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승세 희곡에서 로컬리티의 문제*

The Problem of Locality in Chun Seung Se's D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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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이 연구는 한국 희곡작품 가운데 천승세의 희곡작품 <물꼬> <봇물은 터졌어라우> <滿船> 등을 예시자료로 삼아 ‘로컬리티(locality)’의 문제를 살핀 것이다. 로컬리티의 문학적 재현에서 궁극의 목적은 중심의 서사를 복원하는 데에 있지 않다. 대신 로컬리티 담론은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적 관계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그 관계를 여하히 해체할 것인가에 모아진다.

    본 연구에서 특별히 천승세의 희곡작품을 문제 삼은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이다. 먼저, 그의 작품이 지역/직업/성별 등의 키워드를 통하여 ‘중심의 주변, 혹은 주변의 중심’ 문제에 대한 논의가 가능케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그의 작품이 개발시대 도시와 농촌관계의 공간구획에서 재현된 차별과 배제, 혹은 통합의 문제와 관련하여 어떤 생산적인 논의를 가능케 하리라고 믿은 때문이다. 연구는 로컬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천착을 통해 이뤄졌다.

    이를 통해 드러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천승세 희곡작품에서 인물을 통해 드러내는 로컬/로컬리티는 수평적이며, 종종 근대 동일성 이데올로기를 위반하는 것이다. 이는 로컬/로컬리티의 배치 전략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둘째, 작가 천승세가 보여준 현실인식의 지향이 중심에 대한 주변의 열망이라기보다 새로운 로컬리티의 형상화하는 데 있다. 그의 지향은 대타항으로서의 중심의 서사를 ‘모방’하고 나아가 중심을 ‘탈환’하는 데에 있지 않다. 이를 ‘대안적 로컬리티’라 일컬을 수 있다.


    This paper is studying the Problem of ‘locality’ as examples Chun Seung Se’s drama work <The Irrigation Gate>, <Sluice Has Opened>, <A Ship Filled With Fish >in Korean Drama works. The ultimate purpose in the literary representation of locality is not restore 'the Center' narration. Instead, locality discourse raises a question constantly on dichotomous relation of 'the Center' and 'the Periphery', how does the relation breakup.

    The reason why Chun Seung Se’s drama work in this study get a problem is following two things. First, it is because his work will be able to discuss about the problem ‘the Periphery' of 'the Center', or 'the Center' of 'the Periphery' through the Keyword provinces/job/sex. Next, his work will be able to discuss about productive discuss in relation to discrimination and exclusion or the problem of combination. Study was made by upsetting for ‘human’ of local existence.

    The result revealing through this is as following. First, local/locality is horizontal in drama work of Chun Seung Se's drama work. It is often violating modern identity ideology. This provides a new eyesight at the strategy of local/locality.

    Second, awareness of a reality direction showing Chun Sung Se is not the desire of 'the Periphery' for ‘the Center’, but imagery of new locality. His direction is not the copy of 'the center narration', and ‘recapture’ the center. This can be named of ‘Alternative locality’.

  • KEYWORD

    로컬/로컬리티 , 중심/주변 , 천승세 , <만선> , <물꼬> , <봇물은 터졌어라우>

  • 1. 서론

    이 연구는 한국 희곡작품 가운데 천승세의 희곡작품1)을 예시자료로 삼아 ‘로컬리티(locality)’2)의 문제를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로컬(혹은 로컬리티)은 인간존재의 인간적/사회적 삶, 혹은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자율적인 공간 혹은 장소(장소성)를 뜻하는 개념이다. 동시에 그것은 인간 삶의 근원적이고 구체적인 공간/장소(공간성/장소성)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한편 문학은 바로 이 인간 삶의 실재를 허구적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작품 속의 주인공들이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의 의미를 드러내거나,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컬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더욱이 근대성의 표징인 국가-중앙의 ‘중심성’ ‘일원성’ ‘전체성’은 항상적으로 지역(방)을 ‘주변적’ ‘다원적’ ‘부차적’인 것으로 타자화하거나 배제하는 논리의 일단을 드러내 왔다. 이런 저간의 사정은 로컬, 혹은 로컬에 사는 사람들의 현실과 스스로의 定位에 관한 어떤 문제 의식을 촉발하는 계기가 된다.

    본 연구에서 특별히 천승세의 희곡작품을 문제 삼은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동시대 농어촌과 연관된 다른 작가/작품들과 비교하여 뚜렷한 변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대 차범석의 <산불>은 서사의 사실적 전개를 위해 로컬을 동원하고 있다. 하유상의 <꽃상여>나 <학 외다리로 서다>도 전원취미나 취향으로서의 토속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천승세의 경우는 주인공들의 건강한 삶의 자세나, 현실극복의 치열함을 보여주는 배경공간으로서의 로컬에 주목하고 있다. 둘째, 그의 희곡이 한국문학의 장 안에서 언제나 ‘로컬적’인 위치에 유리되어왔던3) 까닭에 보다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하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특히 천승세의 희곡작품에 드러나는 로컬의 문제는 그의 작품에서 지역/직업/성별 등의 키워드를 통하여 ‘중심의 주변, 혹은 주변의 중심’ 문제에 대한 논의를 가능케 하며, 동시에 개발시대 都農관계의 공간구획에서 재현된 차별과 배제, 혹은 통합의 문제와 관련하여 어떤 생산적인 논의를 가능케 하리라고 믿는다.

    연구 목적의 효과적인 수행을 위해 본 연구에서는 최근 관심이 점증하고 있는 로컬리티의 문제를 바라보는 인문학적 성과를 통해 필요한 이론과 방법론을 적극적으로 차용하여 쓰고자 한다.(2장) 물론 이 같은 관점은 희곡 연구와 관련된 기존 논의나 연구 태도에 대한 반성을 전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작품에 이러이러한 향토성(로컬리티)이 드러난다.”거나, “~향토성이 짙다.”와 같이 작품에 나타난 어떤 의미를 확정하려는 연구자의 시각은 중심의 입장에서 주변의 문제를 바라보고 의미를 구획하려는 태도이다. 때문에 보다 전향적인 작품 이해를 위해 이에 대한 반성이 전제될 필요가 있다.

    연구의 주요 문면들은 ‘중심과 주변’이라는 키워드를 통하여 이뤄진다.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주목한 것은 로컬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것이다. 현존재로서의 인간은 우선 스스로 신체를 이루어 로컬 속에 구체적으로 위치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제 스스로 움직이며 그 대상들을 바라본다. 동시에 로컬을 추상화한다. 인간에게는 구체적 실체로 존재하는 로컬을 추상화하여 인식하고, 다시 그것들을 조정하는 능력과 습관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장소와 공간’을 함께 지닌 존재이다. 예컨대 <만선>의 곰치는 ‘우리나라 사실주의 희곡에서 최초로 성격다운 성격을 부여 받은 인물’4)이라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실제로 곰치에 대해서는 연구사 초기에서부터 “현실과 이상의 갈등, 꿈의 좌절 등을 주제로 설정하였으나, 그것이 상투적인 전개에 그치지 않고 인물의 성격추구가 그러한 주제를 견실하게 떠받들고 있”5)다는 지적이 있어왔던 점을 고려하면, <만선>의 곰치가 사실주의극다운 새로운 캐릭터라는 확인 이후 많은 논자들에 의해 반복 심화되어온 이미지로서의 캐릭터 해석이다. 그러나 이런 캐릭터 해석은 ‘서구의 전통적인 비극적 극작법에 토대를 둔’6) 것을 전제로 한 것이어서 일정한 문제를 노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주인공 곰치 스스로 定位했던 공간개념을 염두에 둔 해석이 이뤄져야 <만선>이 擔持한 민중적인 삶의 현장을 생생하게 재구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주목을 요하는 지점은 로컬을 전제로 이뤄지는 경험의 ‘뒤섞임’이다. 주체가 로컬리티를 재구성하는 일은 주체의 특수한 심리와 지각을 따라 이뤄진다. 이런 차원에서 주체가 경험한 장소와 공간은 주체의 삶 속에서 뒤섞인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은 작가 천승세의 연극관 속에서 당대에 대한 현실 인식이 어떤 지향을 갖고 있으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제공할 것이다. 그러므로 로컬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천착을 통하여 로컬공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다음으로 주목을 요하는 지점은 로컬리티를 전제한 ‘사건’들이다. 문학작품 속에서 로컬에 대한 경험은 텍스트를 둘러싼 여러 주체들-예컨대, 작가‧독자‧인물 등-의 기억의 교차, 그리고 이 주체의 기억과 타자의 기억이 소통하고 교차하면서 만들어내는 사건들로 일어난다. 이 사건들은 마땅히 해석을 기다리는 하나의 기호이다. 한편, 기억은 과거의 경험을 가려 뽑아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기억으로서의 로컬리티는 경험 가운데 일부를 가려 뽑아내 현재의 시점과 장소 안에 되살리는 일이다. 이른바 ‘로컬에 대한 기억으로 기억의 로컬리티를 생성하는’일인 것이다. 장소를 심화시키고 확장시키는 일은 오직 인간만이 지닌 특징이기도 하다. 공간을 심화시키는 일은 시간에 대한 의식,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일로부터 비롯한다. 그래서 기억은 장소로부터 공간을 분리시키지 않는다. 이런 작업은 필연적으로 오늘의 관점에서 <만선>과 <물꼬><봇물은 터졌어라우> 등에 형상화된 로컬이 어떤 해석을 만나 어떤 방식으로 재현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유용한 시각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1)천승세의 희곡은 <물꼬> <봇물은 터졌어라우> <만선> 등 모두 세 편이 있다. 이들 작품은 모두 호남 지방을 무대로 한다. 앞선 두 편은 농촌을 배경으로 한 단막희극이다. <만선>은 어촌을 배경으로 주인공 ‘곰치’의 도전과 좌절을 그린 장막극이다. 여기서는 창작과 비평사에서 1997년 간행한 작품집 《黃狗의 悲鳴》에 실린 것을 기본 텍스트로 하며, 이하 작품 인용에서는 구체적인 서지사항의 제시 없이 작품명과 페이지 수만 밝히기로 한다.  2)본 논문에서는 그간 문학연구의 장에서 수직적 위계개념을 포함하는 (‘국가’의 중심성에 대비되는 개념으로서의)‘지방’이라는 개념과 함께, 그 자체가 일정한 정체성과 다양성이 발현되는 場이라는 차원에서의 수평적인 차원의 개념인 ‘지역’이라는 용어가 지닌 개념적 선입견과 학문분야별 인식 차이를 고려하여 ‘로컬(local)/로컬리티(locality)’라는 개념어를 사용한다. 이 논문에서 지역/지방이라는 용어 대신에 굳이 로컬리티라는 용어를 선택한 이유는 중앙에 의해 억압되고 배제되거나 오인된 로컬의 실재와 욕망을 주목하는 때문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근대국가 담론 안에 내장된 동일성 담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맥락을 드러내고자 하는 연구자의 의도이기도 하다. 보다 구체적인 내용에 관해서는 문재원a, 「문학담론에서 로컬리티 구성과 전략」, 『한국민족문화』32, 2008.10., 71-95쪽을 참고할 것.  3)천승세에 대한 연구는 소설이든, 희곡이든 지나치게 적다. 이는 소설과 희곡 두 분야에서 “본격적인 연구의 몫을 (서로에게) 전가하고 있었던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윤진현, 「천승세 희곡 연구」, 『한극극예술연구』11집, 2000, 239쪽.  4)김방옥, 「한국사실주의 희곡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논문, 1988, 131쪽.  5)서연호a, 「한국연극과 리얼리즘:인식과 전개」, 『한국연극』95, 1984.4., 41쪽.  6)서연호b, 「이념대립에서부터 탈사실주의적 경향까지 : 해방이후에서 1960년대의 희곡까지」, 『문학사상』, 문학사상사, 1995.5. 47쪽과, 김방옥, 앞의 논문, 136-137쪽의 각주16을 참고할 것.

    2. 로컬리티와 문학적 재현의 문제

    그동안 여러 논자들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문학 장 내에서 로컬(local)의 개념은 아직 그 개념이 명확하게 정의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지역/지방(province)라는 의미로부터 어떤 입장이나 태도라는 견해까지 실로 그 개념의 폭이 넓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은 연구자들의 편의에 따라 자신들의 논의에 유리한 특정 의미가 강조되거나 변형되어 나타나고 있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예컨대, 로컬의 개념을 특정 지역의 풍물이나 향토성과 동의어로 사용하는 기존의 전통적인 문학 연구자들의 시각이나, 종종 서발턴이나 하위주체라는 말과 동의어나 유사어 정도로 파악하는 탈식민주의 문학연구자의 경우는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이런 류의 시각은 이론 모형으로서 일정한 한계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전자의 경우 로컬리티에 관한 연구가 종종 특정지역에 대한 지역주의(localism)를 단순 반복하는 일로 전락하게 되는 문제를 노정한다. 이는 중앙/중심과의 길항작용을 통하여 드러나게 될 지역/주변에 내재된 어떤 식민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하위주체로서의 로컬에 대한 후자의 관심을 불러오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경우도 역시 자칫 처음에 연구된 지역을 벗어나 어떤 지역을 대입해도 비슷한 결과를 도출하게 되는 문제를 갖게 된다. 방법론적인 측면에선 이론모형으로서의 일정한 해석력을 담보할 수는 있겠지만, 흔히 연구대상 지역이 갖는 특수성을 방기하는 우를 범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로컬리티(locality)는 특정 로컬이 나타내는 장소성, 역사성, 권력성 등을 포함한 다양한 현상과 관계성의 총체이며, 여기에 추상적인 인간의 인식을 경계지우는 주변성, 소수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7) 그러므로 로컬리티 개념은 지리적 환경이나 그 지역 사람들의 정서적 기질, 언어 등과 같은 기본적인 요소로부터, 그 지역만의 어떤 특수한 역사적 경험이나 사회적 관계 속에 형성된 추상적 기운이나 제도까지 포함할 수 있는 포괄적인 개념인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로컬리티는 어떤 고정된 실체로서 확정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가변적인 상태라고 이해할 수 있다. 당연히 로컬리티의 본질을 향토성과 같은 차원으로 이해하거나 확정된 고정체와 같은 차원으로 수렴하려는 태도는 일정한 문제를 지닌다.

    천승세 희곡에 대해 언급한 기존 연구들의 ‘향토성’에 대한 지적8)은 전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다. 이런 시각은 상당부분 다른 연구에도 영향을 끼쳐 이후 1960년대 희곡의 중요한 경향성으로 파악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9). 문제는 이런 류의 토속성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이냐일 터인데, 이후 많은 연구자들은 대체로 사실주의라는 틀 안에서 그 의미를 해석하고 있다. 특히 <만선>에서 작가의 극작이 서구의 전통적인 비극적 방법론에 토대를 두고 이뤄졌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지적하는 입장10)은 이른바 서구문예와의 만남을 통한 ‘이식과 동화’이라는 틀 속에서 작품을 해석하려는 입장이어서 구체적인 한국적, 혹은 로칼적 공간에 정위해 있는 인물에 대한 해석을 어렵게 한다. 그래서는 비극의 주인공으로서의 성격적 측면만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후 다른 연구자에들에게서도 천승세에 대한 관점은 비슷한 시각을 읽어낼 수 있다. 특히 <만선>에서 ‘경제적인 조건과 원형적인 조건’ 에서 그 비극성을 지적하는 것11)이나, 존 M 싱그의 <바다로 가는 기사들>에 영향받은 작품 정도로 파악하는 시각12)은 로컬적 존재로서의 인물에 대한 이해를 제약하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위의 인용문은 천승세 희곡에 대해 ‘근대와 반근대’, 혹은 ‘비인간적인 소외와 인간적인 해방’이라는 대립적인 관점 속에서 해석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이는 <만선>을 주인공의 삶과 그가 만들어가는 사건들을 구체적인 장소로서의 로컬에 기초한 ‘생활인’이 만들어 가는 삶이나 사건들로 파악한 셈인데, 로컬적 존재로서의 의미를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천승세의 작품이 그리고 있는 공간은 단순히 로컬리즘을 형상화한 토속취미의 발현이 아니라, 중심과 주변이 길항작용을 통하여 드러내는 생활공간으로서의 로컬이라는 점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생활공간으로서의 로컬은 근대문명국가와 국가조직으로부터 소외된 민중적인 삶의 실감을 포착14)하려는 작가적 노력의 소산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발생된 로컬의 자율적 모습은 분명 중심에 의해 지워지고 배제된 것이다. 근대 동일성 체계에 포섭되지 않고 비켜간, 그래서 분열된 주체가 보여주는 전혀 다른 역할을 확인할 수 있다. 단일하고 균질한 흐름을 거스르는 하나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새롭게 깨닫게 된 로컬리티는 종종 탈식민, 탈근대, 탈중심 개념과 함께 중심과 주변의 길항작용 속에서 호명되는 하나의 문학적 실천, 혹은 재현으로 수용된다.

    그러나 로컬을 소외된 자들의, 혹은 기층적 물질성에 기초한 주변부의 특징적 경향성 정도로 파악하거나 규정하려는 태도에는 로컬리티의 문제를 축소하거나 왜곡시킬 우려가 상존한다.15) 기존의 중심/주변체계가 갖고 있는 표상체계에 의존하여 주변부의 문제를 환기하려는 노력이 자칫 기존 체계를 더욱 공고하게 하는 데 공모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더욱이 맥락이 배제된 채 이뤄지는 로컬리티와 주변성에 대한 논의가 그 자체로서 곧바로 진보성이니 혹은 비판적이니 하는 담론으로 확대되는 것은 로컬리티에 대한 논의가 수사학적인 비난에만 머무르게 할 것이다.

    본래 문학 장 내에서 로컬리티 담론은 지역문학담론에서 비롯되었다. 근대 시기 국민국가 틀에서 언제나 변방에 머물러 있던 지역에 대한 관심은 늘 근대성 자체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수반한 까닭이다. 이때 지역문학은 근대적 제도와 그것이 낳은 체계에 의해 이뤄진 하위체계이며, 일원적 소통체계에서 동일화 논리에 의해 강제된 타자이다. 그러기에 동시에 지역문학은 기존의 서열과 담론 질서를 허물거나 전복하려는 도전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문학적 재현전략이 갖는 위험성은 그것이 지역의 특수성, 즉 지역의 정체성을 밝히는 작업이라는 데 있다. 무슨 얘긴고 하니, 지역문학의 주된 관심사 가운데 하나인 지역적 정체성의 강조가 불러올 필연적 결과로서 ‘중심과 주변의 관계 밝히기’라는 담론 전략은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주변의 중심성을 강화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므로 종국에는 반드시 새로운 ‘중심성’을 낳게 될 것이다.

    하지만 로컬리티의 문학적 재현에서 궁극의 목적은 중심의 서사를 복원하는 데에 있을 수 없다. 로컬리티의 담론은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적 관계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그 관계를 여하히 해체할 것인가에 모아져야 한다.16) 그러므로 로컬리티는 확정되고 고정된 어떤 실체가 아니라 다양한 동류의 관계망 속에서 새롭게 만들어지거나 부정될 수 있는 역동적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7)이상봉, 「인문학의 새로운 지평으로서 ‘로컬리티 인문학의 전망’」,『로컬리티 인문학』창간호,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09, 51쪽.  8)유민영a, 『한국현대희곡사』, 기린원, 1988, 533쪽을 참고할 것.  9)유민영b, 「희곡문학의 다양성」, 김윤식 외, 『한국현대문학사』,현대문학사, 1994, 412쪽을 참고할 것.  10)서연호b, 앞의 논문. 48쪽과 김방옥, 앞의 논문, 136-137쪽의 각주16을 참고할 것.  11)심상교, 「1950~60년대 희곡의 비극적 특성 연구」, 고려대박사논문, 1997, ______, 「<만선>의 비극적 특성에 대한 연구」, 『부산교대 교육대학원 논문집』, 199.12.  12)김남석, 「어촌 소재 희곡의 상동성 연구」, 『고대 호원논집』8, 2000.12.  13)윤진현, 앞의 논문, 257쪽.  14)염무웅, 「도시-산업화시대의 문학」, 『민중시대의 문학』, 창작과비평사, 1979, 334쪽.  15)문재원b, 「로컬리티 연구가 근대담론을 넘어야 하는 이유」, 『로컬리티의 인문학』28, 2012.8. 6-7쪽을 참고할 것.  16)위의 논문, 같은 쪽.

    3. 중심과 주변의 관계를 통한 로컬리티의 창출

    중심과 주변이라는 용어는 탈식민주의 이론의 개념과 방법론을 빌린 개념이다. 이때 중심과 주변은 이분법적으로 나눠진 위계질서 내에 위치한다. 대개 로컬17)은 이 중심과 주변이라는 이분법적 위계구도 내에서 상대적으로 비주류 집단을 대표하는 의미로 이해되곤 한다. 이 경우 로컬이라는 개념에는 탈근대, 탈중심, 탈식민 등의 개념이 뒤따르게 된다. 그러니까 로컬이라는 개념 자체가 중심의 절대 권력화에 따라 야기된 지배와 종속이라는 구도를 뒤집기 위한 대항 담론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는 의미이다. 근대 시기 공간 재편의 속성이 획일화, 파편화, 위계화에 있다18)는 점을 감안하면 주변화는 근대의 중요한 속성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탈식민주의적인 시각이 이론으로서 일정한 설득력을 담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로컬이 중심과 수직적인 위계 관계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심/중앙과의 길항작용을 통하여 주변부가 갖게 된 식민성을 중심으로 하위주체로서의 로컬을 분석하고자 하는 시도는 로컬리티에 대한 언급을 단순히 지역성을 재구하는 수준에 머무르게 하거나 지역주의를 재확인하려는 시도로 전락시킬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중심-주변의 구도에 대한 단순한 비판 차원에서는 그 중심과 주변의 관계가 보여주는 공고한 배치구도 자체에 아무런 변화도 이끌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천승세의 작품세계는 애초부터 어민, 농민, 도시 빈민의 인생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충만해 있다.19) 대표작으로 꼽히는 <낙월도>, <신궁>은 어민의 삶을, 등단작 <점례와 소>, <화당리 솟례>, <봇물> 등은 농민의 삶을, 만해 문학상 수상작인 <황구의 비명>과 <포대령> 등은 도시 변두리의 삶을 다루고 있다. 다만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토속성을 소재적 차원에서만 지적하는 ‘로컬리즘 차원의 시각’의 시각20)을 액면 그대로 수용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보다는 오히려 천승세의 작품이 자주 배경으로 삼고 있는 농어촌이라는 토속성을 근대 문명과 국가조직으로부터 소외된 민중적 삶의 실감을 포착21)하려는 의도에서 선택된 것이라고 지적하는 편이 더 타당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은 대개 탈식민주의적 관점을 수용하는 것일 텐데, ‘곤궁한 현실에서도 힘을 잃지 않고 솟아오르는 민중’22)의 이미지로 이해하는 것은 그 한 단면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작품 해석의 문면에서 로컬이 지닌 어떤 주변성만으로 그 윤리적 자질을 판단하는 것은 상당한 위험성을 안고 있다. 논증에서 주의할 점은 로컬리티 자체에 근대성과 대립하는 온갖 가치들을 무의식적으로 부과하려는 태도나, 로컬리티와 주변성의 가치들이 곧바로 진보적인 가치로 보거나 비판적인 가치와 동일한 것이라고 보려는 태도들이다.23) 로컬의 윤리적 자질은 장소성에 기반 주변성만으로 확보될 수 없다. 그것은 로컬이 제시하는 공동체적 이상이 기존 중심에의 모방이나 열망을 떠나, 새로운 중심의 형상을 제시할 때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로컬이 내재화한 주변성과 주체의 비판적인 인식 이후에 전략적으로 마련된 주변성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제 구체적으로 서사 속에 존재하는 인물과 사건을 통하여 천승세 작품의 로컬, 로컬리티를 살펴보기로 하자.

    <물꼬>, <봇물은 터졌어라우>는 지난 60년대 농촌에서 흔하고 심각한 재해였던 가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당자의 입장에선 심각한 문제의 하나인 물꼬 싸움을 주요 사건으로 다루고 있다. 이들 작품은 겉으론 심각한 자연재해라는 현실을 다루고 있지만, 그 과정이나 해결책은 가벼운 희극적 터치로 이뤄져 있다. 사건과 갈등의 해소도 역시 처녀와 총각, 홀어미와 홀아비의 건강한 결합으로 마무리된다. 여기서 주목을 요하는 지점은 서사 속의 주인공들의 삶의 질곡을 이루는 현실의 단면이 이들이 처해 있는 경제적 형편이나 사회적 지위와는 무관한 것으로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덕보나 봉삼, 꼼실네와 돈술의 삶은 모두 처참한 지경의 가난과, 그 때문에 겪을 수밖에 없는 신산스러움 자체이다. 사태가 이러함에도 주인공들은 그들의 사회경제적 열위때문에 위축되거나,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다.

    먼저 <물꼬>의 덕보는 딸 달례를 봉삼의 아들 철운과 혼인시키고 싶어 한다. 그러나 논 두 마지기를 가진 덕보보다 형편이 더 나아 논 여섯 마지기를 가진 봉삼은 혼사에 무심한 듯 반응이 없다. 덕보는 봉삼이 자식들의 혼사에 무심한 것은 자신의 딸 달례가 홀아비의 딸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단정한다. 나아가 봉삼을 친구 사이에 의리도 없는 자라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내면의 갈등이 증폭된다. 여기까지가 극의 前史에 해당한다. 이 갈등이 가뭄을 계기로 빚어진 물꼬싸움으로 비화한 것이다. 혼사문제의 해결을 위해 덕보가 봉삼을 압박하는 수단은 물꼬다. 덕보의 논은 봉삼의 논과 붙어있고, 덕보가 물꼬를 막으면 봉삼의 논은 그 피해를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갈등을 해소할 해법은 “물꼬쌈에는 덕보가 이겨사제! … 덕보는 급하고 봉삼이는 안 급항께…”라는 성범의 대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봇물은…>의 젊은 과부 꼼실네는 돈술과 혼인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방죽의 봇뚝에 잇닿은 논임자 돈술은 꼼실네를 좋아하면서도 당장 눈앞의 ‘배실배실 말라버린 벼잎’에만 관심을 둘 뿐 자신의 마음을 몰라줄 뿐이다. 꼼실네는 “꼼꼼 맥혀 말이 들어갈 틈도 없”이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돈술이 야속하고, 돈술은 “무정한 놈의 예편네야 니가 믄 웬수냐?”며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꼼실네가 돈술을 압박하는 수단은 봇뚝을 막고 물을 내려보내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거기에 물고기를 넣어 돈술의 약을 더욱 올리고 있다. 이들의 갈등 역시 그 해소는 “말년에 둘이서 의지하고 살면 을매나 좋아?”라고 충고하는 정노인의 대사에서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이상에서 이들 작품이 보여주는 서사의 겉면은 혼사장애담으로 볼 수 있는 측면이 상존한다. 오영진의 <맹진사 댁 경사>류의 작품이 보여주는 민중들의 건강한 웃음을 읽어낼 수 있는 여지도 충분하다. 한편, 이들 작품이 드러내는 갈등과 그 해소방식을 근거로 풍농기원굿에서처럼 여성(혹은 여성적 가치)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 또한 일면 타당한 해석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를 곧바로 ‘남성우월주의의 편견을 넘어서 존재하는 민중적 가치’24)라고 치켜세우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남성 VS 여성’이라는 도식은 근대 담론에서 중요한 부면을 이루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작품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남해안에 있는 어느 농촌’, ‘전라남도에 있는 어느 농촌’이라는 장소성을 다시 읽어내면 기존의 읽기와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남도를 무대로 하는 이들 작품의 변방의식은 공간구성뿐만 아니라 인물 형상화, 서사전개 등에서 일정한 변별성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무대공간의 자율성에 힘입어 이들 작품에 그려진 시공간으로서의 논, 방죽, 여름, 가을, 가뭄과 같은 기제들과 이들을 바라보는 인물들의 반응방식은 이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형성된 중심 공간의 논리와는 ‘다른’ 로컬리티를 확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 공간은 아직은 미결정적인 상태, 중심과 거리를 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 이는 인물들이 문제사태를 바라보는 관점과 그 해소를 위해 필요한 것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상의 인용문은 근대 동일성 논리에 오염된 화자, 그렇지 않은 자의 인식과 대응을 그대로 보여준다. 인용문의 측량, 땅값, 강제 등의 단어들에서 근대 동일성 논리의 일단을 읽어내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이는 중심/주변의 관계에서 중심의 논리가 주변을 어떤 방식으로 억압하고 배제하는지 보여주는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삶의 구체적인 질을 量化하고 동질화하는 경제논리로는 로컬과 로컬리티의 실체를 온전히 드러낼 수 없다.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을 통하여 자신의 로컬/로컬리티 담론을 드러내려는 작가의 의도는 <물꼬>의 성범의 대사에서 잘 드러난다. 둘의 싸움을 중재하려는 성범은 “아니 놈들은 물꼬물도 서로 쌈 안 하고 잘 노나 묵는디 이것들은 대체 믄 지랄들이여?”(260쪽)라며 철운과 달래를 타박한다. 그의 대사는 작가의 의도와 관련하여 중요한 해석의 씨앗을 제공한다. 그의 주장은 남들처럼 물꼬의 물을 싸우지 않고 서로 나눠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로컬을 경위하여 이뤄지는 탈근대 담론의 맥아를 발견할 수 있다. 이들 작품이 보여주는 장소로서의 남도, 농촌, 논, 가뭄, 물꼬, 봇뚝 따위의 장소성은 중심/주변의 담론 장에서 변별적인 특징을 갖는 하나의 인문적 지표가 될 수 있다.25) 로컬이 새로운 단위로서 가능성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근대 동일성 논리 안에 포섭되어 있던 로컬과 로컬리티에 대한 반성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물고> <봇물은…>의 주인공들은 새로운 로컬/로컬리티를 보여주되, 새로운 중심을 향한 열망에서 벗어난, 전혀 다른 차원의 열망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열망은 수직적인 구도에서 형성된 근대담론에서 다시 수평적 계기를 만들어 가는 로컬/로컬리티에 대한 열망이다. 이 수평적 계기에 의해 드러나는 로컬리티의 핵심적인 자질들은 바로 그들이 위치한 로컬이 지닌 ‘건강한’ 생산성에 있다. 그것은 근대담론에서 이뤄지는 억압과 수탈을 전제로 한 생산과 구별되는 지점으로서의 건강성이다. 남도의 들녘에서 이뤄내는 두레공동체의 전형은 많이(넓게) 소유한 자를 중심으로 수직적인 위계구도에서 이뤄지는 노동공동체가 아니다. 본래 노동집약적인 手稻농업의 생산성은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나타날 건강성에 기초한다. 그것은 자연의 원리를 잘 살려 상호협동하고 배려하는 양보의 노동을 통해 이뤄낼 수 있는 생산성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파괴하면서 더 많이 생산해야 한다는 그 자체에 의미하기보다 상생적인 생산을 여하히 이뤄갈 것인가에 모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십평생을 독(獨)으로 살아온 덕보(혹은, 꼼실네)가 자신이 가진 유일한 딸(혹은 꼼실네 본인)의 혼사를 성사시키기 위해 물꼬를 틀어막은 데서 비롯된 물꼬 싸움이 해결되는 계기는 바로 이런 사태의 깨달음이 먼저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씨도 밭도 시, 싫은 것이 아니여! 이놈아 엿 마지기 이삭이 다, 다 타도 호, 혼사여? 가, 가슬에 잔치 할라믄 으, 으찌께 하잔 말이여! 내, 내가 왜 달례가 싫어? 니놈 논은 기껏 두 마지기여! 나락이 다 타도 가슬에 혼사 치러?”(264쪽)라는 봉삼의 외침은 작가의식의 밑자리에 위치한 로컬/로컬리티가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주인공 덕보와 봉삼, 꼼실네와 돈술 등을 통하여 전략적으로 마련된 이 로컬/로컬리티는 기존의 중심/주변의 문제에서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물꼬>, <봇물은 터졌어라우>에서 드러난 이런 류의 로컬/로컬리티를 일컬어 중심/주변의 담론을 넘어선 ‘대안적 로컬리티’라 이름할 수 있을 것이다.

    로컬/로컬리티에 대한 이런 대안적 인식의 일단은 <만선>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만선>은 표면적으로 어부의 삶을 제약하는 바다와 금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 곰치는 배타는 일 이외에는 다른 생존 수단을 가지지 못한 어민이다. 그럼에도 곰치는 자신의 생업인 어업에 대한 높은 긍지와 자존감, 집착을 보여준다. 삶에 대한 원초적인 에너지로 넘치는 곰치의 태도는 만선에 대한 ‘기대와 희열’, 숨가쁘게 전개되는 反轉 등을 통해 철저하게 파국에 이르는 장면 속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표면적으로 곰치는 만선에 대한 욕심 때문에 무리하게 조업에 나섰다가 破船한다. 이제 배도 고기도 모두 잃은 곰치는 셋째 아들 도삼과 딸의 약혼자인 연철마저 그 바다에 잃는다. 딸 슬슬이는 자살하고, 이런 사태에 절망한 아내는 끝내 실성한다. 구포댁은 업고 있던 막내 아들마저 바다에 내줄 수 없다며 그를 살려 뭍으로 보내기 위해 빈 배에 태워 떠나보낸다. 곰치는 하나 남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바다로 뛰쳐나가고, 그 위로 곰치 일가를 파국으로 몰아넣었던 바람이 기세 좋게 무대에 몰아친다. <만선>을 압도하고 있는 것은 가난과 횡포에 가까운 자연적 시련이다. 하지만 그것은 특정 지역의 사회 역사적 특수성을 반영한 것이 아니다.26) 곰치의 행동에 동력을 부여하는 장치도 가난이라는 삶의 현실이나 이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는 가난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지도, 자신과 가족을 착취하는 선주에 대해 분노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중심과 주변의 관계를 수직적인 관점에서만 본다면, 혹은 중심을 열망하는 주변의 욕망 정도로만 로컬을 바라본다면, 이런 곰치의 지향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천승세의 작품세계가 수월하게 분석되지 않는다27)는 지적은 그의 작품을 보는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는 요구를 정당화한다.

    많은 경우 로컬의 열망을 ‘脫로컬’, 즉 중심에의 지향에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중심/주변이라는 상호관계의 장 속에서 누구든 스스로 주변부에 머물러 있기를 자처하는 경우는 없겠기 때문이다. 아무리 중심/주변의 관계에서 중심의 일방적이며 폭력적인 배치구도를 비판하고, 주변을 옹호한다고 해도 그것은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태도의 일단은 근대 동일성 논리에 기댄 것으로 결국은 ‘같은’ 것이다. 그러면 중심/주변의 권력구도에서 드러나는 로컬의 열세를 그대로 중심지향적인 태도나 열망으로부터 결백한 것으로 보는 것은 무방할까? 나아가 그들의 그런 결백을 윤리적 우위로 판단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인가? 일부의 시각에서는 종종 이 질문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물어야 할 것은 로컬의 현재태가 아니고, 탈로컬의 열망을 실현해 가는 과정이다. 탈로컬을 욕망하는 로컬은, 스스로의 욕망을 실현해 가는 과정에서 논의할 만한 가치를 지닌 로컬과 그렇지 못한 로컬로 변별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주변에 의해 이뤄지는 탈로컬의 열망이 현재 대타항으로 존재하는 중심을 ‘부정’하는 방향에서 이뤄지는가, 아니면 ‘모방’하는 방향에서 이뤄지는가에 따라 그 가치를 가늠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중심에의 모방은 중심의 탈환을 전제한 脫로컬에의 열망이다. 그러나 이는 근대 동일성 논리에 포섭되어가는 과정일 뿐 참된 의미의 脫로컬에 대한 상상으로 보기 어렵다. 로컬이 지닌 차이를 ‘결여’로 인식하는 태도와, 그것과는 전혀 다른 자질로 보려는 태도는 그만큼 그 간격이 넓을 것이다. <만선>에서 확인할 수 있는 주변부 인물군 가운데 전자를 보여주는 사례는 구포댁, 도삼, 슬슬이 등의 가족은 물론이고, 성삼이나 연철 등에게서 공통적으로 확인가능하다. 후자의 사례로는 (물론 불완전한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곰치를 상정할 수 있다. 다음 장면은 이런 인식적 차이를 보여주는 한 사례가 될 수 있다.

    도삼의 탈로컬에의 열망은 바로 중심에의 ‘모방’이다. 그는 만선을 금전적 성취로 보고, 이런 성취들이 쌓여 가난과 재해의 두려움으로부터 구해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가 보여주는 중심에의 열망은 세 가지이다. “괜히 남의 중선배 부림시러 기죽고 살 필요 없이 집이고 믓이고 싹 팔아서 똘망배라도 내 배 띄우고” 살자는 것과, “기왕이먼 많이 잡어서 돈도 벌고 고생도 않고 살어가는”(309쪽) 것, 그러기 위해서는 외국 사람들처럼 배에 “기계(레이더)도 놓고 비행기도 싣고”(310쪽)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내 배’라야 한다는 논리나 ‘기계와 비행기’도 동원되는 대형화, 대규모화 된 조업은 중심에 다가가기 위한 수단이다. 이 수단을 통해 그가 꿈꾸는 세상은, 즉 탈로컬의 열망은 돈을 많이 벌어서 ‘기죽지 않고’ ‘고생도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도삼뿐만 구포댁, 슬슬이, 연철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주인공 곰치를 제외한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꿈꾸는 탈로컬의 열망이 기실 근대 동일성 논리에 포섭된 채 한 치의 다름도 없는 ‘중심의 모방’에 대한 꿈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꿈은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이들에 의해 드러나는 하위 주체로서 로컬의 논리는 절대권력인 중심을 부정하려 들면서도 중심의 행태를 유사 모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통하여 경험하고 쌓은 기억들을 근거로 탈로컬의 열망을 이뤄가기 위해서 스스로 중심의 위치로 자신을 이동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통로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중심과의 대결구도에서 ‘중심의 주변인’으로서의 이상을 내면화하고 있으며, 이를 행동의 근거로 삼고 있다. 그들의 이런 모습은 이른바 이중구속(double-bind)의 상태에서 근대 동일성 논리에 함몰되어 가는 주변인의 전형인 셈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주변인 스스로 어떤 깨우침을 통해 개별자로서의 삶의 능동성을 발휘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곰치는 다르다. 그 역시 이들과 같이 처절한 가난과 폭력적인 자연을 경험하고 그에 대한 기억을 쌓아왔지만, 그가 꿈꾸는 열망(만선)의 내용과 동기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본래 중심이라는 말 그 자체는 중립적이다. 중심이니 주변이니 하는 표현들은 모두 밀도와 집중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표상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본래 중립적인 말이 권력장 안에서 재편되기 위해서는 거기에 일정한 문화적인 상징의 조작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기존의 중심에서 만들어지는 문화적인 상징의 조작을 거부하려면 새로운 방식과 기준의 상징조작이 개입되어야 한다. 로컬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감추는 존재로서의 중심을 상정하는 경우, 흔히 저지르기 쉬운 오류는 ‘중심=악·가해자’, ‘로컬=선·피해자’라는 등식이다. 그러나 로컬리티의 본질은 로컬내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로컬 안팎의 시선들이 길항하면서 빚어내는 담론투쟁의 결과물이다. 그런 점에서 로컬리티는 일방적인 소통구조에서 동일화의 논리에 의해 강제된 타자로 남겨지는 그 무엇이 아니다. 향토성이라 명명되는 그 무엇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脫로컬의 열망을 상상하고 실현해 가는 일련의 과정에서 얻어진다. 그러므로 脫로컬의 열망을 실현시켜가는 과정에서 무엇을 중심으로 삼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직은 여전히 가능성의 상태로만 남겨져 있다. 진정한 의미의 로컬리티는 바로 이 가능성을 현실화시켜 가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여기서 로컬이 그 선택과 실천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의 여부는 脫로컬의 윤리성과 가치를 스스로 입증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곰치는 바로 그런 脫로컬의 열망을 실현시켜가는 과정에서 만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적 로칼리티’의 擔持者이다.

    우선 곰치가 만선을 통하여 도달하고 싶어 하는 로컬/로컬리티는 자신을 옭죄는 중심의 논리를 넘어서는 것이다. 곰치의 이런 열망을 계급과 같이 하나의 본질적이며 근본적인 문제들, 예컨대 경제담론이나 계급담론을 통하여 설명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가 열망하는 로컬/로컬리티는 계급이나 부와 같은 특권화되고 단일화된 개념을 통하여 설명할 수 없다. 그가 열망하는 로컬/로컬리티는 오히려 모순이니 대립이니 갈등이니 하는 기제들로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그의 열망은 중심에 의해 가해지는 가족의 ‘죽음’으로도, 혹은 빚을 빌미로 가해지는 온갖 ‘위협’으로도 좌절되지 않는다. 그의 열망은 그 어떤 외면적 가치에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빚을 이용해 자신의 욕심을 더욱 채우고, 심지어 빚에 시달리는 곰치네 형편을 이용해 딸 슬슬이를 후실로 들이겠다는 음심을 품은 범쇠에 대해서도 그저 “내가 이기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열망이 승리하는 것은 타자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그들을 옭죄고 억압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열망은 대타항으로서의 중심을 모방하고, 그리하여 그것을 탈환하려는, 그리하여 스스로가 그 중심에 정위하여 군림하거나 새로운 억압자로 나서겠다는 열망이 아니기 때문이다. 온 마을이 “한결같이 기쁨에 찬 얼굴들로”(282쪽) 노래할 만선의 기쁨은 바로 大同 세상에 대한 열망이지 그 자체가 새로운 억압을 꿈꾸는 탈로컬의 열망일 수 없다.

    그러므로 곰치가 꿈꾸는 로컬/로컬리티는 또한 진정한 ‘자유(인)’에 대한 열망이기도 하다. 그것은 오직 어부로서의 자신에 대한 최고의 긍지와 자부심을 지켜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삼대가 모두 바다에 희생되었지만, 어부로서의 삶은 자신의 유일한 존재이유가 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자신의 이런 열망을 ‘구속 없이’ 펼쳐가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는 그 어떤 경제적 동기도 중심에의 열망도 없다. 그가 똘망배 하나라도 갖고자 하는 것 역시도 자유로운 어부로서의 존재의미를 실현해 가기 위한 것이다. 그가 그저 고기 잘 잡는 뱃사람으로서의 자기정체성 실현하는 것이 자기 의지에 의해 조업에 나설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라고 본다면, 그의 열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그의 태도는 확실히 근대 동일성 담론을 위반하는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근대를 넘어 ‘또 다른’ 근대를 열망하고 있는 셈이다. 때문에 앞서 <물꼬> <봇물은…>에서와 마찬가지로 <滿船>에서 드러난 이런 류의 로컬/로컬리티 역시 중심/주변의 담론을 넘어선 ‘대안적 로컬리티’라 이름할 수 있을 것이다.

    17)본래 장소는 틀에 박힌 일상의 안정된 삶을 보장하는 ‘자리, 가정, 일터’로서 그 자체로서 명징한 ‘장소성’을 전제로 한 개념이다. 그러므로 각각의 장소들은 해를 거듭한다고 해도 의미가 변하지 않을 것이며, 가시적인 경계가 다소 모호하더라도 각각의 분별된 장소로서 이해될 것이다. 한편, 공간이란 외적 장소의 경험 속에서 추상화의 과정을 거쳐 이뤄진 영혼의 반응 공간, 혹은 기억의 공간이나, 정치‧사회‧역사의 장을 의미한다. 인간은 집과 같은 장소를 특칭하여 말할 때에도 거의 동시에 공간의 의미를 담아 말하기도 한다. 본 논문에서는 ‘로컬’을 앞서 언급한 장소와 공간을 함께 아우르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다만 문맥 속에서 특정의 의미 영역을 강조하여 드러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면 그에 맞는 용어를 구별하여 쓰고자 한다.  18)앙리 르페브르, 양영란 역, 『공간의 생산』, 에코리브르, 2011, 31쪽.  19)윤진현, 앞의 논문, 242쪽을 참고할 것.  20)유민영b, 앞의 논문, 412쪽.  21)염무웅, 앞의 책, 334쪽.  22)윤진현, 앞의 논문, 247쪽. 논자는 이 부분에서 천승세 문학에서 발견되는 민중의 낙천성이 경제적 질곡을 감춘 채 즉자적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비판하고 있기도 하다.  23)김용규, 「로컬리티의 문화정치학과 비판적 로컬리티 연구」, 『로컬리티, 인문학의 새로운 지평』, 혜안, 2009, 74-92쪽을 참고할 것.  24)윤진현, 앞의 논문, 244쪽.  25)애드워드 렐프, 김덕현 외 역, 『장소와 장소상실』, 논형, 2005, 102-105쪽을 참고할 것.  26)김방옥, 앞의 논문, 131쪽.  27)최원식, 「민중예술의 길」, 《이차도 福順傳》, 한겨레, 1989, 381쪽.

    4. 결론

    이상의 논의는 한국 희곡작품 가운데 천승세의 희곡작품 <물꼬> <봇물은 터졌어라우> <滿船> 등을 예시자료로 삼아 ‘로컬리티(locality)’의 문제를 살핀 것이다. 로컬리티의 문학적 재현에서 궁극의 목적은 ‘중심’의 서사를 복원하는 데에 있지 않다. 대신 로컬리티 담론은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적 관계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그 관계를 여하히 해체할 것인가에 모아진다. 방법론적 차원에서 제기되었던 로컬/로컬리티에 대한 관심은 기존의 담론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나아가 그것은 또한 지역문학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로컬/로컬리티에 대한 이해가 어떤 정형화된 표준을 찾아 그것을 정론으로 삼으려는 태도나 시도에 머물러 있는 경우일 것이다. 이런 시도는 로컬/로컬리티에 대한 관심을 한낱 중심의 한 모퉁이 정도로 전락시키는 작업이 될 우려를 갖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로컬/로컬리티 연구는 지역이니 장소니 하는 것들의 실증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 단순히 장소성, 지역성을 넘어서게 하는 참신한 시각과 도전적인 의식, 새로운 논리의 개발이 필요하다. 예컨대, <만선>의 곰치를 “거대하게 솟았다가 쓰러지는 비극적 인간상”28)이라고 해석하는 관점만으로는 작품이 성취한 다른 차원의 문학적 성취를 놓쳐버리게 할 수도 있다. 주체과 공간의 자율성에 힘입어 작품들이 보여주는 남도, 농촌(혹은 어촌), 가뭄, 물꼬(싸움), 선주, 거센바람 등의 로컬/로컬리티가 그것들의 대타항을 보다 원거리에 두고 아직은 미결정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이들 작품을 바라보는 기존의 시각에 반성의 계기를 만들어가는 기회로 활용되어야 한다.

    본 연구에서 특별히 천승세의 희곡작품을 문제 삼은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였다. 먼저, 그의 작품이 지역/직업/성별 등의 키워드를 통하여 ‘중심의 주변, 혹은 주변의 중심’ 문제에 대한 논의가 가능케 할 것이기 때문이고, 다음으로 그의 작품이 개발시대 도시와 농촌관계의 공간구획에서 재현된 차별과 배제, 혹은 통합의 문제와 관련하여 어떤 생산적인 논의를 가능케 하리라고 믿은 때문이다. 한편 연구의 중심 줄기는 로컬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천착을 통해 이뤄졌다. 나아가 그 인간이 펼쳐가는 사건과 경험의 뒤섞임에도 주목하였다.

    이를 통해 드러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천승세 희곡작품에서 인물을 통해 드러내는 로컬/로컬리티는 수직성과 동일화를 강제하는 근대담론을 위반하는 것이다. 이들 작품에서 주인공들에 의해 구현되는 로컬/로컬리티는 수평적이며, 종종 동일성 이데올로기를 위반하는 것이다. 이는 ‘중심’ 공간의 논리와 다른 로컬리티이다. 이는 주변이지만 중심의 논리에 균열을 가져오거나, 중심을 ‘오염’29)시킴으로써 로컬/로컬리티의 배치 전략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둘째, 작가 천승세가 보여준 현실인식의 지향이 중심에 대한 주변의 열망이라기보다 새로운 대안적 로컬리티의 형상화에 있다는 점이다. 그가 인식하고 있던 당대적인 현실인식의 기반을 로컬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단순히 이는 그가 중심의 주변으로서의 현실을 그저 사실주의적인 관점에서 포착하고 있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의 지향이 대타항으로서의 중심의 서사를 ‘모방’하고 나아가 중심을 ‘탈환’하는 데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의 지향은 이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의 ‘대안적’ 로컬/로컬리티였다. 물론 이는 <물꼬> <봇물은…> <滿船>의 주인공들에게서처럼 중심의 논리에 균열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오염시킴으로써, 중심 ‘넘어’ 새로운 로컬/로컬리티를 생산해내는 실천과정을 통하여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28)김방옥, 앞의 논문, 134쪽.  29)젠더 담론에서 언급되는 ‘비체’(adjection)라는 용어는 본래 더러운 점액질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몸의 정화를 위해 버려지는 것으로 어떤 이데올로기적인 의미가 강하다. 여기서 비체가 지닌 ‘오염성’은 역으로 중심(몸)을 더럽힘으로써 중심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수 있겠다. 엘리자베스 그로츠, 임옥희 역, 『뫼비우스의 띠로서의 몸』, 여이연, 1995, pp.357-397을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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