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의 사례 연구 ―그린피그의 <두뇌수술>, <아무튼백석>, <나는야쎅스왕>을 중심으로―

A case study on production dramaturg : Dramaturgical works of <Brain Surgery>, <Anyway Baik Seok>, and <I am a Sex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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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이 연구는 드라마투르그로서 동일한 극단 및 연출과 함께 작업한 세 작품의 제작 과정을 구체적으로 분석함으로써 현장 작업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분석의 대상은 그린피그의 공연 <두뇌수술>, <아무튼백석>, <나는야쎅스왕>의 작업 과정이다. <두뇌수술>은 1945년의 희곡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아무튼백석>과 <나는야쎅스왕>은 공동창작 작품이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 희곡 텍스트가 선행한 작업의 경우 드라마투르기 작업 과정의 체계가 비교적 잘 잡혀 있었다. 반면, 선행하지 않은 작업의 경우 과정의 체계가 불분명하고 혼란과 충돌이 상대적으로 컸다. 결국 작업의 체계성과 합리적 의사 결정, 이 두 가지 사항은 희곡 텍스트가 선행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사이의 가장 큰 차이이며 안정적인 작업 진행이라는 점에서는 좋지만 새로운 드라마투르기의 출현과 관련해서는 오히려 제한이 될 수 있다. 둘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세 작품 모두 포스트드라마적인 작업 과정과 결과물을 보여준다. 희곡이 선행했건 선행하지 않았건, 우리가 만들 작품의 청사진을 그려볼 수 없었다는 점, 희곡이 선행한 경우마저도 해당 희곡을 공연의 다른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재료로서 파악하였다는 점 등은 포스트드라마적인 속성과 관련된다고 본다. 셋째, 세 작업 모두에 있어서 연극 및 드라마투르그 역할에 대한 메타적 인식이 늘 크게 작용하였다. ‘연극이란, 공연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경계를 스스로건, 협의 과정에서건 끊임없이 넘나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으며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변화를 겪어야 했다.

    이러한 분석 내용을 바탕으로 포스트드라마 작품의 드라마투르그 역할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성찰들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드라마투르기는 문학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작품을 얼마나 제대로 읽어내는가에 달려있기보다는 그것이 공연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 어떤 의미를 줄 것인가에 더욱 밀접하게 관련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드라마투르그의 작품 분석이 그대로 공연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서 분석 자체가 공연의 하나의 재료로 사용될 수 있다는 식의 개입 방식도 필요하다. 둘째, 공동창작의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을 사전에 정의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곧 불분명하다는 의미인 것은 아니며 그 역할은 분명히 존재하되 고정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그런 차원에서 공동창작이 산으로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메타적 인식의 주체로서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을 규정할 수 있으며, 이러한 메타적 인식과 관련된 협의 과정을 공동창작 과정과는 별도로 설정해 둘 것을 제안할 수 있다.


    This study aims at providing a base of deep introspection on field works by concretely analyzing each processes of three productions in which I worked with the same theatre and director. Analysis objects are working processes as a dramaturg of <Brain Surgery>, <Anyway, Baik Seok>, and <I am a Sexking>. <Brain Surgery> is made on the basis of a play written in 1945, whereas <Anyway, Baik Seok> and <I am Sexking> are devised theatres.

    As a result, I have discovered several characteristics as follows. First, in the case of the production based on a precedent script, dramaturgical works were relatively well-organized. On the other hand, in the case of the production which has no precedent script, the system of dramaturgical works was unclear, confusing and in discord. The systemicity of the process and rational decision making, these are the main differences between those two cases. In addition, these are good in terms of stable working process but have limits in terms of emergence of new dramaturgy. Secondly, all those three productions showed postdramatic processes and outputs. Regardless of the existence of precedent scripts, the following two facts are evidences that all these three productions are postdramatic. One is the fact that we couldn't make any blueprint on the final output during the process. The other is the fact that we considered the script(even in the case of the precedent script) as one of the materials like any other factors of the performance. Thirdly, metacognition towards the theatre itself and towards the role of a dramaturg formed a great part of all three productions. I had to constantly cross the borderlines of the theatre concept and the role of a dramaturg.

    On the basis of these analyses, I could draw several introspections as follows on the role of a dramaturg in the postdramatic theatres. First, Dramaturgy should be related more closely with actual influences which a dramaturg makes for the final output, rather than with literary sensitivity which makes a dramaturg read the text properly. Therefore we need to free from the thought that the text analysis done by a dramaturg should be carried out as it is or in a literarily proper way. In other words, a dramaturg's work itself can be another source for the production without reference to offer good analysis. Secondly, even though we cannot preliminarily define the role of a dramaturg in the devised theatre, it does not mean that it is unclear. This role certainly exist but not steady. In this sense, we can characterize the role of a dramaturg in the devised theatre as a main agent of metacognition. So I propose that we install processes of consultation for this metacognition works apart from the devising process.

  • KEYWORD

    드라마투르그 , 드라마투르기 ,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 , 포스트드라마 , 공동창작 , 디바이징 , 방법을 궁리해 가는 연극 , 메타적 인식 , 공연 , 연극 , 그린피그 , 두뇌수술 , 아무튼백석 , 나는야쎅스왕

  • 1. 서론: 연구의 의의

    본 연구는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의 실제 사례 분석을 목적으로 한다.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production dramaturg)란1) 하나의 역할로서의 드라마투르그가 서지 분석 등의 문학적 목적에만 머물지 않고 공연 제작의 전 과정에 걸쳐 실질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연구자처럼 한 극단과 지속적으로 함께 작업을 해왔지만 각각의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경우 각 작업 과정들의 특성을 비교하는 일이 의미 있을 수 있다. 극단이나 연출 성향의 특수성보다는 작업 자체의 특수성에만 주목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연구자가 드라마 투르그로서 극단 그린피그 및 윤한솔 연출과 함께 한 5회의 작업 중 <나는야쎅스왕>, <아무튼백석>, <두뇌수술> 세 작품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다. <나는야쎅스왕>은 2011년 3월~5월, <아무튼백석>은 2011년 9월~11월, <두뇌수술>은 2011년 12월~2012년 3월에 걸쳐 제작된 공연이다. <나는야쎅스왕>과 <아무튼백석>은 희곡이 미리 주어지지 않은 채 공동창작의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졌으며, <두뇌수술>은 극작가 진우촌의 1945년 희곡을 바탕으로 만들어 졌다.

    각각의 공연 개요를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야쎅스왕>은 “쎅스를 하고 싶지만 쎅스를 하지 못하고 쎅스에 관한 지식을 탐닉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실제로 우리가 공연준비를 하면서 내내 공부했던 다양한 성 담론들을 보여준다. 공연 자체가 일종의 독서인 셈이며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말했던 ‘가장 적극적인 독서로서의 글쓰기’2)에 가까운 공연을 구현하고자 한 셈이다. <아무튼백석> 역시 공동창작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하지 만 이 작품은 전제나 방향을 미리 세우지 않은 채 백석이라는 시인을 둘러싼 수많은 정보들을 탐색하고 고민하여 공연 텍스트를 구축해 나갔다는 점에서 <나는야쎅스왕>과는 차이가 있다. 또한 <나는야쎅스왕>에서는 배우들이 등장하지 않고 ‘텍스트를 읽는 행위’ 자체가 주인공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아 무튼백석>에서는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재현하는 무언가가 에피소드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러나 이 에피소드들은 매우 파편화된 형태로 제각기 존재하는 한편, 이 중 몇몇은 우리의 작업 과정을 다큐멘터리적으로 반영하는 성격의 것이었다. <두뇌수술>은 1945년 발표된 진우촌의 희곡을 무대에 올린 작품이다. 그러나 마치 타란티노의 영화 <펄프픽션>과 같이 몇 가지 B급 영화적 요소— 미스터리물의 분위기 구현, 더빙, 슈퍼맨과 원더우먼의 등장 등—들을 포함시 켰다. 원작의 대사나 상황을 전혀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 이 요소들을 그대로 충돌시킴으로써 텍스트의 이중적인 재현을 꾀한 셈이다. 어쨌든 이 작품은 세 공연 중에 희곡 텍스트가 선행했던 유일한 작품이었다.

    결국 이 세 공연에서의 드라마투르기 작업 및 드라마투르그로서의 역할은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작업 과정의 성격상, <두뇌수술>은 희곡 텍스트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에서 공동창작이었던 <나는야쎅스왕>과 <아무튼백석>과는 더욱 구별되는 지점이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포스트드라마의 작업 과정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이거나 각 작업의 개별적 특성에 따른 차이가 더 크게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 연구의 목적은 동일한 극단 및 연출과 함께 한 드라마투르그의 일련의 작업들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기술함으로써 각 작업별로 어떠한 방식으로 개입이 이루어졌으며, 나아가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드라마투르그 작업에 관한 성찰의 계기를 마련하는 일이다.

    1)이와 함께 드라마투르기(dramaturgie)와 드라마투르그(dramaturg)의 의미를 간단히 짚고 넘어가자면, 드라마투르기는 원래 ‘희곡을 작품으로 실현시키다'라는 그리스어에 어원을 둔 말로 일반적으로 희곡과 연극에 있어서 이론적이고 실제적인 전문분야를 다루는 작업을 지칭한다. 이 용어는 한 편으로 좁은 의미에서 희곡의 문학적 법칙과 본질에 관한 이론, 또는 공연의 실제에 있어서 희곡과 연극의 이론적 뒷받침을 해 주는 조언자의 활동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 활동을 전문적으로 행하는 사람을 드라마투르그(Dramaturg)라고 한다.  2)Roland Barthes, 김웅권 역, S/Z, 동문선, 2006, pp. 20~21.

    2. 사례 분석의 전제

    사례 분석(Case Study)은 질적 연구에서 자주 활용하는 연구 방법 중 하나로, 일반화할 수 있는 결론을 이끌어내진 못하지만 대상의 기술적(descriptive) 속성을 바탕으로 대상에 대한 심도 깊은 통찰을 가능하게 한다.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에 대한 사례 연구가 의미를 가지는 것도 이러한 연구 방법상의 특징과 관련 된다.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에 대한 논의는 현장 작업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한 현장 연구(field study)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는 개별 작업의 특성에 따라 그 과정이나 성격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모든 개별 작업들은 개별 작업만의 특별한 상황이 존재하는 법이다. 그리고 사례 분석의 목적은 일반화의 그물망 사이를 빠져나가는 이러한 개별적 특성들의 기술에 있다. 그러므로 사례 분석은 동일한 구성원—극단 형태의—과 함께 한 각기 다른 과정의 작업들을 통해 드라마투르그의 역할과 관련된 성찰을 이끌어내기에 가장 적합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2.1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와 관련된 기존 논의들

    터너와 번트(Turner & Behrndt)3)는 드라마투르그의 작업을 ‘이론과 실제의 다리 역할’로 정의한 바 있다. 즉, 이론적인 아이디어를 실제 수행으로 옮겨가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여러모로 모호하다. ‘이론과 실제’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이 실제 현장에서 얼마나 적합한 구분이 될 수 있는가도 의심스러우며, ‘다리’라는 표현도 미심쩍은 은유에 해당한다. 사실, 실제 현장에서 작업하는 드라마투르그들은 이 모호한 ‘다리’라는 개념에 묶여서 우왕좌왕 하거나 심리적 좌절을 느끼는 때가 많지 않았던가?

    정의를 내리는 데 있어서 어려움이 있기는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도 마찬가지다.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라는 개념과 관련하여 두 가지 질문이 떠오를 수 있다. ‘드라마투르그로서 개입하는 방식이 기존의 드라마투르그라는 명칭과 다른 것인가?’가 하나의 질문일 것이며, ‘연습 과정에 얼마나 참여하는지로 구분 하는 것인가?’가 또 하나의 질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일관적인 개념 구분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드라마투르그 혹은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여기서는 ‘실제 작업 현장에 투입되어 드라마투르그라는 직함 하에 작업의 첫 단계부터 마지막 단계까지 모두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하는 브레히트(Brecht)적인 정의를 전제로 삼기로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의 사례 자체가 많지 않으며 이론적인 뒷받침도 부족하다. 해외의 경우 과거에는 주로 역사적 차원의 기술에 중점을 두었지만 최근 들어 동시대 공연에서의 드라마투르기 작업 과정을 바탕으 로 비교적 구체적인 기술이 이루어지는 논저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프리드먼 (Friedman)4), 린과 사이즈(Lynn & Sides)5), 바튼(Barton)6) 등에서는 직접 경험을 바탕으로 한 구체적인 사례 기술을 목격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적은 수의 사례더라도 그 과정을 꼼꼼하게 기술한다면 그 나름의 의미가 있을 텐데 이들 논저들은 자신이 작업한 사례들의 단편적인 에피소드들을 소개하는데 그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이러한 방식은 일종의 매뉴얼 혹은 작업상의 팁을 작성하는 데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겠으나 동시대 드라마투르그의 작업에 대한 어떤 비전이나 융통성 있는 대안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이에 비해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의 작업에 대한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정리를 시도한 경우도 있는데, 럭허스트(Luckhurst)7)는 역사적 흐름을 꼼꼼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새로운 연극에서의 드라마투르기 작업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적절히 보여주고 있다. 터너와 번트(Turner & Behrndt)8)는 기존의 드라마투르그 개념은 물론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나 방법을 궁리해가는 연극 (devised theatre)에서의 드라마투르그 작업 등을 개념적인 차원에서 정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럭허스트(Luckhurst)보다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 이들 저서들에서 구체적인 사례들은 역시 에피소드적 성격을 취하기는 하나 단순한 단상을 넘어서서 개념화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사실 드라마투르그 작업의 특성상 일정한 작업 매뉴얼을 마련한다거나 지침을 작성해 놓는 일은 쉽지 않다. 가령 그러한 매뉴얼을 마련해 놓는다 해도 다양한 작업환경과 작업 방식 속에서, 그리고 끊임없이 변화의 요구에 시달리는 작업의 성격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큰 실효성을 거둘 지도 의심스럽다. 실제 현장에서의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은 프로덕션 작업의 성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으며 융통성을 발휘할 필요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구체적인 사례를 분석한다 함은 어떤 고정된 매뉴얼을 제시하려 하거나 그러한 매뉴얼의 필요성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렇다고 한정된 사례를 무리하게 일반화시키거나 억지로 결론을 이끌어 내려는 것도 아니다. 본고에서는 연구자가 직접 참여했던 특정 사례의 분석을 통해 동시대 연극 제작에 참여하는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가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였는지 보여주고, 또 이를 바탕으로 드라마투르그 역할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데 의의를 두고자 하기 때문이다.

       2.2 포스트드라마의 드라마투르기

    한스-티스 레만(Hans-Thies Lehmann)이 ‘포스트드라마’라는 개념을 연극학 이론의 중심으로 이끌어 온 이후, 소위 포스트드라마적인 연극의 특징에 대한 논의들이 2000년대의 화두로 각광받아 왔다. 레만은 그의 주저 「포스트드라마 연극」9)을 통해 20세기 후반 세계의 주목을 받은 연출가들의 작업을 분석하여 포스트드라마가 연극사에서 차지하는 미학적, 정치학적 의미를 이끌어냈다. 이들에게 ‘포스트모던 연극’ 대신 포스트드라마라는 용어를 붙임으로써 이들 작업이 포스트모던이라는 거대한 세계 문화사적 조류의 일환임을 암시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연극사적인 맥락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것이다10). 김형기11) 역시 포스트모던 연극과 포스트드라마 연극을 구별하면서 “포스트드라마 작품이 포스트모더니즘과 일치하는 공통분모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변화된 연극 관념을 파악하고 분석하는 일”이라고 말함으로써 연극사 차원의 맥락을 강조하고 있다. 레만에 의하면, ‘포스트드라마적(postdramatic)’이라는 말은 새로운 시도들을 과거의 드라마적인 연극과 연결시키기 위하여, 즉 연극 텍스트들의 변화들이라고 하기보다는 표현을 연극적 모드들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다12). 또한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담론과 진실을 해체함으로써 진실을 유예하고 위계구조를 해체하며 진실을 비담론적 신체유희로 대체한다. 결국 레만이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미학을 전개해 나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모더니즘과의 결별이 가장 큰 화두였던 포스트모더니즘의 담론 전개와 달리 “희곡적 문학으로부터 연극을 분리하고 이를 통해 연극의 자율성을 회복하며 또 그에 따라 연극이라는 예술매체 자체에 대한 자기 성찰 등을 핵심으로 하는 역사적 아방가르드에서 그 연원을 찾는 일이다”13).

    포스트드라마의 특성과 관련된 이러한 논의들 중 본 연구자가 가장 주목하는 지점은 탈(脫)희곡적 혹은 탈(脫)드라마적 성향과 관련된다. 완결된 한 편의 ‘드라마’를 구성하기 위한, 목적 및 결과 중심의 작업 과정을 거부하는 것, 즉 드라마 자체보다는 공연의 제작 과정 자체에 더욱 초점을 맞추는 것 역시 포스트드라마의 한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백석>과 <나는야쎅스왕>은 공동창작의 과정을 거치면서 탈(脫)드 라마적 텍스트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포스트드라마 작품으로 설명할 수 있다14). <아무튼백석>은 실존인물의 삶 자체가 공연 텍스트의 재료가 되었으나 전기적인 사실들 및 백석의 작품들에 접근하는 다양한 방식들을 아무런 서사적 맥락 없이 병렬적으로 보여주었다. <나는야쎅스왕>은 텍스트 읽기 행위 자체를 통해 다양한 성(性)담론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전시하는 작품이다. 이 두 작품은 공연 대본에 해당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출발하였으며 공동창작 과정을 거쳐 만들어낸 공연의 텍스트 역시 희곡의 성질이기보다는 그 자체로 수행적 텍스트의 성격에 가까웠기 때문에 포스트드라마의 주요 특징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포스트드라마가 제작 과정과 결과물을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미루어 볼 때, 그리고 탈(脫)희곡적이라는 개념이 희곡 텍스트가 주어져 있느냐 아니냐의 구분이라기보다는 주어진 텍스트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두뇌수술> 역시 포스트드라마의 범주에서 설명 가능하다. <두뇌수술>은 확실한 희곡 텍스트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원작의 내용 자체는 거의 수정을 가하지 않았지만 근본적으로 희곡 자체에 대한 저항이 바탕이 된 공연이었기 때문이다. 즉 주어진 원본에 대한 의심 및 거부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연극, 결국 기댈 중심을 스스로 해체하고 전복하는 아이러니를 바탕으로 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포스트드라마 범주로 포함시킬 수 있다. 결국 포스트드라마는 드라마의 부재나 거부뿐만 아니라 드라마를 다루는 새로운 방식들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1945년 진우촌의 희곡 <두뇌수술>을 공연으로 만들었다는 점 자체만 놓고 보면 포스트드라마의 틀로 설명하는 데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음 장의 분석에서 드러나겠지만, 공연 <두뇌수술>은 원작 희곡의 의도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았으며 오히려 원작의 틀과 대립되는 연출의 틀을 별도로 세우고 양자가 충돌하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고자 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포스트드라마적이라 할 수 있다. 유봉근에 따르면,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드라마적 요소들’에 대한 자기성찰, 해체, 그리고 분리 과정의 결과물로 담론화한다. 이 과정에서 드라마적 요소가 전적으로 부정되기보다는 새로운 특징들이 도입되는 것이다15). 이미원도 마찬가지로 “포스트드라마는 텍스트를 아주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드라마 연극과 같으나, 연출은 텍스트를 재현하기보다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교란시키는 것이다16).”라고 말함으로써, 주어진 텍스트를 기존의 드라마적 재현의 틀로서 바라보는가 아니면 그것을 활용하는 다양한 방식을 보여주는가가 관건임을 시사한다.

    결국 본 연구는 분석대상으로 삼은 세 작품을 모두 포스트드라마의 범주로 포함시킨 상태에서 논의를 출발시키고자 한다. 이를 통해 이 세 작업이 이러한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어떠한 과정을 거쳤는지, 그리고 그것이 포스트 드라마의 드라마투르그의 작업에 어떠한 시사점을 줄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분석의 결과 부분에서 논하게 될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규정은 자연스럽게 포스트드라마투르기의 문제로 연결된다. 즉, 포스트드라마 작품의 드라마투르기가 과연 포스트드라마투르기라고 불릴 만한 성질의 것이냐의 문제 말이다. 파비스(2012)는 이와 관련하여 “드라마투르기가 스토리, 행위, 인물, 드라마적인 것 등을 거부한다고 할 때, 그에게는 과연 어떤 도구들이 남아있는가? … 드라마적인 것의 위기가 드라마투르기적 이론의 위기를 불러 일으켰다는 점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이 같은 포스트드라마투르기가 포스트드라마라 명명된 작품들의 기능을 보다 잘 설명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라고 밝힘으로써 포스트드라마 작품의 드라마투르기 작업과 포스트드라마투르기—물론 아직 이 개념 자체도 제대로 확립되어 있는 단계는 아니다—를 구별하고 있다. 본 연구에서 언급되는 사례들은 모두 포스트드라마 작품의 드라마투르기 작업에 국한되며 드라마투르기 자체의 혁신적인 변화를 암시하는 ‘포스트드라마투르기’라는 개념과는 관련 없음을 또 하나의 전제로 제시하고자 한다.

    3)Cathy Turner & Synne K. Behrndt, Dramaturgy and Performance, Palgrave Macmillan, 2008, p. 53.  4)Dan Friedman, “The dramaturg: Help or Hindrance?”, Back Stage vol. 43 no. 39, 2002, pp. 30~33.  5)Kirk Lynn & Shawn Sides, “Collective Dramaturgy: a Co-Consideration of the Dramaturgical Role in  Collaborative Creation”, Theatre Topics vol. 13 no. 1, pp. 111~115.  6)Bruce Barton, “Navigating turbulence: The Dramaturg in Physical Theatre”, Theatre Topics, 2005; 15, 1, pp. 103~119.  7)Mary Luckhurst, Dramaturgy: A Revolutions in Theat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  8)Cathy Turner & Synne K. Behrndt, Ibid.  9)Hans-Thies Lehmann, (Karen Jürs-Munby trans.), Postdramatic Theatre, NY: Routledge, 2006.  10)비링거(Birringer, Johannes)가 “텍스트성이나 시각적 재현과 관련된 포스트모던 이론들은 연 극에서 퍼포먼스와 공간에 대한 텍스트와 언어 사이의 복잡하게 얽힌 관계들에 대해 구체 적인 역사적 이해가 부족하다”고 지적한 것은 레만의 시도에 주요한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J. Birringer, Theatre, Theory, Postmodernism, Bloomington and Indianapolis: Indiana University  Press, 1991, p. 43).  11)김형기,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개념과 영향미학: 퍼포먼스와 ‘수행적인 것’을 중심으로」, 『브레히트와 현대연극』 vol. 24, 한국브레히트학회, 2011, pp. 119~122.  12)Hans-Thies Lehmann, (Karen Jürs-Munby trans.), Ibid, p. 46.  13)김형기, 앞의 논문, p. 122.  14)“포스트드라마적인 연극에서 무대화된 텍스트란 단지 움직임, 음악, 시각 등 모든 다른 구 성 요소들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Lehmann, Ibid., p. 46).  15)유봉근, 「레만의 포스트드라마 연극론에서 수행성과 매체성의 문제」, 『브레히트와 현대연극』vol. 24, 2011, p. 85.  16)이미원, 「한국연극에서의 포스트드라마」,『한국연극학』 43호, 2011, p. 8.

    3. 사례 분석

       3.1 희곡 텍스트가 선행하는 경우

    어떤 과정을 거치든 간에, 극단 그린피그의 작업은 기술적인 요인과 관련된 몇 차례의 스탭회의를 제외하고는 극단의 모든 구성원—연출, 조연출 및 배우들—이 함께 참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즉 공연에 사용될 텍스트의 창작뿐만 아니라 텍스트의 토대를 위한 사전 연구, 캐릭터 구축 및 분석의 전 과정을 함께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작업 과정 자체에서 이미 구성원들이 드라마투르기 작업에 관여하는 비중이 비교적 높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자체만 놓고 보면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지만 드라마투르그로서는 이중고의 난점이 있다. 우선, 지나치게 많은 목소리들이 개입하다 보면 연출과의 소통이 더욱 어려워질 수 있으며 논의의 효율성이 떨어진다. 또한, 작업 초기 단계에서 텍스트 구축(공동 창작의 경우), 혹은 텍스트 분석(정해진 희곡을 바탕으로 하는 경우)의 토대가 될 만한 자료들을 찾아볼 때에도 모든 구성원이 함께 참여하다 보니 시간과 노력이 필요 이상으로 많이 드는데다가 그렇게 찾아낸 자료들이 엉뚱하거나 적합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연구자는 구성원들의 자료 수집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아예 사전에 준비를 하고 이를 바탕 으로 구성원들의 수집 방향을 정해주기로 하였다. 즉, 드라마투르그로서의 조사 작업 외에 별도로 다른 구성원들의 조사를 위한 계획 수립 및 사전 브리핑 작업 등을 실시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드라마투르그의 이중고는 극단 구성원, 특히 배우들의 작품 이해를 돕는다는 점에서는 전체 작업에 이득이 되는 일이었다. 즉 자료 수집의 목적을 두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본다면, 이것은 적합한 자료들을 효율적으로 찾아내는 목적에는 위배되지만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서로 공유함으로써 공동의 기반을 단단히 다지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공동창작에서는 물론, 희곡 작품을 바탕으로 하는 경우에도 텍스트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결국 효율성 이라는 것이 모든 작업과 모든 단계에 필요한 가치가 아닐 수도 있다—물론 자료 수집의 또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는 여전히 효율성이 필요하며 그것은 드라마투르그가 전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로 남지만 말이다—.

    <두뇌수술>은 그린피그와 함께 한 세 번째 작업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희곡 텍스트를 바탕으로 한 첫 공연이 되었다. 한마디로 고전적인 의미의 드라마투르기 분석이 유일하게 가능했던 작업이었고 어떤 의미에서건 그런 작업이 필요했다. <두뇌수술>은 2012년 혜화동1번지 봄페스티벌 ‘해방공간’의 취지에 따라 해방기에 발표된 희곡들 중에서 골랐다. 해방공간이라는 페스티벌 주제는 혜화동 1번지 5기동인 연출들 중에서 윤한솔 연출이 제안하였으며 그 취지는 크게 두 가지였다. 친일 잔재 청산의 실패가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문제들의 중심에 놓여 있음을 자각하면서 당시 시대적 상황에 주목하는 것이 그 중 하나였다면, 나머지 하나는 연극사에서 외면되고 있던 당시의 희곡들을 발굴하고 공연으로 올리는 것이었다.

    <두뇌수술>의 드라마투르그로서의 작업은 크게 다섯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단계는 페스티벌 주제인 ‘해방공간’에 대한 전반적인 탐색이었다. 당시의 시대 상황과 관련된 인쇄물, 음성 및 동영상 자료, 해방공간의 정치ㆍ사회적 배경 및 문화적 배경에 관한 연구들이 필요했다. ‘해방공간’은 페스티벌 전체의 주제이기도 했으므로 이와 같은 탐구는 연출 및 배우들 모두에게 필요 하다고 판단되었고 5기 동인들의 의뢰로 3회에 걸친 해방공간 세미나를 기획 하게 되었다. 세미나 기획을 위해 해방공간과 관련된 문학, 사회학, 역사학 관련 논문들을 전방위적으로 검토하였는데, 내용의 적절성과 실질적인 도움 여부, 기간 및 예산의 문제 등을 모두 고려하여 해방공간의 문화사, 해방공간의 희곡 및 연극, 각 연출들이 선택한 희곡 작품에 대한 검토의 순으로 3회의 세미나를 구성하기로 결정하였다. 앞의 두 회차는 해당 분야의 전공자를 초빙한 강연의 형태로, 그리고 마지막 회차는 연출들의 토의 형태로 구성하였다.

    둘째 단계는 희곡의 선택이었다. 희곡 선집 및 관련 전공자들의 도움을 얻어 구할 수 있었던 해방공간의 희곡 42편을 둘러보고 연출과 상의하면서 몇 개의 후보를 고르는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그 후보들을 나머지 극단원들과 함께 리딩하면서 여러 차례의 회의와 논쟁, 고민과 번복 등을 거듭한 끝에 진우촌의 <두뇌수술>을 선택하게 되었다.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드라마투르그로서 <두뇌수술>을 추천했던 이유는—최종 후보였던 <유민가>와 <두뇌수술> 중에서도 특히 <두뇌수술>을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최근 들어서야 그 존재가 발견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해방공간의 희곡들을 발굴한다는 페스티벌 취지에도 맞을뿐더러 당시로서는 거의 공상과학에 가까운 기발한 소재—대뇌교환 수술—를 다루었다는 점이 신선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사실 극작술 상 여러모로 허술한 점이 많았다. 인물들의 등퇴장도 앞뒤가 맞지 않았으며 행위의 개연성도 부족했다. 특히 전반적으로 갈등 구조가 명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급작스럽게 치닫는 결말은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서 모든 것들을 성급하게 봉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작품의 어설픈 드라마 구조는 오히려 자극적인 데가 있었으며 윤한솔 연출의 스타일과도 잘 어울릴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러한 빈 구석들이 오히려 흥미로운 요소로 반전할 수 있는 여지로 보였던 것이다.

    희곡을 선택한 후, 셋째 단계에 이르러서는 해당 작품과 관련된 정치적ㆍ문화적 배경, 작품 및 작가와 관련된 정보에 대한 리서치를 시행했다. 공동창작 때와 달리 <두뇌수술>에서는 이 단계에 이르러서야 배우들과 함께 작업하기 시작했다.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 드라마투르그로서 미리 리서치 계획을 세우고 영역별로 대강의 탐색을 마친 뒤 찾아볼 정보들을 항목별로 지정해주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실용적인 차원에서는 얻는 것에 비해 시간과 품이 많이 들었던 과정이다. 하지만 배우들의 작품 이해 저변을 넓히고, 다양한 연출 아이디어를 이끌어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본다.

    본격적으로 작품 리딩에 들어가기 시작한 넷째 단계에서는, 작품 분석의 다양한 층위를 탐구하고 캐릭터 구축 및 장면 분석을 시행하였다. 이때에는 전형적인 희곡의 드라마투르기 분석 작업을 촘촘하게 시행하긴 하였으나 분석의 틀은 일반적인 해석의 틀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하였다. 즉, 적절하거나 개연성 있는 해석 대신 어딘가 비틀리고 과장된 것으로 일부러 몰아가는 해석 위주로 구성하였다. 다음 표는 <두뇌수술> 희곡 분석 도식이며 총 15페이지 중에서 첫 페이지 내용 일부이다.

    위의 부분은 한가로운 병원 풍경을 묘사하기 위해 두 간호사가 신파조로 사랑 타령을 읊고 있는 대목이다. 원본 텍스트에서는 평화로운 분위기를 드러내는 한 장면이지만 위의 희곡 분석 도식에서는 두 인물이 어딘가 병적이거나 이상심리에 빠져있을 수도 있다는 식으로 몰아가고 있다. 물론 이것은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질 만한 해석이라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공연 제작에 있어서 희곡을 분석하는 일은 문학적 차원이 아니라 실제 공연으로 만들어지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생각할 때, 드라마투르그의 희곡 분석 작업은 그러한 최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만 기능하도록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분석도식에는 등장인물들의 심리 분석이나 분위기 등과 관련하여 거의 억지에 가까운 극단적인 해석들을 많이 포함시켰다. 이렇듯 극단적이거나 과장된 해석들을 포함시킨 가장 큰 이유는 주어진 대본을 비틀어 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그 당시 연출이 제시했던 컨셉들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에서 스릴러나 미스터리의 분위기, B급 영화적인 요소 등이 가장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컨셉들은 사실 원본 희곡을 읽어본다면 쉽게 떠올릴 수 없는 것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상당히 좋은 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연구자는 이때부터 ‘희곡에 반(反)하는, 혹은 대립하는 연출’의 개념을 떠올리기 시작했다—즉, 우리의 작업이 처음부터 포스트드라마적 속성을 염두에 두고 시작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한 생경한 요소들이 원래의 희곡이 지니고 있던 근본적인 문제들을 돌파해 나가는 좋은 방법일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서 사례로 제시한 비틀어진 대본 분석은 두 가지 면에서 유용할 수 있었다. 첫째, 구체적인 연출 아이디어들을 촉발시킬 수 있으며, 둘째, 배우들이 캐릭터를 어떤 관점에서 구성해 나갈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장면 구성 및 본격적인 연습이 이루어지는 다섯째 단계에서는 이번 <두뇌수술>만의 특수성을 고려한 특수한 임무들을 맡기도 했는데, 그 중 하나는 배우들로 하여금 1940년대 발음을 구현하도록 돕는 일17)이었으며 나머지 하나는 원작에 없는 슈퍼맨의 대사를 작품 말미에 첨부하는 일이었다. 1940년대 발음 구현 훈련을 위하여 자료들을 찾아본 결과 뉴스릴의 음성자료와 당시 영화 DVD 자료를 활용하기로 하였다. 두 자료 모두 일상 대화와는 다른 장르적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연극 <두뇌수술>에 필요한 발음 방식은 당시의 일상 대화이기보다는 ‘당시의 대화를 구현하는 시도를 관객이 느낄 수 있게 하는 것’ 이므로 그리 문제될 것 없다고 보았다. 또는 오히려 영화 장르이기에 더욱 적합한 말하기 방식일 수도 있으리라고 여겼다. 영상자료실을 빌려서 1940년대 영화 세 편을 배우들에게 단체로 관람하게 하였는데 그전에 먼저 영화 속 말하기 방식을 분석한 후에 다음과 같은 자료를 미리 만들어 주었다. 관람하면서 배우들이 스스로 따라하면서 연습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1940년대 말하기 스타일의 구현은 사실 무척 난감한 과제였다. 40년대 말하기 자료 자체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몇 개 안 되는 제한된 소스만을 바탕으로 당시의 특징들을 분석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특징들을 추출해낸다 하더라도 배우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익히게 할 것인가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고민 끝에 생각해 낸 방법은, 캐릭터 별로 말하기 특징들을 분화시키기보다는 모두들 같은 시도들로 통일을 시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남자와 여자의 차이, 도시와 시골 출신의 차이를 구분하여 말하기 훈련을 하도록 했는데, 배우 개인이 가지고 있는 언어적 특성과 맞물려 스타일의 통일성이 현저하게 떨어져 보였다. 그래서 완벽한 구현을 이루는데 중점을 두기보다는 우리가 당시 말하기 습성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는, 그 시도를 통일성있게 드러내는 데만 중점을 두기로 하였다.

    또 하나의 특수 임무인 슈퍼맨 대사 만들기는 희곡이 지니는 사회적 의미 구현과 관련된다. 사실 텍스트 분석 작업보다 훨씬 더 큰 난관에 부딪쳤던 지점은 연출 방향을 잡기 어려웠던 점과 관련된다. 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해방이나 친일청산의 의미에 대해 연출이나 드라마투르그 모두 동의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연구자는 이 작품이 친일잔재의 청산에 매우 소극적이라고 판단 하였는데 당시 좌우를 막론하고 친일 청산과 관련하여 이와 비슷한 어설픈 봉합론이 꽤 우세하고 있었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 이것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하였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지점을 오히려 더욱 부각시켜서 일명 “희곡에 반(反)하는 연출”을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하 게 된 것이다18). 그래서 연출이 마지막에 슈퍼맨을 등장시키고 이 부분의 기사문을 써달라고 제안했을 때—이 기사문은 연구자가 직접 썼으며 공연 마지막 노래에 녹음 삽입되었다—, 연구자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러한 연출의 틀을 만들어보자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그러한 생각을 담아 원작에는 존재하지 않는 기사문을 만들게 되었는데, 대뇌교환수술이 일제 강점을 의미한다고 볼 때 뇌가 바뀐 무길이 슈퍼맨이 되어서 미국으로 날아가게 함으로써 희곡이 봉합 해버린 결말을 조롱하는 의미를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것이 작가의 의도에 반(反)할 수 있는 하나의 틀을 제공해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사실 연구자는 이 틀을 아예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를 요구했고 지금도 그에 관한 한 아쉬움이 남아있지만 이 부분은 견해차가 끝까지 존재한 지점이다.

       3.2 공동창작(devised theatre)의 경우

    공동창작과 관련한 이론적 토대는 ‘방법을 궁리하는 연극’(Devised Theatre)으로부터 얻을 수 있겠으나, 엄밀히 말해서 Devised Theatre는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선행하는 텍스트가 존재하지 않는 연극을 통틀어 말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공동창작과 완전히 같은 개념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이들이 대체로 공동창작의 형태를 많이 띠고 있고 공동창작 역시 선행 텍스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거의 비슷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그리고 많은 수의 포스트드라마가 Devised Theatre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선행하는 텍스트가 없다 보니 전통적 의미의 드라마 구조와는 다른, 수행적 텍스트의 형태를 생산해내기 쉽다. <나는야쎅스왕>과 <아무튼백석>은 선행하는 텍스트가 존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공동창작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낸 최종 텍스트가 희곡이라는 형태로 불리기 어렵다는 점, 드라마 구조가 아예 없거나 해체되고 있다는 점에서 포스트드라마의 성격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이 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공동창작으로 만들어지는 포스트드라마의 방법 궁리(devising) 과정’과 관련되는 셈이다.

    공동창작 혹은 포스트드라마의 드라마투르기는 고전적 의미의 드라마투르기와 매우 다른 과정과 경로를 거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드라마투르그의 역할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작업 자체가 포스트드라마 성향이라고 해서 저절로 그러한 경향에 맞는 드라마투르기가 나타나거나 해당 작품의 드라마투르그가 새로운 방식으로 기여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포스트드라마 혹은 해체주의적 작업의 선봉에 서 있는 우스터그룹(Wooster Group)의 엘리자베스 르콩트(Elizabeth Lecompte)는 드라마투르그에 대해서 “조연출, 훌륭한 무대감독, 조력자에 가까운 역할"이라고 말한 바 있다. 또한 주로 포스트모던한 작업을 이끌어 온 앤 보가트(Anne Bogart) 역시 "내가 만났던 최고의 드라마투르그는 음향 디자이너 대런 L. 웨스트(Darren L. West)였다."고 밝 힌 바 있다19).

    이것은 현장 작업자들이 드라마투르그라는 존재를 인식하는 가장 대표적인 두 경향일 수 있다. 그리고 소위 새로운 연극을 추구하는 두 거장 연출가가 이러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만한 일이다. 르콩트의 언급은 드라마투르그라는 하나의 역할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넓은 의미의 드라마투르기라는 개념 차원에서 포괄적으로 파악한 경우이며, 보가트의 언급은 비공식적 드라마투르그, 혹은 ‘외부자의 시선’으로서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을 규정하려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이들의 언급이 부분적으로 옳다고는 보지만, 소위 포스트드라마적인 작업에서의 드라마투르그 역할은 이러한 기존 현장작업자의 인식을 넘어서는 부분이 있고, 또 있어야 한다고 본다.

    공동창작의 드라마투르그는 해석과 동시에 창작에 임하는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디테일과 전체 구조를 동시에 염두에 두면서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논의들 안에서 양극단을 오가야 하는데 특히 드라마투르그 스스로 자신의 지점을 의식하는 것을 넘어서서 수시로 현재 우리가 어느 지점에 도달해 있는지를 팀원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나는야쎅쓰왕>과 <아무튼백석>에서는 공동창작의 일원으로서 구체적인 아이디어들을 함께 이끌어내는 동시에 드라마투르그로서 시시각각 변화해나가는 작업 방향이 어떠한 큰 틀 안에 놓여있는지를 끊임없이 의식하고 환기시켜주어야 했다. 희곡이 주어져 있는 경우와 이 작업들 간의 가장 큰 차이는, 전체 작업의 구조가 어느 정도라도 윤곽을 그릴 수 있는 상태인가 아닌가에 있다. 즉, 공동창작의 경우 아이디어들을 결합시키는 구조 자체를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드라마투르그는 적합한 소스나 아이디어들을 찾아내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 엮여나갈지 큰 틀을 누구보다도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등장하거나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할 때마다 그것이 전체 구조의 구성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도 함께 논의하여야 했다. 다른 사람들의 제안들도 정리하고 그것이 어떤 차원의 제안인지를 구분 짓는 일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었다.

    <나는야쎅스왕>의 경우 작품 제작의 출발점이 되었던 커다란 틀은 우선 드라마를 철저히 배제한 채 텍스트 읽기와 오브제, 행위만으로 구성되어야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일종의 게임의 규칙처럼 약속한 채 작업을 진행하였다. <나는야쎅스왕>의 작업은 그런 점에서 명백한 편이었는데, 연구자는 드라마투르그로서 우리가 해나가는 작업을 크게 두 가지 차원으로 임의적으로 분류하였다. 그 하나가 최종적으로 완성된 공연에서 ‘무엇을 읽을 것인 가’였다면, 다른 하나는 ‘어떻게 읽을 것인가’였다. 그리고 드라마투르그로서 개입을 하는 방식도 이 두 가지 차원—실제 우리의 작업을 이렇게 개념적으로 나눈 것은 아니며 작업은 두서없이 진행되었지만 드라마투르그로서는 두 차원을 명백히 나누어 전체적으로 조망할 필요가 있었다—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작업을 진행하다 보면 디테일한 차원에 함몰된 나머지 전체적인 맥락의 끈을 놓치게 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일례를 들자면, 우리는 작업 초기에 프로이트(Freud, Sigmund)의 정신분석학 이론들과 김상봉의 <나르시스의 꿈>, 바르뜨(Barthes, Roland)의 <사랑의 단상> 등을 내용 구성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러던 중 라깡(Lacan, Jacques)의 이론들을 포함시키기로 결정하였는데 그 이유는 성(性)에 대해 정신분석학적으로 접근하면서 프로이트에만 머물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텍스트들을 임의대로 배치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흐름을 부여하였는데 이것은 구체적인 탐구가 진행됨에 따라 수시로 바뀌었다. 그 구조는 최종적으로 정신분석학적 분석, 생물학적 분석, 철학적 분석 등의 카테고리들로 결정되었으며 각 분석별로 결론들을 내면서 넘어갔다—논리적으로 합당한 결론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학문 담론 형성 과정에 대한 풍자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라깡이 들어오면서부터 그동안 세워놓은 논리적 흐름이 뒤틀릴 수 있음을 감지하였다. 그래서 고심 끝에 우리의 커다란 구조에 쎅쓰왕은 “가설을 증명하려 하지만 결국 가설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는 개념을 도입하게 되었고 이로써 나름의 논리적 흐름을 완결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의 도입은 기존의 단순했던 구조에 역설의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는 위기가 기회로 바뀌게 된 셈이다. 어쨌든 이것은 하나의 아이디어 혹은 소재의 도입은 전체 구성을 크게 뒤바꾸는 일로 연결될 수도 있음을 말해주는 사례이며, 그만큼 공동창작의 작업은 전체와 부분이 끊임없이 요동치며 진행 하는 작업임을 의미한다.

    <아무튼백석>의 경우, 같은 공동창작이라 하더라도 드라마투르그로서의 작업은 <나는야쎅스왕> 때와 또 달랐다. <나는야쎅스왕>은 그나마 “쎅스를 하고 싶지만 쎅스를 하지 못하고 쎅스 지식만 탐닉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였으며 드라마를 철저히 배제하고 읽기 행위와 오브제 등을 통해서만 공연을 만들어간다는 원칙이라도 있었지만, <아무튼백석>은 전반적인 구성이나 컨셉이 미리 존재하지 않은 채 ‘백석’이라는 인물 자체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공연의 방향이나 성격도 과정 중에 서서히 결정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실존했던 시인의 삶과 그의 작품을 바탕으로 만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태생적인 제한이 있었다. 물론 제한이라는 것이 무조건 마이너스의 효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만 공연 제작 과정에서 많은 혼란과 진통을 겪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결국 이러한 과정을 거쳐 <아무튼백석>은 백석의 생애와 작품을 함께 공부해나가는 우리의 과정을 담는 공연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아무튼백석>에서는 <나는야쎅스왕> 때보다 더욱 모호한 역할 규정의 상태에서 드라마투르그로서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백석>에서는 텍스트의 일부를 직접 쓰기도 했고—호미질 관련 텍스트 및 에필로그에 첨가된 드라마투르그의 글—, 전체 구성에도 관여했으며, 작업 과정에 대한 드라마투르그로서의 조언도 담당했다.

    위의 내용은 <아무튼백석> 에필로그의 일부이다. 동시에 프로그램 드라마투르그 글의 일부이기도 하다. 드라마투르그의 글이 대본의 일부가 된 셈이다. 이 작품의 드라마투르그로서 흥미로웠던 지점은 작가가 아니라 드라마투르그로서 남긴 글이 실제 공연의 텍스트로도 사용되었다는 점이다—작가로서 개입 되었던 호미질 부분 텍스트와는 별도로—. 드라마투르그로서의 개입이 모호했 던 점이 작품의 텍스트에도 노골적으로 반영된 셈이다. 더불어 이 상황은 결과로서 무대 위에 오른 작품 <아무튼백석>이 사실은 우리가 백석에 대해 함께 공부하고 토의하고 갈망하고 좌절했던 그 모든 과정, 즉 공연 <아무튼백석>의 드라마투르기 작업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목적도 포함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이 상황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히자면, 당시는 공연을 2주 앞둔 상황이었고 결과물이 어떤 형태로 나오게 될 지 아무도 감을 잡을 수 없는 상황에서 프로그램 인쇄 일정 때문에 드라마투르그의 글을 먼저 쓸 수밖에 없었다. 해당 공연이 어떤 모습을 갖추게 될 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공연 대본은 물론 대강의 흐름조차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다—에서 드라마투르그의 글을 써야한다는 사실이 꽤 난감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그동안 우리가 고민하고 부딪쳤던 지점들을 중심으로 작업 과정에 대한 드라마투르그로서의 소회를 남기기로 했다. 그런데 인쇄에 앞서 이 글을 먼저 보게 된 윤한솔 연출이 그 일부를 에필로 그 대사로 쓰자고 제안하였다. 연구자는 반신반의하던 끝에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봉착한 지점에서의 탈출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드라마투르기 작업에 대한 메타적 차원의 대사가 에필로그에 들어감으로써 파편화된 장면들만 존재했을 뿐인 작품에 일종의 방향을 던져줄 수도 있다고 본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장면들의 구성 방향을 ‘백석을 찾아가는 우리의 과정’이라는 대전제에 맞추어 약간 재조정하게 되었다.

    사실 <아무튼백석>에서 역할 규정이 모호한 채 출발했던 것은 장단점이 있다. 한편으로는 좀더 창작의 축에 깊이 관여하게 되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전반적으로 작업 과정을 돌아보는 시각을 놓치는 위험도 존재했다. 드라마투 르그로서 어떤 식으로 개입할 지 사전에 미리 정해놓고 시작한 <두뇌수술> 작업의 경우 앞장에 정리한 바와 같이 그 내용을 비교적 일목요연하게 기술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야쎅스왕>이나 <아무튼백석> 작업의 경우 실제 작업한 양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을 명확하게 가려내어 기술하기가 어렵다. 공동창작이라는 것의 속성상 누구의 제안이 전체 작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가 명확하지 않으며 또 명확히 밝히는 것이 그다지 의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 이 작업에서는 하나의 아이디어가 전체 구성의 아이디어와 구분되지 않은 채 맞물려 가는 점도 있었으므로 이러한 영향 관계를 언급하는 일은 더욱 어렵다. 어차피 서로가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작업 과정이 진행되기 때문에 창작 주체도 거의 집단 그 자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작업의 특수성상 불가피한 일이며 같은 공동창작 이라고 하더라도 <아무튼백석>보다는 <나는야쎅스왕>의 경우 이러한 현상이 더욱 강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집단의 논의 자체가 공연의 내용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공연에서 읽을 텍스트를 결정하는 차원으로만 반영되기 때문이다.

    무엇이 더욱 좋은가에 대한 답을 제시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공동창작의 경우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이 모호하게 섞여 들어가는 일 자체는 불가피하면서도 긍정적인 측면이 많다. 그러나 역할의 모호함이 태도의 모호함으로 변질되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 즉, 드라마투르그로서 다양한 활동의 영역을 넘나들거나, 융통성을 보이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역할에 대한 자각마저 모호하게 만들어버리면 곤란하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두 작업을 통해 얻은 반성적 결론이라 할 수 있다.

    4. 결론 : 포스트드라마 시대의 드라마투르그 역할

    3장에서는 희곡 텍스트가 선행하는 경우와 공동 창작, 즉 희곡 텍스트가 선행하지 않는 경우로 구분하여 사례 분석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구분이 분명한 차이를 보여주는 지점도 있지만 넓은 의미의 포스트드라마적인 작업 과정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분명하지 않은 지점도 있었다. 3장에서 기술한 바를 토대로 작업 과정상의 특징들을 몇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희곡 텍스트가 선행한 작업의 경우 드라마투르기 작업 과정의 체계가 비교적 잘 잡혀 있었다. 반면, 선행하지 않은 작업의 경우 과정의 체계가 불분명하고 혼란과 충돌이 상대적으로 컸다. 결국 작업의 체계성과 합리적 의사 결정, 이 두 가지 사항은 희곡 텍스트가 선행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사이의 가장 큰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안정적인 작업 진행이라는 점에서는 좋지만 새로운 드라마투르기의 출현과 관련해서는 오히려 제한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아무튼백석>과 <나는야쎅스왕>이 <두뇌수술>에 비해 좀더 포스트드라마의 전형에 가깝다는 점과도 관련 있어 보인다.

    둘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세 작품 모두 포스트드라마적인 작업 과정과 결과물을 보여준다. 희곡이 선행하건 선행하지 않았건, 우리가 만들 작품의 청사진을 그려볼 수 없었다는 점은 포스트드라마적인 속성과 관련된다고 본다. 명확한 희곡이 존재했던 <두뇌수술>의 경우조차도 우리가 현재 어디로 나아가고 있으며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어떤 장르의 공연이 될 것이며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드러내고자 할 것인지—가 작업 과정의 후반에 이르기까지 불분명하였다. 왜냐하면 우리가 동의하고 있었던 유일한 전제는 진우촌의 <두뇌수술>이 하나의 재료에 불과했다는 점뿐이었기 때문이다20).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공동창작이었던 <아무튼백석> 제작과정에서는 이러한 청사진의 부재가 더욱 심하게 드러났던 반면 같은 공동창작이었던 <나는야쎅스왕>에서는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는야쎅스왕>은 오히려 <두뇌수술>보다도 더욱 뚜렷한 목표의식을 작업 과정 내내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나는야쎅스왕>이라는 작품만의 특성이긴 한데 아예 시작부터 일종의 규칙—어떤 경우든 드라마를 완전히 배제한다, 텍스트 읽기의 다양한 방식을 보여준다—을 전제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품의 청사진을 그려볼 수 있는지 여부는 희곡 텍스트의 선행 여부보다는 작업의 출발 조건이나 전제 등과 더욱 관련된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세 작업 모두에 있어서 연극 및 드라마투르그 역할에 대한 메타적 인식이 늘 크게 작용하였다. ‘연극이란, 공연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경계를 스스로건, 협의 과정에서건 끊임없이 넘나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으며 드라마투르 그의 역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두뇌수술>의 경우 드라마투르그로서의 역할은 비교적 뚜렷한 방향을 가지고 출발하였으나 작품의 제작 과정이 초기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감에 따라 여러모로 바뀌게 되었다. <나는야쎅스왕>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해야 할 일이 비교적 분명하였고 변화도 없는 편이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실행의 차원에서는 전체와 부분을 오가는 과정 중에 길을 잃게 된 경우가 있었다. <아무튼백석>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뚜렷한 역할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것이 때로는 혼란으로, 때로는 돌파구로도 작용 하였다.

    전술한 특징들이 3장의 사례 분석에서 유추해낸 내용들을 정리한 것이라면, 이러한 특징들에서 다시 유추할 수 있는 몇 가지 성찰들, 특히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드라마투르그 역할과 관련한 몇 가지 언급들을 덧붙이고자 한다.

    하나의 성찰은 앞서 언급한 터너(Turner)와 번트(Behrndt)의 드라마투르그 작업에 대한 비유, 즉 ‘이론과 현장의 다리 역할’과 관련된다. 그리고 이것은 곧 드라마투르그가 자주 놓이게 되는 다음과 같은 역설적 상황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코스진(Koszyn)의 이와 같은 언급은 오르페우스 신화가 제기하는 오래된 질문을 떠올린다. 오르페우스 신화는 종종 예술을 생산하는 과정에 대한 은유로 해석된다.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찾아 지하세계로 내려갔듯이, 예술가는 진정한 예술을 생산하기 위해 자신의 내면세계 깊숙한 곳으로 빠져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죽음의 얼굴을 마주하고 나서야 예술가는 자신의 생산물에 진정한 생명을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오르페우스가 두려움과 의심에 굴복하여 에우리디케를 잃은 것처럼, 예술가가 작품에 집착하려 들거나 지나치게 분석하려 든다면 그것은 본래의 속성을 잃고 파괴되고 만다. 이것은 예술의 존재론적인 역설인 셈이다.

    코스진(Koszyn)이 지적하려고 하는 드라마투르그 작업의 난점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역설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연출도 연출 스스로의 드라마투르기 작업을 행한다는 점에서 이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겠지만, 드라마투르그는 그 본연의 임무—드라마투르그에게 본연의 임무란 것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에 충실할수록 이 질문의 함정에 빠져들기 쉽다는 점에서 더욱 깊이 생각해볼 만한 문제인 듯하다.

    이쯤에서 다시 좀 전에 제기한 질문으로 돌아가야겠다. 드라마투르그는 이론과 실제의 다리 역할이라는 터너(Turner)와 번트(Behrndt)의 정의에 동의한다 면 그 ‘다리’라는 용어가 지닌 감당할 수 없는 모호함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드라마투르그들이 심리적으로 좌절하거나 작품이 올라간 후 허망함을 맛보게 되는 가장 큰 이유도 바로 ‘다리’ 때문이 아니던가.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다리는 결국 사라지게 되어 있으며 작품을 위해 사라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속성은 희곡 텍스트를 분석하는 과정에서도, 공동창작을 하는 과정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결국 파비스(Pavis)가 말했듯 드라마투르기는 문학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작품을 얼마나 제대로 읽어내는가에 달려있기보다는 그것이 공연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 어떤 의미를 줄 것인가에 더욱 밀접하게 관련되어야 할 것이다22). 그런 점에서 좀 전에 제기한 질문, 즉 지식과 정보를 어떻게 다루어야 ‘신비의 마녀’가 사라지지 않을 수 있을까의 문제는 다른 방식으로 고쳐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어떻게든 텍스트에서 무언가를 건져올려서 눈에 보이는 형태로 형상화를 시켜야 하며 드라마투르그는 어떤 방식으로 다리가 되든 간에 해석의 마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과연 한 편의 공연을 만든다는 것이 드라마투르그의 텍스트 분석 작업과 완전히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인가? 즉, 드라마투르그의 작품 분석이 그대로 공연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난다면 텍스트와 공연의 중간, 혹은 해석이나 신비함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는 안된다는 ‘다리’로서의 강박에서도 벗어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다리는 끊어져 있는 두 개의 장소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것이 반드시 지리적인 의미로 중간 지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대본 분석을 공연 만들기와 동일시하지 않을 수 있다면, 이것을 하나의 과정으로서의 의미로만 볼 수 있다면, 분석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최종 공연 자체를 탈신비화하는 것과 같은 의미인 것은 아닌 셈이다. 오히려 낱낱이 파헤쳐진 텍스트는 공연의 입장에서는 좋은 재료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이 바로 <두뇌수술> 작업 당시 뒤틀어진 희곡 분석을 실시하면서 염두에 두었던 점이다. 단, 우리가 파헤친 의미에 집착하지 않는 한에서 말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작업이 연출과 배우의 상상력의 촉발을 가져오게 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들이 밟고 올라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는 것도 드라마투르그의 주요 역할 중 하나일 수 있다.

    ‘신비의 마녀’와 관련된 문제가 드라마투르그의 본질적인 성격과 관련된 성찰이라면, 또 하나의 성찰은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드라마투르그의 역할과 관련된, 좀 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차원의 언급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전통적 작업 방식이건, 포스트적인 작업이건 간에,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은 변화하는 연극 제작 과정의 요구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나는야쎅스왕>과 <아무튼백석>은 좀 더 포스트드라마적 성향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둘 다 공동창작의 작업 과정을 거쳤다. <나는야쎅스왕>의 경우 희곡 텍스트를 출발점으로 삼지 않은 것은 물론 배우도 등장하지 않는다. 연출과 작가가 등장하지만 이들은 배역이나 인물로서 등장하지 않은 채 오직 무대 위에서 내내 책을 읽을 뿐이다. 일명 ‘텍스트 자체가 주인공’인 연극이라는 표현이 가깝다. <아무튼백석>은 파편화된 에피소드들 속에서 배우들의 재현 드라마, 재현이 아닌 배우들 자신의 이야기, 백석의 시 텍스트 자체, 움직임, 공동창작과 관련된 이야기 등이 동일한 선상에서 다루어졌다.

    터너(Turner)와 번트(Behrndt)에 따르면, 방법을 궁리하는 연극(devised theatre)의 드라마투르기는 작업이 시작되기 전에는 정의할 수 없다23). 드라마투르그로서 동일한 극단 및 연출과 세 번에 걸쳐 작업해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식으로 개입해야 할지의 문제를 늘 새롭게 마주 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방법 궁리(devising)'의 속성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러한 고민은 역시 <두뇌수술>보다는 <나는야쎅스왕>과 <아무튼백석> 작업에서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전에 정의할 수 없음’이 곧 불분명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희곡 텍스트를 바탕으로 하건, 포스트드라마적인 작업을 하건 간에, 드라마투르그로서의 역할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분명히 존재한다 함이 고정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도 결코 아니다. <나는야쎅스왕>과 <아무튼백석> 작업 과정에서 드라마투르그로서 혼돈을 빚은 부분이 바로 이 점이 아니었나 한다. 공동창작의 경우 특히 매 작업마다 그 역할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모호한 역할로서 존재해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사전에 정의할 수 없다 하더라도 사전에 어떤 식으로 창작과정이 진행될 지와 관련하여 협의하는 일은 별도로 가능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러한 창작과정의 진행과 관련된 협의는 작업 초기 단계뿐만 아니라 작업 과정 중에도 틈틈이 가능하며 필요한 일이다.

    결국 공동창작이 산으로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은 이러한 메타적 인식24)의 과정이다. 누군가는 과정의 굴레 밖으로 잠깐씩 나와서 그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의 역할 혹은 메타적 인식과 관련된 협의 과정을 공동창작 과정과는 별도로 설정해 둘 필요가 있다. 즉 공연을 만들어가는 논의 외에도 공연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대한 중간 점검 차원의 논의가 별도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희곡 텍스트가 선행하지 않는 작업의 경우에 더욱 의미 있으리라 본다. 결국 어떤 경우든 간에 드라마투르그로서의 역할은 연출과의 협의와는 별도로 드라마투르그 스스로 규정 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되도록 전체적인 작업 과정의 틀을 세우는 일에서부터 스스로의 역할의 규정이 비롯되어야 할 것이다.

    17)사실 필자가 1940년대 말하기 구현이 작품 분위기 상 중요하다고 연출에게 계속 강조하였던 점도 이 작업을 맡게 된 주요 원인이 되었다. 1940년대 말하기 방식을 구현하는 일은 진실로 그 시대를 구현하려 하는 것을 목적으로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뒷받침하는 데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작품 전체 분위기 및 주제 구현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18)결국 이러한 연구자의 주장은 주어진 텍스트의 의도에 마치 액자처럼 또 다른 틀—작품의 외부를 상상하게 하는—을 만들어주자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두뇌수술>의 포스트드라마적 속성은 처음부터 기획되었다기보다는 작품 창작 과정 중에 의도치 않게 생겨난 셈이다.  19)Cathy Turner & Synne K. Behrndt, Ibid., p. 132.  20)우리는 작가의 의도에는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틀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 했는데, 바로 그 틀을 제대로 작동시키기 위해 원본 텍스트는 거의 수정하지 않은 채 올렸다. 그러한 의미에서 원본 텍스트는 또 하나의 재료가 된 셈이다.  21)Jayme Koszyn, “The Dramaturg and the Irrational,” Dramaturgy in American Theater, ed. Susan Jonas et al. Orlando:Harcourt, 1997. p. 52.  22)Pavis, Patrice, "Dramaturgie et Postdramaturgie", keynote lecture, university of Ghent, 2012.  23)Cathy Turner & Synne K. Behrndt, Ibid., p. 215.  24)여기서 말하는 메타적 인식은 비고츠키(Vygotsky)의 상위인지(metacognition)에 가까운 의미이다. 비고츠키에 따르면 상위인지란 “인간의 인지적 행동에 대한 의식적인 규제이며 인지 과정과 결과에 대한 지식”을 의미한다. 즉, 인식의 주체가 스스로 인식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 혹은 인식하는 과정에 대해 의식하고 통제하는 사고 행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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