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전체 메뉴
PDF
맨 위로
OA 학술지
이오네스코 희곡 속의 정체성 탐구* L'Etude sur l'identite de Ionesco
  • 비영리 CC BY-NC
ABSTRACT
이오네스코 희곡 속의 정체성 탐구*

Ce travail est une recherche identitaire dans les dernières pièces chez Eugène Ionesco : L’Homme aux valises(1975) et Voyages chez les morts(1980). Ionesco est profondément marqué par sa double culture française et roumaine, fruit d’une enfance déchirée entre les deux pays. Il est à la recherche d’une nationalité, surtout d’une langue.

Ionesco s’est souvent inspiré dans son oeuvre dramatique de données personnelles et de souvenirs, prêtant à certains de ses personnages quelquesuns de ses propres traits. De fait, dès Victimes du devoir, en 1952, le théâtre semble avoir offert au dramaturge la possibilité d’un retour sur sa vie et d’une introspection. L’Homme aux valises et Voyages chez les morts se presentent au spectateur comme une autobiographie dramatique. L’Homme aux valises est une pièce écrite à partir des rêves du dramaturge, consignés notament dans son Journal en miettes. Un Personnage, ‘Le Premier Homme’, erre dans un espace qui se métamorphose au gré des réminiscences de l’auteur. Il s’agit dès lors, d’un onirique. Voyages chez les morts donne une représentation de l’au-delà. Ionesco, par l’entremise de son personnage, retrouve ses proches disparus dans ce qu’il nomme un ‘entre-monde’.

Il ne s’agit plus seulement pour Ionesco d’investir son théâtre d’une part de lui-même mais bien de tenter de se dire le plus justement et le plus totalement possible.

KEYWORD
Ionesco , identite , onirisme , L’Homme aux valises , Voyages chez les morts
  • 1. 들어가기

    외젠 이오네스코는 첫 희곡 『대머리 여가수La Cantatrice chauve』(1950)에서 인간들 사이의 의사소통의 어려움 혹은 그 부재를 주제로 언어의 비극을 창조했다. 그 이후 그의 극작술은 『의무의 희생자들Victimes du devoir』(1953)을 시작으로 자신의 심층의식이나 정체성을 찾는 주제로 진화한다. 그는 글쓰기를 통해 자아 탐구를 지속하면서 언어의 문제도 꾸준히 제기했다. 그것은 문학이 언어 예술이라는 점과 언어 기능에 대한 작가의 의혹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오네스코가 문학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 찾기에 나선 까닭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인간 존재에 대한 탐색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문제는 대부분의 작가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다. 작가들이란 주로 자신의 삶의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를 창조하지 않는가. 이야기 속의 인물에게 자신의 생각이나 사물에 대한 인식을 말하도록 하면서 말이다. 이오네스코 역시 실존의 경험에서 연극의 소재를 찾았다. 그것은 역으로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추적하는 작업인 것이다. 그러나 실제 삶 속의 시·공간이 그대로 언어로 전사되지는 않는다. 문학 작품의 창조는 실로 천을 짜고 색깔과 무늬를 입혀 옷감을 완성하는 작업과 같다. 따라서 작가의 체험이 말과 글로 구조화되어 하나의 정신으로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기까지 지난한 진화의 과정을 거친다.

    이오네스코는 청년기 시절 이중문화적 체험, 어머니에 대한 죄의식 등에 따른 내적 갈등을 극작품으로 무대에서 보여주고자 했다. 특히 그의 마지막 두 희곡들인 『가방을 든 남자』(1975)와 『죽은 자들 속의 여행』(1980)은 스스로 정체성을 찾아가는 자전적 이야기다. 그는 마치 삶을 결산하기라도 하듯이 희곡 속의 주인공들인 ‘첫 번째 남자Le Premier homme’와 장Jean을 통해 삶의 애환을 고백한다. 또한 그의 삶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등장인물들과 무대와 장소로 재현된다. 여기에 사용된 자료들은 그의 내면일기 속의 내용과 다를 바 없다. 작가의 실존의 사실적 차원이 보다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작가는 주인공들의 뒤로 물러나서 그들을 바라보는 자세를 취한다. 그들 역시 이오네스코처럼 고뇌하는 존재로 살아간다. 작가는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들과 꿈을 꾸듯이 몽환적 대화를 주고받는다. 그는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의식을 떠나지 않는 강박증을 경감시키고자 한다. 일종의 통과의례나 정화의 기능을 통해 문학적 치유를 기대하는 것이다.

    또한 이 두 희곡들은 서로 작가의 자아를 보완한다. 『가방을 든 남자』의 주인공은 양손에 가방을 들고 다닌다. 가방, 그것은 그가 평생 짊어지고 다니던 짐을 상징한다. 거기에 세상에 대한 정치적ㆍ형이상학적 사유, 무의식적 고정관념, 죄의식 등이 들어 있다. 물론 가족들과 얽힌 어렴풋한 기억도 있다. 특히 『죽은 자들 속의 여행』은 제목 그대로 작가가 죽은 가족들을 찾아다니며 과거의 삶을 반추하고 대화하는 내용이다. 그의 여행은 장소와 시간을 넘나든다. 이오네스코는 현실을 재현하는 기술을 통해 자아의 의미를 포착하려고 시도했다. 그가 현실과 비현실의 융합, 즉 작품속의 환상 사이에서 줄타기를 할 때 그 관계 속에서 독자는 흥미와 미적 감정을 공유할 것이다. 우리는 희곡 속의 사건과 거리를 두거나 깊이 관여하면서 작가의 극적 세계로 들어간다. 글쓰기의 다양한 차원이 자아의 다른 모습들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두 희곡에서 작가의 정체성의 문제가 끊임없이 교차하는 것을 볼 것이다.

    이 글에서 정체성이란 극작가 이오네스코의 정체성, 즉 그가 글을 통해 자신을 좇는 자아의 정체성을 말한다. 우리는 우선 두 희곡 속에서 작가의 자전적 요소들을 찾을 것이다. 이어서 인물들의 대화, 장소와 시간, 사건 등의 분석을 통해 실제의 삶 속의 것들과 일치하거나 중첩되는 것을 비교할 것이다. 이 경우 그의 내면일기들을 참조하는 일은 필연적이다. 이오네스코의 모든 작품은 몽환적 현실을 글로 옮겨놓은 것이다. 또한 몽환적 연극에서 몽환과 현실의 경계가 없다. 우리의 작업은 이오네스코의 자아의 극작술에 다가가는 방법이기도 하다.

    2. 몽환과 기억

    『가방을 든 남자』의 주인공은 ‘첫 번째 남자’로 불린다. 작가가 인물의 이름을 고유명이 아니라 총칭적으로 지칭한 것은 그에게 특정인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의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그는 양손에 짐 가방을 들고 끊임없이 이동한다. 그는 이렇게 질문한다. “나의 원고요? 그것을 다시 써야지요. 첫줄부터 마지막까지 새로 쓰려고요. 내가 쓴 것을 기억할 수 없거든요. 원고는 나의 유일한 재산입니다.”1) 그는 이오네스코처럼 작가다. 이오네스코는 자신을 작품의 심연으로 밀어 넣는다. 그래서 그의 체험은 작품의 토대가 된다. 주인공은 과거로 회귀하고 기억을 되살리려고 애쓴다. 그는 “나는 나의 뿌리를 알고 싶다.”2)고 말하며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찾아 내려고 관련된 사람들을 방문한다. 이오네스코는 주인공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강조한다. “등장인물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무대에 올려놓은 것은 내가 『현재의 과거, 과거의 현재』에서 말했던 것보다 더 오래된 과거입니다. 나의 유년기, 사춘기입니다. 나는 아버지와 계모, 아버지의 이복형제들과의 갈등을 그렸지요. 이 희곡의 생명은 바로 어머니의 정체성과 조부모들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일이었죠.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니까요.”3)

    이오네스코의 극작품은 대부분 개인적 삶의 경험에서 비롯한다. 『아메데 혹은 어떻게 그것을 제거할 것인가Amédée ou comment s'en débarasser』, 『왕은 죽어가다Le Roi se meurt』와 같은 희곡들은 작가의 꿈과 체험들을 무대로 옮긴 것이다. 따라서 인물들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분신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의무의 희생자들』에서부터 연극은 극작가에게 삶과 내적 성찰의 가능성을 제공했다. 그는 이미 『공중 보행자Le Piéton de l'air』, 『알마의 즉흥극L'Impromptu de l'Alma』등에서 극작가로서의 삶, 아내 딸과의 일상적 삶, 문학이나 연극적 관점, 정치적 입장 등을 주인공을 통해 말해 왔다. 그래서 우리는 슈베르, 아메데, 베랑제 등에게 작가의 모습을 오버랩시킨다. 일화들은 작가의 삶, 특히 내면적 삶의 단편들로 구성되었다. 『의무의 희생자들』의 주인공 슈베르의 부인인 마들렌이 자살을 시도하려고 하는 장면은 작가가 어린 시절에 보았던 어머니의 이미지를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불화에 따른 생활고로 음독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작가는 그 상황에 따른 내적 상처를 무대로 재현했다. 이 부분은 내면일기에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어머니는 너무 불행하다. 그녀는 울고 있다....갑자기 그녀는 창문 옆의 화장대 쪽으로 급하게 뛰어간다. 그녀는 은잔을 집어 들어 거기에 옥도정기를 한 병 몽땅 붓는다. 옥도정기는 마치 눈물처럼, 피처럼 넘쳐흘러 은에 얼룩을 남긴다. 어머니는 얼굴을 찡그린 채 어린애처럼 막 울면서 잔을 입으로 가져간다...그(아버지)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애쓴다. 어머니는 그가 그녀의 손에서 은잔을 빼앗는 동안에도 내내 울고 있다.”4)

    이오네스코는 『삶과 꿈의 사이에서』이렇게 말한다. “자서전에서 자기 삶을 말할 때, 연대기적 순서로 언급하는 것, 그것은 일반적으로 누구나하는 방식인데 전혀 진실하지 않다. 진정성은 추억이 넘쳐날 때 그것들이 저절로 모여들 때 생겨난다. 그것은 결코 연대기적으로 쓸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주제나 강박증에 의해 쓰일 때 진실이 묻어난다.”5) 그래서 불연속적인 방식으로 나타나는 장면들은 연대기적 기술에 대한 경멸로 표명된다. 경험, 기억, 꿈의 무대들은 그것들을 구분하는 어떤 경계선도 없이 뒤얽혀있다. 『가방을 든 남자』에서 주인공이 회상하고 연상하는 장면은 시간과 줄거리의 선적 진행을 벗어난다. 이 희곡의 무대가 “그 어떤 장소Un lieu de nulle part”로 지시되어 있는 것은 극 공간이 구체적이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프랑스에서 이 작품을 초연할 당시 무대장치는 미니멀리즘 기법으로 최소화되었다. ‘첫 번째 남자’는 거대한 회색의 벽사이를 배회한다. 그것은 관객에게 가방을 든 낯선 여행객이 무대 위에서 방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등장인물이 과거로 회귀하는 것은 시간을 역행하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이 서로 혼재되어 있어서 몽환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첫 번째 남자’와 그의 외조부들이 만나는 장면은 꿈을 꾸는 듯하다. 그는 “그녀가 세상과 멀어지려고 이름을 바꿨기 때문에 다시 젊어졌어요.”6)라고 말한다. 꿈속의 인물은 환상이므로 언제나 현재 속에 있다. 그는 사건의 증인인 동시에 행위자이다. 이오네스코는 몽환 속에서 자아를 추구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고 말한다. 이 희곡의 연극적 상상력은 그렇게 재구성된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의 꿈이나 기억을 다양한 형태로 상징과 변이를 거쳐 연극적으로 형상화시킨다. 그것은 삶이 글쓰기에 의해 개인 신화로 재탄생하는 계기가 된다.

    1)L'Homme aux valises, pp.31-32.  2)Ibid., p.22.  3)E. Ionesco, Entre la vie et le rêve, Paris, Belfond, 1977.p.169.  4)E. Ionesco, Présent passé passé présent, Paris, Mercure de France, 1968, p.28.  5)Entre la vie et le rêve, pp.171-172.  6)L'Homme aux valises, p.22.

    3. 이름과 신분

    극작가의 꿈에서 출발한 『가방을 든 남자』는 그의 환상과 강박증을 나타낸다. 우리는 인물의 대사나 지문이 단편일기 속의 내용과 상당히 유사함을 말한 바 있다. 주인공 ‘첫 번째 남자’는 불확정적인 존재이다. 그는 작가가 회상하는 대로 과거 속의 공간을 배회한다. 그 장소는 당연히 창조된 공간이며 몽환의 세계이다. 그는 특히 부계의 혈통을 찾아 여행한다. 대사관에서 영사가 그에게 “당신의 아버지 이름이 무엇인가”고 묻자, 그는 “나의 아버지 이름이요? 글쎄요, 난 그의 이름을 확실히 몰라요...잘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라고 답한다. 영사가 짜증을 내며 당신 어머니의 이름을 묻는 게 좋겠다고 하자 그는 이렇게 응수한다. “아버지 이름은 우르쉴, 때로는 엘리즈, 때로는 마리엣, 블랑쉬 등으로 불렸지요.”7) 그들의 대화는 마치 꿈속에서처럼 진행된다. 이 장면은 부조리하게 보인다. 아버지를 전혀 다른 사람들의 이름으로 호칭하는 것은 결례의 차원을 넘어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이오네스코의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엉뚱한 이름으로 표현된 것이다.

    주인공은 여정도 모른 채 정처 없이 유랑한다. 그는 루마니아와 프랑스 이중의 문화에 속한 작가의 분신과 다름없다. 이오네스코는 가족과 이별하는 고통을 토로한 바 있다. 당시 그의 괴로움과 단절감은 모든 내적 모순의 토대가 된다. 아버지의 루마니아와 어머니의 프랑스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는 두 종교, 즉 루마니아 정교와 프랑스 가톨릭 양쪽으로부터 추방된 느낌을 받았다. 그는 프랑스어가 모국어이지만 사춘기 이후 루마니아에서 학업을 마치고 문단에 시인으로 데뷔했다. ‘첫 번째 남자’와 대화중인 화가가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1938년입니다. 파리는 생동하고 있죠. 42년, 혹은 50년입니다.”8) 이 세 개의 날짜가 서로 다른데 모두 이오네스코의 삶에서 중요한 시기이다. 각각 이오네스코가 처음 파리에 도착한 때, 그가 프랑스에 정착하여 귀화했을 때, 마지막으로 그의 첫 희곡 『대머리 여가수』가 파리 무대에서 처음 공연되었을 때를 가리킨다. 그는 자신이 율리시스의 전형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정서적 문화적 균열은 고통을 주었지만 결국 극적 상상력의 한 요소로 작용한다.

    『죽은 자들 속의 여행』은 말 그대로 죽은 자들의 세상을 재현한다. 이오네스코는 사라지고 없는 주변 사람들을 생존의 모습 그대로 무대에 재현시킨다. 무대는 이승과 저승이 만나는 장소이다. 두 세계는 중첩된 채, 몽환적 현실이 펼쳐진다. 희곡은 상당 부분 어머니에 대해 회상하는 내용이다. 『가방을 든 남자』와 『죽은 자들 속의 여행』은 서로 겹치는 부분도 있고, 서로를 꿰뚫어볼 수 있는 대조와 보완의 기능도 한다. 그 어느 곳도 아닌 장소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듯이 글쓰기는 구체적 형상에서 추상으로 흐른다.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지만 해독을 요하는 내용이 많다. 줄거리는 꿈의 논리에 따르는 시공간으로 해체되어 가는 느낌이다. 여기서 작가의 창조적 상상력이 돋보인다. 그것은 자아의 가장 모호한 지점을 관통한다. 즉 자기의 기원의 신화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오네스코는 마치 꿈을 이미지화 하듯 기억과 의식을 좇는다. 무질서 한 기억의 움직임에 의해 솟아난 사건들은 시간의 흐름을 따르지 않는다. 무대장치와 인물들도 몽환적이다. 연극적 자서전은 새로운 미학인 꿈의 극작술이 된다. 그는 연극을 자신에 관해 말하는 고백의 수단으로 활용한다. “연극의 대화와 동작은 현실을 폭로하는 방법,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 자기를 이해하거나 이해시키는 수단이다.”9) 꿈의 극작술은 체계적으로 작가의 전기와 더욱 가까워진다. 작가는 꿈과 언어 사이의 관계를 설명한다. “나는 『가방을 든 남자』에서 몽환적으로 말해진 언어를 통해 꿈의 상황을 활용하려고 했다. 지금까지는 상황과 언어가 따로 떨어져 있었다. 난 처음으로 그 둘을 통합시키려고 했다.”10) 따라서 앞의 두 희곡들은 원초적인 언어로 강박증처럼 따라다니는 언어의 주제들이 꿈의 무대화로 전이된 것이다. 언어는 죽은 자들을 만나는 여행에서 몽환적으로 사용된다.

    이 두 희곡에서 주인공은 대화든 독백이든 언어의 논리적 궁지에 봉착한 상태에서 과거와 가족을 찾는다. 그는 미로의 공간 속에 놓여 있다. ‘첫번째 남자’는 꿈속에서 가방을 든 사람이며 정체성과 자기의 이름을 찾는다. 그는 미지의 나라에 도착한다. 그곳이 어딘지 모른다. 그는 공간적 시간적 좌표를 상실하고 있다. 그는 자신처럼 익명의 사람들을 만난다. 그와 경찰관 사이의 만남은 기이하고 우스꽝스럽다. 경찰관이 여권을 요구하자 그는 신분증을 제시한다. 그의 신분증은 즉각 문제를 일으킨다. 이름이 명확하지가 않다. 두 번째 경찰관이 말한다. “방문 서류에 당신의 이름은 필라르로 되어 있어요. 직업은 방충망기술자이구요. 신분증에는 마르티 혹은 마를리로 씌어있군요. 정확히 뭔지 모르겠어요. 바를리인지...” 주인공은 그 점에 대해 자신은 아무것도 아는 바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터무니 없다며 엉뚱한 가정을 제시한다. 첫 번째 경찰이 비밀의 열쇠를 찾을 때까지 말이다. “신분증은 진짜가 맞아요. 다만 이름이 잘못되었어요. 아마도 가명인지도 몰라요. (....) 난 그의 이름을 압니다. 그는 학교동료, 어린시절의 친구이죠. 그의 이름은 코리아키데스라고 해요.”11) 그러나 ‘첫 번째 남자’는 자신의 불확실성에 대해 한 술 더 뜬다. “난 내 진짜 이름을 확신할 수 없어요. 비록 당신이 이름을 알려주어도 그렇습니다.”12)

    이야기는 더욱 모호한 몽환의 상태로 진행된다. 주인공은 어느 병원에 도착한다. 그는 거기서 신분을 물었던 경찰관을 다시 만난다. 그는 조사를 피하기 위해 교묘하게 이름의 문제를 거론한다. 특히 엉터리 대답을 통해서 말이다. 그는 우스꽝스러운 태도로 자신이 타인임을 강조한다. “당신은 내가 타인인 것을 알지요. 난 내가 아니에요, 아닙니다.”13) 그러나 대화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만큼 위협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한다. ‘첫 번째 남자’는 자기의 건망증에 대해 변명한다. “내 이름이 나를 피해 갑니다. 내가 기억하려고 하기만 하면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 알 겁니다.” 이오네스코는 자주 자신이 타인이라는 느낌을 토로한 바 있다. 이 부분은 그의 경험을 연극화한 것이다. 그의 일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타인의 피부를 가지고 있다. 나는 타인의 피부의 주름살 속에 있다. 난 그것을 경험했다. 사람은 타인이 될 수 있다.”14) 이오네스코는 어디서나 문득 자신이 낯선 사람이라는 감정에 사로잡히곤 했던 것이다.

    13장에서 탐문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으로 이동한다. 영사는 계속해서 묻는다. 이름에 관하여, 존재의 본질에 관하여 모든 소중한 정보들은 잃어버린 가방 속에 들어 있다. ‘첫 번째 남자’는 “특별히 존재하는 자existant spécialisé”15)로서의 직분을 부당하게 가로챈다. 그것은 처음부터 최초로 인식된 인물의 매우 모호하고 발생론적인 차원을 증명한다. 그는 존재하는 하나의 인간이다. 그는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존재하려고 노력하는 자다. 그는 이름과 직무로 작동되는 사회적 역할을 잊었다. 영사가 모든 직책이 신분을 알려준다고 말한 것처럼. 이런 이유로 모든 대화는 사회적 인습과 일치하는 통일성을 지닌다.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이름과 직업을 갖고 있다는 의미로 바뀐다.

    이오네스코의 개인적 강박증을 전사하는 무대에서 심문하기는 병원의 의사에게 이동한다. 이 무대는 작가의 악몽 같은 루마니아로의 귀환을 연상시킨다. 특히 신분증을 통해 신원을 확인하는 과정은 매우 환상적이다. 이름이 들어 있는 모든 카드들, 정신건강증, 은행 신용카드, 여행카드 등, 모든 증서들은 정체성의 공허함을 냉소적으로 드러낸다. 등장인물은 신분이 확인되지 않으면 이 나라를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전체주의적 조사의 풍자적 측면을 본다. 그것은 개인주의와 대립한다. 즉 일반적으로 공적인 증명서가 개인의 신분이나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는 기능을 할 수 없다는 부조리한 세계를 강조한다. 작가는 은연중에 개인의 존재성은 일방적인 한쪽의 조사를 피해간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규범을 피해가는 인간의 광기를 보여주는 것이다.16)

    『가방을 든 남자』에서 신분에 대한 조사는 체계적인 반면 『죽은 자들 속의 여행』에서는 매우 제한적이고 신중하다. 장은 ‘특별히 존재하는 자’로서 한 여자에게 자신의 신분증을 보인다. 자기를 알아봐 달라고, 그 자신을 인정하라고 말이다.

    우리는 등장인물이 국적이든 고유한 의미로서의 신분이든 자기 정체성을 찾는 여정에서 아이러니한 모습을 본다. 그는 자기 이름도 모르는 불확실성 속에서 어머니와 자신의 뿌리를 찾는다. 그는 가족의 추억들을 되살리려고 애쓴다. 정체성을 찾는 일은 상징적으로 변한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삶, 작은 거울로 상징된 자신의 시선이다. 그것은 연극적 글쓰기로 접근하는 일종의 나르시시즘인 것이다. 『가방을 든 남자』에서 주인공이 이름을 잊은 것은 조국의 언어를 망각한 것과 대조된다. ‘첫 번째 남자’는 고향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어 있다. 이오네스코가 루마니아로 돌아갔을 때의 상황과 흡사하다. 경찰관은 그를 심문하면서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첫 번째 경찰이 두 번째 경찰에게 말한다. “그가 하는 말을 통 모르겠어. 어디 통역해 봐.”17) 이후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희극적으로 진행된다. 실제로 발화된 말과 두 번째 경찰의 번역 사이에 차이가 발생한다. 게다가 잃어버린 말에 대한 강박관념은 가방의 상실로 상징된다. 10장의 끝에서 주인공은 말한다. “그 거리명이 적힌 글자들을 해체하려고 해. 더 이상 이 나라의 언어를 모르겠어. 그것은 라틴어야. 난 라틴어를 잊어버렸어. 어쩌지?”18) 모든 작가에게 언어의 문제는 중요하다. 특히 이중 언어사용자인 이오네스코는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흔히 볼 수 있다.

    진정으로 시민의 지위에 관한 문제는 언어의 문제에서 출발하여 개인적인 문제로 옮겨간다. 즉 극중의 대화에서 보편적 언어로 간주되는 라틴어에서 루마니아 언어로 슬며시 미끄러져 들어간다. 극작가의 전기적 요소가 스며드는 것이다. 『죽은 자들 속의 여행』에서 자서전적 근거는 순수하다. 이오네스코는 직접 루마니아어를 언급하면서 언어의 망각의 주제를 부각시킨다.20) 대화가 논리적으로 궁지에 빠지는 것은 그가 선호하는 주제들 중 하나다. 『삶과 꿈의 사이』에서 그는 인간들끼리 주고받는 대화의 신비스러운 측면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어떻게 우리가 서로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서로 이해한다는 사실, 그것은 바로 내가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21) 극작가는 담론과 개인적 의식을 분리하기에 앞서 관객 편에서 불편함을 느끼도록 인칭대명사의 준거가 불확실함을 보여준다. 인물들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 두 희곡 속의 주인공인 ‘첫 번째 남자’와 장은 아무런 결과도 없이 의사소통을 시도하려고 한다. 작가는 언어의 기능은 물론 그들의 말의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것들은 불가능하고 기계적인 마치 해설하는 듯한 목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7)Ibid., p.65  8)Ibid., p.10.  9)E. Ionesco, Journal en miettes, Paris, Mercure de France, 1967, p.187; Cf. Entre la vie et le rêve, Belfond, 1977, pp.164-167.  10)Giovanni Lita, Ionesco, Paris, éd., H.Veyrier, 1989, p.107.  11)L'Homme aux valises, pp.37-38.  12)Ibid., p.38.  13)Ibid., p.61; Cf. L'Homme en question, p.53; “Je suis dans la peau d'un autre, dans les peaux, et les plis des peaus d'un autre.”  14)Présent passé, passé présent, p.42.  15)L'Homme aux valises, p.65.  16)Ibid., p.89.  17)Ibid., p.41.  18)Ibid., p.45.  19)Ibid., p.46.  20)Voyages chez les morts, p.35.  21)Ibid., p.59.

    4. 메타포의 이용

    이 두 희곡 속의 은유적 표현은 작가의 강박증에서 비롯한다. 독자는 희곡을 다양한 층위로 읽으면서 작가의 심층세계로 들어간다. 돈, 장소, 여권과 같은 모티프들은 당시의 현실적 문제들을 보여준다. 돈은 인간관계에서 가장 현실적인 문제를 야기한다. 『죽은 자들 속의 여행』에서 거짓동전은 재귀적 요소다. 주인공은 궁핍하게 사는 외가 식구들에게 돈을 전한다. 희곡의 장소는 작가의 외가가 있던 클로드-테라스 거리의 집이다. 실제로 이오네스코는 한 동안 외가에 신세를 지면서 이곳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나는 그들에게 모든 돈을 주고 왔어요. 그들이 사는 곳을 압니다. 클로드-테라스 거리지요.”22) 그러나 그는 친가 쪽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이 돈은 아무런 가치가 없어요. 이곳에서 통용되지 않아요. 증권시장에서도 마찬가지지요.”23) 아버지의 가족들에게는 돈이 가치가 없거나 시효가 지났거나 위폐일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거짓 동전이 희곡을 무겁게 짓누른다. 이오네스코가 이차대전 후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생활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다른 차원에서 돈은 은유적 기능을 할 수 있다. 돈을 통해 타인과 의사소통하고 신용을 제공하는 일은 인간적 교환을 의미한다. 이오네스코는 계모를 매우 싫어했다. 그녀는 『죽은 자들 속의 여행』에서 심슨 부인으로 나온다. 계모는 전쟁 중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재정 지원을 못한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한창 전쟁 중이라 아버지는 네게 돈을 보낼 수 없었어. 적의 전선을 뚫고 편지를 보낼 수도 없었지. 더구나 돈의 가치는 형편없이 추락했어. 얼마나 인플레가 심했던지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지.”24) 아버지가 송금할 수 없었다는 것은 그와 아들 사이에 대화나 소통의 부재로 이해된다. 생활비의 부족은 삶의 궁핍을 뜻한다. 장과 아버지, 심슨 부인 사이의 갈등은 돈과 재산과 연루되어 있다. 돈은 언어의 메타포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 점은 작가의 『단편일기』를 통해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이 글들이 인쇄될 것이라 생각하자마자 진실이 손상되는 듯하다. 그것은 거짓 동전이 될 것이다.”25) 사용할 수 없는 돈을 소지한 인물의 고뇌는 자기 존재의 진실을 전달하지 못하거나 결실을 내지 못하는 작가를 상징한다. 즉 언어를 마음대로 구사하지 못해 글쓰기를 할 수 없는 경우 말이다. 우리는 『기막힌 유곽!Ce formidable bordel!』26)에서 말 못하는 등장인물이 돈을 축재하는 것과 말을 못하는 것이 일치하고 있음을 본다. 이 모티프에서 자아의 세 양상이 드러난다. 실재하는 이오네스코, 세상과의 관계 속의 이오네스코, 작가 이오네스코가 그들이다. 무대 형상화는 그 자체에 구성과 압축의 예술에 근거한다. 그것은 작가가 경험한 시간의 조각들을 찾아서 엮어내는 것이다.

    22)Ibid., p.91.  23)Ibid., p.36  24)Ibid., p.87.  25)Journal en miettes, p.150.  26)프랑스어 Ce formidable bordel!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기막힌 유곽’이란 뜻인데, 풍자적으로 ‘난장판’ 혹은 ‘시끌벅적한 상황’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이 글에서 이오네스코가 자기 삶을 조롱하며 빗대 부른 것으로 <기막힌 유곽!>으로 옮긴다.

    5. 자아의 종합

    『가방을 든 남자』와 『죽은 자들 속의 여행』은 두 작품 속의 시간들이 연속되거나 중첩된다. 서로 관련을 맺고 있다. 희곡 속의 각 장면들은 극작가의 삶의 일화들이 투영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의 인간적 특성의 다양한 양상들이 하나로 통합되듯 수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방을 든 남자』의 병원 일화를 보자. ‘첫 번째 남자’는 출국하기 위한 비자 신청 건으로 대사관을 찾는다. 그런데 대사관 건물이 병원이다. 그는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 병원에서 노부인의 안락사를 돕는다. 이 장면은 조화롭지 못하지만 블랙유머가 넘쳐나는 동시에 매우 시적이다. 작가는 병원이 집단수용소의 체계로 운영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노인들에게 공포심을 야기하는 것과 등장인물에게 침대를 찾아주라고 말하는 의사 사이의 필연과 우연의 관계가 형성된다. 극작가의 연극적 상상력이 돋보인다. “병원의 무대는 꿈의 무대가 아니다. 사람들은 자주 정신병원을 비난한다. 사실 문제는 안락사이다. 사람들이 노인을 죽이지는 않지만 죽도록 내버려 둔다.”27)

    여기에 강제수용소의 논리가 적용된다. 새로운 입소자들을 위해 기존의 수용자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에 맞서 노령의 사람들은 감독기관의 의료진들에게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쓴다. 그 장면은 죽음의 집단수용소에서 생명의 필연성을 환기시킨다.

    강제수용소에서 공포의 묘사는 호스피스의 주제와 함께 안락사에 반대하는 작가의 생각을 반영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병자, 불구자, 노인들을 안락사하는 것은 히틀러의 세계를 연상시킨다. 그것은 전체주의적 폭압에 가담하는 것이다.”30) 이 무대는 작가의 평소 생각을 보여주는 두 장면으로 간주된다. 하나는 나치와 공산주의와 같은 전체주의에 대한 반대자로서, 다른 하나는 안락사의 반대자로서다. 이오네스코는 이 두 가지가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침해하는 최고의 악으로 간주했다.

    병원의 장면에서 드러난 자아 이미지는 더욱 복잡하다. 사실 ‘첫 번째 남자’는 병원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이든 여자의 살인에 가담했다. 이 모습은 1942년 작가가 루마니아를 떠날 때 겪었던 심적 고통, 즉 전쟁과 공산주의로 죽어가는 조국을 떠나는 자신의 심정을 대변한다. 만약 그가 루마니아에 어떤 소속감도 느끼지 않았다면 전체주의 체제를 떠난다는 명분에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가족과 친구 등 인간적 공동체와 맺은 감정들 때문에 죄의식에 빠진다. 그 상황은 무대에서 잘 드러난다. “난 증인이 되고 싶지 않아. 나의 비자를 원해.”31)라고 등장인물은 말한다.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작가는 『단편일기』에서 노인이 추잡하다며, 노인을 죽이고 싶다고 말한다.32) 그는 요양원을 방문하고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내 앞에 흰 구렛나루에 머리가 벗겨진, 그러나 건강한 노인이 있다. 그는 잘 생긴 노인이다. 그는 매우 원기왕성하다. 얼굴색도 붉다. 그는 의욕적으로 먹는다. 그는 매우 불쾌한 존재이다... 그의 시선은 참을 수 없다. 노인의 눈초리는 날카롭고 교활하며 잔혹하다.”33) 이오네스코의 모습은 ‘첫 번째 남자’에서만큼 나이든 여자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안락사를 비판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삶을 포기할 필요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나이든 여자는 주사를 맞고 행복하게 죽는다. “부드러워요. 나뭇잎들은 돋아나고, 꽃은 활짝 피어납니다.”34) 몸의 내부에서 돋아나는 나뭇가지의 이미지는 극작가의 주인공에게 다가가면서 끝난다. 사실 작가는 『갈증과 허기』의 첫 무대에서 같은 방식으로 마음속에 들장미의 가지를 품고 있는 인물을 통해 자신의 분신을 보여준 바 있다.

    극작가의 다양한 삶의 체험의 모습들이 총체적인 무대 이미지로 나타난다. 정치적인 적대자는 생존자의 죄의식과 만나고, 생존권의 선언은 죽음의 필연성에 저항한다. 무대가 꿈에서 나온 영감의 결과라면 몽환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꿈의 무대가 중심을 이룬다. 꿈의 혼합적 기능을 지적하는 것은 흥미롭다. 극중 일화들이 몽환적인 것은 극작가로 하여금 혼합된 자아, 종합을 지향하는 자아를 드러낸다. 이러한 장면들은 의미심장한 자아의 완벽하고 폭넓은 이미지들이 된다. 그러나 자서전은 단지 삶의 복합적인 양상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삶의 재현에 의미와 일관성을 부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27)Entre la vie et le rêve, p.181.  28)L'Homme aux valises, p.73.  29)Ibid., p.71.  30)E. Ionesco, Antidotes, Paris, Gallimard, 1977, p.18.  31)L'Homme aux valises, p.73.  32)Journal en miettes, p.126.  33)Ibid., p.93.  34)L'Homme aux valises, p.74.

    6. 개인 신화

    이오네스코는 신화를 통해 실존을 극복하려고 했다. 『가방을 든 남자』에서 루마니아는 환상 속의 지옥으로 묘사된다. ‘첫 번째 남자’는 “난 늑대소굴에 홀로 남았어. 지옥의 동굴이야. 고래의 뱃속, 지옥의 문 앞에 놓였어.”35)라고 소리친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영웅적으로 묘사한다. 1940년 자신이 루마니아로 돌아갔을 때 그는 단순히 잘못된 계획으로 지옥의 소굴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고래의 뱃속”을 언급한 것은 작가가 성경의 요나Jonas 일화36)를 떠올린 것이다. 또한 『죽은 자들 속의 여행』의 가족들 사이의 갈등하는 장면은 지옥을 연상시킨다. 장은 계모와 그 형제들과의 갈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여기서 계모는 심슨 부인으로 등장한다. 그녀는 장이 자신의 불행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것에 화를 낸다. 자기는 장의 아버지의 의지에 반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심슨부인은 장이 자기를 어머니로 인정하지 않은 것에 불만이고, 장은 생활비는커녕 먹을 것조차 주지 않았다고 비난한다. 장은 외가의 빚을 청산하기 위해 계모에게 돈을 빌린 적이 있다. 그는 주장한다. “나는 어머니와 외가 식구들에게 돈을 전해주기 위해 밖으로 나와야 했어요. 그러나 돌아가야 했지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죠.”37) 이오네스코는 여기서 돈을 둘러싼 가족 간의 어두운 갈등을 뛰어넘으려고 한다. 돈을 기간만료된 것으로 상징적 물건으로 묘사한다. 고대 신화에서처럼 징벌은 끝없이 반복된다. 계모와 아버지 쪽 사람들은 극작가가 창조한 지옥에서 어머니에게 잘못한 대가를 영원히 치르게 될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삶을 재현시키며 과거의 죄의식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문학의 치유 기능이 작동하는 것이다.

    장과 스핑크스38)가 만나는 장면에서 오이디푸스의 모습은 여행에서 복귀하는 이미지이다. 이오네스코는 『가방을 든 남자』의 주인공을 신화적 특징으로 미화한다. 그것은 꿈과 일치하는 듯 원형에 가깝다. 희곡은 검은물이 흐르는 강의 이미지로 끝난다. 융은 『영혼의 변신과 그 상징』에서 이렇게 썼다. “죽음의 검은 물은 삶의 물이다. 죽음은 태양을 집어 삼키는 바다와 같다. 어머니의 모태에서 다시 아기로 태어나는 것... 물의 상징만큼 자주 나타나는 어머니의 상징은 생명의 나무와 같다.”39) 희곡이 그러한 원형으로 끝남으로써 작가는 자기의 실존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다. 마치 자신이 재탄생하는 것을 알리는 듯하다. 이오네스코의 신화적 상상력이 서구문화 속의 공통된 유산에서 비롯한 것이지만 고유한 특성이 있다. 고대 신화에서 영감을 받아 개인 신화로 재창조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방을 든 사람』의 주인공은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기 위한 조용한 장소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40)고 묻는다. 그의 글쓰기와 다시 시작하기 사이에서 우리는 그의 여행 목적을 알 수 있다. 글쓰기를 통해 자기의 실존을 재창조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글을 통해 말하기 힘든 것, 말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삶의 오해를 풀어주기도 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대면하는 장면은 그렇게 설정되었다. 이오네스코는 언제나 아버지와 대립했다. “그(아버지)와 나, 우리는 최종 판단에 이르기까지 대립하고 있었다. 오로지 그 순간이 왔을 때, 서로 다른 생각들이 조정되었고 오해가 풀렸다.”41) 『죽은 자들 속의 여행』을 쓴 의도도 이런 이유가 내재되어 있다. 무덤의 저편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재회하는 것이다. 희곡 속의 격한 감정이나 분노, 회한 등은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것들이다.

    이오네스코는 일기에서 어머니와 약혼녀 사이에 조용히 이루어졌던 권한이양의 순간을 회상한다. 그것은 일종의 의식이었다. “그것은 단어 밖의 말 없는 대화였다.”42) 『가방을 든 남자』에서 그 의식은 뚜렷이 재현된다. 노부인이 여자에게 말한다. “나는 너에게 아들을 맡긴다. 지금 그를 맡아야 할 사람은 바로 너야. 너는 그를 사랑할 것이니까.”43) 이 장면은 이오네스코의 어머니가 아들을 결혼시키면서 새로운 며느리에게 하는 말이다. 생각이 현실로 바뀐다. 삶에서 직관적이고 느낌이었던 것이 글에서는 객관화된다. 일단 말로 표현되면 그 순간은 우주 공간에 기록되는 것이다. 작가는 연극에서 마지막 부분을 말로 표현하면서 실존의 결핍과 공허를 작품에서 메우는 기능을 부여했다.

    이러한 논리로 이오네스코는 자신의 역할을 무대화했다. 『가방을 든 남자』에서 작가의 이미지들 중 하나는 그가 공산주의의 희생자라는 점이다. 희곡은 전체주의 체계에 대한 조회로 가득 차 있다. 개인에 대한 감시, 경찰의 심문, 속임수를 쓰는 소송 등 모든 것이 인간성에 반한다. 그는 정치적 중요성을 언급하기 위해 몇몇 꿈들을 재창조했다. 그는 『단편 일기』에서 자신이 정신건강을 증명하는 서류를 제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에게 술 팔기를 거부하는 술집의 꿈을 꿨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장면은 『가방을 든 남자』에서 이렇게 재현된다. 꿈은 정치적 고발의 태도를 취한다. ‘첫 번째 남자’는 술집주인에게 마실 것을 주문한다. 그러나 이 주인은 자신에게 정신건강증을 보여주지 않으면 마실 것을 제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이 그런 증명서를 제시해야 한다면 누구도 마실 것을 사먹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인권을 침해하고 있어! 이 나라는 참으로 이상하군.”44) 부조리한 특성의 무대는 일기에서 몽환적으로 나타나며 희곡에서는 전체주의의 불법성을 고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오네스코의 저항의 표현은 자아의 환상적 이미지와 일치한다. 그는 1942년 루마니아에서 프랑스로 떠나면서 조국의 공산체제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고통스럽게 겪었던 동료들을 위해 깊은 연대감과 감정이입을 체험했다. 작가는 그것을 역설적으로 타자의 정체성, 이를테면 공산주의 희생자의 정체성으로 정의했다. 실존의 재창조는 결국 역사적 자아와 진정으로 인식된 자아의 일치를 허용한다. 모든 것을 말하려는 시도와 전략은 자아의 재현을 정당화하거나 정확히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그의 연극은 그 도정의 일환으로 읽힌다.

    희곡에서 극작가의 자아를 찾는 작업은 중요하지만 쉽지 않다. 관객이나 독자는 배우와 등장인물을 보며 그를 작가로 인식하려는 의지와 그와 작가 사이의 거리감 사이에서 긴장한다. 그 긴장의 강도가 극의 흥미를 좌우할 것이다. 이오네스코는 실제 체험의 감정을 반복해 드러냈다. 그는시사적 현실에 압도되어 상처받고 고뇌하는 성격이다. 그는 박탈감으로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와 사회의 불화는 스스로 지각한 것을 초연하려는 욕구로 내면화된다. 그것은 작가가 스스로를 자책하는 글에서 알 수 있다. “더욱 정확한 사건들만을 써야한다. 구체적인 사실들을 기록해야 한다. 가능하면 감정을 줄여야겠다.”45) 그는 직접 사회에 참여하는 일도 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이 긴장감은 글쓰기에 그대로 반영된다. 『기막힌 유곽!』에서 이오네스코를 상징하는 인물은 어떤 감탄사나 짧은 문장 속으로 숨는다. 그것은 앞선 작품들46)에서 작가의 생각을 대변하는 주인공의 긴 독백과 다르다. 주인공인 ‘인물’이 거의 침묵으로 일관한다. 어쩌다 내뱉는 말도 중립적이다. 아무런 감정도 없이 평범한 말을 늘어놓는 것은 인물의 무미건조한 성격을 드러낸다. 오히려 희곡 속의 혁명들이 평온하게 보인다. 그는 심지어 주인공을 대신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을 말하도록 한다. 이 희곡의 4장은 노부인이, 5장은 부인이, 6장과 7장은 신사가 등장하여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난 더 이상 신문을 읽지 않아요. 신문은 나를 불행하게 만들어요. 그것들을 잠시 들여다보기만 하면 죽음과 살인, 전염병, 홍수, 페스트, 지진, 인종말살, 화재, 폭군들 뿐이야.... 이데올로기가 폭력으로 넘치고, 오로지 폭력의 구실에 불과해.”47) 이 말은 분명 이오네스코가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침묵하는 듯하지만 그는 결코 침묵할 수 없음을 뜻한다.

    이오네스코에게 의도적인 거리두기의 수법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작가의 분신들은 둘로 나뉘어 멀리서 서로를 바라본다. 『죽은 자들 속의 여행』에서 아버지와 재회하는 장면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는 한 인물이 주도한다. 이미 무대지시문에 “이상하게도 장과 닮아보이는”48) 인물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 인물은 장의 아버지로 ‘등장인물2’로 표기된다. 장은 소파에 앉아서 그의 말을 듣고 응수한다. 다른 차원에서 새로운 분화가 작동된다. 두 인물은 실제로 작가의 두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명예와 알려지는 것에의 욕망을 표현하고, 다른 하나는 모든 사실에 공허감을 초래한다. 마리-클로드 위베르는 이러한 특징에 대해 희곡의 주인공이 저자를 닮아서 심판자인 동시에 참여자로서 구경꾼처럼 연기를 이끈다고 말한다.49) 관련성과 거리감 사이에, 신중함과 조롱사이에 작가의 형상을 그 자신의 연출 속에서 탐색하는 작업은 쉽지 않다. 그렇지만 분명 거리두기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 마지막 희곡 속에서 자아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이오네스코는 자서전을 통해 삶을 말하거나 기억을 글로 쓸 때 연대기적으로 기록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추억이나 기억은 자연스럽게 떠오를 때 가장 진실하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자서전은 연대기적인 기록이 아니라 주제와 고정관념에 따른 기록이다.”50) 앞의 두 희곡의 시·공간적 배경은 이러한 원칙에 따른다. 희곡에서 죽은 자들을 만나는 상황이 그렇다. 그들은 주인공의 자아의 시선을 통해 보인다. 그 현상은 전적으로 극작가의 시선이기도 하다. 그러한 무대는 실존의 재창조에 의해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작가는 과거의 경험을 되살려 삶을 보완하고 새롭게 재구성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작가가 자신의 삶을 글로 옮기는 일은 존재론적 차원에서 정체성을 독자나 관객에게 이미지로 제공하는 것이다. 희곡의 완성이 작가가 모든 것을 다 말했다고 할 수는 없다. 수수께끼는 사라지지 않는다. 삶의 진실은 영원히 찾아야 할 과업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 속의 여행』에서 장이 반복해서 “나는 모른다”라고 말하는 것도 그런 연유다. 그의 정체성은 끝없는 의혹의 대상이다. 결국 작가는 자기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실토한다. 자아 탐구에 대한 열망은 작품을 풍요롭게 만든다. 그것은 작가의 사유에 역동성을 주며 새로운 극작술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이오네스코의 문학에 대한 성찰은 새로움에 대한 천착이다. 문학이 새로운 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용한 것이다. 『죽은 자들 속의 여행』의 장과 알렉상드르는 작가이다. 그 두 사람 사이의 새로움의 환상에 관한 논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장이 말한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어요. 우리는 가끔 작은 숲이나 잡목림을 탐험할 필요를 느끼지요. 잡목림속에, 그 숲의 어딘가에 새로운 대륙이 있어요. 그건 우리의 흔적을 좇는 일에 불과해요. 우린 이미 그곳을 지나왔어요!” 그러자 알렉상드르가 응수한다. “아마 또 다른 모험이 있을 겁니다! (...) 아침의 백포도주, 첫 담배처럼. 새로운 날이 밝아요. 우린 언제나 습관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건 편안하지 않지요.” 그러나 장은 “모든 것이 새롭다는 전제로 우리는 새로 시작하기를 바라지요. 바로 그 새로움을 기다리고 있어요.”51)라고 말한다.

    두 사람의 대화가 글쓰기에 관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글을 쓰는 작가로서 인물들이 새로운 글을 통해 거듭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결국 두 사람의 생각은 결렬된다. 장은 조국으로 추방당한 상황에서 감히 모험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또한 극작가가 말의 세계로부터 침묵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반면에 알렉상드르는 과감하게 나설 준비를 한다. 그는 미래의 작가 혹은 새로운 말씀의 창조주인지 알 수 없다. 이오네스코는 여기서 문학이 망각과 허무 속에 묻힐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문학의 무용성에 대해 에세이와 인터뷰에서 자주 언급했다. 그는『가방을 든 남자』에서 『죽은 자들 속의 여행』으로 이동하면서 문학적으로 퇴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먼저 ‘첫 번째 남자’는 “진실을 말할 수 있다”52)고 믿는다. 그 진실은 바로 작가의 원고뭉치 속에 들어 있다. 그것은 가방으로 상징되며 주인공이 “유일한 재산”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내면일기에서 작가가 말한 꿈과 일치한다. 그러나 『죽은 자들 속의 여행』에서 장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작가의 명예 혹은 그의 문학은 무대장치의 보조물로 쓰이는 낡은 종이들에 불과하다. 그것은 어떤 중요한 메시지도 지니고 있지 않다. 여기서 극작가가 제기하는 문제는 작가의 사명에 대한 물음과 더불어 절망적 분위기로 흐른다. 마치 『의자들』에서 메시지를 전하는 연사가 벙어리인 것처럼.

    이오네스코는 인간조건에 대한 반항의 표현으로 연극적 메타포를 이용했다. 인간의 조건은 끈에 묶인 인형과 흡사하다. 무엇이 나를 이러한 상황으로 몰아넣는지 참을 수 없다. 그는 연극 속에서 자신의 삶의 연출가가 되어 반항의 감정을 완화시킨다. 자기가 인식한 우주를 창조하면서 말이다. 재현된 연극에는 내면의 상태를 드러내는 독창적 극작술이 있다. 이오네스코가 한탄하는 조각난 현실의 지각, 인간의 불가피한 한계 등은 극작품에서 새로운 세계의 창조로써 위안이 된다. 그 세계는 오직 작가의 자아의 시선을 통해서만 보인다. 진정한 세계는 자아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35)Ibid., p.48; “Je me suis mis tout seul dans la gueule du loup. Dans l'antre du diable. Dans le ventre de la baleine. Aux portes de l'enfer.”  36)구약성서 열두 소 예언서 중 다섯 번째 일화. ‘요나’라는 이름을 가진 예언자가 한 가지 사명을 수행하는 이야기만 전해진다.  37)Voyages chez les morts, p.91.  38)Voyages chez les morts의 VII 장은 ‘첫 번째 남자’와 스핑크스가 만나는 장면이다.  39)C.G. Jung Métamorphoses de l’âme et ses symboles, Georg Editeur SA, 1993, p.366.  40)L'Homme aux valises, p.32.  41)Présent passé, passé présent, p.24.  42)Journal en miettes, p.181.  43)L'Homme aux valises, p.14.  44)Ibid., p.89.  45)Présent passé, passé présent, p.55.  46)Tueur sans gages, Rhinocéros에서 Bérenger의 독백의 경우가 그렇다.  47)Ce formidable bordel! p.138.  48)Voyages chez les morts, p.43.  49)Marie-Claude Hubert, Eugène Ionesco, Seuil, 1990, p.228.  50)Entre la vie et le rêve, p.181.  51)Ibid., p.109.  52)L'Homme aux valises, p.95.

    7. 나가기

    우리는 지금까지 이오네스코의 마지막 두 희곡 『가방을 든 남자』와 『죽은 자들 속의 여행』에서 작가의 정체성 탐구라는 주제로 살펴보았다. 필자는 희곡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작가의 자아의 내면을 찾고 분석하는 데 주력했다. 그것은 그의 존재론에 접근하는 일이다. 그러나 연극 속의 생략과 상징, 은유적 수법은 작가의 일기나 전기적 맥락을 이해하지 않고는 파악하기 어렵다. 희곡의 내용이 실존과 반드시 일치한다고 볼 수 없다. 언어의 기록은 삶의 일부에 불과하다. 진정한 삶은 실존의 공간 속에 몸으로 쓴 기호들일 것이다. 그는 연극의 재현적 특성을 이용하여 자신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표현하려고 했다. 중요한 것은 상연의 짧은 시간 속에 삶의 긴 여정을 어떻게 압축하고 통합하는가에 있다.

    우리는 텍스트의 언어에서 작가의 꿈, 고정관념, 죄의식 등을 추출해 분석했다. 작가에게 작품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수단이다. 그러나 그의 정체성은 글로 씌어진 것만으로 파악할 수 없다. 그것이 작가의 존재론적 조건이고 한계다. 우리는 희곡 속의 주인공을 추적하며 작가의 진실에 다가가려고 노력했다. 이오네스코는 자신의 문학적 소명을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오로지 문학만이 최선의 것이다. 나는 문학을 위해 태어났다.”53) 하지만 원고 더미 속의 글들은 『죽은 자들 속의 여행』에서 보았듯이 먼지속으로 사라질 운명에 있다. 글쓰기는 자신을 세계 속에 밀어 넣는 행위인 동시에 작가로서의 존재를 위해 필연적이다.

    이오네스코가 주인공에게 작가의 신분을 부여한 것은 문학이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글을 하나의 구체적 이미지로, 스펙터클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오네스코는 드라마 장르에 깊이 천착했다. 무대의 말과 행동, 사물은 구체적이어서 직접 감각에 호소할 수 있다. 삶을 무대에 재현하는 작업은 원초적인 존재의 형태를 재구성하는 일이다. 그것은 경이로운 환상으로 들어갈 수 있다. 몽환의 무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심층자아나 무의식적 자아의 탐구는 그런 방식으로 연극으로 제시된다. 이오네스코는 자신의 자서전적 희곡을 끝으로 문학적과업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의 극작술은 자신이 의도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 실존의 고통스런 체험의 결과다. 그는 아마도 무대를 통해 거기서 벗어나 신화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는지 모른다. 결국 그의 연극적 의식(儀式)은 치유할 수 없는 존재의 고뇌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53)E. Ionesco, Découvertes, Genève, Skira, 1969. p.65.

참고문헌
  • 1. Bonnefoy (Claude) 1966 Entretients avec Eugene Ionesco google
  • 2. Calinescu (Matei) 2005 Ionesco, Recherches identitaires, Traduit du roumain par Simona Modreanu, Editions OXUS google
  • 3. Feal (Gisele) 2001 Ioesco, Un Theatre onirique, Editions Imago google
  • 4. Hubert (Marie-Claude) 1990 Eugene Ionesco google
  • 5. Ionesco (Eugene) 1990 Theatre complet, edite par E. Jaquart google
  • 6. Ionesco (Eugene) 1975 L'Homme aux valises suivi de Ce fomidable bordel!, Theatre VI google
  • 7. Ionesco (Eugene) 1981 Voyages chez les morts, Theatre VII, ≪Themes et variations≫ google
  • 8. Ionesco (Eugene) 1966 Notes et contre-notes google
  • 9. Ionesco (Eugene) 1967 Journal en miettes google
  • 10. Ionesco (Eugene) 1968 Present passe, passe present google
  • 11. Ionesco (Eugene) 1969 Decouvertes google
  • 12. Ionesco (Eugene) 1977 Antidotes google
  • 13. Ionesco (Eugene) 1979 Un homme en question google
  • 14. Ionesco (Marie-France), Vernois (Paul) 1980 Ionesco : Situation et perspectives google
  • 15. Ionesco (Marie-France), Dodille (Norbert) 1996 Lectures de Ionesco google
  • 16. Jung (Carl Gustav) 1993 Metamorphoses de l’ame et ses symboles google
  • 17. Lita (Giovanni) Ionesco google
  • 18. Tobi (Saint) 1973 Eugene Ionesco ou A la recherche du paradis perdu google
OAK XML 통계
이미지 / 테이블
(우)06579 서울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반포동)
Tel. 02-537-6389 | Fax. 02-590-0571 | 문의 : oak2014@korea.kr
Copyright(c) National Library of Kore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