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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버나드 쇼 희극의 권력과 코나투스의 충돌과 반전구조* Structure of Reversal & Confliction between Conatus and Authority in Bernard Shaw's Comedies
  • 비영리 CC BY-NC
ABSTRACT
버나드 쇼 희극의 권력과 코나투스의 충돌과 반전구조*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the unique dramatic techniques and a few philosophical themes in some of G. Bernard Shaw's comedies of ideas. Shaw made much efforts to deliver some practical epistemic answers regarding how to live and how to see in the world to his spectators at the theatre based on such major ideas as Bergson's creative evolutionary energy, Nietzsche's Intuition, and Spinoza's conatus, which is a strong desire to survive or overcome the hardships with other people in the unpredictable society. This thesis analyzes the structure of reversal and subversion between conatus and power derived from capital, religion, and politics, which have been mainly and consistently described in Shaw's six famous comedies; Mrs Warren's Profession, Pygmalion, Candida, Major Barbara, Heartbreak House, and Saint Joan.

Shaw denounced cynically and satirically such serious and dark social problems as poverty, prostitution, marriage, war, female, religion, language, manners, and hierarchy which most major characters confronted in their immoral and hypocritical communities around the Victorian period. He tried to make his spectators find out the proper feasible keys to solve the heavy issues through forming the stage of discussion and argument in the theatre. Most men of power have had the trouble with defending their social authority castle, habitus from the ordinary or low level class. Pierre Bourdieu's habitus is a social habit which has been required by education, family background, economic competence, income, sociality, marriage, personal relations, housing, and jobs.

While Shaw's upper class characters tried to protect their own habitus formed by capital and religious privileges, low level people gave themselves trouble about attaining the high habitus by education, marriage, and deceit. Although Shaw's characters failed to get higher positions or habitus by several means, it may be essential and urgent for them to realize the following spiritual recognitions like intuition and insight of Spinoza, Bergson, and Nietzsche. Shaw warned the danger of conatus' loss while characters went through the blockage in the society, as well as urged them to set up their independent habitus based on conatus, unconstrained emotion, joy, and freedom. Vivie, Candida, Eugene, Shotovor, Ellie, Barbara, and Saint Joan can be Shaw's heros and heroines who are supposed to resist and destruct the social structure which has threatened their existences and conatus, energy for survival.

KEYWORD
권력 , 코나투스 , 아비투스 , 직관 , 반전 , 기쁨 , 자본 , 종교 , 결혼 , 공동체 , 공통성
  • 1. 서론

    버나드 쇼(G. Bernard Shaw)는 다윈(C . Darwin) · 스펜스(H. Spencer) · 라마르크(Lamarck) · 드브리스(H. De Vries)의 유기체의 생물학적 진화론, 데카르트(R. Descartes)와 라이프니츠(Leibniz)의 이성중심의 심신이원론, 콩트(A. Comte)의 실증주의, 스피노자(B. Spinoza)와 베르그송(H. Bergson) 그리고 니체(F. Nietzsche)의 생에의 의지와 직관을 바탕으로 예속과 속박에서의 자유를 강조한 내재적 진화론, 마르크스(K. Marx)의 『자본론』(The Capital)에서 변용한 속류 마르크스주의를 집약하여 배우와 관객의 벽을 허물면서 삶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 사상희극을 선보인다. 그는 실험성이 농후한 50여개의 사회풍자희극에서 거의 생략하지 않았던 유한자와 무한자의 끈질긴 갈등구조를 자본가와 노동자, 남성과 여성, 현실주의자와 이상주의자, 체제순응주의자와 개혁주의자의 대립의 무대공간을 통해 빅토리아시대의 개인과 사회의 위선과 무기력함의 심각성을 지적한다. 버나드 쇼는 『자본론』의 애독자답게 사회경제의 점진적 상승변화를 유도하기 위해서 경제적 토대의 균형성, 즉 부의 균등한 배분이 우선 해결되어야 할 선행과제로 인식한다. “사상의 축적 없이는 마음이 움직일 수 없고 극도 존재할 수 없다”1)는 그의 사상극은 부와 교육의 부재와 결핍에서 노동자와 여성을 위시한 하위 계층의 열악한 삶의 원인과 문제들을 탐색한다. 공동체 상층부인 사회통제시스템의 주체가 하위 구성원을 대상으로 전략적 조작을 통해 파생시킨 자본의 불이익은 주거· 문화· 예술· 교육· 사상· 생산력과 연계된 개인의 실제적 생활 영역들에서 부정적 환경—기쁨 종류의 감정보다 슬픔 종류의 정서—을 초래하고, 그 결과 공동체 전체의 성장마비로 이어진다.

    쇼는 정치· 종교· 사회· 경제적 측면에서 권력과 자본을 독점하는 상류계급의 아비투스(habitus)2)와 빈곤과 무지를 반복하는 저소득층의 아비투스를 적절히 대비시키는 표층구조를 구애와 결혼의 메인플롯과 함께 이중적 구조를 즐겨 사용한다. 그는 무대의 외적 흐름인 남녀의 애인구하기라는 삼각관계를 반전과 논쟁의 중심축에 넣고 유머· 풍자· 아이러니· 재치· 역설· 산문체· 말장난· 회귀구조· 대비· 배치의 극적 기법들을 가미하여 관객의 관심을 의도적으로 토론공간으로 끌어드린다. 흥밋거리에 불과한 남녀연애의 상부표층공간은 스피노자의 코나투스(conatus)3)와 니체와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 에너지를 근간으로 하여 계층· 자본· 결혼· 종교·사상에서의 대립과 충돌을 전개시킨다. 사랑놀이의 표층공간은 하부의 현란한 언어게임의 담론구조와 균형적 평형관계를 유지한다. 토론과 논쟁중심의 말놀이, 꿈의 연극과 같은 연출기법, 기호적 원형인물 등은 인물과 관객의 거리두기와 낯설기 기법의 역할을 하면서 무대 공간의 그물망과 연계된 모든 이에게 비평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시간적 간극에도 불구하고 쇼의 메타연극기교와 다층적 구조는 브레히트(B. Brecht) 서사극의 소외효과, 밀러(A. Miller)의 사회주의극, 스트린드베리히(A. Strindberg)와 라이스(E. Rice)의 표현주의극, 셰퍼드(S. Shepard)와 마멧(D. Mamet)의 포스트모더니즘극의 특성들을 연상시킬 만큼 극적 기법에 있어 실험적이고 개혁적이다.

    쇼는 스피노자와 니체와 함께 개인의 신성회복을 내세우는 디오니소스적인 극 분위기를 주도하면서 자유와 창조의지를 위한 직관력 회복을 꿈꾸고, 동시에 데카르트와 함께 이성적 성찰과 무한한 의심의 지속성과 반복으로 삶에 대한 의심 없는 긍정의 무대공간을 창조하고자 한다. 쇼는 사회· 경제· 정치· 종교에서의 물리적 구속력을 집행하는 조직권력을 경계하면서, 개인의 정체되고 고형화된 엔트로피 제로의 내적 에너지를 재활성화 시키는데 극의 목적성을 두고 있다. 그는 자기보존을 위한 무한한 욕망인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와 베르그송의 내적 생명력을 차용하여 인물들의 의지박약을 재충전화 시키고자 한다. 인물들의 긍정적 상승변화를 통한 인간과 사회의 통시적 진화를 극작의 중요한 동기로 간주하고 있는 쇼는 니체의 현존재로서의 인간극복이라는 초인의 이미지를 논쟁의 테이블에 올려놓고 관객과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예외 없이 각자에게 내재된 사회문화적 습성이자 언어와 인식능력의 한계점인 아비투스의 변화가능성을 탐색케 한다. 상위계층의 집단적 아비투스를 욕망하는 하층 계층의 인물들은 주로 공장노동자, 광부, 청소부, 선원, 군인, 창부, 강도, 장사꾼, 가정부, 집사, 비서, 생활보호대상자의 역할을 지속적으로 반복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의 비가시적 권위코드에 의해 자유가 억압되고 의지가 예속되어 지적· 영적능력의 상승이 불가능한 기호적 이미지들이다. 당시 독일의 표현주의극에서도 쉽게 목격할 수 있는 지적 능력부족을 드러내는 개성없는 원형적 인물들은 매너에 있어서도 품위와 예의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언어적 측면에서도 재치와 현란함이 보이지만 대체로 짧은 말대꾸와 농담과 거짓말 등 말장난 정도만 가능한 기계적 표현력이란 지적 한계를 노출한다. 언어의 전략적 담론기능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하위인물들은 부와 교육기회의 확보로 고급문화의 아비투스 장벽을 허물고 신분상승과 상위계층의 외면적 아비투스의 고급가면을 착용하려는 욕망을 붙들고 있지만 대체로 실패한다. 그들은 언어와 매너의 수정으로 일시적 수직상승을 체화하지만, 직관과 공감을 통해서만 가능한 내재적 근본변화의 결과인 자기중심적인 본원적 아비투스를 구축할 가능성이 희박하다. 쇼는 모호한 생명력과 막연한 계급투쟁의 물리적 추진력을 지닌 추상적 인물보다 직관과 성찰을 통해 자아와 타자의 현존재와 만물의 현재흐름을 바르게 직시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을 생명력을 지닌 초인이라고 여기고 있다. 하지만 현재 국내에서 자주 언급되는 쇼의 초인사상, 즉 교육과 출산을 통한 여성의 초인탄생이라는 비논리적 페미니즘접근은 쇼의 사상적 토대를 도식화시킬 뿐만 아니라 탈구조주의적 페미니즘영역에서도 지적받을 만한 부정적 경향이다.

    인물들에 대한 단선적인 접근은 생명력과 초인사상, 남녀투쟁의 이상적 신여성과 여성의 정체성이란 페미니즘, 사회주의 계급투쟁, 언어와 매너 문제 등 고정화된 연구틀을 극복할 수 없다. 쇼의 사상극은 무대공간의 논쟁테이블에 세상 사람들 모두를 불러 놓고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이며 동시에 어떻게 살 것인지에 관한 근원적 질문에 대한 본원적 답을 생각해보라고 권하는 철학공간이다. 그는 세상을 보는 방법인 인식론과 살아가는 방법인 존재론을 여러 인물들을 통해 제시하면서 실제 삶의 현장에서 배우와 관객의 역할을 번갈아 반복하는 우리와 더불어 생에 집중할 수 있는 묘답을 모색한다. 쇼는 관객으로 하여금 무대 인물들의 즐겁지 않는 불쾌한 일련의 사실들을 직면케 하여 경제와 종교의 역할마비를 실감케 하면서 현재의 비극적이거나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에 대한 대항력을 배양시키고자 한다. 무대 위의 다수 인물들은 아비투스의 긍정적 변화를 보여주지 못하지만 같은 공간의 관객은 작가가 전달하고 싶은 사상의 실체를 공감하고 주체적 아비투스에 대한 능동적 의지를 상승시킬 수 있다. “예술가의 일은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평소 생각한 쇼는 자신의 극의 의미와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 여러 차례 읽어야 한다고 충고한다.”4) 작가가 즐기는 표층구조인 사랑놀이마당에만 집중하는 관객의 단편적 시각은 본원적인 내적 변화를 위한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와 니체와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의 열정을 놓치기 쉽다.

    종교영웅과 대주교, 주교, 신부, 목사, 왕과 영주의 정치 권력자, 장군, 기업가, 교수, 전문인, 선장, 시인, 금융인, 바람둥이, 호색가, 투자가, 양조업자, 무기제조업자, 유산상속자로 연기하는 고급문화의 아비투스 그룹의 구성원들은 실체적 진위조차 구별할 수 없는 원형적 인물들로서 항상 자기과시적이고 공격적 역할을 탈피하지 못한다. 그들은 종교적 열정과 도덕적 기준을 지니고 있지만 가식적이며, 자신들이 속한 세계의 권위와 이익을 보존하기 위한 공존의 전략으로서 하층계급과 여성들을 길들이기 위해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거나 잉여자본을 분배할 따름이다. 변화를 지향하는 이상주의와 지양하는 현실주의 성향으로 양분된 여성인물들—바바라 소령(Barbara), 앤(Ann), 바이올렛(Violet), 일라이자(Eliza), 히긴스 부인(Mrs Higgins), 캔디다(Candida), 조안(Joan), 워렌 부인 (Mrs Warren), 비비(Vivie), 앨리(Ellie), 그레이스(Grace), 아키스(Acis)—역시 자본과 종교의 영향력을 비중있게 다루면서, 자신이나 타자인 남성 혹은 공동체와 국가에 대한 상승변화를 시도하거나 아니면 역으로 개혁을 거부하고 현실 상황에 안주하려는 모습들이다. 직관과 창조 생명력 및 아나투스를 바탕으로 자유와 기쁨의 감정들을 지속시키려는 소수의 변화주체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남녀 인물들은 인내와 희생과 규율을 요구하는 현실의 사회·정치·경제 권력에 예속당하거나 공동체와 현상황에 대한 공감력 부족으로 변화를 두려워한다. 상위계층은 자유와 긍정의 아비투스로의 반전 필연성을 자각조차 못하고, 하층민과 여성들은 권력층의 조직적 방어전략과 자기 본연의 지적·물적·인적·문화적 한계라는 이중적 억압 장치로 인하여 상승전환의지를 단념한다.

    쇼는 진지함과 쾌활한 기지, 화려한 수사학과 산문체를 사용하여 대립적 인물들의 지적 갈등과 비평적 논쟁을 통해 타자의 아비투스의 성벽을 무너뜨리도록 유도한다. 쇼는 자기실체의 보존과 극복욕망인 코나투스와 자기 현존재의 문화적 양태인 아비투스의 연계적 충돌과 대항을 긴장의 반전구조로 지속 시킴으로써 관객의 흥미를 무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그는 독설과 익살스러운 풍자, 심각함과 가벼움, 즐거움과 실망감, 악덕과 미덕, 교훈과 농담, 상식과 비상식, 창조와 모방, 진실과 가식, 노출과 가면, 사상과 껍데기, 심층과 표층, 무거움과 가벼움, 예상과 충격, 종교와 경제, 이성과 감성, 신뢰와 배신, 지속과 단절, 자유와 속박, 신과 인간, 봉사와 착취의 충돌구조를 즐겨 반복한다. 인물들과의 갈등공간에서 사랑놀이의 희극적 상황을 냉소적으로 전환시키고, 비극적 상황을 희극적으로 전복시키는 반전기법은 배우와 관객 모두를 그 시대의 자유와 기본권의 억압과 상실감이란 비관주의의 나락으로 빠져들지 못하게 하는 독특한 메타기법이다.

    본 소고는 <워렌부인의 직업>(Mrs Warren's Profession), <피그말리언>(Pygmalion), <캔디다>(Candida), <바바라 소령>(Major Barbara), <상심의 집>(Heartbreak House), <성녀 조안>(Saint Joan)의 애인구하기의 복잡한 삼각관계· 결혼과 자본의 협력· 종교와 자본의 대립· 정치와 종교의 공모 구조를 중심으로 인물들의 코나투스와 아비투스의 연계에 의한 양태의 다양성과 상승변화의 가능성, 그리고 극복과 상실의 다층적 무대공간을 엮어가는 충돌과 반전구조의 효율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1)E. J. West, ed. Shaw on Theatre. New York: Hill and Wang, 1958, p.210.  2)Pierre Bourdieu, The Rules of Art: Genesis and Structure of the Literary Field, trans. Susan Emanuel, Cambridge: Polity Press, 1996.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개인의 문화소비에 대한 취향이나 행동은 개개인들에게 특유한 것이 아니라 교육배경이나 사회적 위치에 따라 계급적으로 결정되며 대물림되고 재생산된다고 주장한다. 특정 개인의 사회계층 수직상승이동을 저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사회화된 주체성인 아비투스이다. 아비투스는 개인과 사회를 연결하는 개인의 사회구조적 고유코드로서 특정한 사회적 환경에 대한 습관적 사고, 인지, 판단, 행동의 체계를 말한다. 그에 의하면 공동체 속의 개인은 장(champ)의 관계망 속에서 특정한 장에 진입여부를 결정하는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행위자로 간주되지만 현실적으로는 주어진 특정한 사회구조적 조건하에서만 가능하다. 그는 사회적 맥락의 별개의 장들인 경제적 자본(부·주택), 문화적 자본(지식·소비패턴), 상징적 자본(직위), 인적 자본(인적그물망)의 소유를 통해 개인이 차지하는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며,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는 장들은 자신들의 우월적 영역을 유지하기위해 반드시 방어적이고 보수적인 보존전략을(conservation strategy)을 채택한다고 본다. 파트리스 보네위츠, 문경자 옮김, 『부르디외 사회학 입문』, 동문선, 1997, 88-106쪽, 아비투스의 사회학적 경향성 참조. 홍성민, 『취향의 정치학』: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읽기와 쓰기, 현암사, 2012, 38-44쪽, 아비투스의 구별짓기 경향성 참조. 이재원, 「조지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에 나타난 언어와 매너의 문제」, 중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2, 계급투쟁과 종속화 참조  3)라틴어 동사 conart(노력하다)의 명사형 코나투스(conatus)는 개인이 살고자하는 근원적 욕구 내지는 의지이고, 자아를 보존·발전·완성하려는 욕망이며 생명력이다. 자유감성과 직관 및 현재를 예찬하는 동양의 무위자연주의자인 스피노자는 코나투스의 완전한 표출을 행복으로 보았으며, 따라서 조직과 국가로부터의 통치전략적 억압과 두려움 없이 각자가 자신의 고유한 코나투스를 보장받고 발휘하는 정치체제가 최선의 국가이다. 각 사물은 자신의 존재능력에 따라 자신의 존재 속에 계속 머무르려고 노력한다고 본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의하면 인간은 독립할 수 있는 완벽한 신성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므로 자신의 코나투스로는 스스로를 보존할 수 없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인간은 타자와의 연결을 통해서만 생존의 가능성을 상승시킬 수 있으며 특히 개인의 삶에 있어서 종교·정치·사유·선택 등의 자유가 보장되는 인적관계만이 기쁨의 생존이 확장되고 역으로는 슬픔과 구속의 감성과 비극이 자리한다고 본다. 코나투스는 자유와 기쁨의 윤리학의 근간으로서 타자와의 긍정적 만남과 접촉이 기본이다. 그러나 자유와 기쁨이 부재한 관계는 슬픔과 비극이 확장되는 삶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그는 『에티카』의 마지막에서 코나투스가 확장되는 자유에 이르는 길의 무게감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해둔다. “이것으로써 나는 정서에 관한 정신의 능력과 정신의 자유에 대해서 제시하려고 했던 모든 것을 종결지었다. 그리고 현자는 오직 쾌락에 따라 동요되는 무지한 자보다 훌륭하다는 것이 명백하다. 왜냐하면 무지한 자는 외적 원인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동요되어 결코 영혼의 참다운 만족을 갖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과 신과 사물을 거의 의식하지 않고 살며, 작용을 받는 것을 멈추자마자 존재하는 것도 멈추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현자는 현재로서 고찰되는 한에서 영혼이 거의 흔들이지 않고 자신과 신과 사물을 어떤 영원한 필연성에 의해서 인정하며, 존재하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고 언제나 영혼의 참다운 만족을 소유한다. 이제 여기에 이르는 것으로서 내가 제시한 길은 매우 험준하다. 만일 행복이 눈앞에 있다면 그리고 큰 노력 없이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서 등한시되는 일이 도대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무릇 고귀한 것은 드물고 어렵도다.” 스피노자, 강영계 옮김, 『에티카』, 서광사, 2014, 366-367쪽. 스티븐 내들러, 이혁주 옮김, 『에티카를 읽는다』, 그린비, 2013, 324-333쪽 코나투스 참조. 성회경, 『스피노자와 붓다』: 해탈의 텍스트: 『에티카』, 파주: 한국학술정보(주), 2010, 불교철학과의 연관성 참조. 질 들뢰즈, 박기순 옮김, 『스피노자의 철학』, 민음사, 2013, 니체와 후기 구조주의와의 관계 참조.  4)G. B. Shaw, Platform and Pulpit, New York: Hill and Wang, 1961, p. 44.

    2. 결혼과 자본의 공모에 의한 아비투스와 코나투스의 충돌과 대항:<워렌부인의 직업>, <피그말리언>, <캔디다>

    쇼의 희극은 가벼운 분위기에서 심각하지 않은 문제들을 다루고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며 즐거움과 웃음을 주는 전통적 범주를 거부하고, 여러 가지 관념들에 대한 진지한 논쟁을 유도하고, 객석공간과 연기공간의 구분의 벽을 허물고 배우와 관객의 적극적 참여를 가능케 하는 익살과 독설의 담론공간을 마련한다. 웃음을 주류로 하여 인간과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경쾌하고 흥미 있게 표출하는 일반적인 사회· 상황· 풍습· 성격· 블랙희극은 인간생활의 모순과 사회의 불합리성을 해학적· 풍자적· 노골적으로 전개하면서, 교화를 통한 조직과 구성원의 적극적 개선을 목적으로 한다. 전통희극의 본류적 개념과는 달리 사고와 개념의 논쟁적 충돌에서 이성과 감성의 균형과 조화를 창조해내는 쇼의 사상희극은 일상적으로 매일같이 벌어지는 서사시적이고 일상적 중요한 사건들을 골라 극의 소재로 사용한다. 쇼는 “연애, 결혼, 상속, 교육, 종교, 자본, 매너, 언어능력, 계급, 도덕, 사상, 전쟁, 빈곤, 사법제도, 아일랜드 문제, 민주주의, 사회주의, 도시 지주제 등을 순서 없이 나열한 다음”5) 유머와 재치 넘치는 말놀이로 이어지는 인물들의 즉흥적 논쟁에 흥미가 없는 듯한 관객들로 하여금 점차 관심을 갖도록 한다. 쇼의 배치기법은 전략적으로 다층적 무대구조를 형성하여 관객에게 자기성찰의 기회를 적절히 제공함으로써 생존을 위한 내적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한다. 사실 쇼의 극작 동기는 사회개혁과 초인 및 신여성탄생이란 가시적 목표에 두지 않고, 자기 보존을 위한 무한한 욕망의 에너지인 코나투스를 통해 사회와 종교권력에 의한 심리적 예속과 감성의 두려움에서 벗어난 자유인의 부활에 있다. 감정의 해방과 직관력을 회복한 인물과 관객만이 현존의 흐름과 만물의 존재함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아울러 사회의 구속력에 억눌린 종속체가 아닌 주체적 아비투스를 구축할 수 있다.

    쇼는 폭넓은 지식과 사상을 주입시키기 위한 미끼로 각 작품마다 눈에 띄는 표층구조인 남녀인물간의 복잡한 삼각관계의 애인구하기그물망을 항상 전략적으로 짜놓는다. <워렌부인의 직업>은 모녀의 사랑놀이가 반전과 아이러니를 통해 추잡한 인간성과 도덕의 가면성을 폭로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모녀의 아비투스간의 충돌극은 크로프츠(Crofts) · 비비(Vivie) · 프랭크(Frank) · 프레드(Praed)의 다중적 관계와 가드너목사· 워렌부인· 크로프츠의 관계가 중첩된 다층적 상부 구조를 형성한다. <캔디다>의 연애놀이 역시 남편 모렐목사(Morell) · 캔디다· 시인 유진(Eugene)의 표층관계를 중심으로, 여비서 프로스핀(Proserpine) · 부목사 렉시(Lexy) · 장인 버게스(Burgess)의 관계와 프로스핀· 모렐· 캔디다의 관계가 중첩되어 진행되고 있다. 스피노자와 니체 및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력과 직관의 필연성, 아나투스와 아비투스의 연계성을 논쟁과 표현주의극의 꿈의 무대로 전개한 <인간과 초인>은 옥타비우스· 앤· 태너의 삼각관계를 메인 축으로하여 핵터(Hector) · 바이올렛의 결혼과 돈 주안(Don Juan) · 아나(Ana)의 관계를 엮어서 사랑놀이를 펼치고 있다. 단선적 연애유희무대를 선보이는 <바바라 소령>은 구세군 소령인 자선사업 봉사자인 바바라와 쿠신즈교수(Cusins)와의 정략결혼을 통해 종교기능의 허약함과 사회시스템의 모순을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다. <피그말리언>은 일라이자를 상대로 프레디(Freddy) · 히긴스교수(Higgins) · 피커링대령(Pickering)이 직접 사랑을 고백하거나, 혹은 사회적 위치와 체면상 좋아하는 마음과 질투심을 은근히 드러내거나 경쟁자와 관객에게만 알아차림을 당하는 연애놀이극이다. <상심의 집>은 앨리를 두고 음흉하고 부적절한 남녀 관계가 형성되는데, 이 그물에 핵터· 망간(Mangan) · 쇼토버선장(Shotovor)이 연결되어있고, 허셔바이부인(Hushabye)을 상대로 핵터와 마찌니목사(Mazzini)의 관계설정이 가능하고, 어터우드부인(Utterword)을 시동생 랜덜(Randall)과 형부인 핵터가 동시에 접근하는 추잡한 연애망이 형성된다. 특히 연애공간의 사랑놀이 주체들은 지적 자각과 내재적 실체에 대한 직관력 회복을 보이지 못하고 극의 진행과 함께 놀이대상만을 수시로 교체하는 예측하기 힘든 부정적 반전만을 반복한다. 구애와 변신의 놀이에 열중하는 기호적 인물들은 인격신의 대행자들인 경제와 종교의 숨은 권력자들이 구축한 사회의 중심공동체인 난공불락의 고급 아비투스의 성벽을 지키고 향유하려는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자본과 종교 및 정치의 상층부에 머무는 고급문화의 특혜자들은 “이웃과의 능동적 교류통한 공통성의 공유로 실체적인 이익과 자유 및 기쁨의 증대”6)를 거부한다. 권력계급들은 타집단과의 공통개념의 연계성확보가 불가능함으로써 스스로 파놓은 이성과 감성의 예속의 동굴 속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조작된 죄와 벌의 미신에 의한 무의식적 공포와 두려움으로 창조주인 신에 대하여 무한한 신뢰와 존경을 보여주는 인물들은 같은 공동체의 함께 살아가는 귀한 생명체인 인간에게는 믿음을 갖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폐쇄적 존재상황을 재현한다. 그들은 하늘을 향해서가 아니라 지상의 생활공간에서 “통시적 공통성의 회복 수단인 신체를 통한 타인과의 능동적 사랑에 실패함으로써 ‘접촉(contact)’의 기쁨과 공감, 참된 인식과 이성을 복원하지 못한다.”7) 작가는 짝짓기놀이를 통해 일반적 통념인 연애의 즐거움과 헤어짐의 슬픔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배우들의 역설과 폭로 및 논쟁의 말놀이와 다름없는, 몸동작과 감동이 결여된 무대 연기에서 관객으로 하여금 개인과 사회의 질적 상승변화의 가능성을 예측하거나 확인케 한다.

    전통적 귀족집안이든지, 경제적으로 자수성가한 새로운 자본권력의 부르주아이든지, 경제능력이 부족하지만 신학교육으로 권력이동에 성공한 종교지도자이든지, 야만성과 폭력성이 발생시킨 전쟁의 영웅이든지, 공동체의 문화정책을 주도하는 지적세력인 교수이든지 이러한 상위계급인물들은 부와 지식을 토대로 한 우월적 아비투스를 즐기면서 자기들끼리만 만나고 교제하고 대화한다. 자본이 사회적· 경제적 욕망의 현실화와 관련된 가시적 결과물이라면, 인물들의 연애와 결혼은 개인적· 성적 욕망의 사회화로 볼 수 있다. 어느 시대이든 자본과 결혼의 두 욕망이 항상 밀접하게 결합하여 형상화되고 있지만, 특히 빅토리아시대에서는 모든 계층의 구성원들의 권력이동과 신분상승의 기회가 두줄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인물들의 결혼과 연애가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얻고 유지할 수 있기에 경제력이 약한 전통귀족과 하층계급간의 고급 아비투스의 방어와 빼앗음의 전쟁 또한 불가피하다. 쇼의 남녀인물들의 사랑과 결혼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고 사회경제적 이익을 만족시키려는 타자와의 전략적 타협의 산물이다. 반낭만적인 사랑과 결혼의 극화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경제적 토대에 기초한 계급에 좌우된다는 쇼의 마르크스주의 사회경제학의 시각으로서, 분명 빅토리아시대의 자본주의적 현실의 모순에 대한 각성의 장을 마련하려는 극적 의도임에 틀림없다.

    검열관의 반대로 1893년에 발표한 <워렌부인의 직업>은 1902년에 공연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조직적 매춘을 유쾌하지 않는 관념극의 기법으로 당연한 경제적 활동수단으로 극화했기 때문이다. 대학교육을 받는 비비는 어머니 워렌부인이 매춘부였고 현재 유럽 전역에 매춘굴의 일부를 소유하고 있다는 극적 반전의 사실을 알고 어머니의 사회경제영역에서 벗어나, 회계사무소를 열고 자본의 정당한 획득을 통해 자아보존을 시도한다. 그녀는 생존의 욕망인 코나투스를 통해 자유로운 감성을 창조해내고 어머니와 주변 타자들을 공감할 수 있는 인물로 상승변화를 드러낸다. 비비는 책임감과 직업이 없고 무능한 감상주의자인 프랭크와 낭만적 연애를 하지만 결혼 가능성이 없고, 진지함이 결여된 유희적 관계만을 유지한다. 크로프츠는 25살 연상이면서 자본과 사회적 권력을 내세워 비비에게 전 재산의 유산상속을 조건으로 결혼을 제안한다. 그는 워렌부인과 매춘사업의 파트너로서 35%의 수익금을 챙기면서 빈민층의 여성들과 소녀들을 착취하는 사업가이다. 그는 준남작이자 신사로서 고상한 이미지를 연출하지만 내적으로 도덕적 가치가 전혀 없는 돈의 화신으로서, 50대의 워렌부인과의 섹스파트너이면서 동시에 그녀의 딸인 비비와 결혼하려는 욕망을 거리낌없이 드러내는 호색가이다.

    크로프츠는 워렌부인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저항하는 비비를 쉽게 단념하지 않고 막대한 자본력으로 집요하게 유혹한다. 그는 극의 진행상황에 따라 비비의 어머니가 매춘부이며 아버지가 가드너목사이고 프랭크와 이복동생관계라는 여러 비밀들을 차례로 폭로하면서 반전에 재반전을 거듭시킨다.(168) 비비는 프랭크와의 관계가 근친상간일 가능성을 염려하던 중 그의 결혼목적이 사랑이 아니라 그녀의 경제능력에 있다는 사실을 프랭크의 고백으로 알게 된다.(196) 프랭크는 비비를 좋아하면서 동시에 그녀의 어머니에게도 틈이 날 때마다 탐욕스럽게 추근거릴 만큼 크로프츠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도덕적 결함을 보인다.(72) 사실 워렌부인의 연애놀이 파트너들은 20대 초반의 프랭크와 50대 크로프츠 외에도 예측 불허의 반전을 거듭하면서 가드너목사와 프레디를 포함하여 4명 이상으로 늘어난다. 그들은 가면을 착용한 이점을 살려 종교지도자로 선량한 사업가로 이상적 신사로 착한 예비사위로 위선의 아비투스성에 머물면서 수치심도 없이 경쟁하듯 버나드 쇼의 쇼(Showing)를 하고 있다. 워렌부인은 과거 홀어머니 밑에서 배다른 2명의 자매와 친동생 리지(Lizzie)와 같이 5명이 가난에 고통받으면서 납공장과 식료품 작업장 등 열악한 환경에서 일했다. 그녀는 선술집에서 숙박을 제공받는 조건으로 일주일에 4실링에 하루 14시간 음료를 나르고 잔을 씻는 일에서 시작하여 생존하기 위해 선택한 직업이 매춘부였다고 고백한다.(114) 도시에서의 힘든 삶의 반전과정 중 공장과 술집 등에서의 낮은 임금과 노동환경에 대한 변명조의 전개는 개인의 매춘과 관련된 도덕성문제보다 자본주의사회의 구조적 부조리로 관심을 전환시킨다. 과거전력을 두고 충돌하는 딸과의 논쟁은 모녀의 신세타령조인 회한이나 눈물로 연결되지 않고 빅토리아시대의 사회경제의 구조적 모순인 부의 편중, 즉 크로프츠와 프레디가 독점한 자본권력에 대한 사회학적 비평으로 계속된다. 워렌부인이 성공했다고 자랑하는 매춘사업은 정상적 자본이 투자되는 영역이 아니라 위협과 노동착취 및 탈세를 통해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만큼 여성의 경제활동참여의 제한성을 나타낸다. 자녀교육을 전담하고 가정경제를 위해 무한한 희생만을 강요하는 무의미한 결혼을 거부하고 직업을 구하는 하위계층의 다수 여성들은 자본과 지식의 허약함으로 권력계급의 유희거리로 전락한다. 더욱 아이러니한 장면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의 노예인 남성의 노예가 되어 있는 최악의 노예인”9) 여성들이 유일하게 의지하고 싶은 인격신이 상존하는 종교의 지도자도 가식의 실체로 표출되고 있다. 프랭크는 아버지 가드너 목사를 “양의 우유 부단함과 표범의 오만함과 공격성을 갖고 있다”(136)고 비꼬며, 설교원고를 직접 쓰지 못해 돈으로 사는 위선자라고까지 폭로한다. 경제와 종교의 상위집단들의 조직적 방해시스템 아래에서 감성과 성찰의 자유로움으로 독자적인 삶을 구축한 비비와 대조적으로, 목사는 워렌부인과의 정사로 몰래 비비를 낳고 프랭크의 결혼상대의 조건으로 돈과 지위를 내세우고 사회적 명성에 따라 손님에게 숙식의 기회를 선택적으로 제공하는 속물의 대명사이다. 쇼는 충돌과 전복기법을 이용하여 지속적으로 상위층 인물들의 가면을 양파껍질 벗기듯이 들추어낸다. 그는 외적 예의바름과 내적 부패의 상극성이 통제권력의 고급아비투스의 실체임을 지적하고 아울러 개인과 사회의 병리적 구조관계에 따른 배타적 습관의 고착화를 경계시킨다.

    비비는 공동체에서 항상 생존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을 해야 하고 환경을 탓하거나 불평해서는 안 되며 성공을 향한 환경을 찾든지 아니면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능동적 참여와 생산의지를 드러낸다(112). 그녀는 과거극복에 대한 자존감과 수치심을 동시에 보여주는 어머니를 위로할 만큼 감성적으로 성숙하고(124)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도 있는 직관력을 소유한 인물이다(Life is what it is; and I am prepared to take it as it is, 184). 비비는 종교와 자본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감성의 소유자로 무대공간의 공동체에서 유일하게 형이상학적인 수준의 생존을 책임지는 긍정의 코나투스를 놓치지 않는다. 쇼는 사회경제의 모순과 종교의 세속화란 역설과 반전의 무대를 비비의 공동체 속에서의 공통성 복원과정을 통해 구성하지만, 비비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과 관객에게는 인식상승변화를 위한 자각의 단계를 선물하지 않고 간과하도록 만든다. 비비가 어머니가 송금한 용돈을 돌려주고 서로 각자의 인생길로 가자고 주장하자(206), 몸의 고통으로 아래에서 위로의 상승 기회를 잡은 워렌부인은 자본가들만이 소유하는 최고수준의 고급문화의 아비투스를 열거하면서 함께 향유할 것을 제안한다.

    쇼는 자기 몫을 철저히 챙기고 삶의 후회가 전혀 없는 워렌부인의 도전적 연기에서 여성의 아픈 역사와 현실 및 자본주의사회제도의 폭력성을 보여주기 보다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의 중요성을 인식하기를 희망한다. 워렌부인은 엄청난 돈의 경제력으로 막강한 인적 자본의 관계망을 구축하고(the big people, the clever people, the managing people, all know it. They do as I do, and think what I think. I know plenty of them, 210) 하위빈민층의 소비패턴과는 다른 고급 소비 문화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의 매춘사업폭로로 모녀의 균형적 관계가 깨지는 종반부에서 비비는 고급 아비투스성의 집착으로 인지변화를 기대하기 힘든 어머니와 남성들과는 달리 다이아몬드와 드레스를 자랑하기 위해 비싼 마차를 타고 고급 아비투스의 정점인 오페라에 가는 기회마저 거부한다. 그녀는 결혼과 자본이 공모한 상부권력의 질서체계에 순응하도록 점잖음과 진지함을 배양시키고 자유로운 감성을 예속시켰던 어머니의 고급문화의 교육장인 극장에서 작별한다.(222)

    낭만과 심각함이 없는 반전 위주의 산문체 연애놀이극인 <피그말리언>은 자본주의사회에서 구성원의 언어와 매너의 재교육으로 신분상승변화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간결한 구조의 풍자희극이다. 고급문화로의 진입욕망이 강한 일라이자를 두고 프래디와 히긴스교수 및 피커링대령 사이의 연인관계가 미묘하게 형성되는 긴 구조에 비해서 주요 사건은 일라이자와 히긴스교수와의 음성학수업의 성과와 그 과정에서 싹트는 연애 감정의 갈등이다. <피그말리언>은 주목할 만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없지만 50개가 넘는 쇼의 희극작품들 중에서 관객으로부터 오히려 애정과 웃음을 선사받는 극적 매력을 갖고 있다. 그 이유는 무지한 하층계급의 일라이자와 음성학 교수인 상위계급의 히긴스가 언어 발성연습을 통해 사회구조적 위치 상승이 가능하다는 당시의 맹신이다. 쇼는 여주인공의 변화성공여부에 대해 여러 인물들의 단순한 긍정의 예상과는 다르게 언어 학습을 통한 신분상승이 계급차이의 벽으로 어렵다고 여긴다. 하지만 그는 교수와 제자의 충돌과 대항의 학습과정에서 “성찰과 공감을 활용하여 현존재적 실체를 정확히 인식할 수 있는 직관력을 가질 수 있다면 완전한 변신의 성과도 가능하다는 여지를 피커링과의 대화에서 암시한다”.10) 거실의 소장품들이 조성하는 상류층의 전통과 품위 및 고급문화의 아비투스의 정점을 향유하는 히긴스부인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히긴스교수의 권위적 제안에 동조한다. 그들은 발음능력과 문장구사력이 개인의 교육수준과 매너의 품위를 드러내고 동시에 사회적 위치를 결정하거나 영향을 끼친다고 믿고 있다. 인간의 정상적 언어능력은 발음과 문장구성력을 기본으로 하여 독창성·논리성·설득력을 지닌 수사학적 환유성을 의미한다. 직유와 은유의 단선적 단계는 정해진 일정기간 동안 체계적 학습기회를 통해 성취 가능하지만, 담론의 무방향성에 대한 다의미적 접근과 새로운 의미 확대생산이 가능한 환유적 언어능력은 다독과 직관에 의해서만 실행될 수 있다. 담론의 다양한 의미생산의 가능성은 자본과 정치권력이 통제하는 폐쇄된 수직사회에서 불가능하고 감성과 이성의 자유로운 발화가 보장된 민주사회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다. 직유와 은유가 구성원을 사회질서체계에 길들이기 위한 사고표현의 통제학습에서 파생된 결과물이라면 환유는 축제와 시장의 공동체에서 살아있는 다중들의 능동적 생명력을 담고 있는 자연의 원시적 음성들이다. 극의 전체적 무대공간에서 자본과 교육의 통합지원으로 진행되는 발화학습과정은 일라이자의 환유적 언어능력을 제대로 복원시킬 가능성이 의심스럽다. 히긴스와 피커링의 정확한 소리내기 학습실험이 끝날 부분 일라이자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한 걱정을 비교적 논리적으로 여러 차례 표출하기도 한다. 그녀는 발음학습이전 불가능했던 정확한 문법 활용과 문장력을 자연스럽게 구사할 만큼 언어의 기교적 상승변화에는 성공한다. 하지만 그녀의 언어향상이 순간적인 반전의 위기들에 대한 본능적 푸념에 불과한지 아니면 자본권력이 마련한 고급전문교육과 고급주거환경에 의한 인지력과 인식력의 실체적 향상인지는 대사관파티의 성공 후 그녀의 구체적 담론능력에 의해 결정된다.

    아비투스의 충돌은 세인트 폴 교회 근처에서 생계유지를 위해 꽃을 파는 소녀인 일라이자가 괴팍한 히긴스교수에게 꽃가게나 의상점의 점원이 되기 위해 발음을 고쳐달라고 부탁하면서 시작된다. 상류계급의 언어 권력의 대부인 히긴스가 점잖음과 예의바름의 신사인 피커링과 함께 하는 6개월의 발음교정수업은 수없는 독설과 반전이 중첩된 논쟁의 소용돌이에서 진행된다. 당시 부자들의 전유물인 고급문화의 주류를 대변하는 극장근처에서 빈민굴 출신이자 태어나서 한 번도 목욕한 적이 없고 머리카락은 감지 않아 더럽고 검정색 밀짚으로 된 선원용 모자를 쓴 일라이자의 외모는 하위계층의 전형적 이미지이다.(26) 히긴스부인의 화려하고 세련된 거실 분위기(144)와는 대조적으로 일라이자의 방은 습기차고 낡은 벽지가 늘어진 일주일 4실링의 방세를 내는 쓰레기더미의 좁은 공간이다.(56) 무대의 시작부에서부터 수차례 관객에게 비춰주는 일라이자와 히긴스모자와의 생활공간의 극적 대비는 끝부분에 이르기까지 계층 간의 부의 이동과 문화차이의 극복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부각시킨다. 그녀의 알아듣기 어려운 의미 없는 소리 혹은 괴성에 불과한 사투리는 특이한 억양과 저급한 어휘와 함께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무지를 그대로 표출한다.(28) 일라이자의 언어·외양·주거환경은 “경쟁력 있는 경제자본· 인적자본· 문화자본· 상징자본의 장들”11)을 소유하지 못한 전형적인 하층민의 원형이다. 알렉산더(Nigel Alexander)가 “이 극은 교훈적이며 사회제도와 개인감정의 충돌에서 야기되는 사회문제를 다루고 있고, 또한 구성원의 발화능력과 억양에서 개인의 사회구조적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12)고 지적하듯이, 일라이자와 히긴스의 공간적·언어적 대비는 두 계층 간의 동질화가 불가능한 대립과 평행을 부각시킨다. 인물들의 변함없는 단선적 병렬식 몸짓과 언어는 이질적 문화층의 능동적 만남과 조화보다 위치의 상승과 방어를 위한 충돌과 대항의 반복만을 의미한다. 일라이자의 발음학습은 국가권력이 공동체통제와 유지를 위한 관리 전략의 방편으로서, 언어교육을 통해 구성원들이 조직과 사회에 예의바르게 순응하도록 개조시키는 지적 순화훈련이기도 하다. 빅토리아시대의 자본독점가들은 종교와 정치권력과 합세하여 언어와 매너의 전략적 교육을 시행하여 예의바르지만 경제실무능력이 없는 신사와 숙녀류의 가품을 대량 생산했다. 이처럼 <피그말리언>은 사회구성원들의 무의식에 고정화된 언어와 매너의 습관성이 상승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학습을 통해 오히려 기존의 위치간극을 더욱 심화시키는 자본과 교육의 폭력성을 담고 있다. 특히 일라이자의 발화변화는 현재의 사회구조적 위계질서를 확대 재생산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국가의 자본과 지식을 독점한 중심 권력은 “언어와 매너의 고급화란 비가시적 폭력성을 내세워 질서체계를 통제함으로써 사회내부에 투쟁과 무질서를 차단하고 비폭력적 공간을 창출해낸다.”13)

    청소부 둘리틀(Doolittle)은 딸의 교육비를 보태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히긴스교수와 담판을 지어 딸을 신사들의 오락거리로 맡기고 대신 5파운드의 술값을 뜯어내는 파렴치이다. 일라이자는 물질적 풍요를 보장하는 언어와 매너의 교육만이 자기를 냉혹한 가난의 계층에서 구해낼 수 있다는 확신과 신분상승의 욕망으로 히긴스의 비꼼과 독설, 아버지의 횡포, 퍼어스 부인(Pearce)의 간섭을 차단한다. 그녀는 히긴스 집에 생활하면서 교수모자와 피커링 그리고 프레디 가족들이 속한 상류층의 화려한 아비투스를 부러워하면서 내심 자신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위치의 영향력 있는 존재가 되기를 다짐한다. 상존하는 상위층 권력의 폭력성과 위장성을 눈치 채지 못하는 일라이자는 히긴스교수와 피커링 대령의 가치체계—행동·사고양식, 감정과 욕구 및 판단의 기질과 성향-를 모방하여 내면화시키고 육화하여 그대로 반복하려는 개량화된 종속체로 전환하길 갈망한다. 사실 6개월의 학습기간을 마친 그녀의 언어기능은 상승변화를 보이면서 수업전후의 외모와 말투에서의 차이는 기대이상이다. 자유감성을 공감하는 본연적 주체성과 수사학적 환유성을 내재한 말하기회복이라면 자본과 문화 혜택의 기회확대를 보장하며, 동시에 타자로부터의 사회적 멸시와 억압에서의 자유로운 해방을 의미한다. 그러나 수업이 끝나고 서로의 관계를 정리할 종반부에서 그녀는 히긴스교수의 수업목적이 상류층 자본권력자들의 지적 호기심에서 시작된 잉여자산의 베풀기라는 단순한 내기에 불과하고, 학생의 언어적· 지적·감성적 변화에는 근본적 애정과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계급사회에서 생존과 상승의 욕망인 코나투스를 포기하지 않았던 일라이자는 투박한 런던 사투리와 촌스런 억양을 드러내지 않을 만큼 고급수준의 발화 능력을 갖춘 이상적인 숙녀로 전환하는데 성공했지만, 히긴스와의 애매한 연인관계에 놓이면서 자본주의사회에서 가난한 애인이 일반적으로 겪는 계층차이의 아픔과 이별의 슬픔이란 통과의례를 경험한다. 부와 사치의 고급소비문화의 아비투스는 경제와 종교의 소수의 권력계층의 전유물로서 다수의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층들이 꿈꾸거나 성취하기 어려운 대상이다. 꽃 파는 무지한 소녀의 외양에서 고급언어능력과 품위 있는 매너 그리고 비싼 의상으로 숙녀로 포장된 일라이자는 빅토리아의 계급차별의 아비투스벽을 근본적으로는 극복하지 못하지만, 순간이나마 지적으로 변화된 듯한 피교육자의 교육책임자에 대한 날카로운 언어적 공격은 히긴스교수가 수호하는 계급차이의 무의미성과 아비투스의 허구성을 부각시킨다.(288) 모건은(Margery M. Morgan) “계급과 계급, 영혼과 영혼을 가르는 가장 깊은 골을 만들어 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가라는 히긴스의 대사 속에 일라이자의 실패에 관한 답이 있다”14)고 주장한다. 쇼는 “스스로를 인간의 생명력과 인위적인 도덕체계사이에서 벌어지는 투쟁에 관심을 둔 도덕의 혁명가”15)라고 소개했듯이, 자본과 지식의 독점으로 구축된 소수 권력의 도덕체계가 계층간의 차이를 심화시키고 하위층의 고급문화로의 도전과 욕망을 근본적으로 억압한다고 결론짓는다. 하지만 쇼는 관객을 위시하여 빅토리아인들이 내심 보고 싶지 않는 추잡하고 모순투성이인 현실로 그들을—히긴스모자와 피커링 및 프레디 가족—끌고 가서 지나친 독설과 고약한 농담을 가미하여 불쾌한 심기를 자극하였다. 특히 그는 일라이자에게 고급 아비투스의 원천인 언어와 매너에 대한 단순한 학습과 상승의지로는 고급문화의 다양한 근본적 문제들을 넘어설 수 없다는 냉정한 현실을 수용하도록 만들었다. 극구성의 아이러니는 고급문화의 권력자와 저급문화의 종속자 모두 ‘언어와 매너’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위치를 방어하려고 하거나 전복시키려는 생존전략을 동시에 구사한다는 사실이다. 쇼는 “창조와 파괴라는 언어의 기능”16)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나아가 매너와 도덕이 사회계급과 어떠한 연관성을 유지하는지도 충분히 검토하였던 것이다. 결국 고급아비투스로의 상승이란 허황된 꿈의 주제를 6개월간 단맛만 잠시 보여주고 실패의 처벌로 막을 내리는 <피그말리언>은 오비디우스(Ovidius)의 신화와 <신데렐라>(Cinderella)동화의 예상된 성공결말을 전복시키면서 극의 초반부에서부터 마지막까지 인물들의 논쟁이라는 핑계에 지나지 않는 ‘말이 많은 말놀이’와 함께 반전의 흐름만 반복하는 ‘말잔치무대’이다.

    쇼는 결혼과 자본의 뿌리깊은 인위적 동맹체제에서 청혼자들을 거부하고 자의적으로 결혼을 선택하지 않은 비비와 고급문화권력의 타의적 의도에 의해 원하지 않는 결혼을 선택하는 일라이자 중간에, 파혼과 결혼다음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중요한 부분인 결혼생활의 위기를 캔디다를 통해 풍자한다. <캔디다>는 33살의 현실을 직시하는 통찰력을 지닌 부인을 사이에 두고 사회주의천국을 건설하려는 모렐목사와 18살의 이상주의 시인 유진 마치뱅크스(Marchbanks)가 대립하는 전형적 연애유희극이다. 무대에는 캔디다의 사랑놀이를 중심축으로하여 두 개의 다른 연애놀이가 전개되는데, 그 중 하나가 모렐의 여비서인 프로서핀 가넷(P. Garnett)과 장인 버게스와 부목사 밀(Reverend Alexander Mill)의 관계가능성이며, 다른 놀이는 목사를 대상으로 맺어지는 아내와 여비서의 사랑과 질투이다. 이 극은 쇼의 연애희극 중에서 유일하게 낭만과 사랑을 맛볼 수 있는 무대이지만, 남편은 절대신의 충실한 종복으로서 아내에게 명목상의 의무적인 역할을 다할 뿐이며 어린 시인은 15살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플라톤과 외디푸스적 감정에 충실할 따름이다. 세 사람의 사랑놀이는 상호간의 다가감의 시각적 이동과 접촉이 공간적으로는 가능하지만 공감적으로는 불가능한 부자연스러운 관계임이 드러난다. 연적인 두 인물은 자신들의 고유한 영역인 종교와 시적 세계만을 집착하고 강화하려는 욕망으로 현존재에 대한 인식력이 떨어지고 사회의 통제관습체제에 억눌러 순응하려는 부류들이다. 모렐은 종교의 권력과 자본의 경제력을 교묘하게 통합하여 마르크스주의적 하느님국가의 재건을 꿈꾸고, 유진은 상상과 사랑이 담긴 환상 세계를 통해 캔디다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을 지적으로 확장· 상승변화시키려는 사상가로서의 희망을 놓지 않는다. 모렐의 아내에 대한 지속적 관심은 목사로서의 최선의 배려이지 남편으로서의 최대의 사랑은 아니다. 유진의 캔디다에 대한 끈질긴 접촉은 공상의 산물인 시를 함께 읽고 공감할 수 있는 애독가의 동질성이지 연인으로서의 지고의 연민이 아니다. 캔디다는 두꺼운 가면을 쓰고있는 남편을 흔들기 위해 “교인들은 당신의 설교에 대해 관심이 없고, 당신은 번지레한 말과 설교로 지친 사람들을 기만한다”17)라는 언어적 공격을 중반부에서 시도한다. 아울러 마치뱅크스에게는 “과시하려든지 혹은 못된 의도이든지 아니면 시적 의도든지 간에 사적인 태도가 아니라, 자신이 진실로 느끼는 바를 그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열정으로 표현하라”고(58) 당당히 충고한다. 그녀는 중세종교권력의 절대적 역할 재현을 꿈꾸는 과거지향주의자인 모렐과 공상적 시를 노래하는 미래지향주의자 유진을 동시에 비난하면서 인물들의 분산된 의식의 시간대를 현재의 통시적 순수시간에 집중시키려고 노력한다. 캔디다는 지금 순간에 존재하면서도 각각 다른 시간대에 머무는 유진과 모렐에게 현재 진행되는 사실에서 생의 문제에 대한 정답을 찾으라고 경고한다. 캔디다의 현실에 대한 집중력 강조는 과거형 남편에게는 과거와 현재가 충돌하는 공허한 말소리에 불과하지만 미래형 유진에게는 자신의 미래지향성과 “현재의 항상성을 연결시키는 시간의 긍정적 항동성”18)으로 전환된다.

    극의 중반까지 시적· 공상적 사랑타령만 하던 유진은 모렐에게 캔디다에 대한 사랑을 여러 차례 진지하게 고백하고 논쟁하는 반전과 재반전의 긴 대립과정에서 캔디다의 직관에 의한 현실 직시란 생존방법의 제시로 3막에서는 미래와 현재를 통시적으로 관할 만큼 성숙해진다. 반면 모렐은 유진의 연속적인 언어폭력의 말놀이에 의해 자신의 이름이 패러디되듯이 도덕적 결함· 자본력의 부족·정치권력에의 기생 등 오랫동안 감춰진 수치들이 파헤쳐지면서 고정화된 과거인물의 원형으로 드러난다. 모렐은 종교권력을 바탕으로 자본을 축적하고 정치권력과 공모하여 정숙과 순결이 최선의 미덕으로 여겨지는 무결점의 고급 아비투스인 사회주의 도덕국가를 완성하는 것이 유일한 꿈이다. 모렐의 희망은 시대착오적인 망상으로서 여성을 기호품이나 애완견으로 여기고 스스로를 과거시간으로의 퇴행을 지속케 하는 변화불가능한 인물임을 부각시킨다. 유진이 미래에서 현재로 회귀하는 데에 성공하여 사회적 공존을 위한 욕망인 코나투스를 내재적으로 강화시킨 반면에 모렐은 과거에서 현재로 되돌아오는 데에 실패하면서 코나투스를 오히려 위축시킨다. 캔디다가 남편이 아니라 자기에게 속한다는 유진의 충격적 사실을 듣고 모렐은 어린 시인의 말이 사실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감추지 못할 만큼 존재론적 위기감을 쉽게 노출한다. 극 중반까지 관객과 유진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에게 당당했던 고급아비투스의 권위와 자신감은 사라지고, 타자의 현란한 어휘의 언표전략에 의해 극의 주도권마저 연적에게 양보하는 수모까지 감수해야 할 상황이다. 종반부에서 예상할 수 없었던 모렐과 유진의 위치전복의 반전은 캔디다의 사랑과 관심의 무게추가 시인에게로 이동한 것으로 간주하기보다, 과거와 미래로의 산종적인 파열의 지향점들이 현재로 합쳐지는 시간의 합일성과 현존재에 대한 직관의 필연성을 부각시킨다. 현실을 지배하는 캔디다는 지적· 영적으로 독립한 유진대신 겉으로는 완벽한 양태이지만 종교의 과거지향적인 폐쇄된 동굴 속에 갇혀있는 어른아이 모렐을 선택하면서 상이한 시간대의 존재들을 모두 현재의 동일시간점으로 끌어안는 지혜를 보여준다. 캔디다의 결정은 유진과 모렐의 미래와 과거의 충돌을 자신의 아비투스인 현실의 용광로에 함께 넣어 융합시키려는 계산된 공존전략이다. 캔디다가 모렐에게 ‘우리 애기’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마지막 반전의 충격 장면에서 관객은 모렐의 종교중심의 아비투스가 타자의 도움 없이 홀로서기가 불가능한 허수아비 같은 껍데기라는 사실을 목격한다. 그동안 목사보인 렉시가 우상화하고 목소리와 모든 행위를 모방하려 했고, 여비서 프로서파인이 마음속으로 흠모했던 모렐은 자신의 종교적 일상업무에 있어서 기계적인 일급목사였지만 ‘자연과 인간’에 대한 공감력과 직관력의 상승변화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모렐은 사람들의 영혼을 치유하고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에 힘쓰는 영적 지도자로서의 역할보다는 교회행정을 완벽히 수행하는 직업인으로서의 이미지가 친숙하다. 모렐은 인격신 중심의 절대적 가치체계의 수호를 위해 자본과 협작하여 사회개혁을 통한 새로운 종교질서체제의 고급아비투스를 욕망하는 기독사회주의 목사일 뿐이다. 유진이 극의 시작에서 마무리까지 전체적으로 흐트러지지 않는 정체된 일관성을 유지하는 목사의 타자를 향한 공감부재와 공존의 제한성을 공격해도 모렐은 사회적 언어폭력성의 의미와 의도를 인지하지 못하고 이해하려는 미동조차 보이지 않는다.

    모렐이 공동체에서 능력있는 도덕적 지도자로 인정받고 목사로서의 권위를 행사할 수 있었던 근거는 주변인물들의 종교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인격신에 의한 이성과 감성의 예속이 생산해낸 미신과 두려움이다. 종교권력이 중세부터 자행한 마녀사냥과 이웃과의 격리는 대항자와 이단자에 대한 응징과 처벌이라는 시각적 이미지를 순응적인 구성원들의 무의식에 효과적으로 각인시켜왔던 장치이다. 항상 통제의 효율성과 권력상승이란 이중적 목표로 기계적 일상성을 고집하는 모렐은 자신의 교구 빈민구제회를 속이고 장기간 여성노동력을 착취하여 돈을 번 것으로 악명이 높은 장인이 시의 입찰에 응찰할 자격을 취득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노동임금을 인상시켜주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실망하는 듯한 훈계만 가볍게 던지고 지나친다. 버게스가 사업권 획득을 위해 정치 지도자들을 소개해달라는 부탁 역시 자본과 정치의 협력이 필요한 고급아비투스확장이라는 실리를 염두에 두고 거절하지 않는다. 정치권력을 이용한 부의 축적에만 관심있는 기업가 장인과 종교의 권력화로 사회주의천국을 꿈꾸는 사위는 도덕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고급아비투스를 재구축하여 권력 확장을 지향할 뿐이다. “쇼 극의 가장 이상적인 여인”19)인 캔디다의 현실로의 회귀 유도에도 불구하고 모렐은 자기를 선택한 캔디다에게 연인에 대한 고마움이 아니라 어머니와 아내라는 가족의 법적 구성원에 대한 의무적인 감사를 표현하면서 끝까지 자유로운 감성의 회복을 보이지 못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캔디다의 다른 자아로 상승변화한 유진은 “인생은 행복보다 훨씬 숭고한 것이며 눈앞의 행복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배웠다(I no longer desire happiness: life is nobler than that. Parson James: I give you my happiness with both hands: I love you because you have filled the heart of the woman I loved. Good-bye)”(76)라고 작별 인사를 할 만큼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관할 수 있는 코나투스를 회복한다. 스티안이 “가치전도로 관점에 따라 해석의 오류를 범할 위험성이 많다”20)라고 지적하듯이 모렐· 캔디다· 유진의 삼각관계는 항상 타자와의 능동적 충돌과 공감을 전제로 베르그송의 순수시간의 항속성과 스피노자와 니체의 생존욕망인 코나투스를 회복시킬 수 있다는 기쁨의 긍정성을 제시한다. 그들은 동일한 공동체에서 슬픔의 충돌대신 공통성과 공통개념의 적극적 공유를 통해 ‘자유 감성과 엘랑 비탈’을 회복하고 삶의 흔적의 표출인 부르디외의 새로운 아비투스를 구축한다.

    5)G. B. Shaw, The Complete Prefaces, vol. 1. London: Penguin, 1993, p.544.  6)이소영, 『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 파주: 오월의봄, 2013, 332-333쪽.  7)이소영, 위의 책, 333쪽.  8)G. B. Shaw, Mrs Warren's Profession. 동인, 2009, p. 94 이하 이 작품의 본문 인용은 괄호 안에 쪽수만 기재함.  9)G. B. Shaw, Intelligent Woman's Guide to Socialism, Capitalism Sovietism and Fascism, London: Constable Co. & Ltd., 1949, p. 197.  10)G. B. Shaw, Pygmalion. 동인, 1998, p. 260 이하 이 작품의 본문 인용은 괄호 안에 쪽수만 기재함.  11)Pierre Bourdieu, “The Forms of Capital,” The Handbook of Theory and Research for the Sociology of Education, ed. John G. Richardson. New York: Greenweed Press, 1983, pp. 241-258. 이재용, 「조지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에 나타난 언어와 매너의 문제」, 중앙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2년, 33쪽 참조.  12)Nigel Alexander, “The Plays of Ideas,” Modern Critical Interpretations: George Bernard Shaw's Pygmalioned. Harold Bloom. New York: Chelsea House, 1988, p. 20.  13)Nobert Elias, State Formation and Civilization, trans. Edmund Jephcott. London: Basil Blackwell, 1982, p. 312.  14)Margery M. Morgan, The Shavian Playground, london: Methuan, 1972, p. 288.  15)G. B. Shaw, Collected Letters, vol. 2. London: Reinhart, 1970, p. 163.  16)Jean Reynolds, Pygmalion's Wordplay: The Postmodern Shaw, Florida: Univ. Press of Florida. 1999, p. 135.  17)G. B. Shaw, Candida, Stilwell, KS: Digireads. com Book, 2006, p. 45 이하 이 작품의 본문 인용은 괄호 안에 쪽수만 기재함.  18)베르그송의 시간의 지속(duration)에서 항상성을 볼 수 있고 진화와 엘랑비탈(Elan Vital)에 근거한 시간과 생명의 유기화창조·생산과정에서 역동성을 확인할 수 있다. 홍경실, 『베르그손의 철학』, 서울: 인간사랑, 2005. 2부 2장: 베르그손의 시간철학에 관한 현상학적 접근참조.  19)Henry Charles Duffin, The Quintessence of Bernard Shaw, London: George Allen & Unin Ltd., 1975, p. 52.  20)J. L. Styan, The Dark Comedy, London: Cambridge Univ. Press, 1976, p. 125.

    3. 종교와 자본의 권력투쟁에 의한 아비투스의 억압과 코나투스의 복원력: <바바라 소령>, <상심의 집>

    쇼의 문학적 전제가 스스로를 한번도 실제 삶과 격리시키지 않는다는 태도에 있듯이, 사상극은 사회문제를 다루면서도 희극적이고 지적이며 의도적이다. 누가 이 세상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를 묻는<바바라 소령>은 하위계층에 대한 통제관리권을 놓고 두 권력집단간의—딸 바바라의 구세군 종교권력과 아버지 언더샤프터(Undershaft)의 독점자본가세력—갈등을 반전과 논쟁 및 아이러니로 극화시키고 있다. 무기와 전쟁으로 인간과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자본권력의 맹신자인 언더샤프트는 무기공장으로 부를 벌어 드리고 동시에 자기가 제작한 무기로 기존의 사회체계를 파괴하는 전쟁을 일으키는 반복 과정을 통해 새로운 가치의 신비주의적 속류 사회주의국가라는 아비투스재건을 희망한다. 여러 연구가들은 대체로 바바라와 아버지의 대립을 이상주의자와 현실주의자간의 갈등구조나, 언더샤프트를 비도덕적 속물로 몰아세우고 바바라의 신여성적 생명력과 미래남편 쿠신즈의 지성을 합쳐 탄생한다는 초인의 이야기에 집착한다. <캔디다>, <상심의 집>, <성녀 조안>의 무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교집단의 권력욕망은 중세를 거쳐 근대를 지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조직적이며 체계화되어 있다. 쇼는 <워렌부인의 직업>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 종교 관계자와 지도자들의 무기력함과 비열함을 지적하면서 종교의 기능마비를 냉소적으로 가볍게 묘사하지만, 로마시대이래 2000년 이상 종교위상의 위기시마다 마녀사냥을 스스럼없이 자행한 종교집단의 국가권력에 대한 집착증을 사회 문제와 함께 풍자적 경고를 놓치지 않는다. 1646년 유대사회에서 이단자로 영원히 격리당한 스피노자와 1431년 마녀로 화형당한 잔다크의 경우처럼 종교권력집단은 절대자인 인격신과 교리 및 체제관리에 대한 도전을 허용하지 않으며, 영향력 확대와 위치상승을 위해서는 개인과 마찬가지로 국가권력층을 공동 구성하는 타고급아비투스세력과의 제휴와 협작도 망설이지 않는다.

    기독교 이상을 실현하려는 바바라는 기도· 헌신· 진리· 믿음· 평화· 사랑으로 세상을 구하고자하지만 자본의 부족으로 구세군 보호소를 어렵게 운영한다. 바바라는 초반부에서 부자보다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에 더 가까이 있기 때문에, 가난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진정한 행복을 가지라고 설교할 정도로 종교적 이상주의를 확신한다. 그녀는 구세군 운영자금이 바닥나서 도움을 요청하는 호소문을 신문에 싣기도 하고 거리에서 모금운동도 벌이기도 하고, 하나님께 직접 필요한 자금을 마련해달라고 수없이 기도하지만 헌금은 모이지 않고 보이지도 않는다. 바바라의 힘으로는 영혼을 구원하려는 구세군의 역할이 더 이상 불가능하자 아버지는 딸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헌금을 제의한다. 그녀는 전쟁을 일으켜 인간의 생명을 죽이고 문명을 파괴하는 무기를 팔아 벌어들인 돈을 종교적· 도덕적 이유를 내세워 단호하게 거부한다. 사실 그의 가족들은 아버지가 무기공장의 경영을 통해 축적하는 부를 부끄러워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 피묻은 돈을 거절하지 못하는 아이러니를 속출한다. 아내 브리토마트(Britomart)는 남편 돈을 얻어 쓰면서 도덕의 화신처럼 예의바르게 처신하고, 딸은 아버지의 생활비로 먹고 교육받으면서 하나님의 천국을 건설하기 위해 희생과 봉사의 천사인 구세군 소령 역할까지 한다. 가족들은 돈과 빵이 기도를 한다고 나타나지 않는다는 진리를 알고 있지만, 통념화된 종교와 도덕의 질서체계에 예속된 만큼 아버지의 존재가 상징하는 자본의 위력을 애써 외면하려고 한다. 쇼는 현실적인 삶에 있어서 추상적인 종교와 신앙이 얼마나 무기력한가를 보여주며, 결코 종교와 집단구성원은 자본이 없다면 스스로 현실에서 소멸되거나 약화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경고한다. 인간이 모여 사는 현실 종교 세력은 막대한 자본을 토대로 체계적인 권력 집단화과정을 확장·지속시킨다. 절대신이 멀리 하라는 자본으로 교묘하게 조직화된 상부의 관리타워는 신자들에게 죄에 대한 신의 엄중한 처벌을 내세워 막연한 공포와 두려움으로 통제하고 특유한 종교적 고급문화의 아비투스를 형 성함으로써 타권력과의 차별화에 성공한다. 종교와 도덕의 순수성을 고집하는 딸에게 언더샤프트는 종교의 기능마비는 자본의 부족으로부터 비롯되며, 돈 없이는 정상적인 종교활동도 할 수 없다고 설득한다.

    언더샤프트는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은 오직 자본이며 겉치레에 불과한 종교와 도덕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전쟁을 없애고 평화를 위해서는 무기 판매를 통해 더 많은 부를 확보해야 한다는 반전의 역설을 펼치고 있다. 딸의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종교 우위논리와 아버지의 현실적이고 독설적인 자본 우위논리의 평행적 대비는 노동자의 복지와 체계화된 근로환경을 갖춘 무기공장을 목격한 바바라가 현금의 위력에 굴복하면서 그 균형의 긴장감이 깨어진다. 예상에 대한 충격적 반전이 계속되는 노동현장에서 언더샤프트가 “음식· 의복· 연료· 집세· 세금· 체면· 자식이란 7가지의 치명적인 원죄에서 구제될 수 있는 길은 오직 돈이라고 설명하자”(141), 물질이 아니라 기도를 통한 영적 구원만이 죄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여기던 바바라는 인격신에 대한 믿음마저 조금씩 흔들린다. 속류 마르크스주의자인 쇼의 대변인 언더샤프트는 인간에게는 빵이 먼저이고, 배고픔이 해결된 다음 찾아오는 정신적 공복을 종교가 맡을 역할이라고 정리한다. 언더샤프트는 경제권력층이 사회와 국가를 총괄적으로 통제하고 그 밑에서 자본을 지원받은 종교권력집단이 구성원들의 감성의 자유를 속박시키는 교양교육을 담당하는 보조자로서의 종속적 기능을 강요한다. 그는 딸에게는 종교의 허약성을 지적하고, 바바라의 미래남편이자 소극적 지성인인 쿠신즈교수에게는 “자네는 평생 다른 도덕주의자들처럼 반드시 반드시 반드시만 외치고 세월 다 보내려고 하느냐?(Ought! ought! ought! ought! ought! Are you going to spend your life saying ought, like the rest of our moralists?”(144)라고 말하면서 교육과 도덕의 비행동주의와 수사학적 말잔치에 대해서 비난한다. 왓선(Barbara B. Watson)이 “<바바라 소령>의 주제는 자본주의의 혜택이 아니 라 현실주의 필요성이다(…the theme of Major Barbara is not by any means the beneficence of capitalism … is the necessity of realism”22)라고 말했듯이, 언더샤프트와 쇼는 주어진 현실 자체와 그 현실이 요구하는 실체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개인이 세상을 이롭게 살 수 있다고 본다. 쇼는 대변인 언더샤프트의 주도적인 반전과 논쟁을 통해 개인과 국가에서 자본의 필연적 우위성을 강조하고 자본의 긍정적 역할에 대한 정확한 공감만이 종교와 도덕의 비실제적 피상성을 인지하고 대응할 수 있다고 간주한다. 쇼는 구성원들 각자의 개인적 생존과 사회적 공존을 위해 부와 종교의 관계를 수평에서 수직체계로 재정립한 다음 자본의 균형적 배분· 자유감성· 직관· 코나투스를 보장하는 주체적 아비투스의 재구축을 희망한다.

    <바바라 소령>이 종교권력을 종속적 위치로 밀어내고 자본의 긍정성으로 새로운 지적문화의 아비투스를 모색한 반면, <상심의 집>은 종교와 함께 자본주의사회의 경제권력의 비겁함과 무기력함을 풍자와 반전의 반복을 이용하여 폭로하고, 부와 종교의 공동의 지배권력이 행사해온 교묘한 통제전략에 의해 생존이 불가능한 파산위기의 영국을 표출한다. 관객은 시작부에서 “조그만 충격에도 쉽게 파손될 것 같은 노후한 배의 이미지와 닮은 무대공간과 현실에서 약간 떨어진 꿈과 같은 환상적 분위기를 직감한다.”23) 이 무대는 초반에서 마지막까지 원형적 인물들이 비실제적인 분위기에서 연속성이 결여된 언어와 몸동작을 지속한다. 쇼는 조직의 기득권층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희극에서 우화, 전설, 신화, 종교, 역사 등을 의미가 없는 일상적 소재들과 함께 혼합· 배치하여 환상적 비개연성의 구조를 즐겨 사용한다. 특히 <상심의 집>은 일상적 현실과 경험을 초월하여 고정화된 기호적 인물들의 가면을 벗기고 현존재에 대한 직시능력을 복구시키려는 작가의 의도를 강하게 드러낸다. 그는 인물들로 하여금 많은 시행착오를 경험케 하여 토론· 공격· 방어· 성찰· 자각의 자아해체과정을 통해 인식력복원을 가능하도록 배려한다. 쇼는 희극적 상상력과 철학적 수사학을 이용하여 인습적인 종교와 도덕의 위선을 우선 파괴하고 다음으로 부의 폭력성을 경고하면서 생의 동력인 본원적 실체의 정체성을 직시하도록 안내한다. 쇼의 자아회복은 공동체로의 능동적 참여를 통한 공통성과 현실감의 복원이다. 그는 종교· 이상· 연애· 결혼· 지성· 개혁· 초인· 생명력· 여성· 계급· 자본을 증오하거나 편애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의 필연적 충돌을 통한 현존재에 대한 공감과, 어떤 종류의 구속에서도 자유로운 감성과 생의 욕망 즉 코나투스의 보존을 놓치지 말라고 경고한다. 쇼· 스피노자· 니체· 베르그송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걱정과 예측보다 현재의 통시적 시간흐름인 지속순간 즉, 있는 그대로를 직관하라는 충고를 반복한다. 쇼의 기법은 개인과 사회의 병리적인 문제들을 제시와 전개를 통해 나열하고 병치할 뿐이며 긴장과 흥분이 동반되는 절정구조를 원하지 않는다. 오직 인물과 관객이 상생과 공존을 위해 능동적 주체로서 무대 위에 던져진 현재의 이야기 거리에 집중하여 “공통개념을 생산하는 인식력”24)을 향상시켜야 한다. 그들은 반구조주의적 저항주의자인 라블레의 냉소적 웃음과 “바흐찐(M. Bakhtin)의 언어의 전복적 카니발리즘”25)으로 재무장하여 사회적 공존을 위한 ‘공통성’을 적극적으로 재생산하고 확대시켜야 한다.

    극의 구성은 남녀인물들 사이의 사랑놀이를 중심으로 개인의 치명적 약점이 노출되는 지속적인 반전과 재반전의 전개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앨리를 두고 경쟁하는 망간과 핵터의 삼각관계가 우선적으로 연애놀이극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둘째 어터우드를 대상으로 시동생 랜덜과 형부 핵터의 음흉한 시선들이 보이며, 동시에 허셔바이부인· 망간· 앨리의 아버지 마찌니의 다른 세 번째 관계가 관객의 시야에 들어온다. 이들의 연애놀이는 진지함이나 만남과 헤어짐의 감정도 없이 극의 전개과정에서 결혼대상이 즉흥적으로 교체되는 복잡한 반전을 기계적으로 거듭한다. 관객과 주변인물들이 이해하기 힘든 단순한 몸짓과 언표행위만 재현하는 88세의 쇼터버선장의 집에 방문한 5명은 모두가 원형적인 기호적 인물들로서 정상적 언어소통이 불가능한 속물들이다. 배신과 고백의 과정에서 수차례의 반복과 전복을 거친 후 종반부에서 쇼터버와 어린 앨리의 결혼장면은 반전의 연속구조 중에서 최고조의 긴장감과 충격을 던지는 시각적 장치로서 과거와 미래의 연결이란 쇼의 사상적 선물이다. 쇼는 종교의 역할에 항상 부정적 의문을 제기하면서 비판적 시각을 유지하는데, 그 이유는 종교권력이 중세이후 빅토리아시대 그리고 2014년 현재까지 자행하고 있는 인간의 자유감성구속과 억압의 흔적 때문이다. 이 극에서 선장의 노선이 아니라 목사관이 폭파되는 의외의 장면은 종교의 권력아비투스의 해체와 재방향성의 필요성을 지적한다. 아울러 쇼는 5명의 방문객 중 앨리에게만 극의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선장과의 언어적· 감성적 소통과 공감이 가능하도록 배려하면서 어떤 인간이 생존할 수 있으며 어떻게 세상을 보아야하는지를 관객에게 제시한다.

    쇼가 다윈과 라마르크의 진화론과 데카르트의 이성주의 및 『자본론』을 접했지만, 그의 사상적 뿌리는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와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와 범신론 그리고 니체의 신체를 우선하는 디오니소스적 생의 욕망이다. 쇼는 현존재와 세상을 있는 그대로 직관할 수 있는 능력과 통찰력을 생존과 공존의 열쇠로 생각하고, 삶의 무게와 방향을 지나치게 부와 구원종교에 편중시킨 인물들에게는 살아남을 여백을 남겨두지 않는다. 인격신과 부가 공동제작한 아비투스의 높은 성안에 안주하려는 데카르트의 이성적 후계자들은 현재와 미래의 위기를 직시하는 쇼터버의 지혜와 존재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망령든 노인의 헛소리로 여기면서 최소한의 공통성회복을 위한 언어소통을 차단시킨다. 종교뿐만 아니라 자본을 독점했던 전문기업가인 망간을 위시하여 재물축적의 욕망화신인 마찌니와 핵터의 경제형편도 빈껍데기에 불과하며 자신들이 짜놓은 경제시스템에 의해 오히려 농락당하는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반전 과정에서 드러난다. 종교와 자본체제는 권력욕망에 집착한 소수 순응주의자에게 고급문화의 아비투스에 대한 향유권리를 보장하지만, 대항세력을 억제하기 위한 언어와 행동 및 사고의 통제전략시스템은 시·공간의 전이와 권력의 속성에 따라 내재적 기계성과 고정성으로 협력자와 대항자 모두의 자유감성과 존재의지를 약화시킨다.

    쇼터버는 앨리와 큰사위 핵터에게 바다의 표류하는 배에서 하루에 10배럴의 럼주를 들이키든지 혹은 갈증해소를 위해 병에 든 더러운 도랑물을 마시든지 간에 망대에 서서 배를 조종하여 자연의 섭리(the Providence)인 생의 방향성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일러준다.(312) 선장은 환상과 꿈같은 표현주의극의 분위기에서 생의 긍정과 감성의 존중이 내재된 수사학적 비유의 메시지를 수없이 전달하는 스피노자와 니체의 대행자이다. 쇼터버는 항해술(Navigation)을 배워 암초를 피하면서 삶의 항해를 포기하지 말라고 경고하며, 아울러 “교회는 좌초 직전에 있고, 하느님의 넓은 바다로 향하지 않으며 파산될 것(The Church is on the rocks, breaking up. I told him it would unless it headed for God's open sea. 314)”이라고까지 지적한다. 사실 극의 중반 이후에서 선장과 다이아몬드를 훔치러 들어온 강도(The Burglar)가 나누는 대화에서도 쇼터버의 실제와 환영을 구별하는 직관력을 엿볼 수 있다.

    선장의 예리한 직관의 도움으로 앨리는 자신에 대한 핵터의 사랑이 거짓이고 아버지의 영원한 경제적 조력자인 망간의 실상이 아버지 사업을 망하게 하고 가족을 가난에 몰아넣은 실세자본가의 대역에 불과한 전문 기업사냥꾼임을 알게 된다. 그녀는 여주인 헤시언(Hesione)의 아름다운 머리가 가발이며 마찌니가 순수한 아버지가 아니라 돈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는 충격적 반전의 사실들도 선장의 폭로로 파악하게 된다. 쇼터버가 자본가들을 두고 “육상과 해상의 도둑들이 같은 혈육이다(Land-thieves and water-thieves are the same flesh and blood, 214)”라고 비난하는 부분에서 앨리는 국내외 자본계급의 비도덕적 폭력성과 제국주의정책의 모순을 인식한다. 그녀는 폐쇄의 동굴같은 배의 공간에서 선장과의 실체적 접촉과 능동적 교감을 통해 개인과 공동체의 공통적 문제점인 공통성을 인식하고 슬픔보다 기쁨의 기회를 확장시키고자 한다. 사회경제의 실천대안을 찾은 다음 그녀는 영국의 종교기능이 마비된 지가 오래되었지만 회복의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까지 함께 인식할 만큼 지적·영적 상승을 보인다. 극의 흥미로운 마무리는 종교와 자본의 동시 몰락을 시각적 장치로 대비하여 극대화시키는 부분이다. 집 주변의 폭격으로 절대신의 안식처인 목사관이 폭파되고 자본주의사회의 실질적 기업가를 대변하던 두 인물 망간과 강도가 동굴 지하에서 죽는 장면이다. 자본을 상징하는 다이너마이트 폭발로 인한 자본가의 죽음이라는 시각적 처리는 관객에게 아이러니와 반전기법의 최고조를 보여주는 극적 장면이다. 핵터와 마찌니는 다음 차례의 필연적 죽음을 기다리면서 불안하게 잠들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늙은 선장은 모든 승무원에게 배가 안전하다고 외치면서 편안하게 잠들며 앨리는 잠들지 않고 내일의 폭격을 기다린다.(322) 마지막 시간처리장면은 세 부류의 인물들을 통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대를 통시적으로 다루고 있다. 핵터와 마찌니는 과거를, 쇼터버는 현재를, 앨리와 허셔바이부인은 내일인 미래의 시간을 각각 담당하고 있다. 부의 욕망으로 부의 생산제품에 의해 살해당하는 망간과 강도가 죽음을 나타내는 반면 내일을 기다리는 앨리가 재탄생과 재창조를 의미하는 만큼 관객은 극의 시간이 단절된 파편화가 아니라 하나로 통합된 통시적 지속과정임을 체화하게 된다. 죽음과 탄생,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대들을 대비와 통합을 통해 연결시키려는 의도는 시간의 순수지속이라는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의 생명력의 도입에 있다. 인간과 자연의 시간은 수학과 과학이 분화시킨 단절된 단편적 단위, 즉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시계판에 움직이는 숫자가 아니라 스피노자의 자연과 베르그송의 내적 생명력이 내재하고 있는 주관적 순수지속이다. 시간은 부와 종교의 권력계급이 효율적 통제를 위하여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며, 더욱이 개인이 파생시키는 시간에 대한 기대와 걱정과도 전혀 연계성이 없다.

    선장은 ‘신즉 자연이자 우주인 시간의 거대한 주체적 움직임의 실체’를 인지하는 유일한 인물로서 주변의 불안한 인물들에게 편히 자라고 권한다. 쇼터버는 과거와 미래보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시간임을 알고 멀리서 폭격소리가 들려와도 쉬라고 충고할 만큼 현재에 집중할 수 있는 직관을 소유한 흥미로운 인물이다. 쇼 역시 1909년 ‘인기극을 쓰는 방법’이란 에세이에서 “우리에게 매일 경험되는 삶은 이해하기 힘든 우연성들의 혼돈인 것 같으며, 순간의 성찰이 그 의미와 정확성을 발견할 수 있다”26)고 언급한다. 쇼터버 는 긴 생의 과정에서 예상하거나 기억 못하는 우연한 사실들에 얽매이어 걱정하거나 후회하지 않고 현실의 일어남을 직시할 뿐 해결책과 해답을 찾기 위해 인위적인 조작을 시도하지 않는다. 작가가 “극의 기능이 관객들에게 재미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의식을 공격하고 부수고 삶을 해설해주는 것”27)이라고 밝히듯이, 쇼터버는 캔디다처럼 주변인물들의 의식과 인식능력의 상승변화를 주도하면서 상심에 젖은 침몰 직전의 노후선인 집에 회복의 방향성을 선물한다. 극의 종점은 선장의 시간대응을 통해 관객에게 지배적 기능만을 답습하던 종교와 자본의 고급문화의 아비투스에서 작별을 선언케 하고 동시에 새로운 아비투스, 즉 긍정과 자유의 욕망인 코나투스의 복원을 근거로 공존과 상생문화의 재탄생을 모색하도록 자극한다.

    21)G. B. Shaw, Major Barbara, London: Penguin Books, 2000, p. 108 이하 이 작품의 본문 인용은 괄호 안에 쪽수만 기재함.  22)Barbara Bellow Watson, “Sainthood for Millionaires”, Bernard Shaw' Plays, p. 360.  23)G. B. Shaw, Heartbreak House, 동인, 2014, p. 10 이하 이 작품의 본문 인용은 괄호 안에 쪽수만 기재함.  24)이수영, 앞의 책, 353쪽.  25)이득재 옮김, 『바흐찐의 소설미학』: 바흐찐 비평선집, 열린책들, 1988, 97-115쪽 언어와 이데올로기 참조.  26)G. B. Shaw, ‘How to Write a Popular Play’, Playwrights on Playwriting, Toby Cole, Ed. New York:Hill & Wang, 1982, p. 50.  27)Ibid., p .56.

    4. 종교와 정치의 공모에 의한 코나투스의 해체와 아비투스 재강화: <성녀 조안>

    쇼는 <성녀 조안> 발표 이전까지 대체로 코나투스와 범신론 그리고 창조적 진화 생명력과 생에의 의지를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혼재시켜 현실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과 직관을 내재한 인물을 이성중심의 현대문명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영웅으로 부각시키려는 흔적의 무대들을 상당수 남기고 있다. 그는 보통 사람이상의 탁월한 지적·물리적 우수성이란 생명력을 소유한 ‘람보’같은 슈퍼맨과 원더우먼이란 이상적 초인을 내세워 자본주의사회의 문제를 극복하려는 단순한 수준의 방법론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니다. 그의 다양한 종류의 인물들은 셰익스피어의 성격적 결함으로 인해 실패와 비극을 체험하는 주인공들처럼 개인과 개인, 인간과 사회의 필연적 충돌에서 살아남기를 위한 인식론적·감성적 상승변화과정을 거치는데, 그들 중에서도 쇼는 현실과 타자의 마음을 자유로운 감성과 직관을 통해 들여다보고 소통할 수 있는 시적 유연성을 지닌 인물을 원한다.

    쇼는 스피노자의 『에티카』와 플라톤의 『국가』(The Republic)에서처럼 인물과 관객으로 하여금 신인 우주의 뒤편에 존재하는 의지를 직관을 통해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는 창조주의 절대 진리에 따른 맹목적인 구원의 해답보다 대자연의 신성과 인간의 심성을 바로 보고 집중할 수 있는 “고도의 인식론적 능력인 스피노자의 3종지 인식단계의 직관지”29)를 복원시키기를 원한다. 쇼는 신과 종교에 관한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문제만을 무대공간에 상정하여 진지하게 논쟁하면서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기를 의도하지 않는다. 그가 인물들에게 바라는 희망은 사회와 국가의 진화를 위한 이상적 개혁주의자가 아니라 자유감성으로 종교와 자본의 고급아비투스의 가치에 의해 속박당하지 않고 지금의 시간을 즐기는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생존력 복원이다. 쇼의 대다수 인물들이 자신의 고정화된 인식의 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반면, 캔디다· 유진· 트렌치· 앤더슨 목사· 돈 주안· 쇼터버 선장· 히긴스부인· 일라이자· 비비· 언더샤프트· 성녀 조안 등은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를 겪은 다음 현실을 보다 더 정확히 공감함으로써 자기발견을 하게 되는 상승변화가 가능해진다. 사실 다수의 비평가들은 쇼의 인물을 이상과 현실의 성향에 따라 이분법적으로 나눈 다음 자본과 직업 및 교육 등에 의해 재차 세분화하는 구조주의적 분류체계를 선호하는 일반적 양상을 보인다. 국내외 연구자들의 쇼의 인물에 대한 표층증후군에 기초한 기계적 인물도식화는 진지함의 가벼움과 비극의 희극성이라는 냉소적 인물원형화의 극적 의도를 간과한 결과이다. 살아 있는 주인공들의 내면적 심리갈등과 무의식적 욕망에너지의 확산에 의한 무방향성과 다원성의 전이가능성은 접근하기 힘든 정체의 다양성을 체화한 반전과 전복의 양태들을 확산시킨다. <성녀 조안>의 여주인공 역시 쇼가 일관성 있게 관객에게 보여주는 수준 높은 인식력을 소유한 인물로서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실체를 정치와 종교의 적대자들처럼 해석하지 않도록 언어의 환유적 수사학을 통해 수없이 충고한다.

    예수의 재판· 잔다크의 화형· 1차 세계대전은 대략 2000년간의 이성중심의 기독교서양문명에서 권력계급의 광기가 자행한 폭력성의 분기점들로서 완벽한 원형주기를 이루고 있다. 1431년의 마녀 원심과 1456년 복권재판 및 1920년 성자추대의 과정—마녀사냥에서 복권까지 약 500년—은 잔다크의 죽음과 재판에 관련된 실제의 역사적 시간여정이다. 19세에 불에 의해 처형당한 잔다크는 프랑스의 3대 성인대열 속에 추대되기까지 “천재· 성녀· 영웅의 긍정적 시각과 마녀·악마·사기꾼이란 부정적 측면을 동시에 받아 왔다.”30) <성녀 조안>은 프랑스와 영국의 100년 전쟁의 영웅인 잔다크에 대한 역사적 서사극으로, 정치권력과 종교세력의 음모를 통한 신진개혁세력의 해체과정을 폭로하는 정치·종교재판의 패러디이다. 쇼는 자본· 결혼· 종교· 정치· 계급· 교육 등 6개의 기본재료를 적절히 섞어서 작품의 방향성을 먼저 설정한 다음, 상위권력층 인물들의 다양하고 복잡한 지적· 감성적 변화와 심리상태를 언어· 매너· 의복· 몸짓· 주거환경· 사상 등 6가지 측면에서 냉소· 충돌· 아이러니· 반전· 독설· 전복 등 6가지 기법을 통해 풍자한다. 이 극 역시 여주인공 조안의 존재에 대한 수용의 찬사와 불인정의 폭력이란 6막의 반전무대에서 로버트 성주(Robert), 대주교, 찰스 7세, 뒤누아 프랑스군 사령관(Dunois), 워윅 백작(Warwick), 코촌 주교(Cauchon), 르메트르 종교재판장(Lemaitre), 데스티베트 고소인 수사신부(D'stivet) 스토검버 종군신부(De Stogumber)사이의 종교와 정치권력의 은밀한 공모와 모략의 전말을 표출시킨다. 극의 시간은 1429년 보드리코트성에서부터 시작하여 1431년 3월 30일 화형까지를 다루고 있으나 에필로그는 조안의 죽음에 직·간접으로 연루된 왕과 대주교를 포함한 모든 정치·종교권력자들이 시공을 초월하여 무대에 나타나 각각 자기입장을 변론하는 음모자들의 내면을 냉소와 아이러니 및 반전으로 들추어낸다. 조안을 마녀로 몰아세운 국가권력은 기독왕국을 표방하는 교회의 제도적 권위와 봉건귀족제의 정치적 권위의 체계적 협력동반자들이다. 버스트도 “조안의 정신적인 영적 힘에 맞서는 것은 그녀를 둘러싼 사회, 정치, 그리고 종교이다”31)라고 지적하듯이, 이 극은 조안과 사회질서체제를 통제하는 두 권력과의 대립을 중심으로 생존욕망과 인식력의 회복가능성과 제한성을 탐색하고 있다. 에필로그의 마지막에서 조안과 왕실병사의 대사는 종교정치세력의 바뀌지 않을 의식의 고정화와 조안의 공감과 소통의 유연성의 대비로 개인과 국가의 관계회복이 불가능함을 경고한다.

    1456년 6월 어느 날 찰스 7세의 침실에서 워윅, 재판장, 사형집행인이 조안의 환영을 보고 각각 사과를 하는데, 그 중 “성자님은 살아 있는 영혼의 밝음과 자유가 참이라는 진리를 입증하셨다”(398)라는 재판장의 고백은 조안의 죽음은 종교권력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서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왕의 침실에 모인 귀족과 주교들은 조안의 영혼에 성자됨을 일단 축하하지만, 다시 살아서 자기들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부탁하는 역설적 아이러니를 합창한다. 그들은 하느님의 대리인 성자일지라도 자신들의 현실권력체제를 위협하면 과거의 불행한 비극이 똑같이 재현될 수 있다는 정치담론의 확정성으로 경고한다. 코촌 주교 역시 “사람의 눈은 성자와 이단자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우둔한 사람의 눈을 용서하십시오”(400)라고 은근히 위협하며, 워윅 백작은 더욱 노골적으로 “정치적 목적으로 행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언제든지 반드시 그렇게 할 것입니다“(400)라고 확언하면서 조안에게 행한 과거의 엄청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도 “작은 실수(our little mistake)”(400)정도로 뉘우친다는 철면피 같은 얼 굴을 보여준다.

    인간은 저마다 자기의 육체적· 영적 존재를 자유롭게 꽃피울 수 있는 기본권을 지녔다고 본 라블레는 쇼에 300년이나 앞서 쇼처럼 본능적이고 자연적인 생의 자유사상과 신랄한 수사학적 풍자 및 박식을 통해 16세기 프랑스의 종교· 사회· 정치· 교육의 무기력함과 비도덕성을 공격하고, 가난과 종교권력으로부터 고통받는 민중에게 해학과 즐거움을 선사했다. 사실 종교권력에 의해 억압 받았던 라블레를 외삼촌을 통해 그 존재를 알았던 쇼는 잔다크로부터 극의 소재를, 그리고 입센(H. Ibsen)에 앞서 라블레에게서 냉소의 극작기법을 구했다. 무엇보다 조안의 생의 철학과 유사한 삶을 살았던 실존인물 잔다크의 통찰력과 생존욕구인 코나투스와 자유감성은 쇼의 창조적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중심 주제이다. 해박하고 신의 존재를 부정한 라블레의 조롱과 웃음은 웃음자체를 거부한 중세기독교의 근엄함에 위배되는 반종교적 흔적으로서, 쇼는 라블레의 언어기교를 빌려 잔다크를 죽음으로 몰아간 15세기 프랑스 종교권력과 영국의 정치권력의 이중성을 수사학적 담론전략을 통해 신랄하게 공격한다.

    조안의 연승으로 귀족권력의 손상된 아비투스의 위신을 회복하기 위해 영국의 정치권력자인 워윅은 조안의 존재감을 마찬가지로 정치· 종교적으로 부담스러워하는 프랑스 주교 코촌을 계속 설득하여 전략적 공동전선을 구축하는데 성공한다. 그는 “조안이 교회를 무시하는 태도는 근본적으로 개인과 하나님 사이에 신부나 귀족의 간섭을 반대하는 개별 영혼의 항의이며 프로테스탄티즘 즉 신교이다”(210)라고 부추기면서 조안의 직관력에 대항하는 정치· 종교의 대응책을 마련한다. 사실 워윅은 프랑스왕인 찰스7세가 황태자시절 왕의 즉위를 위한 대관식을 지연시킨 장본인 중 하나인데, 그 이유는 새로운 절대왕권이 봉건제의 근간인 귀족권력의 약화로 이어질지 모를 개연성 때문이다. 모든 권력자들은 개인과 국가의 안위에는 근본적으로 관심이 없으며, 자신들의 권력체계의 체화인 고급아비투스의 성벽수호가 최우선이다.

    워윅 백작이 두려워하는 것은 조안의 애국심을 정점으로 한 ‘국가주의’(212)의 대두로서, 왕의 정치권력 확대를 항상 눈여겨보고 종교권력의 대부인 코촌 주교와 야합하여 조안의 종교적 영향력 확산을 억제하고 동시에 찰스 7세의 정치 영향력을 전략적으로 견제한다. 영· 불의 100년 전쟁을 위시하여 중세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종교권력체제는 종교영역의 확장을 우선시하여 종교에 비우호적인 정치세력과의 투쟁에서는 생존· 진화의 전술을 개발해오고 경제자본세력과의 협력과 협잡을 통해서는 시스템운영을 위한 부의 축적에 최선을 다했다. 그들은 한 손에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손에는 정치권력을 쥐고서 비영리복음사업을 명목으로 영리사업에 직· 간접으로 투자· 위탁관리하면서 막대한 부를 벌어들인다. 코촌 주교는 워윅 영국영주를 앞에 내세워 조안을 제거하는데 적극 활용하지만 그녀의 신속한 처형판결보다는 시간여유를 갖고 많은 국민들 앞에서 마녀에서 하나님의 착한 자식으로 개종시키려는 교묘한 정치수완을 발휘한다. 그는 종교경영전문가답게 조안의 사후에 발생할 종교적 후유증을 줄이고, 아울러 그녀로 하여금 교회중심의 종교환경과 전통을 인정케 하여 추종자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설득하지만 실패한다. 코촌은 대주교와 여러 수사신부들과 함께 조안이 개인적으로 교회 밖에서 천상의 신적 계시를 받은 사실을 악령의 소리에 유혹된 마녀의 신성모독죄와 신교로 몰아가면서 전통교회의 권위가 인정하지 않는 개인의 신앙자유를 철저히 통제한다. 대주교도 코촌의 교회권위 방어전략에 협조하면서 조안에게 “너의 개인적 판단을 정신적 지도자들의 교시보다 중요시하여 네 일신을 망친다면 교회는 너를 버리고 못된 억측 때문에 네가 어떤 운명에 처하더라도 방치할 것이다”(250)라고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조안과 오를레앙성에서 처음 영국군을 격퇴시킨 뒤누아 장군도 동고동락했던 프랑스군도 앞으로 교회의 제도권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그녀를 버릴 것이며 왕위 대관식으로 빚만 늘었다고 오히려 불평하는 찰스 7세 또한 영국법정에 잡혀있는 그녀의 몸값을 치를 돈이 없다고 외면한다. 3년간 프랑스와 왕을 위한 하나님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조안은 자신의 존재가 국가체제의 중심축인 종교와 정치세력이 쌓은 고급아비투스를 위협하고 나아가 적대국인 영국의 상부귀족층의 위기감을 증폭시킨 결과로 공공의 적인 마녀로 몰린 현실을 인지한다.

    조안은 국가권력이 만든 지배문화의 가치와 운영체계를 거부함으로써 5가지의 반종교질서범으로 죽임을 당하지만 관객에게 ‘종교·정치·교육·자본’이 결탁하여 조작한 사회문화구조의 모순과 억압의 속성을 인식시킨다. 중세이후 권력계급들은 자본과 종교를 바탕으로 국가통제를 위하여 지배문화인 고급아비투스와 하위계층의 저급아비투스를 양분하여 조작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조안의 저항은 인간을 노예처럼 순응과 복종으로 몰아넣는 종교정치권력에 대한 정상적 도전행위이지만 “예수, 갈릴레오, 혹은 그보다 덜 중요한 후대의 사람들 중 한 개인의 투쟁과도 같다.”33) 푸코(M. Foucault)가 “권력의 작동에는 일상 생활의 가치와 규범인 이데올로기를 생산해내는 것이 중요한 요소이며 군주의 권력 행위가 실현되려면 그에 상응하는 정치사회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34)라고 말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무장한 조안이 공격한 코촌과 워윅의 지배이데올로기이자 전제적 권력의 산물인 아비투스는 쉽게 공략당하고 붕괴될 실체가 아니다. <성녀 조안>은 마지막 부분인 에필로그에서 몽환적 꿈의 분위기를 빌러 조안의 부활과 공모자들의 변론을 재현하면서 어느 편이 일방적으로 패배하는 시각적 결과를 제시하지 않지만 ‘권력의 억압과 개인의 종속성’이란 존재의 위기를 신랄한 냉소주의로 경고한다. 조안이 천상의 목소리들-성 마가렛·성 캐서린·성 미카엘-로부터 “하나님께서 프랑스를 도우리라(God will save France, 222)”라는 계시를 들은 후 “교회의 축적된 지혜와 지식과 경험, 그리고 유식하고 신심 깊은 학자들로 구성된 교회의 평의원회의 수사들”(200)의 전통권위는 조안을 죽음으로 이끌어 갔지만 그녀의 내재적인 창조적 진화 에너지인 코나투스를 근원적으로는 소멸시킬 수 없었다. 종교·정치권력의 기대와는 달리 역으로 조안은 전쟁이전의 천상의 순수성과 전쟁후의 지상의 현실 체험의 체화단계를 거쳐 계급차이를 심화시키는 권력집단의 공모성과 폭력성을 공격한다. 그녀는 영적 신성의 근간에 소통과 직관력을 더하여 고급아비투스가 생산해내는 사회구조적 병리현상인 구성원들에 대한 획일적 정치공포와 억압에 자유롭게 저항한다. 조작된 이데올로기의 응어리인 현실사회체제가 곧 권력의 모순적 실체라는 사실을 파악한 다음 조안은 주변 인물들에게 공동체에서 각자의 능동적 참여와 공감의 길을 자의적으로 선택하라고 제안한다. 생의 방향성에 대한 조안의 자유선택은 억압과 예속에서 자유로운 감성의 소유자만이 행할 수 있는 실천력으로 창조적 진화의 에너지이며 코나투스에 의한 생존의 열림 가능성이다.

    28)J. Percy Smith, The Unrepentant Pilgrim: A Study of the Development of Bernard Shaw, London: Victor Golland Ltd., 1966, pp. 17-18.  29)성회경, 앞의 책, 105-114쪽, 스피노자의 인식의 3단계 참조.  30)Charles A. Berst,Shaw and Religion, University Park, Penn. and London: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81. p. 16.  31)Ibid., p. 269.  32)G. B. Shaw, Saint Joan, 동인, 2003, p. 404 이하 이 작품의 본문 인용은 괄호 안에 쪽수만 기재함.  33)Joseph MacCabe, George Bernard Shaw: A Critical Study, London: Kagon, Paul, Trence, Trubner & Co., Ltd., 1964, p. 76.  34)김부용 옮김, 『광기의 역사』, Madness & Civilization: A History in the Age of Reason, Michel Foucault. 인간사랑, 1991, p,134.

    5. 결론

    극작 기법은 스트린드베리히와 입센 및 라블레를, 철학은 스피노자와 니체 그리고 베르그송을, 사회과학은 마르크스와 라마르크 및 다윈을 가까이 했던 쇼는 극작가· 철학자· 사회개혁주의자로서의 사회가치와 체계에 대한 책임감과 문제제기로 브레히트, 밀러(A. Miller), 마멧, 푸코, 들뢰즈(G. Deleuze), 부르디 외의 사회학적 비판성향과 긴밀하게 연계된다. 쇼의 냉소적 희극은 사회경제적 모순을 푸코와 부르디외의 권력억압과 고급문화의 방어기제에 대한 사회구조적 현상학으로 공격하고 스피노자· 니체· 베르그송의 생존의 디오니소스적 욕망과 공생의 기쁨을 치유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쇼는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하는 평범한 사건들을 두서없이 나열·배치하여 20세기 초 영국사회 권력의 구조적 폭력성과 병리현상을 페미니즘적·마르크스주의적· 사회문화적· 철학적· 종교적 접근으로 경고하거나 변화를 요구한다. “예술을 빅토리아시대의 속물 근성에 대항하는 무기로 본”35) 그는 우화· 동화· 전설· 역사· 실제사건 등을 극 이야기의 중요한 플롯으로 이용하면서 관객의 예상을 전복시키는 충격 기법들을 자유롭게 활용한다. 그는 풍자· 반전· 대비· 역설· 아이러니· 독설· 냉소· 웃음· 논쟁· 산문체· 말장난· 몽환적 꿈· 원형인물· 회귀구조 등을 혼용하여 표현주의극과 초현실주의극 기법 및 브레히트의 서사극의 소외효과와 유사한 메타연극기법을 탄생시킨다. 쇼의 실험무대는 “사상의 공장이요, 의식을 고취시키는 곳이며, 사회적 행위의 해설자이고, 절망과 둔감에 반하는 무기고이며, 인간의 진보를 염원하는 사원이다”라고36) 주장한 대로 관객의 잠든 의식을 깨어나게 하는 논쟁의 연단이다.

    그의 극들은 대체로 여러 번 읽거나 봐야 작가의 내재된 의도를 약간이나마 인지할 만큼, 단선적인 이분법적 대립관계와 인물분류화를 바탕으로 초인사상과 진화 생명력, 부에 의한 계급투쟁, 신여성의 페미니즘류의 표층적 의미접근은 가벼운 읽기로 마무리될 우려가 크다. 쇼는 비록 다양한 내용과 이야기들을 50여 편이 넘는 희극에서 냉소와 반전을 통해 관객과 독자를 혼돈의 회오리 속으로 몰아넣어 다양한 해석과 관점들이 가능한 디오니소스적 무대공간을 재현 하지만 그의 고민은 결국 인간이 삶을 어떻게 살고 세상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과 답이다. <워렌부인의 직업>, <피그말리언>, <캔디다>, <바바라 소령>, <상심의 집>, <성녀 조안>은 사회구조와 문화에서의 불균형과 차이를 자본과 교육 및 종교의 공모로 조작된 국가통제권력이 파생시킨 불가피한 부정적 결과라고 폭로하고, 사회를 직접 개혁시키기보다 그 속에서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자 한다. 쇼의 희극이 그려내는 사회와 국가의 중심부는 종교·자본·정치에 의한 음모로 조작된 소수의 국가권력층으로서 구성원들의 이성을 조정하고 감성과 본능을 억압하여 지배문화에 순응하도록 강요한다. 인물들은 자본과 종교가 엮어서 생성한 비가시적 유기체처럼 살아있는 거대한 그물망인 권력의 실체에 의해 주체성을 상실하고 조직의 질서체제를 따르는 종속성을 탈피하지 못한다. 소수의 주요 인물들은 푸코의 권력억압과 부르디외의 고급문화의 아비투스를 스피노자의 생존욕망인 코나투스와 자유감성 및 니체의 생에의 의지로 극복하고, 베르그송의 직관으로 생동적이며 역동적인 실재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지한다.

    상당한 부와 지위로 사회적 권위를 확보한 크로프츠, 가드너 목사, 히긴스 교수, 피커링 대령, 모렐 목사, 버게스는 결혼과 교육을 미끼로 타자의 생존욕망인 코나투스를 억압하고 차별화를 통한 고급문화의 아비투스를 수호하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크로프츠는 자본주의가 파생시킨 추악한 경제활동인 매춘업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워렌부인을 농락한 후 딸인 비비에게도 동일한 수단인 재산과 유산을 명분으로 청혼하지만 거절당한다. 일라이자의 가난과 무지를 비난하는 히긴스는 과잉의 재산과 지식을 베푼다는 가진 자의 여유로움에서 언어와 매너의 학습효과를 상승시키지만 타자로부터 결혼상대로서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 모렐 목사는 렉시 목사보와 여비서로부터 존경과 흠모를 받고 교구의 신자들에게 수준 높은 설교를 도맡아 하지만 캔디다의 사랑을 재확인해야할 만큼 신과 인간에 대한 믿음이 허약하다. 크로프츠의 자본과 히긴스의 교육 및 모렐의 종교는 영국사회를 통제하는 국가권력구조를 지탱하는 세 개의 중심축이다. 국가권력계급을 대신하는 이들은 파트너인 비비, 일라이자, 캔디다에게 결혼과 신분상승을 매개로 관계의 연결고리를 유지하지만, 자유로운 감성과 직관력을 회복한 타자들의 저항은 권력의 속성인 억압과 광기의 부정적 가치체제를 거부하거나 해체시킨다.

    바바라와 앨리는 대립관계에 처한 종교와 자본의 권력투쟁에서 발생하는 광기· 죽음· 범죄· 전쟁· 근친상간의 영역에서 개인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긍정의 사회화 과정을 재현한다. 쇼의 많은 인물들 가운데 성녀 조안과 함께 신에 대한 믿음이 순수하고 조건 없는 사회봉사자인 구세군소령 바바라는 무기업자인 아버지 언더샤프트의 자본지원 없이 어렵게 구세군사무실을 운영한다. 종교와 경제의 분리를 원칙으로 신의 말씀을 실현하면서 종교의 힘을 확장하려는 바바라는 결국 아버지의 피의 돈을 수용함으로써 자본의 위력을 실감하게 되고 종국에는 종교의 위치서열을 경제권력 아래로 떨어뜨린다. 그리고 위생적 작업환경과 작업시스템이 체계적으로 완비된 언더샤프트의 무기 공장 노동자들 역시 농성이나 불만 없이 제품생산에 집중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이미 자본권력의 억압 방어기제에 길들여진 순응자들이다. 자본과 종교의 권력투쟁에서 패배를 인정하고 불가피한 협력관계를 제안하는 바바라와는 달리, 앨리는 쇼터버 선장의 지혜를 배움으로써 종교와 자본의 한계성을 인지하고 자연이 신이라는 스피노자의 범신론과 베르그송의 순수시간의 역동성과 항상성을 수용한다. 앨리는 지금 시간의 현존재에 집중할 수 있는 통찰력을 통해 삶의 에너지인 코나투스를 회복시키고 자본과 종교권력의 음모의 고급문화의 허구성을 해체시키고 타자와의 공존과 상생이 가능한 자유로운 감성의 아비투스를 재구축하게 된다. 제정러시아 말기 상류계급의 고급아비투스에 대한 절망과 고발을 묘사한 체홉(A. Chekhov)의 <벚꽃동산>(The Cherry Orchard)의 영향을 받은 <상심의 집>은 1차 세계대전으로 치닫는 위기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경제권력과 종교권력의 암투에 집착하는 과거지향적인 권력향유자들의 아비투스를 무너뜨리고 88세의 노선장의 대리인 신부 앨리에게 생존을 위한 노선의 항해를 맡긴다.

    잔다크가 개입한 백년전쟁의 유럽은 십자군 전쟁의 실패와 종교개혁, 르네상스 등의 새로운 기운이 종교에 의한 감성의 억압시기인 중세를 종식시키며 근세로의 전환을 꾀하는 시기에 진입하여 구교가 신교에 의해 잠식당하고 봉건주의 사회체제가 절대왕권체제로 넘어가는 격동의 변환기였다. <성녀 조안>은 15세기의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 중 일부의 역사적 실제사건을 통해 20세기 세계대전이후의 영국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병리현상을 냉소적으로 패러디한다. 잔다크의 종교와 정치권력의 공모에 의한 화형은 예수의 처형과 1차 세계대전과 함께 억압된 이성 즉 광기에 의한 역사적 비극으로, 이 극은 국가 권력이 고유한 가치체계인 고급아비투스의 두터운 이데올로기 성벽을 방어하기 위해 모든 수단과 전략을 마다하지 않는 현실을 보여준다. 종교와 정치, 종교와 자본, 자본과 정치, 정치와 교육의 공모와 대립에서 생산되는 푸코의 국가권력의 억압과 통제의 고도의 방어기제는 조안을 마녀사냥의 미명하에 죽음으로 마무리했듯이 2014년 현재 세계도처의 공동체에서 공통성과 공통개념의 복구를 지연시키는 방해기능을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쇼는 관객에게 조안의 죽음을 정치적 경고의 메시지로 전달하면서 동시에 천상의 소리를 듣는 능력과, 지상의 현실과 시간의 항속성을 집중하여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직관을 대안으로 제안한다. 조안을 위시한 비비, 캔디다, 앨리와 쇼터버 선장은 쇼가 해학의 구애와 사랑놀이마당에서 현대문명의 모순과 병리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인문과학적 혹은 철학적 대안으로 당당하게 속내를 내보이고 싶은 정답이다.

    35)Smith, On Shaw, p. 298.  36)Earnshaw, p.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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