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udy on New Narrative and Authenticity

새로운 서사와 연기의 진정성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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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This thesis is a research about new narrative, which appeared in the post-dramatic theater era. The post-dramatic theater, conceptualized by Hans-Thies Lehmann, focused on performativity through physical presence, rather than linguistic text’s representation, and by doing so, presented new paradigm to performing arts, but caused confusion among the audience by preventing interpretation of meaning in advance. Because of this, some theatre researchers point out dramatic effect appearing in the post-drama era, by using the expression of the so-called ‘return of narrative’ or ‘return of story’. With this perspective, the thesis sets ‘self-narrating’ which is observed in contemporary European performing art as research topic. Self narrating is a format that tells a story personally experienced by the performer in his real life, and can be called as ‘new narrative.’ Since the ‘new narrative’ is a story of reality, rather than well-constructed fiction, it does not follow the conventional law of dramaturgie. However, because performance is a story related to personal memory, the audience can realize the story as time passes, and confusion is decreased, consequently. The reason this thesis focuses on the new narrative is that such type of performance satisfies sensorial perception as postdramatic theatre and synthetic interpretation as dramatic theatre, at the same time. Therefore, this thesis will study authenticity of aesthetics through <Cédric -Andrieux> by Jérôme Bel and <Product of Other Circumstances> by Xavier Le Roy, which were recently performed in Korea.


    본 논문은 포스트드라마 연극 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서사에 대한 연구이다. 레만이 개념화한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문학적 텍스트의 재현이 아닌 몸의 현존을 통한 공연의 수행성에 주목함으로써 공연예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였으나, 해석을 통한 의미 전달 작용을 차단함으로써 관객에게 혼란을 주기도 했다. 이러한 연유로 일각에서는 소위 ‘이야기의 귀환’ 또는 ‘서사의 귀환’이란 표현으로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시대에 나타나는 드라마적 현상에 주목한다. 본 논문 역시 위와 동일한 문제의식으로 최근 공연예술계에서 포착되는 ‘자기 이야기하기’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자기 이야기하기’ 공연은 공연자가 자신이 실제 현실에서 경험한 이야기를 관객에게 들려주는 형식으로 ‘새로운 서사’라 칭할 수 있다. 이 ‘새로운 서사’는 잘 짜여진 허구의 이야기가 아닌 실제 현실의 이야기이므로 전통적인 드라마투르기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하지만 공연이 개인의 기억을 이야기하는 것이므로 관객은 개인적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연의 내용을 쉽게 인지하며 극적 체험을 한다. 본 논문이 새로운 서사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러한 형식의 공연이 포스트드라마 연극으로서의 감각적 지각방식과 드라마 연극으로서의 의미작용을 동시에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최근 국내에서 공연된 자비에 르 롸의 <다른 상황의 산물>과 제롬 벨의 <세드리크 앙드리외>를 통해 그 진정성의 미학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 KEYWORD

    Postdramatic Theatre , Xavier Le Roy , Jerome Bel , Authenticity , Irruption of the real , ,

  • 1. 포스트드라마 연극과 새로운 서사

    한스-티스 레만(Hans-Thies Lehmann)이 개념화한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동시대 공연예술의 현상을 아우르는 포괄적 용어가 되었다. 하지만 레만은 포스트 드라마 연극을 통해 현대공연예술을 하나로 범주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범주화할 수 없는 그 다양성을 확인하는 것으로 새로운 담론을 이끌어냈다. 즉, 하나로 범주화 할 수 없는 현대의 다양한 공연예술 현상이 포스트드라마 연극이라는 개념 하에서 탐구되는 것이다.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포스트’라는 용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드라마 이후의 혹은 탈(脫)-드라마 연극을 말한다. 결국 레만의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연극미학의 기준점이 되었던 ‘재현 중심의 드라마 연극’ 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여기서 드라마 연극이 재현하는 것은 문학적 서사이다. 그러므로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문학적 서사에서 이탈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포스트모더니즘을 극단적으로 단순화한다면 메타 내러티브에 대한 불신”이라며 ‘거대담론의 죽음’1)을 언급한 리오타르(Jean Francois Lyotard)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거대-내러티브’들의 죽음이다. 그 동안 내러티브는 은밀한 폭력성으로 보편적 인간사에 대한 환상을 정당화하고 지지했다”2)는 이글턴(Terry Eagleton)의 주장을 상기시킨다. 이는 포스트드라마 연극이 현대의 시대정신을 공유하는 미학적 사유의 결과라는 것을 입증한다. 따라서 레만의 문제제기는 완벽한 허구로서의 문학적 서사와 재현이 더 이상 연극미학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포스트모더니즘적 현실의 반영이다.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연극성을 다시 강조하는 것으로 공연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이는 공연의 탈문학화와 탈경계화를 더욱 가속했다. 레만은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특징을 종합의 후퇴(Retreat of Synthesis), 꿈의 이미지(Dream Image), 공감각(Synaesthesia), 퍼포먼스 텍스트(Performance Text)3)로 보았다. 이는 현대 공연예술이 공연 요소들 간의 서열을 제거하는 것으로 언어 중심의 논리적 구조를 버리고, 이 구조를 통한 종합적 이해 역시 배제했음을 뜻한다. 특히 퍼포먼스 텍스트는 “재현보다는 현존을, 소통보다는 공유의 경험을, 결과물보다는 과정을, 의미보다는 표명(manifestation)을, 정보보다는 에너지 넘치는 충동”4)으로의 변화를 입증한다. 다시 말하자면, 완벽하게 재현되어 의미를 전달하는 결과물로서의 작품이 아니라 관객과 배우의 공동현존을 통해 에너지를 공유하는 과정자체를 공연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관객의 지각방식의 변화로 이어졌다. 관객은 전통적 연극에서 언어를 중심으로 생산된 기표와 기의를 해석함으로서 그 의미를 수용했다면, 포스트드라마 연극에서는 몸의 공존에 근거한 에너지의 전이를 통해 감각적 자극을 지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두고 레만은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관객은 순간적으로 지각하여 과정을 상기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생산을 미루고 집중을 분산하여 감각상의 인상을 저장한다”라고 했다.5) 파비스(Patrice Pavis)에 따르면 이러한 현상은 “극적인 형식들이 더 이상 커버할 수 없게 된 현실에 관한 모든 관점들을 포착하기를 단념”6)한 것이다.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관객의 체험을 통해 비로소 공연이 완성된다. 이로 인하여 수행성(performativity)은 포스트드라마의 핵심 개념으로 대두되었고, 체험이라는 미적경험을 통해 관객을 변형(transformation)시키는 “영향미학”7)으로 귀결되었다. 그렇다면 포스트드라마 연극에 이르러 예술의 오래된 숙원인 ‘예술을 통한 현실 변화’가 마침내 실현된 것인가? 또한 정말 드라마의 시대는 끝난 것인가? 이 연구는 포스트드라마 연극 시대의 새로운 서사로서 나타난 ‘드라마’에 대한 연구이다. 새로운 서사는 공연에 ‘현실이 난입(Irruption of real)’8)하는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특성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 현상은 공연이 재현을 단념하는 대신 현실을 공연 안으로 끌어들여 스스로를 확장시킨 결과이다.

    파비스는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비약적 발전은 도시나 국가, 기업으로부터의 전격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것이기 때문에, 지원이 끊긴 후에는 포스트드라마 연극이 사라져 버리거나 보다 이해하기 쉬운 잘 만들어진 통속극으로 돌아갈 위험성이 존재한다고 경고한다.9) 또한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재현의 거부가 아닌 오히려 ‘재현이라는 현상에 대한 매혹이자 천착이며, 포스트드라마 연극이 전통적인 개념인 연극의 이중성을 배제함으로써 오히려 연극성을 축소시켰다’10)고 비판받는다. 이러한 비판의 근원은 포스트드라마 연극이 해석하기 어렵다는데 있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의미에서 극적 텍스트가 사라졌기 때문이며, 또한 공연이 더 이상 문학적 텍스트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11)이다. 이 시점에서 다시 서사의 문제가 대두된다. 하지만 재등장하는 서사는 문학적 텍스트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본 연구의 대상이 되는 이 새로운 서사는 허구적으로 구성된 행위가 아닌 사실/진실을 자신의 개인적 기억에 근거하여 재구성한 후 서술하는 행위이다.

    본 연구는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시대에 나타난 ‘편집된 실재(實在)-자기 이야기’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진실 그 자체일지라도 이야기는 여전히 흥미롭기 때문이다. 물론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서사는 연극적 환영을 만들어내는 전통적 드라마트루기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전통적인 드라마작법이 허구를 실재처럼 느끼게 하는 과정이었다면, 새로운 서사는 실재 그 자체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 형식이 ‘스촌디(Peter Szondi)의 미완의 프로젝트’12)의 새로운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스촌디는 ‘드라마의 위기’를 언급하며 극작법으로서의 드라마뿐만 아니라 무대적 실천으로서의 연기술 또한 해결책을 찾아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연구는 최근 유럽 공연예술계의 한 경향인 소위 ‘자기 이야기를 하는 공연’에 주목한다. 왜냐하면 ‘자기 이야기하기’ 공연이 새로운 서사로서 그리고 무대적 실천으로서의 연기술로 해결책이 될 수 있을지 가늠하기 위함이다.

    ‘자기 이야기하기’는 새로운 서사로서의 기능 뿐 아니라 연극성 자체에 질문을 던지는 일종의 메타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형식의 공연은 최근 한국에서도 페스티벌 봄을 통해 소개되고 있다. 2009년 리미니 프로토콜(Rimini Protokoll)의 <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Karl Marx: Das Kapital, Erster Band)>, 2011년 르 롸(Xavier Le Roy)의 <다른 상황의 산물(Product of Other Circumstances)>, 2012년 벨의 <세드리크 앙드리외(Cédric-Andrieux)>, 쉬쉬팝(She She Pop)의 <유서(testament)> 등이 공연되어 한국공연예술계에 새로운 반향을 일으켰다. 따라서 본 연구는 한국에서 공연된 작품 중 르 롸의 <다른 상황의 산물>과 제롬 벨의 <세드리크 앙드리외>를 통해 새로운 서사와 그에 따른 무대적 실천으로서 연기의 진정성에 대해 탐구해보고자 한다.

    1)김욱동, 『포스트모더니즘』, 민음사, 2008, 55쪽 참조  2)Terry Eagleton, “Awakening from Modernity”, in Times Literary Supplement, February 20, 1987, 리차드 미들턴, 브라이언 왈시, 김기현 외 역, 『포스트모던시대의 기독교 세계관』, 살림, 2007, 293쪽에서 재인용.  3)이 외에도 레만은 탈서열화(non-heirarchy), 동시성(Simultaneity), 과잉(Plethora), 육체성(physicality), 기호들의 밀도조절을 통한 유희(Play with the density of signs), 음악화(Musicalization), 시각적 드라마트루기, 따듯함과 차가움(Warmth and coldness), 구체 연극(Concrete theatre), 이벤트 등을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연극적 특색으로 열거한다.  4)Lehmann, Hans-Thies, Karen Jurs-Műnby trans. Postdramatic Theatre,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006, p. 85.  5)Ibid., p. 87.  6)파트리스 파비스, 「포스트드라마 연극에 관한 고찰들」,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미학』, 푸른사상, 2011, 296쪽.  7)김형기,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개념과 영향미학」,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미학』, 푸른사상, 2011, 21쪽  8)Lehmann, Hans-Thies, op.cit., p.99.  9)파트리스 파비스, 앞의 논문, 296쪽 참조.  10)최성희,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서사적 특징」,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미학』, 207쪽.  11)남상식, 「몸과 공간의 형상, 그 연극성에 관하여」, 『퍼포먼스 연구와 연극』, 서울: 연극과인간, 2010, 228쪽.  12)파트리스 파비스, 앞의 논문, 297쪽 참조. 파비스는 스촌디의 저서 『현대 드라마 이론(Théorie de drame moderne)』을 인용하여 스촌디가 드라마 위기에 따른 극작법의 변화와 드라마적 형식의 보존을 위한 시도, 그리고 해결책을 찾기 위한 시도들을 설명했다고 언급한다.

    2. ‘자기 이야기하기’

       2.1. 르 롸의 <다른 상황의 산물>: 과정, 그 자체를 드러내기

    2011년 “페스티벌 봄”에서 공연된 르 롸의 <다른 상황의 산물>(4. 1~2, 백성희장민호 극장)은 공연 자체에 대한 질문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르 롸는 몸의 표현과 관련되어 주목을 받는 예술가다. 그의 공연은 “전통적인 연기의 체현, 의미와 지시적 기호의 연기를 해체하는 공식적인 행사에 가깝고, 공연은 무용-사건”13)으로 묘사된다. 극중 인물이 아닌 나 자신을 연기하는 공연자를 통해 공연은 하나의 이벤트로 간주되고 현장성은 극대화 된다. <다른 상황의 산물> 역시, 같은 맥락에 놓여있다. 이 공연은 몸의 표현을 통한 감각적 자극과 더불어 나레이팅을 통한 의미작용도 함께 수행된다.

    르 롸는 <다른 상황의 산물>을 통해 자신이 ‘2시간 만에 부토 완성하기’라는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공연은 나레이팅과 공연 중간 그 가 선보이는 움직임들로 2시간 동안 진행된다. 이 형식은 공연보다는 강의에 가깝다. 마치 ‘스티브 잡스의 프레젠테이션’14)을 보는 듯하다. 르 롸의 공연이 공연의 일상화라면, 잡스의 프레젠테이션은 일상의 공연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 이다. 르 롸가 강의형식의 공연을 선보인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은 아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자전적 내용을 담은 <상황의 산물(Product of Circumstances)>(1999)를 통해 동일한 형식의 공연을 선보였다. 르 롸에 따르면 이러한 형식의 공연은 이론과 실행을 한 공간에서 진행하는 이벤트 제의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는 개인적 이야기를 통하여 과학과 예술의 관계에 대하여 언급하기로 결정한 후 그 프레젠테이션을 퍼포먼스로 변환시켰다고 말한다.15) 본래 강의의 목적은 지식의 공유이다. 때문에 무엇보다도 내용전달이 중요하다. 르 롸가 <다른 상황의 산물>에서 나레이팅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예술창작의 과정 자체를 공유’하기 위함이다.

    그는 2시간 만에 부토를 완성시키기 위해 부토의 대가인 타츠미 히지카타(Tatsumi Hijikata)와 카즈오 오노(Kazuo Ohno)의 춤을 카피한다(그림 1-3). 이 춤을 추는 과정에서 르 롸는 죽은 조상을 연상하고, 이것을 계기로 일본의 부토가 죽음과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는 부토를 완성하는데 카피는 적합하지 않다고 여긴다. 마침내 그는 자기만의 부토 공연을 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추었던 부토가 암흑부토인 것을 알게 되고 관객에게 춤을 보여준다고 하면서 무대를 암전시킨다. 그 후 다시 조명이 들어 왔을 땐 이미 춤을 끝낸 상태였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완성한 부토 보여주면서 공연을 마친다.(그림 1-4)

    이상은 <다른 상황의 산물>의 공연 내용이다. 이 공연의 서사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 진행된다. 이 공연에는 두 종류의 시간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실재의 시간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나레이팅 되는 과거의 시간이다. 먼저 실재의 시간은 관객이 실제로 체험하는 2시간을 말한다. 물론 모든 공연예술은 공연에 소요되는 실재 시간이 존재하지만, 이 공연의 실재 시간은 좀 더 특별하다. 왜냐하면 공연의 모티브가 되는 ‘2시간 만에 부토 완성하기’라는 과제에서 주어진 시간과 관객의 체험시간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공연의 결말은 내용의 완결과 상관없이 시간에 따라 좌우된다. 공연자와 관객의 실재 체험 시간은 같다. 이로 인해 관객은 공연자와의 신체적 공존을 체감하며 긴장감을 유지한다. 이때 발생하는 긴장감은 전통적인 드라마 속 잘 짜여진 극적구조를 통해 유발되는 것과는 다르다. 이 긴장감은 현실의 시간, 그 자체를 공유하는 것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이 공연에 존재하는 또 다른 시간인 과거의 시간은 기억의 순차적 회상을 통해 드러난다. 과거의 한 시점으로부터 현재까지의 시간이 직선적이기 때문에 관객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새로운 서사 이전의 포스트드라마 연극에서의 시간은 대부분 그 변화와 흐름을 체감할 수 없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서사로서의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시간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기억을 통해 자기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기억을 통해 흐른다.

    <다른 상황의 산물>은 동양적 정서와는 다른 상황속의 한 개인이 깨달아가는 부토에 대한 이야기다. 이 공연의 시작은 관객이 공연장으로 들어서면서부터이다. 물론 본격적인 공연은 본래 예정되어 있는 시각에 시작되지만 관객이 체감하는 시작은 이와 다르다. 왜냐하면 관객이 입장할 때 르 롸가 빈 무대를 돌아다니며 관객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관객은 여기서 당혹감을 느낀다. 일시적으로 공연의 주체와 객체가 전도된 느낌을 받는다. 그러다가 르 롸가 무대를 걸으며 몸을 풀거나 준비를 할 때면 다시 관객은 편안한 마음으로 무대를 본다. 노트북과 흰색 스크린만 걸려있는 무대와 일상복 차림의 공연자는 시각적으로도 그냥 실재 그 자체임을 드러내는 요소이다. 또한 외국어로 진행되는 대부분의 공연이 미리 번안되어 자막으로 그 내용을 알 수 있게 하는 반면, 르 롸의 공연은 무대에서 그의 말이 동시통역되어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게 통역사를 등장시켰다. 이는 이 공연이 현장에서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임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로 해석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이야기는 미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이 현장에서 만들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통역자는 르 롸가 움직임 시범을 보일 때는 무대 아래로 퇴장했다가 이야기가 시작 될 때 다시 등장한다. 그는 이야기하기에 이어 자신이 경험한 부토를 선보인다. 관객은 그의 공연을 이야기를 통해 이해하고 움직임을 통해 감각적으로 지각한다. 그가 부토를 완성하는데 카피는 적합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부분은 오랫동안 예술의 중심에 있었던 미메시스에 대한 회의라고 할 수 있다. 예술에서 삶을 모방하여 재현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음을 말하는 일종의 표명이다.

    이 공연은 내용적인 면에서 본다면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이야기이다. 여기에는 관객에게 전달하고자하는 주제의식이나 메시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관객의 몰입을 위한 어떠한 극적 장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자기의 이야기,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개인 서사이다. 이미 모두가 공감하는 거대서사, 보편적 서사는 사라졌다. 거대서사에서 개인서사로의 전환은 결국 ‘무엇을 기억하느냐’ 에서 ‘어떻게 기억하느냐’ 로의 중심이동이다. 무엇을 기억하느냐의 문제는 ‘무엇’에 해당되는 사실 혹은 이야기만 기억하면 되지만, 어떻게 기억하느냐의 문제는 시각, 청각, 촉각 등 몸을 통한 감각적인 기억을 동반한다. 이 감각적 기억이 ‘관객인 나’의 기억과 만나질 때 공연의 수행성은 발동된다.

    르 롸는 몸의 표현을 들뢰즈/가타리(Deleuze/Guattari)의 ‘되기’ 이론으로 설명한다.16) 여기서 말하는 ‘되기’는 어떤 대상의 재현이 아닌, 힘과 에너지를 통해 일어나는 자기 변화와 욕구의 실현이다.17) 그는 <다른 상황의 산물>에서도 ‘되기’를 언급한다. 그가 부토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그 몸의 표현을 ‘나비되기’, ‘나무되기’ 등으로 설명한다. 관객은 그 몸의 형상을 나비와 나무의 재현으로 인식하지 않고, 그 즉물적 형상으로 감각한다. 또한 관객은 그가 만들어내는 그로테스크한 표정과 근육을 뒤틀어 표현한 동작 등을 감각적으로 지각한다. 르 롸는 부토를 체화하는 과정에서 그의 죽은 조상을 봤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이후 부토가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그의 근육에 각인된 감각이 그의 특별한 기억과 연결되어 구체적인 과거의 모습을 불러냈다는 것이다. 관객 또한 이 몸의 표현을 보면서 그 뒤틀림을 ‘살-피부’로 지각하고 자신의 기억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공연자 개인의 서사는 관객 개인의 서사로 변화될 수 있다. 물론 공연자로부터 관객에로의 감각 전이는 몸의 표현을 위주로 하는 모든 공연에서는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하지만 그것이 서사와 결합될 때 더욱 구체적인 기억과 만나게 되고 이는 의미화 작용으로 이어진다.

    이 공연은 르 롸가 자신의 체화한 그 만의 부토를 추는 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이것이 공연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르 롸는 인터넷 검색, 책 등을 통해 자신만의 부토를 만든 방법을 공개하며 관객도 그 과정을 체험하게 했다. 관객은 이 체험을 통해 예술창작의 과정 또한 평범한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관객은 그가 2시간동안 부토를 창작하는 과정을 함께했다. 그 결과 2시간 후 완성된 그 만의 부토를 신뢰하게 된다. 그 만의 부토에서는 그가 처음 교본으로 삼았던 실제 부토의 모습을 찾을 수 없지만, 관객은 그 춤이 부토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만약 관객이 그가 마지막에 만들어낸 결과물만을 보았다면 ‘그 춤이 부토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정을 함께 한 관객은 스스로 더 많은 의미를 생성해낸다. 이는 자기 이야기를 하는 새로운 서사가 그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미적 경험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르 롸는 <다른 상황의 산물>을 통해 그 동안 그의 작업의 중심이었던 ‘물질로서의 몸의 표현’뿐 아니라 새로운 형식을 위한 탐색을 관객과 공유했다.

       2.2. 제롬 벨의 <세드리크 앙드리외>: 몸으로 기억하기

    <세드리크 앙드리외>(3.30~31, 아르코예술극장대극장)는 2012년 페스티벌 봄을 통해 국내에 소개되었다. 이 공연은 벨이 그 동안 해오던 무용수들의 ‘자기 이야기하기’ 작업의 일환이다. 벨은 르 롸와 함께 자신의 공연철학을 실천하는 동시대 대표적 예술가 중 하나이다. 그는 전통적인 방식의 무용 공연을 거부한다. 그의 대표작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The Show Must Go On)>(2001)는 움직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며 공연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 공연은 공연자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동작들을 반복, 전시함으로서 몸으로 자기 이야기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이후 벨은 본격적으로 자기 이야기를 하는 <베로니끄 두와노(Veronique Doisneau)>(2004), <루츠 푀르스터(Lutz Forster)>(2009), <세드리크 앙드리외> 등을 발표한다. 또한 <나와 PK>란 작품을 통해서는 자신의 기존 작품을 공연 내 삽입하여 ‘공연을 비평하는 공연’이라는 대담형식의 공연을 선보인다. 이렇게 새로운 형식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벨과 르 롸는 매우 닮아있다.

    벨은 자신의 이름을 붙인 <제롬 벨>(1995)을 공연했을 뿐만 아니라 <자비에 르 롸>(2000)도 발표했다. 생물학 전공자인 르 롸가 물질로서의 몸의 표현자체에 관심을 두었다면 무용 전공자인 벨은 움직임의 본질 및 무용수와 무용계의 거장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인다. 벨은 르 롸와 마찬가지로 기억을 회상하는 이야기와 그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움직임을 병치시킨다. 벨의 공연 속의 기억은 몸으로부터 시작된다. 왜냐하면 자기 이야기를 하는 공연자가 무용수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몸에 일상의 훈련과 공연의 기억을 저장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몸은 기억의 저장고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연은 마치 몸으로 쓰는 자서전과 같다. 하지만 벨의 공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서전을 쓸 만큼 명성을 갖고 있지 않다. 명성이 있는 거장이 이끄는 유명 무용단에서 활동한 무명 예술가들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예술 활동을 하였지만 한 번도 공연의 주인공인 적은 없었다. 벨은 예술 활동을 지속해온 일반 무용수들의 삶과 그들의 관점에서 묘사되는 거장들의 이야기를 동시에 진행한다. <세드리크 앙드리외>는 세드리크 앙드리외라는 프랑스 출신의 무용수가 자신의 예술 여정과 자신의 관점에서 커닝햄(Merce Cunningham)에 대해 이야기하는 공연이다.

    벨은 이전에도 <베로니끄 두와노>, <루츠 푀르스터>를 통해 각 각 파리 오페라 발레단과 피나 바우쉬(Pina Bausch)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켰다.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해 벨은 관객으로 하여금 무명 무용수의 삶과 거장의 삶을 등가적 위치에서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그들의 일상을 재구성한다. 이 재구성은 무용수의 기억을 바탕으로 한다. 무용수가 기억하는 거장은 그들의 작품이나 업적이 아닌 훈련과 개인적 기억이다. 이 작업에서 나타나는 주변부의 부각과 미시적 접근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이다. 또한 이 작업의 모티브인 현실의 난입은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특징이기도하다. 하지만 르 롸의 작업과 마찬가지로 벨의 작업 또한 그 이전의 포스트드라마 연극과는 다르게 시간을 인지할 수 있고 의미 해석이 가능하다.

    무대는 완전히 비어있다. 공연을 위한 아무런 장치도 없다. 공연이 시작되면 세드리크 앙드리외는 큰 가방을 메고 무대로 나온다. 손에는 생수병을 들고 있다. 그는 마치 연습실에 들어온 듯이 가방을 무대 앞쪽에 내려놓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먼저 자신이 몇 살이고 언제부터 무용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이야기한다. 그리고 무용에 큰 재능이 없었음도 고백한다. 그의 예술 여정에는 선택의 순간마다 동시대 거장들과의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그가 그들을 직접 만난적도 있고 만나지 못한 적도 있었지만, 이와 상관없이 거장들은 그의 인생에 영향을 미쳤다. 그가 처음으로 언급하는 예술가는 피나 바우쉬이다. 그는 피나바우쉬의 작품 <봄의 제전> 중 ‘선택받은 자’ 부분을 보고 피나 바우쉬 무용단에 들어가기 위해 무용을 계속하기로 마음먹는다. 이 후 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 내 한 무용단에 입학하지만 생계유지를 위해서 미술대학의 모델 일도 해야만 했다. 그는 이 부분에서 모델 일을 할 당시 주로 했던 동작들을 선보이며 공연의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든다. 그 다음 등장하는 예술가가 커닝햄이다. 그는 우연한 자리에서 선배가 ‘커닝햄의 무용수들은 완벽하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무작정 미국으로 향한다. 그리고 커닝햄 무용단에 입단한다. 그 곳에서의 생활은 훈련의 연속이었고 지루했으나, 아무런 의도나 감정 없이 움직이는 법을 배웠다.

    그는 머스 커닝햄 무용단에서 매일 반복되던 일상 훈련 시범을 보인다.(그림 2-1) 그는 무대의 한 구석에서 일상 훈련시 자신이 위치했던 곳을 설명하고 이어 커닝햄이 있었던 위치도 설명하며 움직임을 시작한다. 그의 기억은 몸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훈련동작을 선보이는 중간에 그 동작을 수행할 당시 자신이 느꼈던 감정이나 생각을 이야기한다. 이는 반복훈련을 통해 근육에 각인된 감정이다.

    그는 이후 파리로 돌아와 파리 오페라 발레단 활동을 하며 공연했던 동작들도 선보인다.(그림 2-2) 파리 오페라단에서의 그의 활동은 동시대 안무가들과의 작업이었다. 그는 브라운(Trisha Brown), 포사이드(William Forsythe)등과 공연하게 된다. 그는 각 각 자신의 입장에서 그들과의 작업에 대해 언급한다. 브라운과의 작업은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 이전보다 더 아무런 목적 없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포사이드와의 작업은 자신이 항상 2순위 또는 3순위로 밀려난 무용수였고, 항상 부상의 두려움이 있었음을 고백했다. 그는 자신이 실제 공연 속에서 담당한 안무동작들을 선보였다. 이는 그가 했던 동작들을 벨이 재구성한 것이다. 벨은 <베로니끄 두와노>에서도 두와노가 공연 때 추던 군무 동작을 솔로동작처럼 변형시킨바 있다. 이 과정에서 관객들은 낯설음을 느낌과 동시에 그 동안 주목하지 않았던 주변 무용수의 동작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언급한 공연은 벨과 함께 한<쇼는 계속 되어야 한다>였다. 그는 이 공연을 통해 움직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왜냐하면 이 공연은 전통적인 의미의 춤이 없는 무용공연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공연 중 자신이 가장 좋아한 장면을 실행한다. 그 장면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대 앞쪽에서 관객을 4분 동안 바라보는 장면이었다. 공연자는 항상 보여지는 인물일 뿐 보는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공연 중 관객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매우 흥미로웠다고 이야기한다. 이어 객석에 조명이 켜지고 그는 객석을 관찰한다. 공연자의 시선을 받은 관객은 눈을 피하거나 마주 쳐다보거나 혹은 공연자를 향해 손을 흔든다. 관객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모두 이 익숙하지 않은 자극에 대한 반응이다. 낯선 자극이 관객의 움직임도 이끌어 내는 것이다. 관객은 시선을 피하거나 마주보거나 손을 흔드는 것으로 몸의 표현을 한다. 공연자는 이러한 관객 반응에 자극받아 다시 반응한다. 이때 공연의 주체와 객체가 모호해지면서 ‘사이’의 상태가 만들어진다. 이는 공연자와 관객이 상호반응을 통해 서로의 현존을 확인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이 현존은 배우와 관객사이의 에너지 전이를 통해 확인된다. 연극학자 피셔-리히테는 이를 “감염(infection)”19) 으로 표현한다. 에너지의 전이는 이야기 보다는 몸의 표현에 의해 발생된다. 이야기를 통한 의미작용과 몸의 표현을 통한 에너지 전이는 관객의 의식작용과 감각적 자극을 통한 지각을 유도해낸다.

    공연의 후반에 앙드리외는 벨과의 우연한 만남을 소개한다. 그 우연한 만남은 이 공연이 성사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예술인생을 되돌아보니 20년간 무용을 한 이유가 어쩌면 실업에 대한 두려움과 사랑과 같은 우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며 이야기를 마친다. 관객들은 그의 이야기에 정서적으로 공감하고 또한 그의 이야기의 의미를 이해한다. 왜냐하면 공연을 관람하는 대다수의 관객들은 유명하지도, 주목받지도 못하는 일상을 살아가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이야기는 평범한 인간의 삶이라는 보편성과 예술가의 삶이라는 개별성을 동시에 충족시킨다.

    <세드리크 앙드리외>는 주변부의 시각에서 중심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주변부에 있는 그의 몸과 몸의 표현에 주목하게 한다. 벨에게 있어서 이러한 형식의 작업은 움직임에 대한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과 기억을 관객과 공유하기 위한 매우 적절한 장치이다.

    13)남상식, 앞의 논문, 235쪽.  14)‘스티브 잡스의 프리젠테이션’은 이미 그 용어가 자체가 하나의 이미지를 연상시킬 정도로 대중에게 친숙하다. 그의 프리젠테이션은 이미 하나의 퍼포먼스로 인식되고 있다. 검은 터틀넥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은 잡스는 유려한 언술과 세련된 제스처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한다. 이는 그가 전달하고자하는 내용을 넘어 대중에게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15)르 롸 인터뷰, http://youtu.be/c_PCUNAGAC0 참조  16)남상식, 앞의 논문, 237쪽.  17)김효, 「들뢰즈 가타리의 되기 이론으로 살펴 본 장 쥬네의 하녀들」, 『한국연극학』 36호, 한국연극학회, 2008, 229쪽.  18)페스티벌 봄 2012 프로그램북,  19)Erika Fischer-Lichte, translated by Saskya Iris Jain, The transformative power of performance : A new aesthetics,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008, p.36.

    3. 연기의 진정성

    <다른 상황의 산물>과 <세드리크 앙드리외>는 실제 경험한 이야기와 그에 따른 몸의 표현이 공존하는 새로운 형식의 서사이다. 이러한 공연의 새로움은 공연 안으로 ‘현실이 난입’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관객은 극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허구를 실재처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실재를 지각한다. 그렇다면 이때 공연자의 연기는 어떠한가? 일반적으로 연기에는 허구라는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자기 이야기하기’공연에서의 연기는 허구라는 범주에 포함시키기 어렵다. 하지만 반대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왜냐하면 실재 이야기이지만 이미 경험한 이야기를 선택 편집하여 퍼포먼스 텍스트로 구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관객은 ‘선택 편집된 실재’ 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형식의 공연을 통해 관객은 전통적인 연극과는 다른 진정성을 기대한다. 진정성에 대한 관객의 기대는 이미 가상 이미지와 인공적인 이야기들의 범람으로 허구가 되어버린 현실세계에 대한 반작용이다.

    ‘진정성((Authenticity, 眞正性)’은 “참되고 올바르다. 거짓이 없다”20)를 뜻하는 단어이다. 하지만 진정성의 개념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였다. 진정성은 고대 그리스부터 철학의 주제가 된 개념이다. 그 어원은 그리스어로 ‘authenteo’로 ‘온전한 힘을 소유한’이라는 뜻이다. 또한 진정성을 뜻하는 독일어 ‘eigentlichkeit’ 는 ‘자신의 일을 주관하는 태도로 개인이 자신의 영역에서 주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 데카르트 철학 이후에 진정성은 더욱 주목을 받으며 키에르케고르, 니체, 사르트르, 하이데거 등을 거쳐 현대 사회학, 심리학 등에 영향을 미쳤다.21) 현대 철학에서 진정성의 기본 전제는 ‘진정한 자아’이다. 귀논(Charles Guignon)은 진정한 자아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인간관계·직업·실천 행위들 안에 존재하는 방식에서, 실제로 자신 그대로”22)가 될 것을 요구한다. ‘실제로 자신 그대로’가 되기 위해서는 개인적 감정과 욕구에서 벗어나 멀리서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

    공연에 있어서의 ‘진정성’도 철학적 관점을 바탕으로 논할 수 있다. 진정성이 ‘실제 자신이 존재하는 방식 그대로 참된 자아를 찾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면 ‘자기 이야기하기’공연은 무대에서 공연자가 진정성을 구현하는 과정인 것이다. 이렇게 무대에서 진정성을 찾으려는 노력은 현실 사회에서의 진정성 결핍으로부터 기인한다. 과거 전통적인 연극은 허구적 유토피아를 만들어 관객들에게 이상을 제공했다면, ‘자기 이야기하기’ 는 실재 그 자체를 드러냄으로써 진정성이라는 자기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공연자의 진정성은 그 공연이 실제 경험한 이야기라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관객은 그 이야기의 정보 및 배경이 실재라는 사실만으로 진정성을 체감하기 어렵다. 그래서 관객에게 공연자의 진정성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연극적 장치가 필요하다. 그 연극적 장치를 진정성의 요소들이라 칭할 수 있다.

    공연은 이야기의 서사, 배우의 연기, 시각적 요소, 청각적 요소 등이 공감각적으로 작용하여 관객에게 수용된다. 이를 근거로 ‘자기 이야기하기’ 공연의 진정성의 요소들을 꼽는다면 1)실재 이야기, 2)현존하는 몸, 3)완벽하지 않은 연기, 4)환영이 제거된 무대 등을 들 수 있다. 첫째, 실재 이야기는 진정성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택과 편집이다. 관객은 실재 이야기라는 사실만으로 주목하지는 않는다. 관객은 그 이야기를 통해 어떤 정보를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는 본래 이야기가 의사소통 한 수단이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야기는 그 목적이 의사소통에 있기 때문에 관객들 또한 이야기를 통한 정보획득에 익숙하다. 그리고 이야기가 공연이 될 때는 드라마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왜냐하면 공연은 이야기와 더불어 행동이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재 이야기의 선택적 편집은 그것의 드라마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과정은 허구적 요소의 개입이 아니라 진정성을 감각적으로 공유하기 위함이다.

    둘째, 현존하는 몸이다. 현존하는 몸은 물질 그 자체로서 진정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물질로서의 몸에는 시간을 지나온 기억이 새겨져있기 때문이다. 르롸의 경우 몸은 물질로서의 몸이지만 ‘기억’을 통해 관객과 조우한다. 그 기억은 사회적 기억일 수도 있고, 개인적 기억일수도 있다. 관객은 그의 몸의 표현을 통해 집단 서사와 개인서사를 체험하기도 한다. 관객 앞에서 무언가가 ‘되기’위해 자신의 몸을 변형시키는 과정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것 자체가 몸의 서사이다. 그는 “자신의 몸 하나만으로 진행되는 그의 공연은 미적 사건과 몸성, 물질성이 직접 체험되는 현장으로서의 몸의 의미를 전시”23)한다. 이는 벨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몸에 각인된 기억을 설명하는 것으로 경험을 공유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설명은 몸에 대한 부연이 아니다. 몸과 나레이팅은 각 각 독자적으로 관객에게 이야기한다. 또한 벨의 작업에서 안무된 무용이 아닌 자신만의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것도 몸의 서사이다. 이 전의 관객들은 무대에서 이야기 속 주인공들을 재현한 인물들을 만났다. 그 이야기가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라도 그 실제 주인공은 무대 밖에 있고 공연자가 그 인물을 재현했다. 피셔-리히테는 드라마적 재현 역시 그 것을 가능하게 하는 몸의 물질성이 존재하고 이를 바탕으로 극중 인물이 ‘세계-내-존재(being-in-the-world)’24)가 되는 근거가 된다고 말한다.25) 하지만 ‘자기 이야기하기’ 의 공연자의 몸은 그 자체로 ‘세계-내-존재’가 된다. 훈련되지 않은 몸, 관리되지 않은 몸, 나이든 몸이 그 삶의 흔적과 ‘세계-내-존재’로서 진정성을 자아낸다. “몸은 이제 자기의 극적 표현화를 이행하고 있으며… 관객의 몸을 통한 참여”26)를 유도한다.

    연기의 비완벽성 역시 진정성을 구현하는데 중요한 요소이다. ‘자기 이야기하기’공연의 출연자들은 역할 구축을 통해 극중 인물을 완벽하게 재현할 필요가 없다. 실제로 그 사건을 경험한 실제 인물이 무대에 오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문 연기자가 아니다. 예를 들면 리미니프로토콜의 <자본론>에 등장했던 배우들은 모두 실제로 자본론과 관련된 기억을 지닌 사람들이 등장하였고, 쉬쉬팝의 <유서>에서는 연기자들의 실제 아버지들이 리어왕 역할로 등장하였다. 따라서 훈련되지 않은 이들의 무대 연기는 매끄럽지 않고 어색하다. 하지만 이런 어색함이 오히려 완벽한 허구가 아닌 연습되지 않은 실재임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특히, <유서>에 등장하는 아버지들의 연기는 함께 연기하는 전문 공연자들의 세련된 무대연기와 대비되어 실재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물론 이들의 연기는 즉흥이 아닌 짜여진 틀 안에서 이미 반복 연습된 것이지만, 관객들은 마치 준비된 것이 아닌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실재를 보는 것처럼 느낀다. 그래서 오히려 공연이 중지되는 순간-예를 들어 통역자가 다시 무대로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순간 또는 앙드리외가 춤을 춘 후 숨을 고르는 순간, 아버지가 카메라 각도를 조절하는 순간 등-에는 진정성이 극대화된다. 잘 짜여지고 계산된 완벽한 연기가 아니라 오히려 계산되지 않은 순간이 드러날 때 진정성이 포착되는 것이다.

    마지막 진정성의 요소는 환영이 제거된 무대이다. ‘자기 이야기하기’의 무대는 대부분 빈 무대이다. 빈 무대에 스크린 또는 의자 등 매우 일상적인 도구들이 놓여있다. 이 도구들은 역시 상징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공연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실용적인 것이다. 예를 들면 노트북, 생수병, 의상을 넣은 가방 등이 그것이다. 이 외에는 극적 환영을 만들거나 과거의 기억을 재현하기 위한 어떠한 장치도 없다. 이런 빈 무대는 현존하는 몸을 더욱 부각시킴과 동시에 나레이팅에 집중하게 한다. 그리고 관객에게 그 곳이 허구의 가상공간이 아니라 극장이라는 특정 장소에서 벌어지는 실재임을 확인하게 한다.

    ‘자기 이야기하기’ 공연에서의 연기는 전통적 연기방식인 모방(mimesis)을 필요치 않는다. ‘극중 나-배역’와 ‘실재의 나-공연자’가 일치하여 모방의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연기에 있어서 ‘극중 나’와 ‘실재의 나’사이의 문제는 항상 연기 방법론을 결정짓는 중요한 종자였다. 예술가들은 이 둘의 사이의 관계설정을 통해 자신만의 연기론을 설파했다. 그 둘 사이의 간극을 없애려고 했던 스타니슬라브스키, 그 둘의 사이의 중간을 의식한 메이어홀드27)와 그 둘 사이의 의도적 분리를 주장한 브레히트 등이 그 예이다. 특히 스타니슬라브스키의 경우 극중 나와 실제의 나를 일치시켜 공연의 진실성을 획득하고자 노력하였다. 스타니슬라브스키의 배우는 ‘실제의 나’가 모방을 통해 완벽한 ‘극중 나로 살기’위한 훈련을 지속했다.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연기론은 그 둘의 합일을 통해 무대 위 진실을 구현하여 완벽한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고자한 것이었다. 하지만 허구의 상황에서 ‘두 자아’의 합일은 오히려 관객에게 허구와 현실의 혼동을 초래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스타니슬라브스키가 완벽한 허구적 환영을 통해 진정성을 추구했다면 그로토프스키(Jerzy Grotowski)의 유사연극(Para-Theatre)이나 리빙 씨어터(Living Theatre)와 오픈 씨어터(Open Theatre)는 현실에 가깝게 접근함으로서 그들의 예술세계를 구축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자기 이야기하기’는 ‘극중 나’와 ‘실제 나’의 구분이 무의미한 공연이다. ‘실제 나’가 공연 안에서 이야기의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진정성이란 “완벽하지 않은 연기로부터, 반환영주의적으로 자신들의 전기를 연극 속으로 옮겨오는 행위를 통하여 실재에 대한 거리가 형성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28)고 한다. ‘자기 이야기하기’의 공연자는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 아닌 서사를 나레이팅을 한다. 재현이 아닌 객관적 서술을 택하는 것이다. 이러한 거리두기 연기술을 ‘디에게시스(diegesis)’29) 연기라고 칭할 수 한다. 이 객관적 전달자로서의 연기는 브레히트로부터 출발한다. 브레히트는 관객들이 공연을 보면서 감정이입 되는 것이 아니라 냉철한 이성을 유지하여 판단한 후 이를 현실 속에서 실천해 주길 원했다. 그러므로 브레히트가 사용한 나레이팅은 관객의 감정이입을 막는 장치였던 것이다. ‘자기 이야기하기’에서 사용되는 나레이팅은 감정이 아닌 이야기 자체를 전달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기억하기 위함이고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그 이야기가 공유할 가치가 있는 이야기일 때 가능하다. ‘자기 이야기하기’는 과거의 감정을 재현하지 않고 나레이팅하는 것으로 진정성을 부각시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20)연세 한국어 사전.  21)진정성은 특별히 18,19세기 실존철학자들의 관심을 많이 받았는데 이 주제에 접근한 대표 철학자로 주관성을 강조한 데카르트, 자신의 목표에 일치하는 행동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최대실현을 강조한 키에르케고르, 재부에서 기인하는 자기구성을 위해 외부에서 부여된 자기제한을 포기하는 것을 강조한 니체, 인간을 자신의 행동의 총합이라고 보면서 선택적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르트르, 존재함을 강조한 하이데거가 있다. 김예실․이희경, 「진정성에 대한 고찰」, 『인간이해』, 31호 2권, 서강대학교 학생생활 상담연구소, 2010, 2쪽 참조.  22)귀논, 찰스, 강혜원 역, 『진정성에 대하여』, 동문선, 2005, 24쪽.  23)남상식, 앞의 논문, 222쪽.  24)하이데거의 개념으로 현존재가 세계와 분리할 수 없는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에 대한 현존재 자신의 이해를 표현하는 단어다. 세계는 현존재의 실존의 본질적 부분이다.  25)Erika Fischer-Lichte, op.cit., p.147.  26)심재민,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수행성, 현상학적인 몸, 그리고 새로운 형이상학」,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미학』, 같은 책, 86~87쪽.  27)N = A 1 + A 2 (N은 배우, A 1은 재료의 구성자, 그리고 A 2는 재료를 일컫는다.)  28)김형기, 「일상의 퍼포먼스화-혹은 뉴 다큐멘터리 연극」,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미학』, 231쪽.  29)어떤 스토리와 그 스토리와 관련된 실제 말하기를 구분하기 위해 서사이론에서 사용하는 용어. 미메시스의 반대.

    4. 나가는 글

    포스트드라마 연극이 논의 되면서부터 관객의 공연 해석시도는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왜냐하면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연극의 고유의 기능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해석을 통한 인식은 연극성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연을 통한 새로운 지각방법의 문제가 대두되었고 이 과정에서 논리와 문학은 터부시되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관객은 여전히 공연이 끝난 후 공연을 이해하고 그 의미를 분석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스스로 의미를 해석해내지 못하면 난해한 공연이라고 느낀다. 물론 모든 공연이 대중과 쉽게 소통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공연 예술은 그 어떤 장르보다도 관객과의 소통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생산자와 수용자가 동시에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공연예술은 관객과의 소통을 위해 서사로의 귀환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이야기하기’는 그 모색 중 하나이다. 이러한 모색은 연극성의 의미를 재확인하고자하는 노력이기도 하다. 본 연구는 새로운 서사의 여러 경향 중 유럽에서 일고 있는 ‘자기 이야기하기’ 공연에 주목하여 그 서사와 의미를 탐구하였다. 이 연구는 유럽공연계에 일고 있는 부분적 현상에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연구는 아직도 여전히 관객과 소통해야한다는 미명하에 사실주의적 경향의 공연이 주를 이루고 있는 한국 연극계에 새로운 모델로 기능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로부터 시작되었다.

    새로운 서사로서의 ‘자기 이야기하기’ 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 구분이 무의미하다. 실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진정성의 미학을 추구하는 공연이다. 공연의 진정성은 공연자가 자신의 참된 자아를 찾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공연을 통해 그 과정을 관객과 함께 공유한다. 관객은 공연을 보면서 자신의 진정성에 대해 사유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자기 이야기하기’의 미덕일 것이다. ‘자기 이야기하기’는 새로운 서사로서 감각적 자극과 의미 해석이 동시에 가능하다는 점에서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또 다른 지평을 열었다. 본문에서 언급한 르 롸와 벨 이외에도 현실그 자체를 무대 위에 올려놓는 다큐형식의 공연들이 증가하고 있다. 또한 2010년 내한한 크리스 콘덱(Chris Kond다)의 <죽은 고양이의 반등(Dead Cat Bounce)>의 경우와 같이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고 현실 그 자체를 무대에 올려 공연도 있다. 관객들은 실재인 상황을 인식하면 인식할수록 더욱 흥미를 느끼게 된다. 그것은 아마도 ‘현재 이곳에서 벌어지는 실재 이야기’가 관객에게 새로운 극적체험을 제공하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에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공동체 의식과 예측 불가능한 실재로부터 야기되는 과정으로서의 공연이 스스로 새로운 체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공동의 이야기도 만들어진다. 이미 완결된 구조를 갖춘 문학작품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이기에 가능하다.

    인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 이야기에 의미를 부여하며, 이야기와 함께해 왔다. 그것이 사회학적 메타 서사든 허구의 서사든 말이다.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포스트드라마 연극 역시 그러한 흐름에 저항한 일종의 메타서사로 볼수도 있을 것이다. 2000년간 지속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사에서 맞서 탈경계화와 탈문학화라는 무기를 들고 싸운 영웅담일 수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포스트-포스트드라마라 연극이라는 단어가 심심치 않게 오르내린다. 파비스는 포스트-포스트드라마라는 용어를 언급하며 그 이후에는 포스트-포스트포스트를 써야할 될 것이라며 비판했다. 하지만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문제제기는 이미 1980년대에 제기되었다. 포스트-포스트드라마 연극이나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논의의 시작은 포스트드라마 연극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단순히 용어의 문제가 아니라 빠르게 변하는 인류의 삶과 이에 따른 예술표현의 문제이다.

    ‘자기 이야기하기’ 는 어쩌면 동시대와 가장 어울리는 연극의 형식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현재는 소위 ‘자기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현재는 미디어가 남발하는 이미지를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시대가 아니다. SNS를 통해 개인이 적극적으로 이미지를 생산해내고 그에 걸맞은 이야기를 만들어 스스로 유통하는 시대인 것이다. 현대인들은 일상에서 자기 이야기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휴대폰을 이용하여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페이스북이나 블로그에 올린다. 그리고 글을 통해 오늘 자신이 어디를 갔었고, 거기에서 어떤 일을 했으며, 무엇을 먹었고, 누구를 만났는지 상세히 이야기한다. 이 과정에서도 역시 자기만의 편집이 진행된다. 왜냐하면 누군가에게 공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익명의 사람들은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그 사람의 블로그에 방문하여 소소한 이야기를 감상한다. 그리고 그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에 댓글을 남기며 서로 소통한다. 이러한 시대연극은 어떤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가? 또 연극은 어떤 시대정신을 공유해야하는가? ‘자기 이야기하기’는 SNS를 통해 자신을 유통시키는 현대인들을 대변하는 새로운 서사다. 이미 현대 사회는 개인적 서사로 점철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 이야기하기’ 공연은 어쩌면 당연한 시대적 현상일지 모른다. 이러한 맥락에서 추후 ‘자기 이야기하기’ 공연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연구도 가능하다. 왜냐하면 예술을 통한 현실변화의 꿈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포스트드라마 연극도, 포스트-포스트드라마 연극에 대한 담론도 결국은 이와 같은 맥락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 1. 제롬 벨Jerome Bel, 2011
  • 2. 자비에 르 롸Xavier Le Roy 2011
  • 3. 귀논 찰스, 강 혜원 2005
  • 4. 미들턴 차드, 왈시 브라이언, 김 기현, 신 광은 2007
  • 5. 김 욱동 2008
  • 6. 김 예실, 이 희경 2010 [『인간이해』] Vol.31
  • 7. 김 형기
  • 8. 김 형기 2011
  • 9. 김 효 2008 [『한국연극학』]
  • 10. 남 상식 2010
  • 11. 심 재민 2011
  • 12. 최 성희 2011
  • 13. 파비스 파트리스 2011
  • 14. Fischer-Lichte Erika, Saskya Iris Jain 2008 The transformative power of performance : A new aesthetics google
  • 15. Lehmann Hans-Thies, Karen Jurs-M?nby 2006 Postdramatic Theatre google
  • [그림 1-1] <다른 상황의 산물>
    <다른 상황의 산물>
  • [그림 1-2] <다른 상황의 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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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상황의 산물>
  • [그림 2-1] <세드리크 앙드리외>
    <세드리크 앙드리외>
  • [그림 2-2] <세드리크 앙드리외>
    <세드리크 앙드리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