 <안데르센 프로젝트(The Andersen Project)>를 중심으로 이 문제를 논한다.


    New Media has brought changes throughout the entire human culture and this is no different in case of the art world. However, difference of opinions is shown between scholars on how to view the new media within art even if they agree on this fact. The term called new media seems to emphasize the difference from the old media. But rather than the new media replacing or disposing old media, they form a dialectal relationship by referring to, accepting and competing with each other. While old media gets to acquire new cultural significance within such relationship, this is called remediation.

    The characteristics of ‘medium-specificity’ that had achieved climax after reaching modernism get challenge in the art of new media era. The history of drama in the twentieth century was the history on the search of ‘Theatricality' while trying to escape from the proscenium theatre and destroy theatrical illusion accordingly. But the drama of new media era seems to be trying to return to the theatrical illusion once again.

    This study examines the arguments surrounding new media from the aspect called change of art environment to investigate the problems raised by the works performed under this changed environment and condition based on the works of Robert Lepage. The mixture of reality in different dimensions, relationship between new media and actors, remediation of traditional drama customs or montage of space, etc are the things to be particularly noticed in the works of Lepage. Through such analysis, the characteristics of new media era performances will be examined.

  • KEYWORD

    뉴미디어 , 재매개 , 매체 투명성 , 비매개 , 하이퍼매개 , 마노비치 , 볼터 , 그루신 , 로베르 르파주 , <안데르센 프로젝트>

  • 1. 서론

    오늘날 미래 사회에 대한 전망을 전적으로 미디어 학자들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일이다. 새로운 매체의 등장과 이에 따른 사회 변화는 단순한 기술적 문제가 아닌 문명사회 전체, 지성사 전체에 해당되는 문제이다. 컴퓨터 기반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함께 진행된 변화를 ‘미디어 혁명’ 혹은 ‘디지털 혁명’으로 부르는 이유는, 이것이 단순히 문명의 편리함을 증대시키는 기술적 혁신을 넘어 인간의 사고방식, 가치관, 인간관계, 사회 및 조직의 구성 방식, 국가의 위상과 정체성, 권력 구조와 작동방식, 지적 활동(철학, 인문학, 예술 등을 포함하여) 전반에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뉴미디어의 등장과 기술적 발전은 예술에도 영향을 미쳤다. 생산(창작), 저장(결과물의 형태), 유통(향유, 보급, 배포) 등 예술제도의 전 과정에 걸쳐 변화가 진행되었고, 기존의 예술 형식과 장르, 나아가 미적 개념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뉴미디어’는 네트워크 된 컴퓨터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미디어의 특징이 기존의 미디어, 즉 올드 미디어와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음을 강조하는 단어일 것 이다. 새로운 미디어는 새로운 예술 영역도 탄생시켰다. 새로운 예술은 컴퓨터 아트(Computer Art), 미디어 아트(Media Art), 멀티미디어 아트(Multimedia Art), 웹 아트(Web Art), 사이버 아트(Cyber Art), 인터렉티브 아트(Interactive Art)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다가 ‘뉴미디어 아트’라는 용어로 통칭되었다. 그런데 과학기술의 발전은 이러한 새로운 명칭으로 명명되는 예술 활동에만 관련되지 않는다. 오히려 뉴미디어의 문제는 기존 예술 장르 안에서 뉴미디어와 올드 미디어와의 충돌과 재배치, 기존 예술의 위상 변화, 예술 언어와 문법의 변화와 관련된 문제라는 점에서 중요성이 있다.

    그런데 뉴미디어 시대의 도래가 예술계 전반에 커다란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에는 모두들 동의하면서도, 뉴미디어를 어떻게 정의하고 바라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학자들 간에 다소 견해 차이를 보인다. 뉴미디어가 기존의 올드 미디어를 완전히 대체하고 있는가, 혹은 뉴미디어의 대두와 함께 올드 미디어 역시 재배치되고 있는가, 아니면 이러한 논쟁 자체가 무의미하며 뉴미디어 역시 새로운 미디어에 의해 대체될 것이므로 이미 뉴미디어는 그 유효성을 상실했다고 보아야 하는가 하는, 서로 다른 견해가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뉴미디어를 둘러싼 담론을 예술 환경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살피고, 이 문제가 연극에는 어떠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가를 정리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뉴미디어 환경, 혹은 뉴미디어 조건 하의 연극 문법과 연극 언어의 변화를 검토하고자 한다. 본 연구가 주목하고 있는 점은 단순히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무대에 가져온 표현의 확장이 아니다. 그로 인한 우리 감각의 변화가 연극 예술의 언어와 문법 전반에 가져온 변화이다. 특히 이 문제는 연극에 하이 테크놀로지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로베르 르파주(Robert Lepage)의 작업을 분석함으로써 구체적으로 논의될 것이다. 르파주의 연극은 상이한 차원의 리얼리티의 혼재, 미디어 테크놀로지와 현존하는 배우의 몸과의 관계, 전통적인 연극 관습의 재매개, 뉴미디어를 이용한 공간의 편집 분할 등, 뉴미디어 시대의 연극의 변화와 특징을 잘 드러낸다. 본 연구는 로베르 르파주가 2005년 초연한 <안데르센 프로젝트(The Andersen Project)>를 분석하면서 이 문제를 논할 것이다. 분석 자료로 사용된 것은 2006년 영국 런던의 바비칸 센터에서 공연된 <안데르센 프로젝트>의 실황 영상과 공연 대본이다.

    2. 뉴미디어와 예술 환경의 변화

    탈장르적이고 매체 통합적인 특성을 지니는 뉴미디어 예술은 20세기 초 모더니즘 예술이 주장한 매체 특정성(medium-specificity)과 매우 다른 입장을, 심지어 극단적으로 반대의 입장을 취하는 듯하다. 예술형식 자체의 고유성, 매체 언어가 가진 순수성의 추구는 모더니즘에 와서 정점을 이루었다. 20세기 연극 전체가 ‘연극성’에 대한 탐구에 바쳐진 것도 이러한 맥락과 관련이 있다. 그런데 모더니즘 예술의 대표적 특징 중 하나를 ‘분화’와 ‘순수성’이라고 할 때, 오늘날의 예술 작업들이 보이는 장르 혼종적이고 멀티 미디어적인 특징은 모더니즘의 신화 중 하나인 ‘매체의 순수성’에 대한 도전이자 가장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반응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뉴미디어 환경에서의 예술은 모더니즘적 예술 개념 및 미학에 전면적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뉴미디어 언어에 대한 대표적 이론가 중 한 명은 미디어 이론가이면서 역사가이자 시각예술 이론가이기도 한 레프 마노비치(Lev Manovich)이다. 그는 2001년 『뉴미디어의 언어(The Language of New Media)』1)를 통해, 전기 매체의 확장과 함께 급변하고 있는 미디어가 곧 ‘인간의 확장(The extension of man)’2)이라는 마샬 맥루한(Marshall Macluhan)의 직관적이고 예언적이었던 이론이 이제 컴퓨터를 기간으로 하는 뉴미디어의 등장으로 다시 한 번 혁명을 겪고 있다고 주장한다. 맥루한이 말한 ‘인간의 확장’은 단순히 기술 의존을 통해 우리의 감각을 고도화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는 “모든 미디어가 우리 자신의 확장이며, 이 미디어의 개인적 및 사회적 영향은 우리 하나하나의 확장, 바꾸어 말한다면 새로운 테크놀로지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도입되는 새로운 척도로서 측정되어야 한다”3)고 주장한다. 그는 테크놀로지가 점차 새로운 인간 환경을 창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외피의 변화가 아닌, 말 그대로 완전히 새로운 환경을 창조함으로써 우리의 신체, 인식, 지각의 영역 자체를 변화시킨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미디어가 담고 있는 ‘내용’에만 주목한 채 미디어를 선도 악도 아닌 가치중립적이며 도구이자 기술일 뿐이라고만 생각했던 당시 커뮤니케이션 이론가들을 비판하면서, ‘미디어가 곧 메시지다’라는 주장을 통해 사람이나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미디어가 담고 있는 내용이 아니라 오히려 미디어 그 자체임을 역설했다.

    반면 레프 마노비치가 네트워크로 연결된 디지털 컴퓨터의 세계를 주목하는 이유는 이것이 ‘메타 미디어’의 출현이기 때문이다. 그는 컴퓨터의 등장 이후 기존의 미디어들이 일종의 하위 범주 미디어 데이터가 된 상황에 주목한다. 기존의 미디어들은 이제 컴퓨터로 조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디지털화하여 ‘미디어’를 기록하고 저장하고 창조하고 배포하며 상호 네트워킹 되도록 만드는 컴퓨터의 사용 방식이 도대체 어떻게 작동하기에 컴퓨터를 소위 ‘뉴미디어’로 만들게 되었는가를 탐구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뉴미디어인 컴퓨터의 가장 근원적인 시작점이자 특징, 다시 말해 모든 것을 수치화하는 ‘계산 기술’과, 이미지, 사운드, 텍스트 등을 저장 재현하는 ‘현대적 미디어 기술의 발전’이라는 두 가지 측면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것은 그의 표현을 따르면 물적 토대로부터 접근해 나가는 ‘디지털 유물론’적 접근이다.4) 마노비치는 계산 기술과 미디어 기술 발달이라는 두 가지 시작점의 종합이 바로 오늘의 뉴미디어를 존재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 결과로 컴퓨터로 조작하고 처리할 수 있는 그래픽, 동영상, 사운드, 형태, 공간, 그리고 텍스트 등으로 구성된 뉴미디어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뉴미디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뉴미디어의 기술 체계(사람들이 문화적 부분에만 주목하기 때문에 종종 간과되고 있는)와 뉴미디어라는 영역의 고유한 속성을 그 무엇보다 먼저 선행 작업으로 구별해 내어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오늘의 세계는 기술혁신이 가져온 새로운 세계의 출현이면서 동시에 이미 자리 잡은 올드 미디어들이 뉴미디어와 혼종을 이루는 세계이기도 하다. 때문에 뉴미디어의 고유 속성을 구별한다는 것은 생각처럼 용이하지 않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마노비치는 기존 미디어의 디지털화(볼터와 그루신의 용어로 설명하면, ‘디지털 형식 속에 조명되고 표상되는 방식의’ 뉴미디어에 의한 올드 미디어의 재매개(remediation)5))와 역사적 선례가 없는 프로그래밍과 데이터에 기반을 둔 새로운 미디어라는 두 가지 측면을 확실히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뉴미디어의 특징이라고 생각하는 것 중 상당 부분이 사실 더 오래된 문화형태이자 올드 미디어에서 이미 드러났던 것이기 때문이다.6) 말하자면 그런 특징으로는 충분히 뉴미디어를 기존의 올드 미디어와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산업사회의 미학과 구별되는 정보사회의 미학은 이전의 미학과 판이하게 다를 것임도 주장한다.7) 마노비치는 일과 여가를 확실히 구분했던 산업사회(모더니즘 사회)와 달리 오늘날의 후기산업사회는 이 두 가지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도 지적한다. 때문에 뉴미디어의 세기에는 기존의 문화, 기존의 예술을 다시 재정의해야 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마노비치는 뉴미디어의 원리로 수적 재현(numerical representation), 모듈성, 자동화, 가변성(variable), 그리고 부호변환(transcoding)의 다섯 가지를 든다.8) 모든 데이터와 내용의 수적 재현으로의 전환이 디지털화인데, 이러한 디지털화는 예술작업의 탈물질화를 촉진시킨다. 모듈성은 객체 자체의 독립성을 잃지 않고 더 큰 객체로 조합될 수 있다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HTML 문서의 구성이나 월드 와이드 웹의 구성을 보면 단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모듈성은 부분의 삭제와 대체를 아주 쉽게 만든다는 것이 특징이다. 수적 재현과 모듈성을 기본으로 수행되는 뉴미디어는 그 과정의 많은 부분을 자동화한다. 오늘날 창조적 생산 과정에 중 이루어지는 자동화는 낮은 단계 뿐 아니라 매우 높은 단계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뉴미디어의 객체가 하나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잠재적으로 서로 다른 무한한 판본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가변성이라는 특징을 드러낸다. 이것은 단순한 복사본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변형가능성(mutable), 유동성(liquid)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변성이 가능한 조건은 자동화와 모듈성에 있다. 한편, 뉴미디어에서 무엇인가를 ‘부호변환’한다는 용어의 의미는 그것을 다른 포맷으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부호변환과 관련하여 마노비치는, 뉴미디어는 디지털화한 옛 미디어라는 차원도 포함하지만 뉴미디어의 가장 근본적인, 그리고 역사적 선례가 없는 특성인 ‘프로그램화’의 가능성이 특히 중요하다고 말한다.

    마노비치가 뉴미디어 고유의 특성과 영역을 분석하고 체계화하고자 했다면, 제이 데이비드 볼터(Jay David Bolter)와 리처드 그루신(Richard Grusin)은 뉴미디어를 올드미디어와의 관계적 맥락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새로운 미디어는 기존의 미디어를 대체하거나 폐기하지 않는다. 새로운 미디어는 기존의 미디어를 모방하거나 참조하기도 하며, 다른 미디어에 반응하고 그것을 재배치하고 서로 경쟁하고 개혁하면서 문화적 의미를 찾아간다. 뉴미디어는 올드미디어를 재매개9)하는 것이다. 볼터와 그루신은 그 어떤 미디어도 독립적으로 기능할 수 없으며 고립적으로 파악될 수 없다고 말한다. 현재의 모든 미디어가 재매개로 기능하며 재매개는 기존 미디어에 대한 해석 수단도 아울러 제공해 준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미디어는 지속적으로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고 서로를 재생산하고 서로를 대체하며, 이런 과정은 미디어의 절대적 구성요소다. 미디어가 미디어로 기능하려면 서로를 필요로 한다”10)고 설명한다. 뉴미디어는 기존 미디어를 인정하거나(병행) 그것들과 경쟁, 개조하면서 재매개해 왔다. 예를 들어 사진은 회화를, 영화는 연극과 사진을, 텔레비전은 영화, 보드빌, 라디오를 재매개 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미디어의 흔적을 지우는 투명성(transparent)의 비매개(immediacy)와 미디어의 존재를 전면적으로 드러내는 불투명성의 하이퍼매개(hypermediacy)11)가 동시에 작동한다. 이 점에 대해 “비매개의 논리가 표상행위를 지우거나 자동화하도록 유도한다면, 하이퍼매개는 다중적 표상행위를 인정하고 미디어를 인식하도록 한다”고 설명한다. 이 둘은 서로 모순된 관계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항상 함께 작동하는 재매개의 이중논리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리고 이들 간의 진동과정이 바로 재매개의 과정인 것이다. “진동은 한 미디어가 선행 미디어들이나 다른 동시대적 미디어들을 어떻게 개조하는지를 이해하는 열쇠”12)이다. 투명성의 비매개는 가상현실의 몰입성에서 잘 드러난다. 가상현실이 현전감(sense of presence)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상생활의 시각 경험과 될 수 있는 한 가까워야 한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끊임없이 관람자의 현전감을 강화시키고자 욕망한다. 3D, 4D 영화의 개발은 그러한 일례일 것이다. 비매개는 컴퓨터 인터페이스를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욕망한다. “투명한 인터페이스는 또한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매개적 속성도 부정하려는 욕구의 발현이다.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통해 우리가 매개(mediation)를 넘어섰다고 믿는다는 것은 현재 우리의 기술발전 단계가 갖는 독특성을 주장하는 것이기도 하다”13)고 지적한다.

    사실 이러한 비매개에 대한 집착이 기술 발달에 의존하는 뉴미디어에만 해 당되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의 전통은 ‘극적 환영의 추구’라는 점에서 비매개에 대한 집착을 가장 잘 드러내는데, 르네상스 극장의 원근법의 사용으로부터 19세기의 무대 환영의 관습, 그리고 사진과 영화의 발명과 발전이 보여준 리얼리티의 추구를 생각해 보면 그렇다. 그러나 동시에 이 즐거움은 비매개의 반대 축에 서 있는 ‘매개성의 드러냄’에도 있다. 이것이 볼츠와 그루신의 용어로 말하면 미디어의 존재를 전면에 드러내는 불투명성의 하이퍼매개의 논리이며 ‘미디어에 대한 매혹’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작용하는 데에 우리가 느끼는 예술적 쾌감이 있는 것이다.

    투명성의 매개와 마찬가지로 미디어에 대한 매혹 역시 역사가 길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 강력한 문화적 지배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투명성의 패러다임이었다. 여기에 중대한 도전을 하는 계기가 바로 모더니즘이다. 모더니즘은 미디어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모습을 띠었다. 이 점을 미술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이렇게 지적한다. “사실주의적인 환각기법은 기법을 은폐하기 위해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미디어를 용해시켰다. 모더니즘은 기법을 사용하여 기법에 주의를 끌게 했다. 과거 거장들은 회화의 미디어가 갖고 있는 한계들을 단지 암시적으로나 간접적으로만 인정될 수 있는 부정적인 요인들로 간주했다. 모더니스트 회화는 이런 동일한 한계들을 공개적으로 인정해야 할 긍정적인 요인들로 간주하게 되었다.”14) 모더니즘 예술은 세계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을 표상하게 되었다. ‘연극 그 자체’, ‘음악 그 자체’, ‘문학 그 자체’, 더 나아가 ‘언어 그 자체’, ‘소리 그 자체’, ‘색 그 자체’, ‘선 그 차제’에 대한 탐색이 시작된 것이다. 하이퍼매개의 논리를 따르는 작업은 관람자가 미디어를 미디어로 인정하는 바로 그속에서 즐거움을 얻게 한다. 매개(매체 자체에 주목하게 만드는 것)와 매개 너머에 있는 것(매체가 전달하는 내용과 묘사된 대상을 주목하는 것) 사이의 긴장, 이 둘 사이를 관람자가 계속 왕복하게 하는 것이 현대 예술의 또 하나의 유희성이다.

    한편, 뉴미디어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미디어와 기존의 미디어가 혼종을 이루며 모더니즘적 예술 개념에 도전을 하는 오늘의 시대를 로잘린드 클라우스(Rosalind Krauss)는 ‘포스트 미디엄’15)의 시대로 설명하고자 한다. ‘포스트 미디엄’의 시대는 포스트모더니즘마저 끝난 포스트-포스트모던의 시대로 모더니즘적인 미디어의 개념(예술과 예술 아닌 것을 구분하는)을 극복하여 다시 미학적으로 재맥락화하는 오늘을 지칭하는 것이다.16) 예술과 예술 아닌 것과의 경계가 모호한 오늘의 시점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을 예술이게끔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현재 예술이 처한 상황을 포착하고 설명하기 위한 시도라 할 수 있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뉴미디어와 올드 미디어의 경계나 대립이 사실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을 인식한 그 이후의 상황, 즉 뉴미디어의 특권적 영역이 사라진 이후의 상황이다. 포스트미디엄 시대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미디어혼성(intermediacy)이다. 매체 간의 구별, 예술 장르간의 구별, 나아가 예술과 현실, 가상과 실재와의 구별이 모호하고 무의미한 시대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미디엄의 ‘재’창조, ‘재’배치이다. 모더니즘적인 예술의 특권성으로 회귀하는 듯 보이는 최근의 작업에 주목하면서, 로잘린드 클라우스는 그것을 전통으로의 회귀가 아닌 미디엄의 재창조로 볼 수 있다고 주장 한다.17) 말하자면 단순한 회귀가 아닌, 전통적 미디엄의 재맥락화인 것이다.

    뉴미디어를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다. 뉴미디어를 접하면서 우리가 새롭다,라고 느낀 많은 부분이 사실은 기존 미디어를 통해 이미 익숙해진 것들이기도 하며, 때로는 뉴미디어를 우리에게 익숙한 기존 미디어에 대한 관습과 이해에 근거하여 받아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18) 이 둘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여 이해하려는 시도든 그 둘의 상호 영향을 강조하고 주목하려는 시도든, 어떤 미디어도 고립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올드 미디어와의 관계 속에서만이 우리는 뉴미디어와 뉴미디어가 가지고 온 변화를 파악할 수 있다. 현대 예술과 관련하여 뉴미디어를 논한 논자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점도 바로 이 지점이다.

    1)Lev Manovich, The Language of New Media, MIT press, 2001. 레프 마노비치, 서정신 역, 『뉴미디어의 언어』, 생각의 나무, 2004.  2)1964년 처음 출간된 마샬 맥루한의 유명한 저서 『미디어의 이해(Understanding of Media)』의 부제는 ‘인간의 확장(The extension of man)’이다. 맥루한은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기본적으로 인간의 청각, 시각, 촉각 등 지각 능력을 확장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했다.  3)Marshall Macluhan, Understanding of Media: The extension of man, 1964, 마샬 맥루한, 박정규 역, 『미디어의 이해 : 인간의 확장』, 커뮤니케이션 북스, 2001. 7쪽.  4)마노비치, 앞의 책, 61~63쪽 참조.  5)재매개는 볼터와 그루신의 용어로 “하나의 미디어를 다른 미디어에서 표상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재매개를 디지털 미디어의 독특한 특징이라고 주장하는데, 디지털 미디어가 올드 미디어를 재매개 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 정도가 있다. 그 중 하나는 기존 미디어와 대립되지 않은 채 디지털 형식 속에 표상하는 방식이다. 마노비치가 말한 ‘기존 미디어의 디지털화’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 경우 관람자가 디지털화된 내용과 맺는 관계는 원 미디어를 볼 때와 거의 동일하다. 두 번째는 공격적인 재매개 유형으로 원천(source)미디어와 대상(target)미디어를 모두 부각시키는 방식이다. 본 연구에서 특히 주목하는 바는 바로 이러한 방식의 재매개이다. 세 번째 방식은 새로운 미디어가 기존 미디어를 완전히 흡수해서 재매개 하는 방식이다. 이 경우 새로운 미디어는 기존 미디어를 지울 수 없으며 기존 미디어에 의존하게 된다. 컴퓨터 게임 장르에서의 영화의 재매개 같은 경우가 그 예이다. J.D.Bolter, R.Grusin, Remediation: Understanding New Media, Cambridge: MIT press, 1999. 볼터, 그루신, 이재현 역, 『재매개: 뉴미디어의 계보학』, 커뮤니케이션북스, 2006. 52~57쪽 참조.  6)마노비치는 이 문제를 ‘이런 것은 뉴미디어가 아니다’라는 장을 할애하여 논하고 있는데, 그의 논박의 중심에는 기존 미디어로서의 영화가 있다. 예를 들면 아날로그는 연속적이고 디지털은 분절적이라는 생각은 영화는 이미 시간을 샘플로 추출했다는 것으로 반박되고, 디지털 미디어에 와서 서로 다른 유형이 멀티미디어 디스플레이 도구인 컴퓨터라는 기계에서 디스플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영화가 이미 최초의 현대적 멀티미디어였다는(동영상과 사운드, 영상과 텍스트의 결합) 점으로, 뉴미디어가 데이터를 순차적인 것이 아닌 동시적인 것으로 접근 가능하다는 생각은 영화가 이미 시간을 조작하고 재배열했다는 사실로 반박된다. 마노비치, 앞의 책. 95~117쪽.  7)마노비치는 『뉴미디어의 언어』에서는 동료 학자들에게 동의했던 많은 부분들, 특히 볼터와 그루신의 재매개 이론 등에 대해 최근에 이의를 제기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의견(재매개)에 따르면 새로운 미디어는 언제나 구미디어를 재매개하기 때문에 우리는 컴퓨터와 같은 새로운 미디어가 이전의 미디엄과 다르게 기능하리라고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노비치가 원하는 것은 새로운 미디어가 가져온, 이전에 역사적으로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던 새로운 창조-생산-유통-향유 방식에 대한 상위적 정의인 듯하다. 마노비치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올드 미디어와 확연히 구별되는 뉴미디어 고유의 미학적 특징이다. 이러한 수정된 개념을 수렴한 논문이 그의 <정보 미학(Info-aesthetics)>이다. www.manovich.net.  8)마노비치, 앞의 책, 70~95쪽 참조.  9)처음 자신들의 공저를 기획하던 초기에는 재목적화(repurposing)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10)볼터, 그루신, 이재현 역, 『재매개: 뉴미디어의 계보학』, 커뮤니케이션북스, 2006. 66쪽.  11)그들은 이 용어를 multi-mediacy라는 이름하에 작동하는 것이라 정의한다. 볼터, 그루신, 위의 책 xii쪽.  12)볼터, 그루신, 앞의 책. 18쪽  13)앞의 책. 24쪽.  14)Clement Greenberg, “Modernist Painting“, The New Art: A Critical Anthology, NY:Dutton, pp. 68~69, 볼터, 그루신, 위의 책, 44쪽에서 재인용.  15)‘포스트-미디엄’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피에르-펠릭스 가타리(Pierre-Felix Cuattari)라고 한다. 그는 1992년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에 기고한 「사회적 실천의 재구성을 위하여」 라는 글에서 “현재 미디어의 위기와 포스트-미디어 시대의 도래는 보다 심층적인 위기의 징후들이다”라고 서술하면서 이 용어를 사용했다. 임근준, 「문답: 포스트-미디엄의 문제들」, 『문학과 사회』 2007년 겨울호, 338쪽.  16)Rosalind Krauss, A Voyage on the north sea : art in the age of the post-medium condition, Thames & Hudson:NY, 2000. ; Rosalind Krauss, “Two moments from the post-medium condition”, October․NO116, 2006. spring, pp. 55~62. 참조.  17)Roslind Krauss, “Two moments from the post-medium condition”, pp. 56~57.  18)경계를 해체하는 미디어들의 특성은 미디어 컨버전스(Media Convergence)를 촉진시킨다. 휴대폰이 신문, 텔레비전, 도서관, 영화관을 모두 아우르는 것처럼 보이는 현대의 문화가 바로 그 현상의 대표적 예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에서 특이할 점은 이러한 첨단의 미디어가 발전을 거듭할수록 오히려 올드 미디어를 참조하고 모방한다는 점이다. 초기 컴퓨터나 텔레 미디어들의 특징과는 달리, 오늘날 우리는 타이핑하거나 명령어를 입력하는 대신 모바일 위에 ‘쓰고’ ‘터치(접촉)’하기를 원한다. 예컨대 디지털 기기의 전자책은 손으로 책장을 넘기는 방식을 선호한다.

    3. 연극 언어의 재매개

    뉴미디어가 가져온 예술 환경의 변화는 연극 언어와 문법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이것은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무대 위에 구현되고 연극에 개입함으로써 가져온 기술적 가시적 변화도 있겠으나, 그보다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뉴미디어의 영향으로 인해 변화되고 있는 우리의 예술개념과 지각 방식이 연극 언어와 문법에 미친 영향일 것이다.

    마샬 맥루한은 ‘우리가 미디어를 만들었지만 이제 미디어가 우리를 만든다.’라는 말로 이문제를 선언적으로 표현한다. 미디어는 정보의 저장, 전파, 수용의 측면만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자체에 대한 개념에도 변화를 가져왔으며 우리의 지각 능력과 사고 체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예컨대 구텐베르그적 문자 사회는 우리에게 독해의 시대, 산문의 시대를 열었다. 이것은 대량으로 종이 출판이 가능해졌다는 것과 서적의 보급이 대중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지각 방식이 인쇄 매체 중심으로 훈련받고 고착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쇄물의 사각 질서는 연속적인 사고를 구조화했으며, 문자 사회에서 ‘대상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행위는 무엇보다도 인쇄물을 ‘읽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때의 의미는 이미 창조한 자(작가)에게 있었다. 반면 전자 미디어는 연속적 사고 대신 유추로 진행하는 비선형적이고 반복적이며 단절적인 통찰 사고 형식을 가져왔다. 그런데 도상과 이미지가 중요해진 뉴미디어의 시대는 독해의 시대를 해석의 시대로 다시 변화시켰다. 때문에 미디어 이론가들은 오늘날이 문자 사회보다는 오히려 구술문자의 시대에 점성가나 선지자, 예언자가 해석해 주던 시대와 유사하다고 말하기도 한다.19) 도상적이고 상징적인 이미지를 해석하는 시대, 해석에 의해 비로소 의미가 발생하고 텍스트가 완성되는 시대인 것이다.

    주도적 매체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사고 체계와 감각의 변화를 가져오며, 감각과 지각 방식의 변화는 예술의 창조와 인식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이것을 맥루한은 ‘미디어는 단순히 감각을 확장할 뿐 아니라 ‘감각 비율(sense ratios)’을 변경하고 고착시킨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증폭하고 확장하는 데 사용하는 새로운 매체와 테크놀로지는, 사회라고 하는 신체에 대대적으로 행해지는 수술인데, 이 새로운 테크놀로지로 사회를 수술할 때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것은 절개된 곳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변화를 받는 것은 전체 조직이다. “라디오의 영향은 시각에 미치고, 사진의 영향은 청각에 미친다. 새로운 충격이 가해질 때마다 모든 감각의 배분 비율이 변화된다”20)고 맥루한은 말한다.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을 역사적 맥락과 계보학적 맥락에서 파악하고자 한 빌렘 플루서(Vilem Flusser) 역시 ‘지배적 문화 코드’를 중심으로 문화사를 바라봄으로써 이 점에 주목한다. 그는 더 이상 선형적 알파벳과 대화가 중심인 커뮤니케이션 이론이 유효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그 대안으로 코무니콜로기(kommunikologie)를 제안한다. 코뮤니콜로기는 발신자-수신자 중심의 대화적 커뮤니케이션에 관심을 두지 않는 대신, 각 시대의 지배적인 문화코드가 어떤 역할을 하는가의 관점을 취한다.21) 그는 알파벳 이후의 사회를 ‘기술적 이미지’가 중심인 지식사회(알파벳 이후의 시대)로 규정하는데, 이 시기는 알파벳 시대의 경험을 지닌22) 이미지의 시대이다.

    미디어의 등장과 이것이 가지고 온 변화는 단순히 무대 위 테크놀로지의 구현에만 있지 않다. 우리의 감각 비율의 변화에 따른 매체 언어와 문법의 변화이다. 이런 관점에서 가장 먼저 주목할 변화 중 하나는 연극 고유의 매체 특정성이라고 여겨졌던 것들의 재매개이다. 뉴미디어는 공연예술 고유의 매체 특정성으로 생각되어왔던 많은 특징들, 즉 배우의 현존, 재현성, 시공간적 동시성, 시공간적 제한성 등을 재매개한다. 더불어 다른 예술 형식의 매체 특정성과 혼종되면서 이를 다시 연극 안에서 재매개 하기도 한다.

    무대 예술에서 절대로 지울 수 없는 요소라 생각되었던 배우의 현존은 뉴미디어 시대에는 도전을 받는다. 배우의 현존이 3D 홀로그램으로 만들어진 3차원 입체 영상에 의해 대체되기도 하며, 배우를 실시간으로 촬영하여 스크린에 투사한 영상(현존하는 배우가 아닌 복제)이 배우보다 더 관객의 시선을 끌기도 한다. 심지어 2004년 서울공연예술제 기간 중 공연된 레바논에서 온 작품 <슐라이만 실종 사건>(Rabih Mroué 작, 연출)23)의 무대 위에는 그 어떤 배우도 물리적으로 현존하지 않는다. 그 대신 신문 자료, 경찰 기록, 사진 슬라이드 등이 서사를 이끌어간다. 무대 위에는 배우 대신 ‘자료’가 현존하는 것이다. 캐나다 극단 Creation’s 4-D Art를 이끌고 있는 미셸 르미유(Michel Lemieux)와 빅토르 필롱(Victor Pilon)은 2000년과 2004년 엘지아트센터에서 공연된 작품 <오르페오(Orfeo)>와 <아니마(Anima)>에서 3D 홀로그램으로 사전에 촬영 제작된 가상의 배우를 무대 위 실존하는 배우와 함께 연기하도록 했다. 복제된 가상현실과 실존하는 현실이 한 시공간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때로는 연극에 있어서 배우의 실존적 의미라고 할 수 있는 매개적 특징, 즉 배우는 타인의 삶을 구현하는 자라는 특징도 도전받는다. 각각 2009년과 2010년, 2012년 페스티벌 봄을 통해 국내에 소개된 <자본론>(극단 리미니 프로토콜 (Rimini Protokoll)), <죽은 고양이 반등>(크리스 콘덱(Chris Kondek) 기획, 연출), <유서>(극단 쉬쉬팝 (She She Pop))와 같은 작품은 대표적으로 언급할 수 있는 예이다. 이 작품들은 배우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성격의 역할을 맡아 이것을 사전에 리허설한 후 무대에서 반복하여 구현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이 작품들에서 무대 위 배우는 누군가의 형상을 대신하거나 매개하지 않는다. 그는 바로 그 자신이다. 물론 이 작품에도 역할이 있고 리허설된 부분이 있다. 다만 그들은 그 자신을 맡아 연기하고 그 자신의 삶을 사전에 연습하여 반복한다.

    그런데 주목할 사실은 그러한 도전이 매체 특정성을 전적으로 부정하거나 무화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무대 위에 가시적으로 현존해야 할 배우 대신 슬라이드, 인터넷, 신문 등을 통해 그에 ‘대한’ 이야기가 제시되는 <슐라이만 실종 사건>의 경우는 무대 위 주인공의 부재라는 상황은 ‘인물의 실종’이라는 경험 그 자체를 관객에게 생생하게 전달한다. 실재하는 배우와 3D 홀로그램으로 영사되는 가상의 배우가 한 공간에서 연기하게 되는 <오르페오>나 <아니마>의 경우에도 강조되는 것은, 테크놀로지의 매개성이 강조되면 강조될수록 동시에 그 물리적 현존이 더욱 두드러지는 함께 연기하는 현존하는 배우의 신체이다. 이렇듯 이들 공연은 매체의 ‘투명성’과 ‘불투명성’을 오가며 무대 위 매체의 이중성을 드러낸다. 볼터와 그루신은 비매개와 하이퍼매개 사이의 진동 과정을 설명하면서 “현재의 모든 미디어가 재매개체(remediator)로 작용할 수 있으며, 뉴미디어가 올드 미디어를, 반대로 올드 미디어가 뉴미디어를 재매개할 수 있다”24)고 말한다.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아이디어는 기존의 매체 언어와 관습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 서로를 재매개한다.

    뉴미디어 환경에서 다시 재매개되는 공연예술 안의 올드 미디어와, 올드미디어를 통해 다시 재매개되는 뉴미디어의 관계는 2010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서 공연된, 테아트로 리네아 데 솜브라(Teatro linea de sombra)의 <아마릴로(Amarillo)>(Jorge Vargas 구성, 연출)에서 잘 드러난다. 이 작품에서 눈앞에 실존하는 배우의 신체는 카메라를 통해 실시간으로 촬영되고 그 영상은 스크린 역할을 하는 벽 위에 영사된다. 그런데 그 ‘라이브’ 영상은 사전에 촬영된 영상과 함께 컴퓨터 시스템에 의해 재배열되거나 믹싱 된다. 이럴 때 눈앞에 현존하는 신체는 동일한 공간에 놓인 스크린 안에서는 오브제이며 물질이며 데이터이다. 비디오 카메라의 사용으로 인하여 실존하는 배우는 공간적으로 분할되고, 현실과 가상에 동시에 사는 것이 된다. 무대에 실존하는 몸과 그의 복제된 이미지인 영상, 그리고 특정 역할(예컨대 국경을 넘는 불법 이민자)로 재현되는 믹싱된 영상 등이 공간에 배열되면서 배우는 다층적 리얼리티에 존재하게 된다. 때때로 카메라는 관객의 시각적 능력만 가지고는 포착하기 어려운 세심한 부분을 확대하여 강조하기도 한다. 또 전면의 벽에 육탄으로 매달린 배우의 몸과 영상을 믹싱하여, 위험한 몸과 재현적 의미(기차의 지붕에 올라탄 채 여행을 하는 사람들의 위험성)를 관객이 실감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주목할 점은 이 공연에 사용되는 영상의 일부가 ‘라이브 영상’이라는 점이다. 영상과 사운드는 기록의 매체이지 실시간 공연(live)의 매체는 아니다. 필름을 관습적으로 기록의 매체로 여겨온 관객에게 ‘라이브 영상’은 조금 아이러니하다. 이 공연은 이것을 라이브 매체로 사용한다. 라이브를 장르 특정성으로 갖는 공연 안에서 기록의 매체였던 영상은 재매개된 것이다. 이러한 재매개성은 특히 실시간으로 촬영된 영상이 ‘실시간으로 믹싱’ 된다고 하는 극의 형식과 방법론에 의해(마노비치가 강조했던 컴퓨터의 메타 매체적 특징이 여기서 드러난다) 강조된다. 무대 위 실존하는 배우가 스크린에 투영되는 방식만이었다면, 즉 단순한 모니터로서의 역할(초기 텔레비전이나 오늘날의 CCTV와 같은) 이었다면 이 작품의 영상은 흥미롭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스크린에 투영된 영상은 기록으로서의 매체의 성격과 모니터링으로서의 매체의 성격을 동시에 지닌다. 바로 이 때문에 관객은 매체의 매혹에 빠져들게 되며, 또한 올드 미디어(연극)에 의한 뉴미디어(영상)의 재매개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상의 변화가 가져온 또 하나의 특징은 현실과 허구, 실제와 환상이라는 경계의 해체이다. 이 작품이 영상 믹싱을 통해 하는 것은 가상과 현실의 이미지 믹싱이다. 실제 이민사의 자료 영상은 무대 위 실존하는 배우의 연기와 뒤섞이면서 가상과 현실을 허물고 새로운 의미와 심리 효과를 만든다. 벽에 매달린 채 실재하는 배우의 위태한 몸과 그 위로 영사된 영상이 다시 재구성해 내는 현실은 이것을 재현이라 해야 할지 실재라고 해야 할지 모호하다. 이러한 가상과 현실의 경계 해체는 다른 작품들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그 자신을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와 개인의 사적 이야기가 전개되는 <유서>, 무대 위에 실화였던 사건의 뉴스 자료와 서류들이 제시되는 <슐라이만 실종 사건> 등도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이것이 단순히 내용상의 문제가 아닌 형식상의 문제, 뉴미디어 환경에서 촉발된 문제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아마릴로>와 같이 라이브 영상과 미리 촬영된 영상의 믹싱과 같이,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개입되면서 발생된 공연의 ‘형식’과 ‘문법’이 그 스스로 경계를 허물게 만들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매일 접하는 일상 문화 안에서도 발견되는 바이다. 이 경계를 엄밀히 구분한다는 것이 뉴미디어 시대에는 이미 가능하지 않으며, 그 점이 바로 우리 문화의 중요한 특징인 것이다.

    무대 위의 스크린이 실시간으로 움직이는 무대 위 배우를 촬영하여 투사하는 방식을 이용하는 무대에서도 이 문제는 발생한다.25) 재미있는 것은 이 경우 실존하는 배우는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서 자신의 모사이자 복제품(영상)과 싸워야 한다는 점이다. 뉴미디어 아트 연구자이자 미술 비평가 마이클 러시는 우스터그룹의 작업 <집/빛들(House/Lights)>을 통해 이 문제를 언급한다. 거트루드 스타인의 <파우스트 박사가 불을 밝히다(Dr. Faustus Lights the Lights)>를 원작으로 하여 1997년 뉴욕의 ‘퍼포밍 공장(Performing Garage)’에서 공연한 이 작품에 대해, 러시는 포스트모던 예술가들이 ‘원본을 흉내낸 모조품을 생산하는 기행과 기벽에 집착하고 있다’고 언급한 프레데릭 제임슨(Frederic Jameson)을 인용하면서 ‘고전적인 텍스트를 다수의 비디오 모니터와 균열된 텍스트를 이용한 미디어 광기로 바꿔버린 작업들’이라 설명한다.26) 그는 이 작품이 원본 텍스트를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요란한 음악, 확성된 목소리 등으로 인해 대사를 거의 알아차리기 어렵다는 점을 주목한다. 텍스트는 보존되었지만 문자적 의미의 전달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또 이 작품은 비디오로 행위자의 모습을 찍어 무대 위에 있는 여러 개의 모니터 화면을 통해 관객에게 보여주는데, 실시간으로 연기하는 행위자들보다 더 관객의 주목을 끄는 것은 무대 위 자신의 복제품인 영상이라는 점도 지적한다. 원본과 모조품의 경쟁에서 대개 관객의 시선을 끄는 것은 스크린 속 복제품인 것이다. 우스터그룹은 이 작품에 대해 “우리는 새로운 매체를 융합해 고전 연극 텍스트를 소생시켰고, 다시 그것들을 동시대 글로벌 문화의 혼돈스러운 맥락 속에서 재작동하도록 했다.”27)고 설명한다. 이 작품에서 텍스트의 소생이 텍스트의 문자적 독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은 오늘날 희곡 텍스트를 대하는 많은 연출가들과 극단이 선택하는 바이기도 하다.

    연극이 전통적으로 가졌던 텍스트에 대한 태도는 20세기 들어 이미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뉴미디어 시대 연극의 서사는 작품이 설사 전통적 의미의 서사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기승전결을 따르는 문자 시대의 서사 규칙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선형적(linear) 방식의 독해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우며, 종종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transmedia storytelling)’28)이 무대 위 동일한 공간에서 벌어지기도 한다. 마노비치는 뉴미디어에서는 개별 미디어 요소(이미지, 텍스트 페이지 등)들이 항상 각자의 정체성(모듈성의 원리)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하나 이상의 객체가 함께 연결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이퍼링크는 이러한 연결을 만드는 구체적인 방법이다. 올드 미디어에서는 각 요소가 특정 구조에 ‘고정 연결(hardwired)’되어 있어 더 이상 독립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는 반면, 하이퍼미디어에서는 요소와 구조가 서로 독립되어 있다. 하이퍼링크의 가지라는 특유의 구조는 문서의 내용과는 독립적으로 규정될 수 있다. 마노비치는 이러한 가변성의 원리가 역사적인 사회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라 말한다. 즉 옛 미디어의 논리가 산업사회의 논리에 상응하는 것이라면 뉴미디어의 논리는 개성을 존중하는 후기산업사회의 논리에 부합한다는 것이다.29) 오늘날의 공연이 보여주는 구성상의 특징과 발상은 뉴미디어적 언어의 특징을 그대로 반영한다.

    <자본론>, <죽은 고양이 반등>과 같은 작품은 이러한 서사적 특징을 이야기하기 좋은 예이다. 이들 작품은 뉴미디어 테크놀로지의 직접적 개입은 두드러지지 않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사용하는 수준의 컴퓨터 조작, 인터넷 검색, 프로젝터를 통한 영상 공유 정도가 전부이다. 이 작품에서 오히려 주목해야 하는 점은 공연의 구성 방식, 서사 전개 방식이 뉴미디어적 언어의 특징을 반영 한다는 점이다. <자본론>과 <죽은 고양이 반등>은 전통적 드라마가 요구했던 서사구조를 더 이상 유지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여러 가지 독립된 요소들을 병치 배열한다. 각각의 공연에서 나열된 요소들은 상호간에 논리적 연결성을 갖기는 하지만 필연적이지는 않다. 그것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으며(<자본론>의 경우 다양한 인물의 사연들이 더 추가되거나 또는 누락될 수 있으며, <죽은 고양이 반등>의 경우도 자료 조사의 대상이나 데이터의 내용은 언제든지 실시간으로 바뀔 수 있다), 그 어떤 경우도 전체의 의미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공연에는 다양한 데이터들이 인터넷 검색, 사전 녹화된 인터뷰 영상, 전화 통화, 사진, 역사 기록, 다른 텍스트에서 가져온 인용문(영화 장면들을 포함하여)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믹싱과 재배열 등의 매체들을 통해 제시된다. 그런데 그 각각의 요소들은 지금은 이 공연에서 선택되어 하나의 작품을 이루고 있지만, 자료로서의 정체성은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 개개의 객체들은 언제든지 다른 작품에서 다시 재선택되고 재배열되어 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디지털 기반 뉴미디어 언어가 가진 가장 두드러진 특성이기도 하다.

    뉴미디어가 가지고 온 연극의 시공간 구성도 주목해야 할 점이다. 연극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특징으로 한다. 그런데 영상을 비롯한 무대 위 다양한 테크놀로지의 사용은 공연예술의 특징이었던 시공간적 제약을 벗어나도록 한다. 무대 위 영상을 통해 우리는 전지구적 장소가 무대 위에 표상되는 것을 보며 지구를 벗어나 우주 여행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영상의 사용은 시간을 거스르거나 일상적 감각을 거스르는 시간의 흐름을 표현할 수 있게도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미디어의 사용이 무대 안팎을 생중계하고 ‘지금-여기’서 벌어지지 않은 과거의 사건을 ‘지금-여기’와 믹싱함으로써 시공간의 몽타주를 구현한다는 점이다. 관객과 항상 시공간을 공유했던 연극은 그 제약을 벗어난다. 예컨대 공연은 종종 관객이 없는 곳에서 벌어지며 관객과의 소통은 스크린으로 매개된다. 베를린 폭스뷔네(Volksbühne)의 프랑크 카스토르프(Frank Castorf)는 <백치>(도스토옙스키 원작, 2002년 Berlin Volksbühne 초연)의 공연을 위해 무대 위에 컨테이너 박스를 이용한 거대한 건물을 건축해 놓는다. 사건은 건물 안에서 진행되지만 우리가 인물들을 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창가에 있을 때나 건물 내 CCTV에 잡힌 인물의 모습이 건물 외벽의 스크린에 투사될 때뿐이다. 때로 이동 카메라를 든 스테프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 사건을 촬영해 주기도 한다. 눈앞에서 진행되는 공연을 우리는 동시에 스크린을 통해서도 보는 것이다(재미있는 것은 관객은 카메라를 매개하여 스크린에 투사된 영상을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본 것보다 더 정확하다고, 적어도 ‘더 잘 보인다/더 잘 알겠다’ 라고 느낀다). 이것은 정보의 반복이며 동시에 반복이 아니다. 영상은 인물을 낯설게 만들기도 하고 인물과 사건에 대한 특정한 관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영상이란 것이 그 매체적 특성상 항상 카메라의 시점을 관통해 우리에게 제시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매체 언어를 통해 동일한 내용을 본다. 이것은 일종의 무대 위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이라 부를 수 있는 상황이다. 사건과 공간은 이런 방식을 통해 분할되면서 동시에 우리의 인지 작용을 통해 몽타주 된다.

    영국 노팅험과 독일 베를린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하는 다국적 아티스트들의 프로젝트 그룹 갑 스쿼드(GOB Squad)의 (2007년 Berlin Volksbühne 초연, 이하 키친)은 거의 대부분의 공연이 관객 앞에서 공연되지 않는다. 공연은 무대 뒤에서 일어난다. 이것은 일종의 라이브 필름 쇼(이런 명칭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이다. 본래 <키친>은 앤디 워홀이 1962년에서 1968년까지 뉴욕에서 운영했던 팩토리(The Factory) 시절에 만든 1965년 작 필름의 이름이다. 영화 <키친>은 워홀 영화들에서 음향을 담당했던 버드 위어트샤프터(Bud Wirtschafter)의 실제 부엌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워홀의 많은 필름 작업처럼 이 작품 역시 상황은 주어져 있지만 정해진 시나리오는 없이 즉흥적 상황을 촬영했다. 곱 스쿼드의 <키친>도 일관된 서사나 플롯은 없다. 이 작품에는 1명의 여자와 3명의 남자가 등장 하는데, 이 중 여배우는 오리지널 영화에서 에디 세즈윅(Edie Sedgwick)이 입었던 것과 같은 줄무늬 티셔츠를 입고 있다. 워홀의 <키친>에 대한 일종의 오마쥬이자 패로디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무대 앞에는 대형 스크린이 내려져 있는데, 공연이 시작한 후 관객이 볼 수 있는 것은 스크린에 투사되는 영상뿐이다. 그런데 관객에게는 공연의 시작 전 스크린 뒤를 엿볼 기회가 제공된다. 이 때문에 본격적으로 상영이 시작되면 관객은 필름 안에 묘사되는 공간과 조금 전 자신이 본 실제 공간을 비교하는 또 하나의 즐거움을 갖는다. 그 장소를 이미 탐방했기에 우리는 카메라가 그 장소를 어떻게 왜곡하거나 과장하는지, 혹은 얼마나 사실적으로 전달하는지, 어떤 각도에서 공간을 재단하고 있는지 등을 관객은 인지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들은 필름과 공연이라는 두 가지 다른 예술 형식의 매체적 특징에 도전하는 실험을 한다.

    뉴미디어 시대는 공연예술의 언어와 문법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가지고 온 무대 표현의 확장과 다양성도 중요하지만, 예술 형식과 개념에 대한 변화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것은 연극예술의 위상과 본질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19)소위 ‘컴퓨터 구술 문화’의 시대인 것이다. 스크롤링하는 디지털 미디어의 페이지 개념은 종이 인쇄물이 촉진시켰던 페이지식 사고와 선형적 사고에서 다시 파피루스 두루마리로의 회귀처럼 보이며, 문자 독해에서 시청각적 이해로의 전환은 구술문화로의 회귀처럼 보이기도 한다.  20)마샬 맥루한, 앞의 책, 76쪽.  21)빌렘 플루서의 『코무니콜로기』의 부제는 ‘코드를 통해서 본 커뮤니케이션의 역사와 이론 및 철학’이다.  22)그렇기 때문에 세계를 바로 추상화하지 않으며, 텍스트를 이미지로 추상화하는 경향을 지니기도 한다. 기술적 이미지가 지배하는 시대의 코드는 알파벳 이후의 코드이지만 알파벳 없이는 발명될 수 없었을 코드라는 데에 주목할 점이 있다. 빌렘 플루서, 『코뮤니콜로기』, 커뮤니케이션북스, 2001. 111쪽.  23)이 작품의 영문 원제목은 로, 이 작품의 작가이자 연출가인 Rabih Mroué는 이것을 인베스티게이션(Investigation) 연극이라는 새로운 장르로 명명한다.  24)볼터, 그루신, 앞의 책, 65쪽.  25)토마스 오스터마이어(T.Ostermeier), 크시슈도프 바를리코프스키(K.Warlikowski), 크시슈토프 가르바체프스키(K.Garbaczewski)와 같은 유럽의 연출가 뿐 아니라 이제 우리 연출가들의 작업에서도 이런 형식적 시도는 흔히 볼 수 있다.  26)M.Rush, New Media in Late 20th Century Art, Thames & Hudson Ltd. London, 1999. 마이클 러시, 심철웅 역, 『뉴미디어 아트』, 시공사, 74~78쪽 참조.  27)위의 책, 79쪽.  28)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transmedia storytelling)은 다수의 미디어 플랫폼에 걸쳐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을 말한다. 이때 각각의 매체에 담긴 이야기는 그 자체로서도 독립적이지만, 여러 매체에서 이야기된 정보를 더 많이 접하고 통합할수록 풍부해지는 것은 말할 것 없다.  29)마노비치, 앞의 책, 85~86쪽.

    4. 뉴미디어 시대의 연극 : 로베르 르파주의 <안데르센 프로젝트>

    캐나다 퀘벡 출신의 연출가 로베르 르파주는 자신의 공연에 현대의 과학 기술이 가져온 다양한 테크놀로지를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상당히 아날로그적으로 느껴진다. 이것은 작품의 서사 구조가 전통적 드라마 구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적어도 처음과 끝이 있는 이야기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테크놀로지가 사용되었다고 해도 배우의 연기가 주도해 나가는 연극 고유의 표현 방식에 급진적으로 도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의 작품은 “르빠주의 기계 장치는 완벽하게 통제되면서 무대를 지배하기보다는 서사의 흐름과 배우의 연기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행한다”(신정아), “르빠주의 연극은 첨단 테크놀로지를 활용하여 무대와 객석 간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기계나 물신 숭배가 아니라 사랑과 따스함을 지닌 인간성이다.”(이선형)와 같이 평가되어왔다.30)

    르파주의 작품에서 테크놀로지 사용이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이유는 일차적으로는 영상의 적극적 사용 때문이다. 영상 매체가 만드는 시각적 효과가 우리가 관습적으로 무대에서 보았던 공간을 왜곡해서 보여주고 환상적 시각효과를 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물이 갑자기 스크린 안으로 들어간다거나(<안데르센 프로젝트>의 도입부, 자막과 함께 그라피티를 하는 장면), 세탁실이 갑자기 우주 공간으로 변환되면서 인물이 무중력 공간을 유영하는 장면(<달의 저편>의 세탁기 장면) 등이 예이다. 그런나 관객들이 르파주의 공연을 보면서 하이테크놀로지가 사용되었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실제 작품에 사용되는 기계 장치들은 프로젝터, 캠코더, 비디오 등의 다소 평범한 것들이라고 한다.31) 시각적 효과를 만듦에 있어서도 그는 스크린, 거울, 대소도구 등을 비디오 프로젝션과 결합하는 방법을 선호하는데, 그러나 이러한 평범한 장치의 사용이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연결되면서 장면이 관객에게 시각적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이며 사용된 것이 첨단기술이라고 느끼게 된다. 그의 미장센을 ‘techno-en-scene’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는 작품의 무대 환경을 구축하는 데에 작화, 건축, 오브제 제작 등에 기초한 전통적 방식보다는 영상을 기반으로 하는 미디어 테크놀로지에 의존한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디지털 영상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우리를 더욱 더 사실주의적 환각에 몰입하게 만들려는 욕망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시각예술에 있어 회화, 사진, 영화로의 발전과 각 매체 상호 간의 관계는 이러한 문제를 가장 확연히 보여준다. 실제를 그대로 재현하는데 있어서는 그 어떤 매체와의 경쟁도 불가했던 영화의 발명은 역설적으로 연극으로 하여금 르네상스 이후부터 무대가 지속적으로 추구해왔던 사실적 환영을 무대 위에 구축하려는 욕망과 결별하게 만들었다. 반면 영상 테크놀로지는 평면 스크린을 벗어나는 3D, 4D의 발명, 디지털 애니메이션의 실사화 등과 같이 점점 더 현실의 체험에 가까워지려는 욕망을 보였다. 오감을 사로잡고 매체를 지우려고 하는 오늘날의 영상 기술은 실재하는 사물들 속에 자신이 위치하는 듯한 환각을 관객에게 제공하고자 노력한다. 그런데 영상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르파주의 공연은 연극이 사실주의적 무대 환영과 결별했던 그 지점의 관습을 다시 무대로 가져오는 듯 보인다. 그의 미장센은 관습적인 프로시니엄 무대를 요구하며, 원근법에 기초해 무대 환영을 만들었던 무대 관습을 종종 무대에 다시 불러온다. 작화와 건축과 같은 수공업적인 무대 구현은 하지 않지만, 테크놀로지를 이용하여 프로시니엄적 공간의 전제 하에 무대 배경을 구현하는 방식은 연극적 환영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의 작품에는 공연예술의 오랜 관습과 새로운 실험이 복잡한 양상으로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작품에서 어떤 표현과 양식이 새로운 것이고 무엇이 전통적인 것인가를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오늘의 문화는 시간 조직화 미디어인 영상에 익숙하며, 공간의 개념 역시 문자 문화의 시대와는 달라졌다. 영화의 발명 이후 우리의 문화 인터페이스 전반이 영화적 양식에 익숙해져 있다. 미디어 학자 이재현은 이 점을 강조하면서, “모든 대상과 경험을 줌, 틸트, 팬, 트랙, 달리 등과 같은 영화적 문법을 통해 ‘공간화(spatialization)’하기에 이르렀다”32)고 말한다. 영화가 아닌 서사 장르, 예컨대 소설, 희곡, 만화 등에서도 영화적으로 공간이 비약하고 시간이 편집되는 것을 오늘의 관객은 낯설어 하지 않는다. 르파주의 연극은 이러한 영화적 편집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실제로 르파주는 자신의 작업을 ‘연극성을 지닌 영화적 퍼포먼스’라고 규정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는 “우리는 과거의 스토리텔링 방식을 좇고 있다. 무감각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과거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사람들은 너무나도 현대적이다. (중략) 그들은 플래시백(flash-back), 플래시포워드(flash-forward), 점프컷(Jump-cut) 등의 기능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심지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까지도 말이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기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곧 지루해하고 말 것이다.”33) 라고 말한다.

    작화나 건축을 대신한 영상의 사용이 가져오는 장점 중 하나는 무대 전환의 속도이다. 공연예술의 특징이자 한계였던 시공간의 제약은 이러한 영상 테크놀로지로 극복되는 듯 보인다. 영상은 무대 위에서 빠른 공간의 전환을 가능케도 하지만 또한 시간의 편집도 가능하게 만든다. 영화 언어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시간의 편집이 무대 예술 속에도 도입되는 것이다. 그런데 연극은 영상 매체를 다시 재매개하기도 한다. <안데르센 프로젝트>에서 주인공이 위치한 장소를 프로젝터를 통한 실사 영상으로 제시하는 방법들이 일차적으로 원하는 바는 사실의 재현인 듯 보인다. 파리의 지하철, 오페라 극장의 내부, 파리 시내, 공중전화 박스 등 실제 공간을 촬영한 장소는 성실하게 장소 자체의 지시적 의미를 무대 위에 구현하며 이전에는 건축적 공간의 구축으로만 가능했을 결과들을 미디어를 이용하여 간단히 성취해 낸다. 그러나 이 장면의 영상은 그러한 사실적 구현이 일차적으로 추구하는 투명성과 비매개성을 성취하면서도, 역설적으로 그것이 연극 공연장이며 그 영상 앞에는 실존하는 몸을 가진 배우가 있다는 그 사실 때문에 매개성을 드러낸다.

    르파주의 공연에서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함께 어우러진 잘 훈련된 배우의 신체 동작은 관객에게 시각적 충격을 주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안데르센 프로젝트>의 도입 부분에서 라텍스로 제작된 스크린 활용이라는 아이디어 덕분으로 눈 앞에 실존하는 배우가 투사된 영상 ‘안으로’ 들어가는 듯한 장면은 극의 초반부터 관객에게 강한 인상과 충격을 준다. <달의 저편>에서는 우주 공간을 유영하는 듯한 느리고 편안하지만 잘 통제된 배우 움직임은 관객을 우주 저 편의 환상의 시공간으로 데리고 가는데 큰 기여를 한다. 그의 작품에서 시간과 공간을 왜곡하거나 시각적 충격을 주는 환상적 장면을 창조하는 일은 단순한 영상과 테크놀로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 안에서 움직이는 배우의 실존하는 신체가 함께 함으로써 구현된다. 이럴 때 관객은 르파주가 만들어주는 아름답고 신비한 가상현실에 몰입되는 동시에, 그 가상현실 속에 현존하는 배우의 몸으로 인해 가상현실의 가상성, 매개하는 미디어의 존재성을 강하게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모순된 지점 사이의 진동이 <안데르센 프로젝트>의 극장성, 연극성을 만든다. 영상 언어의 매체적 특징이, 공연예술인 연극 안에서 기존의 자신의 매체 특징과는 다른 역할과 위상을 갖게 되는 것이다. 디지털 미디어가 점점 물질적 구체성을 상실함에 따라 역설적으로 신체의 물리적 현존과 사물의 물질성이 더욱 부각된다는 것은 주목할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을 르파주의 작업은 잘 드러낸다. 그의 배우는 아크로바틱을 방불케 하는 완벽한 신체 움직임을 수행한다. 뉴미디어가 투명한 비매개성(immediacy)와 불투명한 하이퍼매개성(hepermediacy)를 통해 점점 관객의 감각의 모든 부분을 채우려고 욕망하고 더 현실과 가까워지기를 욕망할수록 그 안에서의 신체의 현존과 신체의 감각적 반응은 두드러진다.

    시공간의 빠른 전환은 연극의 전통적 서사 구성 방식도 변화시킨다. 총 29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진 <안데르센 프로젝트>의 특징 중 하나는 공간의 비약적 전환과 장면의 영화적 편집이다. 작품의 시작 부분의 장면 연결은 이러한 특징을 잘 드러낸다. 작품의 시작은 파리 오페라 하우스에 서 있는 프레데릭의 장면이다. 프레데릭의 관객 연설이 끝나면 장면은 비트가 강한 음악과 함께 파리의 한 귀퉁이의 벽면이 된다. 방금까지 프레데릭이었던 배우가 후드가 달린 점퍼로 갈아입을 동안, 프로젝터가 보여주던 파리 오페라 극장의 객석 장면은 흰 벽으로 바뀐다. 후드 달린 점퍼를 입고 있는 인물은 이제 모로코계 이민자 라시드이다. 그는 흰 벽에 스프레이로 그라피티를 시작한다. 그가 그리는(실제로는 프로젝터가 순차적으로 완성 과정을 보여주는 이미지) 것은 안데르센이다. 안데르센을 그릴 동안 그의 좌측으로 영화처럼 작품의 제목, 참여한 스텝들, 각색자, 연출가 등의 정보가 자막으로 제시된다. 모든 자막 정보 제시가 끝나고 안데르센의 그라피티도 완성되면 인물은 그 장소를 떠난다. 그러면 장면은 다시 핍쇼장으로 변한다. 라시드가 청소 도구를 가져와 청소를 시작한다. 이렇게 약 5분여의 시간 동안 공연은 사건이나 인물보다는 장면의 이미지 편집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이 장면의 전환은 전통적 극장 예술의 장면 전환보다는 영화 커트와 커트의 몽타주, 장면과 장면의 연결에 더 가깝다. 장면 전환의 논리나 매끄러운 서사의 이음새를 의도하기보다는 오히려 비약과 변증법적 충돌을 의도한다. 프레데릭이 안데르센 박물관을 방문하는 장면은 적절한 예이다. ‘안데르센 프로젝트’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프레데릭의 장면이 끝나고 짧은 암전 후 다시 불이 밝혀진 무대에는 오래된 여행 가방이 놓여 있다. ‘전시 번호 7, 안데르센의 여행 가방’이라는 내레이션이 흐른다. 한동안 무대 위에는 아무도 등장하지 않으며 여행 가방만이 조명을 받으며 홀로 놓여있다. 이때 장면 위로 나레이터의 목소리가 다시 흐른다. “한스 크리스티앙 안데르센은 여행에 매우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로 시작되는, 그가 여행을 좋아하며, 화재에 대한 강박증 때문에 항상 밧줄을 가지고 다녔다는 에피소드가 울리는 동안 우리가 보는 것은 무대 위에 놓인 여행 가방이다. 이곳은 안데르센 박물관이며, 관객이 보고 있는 것은 전시관의 전시물이다. 내레이션은 프레데릭이 듣고 있을 오디오 가이드일 것이다. 그러나 이 장면은 그러한 설명 없이 그냥 제시된다. 전시물 7번에 대한 설명이 끝나면 좌측으로부터 여성의 드레스가 입혀진 토르소 마네킹이 무대 중앙으로 나온다. 나레이터의 목소리가 다시 시작된다. ‘전시 번호 8 예니 린드’, 다음 전시물로 시선이 이동된 것이다. 이어서 안데르센과 예니 린드의 에피소드가 낭독된다. 예니 린드의 에피소드는 안데르센의 역을 맡은 배우와 예니 린드 역을 담당하는 마네킹의 연기로 관객 앞에 시각적으로 재현된다. 길지 않은 이 장면이 끝나면 배우는 안데르센의 의상을 벗고 프레데릭의 가죽 잠바로 갈아입는다. 의상을 바꿔 입음으로써 이제 그는 도이치 반 832호 열차에 앉은 프레데릭이 된다. 그의 뒤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이 비추어지면서 그가 앉은 열차의 이동을 표현한다. 이 장면들의 전개 방식과 연결에서 보듯, 장면의 전개는 전통적 연극 문법보다는 영화적 편집에 가깝다. 전시물에서 전시물로 시선을 옮기는 것이 그 주체인 인물 없이 전시물 이미지 컷들의 편집으로 진행된다. 또 장면과 장면의 전환이 마치 영화의 점프컷처럼 별다른 설명 없이 진행되는 것 역시 전통적 연극적 장면 전환은 아니다.

    이 작품이 사용하는 이런 방식의 장면 편집은 빠른 장면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유용성만 지닌 것이 아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세 개의 다른 차원의 리얼리티를 가진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변증법적으로 충돌, 의미화 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중요한 형식이다. 작품에서는 프레데릭을 중심으로 한 현재, 안데르센을 중심으로 한 과거, 그리고 안데르센의 동화 드라이아드의 허구가 서로 교차된다. 세 가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시공간, 세 가지 다른 차원의 리얼리티가 서사적 논리가 아닌 이미지와 연상에 의해 전개되는 방식은, 이 작품 속 현실과 가상이 자연스럽게 경계를 허물고 공존할 수 있도록 만든다. 논리와 의미를 깨닫는 것은 관객이 장면들의 이미지와 정서를 먼저 받아들이고 난 한참 후이다. 예컨대 마지막 장면에서 건물에 화재가 났지만 아파트 창문에서 뛰어내릴 방도가 없어 그저 망연자실 창가에 선 채 안데르센과 드라이아드에 대해 생각하는 프레데릭은, 평생 화재에 대한 공포로 여행 시 언제나 밧줄을 가지고 다녔다는 안데르센의 에피소드가 다시 겹쳐지면서 장면의 의미를 생성한다. 장면의 몽타주를 완성하고 의미를 생성하는 것은 관객의 머릿속에서 최종적으로 구현된다.

    이렇듯 현실과 환상이라는 두 가지 다른 차원의 리얼리티가 경계를 허무는 것은 르파주 공연의 내용적 특징이기도 하지만 그가 선택한 형식적 특징이기도 하다. <안데르센 프로젝트>의 프롤로그는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상징적이다. 공연이 시작하면 파리 오페라 극장의 붉은 커튼이 열리고 프레데릭이 무대로 나온다. 스크린은 이제 파리 오페라 하우스의 객석을 보여주고, 무대 중앙으로 온 프레데릭은 우리를 등지고 선다. 관객은 그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없지만, 대신 전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을 통해서 연설을 하는 그의 클로즈업 된 얼굴을 볼 수 있다. 프레데릭의 복사된 이미지가 진짜 관객을 마주하고 있는 반면, 프레데릭 역을 맡은 배우는 복제된 가상의 관객인 파리 오페라 하우스의 관객과 마주서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 사용된 영상은 파리 오페라 하우스의 복제와 재현, 클로즈업을 통한 대상 인물과 관객의 동일시라고 하는 대단히 관습적인 영상 문법이다. 그러나 이 관습적 영상의 의미는 라이브 공연 속에서 재매개된다. 이제 두 가지 다른 차원의 리얼리티가 혼재하면서, 극이라는 허구 속 내용에 몰입된 리얼리티가 진짜인지, 현존하는 배우의 몸과 현존하는 관객의 몸이라는 리얼리티가 진짜인지를 말하기는 어려워진다. 이것은 그저 두 개의 다른 차원의 리얼리티리며, 그나마 그 경계도 모호한 세계들이다. 르파주은 공연은 디지털 시대에 우리가 처한 현실이자 실존적 조건에 대한 은유처럼 보인다. 실재와 가상, 현실과 허구의 경계는 이미 우리 사회 안에서 해체되고 있는 것이다.

    르파주의 공연이 보여주는 테크놀로지를 사용한 시각적 효과는 우리의 오감을 사로잡고 우리를 무한한 환상의 세계로 데려간다. 그러나 르파주 공연의 중요성은 그의 작품이 뉴미디어 시대의 우리 연극이 당면한 여러 가지 문제와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의 공연은 연극 언어의 오랜 관습을 다시 불러와 현대 연극에서 재매개하기도 하고, 뉴미디어를 연극 안에서 재매개하기도 한다. 우리의 감각과 지각 방식의 변화와 함께 연극의 서사 구조를 비롯한 미학적 특징들도 변화하고 있다. 르파주 공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이것이다. 뉴미디어 시대의 연극은 무엇인가 라는 문제제기를 우리는 르파주를 통해 본다.

    30)신정아, 「일인극 <안데르센 프로젝트>를 통해 본 총체적 작가 로베르 르빠주의 연극 세계」, 『외국문학연구』 29호, 2008. 231쪽: 이선형, 「퀘벡 연극, 변방과 중심 –로베르 르빠주의 <안데르센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프랑스문화예술연구』 32집, 2010. 613쪽  31)르파주 공연의 테크놀로지와 장면 구성의 원리 등에 대해서는 남지수, 「로베르 르파주 공연의 연극성 연구」,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8. 20~24쪽 참조.  32)이재현, 『멀티미디어와 디지털 세계 : 뉴미디어란 무엇인가?』, 커뮤니케이션북스, 2004, 110쪽.  33)Maria M. Delgado & Paul Heritage eds.,In contact with the God? Directors talk theatre,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97, p.148. 남지수, 「로베르 르파주 공연의 연극성 연구」, 24~25쪽 재인용.

    5. 결론

    연극예술과 뉴미디어의 문제는 무대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표현의 확장과 같은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사용해 왔던 연극 언어와 문법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자 연극의 미적 체험, 연극의 장르적 개념에도 문제제기를 하는 일이다. 더불어 이것은 우리 사회 안에서 연극이 예술로서 어떤 위상을 갖는가 하는 문제와도 관련을 갖는다. 뉴미디어를 살피는 것은 새로움을 좇는 일이 아니다. 어떤 미디어도 고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미디어도 고립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때문에 뉴미디어는 올드 미디어와의 관계 속에서 탐구할 때 뉴미디어와 뉴미디어가 가지고 온 변화를 파악할 수 있다. 우리가 뉴미디어를 사용한 연극을 보면서 새롭다라고 느끼는 것이 사실은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으며 잊힌 관습이 재맥락화 된 것일 수도 있다. 단순한 기술적 발전과 효용의 문제를 떠난 이것을 뉴미디어 환경, 혹은 뉴미디어 조건 하의 연극 문법과 연극 언어의 변화로 검토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뉴미디어 아티스트인 안 마리 슐라이더는 “리얼리티는 구현되는 것이다.”34) 라고 말한다. 우리 일상의 많은 부분이 가상현실에 의존하고 있는 오늘날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환상인지를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는 미디어 속에 살고 있으며 미디어를 매개로 존재한다. 이러한 점에 주목하면서 볼터와 그루신은 “뉴미디어는 자기규정의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한다.35) 우리는 소설이나 영화 속 인물들을 통해 스스로를 동일시하고 자기규정을 해온 것을 넘어서, 이제 가상현실 시스템이나 그래픽 게임, 디지털 방식으로 만들어진 영상물에도 동일시를 하며, 전화나 인터넷과 같은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매개에 의존하여 존재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르파주를 비롯한 뉴미디어 시대의 연극이 지니는 중요한 의미도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뉴미디어 시대의 연극은 뉴미디어를 통해 연극을 재매개하고 또 연극 안에서 뉴미디어를 재매개하기도 하지만, 연극과 우리의 관계를 또한 재매개한다. 무엇보다도 현실과 환상을 오가고 가상현실과 물리적 현존을 넘나드는 르파주의 <안데르센 프로젝트>와 같은 작품은 디지털 시대를 사는 우리의 정체성과 실존에 대한 문제를 깨닫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문제를 던져준다.

    34)Mark Tribe, Reena Jana, 『New Media Art』, TASCHEN, 2008, 마크 트라이브, 리나 제나, 황철희 역, 『뉴미디어 아트』 마로니에북스, 2008, 82쪽.  35)볼터, 그루신, 앞의 책 2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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