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ying to Place Beckett’s View on Death in Western Thanatology

서구 죽음학에서 베케트 죽음관 자리매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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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Beckett’s life-long struggling with death may be illuminated in terms of the Western tradition of thanatology as well as Philippe Ariès’s anthropological classification of death. Among the Western tradition, Beckett’s oeuvre incarnates memento mori, timor mori, nihilism, theatrum mundi, life as afterlife, and the transsubstantiation of the self. Among the five views of death Ariès suggests, Beckett appears to foreground the death of the self and the invisible dirty death. In a world devoid of transcendental Signified, Beckett’s resident is “a poor player/That struts and frets his hour upon the stage.” Our contemporary vision of death is dominated by the dirty death and timor mori resurrected from the cultural icon of danse macabre in the late Mediaeval age as vividly dramatized in W;t by Margaret Edson. Beckett stands in no man’s land: Lucky complains of divine aphathia as well as scopes at the possibility of God’s existence like Hamm. Beckett’s way of getting out of the dilemma is laughing a mirthless and dianoetic laugher. To bourgeois class who shudder at the sight of Grim Death after forgettable years of indulgence and addiction to capitalist consumption, Beckett seems to preach, your life is a death-in-life, you are not born yet until you are baptized with existential awakening as Gregor Samsa in Kafka’s Verwandlung, or Tolstoy in Confession.


  • KEYWORD

    Samuel Beckett , Death , Thanatology , Philippe Aries , timor mori , memento mori , Krapp’s Last Tape , All That Fall

  • 베케트의 연극은 죽음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엘람(Keir Elam)은 베케트에게 죽음에 대한 연극을 부탁하는 건 페트라르카에게 사랑의 소네트를 부탁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면서, “모든 베케트 극은 특히 후기극의 경우 무엇에 관한 극이냐고 따진다면 그건 본질적으로 ‘죽음에 관한’ 극이다” (145)라고 주장한다. 후기극은 아니지만『행복한 나날들』(Happy Days)(1961)은 무대 이미지상 땅속으로 매장되어 가는 과정으로 위니(Winnie)의 삶을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파고들면 위니가 겪는 불지옥의 고통은 단테 신곡 지옥편의 수형자가 겪는 형벌과 유사하며 특히 허리까지 땅속에 묻혀서 받는 강한 빛과 열고문은 지옥편 칸토 X에 나오는 배교자 에피쿠로스가 달아오른 석관에 허리까지 파묻은 채 발버둥치는 고통을 떠올리게 한다. 『유희』(Play)(1963)도『더 타임즈』 (The Times) 기자의 초연 극평처럼 “저승의 우울한 회색지대” (Fletcher et als 169)의 풍경을 그렸고『숨결』(Breath)((1969)은 탄생과 죽음, 자궁과 무덤 사이 찰라를 인생으로 극화한다. 『발자국들』(Footfalls)(1976)이나『오하이오 즉흥곡』(Ohio Impromptu)(1980)이나 대부분의 TV극 주인공들이 현세의 실존인물이라기 보다는 회색지대에 거주하는 유령 내지는 중음신(revenant)에 가까우며 『자장가』(Rockaby)(1981)도 선형적(linear) 발전 없이 무의미하게 좌우로만 흔들리는 삶의 종착이 죽음이란 걸 확인해주는 무대이다.

    베케트가 그리고 있는 죽음에 대한 다양한 풍경은 기존 죽음학자나 예술가들이 추론하고 형상화한 죽음과는 동떨어져 있다. 서구 천년 동안의 죽음현상에 대한 연구를 집대성한 아리에(Philippe Ariès)는 죽음에 대한 인식의 변천을 5 단계, 1) “순치된 죽음” (tame death), 2) “자아의 죽음” (the death of the self), 3) “낯설면서 임박한 죽음” (remote and imminent death), 4) “타자의 죽음” (the death of the other), 5) “비가시적 죽음” (the invisible death)으로 나눈다.1 이 분류는 연대기적인 동시에 죽음의 양상에 따른 분류이다. 죽음의 양상과 그에 따른 인간의 태도가 어떠한 방식으로 11세기부터 변천하여 왔는지 점검하기 위해 아리에는 4개의 주제를 설정한다. 우선, A)개인의 자각, B)순치되지 않은 자연에 대한 사회의 방어, C)내세에 대한 믿음, 마지막으로 D)악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죽음의 양상에 대한 다섯 개의 변주(Variations)를 이 네 주제의 다양한 조합과 변위의 결과로 해석한다.

    아리에의 설명에 따르면 1)순치된 죽음의 경우, 개인의 죽음은 개인사의 비극에 그치지 않고 그가 속한 공동체의 손실로 간주되며 공동체는 경건한 장례행사를 치름으로써 거친 자연의 폭력에 대한 사회의 방어기제를 강화하는 계기로 삼았다. 그리하여 12세기까지 서구는 전통적인 순치된 죽음이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11세기 무렵 공동체의 운명으로부터 이탈한 개인들이 생겨나고 그들은 스스로 자아의식을 형성하여 자아를 공동체로부터 분리 독립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죽음은 공동체의 죽음이 아니라 두 번째 양상인 2)자아의 죽음으로 귀착된다. 즉 4개의 주제 중 B)의 사회적 기능이 약화되면서 A)개인주의와 C)내세관이 죽음관을 결정하게 된다. 자아의 죽음 시대 죽음관의 특징은 “쾌락과 고통을 체험한 육체와 죽음에 의해 해방되는 불멸의 영혼” (606)의 완전한 분리이다. 망자는 이에 대한 확신을 가지며 내세로 나아가는 영혼의 여행을 흔쾌하게 받아 들였다. 이러한 경향은 17세기까지 심화되었다.

    세 번째, 3) “낯설면서 임박한 죽음” 은 “새로운 죽음 기술” (The New Arts of Dying 300)을 제시한다. 이성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내세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이에 부수된 성직자들의 계산적인 협박은 점차 사라지고 이들의 생사관은 “죽음에서 축복받으려면 사는 법을 배워야 하고/삶에서 축복 받으려면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 (300 재인용)라는 예수교파 시구에 잘 드러나 있듯이 과거처럼 임종 순간의 회개와 참회에 의해 사후 은총을 받는 게 아니라 평생을 두고 도덕적으로 살아서 치부책이 깨끗해야 한다는 합리적 사고가 죽음관의 근저에 자리잡은 것이다.

    네 번째, “타자의 죽음” 은 낭만주의 시대 죽음관이며 아름다운 죽음이다. 아리에의 주장에 따르면 네 개의 주제 중 D)악의 존재에 대한 믿음 항목에서 지옥이란 개념이 19세기 기독교인들의 “감수성엔 낯설게” (473) 되었다. 다만 “잔재적 악” (residual evil)인 “고통, 불의, 불행” 등은 육체와 결합되어 있으므로 육체만 여의면 즉 죽으면 자연히 해결된다고 생각하여 죽음은 “아름다운” 사건으로 받아 들여졌다. 그리하여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ë)의 시구에서는 “거기 미지의 영원 속 깊이/나의 욕망의 닻을 내리니/ . . . 두려움 없이 무덤의 어둠을/ 헤치고 나가/ 오히려 죽음의 거센 파도가 울부짖는 소리를 미소를 띄고 들으리” (There cast my anchor of Desire/ Deep in unknown Eternity;/ . . . Brave/ Unawed the darkness of the grave/ Nay, smile to hear Death’s billows rave(442 재인용)라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체험으로 죽음이 묘사된다. 죽음은 즉 종결이 아니라 ”미지의 영원“한 대양이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심리적 풍경이 획기적으로 변모하였다. 죽음은 이제 더 이상 아름답지도 “달콤한 최면 상태” (409)도 아닌 부인과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 죽음은 임종자나 친지들에 의해 감추어져야할 보이지 않는(invisible) 사건으로 변질되었다. “죽음은 추악해졌고 임상치료화(medicalized) 되었다” (612). 의사, 환자, 보호자는 “상호 거짓말의 공모 관계로 말없이 의사소통하는 게 편하게 되었다” (612). 중세의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가 내뿜었던 <죽음 공포>(timor mori 이하 티모르 모리)가 다시 부활하여 우리 시대에 맹위를 떨치며 횡행하게 된 것이다.

    얼핏 관찰하면 베케트의 소설과 드라마를 지배하는 죽음에 대한 편집증은 바로 우리 시대의 티모르 모리와 직결된 듯 보인다. 주인공들은 티모르 모리에 압도되어 자신들이 삶마저도 향유하지 못하고 고고와 디디처럼 계속 세상 무대를 바장이거나 왓트(Watt)처럼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는 결단을 범한다. 아리에의 네 주제 중 A)개인의 자각을 제외하고는 공동체, 내세, 악의 존재에 대한 믿음 모두가 거부된다. 아리에가 말한 추악하고 음습하여 타부시된 “죽음의 포르노그라피” (Ariès, “ The Reversal of Death” 548) 시대에 베케트는 새로운 죽음관을 제시하려는 듯 보인다. 그의 새로운 죽음관은 물론 순전히 개인의 창안은 아니며 아리에의 죽음학 목록 못지않게 그리스 시대부터 전해오는 서구전통 죽음학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다.2

    물론 베케트가 전통적인 죽음관을 가감 없이 답습하는 건 아니다. 죽음의 유령에 덮어 씐 듯한 베케트의 죽음 이해는 그에 앞선 서구의 지성들의 죽음관과는 달리 독특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가령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연습이 철학하기였다면 베케트에게 죽음연습은 마지막 게임(endgame)이고 유희이다.3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불가지 내지는 불신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베케트에게 살아감이란 죽어감이고 삶은 죽음의 유희이다. 죽음과 삶이란 현상에 대해 베케트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듯하다. 즉 죽음이 영혼과 육체의 분리라는 전통적인 해석 보다는 나의 실존이 죽음과 삶의 문제이다. 다시 말하여 내 몸이 살아 있으나 나 자신의 의식이 실존적 자각 내지는 깨침의 상태를 유지하지 않으면 나는 몸은 살아 있으나 사실상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베케트는 판단한다. 여기서 베케트는 서구 문학의 주요 모티프 중 하나인 생중사(death-in-life)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극단적인 경우『모든 추락하는 것들』(All That Fall)에 나오는 정신과 소녀 환자에 대한 의사의 진단처럼 비록 그녀의 몸은 태어나서 삶의 모든 활동을 정상적으로 영위하지만 의식이란 측면에서 “그녀의 문제는 그녀는 사실상 결코 태어나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CSP 36).

    베케트의 실존적 해석과는 달리 서구의 죽음학은 영혼의 불멸성을 인정하느냐 부인하느냐에 따라서 크게 영혼불멸설과 영혼필멸설 두 흐름으로 대별된다. 윤회를 믿는 오르피(Orphic) 전통에서부터 소크라테스 플라톤, 키케로를 거쳐 중세, 근대의 기독교 전통으로 영혼불멸설과 내세존재설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반면 에피쿠로스, 루크레티우스, 그리고 현대의 유물론자나 자연과학자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영혼필멸론과 내세부인설이 대립하고 있다. 베케트는 물론 회색지대에 서있는 불가지론자이며 오히려 후자의 유물 무신론에 기울고 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입장은 <상상력이 죽었다고 상상해봐>(“Imagination Dead Imagine”)라는 짧은 산문에 잘 드러나 있다. 즉 소크라테스의 영혼에 해당하는 것이 베케트에겐 상상력이고 의식인데 소크라테스의 영혼은 임종 순간 육체의 형역(形役)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저 세상으로 가지만 베케트의 상상력은 죽는 순간, 일종의 회색의 전환기 상태를 기술하고 있다. “어느 구석에도 살아있다는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어 그렇게 말하겠지, 흥, 그 점엔 이견이 있을 수 없지, 그런데 상상력은 아직 죽지 않았어, 그래 완전히 끝장난 건 아니지, 상상력이 죽었다고 상상해보렴” “( No trace of anywhere of life, you say, pah, no difficulty there, imagination not dead yet yes, dead, good, imagination dead imagine” (SBCSP 181). 즉 베케트는 소생할 가능성 없는 최후의 순간 상상력이 가물거리면서 떠오른 이미지를 재현하고 싶은 것이다. 튜(Philip Tew)의 설명에 따르면 “베케트의 죽음 비전은 전통적인 연옥 내러티브의 인간중심주의를 파고들면서 초월해버리고 아마 상상력의 마지막 곤혹스러운 개념적 한계를 단지 포착하려는 듯 보인다” (6). 즉 영혼/육체의 명료한 분리 보다는 의식과 대상 사이의 실존적 각성 유무에 베케트의 방점이 주어진다.

    영혼 불멸/필멸설 그 어느 쪽도 취하지 않고 죽음의 현상을 관찰하려는 베케트의 죽음관도 서구의 죽음학 전통에서 예외적일 수 없으며 다만 여러 갈래의 전통이 뒤얽혀 있다. 우선 크게 네 가지 갈래를 짚어 볼 수 있다. 첫째, 그의 죽음관은 소위 서구의 “항상 죽음을 상기하라” 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전통의 일부를 구성하며 그 특징으로 삶을 자궁무덤으로 가는(wombtombing) 과정으로 보았다. 이는 살아가는 도중 끊임없이 죽음을 상기시켜 인간의 의식 속에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상호교직시키는 전통이다. 둘째, 베케트는 소포클레스 비극 속의 코러스처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걸, 이왕 태어났으면 죽음은 빠를수록 좋다” 는 극단적 염세주의를 지향한다.4 이 세상이 허무하고 (null and void) 의미가 없다는 인식은 그의 무대를 결과를 낳지 않으려는 (inconsequential) 행위들 즉 기다림, 시간 때우기 아니면 유희나 춤으로 채운다. 셋째, 베케트 무대 위의 상황이 이승이 아니라 저승의 장면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의 자궁무덤적 상상력을 극단까지 밀고나간 결과 베케트 무대는 이승과 저승 사이 회색지대(no man’s land)로 변환한다. 마지막으로 베케트는 육체적 일회적 죽음만이 죽음이 아니라 일평생 가운데에서도 끊임없이 자아가 죽고 태어난다고 보았다. 이러한 현미경적 시각에 따르면 의식의 질적 연속성이 불가능하므로 인간은 한 평생 동일한 자아를 보지할 수 없다. 즉 한 인간개체에 수많은 자아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으며 우리는 수많은 자아를 거쳐 간다. 이에 대한 연극적 실험은『크랍의 마지막 테이프』(Krapp’s Last Tape 1958)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진다.

    베케트 죽음관의 첫 번째 특성인 메멘토 모리 전통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중세의 <죽음의 무도> 전통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예술 작품이 이 관념을 형상화하였는데 일상 생활이나 종교적 수련과정에서도 이 세계관은 지배적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가령 17세기 영국 수사들의 목걸이에 새겨진 명구처럼. “우리가 살아있기 시작하자마자/우리는 파멸되기 시작했었다” (AS SOONE. AS. WEE. TO. BEE. BEGVNNE;/ WE. DID. BEGINNE. TO, BE. VNDONE.)는게 그 핵심적 메시지였다. 베케트는 이 메멘토 모리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도 포조는 장님이 되어 “여자들은 무덤에 걸터앉아 아이를 낳고, 대낮이 일순 반짝했다 이내 다시 야밤중이네” (2막)5 (They give birth astride of a grave, the light gleams an instant, then it’s night once more/Elles accouchent á cheval sur une tombe, le jour brille un instant, puis c’est la nuit á nouveau.).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으러가는 길로 나선다는 인생관은 극단적인 염세주의이다. 이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디디도 포조의 삶/죽음관에 동의한다. 결국 인생이란“무덤에 걸터앉아 난산을 겪는데 묘혈파는 산역꾼이 구멍 깊숙이 머뭇거리며 겸자를 들여대네”(WFG 58). 산부인과 의사가 집게를 사용하여 신생아를 받는 장면과 산역꾼이 시체를 묘혈 속으로 매장하는 장면을 중첩시켜서 자궁무덤화라는 그의 죽음관을 재확인하고 있다. 『독백 한 편』(A Piece of Monologue 1977)에서도 화자는“탄생은 그의 죽음이었어(Birth was the death of him)”라고 시작한다. 배리(Elizabeth Barry)의 설명에 따르면“무덤에 걸터 앉은 존재”는 성 오거스틴이『하나님의 도시』(The City of God) 12권 10장에서 생중사(death-in-life), 사중생(life-in-death)을 논하면서“삶이라기보다는 죽음이라고 불러야 할 유한한 인간의 삶”을 가리키는 표현이다(81 재인용). 괴테도 유사한 비유를 도입하고 있다. 『토르카토 타소』(Torquato Tasso)에 대한 그의 감상 노트에서 누에가 비단실을 몸에서 뽑아내어 결국엔 자신의 무덤인 고치로 만든다는 계시적인 시구로 남기고 있다. “누에는 자신의 깊숙한 내면 자아로부터 고귀한 비단실을 뽑아내어 마침내 자신의 관 속으로 스스로 입관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It(the silkworm) will evolve its precious weft from deep/ Within its inner self and will not cease/ Till it has cased itself in its own coffin)(Barry 82 재인용).

    자궁무덤화라는 인생 내러티브는 아리스토텔레스가『시학』에서 주장한 시작-중간-끝이 있는 온전한 플롯 구성을 갖지 못한다. 무덤으로 향하는 인생플롯은 궁극적 목표와 클라이맥스로 치닫게 하는 추동력이 결여되어 발단(exposition)-전개(development)의 오르막 플롯 구조를 형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생 드라마의 영혼인 온전한 플롯구조가 중동무이된 인생은 부조리하다. 마치 연줄이 중간에 끊어진 연처럼 오랫동안 허공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맴돌다 마침내 땅으로 낙하할 것이다. 그리하여 베케트 동네의 주민들은 방향성 없이 의미도 발견하지 못하고 낯선 무대 위를 바장이고 배회하다가 마침내 무대 뒤로 사라진다. 어차피 지상의 체류가 죽음으로 가는 도정이고 그것도 의미 없는 도정이라면 토마스 하디처럼 그 연장된 체류를 단축시키는 게 바람직할 수 있다. 그리하여 고고는 “목을 매는 게 어때” (12)라고 디디에게 제안한다. 이처럼 베케트극의 부조리한 플롯 구성은 바로 그의 독특한 죽음관에서 비롯한 것이다.

    죽음을 되뇌면서 살아가라는 메멘토 모리는 베케트에 이르러 이처럼 염세적인 허무주의 색조를 띈다. 원래 이 전통은 부정적인 측면 보다는 부질없는 인간의 세속적 욕망(권력, 부, 명예) 감각적 쾌락을 쫓으면서 짧은 지상의 체류를 낭비하지 말고 인생을 보다 도덕적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뜻에 순복한 삶을 영위하라는 긍정적 교훈이었다.6 그러나 메멘토 모리를 받아들이는 베케트의 태도는 짐짓 냉소적이고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위 포조의 대사를 무대화한듯한『숨결』 (Breath)이란 축소극(dramaticule)도 인생은 초로에 불과하며 죽음은 바로 코앞에 있다는 인식을 매우 냉소적으로 다루고 있다. 조명의 조작을 통해 인생을 5장으로 압축한 무대극인데 각 장이 5초(1장 발단), 10초(2장 전개, 신생아의 “희미하고 짧은 고고성”), 5초(3장 클라이맥스), 10초(4장 대단원, 단말마적 비명 ), 5초(5장, 막내림)로 된 초압축극이다. 무대 위에 생명의 빛이 조명되는 동안의 인생은 총 25초에 불과하며 1장과 5장 합쳐서 10초는 어둠과 무의 세계로 죽음의 영역이다. 인생은 수유(須臾10-64 초)라는 법문을 연상시킨다.

    둘 째,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던 게 훨씬 좋았을 것이란 소포클레스적 염세주의 입장에서 보면 이승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곳이며, 거기에서는 무언가 하려고 애쓰면 안된다” (Ubi nihil vales, ibi nihil veils)이다. 괼링스(Arnold Geulincx)의 이 금언은 삶이 본질적으로 군더더기임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삶은 럭키 목덜미의 상처 흔적인 고름(pus)인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던져질(Geworfenheit) 때 다친 상처로 진물이 흐르는 삶, 고름 같은 삶은 결코 새 살로 편입될 수 없다. 언젠가 칼로 째어 쏟아내야 할 고름에 불과하다. 다만 인간은 그 고름을 살로 착각하여 헛되이 양분과 산소를 거기에 공급할 따름이다.

    현세의 비본질성, 환영성(maya)에 대한 인식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이래로 고대 철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가령 소크라테스의 후계자처럼 보이는(영혼을 중시하고 육체를 홀대하는 점에서) 에픽테투스도 삶과 죽음의 관계를 선원과 선장의 관계로 비유하고 있다. 그에게 죽음은 물 길러 간 선원을 부르는 선장의 호출 신호와 다를 바 없다. 선장이 배에 물이 동이나 한 섬에 임시 닻을 내린다. 나에게 물을 길어 오라고 명령한다. 우물로 가는 길 초원은 아름답고 해변에 조개들은 아름답고 먹음직스럽게 보인다. 주위 경관도 경탄을 자아낸다. 그러나 이런 것들에 미혹되어서는 안된다. 언제나 선장의 목소리가 들리는 지근거리에 머물면서 물을 길어 올리되 출항 명령이 떨어지면 바로 배 쪽으로 향해야 한다. 따라서 마치 조개 존재에 불과한 아내나 자식들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56).『 고도를 기다리며』가 던지는 메시지도 바로 고도가 나타나면 바로 떠날 준비를 해야 하며 그가 나타남으로써 비로소 그들의 삶 또는 여행은 의미와 목적지를 갖게 된다. 그 전까지는 단지 낯선 곳에 임시 기착했을 따름이다.

    현세의 환영성이 극단적으로 발전된 예는 신비적 비전에 사로잡힌 광신도에게서 발견된다. 그들에게 이 세상은 허깨비에 불과하다. 『모든 추락하는 것들』에 등장하는 피트 양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녀를 스쳐지나가는 현실 속의 사람들은 모두 허깨비이며 오히려 자신의 환상 속의 인물들(가령 성경 속의 인물들)은 모두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루니 부인이 의아해 하자, “나는 나의 창조주와 단둘이 지냅니다. . . 사실 나는 넋이 나갔어요 , 루니 부인, 넋이 송두리째 빠진 거예요. 보고 듣고 냄새를 맡는 등 느끼면서 일상을 지내오긴 하지만 내 마음은 딴 곳에 가 있어요” (CSP 23). 세상이 온통 "큼직하게 푸르스름한 안개 덩어리" 로 다가와 형체를 분간 못하니 몸이 비록 지상에 머무르고 있어도 자신은 사실상 부재한/넋이 나간(not there) 존재라고 황망하게 대답한다. 피트양을 사로잡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 그가 다스리는 세계일 뿐, 이 세상살이는 사후의 복된 세계로 가는 여행 도중 간이역에서 머무름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현세를 죽음에 기생하는 더부살이로 보는 인식 근저에는 두 가지 전혀 상반된 철학이 존재한다. 하나는『파이도』의 소크라테스나 에픽테투스 그리고 상기한 피트 양, 로제티처럼 현세 저편에 존재하는 본질이나 중심에 대한 철저한 믿음을 가지고 이 세상살이를 무의미한 행위로 간주하는 경우가 있으며 반면 현대의 부조리주의자들처럼 죽음 이편 저편 어느 쪽에도 중심이나 본질이 없다는 니힐리스트적 주장도 있다. 베케트는 후자에 속한 듯 보인다. 과학의 세례를 받은 현대인들은 전자의 축복받은 내세관에 안락하게 안주할 수 없는 처지이다. 그런 점에서 베케트의 인식이 더욱 공감을 얻는다.

    삶은 경쾌하게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루니 부인처럼 세속의 군살이 더덕더덕 붙어 삐져나오는 비계덩어리를 질질 끌며 힘겹게 발자국을 옮기는 것이다. 차라리 “팍 엎어져서 바가지에서 쏟긴 큼직하고 두툼한 젤리처럼 길바닥에 납작 들어붙어 꼼짝달싹 못했으면. 모래 먼지 파리떼가 쩍쩍 들어붙은 비대한 찌꺼기 덩어리라 한 삽 거창하게 퍼올려야 하겠지”(CSP 14). 삶은 고해(苦海 Weltschmerz) 그 자체이다. 고해의 바다를 건너가는 길은 다양하다. 베케트가『고도를 기다리며』와『유희의 끝』에서 택한 길은 무덤위의 춤추기(Dancing on the grave)이다. 패자의 무덤 위에서 득의만만하게 추는 승자의 춤이 아니라 변비에 걸려 온 몸을 비비꼬든지 그물에 걸려서 퍼덕거리든지 고통으로 온 몸을 쥐어짜내는 럭키의 춤이다. 베케트가 현세를 고해로 보는 근저에는 쇼펜하우적 인식이 깔려 있다. 그는『프루스트』에서 습관에 의해 지배된 삶을 고통과 권태 사이를 왕래하는 시계추에 비유한다. 습관이 자신의 의무인 “자신의 세계의 환경에 대한 유기체적 감각의 부단한 적응, 재적응” 을 수행할 때 고통이란 바로 “태만이나 비효율성으로 인한 이 의무의 방기” 이며 “권태는 만족할만한 수행” (16)에 해당한다.

    셋째, 베케트의 무대를 내세로 해석하는 비평가로 엘람을 들 수 있다. 그는『유희』의 상황을 “구스타프 도레의 삽화를 통해 우리 자신의 문화에 도상학적으로 우선 친숙하게 알려진 단테의 저 세상, 연옥의 희끄무레한 영역 중 한 곳, 아니면 지옥에 가까운 장소들”(149)로 이해한다. 『오고 감』(Come and Go)도 “폐쇄되고 통과 불가한 단테 지옥의 하계층들”(149)로 이해했다. 따라서 저 세상으로 사라져 버린다는 것(being gone)도“단순한 부재가 아니라, 영원한 고통의 순간의 형태로 남는 끔찍한 현존성” (not simple absence but terrible present-ness, in the form of an eternal and agonizing instant)(150)이라는 “초월적인 연극적 내세론” 을 제시한다. 베케트의 후기 축소극(dramaticule)이 내세적 종말론을 무대화하는 것은 물론 베케트 자신이 영혼의 불멸을 믿는 내세 주의자이기라기보다는 단테의 내세적 풍경을 차용하여 현세의 징벌적 고통을 연극화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7 가령 루니(Dan Rooney)의 삶도 생중사인데 그는 자조적으로 “저주받은 단테의 죄인들처럼, 얼굴이 정반대로 뒤틀려 우리 눈물이 우리 엉덩이를 적시겠지” (Like Dante’s damned, with their faces arsy-versy. Our tears will water our bottoms)(CSP 31) 부분은 단테 지옥편 칸토 XX장 21-22행, “눈에서 흐른 눈물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려 엉덩이를 적시네” (tears, down from the eyes,/ bathed the buttocks, running down the cleft 이하 Everyman’s Library판)의 문학적 차용이다. 이 여덟째 지옥의 수인들은 티레시아스(Tiresias) 등 인류 역사상 명망있는 예언자나 점술사인데 감히 하늘의 영역인 미래예측의 불경죄를 범했기 때문에 눈이 앞을 보지 못하고 후방을 보도록 머리가 180도 돌려져 있다. 그리하여 참회의 눈물이 흐르면 가슴으로 떨어지지 않고 등골을 타고 흘러내린다. 티레시아스처럼 자신이 평생 궁구한 삶의 의미가 고작해야 신에 대한 불경죄에 지나지 않겠는가는 장님 댄의 회한이 이 비통한 고백 속에 짙게 배어 있다.

    엘람은『나 아님』(Not I)의 여주인공(Mouth)이 공중에 떠있으며 입부분만 집중조명을 받는 모습에서 단테의 지옥편 XXVII장의 형벌 장면을 떠올린다. 그녀는 굳이 자신의 신원을 감추려고 발버둥치는데, “관객의 눈에 더할 나위 없이 매혹적인, 귀가 없이 허공에 떠있는 얼굴 모습의” 실제 신원은 다름 아닌 몽타페르티의 전투에서 기벨린파(Ghibellines)의 플로렌스 배신자인 보카(Bocca)이다. 물론 보카는 이탈리아 말로 입을 뜻한다(153). 게다가 “배신자 보카처럼 그녀는 토사물처럼 언변을 뱉어내면서 끝없이 자신의 신원을 숨겨야 할 운명이다”(153).8

    단테의 내세와 베케트의 내세적 무대를 관통하는 일관된 요소는 징벌의 유사성이다. 즉 살아 생전의 죄업에 대한 심판이나 출생이란 죄업에 의해 선고된 형벌은 모두 무명(blindness)이다. 베케트 무대의 주인공들이 자신의 처지나 신원에 대해 장님이라 어떠한 의미있는 말과 행동을 취할 수 없듯이 단테 지옥의 이 수형자들은 자신의 죄업의 성격을 정확히 깨닫지 못한다. 마치 카프카의 우화 <유형지>(In the Penal Colony)에 나오는 저주받은 수인처럼. 그들은 써레처럼 생긴 정교한 고대 기계에 밧줄로 묶여져 있고 그 써레의 날카로운 톱니가 수인들 등짝에 그들의 죄목을 상형문자로 새겨 넣는다. 수인들 자신은 자신의 등짝에 새겨진 죄목을 읽어낼 수 없다.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의 죄목을 인지하게 된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고고와 디디의 어처구니없는 비극적 결함(hamartia)은 자신들이 누구인지 모른다는데 있다. 게다가 약속 시간도 장소도 틀릴 가능성이 크다. 놀란 디디는 소리친다, “무슨 말 하려는거야? 엉뚱한 장소에 왔다고?” (10). 고고는 시간이 토요일인지 일요일인지 월요일인지 또는 목요일인지 분간 못한다. 지옥은 저 세상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자신과 시간 장소를 모르는 무명에 빠진 존재의 삶 자체가 바로 지옥이며 그런 의미에서 지옥은 바로 여기 이 순간에 진행되고 있는 현세적 현재적(hic et nunc) 사건이다.

    마지막 죽음관은 프루스트의 비전을 반영하고 있다. 베케트에게 죽음은 평생 마지막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다. 매일 매순간 자아는 죽고 또 새로 태어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서로 타인이며 오늘의 나는 완전히 새로운 존재이다.

    『크랍의 마지막 테이프』는 바로 이러한 자아의 거듭남을 녹음기 조작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크랍은 생일이 오면 일 년 동안 일어난 주목할 만한 사건을 녹음기에 음성으로 남긴다. 이 의식행사는 크랍이 안간힘을 다하여 기억의 상실(amnesiacs)을 극복하여 과거의 자아와 현재의 자아를 붙들어 매려는 노력이다. 베케트 동네의 주인공들에겐 거의 대부분 기억상실증이란 저주가 내려져 있다. 고고는 어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포조도 2막에서 고고와 디디를 만난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며 소년도 마찬가지로 2막에서 처음 왔다고 주장한다. 기억하지 못함은 과거의 자아가 이미 죽고 새로운 자아가 태어났다는 걸 의미한다. 피필드(Peter Fifield)도 이 상태를 죽음도 삶도 아닌 “체험적 여명” (experiential gloaming)(129)이라고 부른다. 말론이“나는 이미 죽었고 내가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만사가 일어나고 있지 않는가”(Beckett, Molloy 220) 하고 의심하듯.

    그러한 회색지대를 지우기 위해 크랍은 과거의 자기를 다시 방문하고 또 새로운 테이프에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기 위해 70회 생일 연례행사를 벌인다. 우선 자신의 과거 분신들의 목소리가 저장된 녹음테이프 하나를 뽑아들며 회고를 한다. 그 테이프에서는 인생에 마치 통달한 듯한 39세 혈기방장한 크랍의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무대 위 크랍은 객석의 관객과 마찬가지로 39세의 크랍이란 전혀 다른 인물의 대사를 듣고 있는 셈이다. 크랍이란 극중 인물(dramatis persona)은 즉 두 개의 자아로 분열되는 것이다. 보다 엄밀하게 분석하면 39세의 크랍은 자신의 녹음에서 10년 내지 12년 전의 과거자아의 삶에 대한 각오에 대한 촌평을 가하면서 “그 포부, 그 결단들, 특히 절주 결심 . . . 내가 그토록 형편없는 철부지였다니 믿을 수 없다” (CWP 58)라고 한다.

    관객은 테이프를 듣고 있는 1)현재 무대 위의 크랍, 2)테이프 속 39세의 크랍, 3)39세의 크랍의 비웃음을 사고 있는 20대의 크랍 등 세 분신 자아를 확인하게 되며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이 자아 분열 현상을 유도한 작가의 의도에 대해 궁금해 한다. 대부분 인간은 인격이나 자아의 연속성을 믿는다. 시간이 인간주체를 아무리 훼손시켜 생판 다른 인물로 바꾸었다 해도 우리는 다만 몰라 볼 정도로 타락했다든지 성숙했다든지 판단을 내리지 전혀 다른 인물로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베케트는 시간의 침식/퇴적작용에 의해 변모한 인격지형에 대한 동일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매순간 낡은 자아가 죽고 새로운 자아가 태어난다고 보았고 그 타인화 과정(transsubstantiation)을 구획지어서 현미경처럼 보여주는 게이 작품의 요체이다.

    인간주체의 불연속성에 대한 통찰은 프루스트적 인식이다. 시간의 프루스트적인“훼손” (“deformation”)에 대해 언급하면서

    70세를 맞는 무대 위의 크랍도 녹음테이프 속의 분신을 자신의 분신으로 착각하고 때로는 시샘을 느끼고 때로는 조롱하지만 테이프의 인물과 현재의 자기 사이에는 수많은 어제라는 재난이 가로막고 있어 이제는 서로 동질적 연속성을 추적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낯설어졌다. 39세의 크랍은 인생의 절정기에서 삶의 철리를 깨친다. “그토록 내가 억누르려고 했던 어두움이 실제로는 나의 가장 —”(“the dark I have always struggled to keep under is in reality my most —”(CWP 60)이라고. 비록 화가 난 크랍의 녹음기 조작 때문에 가장 중요한 깨침의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뒤 애인과의 뱃놀이 정사 장면에서 추측해보면 아마 밑줄친 부분은 “본질적 자아” (essential self)일 것이다.9 다시 말하여 중년의 크랍이 개안한 진리는 육체에 대한 마니교적 억압에서 벗어나서 육체적 욕망을 해방시켜 정신과 육체의 합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39세 화자는 애인이 마니교적 죄의식으로 태양을 보지 못하고 실눈을 뜨는데 어둠인 자신의 몸 그림자로 눈을 가려줌으로써 눈을 뜨게 하고 자신의 몸도 그녀 몸속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육체와 정신의 이분법에 의한 죄의식에서 해방된 의식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대 위 크랍은 시간의 침식작용에 의해 이미 육체의 욕망의 노예로 전락하였으며 술과 바나나 없이는 살지 못하는 어릿광대로 훼손되었다. 그 어느 누구도 이 둘만큼 낯설고 대조적일 수 없다. 억지로 이 둘을 한 인물의 분신으로 파악하기보다 새롭게 태어난 인물로 보는 게 여러모로 보다 이성적인 판단이다. 그러나 무대 위 크랍은 습관의 힘에 의해 굳이 자신의 인격의 동일성을 증명하기 위해 70세 기념 녹음 연례행사를 시작하려고 갓 개봉한 테이프를 녹음기에 걸고 녹음 시작 버턴을 누른다. 으레 그러듯이 30년 전 테이프 목소리에 대한 경멸을 내뱉은 후 자신의 신세를 두서없이 주저리주저리 섬긴다. 그러다 화가 치밀어 올라 테이프를 내동댕이치고는 39세 녹음테이프 뱃놀이 장면을 다시 듣는다. 결국 70세의 크랍은 자신의 모습을 온전하게 녹음하지 못하고 억지로 두서없이 주워섬긴 녹음 서두의 자아는 무대 위에 팽개쳐지고 공테이프 회전하는 소리만 무대 위의 정적을 깰 따름이다. 다시 말하여 시간의 파괴작용에 의해 생사를 거듭하는 인간주체의 본질을 깨닫는 순간 크랍은 더 이상 타인에 대한 기록일 수밖에 없는 연례 녹음 행사를 치루는 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마찬가지로 베케트가 그리고 있는 네 개의 죽음 형상은 모두 절망적인 염세적 얼굴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염세적 얼굴의 탈을 한꺼풀 벗기고 나면 전혀 다른 죽음을 초월한 얼굴이 나타난다. 베케트에게 삶이란 기본적으로 병이며 괴로움이다. 그 병은 죽음에 의해 비로소 치유되며 고해도 죽음에 의해 건널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태도를 긍정적 니힐리스트(positivist nihilist)라 부른다. 죽음이 축복인지 행복인지는 알 수 없어도 삶의 괴로움은 도저한 고통을 안겨 주며 일단 죽음은 삶의 고통을 멈추어둔다는데 의미가 있다. 이 긍정적 니힐리스트란 용어는 베케트가 1937년 친구 호은(Joseph Hone)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그는 아마 긍정적 니힐리스트 비전을 가졌음에 틀림없다” 라고 하는 표현에서 비롯한다. 여기서“그는”보스웰(James Boswell)을 가리킨다. 보스웰은『사무엘 존슨의 생애』(Life of Samuel Johnson 1791)에서 차라리 죽어서 허무로 돌아가는 것 보다 고통스럽지만 현세에 머무르는 게 낫다는 새무엘 존슨의 주장에 대해 존재 자체가 “명백한 악”(positive evil)이므로 옳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리하여 베케트는 보스웰을 명백한 악인 삶을 부정하는 긍정적 니힐리스트로 규정하고 자기와 동일시한다(Ricks 16 재인용). 긍정적 니힐리스트는 옥시모론이다. 긍정적 니힐리스트는 결코 죽음에 대해 초연할지는 모르지만 결코 긍정적이거나 낙관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베케트에게 있어서 삶이 악인 이유는 형이상학적 중심 즉 절대자의 부재에 대한 회의 때문이다.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가 부재함으로 삶은 의미로 충만한 느낌표의 문장이 아니라 알파 이전의 무와 오메가 이후의 무 사이의 휴지부(hiatus)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베케트의 주인공들은 항상 전전긍긍해 한다. 이러한 실존적 불안(Angst)은 때로는 중심에 대한 편집증으로 때로는 묶인 존재라는 피해망상으로 표출된다. 햄이 의자를“바로 중심에 탕 놓아라” (Endgame 27)라고 클로브에게 호통치는 장면과『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고고가 디디에게 은연중 구속적인 존재를 환기시켜주는 장면에서도 잘 드러난다.

    바로 이 점에서 베케트는 죽음학의 역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아리에는 죽음관의 변천사에서 중세 말기와 19세기에 유사한 지각 변동이 반복되어 발생했다고 진단한다. 즉 중세에는 만물이 오브제로서 신적인 거대한 존재의 사슬(Great Chain of Being)속의 한 구성요소로 영혼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중세인들은 자신의 영혼과 오브제의 영혼이 교감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중세 말기 자본주의가 태동하면서 인간과 오브제의 관계는 변질되었다. 인간과 재물 사이에 더 이상 “감각적 결합이” 존재하지 않는다. 가령 “우리 산업 문화는 사물들이 ‘우리 영혼에 접착하여 그로 하여금 사랑하도록 강요하는’ 그런 영혼을 품고 있다고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사물들은 생산 도구가 되거나 소비탕진의 오브제로 변했다. 그들은 더 이상 ‘보물’(treasure)로 자리잡지 못한다” (136). 이러한 사물관의 변천은 죽음관의 변화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중세의 순치된 죽음은 이제 임종자의 삶의 행적(biography)과 소유물을 약탈해가는 숙적으로 돌변했다. 죽음은 더 이상 “(선행과 죄업에 대한) 경중을 가리며 최종 대차대조부를 작성하고 판단하며 안식을 취하는” 계기가 되지 못하고 “육체적 죽음, 고통, 부패과정” 으로 받아들여졌다(138). 20세기에도 유사한 죽음관의 변천이 일어난다. 낭만주의 시대 때 보편적으로 통용되었던 신은 이미 증발하였고 현대인들은 중세부터 지속되어 온 안온한 내세관의 보금자리에 더이상 머무를 수 없다. 다시 죽음에 대해 불가항력을 느끼며 무력감과 공포에 빠져 있다. 마치 중세 말기인들이 <죽음의 무도>가 안겨주는 티모르 모리에 휩싸이듯이 현대인들은 죽음에 대해 무관심과 공포라는 병립불가능한 감정에 휘둘리고 있다.

    20세기에 죽음은 더 이상 소크라테스가 설법하는 영혼의 여행도 아니며 단테가 그리고 있는 지옥/연옥/천국도 아니다. 이처럼 영혼 불멸설에 근거한 전통적 내세관의 원천무효가 선언된 형편에서 현대인들은 20세기의 “험상궂은 추수꾼” (Grim Reaper)과 대면해야 할 운명에 처해 있다. 파스칼이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해 도박을 하던 시대는 지났다. 인격신에 베팅하는 자는 판돈을 잃을 상황이다. 신의 증발과 영혼필멸이란 엄연한 현실에 의해 낯설게 다가오는 죽음과 현대인은 쉽게 화해하지 못한다. 무지의 공포에 질려 일종의 퇴행 현상을 보이며 죽음에 대한 의도적 망각으로 대처한다.

    우리 시대에서 죽음은 크레이스 소설『사후』(Being Dead)에서 묘사되듯 루크레티우스적 죽음관이다. 바리톤 만에서 불의에 강도 살인을 당한 주인공 조셉과 첼리스는 불행히도 “떠나갈 영혼도, 지옥행 마차도, 그들의 타락한 영혼을 화염지옥으로 끌고 갈 창백한 말도, 또는 그 황금빛 날개에 걸맞지 않게 소박하게 그들을 안식, 재결합과 영원으로 태워 줄 거룩하게 치장한 천상의 사자도” (15) 기대할 수 없다. 그들은 “부드러운 과일이었고 보드라운 육체에 머물렀을” 뿐이다. “그들은 살덩어리였고 우리도 완전 살덩어리이며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고기 덩어리이다” (15). 이내 곧 고기 덩어리를 구성했던 원자들은 각기 자신이 고유 화학원소인 마그네슘, 인 칼슘으로 환원될 것이다. 영혼과 신은 인간의 꿈이 빚은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

    종래의 신성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고 영혼의 여행이 출발하는 시점이 죽음이란 “신성한 죽음관”은 종교 신자들에게나 통용되는 가설이다. 베케트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말론은 “기독교적 덕성, 유혹에 대한 저항, 상시적 기도에 의존하기, 죽음의 불가피성과 미만성에 대한 부단한 성찰” (Tonning 109) 등을 통해 죽음을 맞는 것이 아니라『게임의 종말』의 햄이 주절대듯 한 바탕 게임으로 죽음을 조롱하고 있다. 시간 때우기와 놀이 외에 웃음도 죽음으로 향해가는 인간 존재(Sein-zum-Tode)에 대한 부조리적 반응이다. “웃음 가운데에도 엄격히 말하여 웃음이 아닌 경우가 있다. 짖어대는 양태로 존재하는. 세 가지만 잠시 떠올려보면 가령 쓴웃음(bitter laugh) 허탈한 웃음(hollow laugh) 그리고 파리한 웃음(mirthless laugh)” (Watt 47)으로 분류된다. 이 웃음들에 베케트는 위계질서를 부여한다. 파리한 웃음은 허탈한 웃음이 그리고 허탈한 웃음은 쓴웃음이 각각 발전 심화된 경우이다. 부조리 웃음의 초보 단계인 쓴 웃음은 선하지(good) 않는 대상에 대해 짓는 도덕적 웃음이고 허탈한 웃음은 참(true)이 아닌 대상에 대해 짓는 지적인 웃음이며 마지막으로 파리한 웃음은 “웃음 중의 웃음으로” “철학적 웃음” (dianoetic laugh)이다. 이 철학적 웃음은 “웃음에 대해 웃는 웃음으로 . . . 불행한 것에 대해 웃는 웃음” (Watt 47). “ 불행보다 더 우스운건 없어요” (18)라고 외치는『마지막 유희』의 넬의 웃음이 바로 철학적인 웃음이며 베케트 전 작품을 통해 가장 의미심장한 웃음이다.

    이처럼 베케트의 문제는 인간 존재의 곤경(human predicament of existence)의 비극적 딜레마에서 벗어나 에피쿠로스나 루크레티우스처럼 개운하게 살 수 없다는데 있다. 그렇다고 소크라테스나 에픽테투스처럼 절대자나 제우스 신에 의탁하여 구도 생활을 영위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자연과학적 유물론이 우리 시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등극한지는 이미 오래 전이다. 따라서 위 네 가지 죽음의 양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화두에 골몰하는 베케트에게 삶은 죽음보다 고통스럽다. 이처럼 티모르 모리의 베케트적인 변용과 굴절이 그의 작품 속에 재현되어 있는 것이다.

    베케트 작품 속의 주인공들의 삶은 죽음의 잿빛으로 온통 둘러싸여 있다.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마치 변비 걸린 사람처럼 그들은 계속 화장실을 떠나지 못하고 그 속을 들락날락해야만 하는 이치와 마찬가지이다. 자궁무덤화 과정이나 메멘토 모리나 현세를 내세로 대체하는 재현행위는 모두 20세기적 죽음에 대한 베케트의 대응이다. 베케트는 이렇게 말하고 싶을지 모른다. 자본주의의 무한한 욕망추구 와중에 죽음을 잠시 망각하고 신나게 보내다 말년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험상궂은 추수꾼의 낫질에 새파랗게 질린 부르조아들에게 네가 평생 추구해온 삶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었다고. 진정한 삶은 그런 망각과 회피 그리고 무명(blindness)의 삶이 아니라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투쟁의 연속으로서의 삶이라는걸. 톨스토이가『참회록』에서 벌인 죽음 의식의 각성을 위한 투쟁처럼.

    베케트는 평생 죽음의 그림자와 드잡이질 해왔다. 죽음으로 부터 구원해줄 고도를 기다리며 럭키의 입을 빌려 신의 무관심을 은근히 나무라고도 하는 한편 삶을 죽음으로 가는 과정으로 파악하여 삶을 향락하는 세속애에 대해 코웃음을 친다. 그러면서도 신의 존재에 대해 냉소적인. 자신의 태도에 대해 철학적인 웃음을 터트린다. 죽음에 대한 베케트의 딜레마적인 태도는 아리에가 주장한 추악한 죽음과 중세식의 티모르 모리를 극복하는 방식이다.10

    1텍스트는 Ariès, Philippe. The Hour of Our Death: The Classic History of Western Attitudes Toward Death Over the Last Thousand Years. Trans. Helen Weaver. New York: Random House, 2008. 이하 면수만 표기.  2아리에가 제시한 A)개인의 자각, B)순치되지 않은 자연에 대한 사회의 방어, C)내세에 대한 믿음, 마지막으로 D)악의 존재에 대한 믿음 등 4개의 주제는 인류학적 접근에 기반한 분류라면 필자가 베케트 작품분석 도구로 제시할 주제는 어느 정도 철학적인 문제로서 C)와 D)에 관련된 내세와 악의 존재이다.  3소크라테스는 가르치길 진정한 철학자에게 죽음은 불행이 아니라 영혼을 괴롭히는 육체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신의 축복이다. 플라톤의 저서『파이도』(Phaedo)에 기술된 대화 첫머리에 죽음을 영혼과 육체의 단절이라고 정의를 내리고서 그는 철학하기 또한 동일한 단절과정이라는 명제를 산파술로 증명한다. 그 결과 마침내 죽음은 바로 철학하기란 궤변적인 삼단 논법을 완성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이 현자가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갖지 않고 의연하게 대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왜나 하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육체의 감각소여에 휘둘리지 않고 냉철한 이성으로 사유하기 위해 영혼을 육체로부터 떼어 내는 게 구도하는 철학자의 필수 실천사항인데 마침 굳이 고행을 하며 애를 쓰지 않아도 이제 절대자가 자연스럽게 영혼을 육체로부터 해방시켜주니 불감청 고소원이기 때문이다(Plato 15-17).  4극단적인 염세주의는 비단 베케트의 전유물이 아니다. 소포클레스(Sophocles)의『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Oediphus at Colonus)의 코러스 대사, “살아 있기보다 차라리 죽은 게 나은데, 최고의 복은 아예 태어나지 않는거지” 로부터 시작된 염세주의 편린을 역사적으로 추적하면서 릭스(Christopher Ricks)는 영문학사에서는 하우스만(A. E. Housman), 하디(Thomas Hardy), 토마스(Edward Thomas)등을 보기로 든다. 가령하디는 자신의 책 뒷장에 “비통하도다, 나의 지상체류가 연장되었구나” (Heu mihi, quia incolatus meus prolongatus est!; Woe is me, that my sojourning is prolonged!)라고 기록했다(Ricks 8-13).  5영어판에서는 그냥 사람들(they)이라는 인칭대명사를 쓴 반면 불어판에서 임산부(Elles)라는 점을 보다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6이 설화의 연원을 거슬러 가면 5세기 아라비아에까지 이른다. 세 명의 귀족 또는 왕이 하루 종일 사냥을 즐기고 흥겨운 피곤함에 젖어 궁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땅 속에서 괴기스러운 음성이 울려 나온다. “현재의 당신은 과거의 우리였고, 현재의 우리는 미래의 당신들이 될 것이다” (Quod fumis, estis. Quod sumus, eritis). 돌아다보니 살이 부패하여 형체를 분간할 수 없지만 “파충류들이 이리저리 기어 다니는 세개의 화강암 석관 속에” 세 명의 해골이 누워 있다. “세 명의 산 자와 세 명의 죽은 자” 라는 이 아라비아 전설은 그 후 중세 말기 유럽을 지배했던 다양한 모습의 <죽음의 무도>의 원형이 되었다. 죽은 해골들은 이승에서의 지위, 명성, 권력, 부 그리고 육체적 쾌락등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며 자칫 잘못하면 바로 죄업으로 바뀌어 저승에서 호된 대가를 치룰 것이라고 경계하는 것이다. 세속의 모든 부와 권력을 한 손에 쥐고 게다가 약동하는 생명력으로 사냥을 즐기며 육체적 쾌락을 만끽한 세 젊은이는 졸지에 던져진 해골의 메멘토 모리 경고에 매우 당혹했을 것이다. 그 이후 세 청년 귀족들은 복된 죽음 또는 안심입명(安心立命: good death)에 대한 고민을 평생의 화두로 삼고 살아가게 된다(Clark 337-38).  7작가 서정인도‘지구에서의 삶은 또 하나의 지옥생활이다’라는 유사한 세계관을 피력한 적 있다. 단편 <벽소령>에서 서정인은 “삶이 힘들지? 당연하지 저 별에서 죄를 지으면 사후에 심판하여 보내는 지옥이 바로 지구거든” 이라는 기상천외의 현세관을 제시한다. 이 촌철살인적인 절망주의에 의하면 우리는 이미 전생의 업보에 의해 지옥의 형벌을 받고 있으며 구원의 가능성은 전무하다. 단테의 지옥문 현판에 걸려있는 무시무시한 경고문, “여길 들어오는 자여 모든 희망을 포기하라” (Relinquish all hope, Ye who enter here)처럼 지구가 지옥이라면 모든 희망은 끊겨 버린다. 베케트도 서정인도 지상의 삶을 생중사의 고해라고 인정하는데 전자의 경우엔 그 인생고의 형상에 후자는 그 원인에 각기 방점을 찍고 있다.  8단테와 베케트 극작품 간의 유사성 비교에 대한 연구로는 Hélène L. Baldwin, “Samuel Beckett’s real silence”; Neal Oxenhandler,“ Seeing and believing in Dante and Beckett”; Wallace Fowlie,“ Dante and Beckett’ 참조(Elam 163 참조).  9스튜어트(Paul Stewart)는 필자와 정반대로 이 깨우침의 순간을 크랍이 성애적인 갈애에서 해방되어 금욕으로 극복하는 계기라고 해석한다(176).  10그러나 베케트의 죽음을 진정한 의미에서 긍정적 유토피아적 비전으로 보는 이론가들이 있다. 아도르노, 크리츨리(Simon Critcheley), 웰러(Shane Weller) 등 소위 죽음의 정치성을 주장하는 비평가들이다. 아도르노가 대표적인 이론가이다. 결국 자본주의와 전체주의에 대한 니힐리스트적 부정이 오히려 강력한 정치성을 띈다는 역설. 그는 “영지주의자나 베케트에겐 이 창조된 세계는 근원적으로 악이며 대체할 세계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상이 현재 그대로인 한 모든 화해, 평화, 정숙의 풍경들은 죽음의 풍경일 수 밖에 없다” (Adorno, Negative Dialectics 381). 아도르노는 <마지막 유희 독법> (Trying to understand Endgame)과『부정적 변증법』에서 베케트가 동일자의 법칙에 기초한 관리된 전체주의 사회를 문체와 내용 양 측면에서 죽음의 폐허로 재현함으로써 그 폐허 속에서 유토피아 즉 비동일자의 법칙과 화해하는 세계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매우 정치적으로 본다. 따라서 베케트의 죽음의 문학적 재현은 매우 긍정적이며 미래 지향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웰러도 외견상 베케트 미학의 핵심을 이루는 고독의 숭배(apotheosis of solitude)도 결국 고독한 원자들의 “조합(combinations)이 역설적으로 오히려“우리가 감각으로 지각하는 사물들을 생성시키” 도록 유도한다고 믿는다(Burnet 36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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