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apegoats and Bastards of Manifest Destiny in the U.S.-Mexico Borderlands: Cormac McCarthy’s Blood Meridian Revisited

국경의 틈새에서‘명백한 운명’을 욕망한 희생양과 사생아 ―코맥 매카시의『핏빛 자오선』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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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Cormac McCarthy’s Blood Meridian (and the Border Trilogy) can be used as a touchstone with which the limit of American literature is tested. For his text is particularly significant in the sense that its language mixes English with Spanish; its characterization confronts Americans with non-Americans; and its narrative structure traverses the geographical and symbolic borderlands between America and Mexico. In this sense, his novels deserve to be reexamined under the rubric of Chicano/a Studies, Hemispheric American Studies, transnationalism, etc. Rereading McCarthy’s Blood Meridian, this paper attempts to rethink its historical complexity in relation to Manifest Destiny, focusing on the border-crossing motifs of filibustering and scalphunting. For this purpose, I pay due and careful attention to the ways in which the ideology of Manifest Destiny was created, circulated, and manipulated among the 19th century American expansionists and border-crossing agents. Of course, my discussion does not omit the significance of the U.S.-Mexico borderlands in the contemporary Chicano/a Studies and Hemispheric American Studies. In these historical and interdisciplinary contexts, I investigate how the 19th century filibusters like Captain Smith and his followers fall prey to the imperial practice of Manifest Destiny. I would also interrogate whether and how the Glanton Gang’s scalp trade is involved in the capitalist desire of Manifest Destiny.


  • KEYWORD

    Manifest Destiny , John O’Sullivan , Hemispheric America , border , borderlands , Cormac McCarthy , Blood Meridian

  • I. 왜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이 문제인가?

    1987년 출판된 글로리아 안잘두아(Gloria Anzaldu´ a)의 『접경지』(Borderlands/La Frontera: The New Mestiza)는 기막힌 역사적 은유로 미-멕시코 접경지의 존재 조건을 형상화함으로써1 이후 치카노 문학을 노정하는 별과 같은 이정표가 되었다. 그녀는 책에서“입 벌린 상처”같은 국경을 넘나들며 살아가는 접경지의 주체를“뉴 메스티자”(책의 부제)라고 호명하고 이 여성들이 만들어 나가는“경계 문화”의 혼종성을 예찬한다. 나중에『문제는 경계다』(Border Matters: Remapping American Cultural Studies)를 펴낸 비평가 호세 살디바(Jose´ David Saldı´var)는“경계 문화는 전치(displacement)에 이은 이문화간, 초국가적 넘나들기를 통해 생겨난다”(35)라는 진술로 안잘두아의 영감을 보강하면서, 미-멕시코 경계 연구의 이론적 패러다임이“검은 대서양,”즉 아프리카 디아스포라 담론의 틀과 서로 맞닿아 있으며 넓게는 영국발 문화연구 (Cultural Studies)의 계보에 소속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9-12). 접경지 문화의 혼종성에 대한 관심은 순혈주의의 독선과 국가주의의 안일을 견제하고자 하는 대안 구상에 다름 아닌데, 이는 또한 아메리카 반구 연구(Hemispheric American Studies)를 주창하는 학자들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이들은 미국학 연 구자들에게 미국 중심의, 미국에 국한된 분석을 넘어설 수 있도록 학제적 얼개를 다시 짜서 아메리카 반구 전체를 밑그림으로 놓기를 촉구한다(Levander and Levine 2-3).2 특히 미국과 멕시코의 반구적 연관성과 관련하여, 제시 알레만(Jesse Alema´ n)은 양국이 유럽의 제국주의로부터 독립할 당시 함께 품었던 혁명 정신과 공화주의의 이상을 상기시키면서 멕시코를“낯설고도 친숙한 미국의 짝”(an uncanny figure for the United States)으로 상정한다(77). 그런데 불행하게도 먼로 독트린을 계기로 미국은 더 이상 멕시코의 이웃 공화국이 아니라“멕시코의 영토는 욕망하되 멕시코와의 인종적 피섞임은 두려워하는”“낯선 제국”(unhomely empire)으로 변하게 된다(Alema´ n 83, 91).3 이와 같이 미국과 멕시코를 역사적 짝패로 보는 아메리카 반구 연구의 초기값은 살디바가 도입하는 치카노 문화 연구의“초학제적 모델”(a transdisciplinary model 9)의 전제와 서로 조응한다. 미국과 멕시코의 관계를 이렇게 설정하면 당연히 양국 간의 경계가 지니는 상징성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런 유의 변화의 이해가 필자가 이 논문에서 목표하는 바이다. 미국 소설이라는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미-멕시코 틀로 확대하여, 도전적인 해석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고, 이를 토대로 주류 비평이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역사적 전망을 제시해보자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시도는 학계에서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미국 사학계에서도 비교적 잘 알려진 일례가 있다. 앞서 언급한 치카나 레즈비언 문화이론가인 안잘두아의 책이 출판된 해와 같은 해인 1987년에 백인여성 사학자 패트리샤 리머릭(Patricia Limerick)도 안잘두아처럼 야심차게『정복의 유산: 미 서부의 끝나지 않은 과거』(The Legacy of Conquest: The Unbroken Past of the American West)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책의 논지가 착상될 당시 리머릭은“어리고, 정년이 보장되지 않았고, 출판 경력도 없는, 그저 약간 까칠한 여교수”(2)였는데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아메리카 서부에 대한 기성 강단 사관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정복의 유산』이 출판된 지 20년 만에 나온 복간판을 위해 새로 쓴 머리말에서 리머릭이 미국 서부사의 문제에 관해 재차 내놓는 진단과 처방은 간단 명료하다. 요약하자면, 첫째, 서부 역사의 주체는 개척을 이끈 백인 남성들만이 아니라, “인디언, 멕시코인, 멕시코계, 아시아계, 흑인”등의 소수민족까지 포함한다. 둘째, 프런티어는 1890년대에 종결된 것이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에 거주하는 동시대인의 삶에 계속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 [프레더릭 잭슨 터너의 이론이 성립하는 이유는 그의 연구가 히스패닉의 존재와 역사를 배제했기 때문인데 이는 학자로서의 나태함 또는 무지의 소치로 볼 수 있다(253).] 셋째, 서부 개척, 팽창주의, 서진 운동 등에 붙여야 할 정직한 용어는“정복”이다(6-7). 리머릭은 역사가와 일반 독서대중 공히 이 세 가지만 인정하면 서부와 관련해 꼬인 문제는 쉽게 풀릴 것이라고 덧붙인다. 그녀의 주장에 대해 원로 사학자들은 대체로 분개했는데, 자신들의 텃밭이 침범 당했다고 느낀 그 중 몇몇은 다소 감정적으로 다음 두 갈래로 반응했다고 한다. “그녀의 책은 온통 오류투성이이다”와“그녀의 책의 내용은 [자신들이] 이미 다 말한 것들이기 때문에 딱히 혁신적이라고 평가할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7)로.

    경계와 접경지의 역학과 관련하여, 리머릭이 취한 혁신적인 입장은 우선“미국의 남서부”가 (텅 빈 황무지가 아니라) 이전에“북부 멕시코”였음을 천명하고 이 지역을 “앵글로 아메리카와 히스패닉 아메리카가 언어, 종교, 인종, 경제, 정치적으로 조우한” 공간으로 인정한다는 점이다(222). 리머릭은 미-멕시코 접경지의 지정학적 중첩과 그 변천을 조밀하게 역사화하면서, “자의적으로 두 주권 영역을 나누는 선을 긋는 것과 사람들로 하여금 그 선을 존중하라고 설득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222)라는 진술로 경계와 접경지의 모순된 탄생에 관해 정곡을 찌른다. 또 하나 빠트려서는 안 될 리머릭의 입장은 이러한 혼성적 문화 공간으로서의 접경지를 미-멕시코 대자의 틀에 한정시킨 것이 아니라, 백인 식민주의자들이 오기 전, 다시 말해 그 공간에 인위적인“선이 상상되기 이전에”이미 거기서 아무런 제약 없이 삶의 터전을 일구었던 원주민들의 존재가 추가된 삼각관계의 장으로 본다는 점이다(235). 나중에 본론에서 다시 논의하겠지만, 미-멕시코 양국에 인디언 부족들이 연루된 삼각관계는 1960년 초반에 사학자 랠프 스미쓰(Ralph A. Smith)에 의해 심도 있게 고찰된 바 있으며, 많은 매카시 비평가들은『핏빛 자오선』(Blood Meridian)의 갈등 관계를 이해하는데 스미쓰의 연구가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동의한다(Sepich 5-8). 물론, 제이 엘리스(Jay Ellis)가 지적하듯이, “터너 신화의 반영구적 위세에 저항하는 패트리샤 리머릭의 수정주의 사관”또한 매카시의 역사소설『핏빛 자오선』과 국경 3부작을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지 않게 읽어나가는데 필수적인 역사적 맥락을 제공해준다(8).

    최근까지 매카시 연구자들이 공간과 역사에 초점을 맞춘 비평을 상당수 쏟아 국경의 틈새에서‘명백한 운명’을 욕망한 희생양과 사생아 601낸 것은 기정사실이다.4 이들 논의의 대부분은 미국의 관점에서 미국 중심적으로 전개되지만 정작 미국이라는 국가 자체에 대해서는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는다. 본 논문은 본론에서 매카시의 소설에 점철된 멕시코의 모습과 정체에 착안하여 미국 너머에서 미국을 바라보며 미국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다. 이를 위해 앞서 언급한 수정주의 서부 사관, 아메리카 반구 연구, 치카노 문화 이론 등의 초국가주의 비평틀을 필요에 따라 활용하면서 초학제적 상상력에 기대어 매카시의 텍스트를 해석할 것이다. 여기서 잠시, 심도있는 주제적 접근에 앞서, 매카시의 소설에서 멕시코가, 멕시코와의 경계가 정말 중요하긴 한 건지 확인해 두더라도 지면의 낭비는 아닐 것이다.

    코맥 매카시가『핏빛 자오선』과 국경 3부작에서 창조한 인물들은 여러 가지이유로 미-멕시코 국경을 넘나든다. 『핏빛 자오선』에서 글랜턴 일당(the Glanton Gang)은 텍사스-치와와 접경지를 종횡으로 누비며 코만치 족을 위시한 인디언들의 머리가죽을 사냥한다. 『모두 다 예쁜 말들』(All the Pretty Horses)에서 존 그래디(John Grady)는 숙련된 카우보이로서의 자신의 노동력을 팔기 위해 멕시코의 부유한 대농장을 찾는다. 『국경을 넘어』(The Crossing)에서 빌리 파햄(Billy Parham)은 처음에는 사로잡은 늑대 한 마리를 태생지인 멕시코 북부 산악지대로 돌려보내기 위해, 두 번째는 도난당한 아버지의 말들을 되찾기 위해, 마지막으로는 두 번째 여정에서 피살되어 멕시코에 가매장된 동생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국경을 넘는다. 국경 3부작의 최종편인『평원의 도시들』(Cities of the Plain)에서 존 그래디는 매음굴에 갇힌 멕시코 소녀를 향한 낭만적 끌림 때문에 접경지 소도시 후아레스를 들락거린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매카시의 등장인물들이 국경, 즉 국가 간의 경계를 넘는 방식과 이 소설들의 배경으로서의 미-멕시코 접경지가 다루어지는 방식이 매우 특이함을 알 수 있다. 이 특이성은 소설의 서사구조가 미국과 미국이 아닌 공간을 가로지르고, 미국인과 비미국인을 대면하게 하고, 심지어 어디까지가 미국문학이고 어디서부터가 미국문학이 아닌지 그 한계를 규정하도록 은연중에 강요한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기실 플롯의 상당 부분이 멕시코 영토를 배경으로 펼쳐지면서 생소한 이국의 지명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다양한 계층의 멕시코인 등장인물들이 출몰하는데다가 이들이 내뱉는 짧고 일상적인 대화뿐만 아니라 철학적 성찰이 담긴 듯한 긴 독백과 담화까지 스페인어로 인쇄되어 있는 특이한 텍스트적 환경은 영어와 미국적인 것에 익숙해진 독자들을 불편하게 만들기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텍스트적 환경은 한편으로 (브레히트식의) ‘낯설게 하기’가 겨냥하는 이화 효과를 수반하여 메카시의 소설을 친숙한 고전 서부극의 연장선상에서 즐기고자 하는 일부 독자층의 동화 심리를 저버릴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프로이트적 의미에서의) 이 ‘낯설고도 친숙한’ 텍스트의 공간 속에서 멜빌과 포크너와 핀천의 기운이 감도는 순미국적 서사 전통을 모색하려는 평자들은 매카시의 심오한 내러티브에 회절되는 멕시코라는 타자의 목소리 앞에서 주춤하게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목소리는 사장된 과거에서 스며나오는 환청적 울림이라기보다는 (레비나스적 의미에서) 식도를 가진 얼굴이 성대를 통해 생성하는 요청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바로 이 타자의 요청이 백인 주체의 욕망의 공식과 백인 미국의 역사적 근간을 교란시킬 수 있는 윤리적 대듦으로 번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매카시의 월경 소설이 이와 같이 미국문학의 한계를 규정하는 동시에 가능성을 타진하는데 드물게 유용한 자료라고 판단한다. 그의 소설 속에 창조된 특이한 정황들은 특수를 보편에 포함시키는 근대적 상상력을 학습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잘 상상된 특수가 보편 자체를 재구성하게 할 수 있다는 탈현대적, 탈식민주의적, 탈구조주의적 역발상을 촉진하는 값진 계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는 경계에 관한 논의를 지나치게 추상적인 방향으로 끌고 가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눈에 보이지 않는 자아, 의식, 욕망의 경계에 깊이 천착하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대신“항상 역사화하라!”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불후의 구호에 호응하여, 지도 위에 그어지고 땅 위에 세워진 경계가 접경지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면밀히 고찰할 것이다. 또한 사람과 경계라는 두 변수가 만났을 때 발생하는 월경의 문제를 빼놓을 수가 없는데, 월경 일반도 그러하겠거니와 특히 미-멕시코 사이의 월경이 심히 양극화된 양태—폭력으로서의 월경 대 소통으로서의 월경—를 띠기 때문이다. 미-멕시코의 역사를 일별하더라도 전자, 즉 침략과 정복을 위한 월경과 후자인 교역과 교류를 위한 월경이 공존하며 길항하는 시기가 어렵잖게 목격된다. 역사에서 손을 놓지 않는 매카시의 소설에서도 폭력으로서의 월경과 소통으로서의 월경이라는 양면성이 동일 시공간에 착종되어 있다. 이 착종의 맥락은 찬찬히 고찰될 가치가 있다. ‘월경은 폭력인가, 소통인가?’보다 정확히는‘어떻게 월경은 폭력이면서 소통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안을 작성함에 있어, 아마도 가장 적절한 출발점은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양국의 국가적 운명을 결정지은 역사적 이슈이자 정치적 이데올로기인 이른바‘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에 대한 정확한 이해일 것이다.

    1원문은 다음과 같다. “The U.S.-Mexican border es una herida abierta [is an open wound] where the Third World grates against the first and bleeds. And before a scab forms it hemorrhages again, the lifeblood of two worlds merging to form a third country - a border culture”(25).  2이 요청은 1998년 미국 아메리카학회(ASA) 회장 제니스 래드웨이(Janice Radway)의 취임 연설의 기조이기도 하다.  3필자는 곧이어 나올 논문에서 정신분석학적 비평이론에 근거하여 매카시의 소설을 분석할 것이다.  4김미현은“서남부 국경지대”를“배척과 끌림이 혼재하는 세계”(26)라고 정의하고, 메카시의『피의 자오선』에서“혐오라는 감정으로 추동되는 배척과 끌림의 반복이라는 비전”(28)을 찾아내어 이를 미국 역사와 서구 근대 문명 기저에 존재하는 양면적인 욕망에너지와 연결 짓는다.

    II.‘ 명백한 운명’의 역사와 신화

    폭력으로서의 월경의 실제가 가차없이 드러나는 경우는 단연 주권 국가 간의 전쟁이다. 미-멕시코 양국 관계에 이 관점을 적용시킬 때 으뜸으로 부각되는 역사적 사건은 멕시코 전쟁(1846-48)일 것이다. 멕시코 전쟁의 원인이야 복합적이겠지만 굳이 하나의 연표적 계기를 꼽으라면 1845년에 단행된 텍사스 합병을 들 수 있다. 1836년 3월 멕시코로부터 독립을 선포한 텍사스 공화국의 앵글로색슨 수뇌부는 팽창주의를 천명한 민주당이 1844년 대선에서 승리해 폴크 정권이 들어서자 미연방의 스물여덟 번째 주로 가입하는 수순에 박차를 가했고 마침내 1845년 12월에 의회의 승인을 이끌어냈다. 텍사스 합병은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팽창주의 정책을 태평양 연안까지 구현하는데 필요한 지정학적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반면, 멕시코의 입장에서는 텍사스의 분리 독립으로 야기된 자국의 영토의 상실이 도미노 현상처럼 연쇄될 지도 모를 위기의 순간이었다. 양국 간의 이와 같은 이해관계와 영토 분쟁의 결과가 멕시코 전쟁이었다. 멕시코 전쟁의 심층적 배경과 동인에 관해서는『핏빛 자오선』에 제기된 역사 재구의 문제를 조명할 다음 장에서 논의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텍사스 합병을 옹호하기 위한 캐치프레이즈로 시작해 (롤랑 바르트 식의) 신화 창조 과정을 거쳐 역사적/초역사적인 미국의 이데올로기로 성장한‘명백한 운명’의 실체를 해부하고자 한다.

    19세기 중반 미국의 팽창주의 정책을 지지하는 정치적 수사로 유통된‘명백한 운명’이라는 문구가 오늘날 미국인의 의식의 심층부를 떠받치는 이데올로기 중의 하나로 살아남게 된 과정은 여러 측면에서 아이러니컬하다. 우선‘명백한 운명’이라는 문구가 존 오설리번(John L. O’Sullivan)이라는 언론인에 의해 최초로 씌어졌다는 주장이 인정받게 된 시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존 오설리번이 1845년 여름과 겨울 자신이 관여하는 두 언론매체에 순차적으로 이 문구를 사용했음을 밝힌 학술적 입증은 역사학자 쥴리어스 프랫(Julius Pratt)이 1926년에 발표한“‘명백한 운명’의 기원”이라는 짤막한 논문을 통해서였다. 말하자면 약 8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에 기본적인 사실관계가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왜일까? 존 오설리번의 전기 작가 로버트 샘프슨(Robert Sampson)이 기지를 발휘해 지적하듯이, 1846년 서른세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자신의 텃밭인 언론계를 떠난 오설리번이 이후에 취한 행보는 문자 그대로“잊힘으로의 여정”(Journey to Obscurity 208)이었다. 자신의 경력의 정점에서 스스로 택한 무명으로 인해 문구만 남고 조어자의 권위는 풍화되어버린 것일까? 바로 이런 의문 때문에, 샘프슨이 제기하고 있듯이, ‘명백한 운명’이라는“용어의 진화 과정과 함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설리번이 이 용어를 만들어낸 정황을 면밀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194).

    일반적으로, 존 오설리번은 잭슨 대통령의 정신을 계승하고 민주당의 팽창주의 노선을 지지한 월간지인『민주 리뷰』(The United States Magazine and Democratic Review)의 주필로 알려져 있지만, 언론인으로서의 오설리번이 가장 높은 곳에 남긴 족적은 1844년 대선을 석 달 앞둔 시점에『뉴욕 아침 뉴스』(New York Morning News)라는 친민주계 일간지를 창간하여 매일 아침 그의 정치적 논평을 뉴욕 시의 유권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함으로써, 지명도에서 휘그당의 헨리 클레이(Henry Clay)에게 뒤져 있던 민주당 후보 제임스 폴크(James K. Polk)를 제11대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부분이다(Sampson 163-76).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대선 캠프를 이끈 폴크는 젊고 유능하고 낙천적인 오설리번의 펜이 필요했지만, 당선자 폴크에게 개인 소유 신문의 사설을 통해 새 정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훈수할 수 있는“급진파”오설리번은 불손하고, 성가시고, 위험한 존재였다. 결국 오설리번은 새 정부의 어느 자리에도 끼지 못하고 토사구팽을 당한다. 하지만 폴크 측근들의 우려와는 달리 그는『뉴욕 아침 뉴스』의 사설을 권력의 배신을 성토하는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대의가 세력 앞에 종종 고개 숙이는 정치판의 현실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환멸감까지는 아니었고, 여전히 그는 잭슨 대통령의 유훈인 팽창주의에 변함없는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이러한 막후의 정황을 고려하여‘명백한 운명’의 아이러니컬한 내용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민주 리뷰』1845년 여름호와 같은 해 12월 27일자『뉴욕 아침 뉴스』의 사설에 실린 용어만으로 따져볼 때, 오설리번이 염원한‘명백한 운명’은 아메리카 전 대륙에서“자유주의”(liberty)와“연방자치제”(federated selfgovernment)를 실현시키자는 것이었다. 이 정치적 신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는“신의 섭리”(Providence)까지 동원했지만, 실제‘명백한 운명’이라는 주장은 텍사스 합병을 공고히 하고 오리건 준주를 (대영제국과의 경쟁에서) 독차지하겠다는 세속적 실리를 겨냥한 것이었다(Pratt 798, Sampson 199). 오설리번이 신봉한 팽창주의는 아메리카 대륙에 공화정의 가치를 널리 퍼트린다는 선한 동기에서 출발했지만, 결과적으로 정복과 착취를 수반할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1845년을 전후한 몇 년 동안의 그의 행보를 엄밀히 추적해보면, 이와 유사하게 상충하는 가치들이 혼재하는 모순적 상황들이 왕왕 드러난다. 예를 들어, 그는『아침 뉴스』의 사설을 통해 한편으로는 아메리카 대륙의“평화적인 연합”을 마음속에 그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멕시코와 퀘벡의 합병까지 옹호하는가 하면(Sampson 201쪽에서 재인용), 줄곧 전쟁을 혐오하는 평화주의 입장을 고수하다가 막상 멕시코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멕시코 원정이 유럽 군주제에 기댄 멕시코의“유사 공화정”을 분쇄하여 미국의 공화제를 수호하는 전기가 될 것이라고 두둔했다(Sampson 203쪽에서 재인용). 당시 정국의 뜨거운 감자였던 노예주와 자유주의 대립에 있어서도, 오설리번 자신 뉴욕 시에 거점을 둔 당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노예주의 증가를 반대한 북부 급진 민주당원과 이를 찬성한 남부 칼훈(John Calhoun)계 민주당원 사이에서 어정쩡한 입장을 취함으로써 적잖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로 인해, 수정주의 역사학자인 하인과 패러거(Hine & Faragher)는“명백한 운명은 미국인 전체가 지지해온 오랜 신념이 아니라, 영토의 확장이 노예주의 확산으로 직결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잠재울 목적으로 오설리번과 같은 선전선동가들이 고안한 정치적 산물”(200)이라고까지 비판한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오설리번 개인의‘명백한 운명’은 체계적으로 잘 정리되고 전략적으로 잘 포장된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우연과 모순이 적당히 가미된 수사적인 아이디어 수준이었다. 그런데‘명백한 운명’이 조어자의 손을 떠나 폴크 정권의 전유물이 되면서 태생적 모순마저 예외로 미화되는 희한한 합리화 과정을 겪는다. 특히 멕시코 전쟁을 거치면서 팽창주의를 미화하는 수사로서의‘명백한 운명’은 일당의 정강정책으로부터 한 국가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격상되는데 바로 이 시점부터 명명백백한 제국주의의 면모를 띠게 된다. 이 국면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역사가 토마스 히탈라(Thomas Hietala)의 말을 빌자면, 전승의 대가로 국경이 태평양까지 연장될 역사적 순간을 목전에 둔 미국의 위정자들은“자유와 제국이 상호보완적일 수 있고”(174), “자치제와 광대한 영토가 공존할 수 있으며”(175), “민주 정부와 강력한 군사력이 양립불가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205), 심지어“모든 제국이 제국주의적일 필요는 없다”(177)는 기이한 논리로“공화적 제국”(173)의 탄생을 자신했다. 인디언과 멕시코의 정복을 통해 얻게 된 자신감이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힘입은“거리의 정복”(197)으로 인해 한층 고양됨에 따라, 그들은 그들이 건설하는“이 새로운 제국”(this new empire)이“대영제국보다 더 위대한 제국”(a Greater Britain)이 될 것이라고 선포하고“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라는 이름의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기에 이른다(182).

    ‘명백한 운명’속에 잠재되어있던 제국주의적 요소가 발현되면서 함께 나타난 최악의 부작용은 인종(차별)주의였다. 텍사스 정신을 대표하는 지도자로 추앙받는 샘 휴스턴(Sam Houston)은 멕시코 전쟁의 승리를 자축하는 한 연설에서 “미국의 개척자들이 인디언 부족들을 무찌르고 텍사스에서 그들을 쫓아냄으로써 야만의 황야를 문명인의 터전으로 개조할 수 있었듯이,”“미국인은 이번에도 멕시코인들로부터 빼앗은 땅에서 문명인을 위한 행복과 번영을 일구어낼 것이다”라고 자부했다(Hietala 194쪽에서 재인용). 멕시코 정복을 프런티어 신화의 알짜 중의 하나로 보는 미국학자 리처드 슬랏킨(Richard Slotkin)은 당시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보다 명쾌하게 정리한다. 19세기 미국의 파워 엘리트들은 멕시코 전쟁을“규모가 확대된 인디언 전쟁”(a grand-scale Indian war)으로 간주했고(181), “야만을 정복한 신세계에 민주주의와 경제 진보의 장을 건설하는 일이 앵글로색슨족의 사명”이라고 못 박았다(175). 과달루페이달고 조약이 체결될 당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상원의원이었던 존 칼훈은 한술 더 떠서 “만약 멕시코가 합병되어 미국의 준주가 된다면 멕시코의 잡종 인구들이 인종적으로 순혈인 미국인들과 평등한 위치에 놓이게 될 것이므로 결단코 거기까지 가서는 안 된다”(Hine and Faragher 211쪽에서 재인용)고 목청을 높였다. 다음장에서 논의하겠지만, 미국의 사병(私兵) 집단과‘명백한 운명’간의 연관성을 파헤치는 로버트 메이(Robert May)가 지적하듯이, “명백한 운명의 인종주의적 경향은 멕시코와의 정전 이후 중미 지역으로 급속히 퍼져나간 여러 군소 군사원정에서 더욱 확연하게 드러났다”(163). 매카시가『핏빛 자오선』에서 섬뜩하게 재구성한 글랜턴 일당이 바로 이 무장 사조직과 깊은 관련이 있다.

    III.‘ 명백한 운명’이라는 국가적 동의의 틈새

    폴크 대통령으로부터 의회의 승인을 전달받은 재커리 테일러(Zachary Taylor) 장군이 멕시코 영토로 진군을 감행했을 때, 휘그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리오그란데 강을 건넌 원정군은‘명백한 운명’이라는 기치를 드높이 내걸었다. 이렇게 시작된 멕시코 전쟁은 앵글로 아메리카의‘명백한 운명’이라는 국가적 동의 위에서 수행되었고 놀랍도록 예상을 초월한 경제적 실익을 낳았다. 미국은 과달루페이달고 조약을 체결하면서 패전국인 멕시코로부터 오늘날의 캘리포니아 주, 네바다 주, 뉴멕시코 주 전 지역과 콜로라도, 유타, 애리조나 주의 일부에 걸친 거대한 영토를 단돈 천오백만 불에 할양받은 것이다. (월남전이나 한국 전쟁과는 정반대로) 전리품의 질과 양이 어마어마하여 계급을 초월하는 분배적 실효가 보장될 때, 그 전쟁이 국민적 합의에 얼마나 충실했는지를 따지는 사후 절차는 희석되거나 생략될 수 있다. 헨리 데이비드 쏘로와 프레더릭 더글러스가 노예페지론에 입각해 멕시코 전쟁에 이의를 제기한 사실 정도는 종종 회자되고, 전쟁 당시 20대의 중위였던 율리시즈 그랜트가 전선에서의 비인도적 참상을 기록한 편지 내용이 간혹 인용되기는 하지만, 멕시코 전쟁에 대한 국가적 동의의 문제점에 관해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된 시점은 탈식민주의 비평이론이나 치카노 문화연구와 같은 마이너리티 담론이 학계에 자리잡기 시작한 1980년대 이후이다. 그렇긴 하지만, 탈식민주의 진영이나 치카노 문화연구 진영에서 매카시라는 미국 백인 작가의 작품에 학구적 관심을 집중한 사례를 찾기는 쉽지 않다. 대신 새라 스퍼전(Sara Spurgeon)의 비평을 통해 이와 같은 기류를 감지할 수는 있다. 스퍼전은“매카시는 신중한 필치로 제국건설의 야망과 [개척] 신화의 정당성을 해체한다”고 주장하면서, 『핏빛 자오선』을“소수인종을 타자화하고 자연을 여성화함으로써 이룩한 폭력적 정복에 근거한 미국의 민족주의 정체성에 대한 주도면밀한 기소”로 읽는다.(85). 조금 아쉬운 부분은 서부를 조망하는 그녀의 입장은 수정주의자의 태세임에도 불구하고 서부 신화를 해체하는 그녀의 비평틀은 여전히 국가(중심)주의 안에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본 논문은 미-멕시코 접경지를 배경으로 한 매카시의 소설에서 멕시코 전쟁에 얽힌 국가적 동의와 국제적 합의 사이에서 어떤 미세한 이반이 발생하고 있는지 등의 정황을 두루 살핌으로써, 『핏빛 자오선』을‘명백한 운명’ 이라는 국가적 동의의 틈새와 바깥에서 어떤 주체가 무슨 행위를 자행했는지에 관한 기록으로 전제하고 국가적 동의가 초래한 윤리적 파국이 얼마나 섬뜩했는지를 역사적으로 되짚어볼 것이다.

    존 세피치(John Sepich)가 주장하듯이,5“『핏빛 자오선』의 중추는 글랜턴 일당에 관한 역사적 기술이다”(2008: 1). 『핏빛 자오선』을 일종의 역사 소설로 이해할 수 있을진대, 글랜턴 일당의 실제 모델은 멕시코 전쟁을 전후한 미국에서 인디언 머리가죽 사냥(professional scalp hunting)을 포함한 매우 특수한 이윤동기에 입각해 우후죽순처럼 결성된“필리버스터”6라는 사병(私兵) 집단이다. 매카시가 재구한 글랜턴 일당이 역사의 단순한 반영 이상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저지 홀든(Judge Holden)과 키드(the kid)라는 범상치 않은 한 쌍의 구성원을 창조해내었기 때문이지만, 본 논문은 이 두 중심인물의 내면을 분석하는데 지면을 할애하지는 않을 것이다.7 대신 앞서 논의한 경계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삐딱하게 다시 본‘명백한 운명’의 탄생을 재삼 환기시키면서, 매카시의 시선에 포착된 필리버스터 집단의 진화의 뿌리를 역추적 하는데 주력할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논의는 동일 이름으로 실존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는 글랜턴 일당의 두령 존 글랜턴(John Glanton)과 멕시코 전쟁 참전 장교들의 프로필에서 허구적으로 조합된 필리버스터 리더 캡틴 화이트(Captain White)가 매카시의 서사 구조 안에서 어떤 주체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에 관하여 집중될 것이다.

      >  Ⅲ-i.‘ 명백한 운명’의 희생양―『핏빛 자오선』의 캡틴 화이트

    『핏빛 자오선』은 대략 1849년 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한다. 때는 멕시코 전쟁이 끝난 지 1년여가 지난 시점으로, 공식적으로는 과달루페이달고 조약으로 새로운 선이 지도 위에 그어졌지만 아직은 국가의 주권이 사물의 질서에까지 미치지 못하던 과도기였다. 캡틴 화이트는 이 시기를 지배한 ‘명백한 운명’ 이라는 초역사적 이데올로기에 도취되어 멕시코 전쟁에 참전한 미연방 정규군 장교로 등장한다. 역사가 새뮤얼 왓슨(Samuel Watson)이 지적하듯, 당시 미군 장교들은“민족주의와 팽창주의라는 국가 이데올로기를 선봉에서 수행하는‘제국의 에이전트’(Agents of Empire)의 입장”(68)을 취했다. 멕시코 전쟁 동안 캡틴 화이트 역시 몬트레이 전투(Battle of Monterrey)에 참가한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치와와 시를 접수한 도니판 대령(Alexander Doniphan)의 전공을 치켜세우는 등(Blood Meridian 33-34), 제국 건설의 선봉대로서의 미합중국 장교의 전형을 따른다. 그런데 종전과 함께 (어쩌면 예정되었을지도 모를) 위기가 찾아온다. 캡틴 화이트는 국가 간의 공적 협약인 과달루페이달고 조약을 ‘명백한 운명’의 중단으로 간주하고는 사적인 군사 행동을 통해서라도 불만을 해소하려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연방 정규군 장교의 대오에서 이탈한다. 여기서 필리버스터의 길을 택한 그의 행보는 역사에 나타나는 다수의 미군 장교상에서 벗어난다. 제 2차 독립전쟁 혹은 영미전쟁이라고도 일컬어지는 1812년 전쟁(the War of 1812)이 끝난 시점인 1815년부터 멕시코 전쟁이 끝날 무렵까지 미합중국 장교단의 성향을 분석한 새뮤얼 왓슨에 따르면, 미합중국의 정규군 장교들은 변경의 곳곳에서 때때로“지역 민병대 지휘관이나 지방 군벌 수뇌와 작전권, 나아가 군권의 통수를 두고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69)에 처했다. 연방정부의 명을 받아 배속되어 연방정부의 직접 통제를 받는 미합중국 정규군 장교들은 특히 캐나다 접경지대에서 대영제국의 군대와의 군사적 충돌을 피해야 한다는 외교적 또는 국제법 존중의 취지하에 불필요한 물리적 마찰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다. 반면 지방정부에 의해 임명되긴 했으나 대체로 자발적으로 접경지에서 근무하는 민간인 공무원들은 먼로 독트린 이후 민간 분야에서 가속화된 정착과 상업을 선도하는 과정에서, 입장을 달리 하는 연방군 대신, “애국자들”(the Patriots)과 같은 비정규 군사직으로부터 무력 협조를 얻고자 했다(78-80). 왓슨은 특히 1846년 이후의 미합중국 장교들은 이미 물불을 가리지 않는 호전적 팽창주의자는 아니라고 본다. 그들은 국가의 관료 체제를 수호하는 합헌적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언제나 대의에 봉사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민주계와 휘그계를 위시한) 특정 파벌이나 이익단체를 대변할 의도는 전무했다는 것이다. 안정과 질서, 명예와 권위, 전통과 원칙을 중시하는 웨스트포인트 출신의 장교들은 미국의 국경과 변방에 이른바 데스페라도들과 한탕주의자, 기회주의자들이 난무하는 무질서와 폭력이 지속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82-83).

    정규군에서 비정규군으로 신분이 전환되었지만, 쉐인 쉼프(Shane Schimpf)가 묘사하듯이, “동부 출신으로”“말쑥하게 차려입고”“신과 법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살아온”(18) 캡틴 화이트는 자신과 자신을 따를 무리들이“불명예 제대한 궁상맞은 쓰레기(bobtails)처럼 보이기를 원하지 않는다”(BM 35).『 핏빛 자오선』의 플롯의 이 대목에서 켑틴 화이트는 테네시에서 텍사스 접경지까지 흘러온 떠돌이 애송이 주인공인 키드를 멕시코라는 경계 너머의 공간으로 유인하는 역할을 하는데, 그는 키드에게 별안간의 조약으로 전쟁이 끝나버림으로써 자신의 “친구들과 형제들의 피가 뿌려진 저 아래 땅” 이 “명예심도 없고 정의감도 없고 공화정이 뭔지조차 모르는 멕시코인의 수중에 도로 들어가 버렸다”(BM 33)고 개탄한다. 외모 상으로 댄디스트의 품위를 유지하고 내면적으로 애초에 품은 명분을 저버리지 않은 캡틴 화이트는, 여러 비평가들이 동의하듯이, “명백한 운명의 에이전트”(Agents of Manifest Destiny)로 보기에 부족함이 없다(Sepich 20쪽에서 재인용). 이 점에서 캡틴 화이트는 텍사스에 이어 멕시코와 퀘벡까지 합병해야 한다고 주장한 오설리번의 공화주의적‘명백한 운명’론에 공명한다고 덧붙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동기적 측면에서 캡틴 화이트의 경우는 뒤에서 논의할 존 글랜턴의 경우와 구별되며, 마찬가지로 로버트 메이가“전형적인 미국의 현상”(158)이라고 정의하며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기술하는 필리버스터의 사례와도 차이가 있다.

    사실 텍스트를 꼼꼼히 읽으면, 캡틴 화이트 식의‘명백한 운명’의 사적 실천에도 틈새가 있음을 알아챌 수 있다. 그가 이끄는 사설 멕시코 원정대에서 모병관으로 일하는 한 백인 수하는 멋모르는 키드를 끌어들이기 위해 멕시코에는 아직 “전리품” 이 널려 있기 때문에 거기서는 “무엇이든 집는 자가 임자가 될 수 있다” 고 유혹한다(BM 30). 이는 자신의 상관이 피력하는 대의와 명분보다는 오히려 위 인용문에 제시된 세속적 동기에 더 부합되는 선전이 아닌가. 캡틴 화이트가 물욕에 경도된 천박한 자본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관점의 액면이 전부 용인될만한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맹신적 애국주의는 백인우월주의와 결합되어 멕시코인을 “퇴화된 인종,” “껌둥이보다 약간 나은 잡종,” “명백히 스스로를 통치할 능력이 없는 민족” 이라고 규정한뒤, “이런 민족은 다른 군가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데 바로 자신이 이 과업을 촉진할“해방의 도구”라고 키드에게 설파하는 치명적인 누를 범하기 때문이다(BM 34). 건조하고 담담한 매카시의 문체로 인해 이 진술이 침을 튀기는 장광설이 아니라 사후의 사색적 읊조림으로 들린다는 점에서 재고할 사항이 없진 않지만, 어쨌든 여기서 캡틴 화이트의 입장은 오설리번의 섭리에 기댄 정치적 수사를 넘어 폴크 정권이 전용한 제국주의적‘명백한 운명’을 연상시킨다. 또한 예외없이, 멕시코인을 멸시하는 캡틴 화이트의 식민주의적 태도는 인종주의로 연결된다. 그는“대체 멕시코인들이 얼마나 무능한 겁쟁이였으면 벌거벗은 야만족들에게 백 년 동안이나 공물을 바쳐왔겠냐”며“아파치족들은 이들에게 쓸 총알조차 아까워 아예 돌로 쳐 죽인다”(BM 33)고 성토하면서, 하향 비교를 통해 두 민족 모두를 한층 더 강등시킨다.

    이런 맥락에서 캡틴 화이트의 멕시코 원정대는 공화주의 쪽으로든 제국주의 쪽으로든 국가적 동의의 틈새에서 비공식으로 ‘명백한 운명’ 을 꿈꾸지만, 23장으로 구성된 소설의 4장에서 코만치족의 습격을 받아 거의 모든 대원들이 몰살당함으로써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일찌감치 텍스트에서 사라진다. 그렇다고 그의 주체적 위치를 둘러싼 논의 자체가 종결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사라지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코만치 부족과의 전투에서 캡틴 화이트는 전사하고 그의 원정대는 조기 해산되지만, 누군가에 의해 그의 시신이 멕시코의 어느 국경 마을로 옮겨져 “목이 잘려나간 몸뚱이는 시궁창에서 돼지들에게 반쯤 뜯어 먹히고”(70) 그의 머리는“용설란주를 담그는 유리 단지” (69)에 보존되어 장터 한켠에 전시된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키드는 지나가는 멕시코 무장 조직에 의해 이 마을로 호송되어, 유리 용기 속에“가라앉아 있는 전직 상관의 초점 잃은 눈”(70)을 대면하게 되지만, 그는 이 끔찍한 폭력 앞에 압도되어 머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고 위증한다. 키드는 여기서 부인이라는 즉각적인 방어기제 뒤에 숨지만, 독자들은 반영구적인 상태로 보존된 캡틴 화이트의 맹목적인 응시를 회피할 필요가 없다. 바클리 오언즈(Barcley Owens)는 캡틴 화이트의 머리를 단순히“원시적 전리품”(a primitive trophy of war)으로 보지만(7), 그의 머리가 조야하게 표본 처리되어 전시된 곳이 승자의 박물관이나 실험실이 아니라, 행인들이 나다니는 멕시코의 접경지 마을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의 머리는 멕시코를 침략한 미군과 멕시코에 출몰한 미국의 필리버스터들의 존재를 영구히 상기시키는 역사적 증거로 남게 된다. 더더구나 깜빡임이라는 찰나적 위안조차 주지 않는 그의 응시는 보는 자들의 마음을 가일층 부담스럽게 한다.

      >  Ⅲ-ii.‘ 명백한 운명’의 사생아―『핏빛 자오선』의 글랜턴 일당

    캡틴 화이트와 그가 조직한 멕시코 원정대가‘명백한 운명’에 오도된 희생양으로 기억될 수 있는 반면, 존 글랜턴과 그의 일당이 자행한 머리가죽 매매는 ‘명백한 운명’이 낳은 최악의 부작용으로, 이는 미국을 위시한 반구 아메리카가지고 가야할 역사적 짐인 대서양 노예무역보다 더 수치스러운 아메리카 역사의 가장 진한 오점일 수 있다. 글랜턴 일당과‘명백한 운명’의 관련성에 관한 이 주장은 글랜턴 일당을 철저하게 역사화 함으로써 입증될 수 있을 텐데, 이를 통해 우리는‘명백한 운명’이 미국의 국내 어젠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멕시코 양자 간의 문제이기도 하고, 더 넓게는 미-멕시코-인디언 삼자 간의 복합적인 이해관계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핏빛 자오선』의 등장인물 존 글랜턴의 모델이 된 동명의 역사적 인물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으로 남긴 문헌자료에 따르면, 텍사스 태생의 실존인물 존 조엘 글랜턴은, 캡틴 화이트와는 달리, 멕시코 전쟁 당시 정규군에 소속되지는 않았으나 텍사스 레인저(a free Ranger) 신분으로 작전과 정찰 임무에 산발적으로 투입되었는데, 전쟁이 끝날 무렵부터 검은머리 인디언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그 대가로 막대한 금전적 이득을 본 직업 머리가죽 사냥꾼으로 악명을 드높이게 된다(Chamberlain 306-07, Smith 1963: 38-39, Smith 1964: 18-20). 소설에서 글랜턴 일당의 머리가죽 사냥은 1850년 봄 유마(Yuma) 전사들의 급습으로 인해 인과응보 격으로 종결되지만, 역사적으로 머리가죽 사냥은 스페인 제국이 오늘날의 미국 뉴멕시코 주까지 지배하던 17-8세기부터 남북전쟁 직후 미 연방군이 직접 나서 이 지역의 인디언 부족들을 대대적으로 소탕할 때까지 지속되었다(Limerick 227, Smith 1963: 64). 머리가죽 사냥은 폭력의 악순환이었다. 조상대대로 북미 대륙 남서 지역에 거주해오던 코만치 족과 아파치 족 등이 유럽 식민주의자들의 침입으로 삶의 터전을 위협받게 되자 히스패닉 정착촌에 대해 습격과 약탈로 응수한다. 이들 원주민 전사들의 잦은 침략으로 통치에 어려움을 느낀 식민주의자들은 인디언들의 머리가죽에 현상금을 거는 방식의 비루한 무력으로 맞선다. 백인들의 맞대응 방식에 분노와 모욕을 금치 못한 인디언 전사들은 공격의 강도와 폭력의 수위를 높인다. 이런 가운데, 1840년대에 접어들어 북부 멕시코의 치와와(Chihuahua) 주정부 당국이“인디언 머리가죽을 사들이는 스페인의 식민 정책”을 공개적으로 강화하자“치와와 주는 머리가죽 사냥꾼들의 천국이 되었고 미국 출신의 열렬한 머리카락 수집자들(hair-seekers)이 모여들게”(Smith 1963: 39) 됨으로써, 이 인간 한계의 징후는 절정에 달한다. 존 세피치는 이 정황을 “인디언 침략에 종지부를 찍고자 한 치와와 주의 욕망” 에“앵글로 외국인(the Anglo alien)들이 유혹을 느꼈고, 역사적으로 존 글랜턴도 그 유혹에 굴복했다”(1999: 127)라고 기술한다.

    소설에서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은 치와와 주의 융성을 이끈 앙헬 트리아스(Angel Trias) 총독이 자신들과 머리가죽 매매 계약을 체결한 글랜턴 일당을 초청해 연회를 베푸는 장면으로 극화된다. 이 날 “머리가죽 128개와 머리 8개” 를 말에 매단 채 당당하게 치와와 시로 입성하는“미국인,”즉 글랜턴 일당을 구경하기 위해 소년소녀들을 포함한 수백 명의 멕시코 군중이 청사 앞으로 몰려 나온다(166-67). 여기서 매카시는 익명의 치와와 시민들을 묘사함에 있어 다소 가치중립적으로, 진귀한 구경거리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태도를 보여주는 정도 에서 그친다. 반면, 관저 앞까지 글랜턴 일당을 마중 나온 총독의 부관들과 수행원에 대해서는“그들을 열렬히 환영하고 그들의 전리품에 감탄했다”(167)라고 표현함으로써 국가 이데올로기에 무비판적으로 봉사하는 중간 계층의 투명한 생존 본능을 꼬집어 지적한다. 이날 저녁 리들앤스티븐스 호텔(the Riddle and Stephens Hotel)에서 개최된 만찬 석상에서는, 프랑스와 영국 등지에서 유학하며 각종 고전과 여러 유럽어를 섭렵한 고매한 인격의 신사로 알려진 트리아스 총독이 글랜턴의 인간 사냥꾼들에게“시가와 셰리주를 몸소 돌리며 극진히 환대하면서 이들의 모든 요구를 빠짐없이 들어주라고 시종들에게 명령”(168)한다. 여기서 우리는 오랑캐(외국 용병)를 이용해 오랑캐(내부의 원주민)를 제어하는 제국주의의 위선에 찬 생리를 놓칠 수 없다.

    외국의 주지사로부터 계급을 뛰어넘는 과도한 접대를 받는 이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역사적 위치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글랜턴 일당 중에는 영어도 스페인어도 아닌, 아마도 네덜란드어로 추정되는 외국어로 트리아스 총독과 담화를 이어나갈 수 있을 정도로 세사와 비의에 모두 박식한 조직의 2인자 저지 홀든이 있긴 하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한 몫을 챙기겠다는 일념만으로 척박한 변방에 몸을 던진 무지한 기층 출신이다. 이들 중 과연 몇 명이 동부의 정계와 언론계에서‘명백한 운명’이라는 문구가 회자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을까? 캡틴 화이트의 멕시코 원정대에서 운좋게 살아남은 키드가 글랜턴 일당에 가입하게 되는 경위를 보면, 이 변방의 무법자들이 풍문과 전언만으로도 접경지의 정치학과 경제학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예로, 키드에게 글랜턴을 따라가자고 부추기는 토드빈(Toadvine)은 전설적인 머리가죽 사냥꾼으로서의 글랜턴의 정체를 정확히 알고 있고, 글랜턴 일당이 멕시코를 대변하는 트리아스 총독과 모종의 계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 계약서에 인디언 머리가죽 하나당 백 달러가, 아파치 부족의 메스칼레로 (Mescalero) 추장인 고메스(Gómez)의 머리에는 천 달러가 약정되어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다(79). 이 정도의 정황 증거를 확보하고 있으면 글랜턴 일당이 범한 행위에 대해 역사적 책임을 묻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문제는 책임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설정할 것인가에 있다. 머리가죽 매매 계약의 한 주체인 트리아스 주지사가 멕시코 정부를 대변한다고 보는 데에 토를 달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멕시코에 법적 책임이 있다. 그런데 상대방 계약 주체인 글랜턴 일당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들이 느슨하게나마 미국 정부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을까? ‘명백한 운명’을 주도하진 않았지만, 글랜턴 일당이 서명한 비윤리적 이윤추구 활동이 ‘명백한 운명’ 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된 앵글로 아메리카의 패권주의적 서진에 걸림돌을 제거하는 파생적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물음에 대한 대답은 긍정일 것이다. 이 심문에 아니라고 답하기 위해서는 궁색한 조건을 첨부해야 한다. 예를 들면, 제이 엘리스는‘명백한 운명’을“거시적인 역사의 흐름”으로 정의하고, 그 뒤에 숨겨진 글랜턴 일당의 머리가죽 거래를“미시사적 특수”로 해석하면서 두 역사적 사건 사이에 관련성이 있음을 인정한다(171). 다만‘명백한 운명’이 지나간 자리에 인디언 학살이 뒤따랐음을 수용하면서도“글랜턴 일당이 미국의‘명백한 운명’을 표상한다고 상정하는 것은 터무니없다”고 주장한다(175).

    글랜턴 일당이‘명백한 운명’의 적자가 아니라 사생아라는 논거 때문에 그들의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 미국 정부에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될 때, 글랜턴 일당에 의해 사냥당한 인디언들의 존재조건은 역사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영구히 비참해진다. ‘명백한 운명’에 저항한 인디언들은 당시 반구 아메리카에 팽배한 근대적 생산 관계에서 아프리카에서 강제 유입된 노예 생산력에 의해 대체됨으로써 교환가치가 영에 가까운 대상으로 전락해가고 있었다. 트리아스 총독과 글랜턴 두목 사이에 조인된 매매 계약서를 보더라도, 인디언들은 살아서는 무가치하고 죽어서만, 그것도 죽었다는 사실이 피가 듣는 혹은 말라붙은 머리가 죽을 통해 입증됨으로써만 고작 100달러의 환금가치가 발생하도록 조건화 되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그들은 오로지 검은 머리카락이 한 움큼 남은 머리가죽을 통해서만 존재성이 규정되는 극단적인 비체화(abjection)를 겪는다. 이 과정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언어로는 합리화하기 어려운 기이한 역설이 병발한다. 우선 랠프 스미쓰의 말을 빌자면, “미국 역사에서 이때만큼 비상하게 상대방의 머리카락에 관심을 보인 적은 없었으며, 이때만큼 수상하게 상대방의 머리를 훔쳐본 적이 없었다”(1964: 19). 즉 비체였던 머리가죽이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상품으로 재발견되어 이른바 물신숭배의 대상으로 등극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때는 치와와 주를 중심으로 한 미-멕시코 접경지에 형성된 머리가죽 시장(the scalp market)에서 무도한 이윤 경쟁이 과열되어 1850년을 정점으로 비체-상품의 공급원이 고갈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Smith 1964: 21). 이 국면에서 비체화와 물신화 사이의 아이러니컬한 변증법이 최악의 결과를 낳는데 그것은 인디언들뿐만 아니라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모든 사람이 이윤 충동의 표적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여러 비평가들이 글랜턴 일당의 폭력성과 비도덕성을 비판하기 위해 자주 인용하는 장면으로, 글랜턴이 자신의 권총으로 무방비 상태의 멕시코 노파를 근접 사살한 뒤 그녀의 머리가죽을 도려내라고 명령하는 장면은 바로 이 역사적 정황에 근거한 것이다. 소설의 시간 배경이 머리가죽 매매가 극성을 떨치던 동시에 공급원의 고갈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 1849-50년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또 소설의 플롯에서 이 장면이 글랜턴 일당이 치와와 주 총독을 알현하여 ‘상품’ 을 넘기기 전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머리가죽을 하나라도 더 확보하고자 하는 글랜턴의 행동 준칙은 인륜을 극소화함으로써 이윤을 극대화시키는 자본주의적인 욕망에 따랐다고 볼 수 있다. 도산의 궁지에 내몰린 소상인이 앞뒤 가리지 않고 회생의 수단에 손을 뻗칠 때 그의 혹은 그녀의 행위는 미치광이의 발작이 아니라 이성적인 선택일 것이다. 이미 실성했으면 그런 자구책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글랜턴의 선택 역시 자본주의적으로 이성적인 행위이다. 그의 폭력 행위는 너무도 태연자약하게 이루어져 18세기 영국의 도덕이론가들이 가장 두려워한, 그래서 가장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인간의 비행(depravity)인 “동기없는 악의”(motiveless malignancy)와 “무심한 잔인성”(disinterested cruelty)에 기인한 악행(Eagleton 2009: 38쪽에서 재인용)을 연상시킨다. 또한 그의 간계는 너무도 철두철미하여 그의 부하들 중 유일하게 멕시코인인 맥길(McGill)에게 동포의 머리가죽인 “영수증”(98)을 직접 챙기라고 명령함으로써 이윤창출에 더해 부하의 충성도까지 확인한다.8 하지만, 위기에 처한 자영업자의 자구 행위가 악의에 찬 동기에서가 아니라 이성적인 선택이라는 이유로 마냥 허용될 수 없듯이, 글랜턴의 이윤추구 행위 역시 누군가에 의해 저지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과연 누가 방울만이라도 매달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우리 중의 대부분은 비도덕적인 수단으로 살 길을 모색하는 소상인이 우리의 이웃임을 아는 순간, 그의 멱살이나 그녀의 팔을 잡기보다는 짐짓 못 본 체 시선을 거두지는 않을까? 하물며 변방의 준전시 상황에서 총과 악으로 중무장한 우두머리의 권위에 반항하는 것은 목숨을 건 결단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이미 글랜턴 일당의 내부자가 되어버린 소설의 주인공 키드로서도 글랜턴의 시체매매-물신숭배 행위를 그렇게 무력하게 관망할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글랜턴 일당의 최후 또한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다. 머리가죽 무역에 이어 콜로라도 강 위를 오가는 연락선을 장악하여 일종의 통행료 징수 사업을 벌이던 글랜턴 일당은 이 착취 행위에 불만을 품은 유마(Yuma) 부족의 기습 공격을 받아 글랜턴을 비롯한 일당 대부분이 무참히 살해되고 마침내 조직도 와해된다. 존 세피치는 이를 두고“정의(Justice)는 인디언들에 의해 실현되었다”(2008:26)고 평가한다. 실제 콜로라도 강가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을 연재 보도한『뉴욕 데일리 트리뷴』(New York Daily Tribune)지의 1850년 7월 8일자 기사는 글랜턴 일당을“변방의 무법자들”(these frontier outlaws)이라고 칭하고, 이들을 살해한 인디언들의 행위가“정의감에 비추어 정당하다”(by every sense of justice justifiable)고 보도하는데, 그 이유인즉슨 유마 전사들이 글랜턴 일당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위해를 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Sepich 2008: 187쪽에서 재인용). 여기서 시대적으로 먼 훗날의 독자 세피치와 현장에서 먼 동부의 일간지가 공히 추켜세우는 정의란 대체 무엇인가? 만일 피의 보복으로 글랜턴 일당이 제거된 것이 그들이 의미하는 정의라면 이는 너무나 빈약한 정의가 아닌가. 기실 정의를 종이 위에서 얘기하기 위해서는 한 권이 책이 필요할 것이다. 윤리에 합의하기 위해서도 한 세월이 더 소요될 것만 같다. 해서 우리는 정의와 윤리를 논급하는 대신 훨씬 덜 추상적인 책임(responsibility) 이라는 문제로 한 발 물러설 전략적 필요가 있다. ‘내가 사건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 는 것은‘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만큼 절대적이다. 책임을 진다는 행위는 “지식과 규범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절대적인 결정”이라고 데리다(Derrida)가 말한 바 있다(Eagleton 2009: 248쪽에서 재인용). 어떤 행위 이후에 그 행위의 주체가 더 이상 전과 동일하지 않을 때 그 행위를 성공적인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내가 책임지겠다’는 자백 혹은 선언이야말로 (그 전후로‘나’의 조건은 천양지차로 달라지므로) 성공적인 인간 행위, 즉 정의롭고 윤리적인 행위가 되지 않을까. 『뉴욕 데일리 트리뷴』지는 글랜턴 일당의 죽음을 보도하면서 그 사건의 책임 소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아마도 일간지의 생리상 시간을 두고 헤아려볼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만약『뉴욕 데일리 트리뷴』이, 아니면『뉴욕 아침 뉴스』가‘명백한 운명’의 일선에서 벌어진 이 학살 사건에 대해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라는 질문만이라도 던졌다면, 사건의 꼬리를 물고 거슬러 올라가다 글랜턴 일당이‘명백한 운명’과 역사적으로 관련이 있음이 밝혀졌을 것이고, 따라서 유서깊은 동부에 안주한‘명백한 운명’의 국부들은 그들이 낳은 사생아들의 운명에 대해서 무지했거나 무심했다는 주장이 훨씬 앞서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핏빛 자오선』처럼 폭력적이고 충격적인 방식으로 당시의 정황을 역사 소설로 다시 기획할 필요가 없지 않았겠는가.

    5『핏빛 자오선』의 텍스트성과 역사성의 불가분의 관계를 논의하고자 할 때, 존 세피치(John Sepich)의 공로를 누락해서는 안 된다. 에드윈 아놀드(Edwin Arnold)가 언급하듯이, 세피치는 영문학자도 직업비평가도 아님에도 불구하고『핏빛 자오선』을 이해하는데 절대적으로 유용한 사료를 수집, 정리하여『핏빛 자오선 노트』라는 단행본을 출판함으로써 매카시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매카시 본인으로부터도 고무적인 평가를 받았다(xv).  6필리버스터(filibuster)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긴 연설로 의사진행을 방해하는 전술을 뜻하는 의회 용어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실은 네덜란드어 vrijbuiter에서 나와 스페인어 filibustero와 프랑스어 flibustier를 거쳐 영어로 정착된 말로 17세기부터 19세기 초엽까지 공해 또는 외국 영해에서 약탈을 일삼던 해적을 의미했다. 이런 맥락에서, 로버트 메이(Robert May)에 따르면, 이 단어는 1850년경 미국의 어휘사전에 등재될 당시“선린관계에 있는 외국에 대해 자국 정부의 명시적 또는 암묵적 동의 없이 사사로운 군사적 침략을 도모하는 무리”(148-49)를 지칭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이 용례는 훨씬 폭넓게 걸쳐 있는데, 스페인령 플로리다, 영국령 캐나다, 멕시코령 캘리포니아, 쿠바, 니카라과 등지로 무허가 식민 원정을 감행하는 소규모 군사조직을 가리키기도 했고, 보다 느슨하게 는 이국 원정을 통해 로맨스와 모험 또는 명예와 영광을 꿈꾸는 일군의 젊은이들도 여기에 해당되었다.  7유사 부자(父子)로서의 저지 홀든과 키드의 관계는 신/역사주의적 접근보다는 정신 분석학적 접근을 통해 훨씬 더 다층적인 의미를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곧이어 나올 논문에서 필자는 이를 논증할 것이다.  8역사상의 글랜턴은 아파치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네 명의 부하들의 머리가죽까지 벗겼다고 기록되어 있다(Smith 1964: 19-20).

    IV.‘ 명백한 운명’없는 접경지를 위하여

    ‘명백한 운명’의 후예라 불러도 무방할 하버드 역사학자 페리 밀러(Perry Miller)가 “텅 빈 황야”라고 부른 “프런티어” 가 사실은“유혈이 낭자한 갈등과 정복의 싸움터” 였다는 수정주의 견해가 미국학 연구에서 탄력을 받아 이리저리 유포된 지도 벌써 20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Amy Kaplan 1993: 16). 프런티어라고 명명된 아메리카 땅에 폭력적인 지정학적 특이성이 뿌리 내리게 만든 주범은 유럽이 발명한 최악의 시스템인 해외 식민주의였다.9 멕시코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근대 멕시코가 스페인 제국주의로부터 독립하기 훨씬 이전부터, 히스패닉 이주민의 정착과 푸에블로 원주민의 토착을 모두 무시하는 아파치 부족들의 끊임없이 침략으로 말미암아 이 핏빛 접경지를 “거주지로 부적격인 전쟁 구역” 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Limerick 227). 비평가 존 웨그너(John Wegner)도 “멕시코의 북부였다가 미국의 남서부로 재정의된 이 지역”(33)에 서린 전쟁과 폭력의 기운을 지적하면서, 매카시의 국경 3부작은 “이 지역의 과거를 지배했던 전쟁들에 대한 암시와 지시로 충만”(43)해 있다고 논평한다. 오늘날 미국과 멕시코의 접경지 에서 국가 수준의 실제적인 무력 충돌이 발생할 가능성은 희박해졌지만, ‘명백한 운명’이 가른 양 국가의 경제적 위상이 급속도로 확연하게 달라지면서, 국가의 이해를 지키기 위한 국경선의 담이 높아지고 통제의 정도가 상승하고 있다.

    그리하여 같은 토양, 같은 기후, 같은 식물상으로 표상되는 동질적인 자연 환경을 인위적으로 둘로 가른 분단이라는 새로운 폭력이 고착화되기에 이른다. 엄밀히 말해, 미국과 멕시코를 분단국가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만 북미 대륙 남서부 지역의 지정학적 특수성을 ‘분단지역’ 으로 명명해도 큰 무리수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분단지역에 상존하는 흙과 바람과 나무와는 달리, 사람에게 분단은 생활의 단절이자 욕망의 억압이 된다. 특히, 조상들의 삶의 패턴을 따라 리오그란데 이북이나 알타(Alta) 캘리포니아 지역에 노동력을 공급해온 멕시코인들에게 통행의 차단은 순응할 수 없는 폭압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바바라 할로우(Barbara Harlow)는 미-멕시코 접경지를 잠입, 체포, 감금, 추방과 같이 비일상적인 사건이 일상화되어가는 항구적“갈등지대”(sites of struggle)가 되리라고 전망한다.10 이 비관적 전망을 뒤집을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기는 쉽지 않다. 예컨대, 멕시코 이산가족들의 눈물의 요구에 백악관이 국경의 개방으로 화답할 까닭도 없고, 미국 남서부 제주의 유권자들이 연방에서 탈퇴할 주민투표를 발의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엄연한 현대 민족국가(nation-state) 체제 하에서, 이와 같은 분단의 갈등을 해소할 현실적인 타개책을 제시할 수 없을 때, 역사를 거꾸로 돌려보는 비현실적 착상이 미상불 대안 모색 자체를 전면 포기하는 것보다 약간은 더 책임있는 행위일 것이다. 오늘날 미-멕시코 접경지가 분단지역이자 갈등지대가 된 이유가 19세기 중반 미국의 패권주의자들이 열망한‘명백한 운명’이 현재의 국경 근처에서 중단되었기 때문이라는 발상이 가능하다면, 다음과 같은 가설 또한 전혀 뜬금없지 않을 수 있다. 19세기 중반 미국에서‘명백한 운명’을 실천한 자들은 기존의 국경을 넘어섬으로써 더 확장된 국경을 세우기를 열망한 일종의 제국주의자들이 맞다. 이들의 행동은 모종의 반복 행위인데, 우리는 이 반복 구조에서 현존하는 경계를 끊임없이 부정함으로써 더 큰 경계를 욕망하는 역설적인 주체의 위치를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이 기묘한 이치는 한 국가가 그 국가의 존재 조건인 경계를 부정하면서 최후의 경계를 욕망한다는 섬뜩한 모순을 내재하고 있다. 여기서 최후의 경계는 경계 너머가 없는 세상과 공존 관계에 놓이게 되는데, 경계 너머가 없는 세상이란 결국 해당 국가의 존재조건이 사라지게 되는 상태로서 이는 제국보다는 오히려 유토피아에 가까운 것이므로, 애초에 이를 꿈꾼 주체는 심각한 자기부정에 빠지거나 자기해체를 겪을 가능성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앞서 언급한‘분단지역’혹은‘갈등지대’의 조건 자체는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접경지에 사는 사람들의 애환과 분노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터이고, 그 결과에 따르는 가상의 시나리오 중의 하나에 접경지의 아프고 슬픈 현실을 다룬 매카시의 국경 3부작의 부재가 포함되지 않았을까?

    9이 죄를 대속할 수 있는 유럽 최고의 발명품은‘시스템으로서의 복지’이겠지만 아쉽게도 그 혜택은 아직 유럽 안에 머물고 있다.  10물론 역사적으로 이 지역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이 존재했다. 멕시코 전쟁 이후, 앵글로 아메리카가 취한“배타적 변경”정책과는 대조적으로, 17-8세기 스페인 제국은“포용적 변경”을 표방하여 인디언들까지 식민지 경제와 사회에 유입되도록 했다. 그러한 포용정책하에서 뉴멕시코 지역은, 앵글로 미국인들이 상상한 것처럼 경제적으로 낙후되고 문화적으로 침체된 벽오지가 아니라, 농부, 일용직 노동자, 목축업자, 장인 등의 민간인들이 거주하는 생기있는 사회였다. 1821년 독립 후, 멕시코 역시 해외 인력을 자국의 건설에 끌어들일 목적을 분명히 했으며, 특히 미국인들의 상업적 에너지가 변경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주기를 희망했다. 한편,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철도 건설과 대규모 영농사업에 기반을 둔 미국 남서부 경제에서도 멕시코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멕시코 노동자들은 값싼 노동력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계절제 농장노동자(bracero)로 임시로 고용되었기 때문에 시장 상황에 따라 용이하게 해고할 수 있었으며, 흑인,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이주노동자들과는 달리, 그들의 집이 육로로 통하는 국경 너머에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큰 저항 없이 낮은 비용으로 추방할 수 있다는 이점까지 갖추고 있었다. 실제 1930년대 대공황기에 미국 국민의 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수의 멕시코 노동자들을 본국으로 강제송환했으며, 1954년에는 남서부 지역에서 멕시코계 불법이민자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하는 법령(Operation Wetback)을 시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련의 정부 주도 법집행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남서부와 멕시코 북부가 걸쳐 있는 접경지를 완전히 통제한다는 것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리머릭은 일갈한다(22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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