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테로토피아>의 탈경계성*

Les trans-frontieres de Heterotop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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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예술에서 순수성의 문제는 세 차원에서 숙고할 수 있다. 첫 번째 차원은 장르의 순수성으로 음악, 미술, 무용이나 연극이 고유의 영역을 간직하는 것을 뜻한다. 두 번째 차원은 양식의 순수성으로 예를 들어 연극 내에서 비극, 희극, 드라마, 팬터마임의 경계를 엄격하게 지키는 것을 뜻한다. 세 번째 차원은 공간의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예컨대 회화에서 화가의 그림은 순수한 창작품이지만 이 그림을 담기 위해서는 그림틀이 필요하다. 틀에 따라 그림이 돋보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틀은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었지만, 그 자체가 예술품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를 에르곤(ergon)과 파레르곤(parergon)으로 나누어 예술품을 에르곤으로, 주변을 장식하는 것을 파레르곤으로 명명했다. 이를 연극의 공간에 적용시키면 예술행위가 펼쳐지는 무대는 에르곤으로 이를 수용하는 객석은 파레르곤이 될 것이다. 회화에서 틀이 장식인가 예술인가를 논하듯이, 연극에서 관객(객석)이 장식인가 아닌가를 논구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사실 근대 이후 장르나 양식의 혼용과 크로스오버의 현상은 해체철학으로부터 이론적 근거를 제공받았다고 해도 무방하다. 우위와 열등, 좋은 것과 나쁜 것, 선과 악의 분리가 상대적이며 결코 개념화될 수 없다는 해체철학이 대두되면서 예술에서 잡(섞임, 장식, 틀)의 의미가 새롭게 개진되었다고 할 수 있다.

    통합예술의 의의를 밝히기 위한 공연예술로 현대발레의 선구자로 불리는 윌리엄 포사이스의 <헤테로토피아>는 좋은 예가 된다. 2013년 국내에서 공연된 <헤테로토피아>는 관객에게 충격적일만큼 해체적 공연을 보여 주었다. ‘춤의 해체주의자’로 불리는 포사이스는 조명과 음향, 퍼포먼스, 설치미술 등과 연대하였고, 발레동작의 과감한 해체와 조합으로 탈중심화, 파편화, 예측 불가능성, 탈초점으로 인한 움직임들의 사이와 전이과정의 부각, 불균형 등의 기술을 선보였다. 본 글은 비교적 최근 작품으로 포사이스의 해체발레의 중심에 서 있는 <헤테로토피아>를 중심과 배경, 경계와 탈경계의 관점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본고가 추구하는 것은 <헤테로토피아>의 작품 가치의 경중이나 예술적 수준을 다루기보다는 공연예술에서 예술가의 상상력과 창조력이 어울려 탈경계의 이념이 어떤 방식으로 실현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를 논구함에 있어 이분법적 구조를 해체시키려 한 데리다의 해체철학은 매우 유용할 것이다. 포괄적으로 데리다의 해체는 경계의 해체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En ce qui concerne le problème de la pureté dans les arts, on peut le réfléchir dans les trois dimensions. En premier lieu, il s’agit de la pureté du genre, comme un domaine propre au théâtre, à la danse, à la musique ou à l’art. En deuxième lieu, comme limite stricte parmi la tragédie, la comédie, le drame et le pantomime, il s’agit de la pureté du style. En troisième lieu, il s’agit de la pureté concernant l’espace. Par exemple, dans la peinture on a besoin des cadres pour y mettre l'objet d'art. Alors, d’une manière générale, le tableau même est considéré comme l’art pure, tandis que les cadres de tableaux ne sont que l’ornement. Chez les grecs anciens, l’ergon signifiait l’art comme une peinture, alors que le parergon signifiait l’ornement comme cadres.

    Si l’on s’adapte au théâtre le concept de l’ergon et du parergon, la scène peut correspondre à l’ergon et la salle peut correspondre au parergon. Alors, chez Derrida “le parergon désigne une extériorité qui est en même temps un fondement, une sorte de dehors à la limite du dedans.” Si c’est comme ça, il reste à savoir si la salle (le parergon ou le public) est réellement une sorte de dehors à la limite du dedans. En réalité, depuis les temps modernes, le phénomène des trans-frontières parmi des arts va de pair avec le concept de la déconstruction parlée par Derrida. “Si le terme ‘déconstruction’ a d'abord été utilisé par Heidegger, c'est l'oeuvre de Derrida qui en a systématisé l'usage et théorisé la pratique.” Dans la mesure où la dualité entre la supériorité et l'infériorité, le bon et le mauvais, le bien et le mal n’est que relative dans la pratique de la déconstructivisme, le sens du parergon se renouvelle.

    Hétérotopie de William Forsythe peut être un bon exemple pour éclairer le concept de trans-frontières dans les arts. Ce ballet qui représentait en 2013 en Corée, avait une place dans l'estime du public coréen. Surtout il est estimé comme spectacle typique de la déconstruction. Forsythe, appelé l’artiste de déconstruction, non seulement intégrait l’éclairage, le son, la performance et l’installation dans son ballet, mais aussi y déroulait de nouvelles techniques de mouvement comme déséquilibre, imprévisibilité et defocus etc. Par consèquent, c’est possible d’analyser Hétérotopie selon le point de vue des trans-frontières. Par là, on peut confirmer comment l’idée des trans-frontières se réalise dans l’harmonie déconstructive composée par l’imagination et la création de l’artise. Pour disserter le performance de Forsythe, la déconstructivisme de Derrida serait utilisable, car celle-ci derridarienne n’est globalement d’autre que déconstruction des frontières ou bien des dualités.

  • KEYWORD

    포사이스 , 헤테로토피아 , 탈경계 , 해체철학 , 파레르곤

  • 1. 들어가며

    예술에서 순수냐 비순수(참여)냐의 문제는 매우 오래된 논점이다. 대략, 예술 고유의 형식과 내용에 집중하여 작가의 창조력과 상상력으로 표현된 예술을 순수예술로, 사회적·정치적 메시지를 직접 담은 예술을 참여예술로 간주하여 왔다. 이들의 개념적 대립은 예술이 예술을 위한 예술이어야 하는가, 사회 참여(engagement)의 책임이 있는가 하는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인간에 의해 창조된 예술은 그 무엇이든 인간이 형성한 사회와 결코 무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1) 그것이 순수성을 지향하든 참여를 지향하든, 예술이란 표현이며 그 표현은 나를 포함한 다른 누군가를 향하기 때문이다. 언어 차원에서 보면, ‘순수’에 대립되는 말은 ‘참여’보다는 ‘잡’(雜)에 더 가깝다. 우리말에서 ‘잡’은 상당히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를테면 잡풀, 잡념, 잡종, 잡놈(년), 잡식 등은 섞인 것, 불순한 것을 뜻한다. 예술에서도 잡예술은 일정한 장르의 고유성과 순수성이 훼손된 것, 소위 국적불명의 것으로 간주되었고 순수예술과는 엄연하게 차별되었다. 연극사를 보아도 오랫동안 연극적 순수성이 절대적인 규칙으로 적용되어 왔으며 섞임은 결코 허용되지 않았다. 17세기 프랑스 신고전주의에서 코르네이유의 <르 시드>(Le Cid)가 고전주의 규칙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프랑스 아카데미가 들고 일어섰던 것처럼, 규칙에서 벗어난 혼용의 잡연극은 용납될 수 없었다. 삼일치법과 같은 규칙이란 연극의 순수성의 훼손을 막기 위한 규칙이었다.

    예술에서 순수성의 문제는 세 차원에서 숙고할 수 있다. 첫 번째 차원은 장르의 순수성으로 음악, 미술, 무용이나 연극이 고유의 영역을 간직하는 것이다. 두 번째 차원은 양식의 순수성으로 예를 들어 연극 내에서 비극, 희극, 드라마, 팬터마임의 경계를 엄격하게 지키는 것이다. 세 번째 차원은 공간의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예컨대 회화에서 화가의 그림은 순수한 창작품이지만 이 그림을 담기 위해서는 그림틀이 필요하다. 틀에 따라 그림이 돋보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틀은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었지만, 그 자체가 예술품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를 에르곤(ergon)과 파레르곤(parergon)으로 나누어 예술품을 에르곤으로, 주변을 장식하는 것을 파레르곤으로 명명했다. 에르곤과 파레르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경계가 자리 잡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를 연극의 공간에 적용시키면 예술행위가 펼쳐지는 무대는 에르곤, 이를 수용하는 객석은 파레르곤이 될 것이다. 전통적으로 연극 무대는 지엄한 것이었으며 ‘관례’라는 규칙에 따라 관객의 개입은 결코 허용되지 않았다. 관객의 무대로의 개입은 그야말로 ‘잡’이 되는 것이며 연극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부터 근대의 사실주의 연극에 이르기까지 공간 섞임의 거부는 연극의 가장 오랜 전통이다. 이러한 사실은 연극의 삼대요소 가운데 하나인 관객이 장식품에 불과하다는 모순을 낳는다. 관객 없이 연극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절대로 넘나들 수 없는 공간의 불가침은 관객을 일종의 장식으로 전락시킬 뿐이다. 그렇다면 연극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겨난다. 배우를 위한 연극도 아니고 관객을 위한 연극도 아니라면, 그곳에 존재하지도 않는 제 삼자 이를테면 유령처럼 떠도는 권력자를 위한 연극이란 말인가. 사회적 메시지를 즉석에서 가장 확실하게 전달할 수 있는 선동적 특징을 지닌 연극이야말로 대중을 교화하고 다스리기에 가장 적합한 예술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연극이 절대 권력의 시녀가 아닌, 예술의 승화체가 되기 위해서는 공간의 이중적 논리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회화에서 틀이 장식인가 예술인가를 논하듯이, 연극에서 관객(객석)이 장식인가 아닌가를 논해야 한다. 사실 순수와 잡이 손을 잡고 균형을 이루려는 근래의 현상2)은 해체철학의 공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우위와 열등, 좋은 것과 나쁜 것, 선과 악의 분리가 상대적이며 결코 개념화될 수 없다는 해체철학이 대두되면서 예술에서 잡(섞임, 장식, 틀)의 의미가 새롭게 개진되었으니 말이다.

    잡예술 혹은 통합예술의 의의를 밝히기 위한 공연으로 현대발레의 선구자로 불리는 윌리엄 포사이스(William Forsythe)3)의 <헤테로토피아>4)는 좋은 예가 된다. 2013년 국내에서 공연된 <헤테로토피아>는 충격적이어서 현대발레를 새롭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포사이스는 이미 ‘춤의 해체주의’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조명과 음향, 퍼포먼스, 설치미술 등과 연대하였고, 발레동작의 과감한 해체와 조합으로 탈중심화, 파편화, 예측 불가능성, 탈초점으로 인한 움직임들의 사이와 전이과정의 부각, 불균형 등의 기술을 발견하였다.5) 본 글은 포사이스의 해체발레의 중심에 서 있는 <헤테로토피아>를 중심과 배경, 경계와 탈경계의 관점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본고가 추구하는 것은 <헤테로토피아>의 작품 가치의 경중이나 예술적 수준을 다루기보다는 공연예술에서 예술가의 상상력과 창조력이 어울려 탈경계의 이념이 어떤 방식으로 실현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를 논구함에 있어 이분법적 구조를 해체시키려 한 데리다의 해체철학은 매우 유용할 것이다. 포괄적으로 데리다의 해체는 경계(대조)의 해체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1)이러한 언급은 삶이란 세계와의 연관성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고, 철학이나 예술이 인간과 세계를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현상학적 태도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2)통합, 통섭, 상호텍스트성, 다원, 다양성은 이러한 인식 변화의 결과이다.  3)연극에서 갑자기 발레를 언급하는 것은 널뛰기 인상을 주지만 경계를 넘어서려는 혼용의 예술미학에서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본다. 더구나 포사이스의 발레는 연극적 요소를 함유하고 있다. 2005년 ‘The Forsythe Company’를 창단한 포사이스는 발레의 한계를 확장시키고자 급진적이고 실험적인 발레를 꾸준히 선보여 왔다. 대표적인 공연으로 (2005), (2005), (2005), (2006), (2007), (2008), (2008) 등이 있다. 포사이스는 “발레 테크닉에 현대정신을 도입하는 작업으로 발레동작의 과감한 해체와 조합에 빠른 속도감을 더함으로써 자기만의 독창적 테크닉을 개진하며 현대발레의 아방가르드를 주도해왔다.”(조은미, 「월리엄 포사이드의 무용기법에 관한 연구」, 한국무용교육학회지, 제 18권 2호, 2007, 21쪽)  4)2006년에 초연된 <헤테로토피아>는 미셀 푸코(Michel Foucault)의 논문 「다른 공간들」(Des espaces autres)(1967)에서 언급된 ‘헤테로토피아’의 개념을 차용한 작품이다. 푸코의 ‘헤테로토피아’ 개념에 대해서는 논문 「관계 속의 공간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 사이버스페이스 그리고 연극-」 (이선형, 드라마연구, 제 42호, 2014)을 참고할 것. 내한한 <헤테로토피아>는 2013년 성남아트센터에서 공연되었다.  5)조양희, 「윌리엄 포사이드 작품 「Impressing the Czer」에 나타난 해체주의적 성향연구」, 한국무용교육학회지, 제 20집 제 2호, 2009, 146쪽 참조.

    2. <헤테로토피아>의 탈중심 미학

    현대발레에서 미학적 예술 실천적 양식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첫째, 무용의 언어적 측면에서 발레의 무용언어와 특히 현대무용의 언어 – 때로는 재즈나 민속춤의 언어 – 간의 과감한 혼용이다. 둘째, 현대발레를 지향하는 발레단의 레퍼토리가 거의 대부분 일종의 절충주의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절충은 단순히 레퍼토리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용 언어, 양식에서도 이루어지는 절충이다. 셋째, 극장 예술적 장면구성이나 무대 기술상 현대발레는 대부분 종합발레(Total Ballet)를 지향한다.6) 그런데 이러한 현대 발레의 특징은 포사이스의 발레에 거의 그대로 적용시킬 수 있다. 우선 그의 발레는 혼용의 결정판이다. 발레 같지 않은 발레일 정도로 스트리트댄스(street dance)에서 현대무용까지 다양한 춤들이 혼용되어 있다. 또한 포사이스의 발레는 연극 같은 공연 양식을 도입하여 낯선 무대 언어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절충주의적인 발레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하이테크 발달 덕택에 가능해진 전자음을 비롯한 다양한 소리, 혁신적인 조명, 특수 효과로 건축된 멀티미디어의 무대장치 덕택에 발레는 종합적이 되고 공간 운용의 폭이 대폭 확산되어 있다.

    포사이스의 발레는 전반기에는 솔로와 군무, 강조된 공간과 배척된 공간 사이에 적절한 리듬을 주면서 발레의 기본적인 틀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다. 현대발레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짜르에게 영향주기>(Impressing the Czar, 1988)에서도 리듬과 공간의 운용에 있어 균형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기존 발레와의 차별화를 시도한다. 무용수의 동작이 마치 일상의 동작처럼 보이기도 하고, 점프, 회전 같은 난이도 높은 전통적인 동작은 사라진다. 흔히 전통발레에서 강조하는 수직성에서 탈피함으로써 중력과의 관계를 다양화시키고 풍요롭고 자유로운 움직임을 창출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의 발레는 초점도 없으며 이완된 자세로부터 중심점이 해체되어 의도적으로 불균형을 추구한다는 인상을 준다. “발레의 근간이 수직성과 명백한 수월성을 무시하면서, 포사이드는 방향 정위의 많은 다른 면들이 공존하도록 허용하며, 고전 테크닉에서 역점을 두는 통제나 기교와는 완전히 다른 이완 유동성의 특질을 움직임에 부여하는 불균형을 도입했다.”7) 포사이스의 발레를 가리켜 파격적, 실험적, 해체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8)

    종합발레로써 <헤테로토피아>는 순수보다는 ‘잡’의 특징을 보여준다. 기계음향과 괴성에 가까운 목소리의 조합, 조명의 적극적 활용, 예기치 않은 구성과 형상은 풍자적이며 파괴적이며 혼합적이다. <헤테로토피아>에는 중심이 없다. 무용수의 움직임이 그러하며, 무용수와 관객과의 위치도 중심과 주변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공연에서 공간의 중심은 (중심)인물들에 의해 구축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곳에서 중심인물은 부재의 상태로 인물들의 공간 활용은 다각적이며 비균형적이며 산포(dissémination)되어 있다. 어느 한 지점에 조명이 집중되지도 않으며 인물들이 집중적으로 모이는 지점도 없다. 공간은 자율적이며 분산되어 있는 것이다. 보기에 따라 무용수들은 환자들 같기도 하다. 소통불능의 자폐증 환자라고나 할까. 그들은 소통을 욕망하나 끊임없이 미끄러질 뿐이다. 혼자인 듯 함께 하고 함께하는 듯 혼자의 모습이다. 이성(일상어)적인 대화체가 아닌 몸으로 말하고 몸짓으로 소통하려는 모습은 마치 원시림 속의 동물과도 같다. 이렇듯 탈균형화, 탈중심화, 탈초점화(disfocus)9), 동물의 몸짓을 자유롭게 지향하는 포사이스의 발레는 이해가 어렵고 풍자적이며 파괴적인 인상마저 준다. 이를테면 그가 즐겨 사용하는 에폴망(épaulement)10)은 신체의 비틂에서 균형과 중심잡기에서 빠져 나오기 위한 수법이다.11) 또한 무용수가 두 팔을 최대한 뻗으면서 힘의 방향이 머리 뒤쪽으로 향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탈중심의 자세는 발레의 내적 근육을 가지런하게 취하는 동작에서 벗어나도록 한다. <헤테로토피아>에서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마치 스트리트 댄서들의 움직임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사실 포사이스는 발레에서 움직임 자체보다는 변화에 주목한다. “포사이스에게 있어서 움직임은 자세보다는 그것들의 변화가 중요시된다. 춤의 진행은 기존 발레에서처럼 정해진 방향성이나 확실한 동작의 구분 없이 이루어지므로 ‘탈초점’의 모습을 구현하며, 그것은 움직임들 간에 동등한 권리가 주어지는 방식으로 ‘움직임 내부의 역학적 개념을 향한 강조의 급진적 이동’이 이루어지는 것이다.”12)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매끄럽지만 점프 컷(jump cut)처럼 단속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움직임의 지속적인 변화 덕택이다. 움직임의 변화는 인간의 본능적 움직임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는 것을 염두에 둔다. 루돌프 폰 라반(Rudolf von Laban)13)이 그랬던 것처럼 포사이스 역시 본능적인 움직임, 인간적인 움직임이 무엇인가를 탐구해 왔고 그 결과 발레의 틀을 벗어나 몸의 움직임 자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그러므로 발레의 동작은 고정적이거나 규칙적이지 않으며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은 없다. 짜임새가 흐트러진 몸의 움직임은 순전히 즉흥적이다. 즉흥은 개방적이고 자유로우며 상황에 따른 관계맺음이 가능하다. 즉흥은 현재를 살아가는 일상의 삶에서 흔히 일어나는 것들로 발레의 움직임과 일상의 움직임은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 즉흥의 움직임은 기존 공간과 전혀 다른 새로운 공간은 새로운 연출과 새로운 움직임을 요구하며 새로운 수용 태도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즉흥성을 바탕으로 지속적인 변화로 짜인 움직임은 의미가 비어있거나 무의미할지라도 그 흔적으로 남게 될 것이다.

    한편, 공연예술에서 공간 연출은 공연의 예술 수준을 결정하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공간 연출은 무대 뿐 아니라 객석의 공간까지도 포함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공연에서 순수 공간이란 객석과 분리된 무대, 즉 무대는 행위 하는 자의 공간이며 객석은 바라보는 자의 공간이라는 불변의 등식이 성립되어 있는 곳이다. 하지만 ‘잡’ 혹은 종합을 추구하고 이원적 구조를 해체하려는 <헤테로토피아>에서는 메시지 전달자의 무대와 메시지 수용자의 객석이라는 이분법은 거부된다. 그렇다면 관객은 관객으로서 어떤 역할과 태도를 취할 수 있을 것인가?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관계에서 비롯된 폐쇄성은 관객으로 하여금 수동적 자세에 익숙해지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사전의 정의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본래의 예술의 본질은 일방성과 폐쇄성에서 거리가 멀다. “예술은 주체적인 개물(個物)을 통하여 보편적인 표현을 하고자 하는 기술인 동시에 지적(知的) 활동이다. (...) 예술작품으로부터 관상자(觀賞者)가 향수(享受)하는 것은 단순히 관능적 쾌감에서 그치는 수동적인 입장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작품을 통해서 미(美)를 추창조(追創造)하는 과정이다.”14) 예술의 본질은 예술과 대면하는 관상자(관객)가 일방적인 수용 대상자가 아니라 그의 고유한 세계와 특정한 예술이 만남으로써 미를 창조해 내는 양방적 관계라는 것이다. <헤테로토피아>에서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이러한 공간이다. 이곳에서 무용수와 관객이 만나는 순간 상호 능동적 참여를 일궈내어 수평적 관계 맺기라는 해체적 예술 행위가 발견된다. 이는 발레가 절대적 형식과 의미의 틀 속에 갇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포사이스의 이념을 여실히 반영하는 것이다.

    6)John Percival, 『현대발레』, 김복선 옮김, 현대미학사, 1993, 154-155쪽 참조.  7)Roslyn Sulcas, 1995:7, 조은미, 8쪽 재인용.  8)“포사이스는, 1960년대 이후의 미국적 실험 춤의 이념과 제반 무용기법과 더불어 음향과 조명의 기술을 사용하여 파괴적이고 풍자적이며 동시에 수수께끼와 같은 발레의 형이상학을 펼쳐나가고 있다.” 위의 책, 6쪽.  9)“발레라는 기존의 관습적 체계에 대해 의문을 제시하면서, 탈촛점의 측면에서 공간의 여러 곳에 역점을 준다. “그로부터 이 모든 점들에 동등한 중요성이 부여될 수 있다. 비직선적 움직임들이 발생할 수 있으며 몸의 여러 부분들이 다양한 시간적 비율로 점들을 향해 움직일 수 있다.” 위의 책, 9쪽 재인용.  10)한쪽 어깨를 앞으로 내밀고 다른 쪽 어깨를 뒤로 빼고, 양 어깨의 선을 체중을 받치고 있는 다리 방향과 직각이 되게 하는 발레의 자세를 일컫는다.  11)“I think épaulement is our secret weapon in ballet. It’s not really the positions—I don’t really care about those. But the torsions of them: All that counter-torsion, which comes from épaulement, is what I still use to find really cool coordinations.” http://www.movementresearch.org/criticalcorrespondence/blog/?p=5213 William Forsythe in conversation with Zachary Whittenburg, 5쪽.  12)조은미, 앞의 책, 9쪽 재인용.  13)“안무가이자 무용 이론가로 알려진 루돌프 폰 라반(1879-1958)은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예술계에 창조적 힘을 발휘한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이자 철학자이다.” 신상미·김재리 지음, 『몸과 움직임 읽기』,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0, 12쪽. 특히 라반이 창시하고 제자들이 발전시킨 라바노테이션(Labanotation)은 몸의 움직임을 해부학적 관점에서 파악하고 몸과 시공간과의 관계를 분석해 움직임을 상징 기호로 체계화한 동작 기록법(movement notation)이다.  14)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29709

    3. 해체와 탈경계

    일반적으로 공연예술에서 안과 밖의 구분이 명확하다. 무엇보다도 공연장이라는 인위적 건축물은 자체로 안과 밖을 엄격하게 구분한다.15) 공연장 밖의 사람과 안의 사람은 심리, 상황, 자세, 태도, 관점에 있어 확연하게 구분된다. 그런데 구분이 아무리 엄격하다 해도 그것은 일시적이다. 안의 사람은 언제든지 밖의 사람이 될 수 있고 밖의 사람은 언제든지 안의 사람이 될 수 있다. 경계가 분명하게 구획되어 있는 것 같지만, 시간에 따른 가변적인 상황은 안과 밖의 구분이 유동적이고, 불확실하고, 비결정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공연장 내부 자체도 안과 밖으로 구분된다. 단적으로 안은 무대며 밖은 객석일 터이다. 보통 안은 예술가가 행위를 벌이는 예술 창조의 장소로, 밖은 예술가를 관조하면서 이를 수용하는 예술 수용의 장소로 인식되어 왔다. 안이며 중심이며 초점이 맞춰진 무대에서의 총체적 예술행위가 예술의 가치와 의미와 수준을 결정 짓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런데 해체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공연의 이중적 구조의 기초가 실은 소리(말)중심, 인간중심, 남성(근)중심의 사고에 덧붙이기를 한 것임이 드러난다. “데리다의 해체를 가장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이원구조는 근거 없는 것이고, 근거 없는 이원구조에 의지해 진행되는 서구 담론은 자체적으로 이미 균열되어 있음을 조명하고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데리다가 억지로 무엇을 힘들여 해체한 것이 아니라, 전통적 담론이 내부적으로 이미 해체되어 있는 사실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뜻에서 데리다의 해체를 ‘자동해체(auto-déconstruction)’라고도 한다.”16) 이에 따르면 중심과 변경의 이중 구조란 애초부터 허구이며 이 구조의 결정되어진 의미는 없고 다만 상호 차이 속에서 그 의미가 지속적으로 연기되는 성질의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데리다는 안과 밖의 구조는 상호 폐쇄적인 구조 속에서 지배와 종속의 관계가 아니라 안이 밖을 보충대리(supplément)하고 밖이 안을 보충대리하는 관계망으로 짜여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다만 안과 밖, 즉 무대와 객석이 차이가 있으며 오로지 이 차이로 인해 의미가 생겨나면서 무대는 무대의 역할을 맡게 되고 객석은 객석의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다. 물론 무대는 무대로 객석은 객석의 의미로 고정되는 일은 결코 없다. 양자의 차이는 고정되지 않으며 끊임없이 산포되어 흔적으로 남는다. 그런데 바로 <헤테로토피아>에서 무대와 객석의 폐쇄적 분할이 아닌 보충대리 관계의 차연적인 공간을 발견할 수 있다.

       3.1. 공간의 탈경계

    포사이스는 러시아 발레, 라반 그리고 포스트구조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푸코와 해체철학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서 이를 바탕으로 한 퍼포먼스, 설치미술, 영상 및 멀티미디어의 활용은 그의 발레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사항이다.17) 이러한 영향의 흔적은 <헤테로토피아>의 공간 구성에서 두드러진다. 특이하게도 <헤테로토피아>는 두 개의 공간을 운용한다. 두터운 검은 커튼으로 나뉜 두 공간 사이에는 작은 통로가 있다. 16명의 무용수들은 두 방을 바삐 오가고 관객들은 마음대로 양쪽을 왕래할 수 있다. 작은 공간에는 검은 피아노가 놓여 있고, 밝은 큰 공간에는 사각형의 테이블들이 가득하다. 테이블은 퍼즐을 맞추듯 질서정연한데, 완성된 퍼즐이 아닌 양 이따금 비어 있는 공간이 있다. 테이블은 포사이스가 즐겨 사용하는 오브제이기도 하다. 어두운 공간에서 무용수들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움직이지만 밝은 공간에서는 마치 아이들이 놀이를 하듯 자유롭게 움직인다. 밝은 공간에서 무용수들은 테이블 위를 가로지르거나 춤을 추고, 테이블이 없는 빈 공간에서 연기를 하거나, 두더지처럼 간헐적으로 테이블 밑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관객의 시선도 수평적·수직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탁자 위에서의 움직임은 무용수의 신체 전면이 노출되며, 빈 공간에서는 상반신이 노출되고, 탁자 밑에서의 움직임은 전혀 노출되지 않는다. 영화 용어로 표현하면 탁자 위의 무용수는 풀 쇼트, 비어 있는 공간의 무용수는 미디엄 쇼트, 탁자 밑의 무용수는 화면 밖(hors champ)의 인물이 될 것이다. 이곳은 외적 공간(객석)이 사면으로 둘러싸인 까닭에 배경이나 무대 장치는 없다.

    사실은 무대장치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한 쪽 테이블에 영문 대문자 알파벳들이 미니어처처럼 세워져 있다. 알파벳들은 지역이나 이름 등과 관련이 있어 보이지만 꼭 어떤 것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알파벳의 조합은 의미가 있는 단어가 아니므로 상식적인 기표가 아니다. 수수께끼 같은 알파벳은 무용수들의 인위적인 기이한 음성과 비교가 된다. 그들은 동작과 더불어 동물들 소리, 소음 혹은 낯선 소리들을 내 보낸다. 소리는 동작과 쌍처럼 어울려 감정과 느낌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무용수는 인간인데 소리는 인간의 소리가 아니다. 외계의 언어와 동물의 소리가 교묘하게 섞이며 공간 전체에 메아리친다. 새소리, 전자음, 피아노 소리가 들리지만 여전히 낯선 불협화음이다. 태고의 소리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음성과 문자, 이것이 전하고자 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해체철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들은 분석하고 이해하려 들 때 실패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전달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개념으로 묶고 의미화 하여, 분석하고 파악하려는 것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다. 이것이 역사이자 변증법이며, 학문적 태도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데리다의 해체철학에 목적이 있다면 바로 이런 태도를 송두리째 뒤집고자 하는 것이다. <헤테로토피아>에서 만나는 의미 없는 문자, 특히 알 수 없는 음성에서 데리다가 해체하고자 시도했던 음성중심주의를 떠올릴 수 있다. 그는 소크라테스, 루소, 소쉬르 등이 줄기차게 추구해 왔던 소리 중심을 배격하고자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문자를 음성의 반대편에 위치시키고 이를 옹호하고 강조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 경우 역시 이원론적 구조에 포획되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까닭에 문자중심주의를 말중심주의에 대비시키거나 또는 일반적으로 하나의 중심을 다른 중심에 대조시킨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18) 음성이든 문자든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헤테로토피아>에서 음성과 문자가 이해 불가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헤테로토피아>에서 음성과 문자는 특별한 의미를 생산해 내는 대신 다만 몸짓과 일체일 이루고 있을 뿐이다.19) 말과 문자가 동등하게 해체되었기 때문에 말이나 문자는 영원히 중심도 변방도 아니다. 전통적인 서구의 인식과는 달리 말과 문자 사이의 경계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언어의 탈경계 지대에 들어서면 말은 있는 것 같은데 줄거리는 없다.20) 비일상적 소통의 교환만 있을 뿐 기승전결이나 클라이맥스도 없다. 미는 사라지고 해석만 남게 되므로 즐거움이나 감각의 쾌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이렇듯 <헤테로토피아>의 무대에서 탈경계는 공간, 언어, 장르, 움직임 등 다층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무용수들이 활동하는 무대 자체도 예외 없이 중심이 없다. 테이블로 구축된 무대는 전체적으로 균질화되어 있으며 어디서든 스폿 없이 연기가 이루어진다. 무용수들은 제각기 독립적으로 자신의 몸동작에 열중하며 이중인화(surimpression)21)처럼 여러 장면이 겹치기도 한다. 비틀고 뛰고 외치는 몸은 결코 일사불란하지 않으며 개별적이다. 각각의 관객은 위치한 장소와 관심에 따라 독립적인 하나의 움직임을 따라가거나 전체를 조망하려 할 것이다. 초점이 맞춰진 곳이 없는 탈초점화는 동시에 모든 곳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기도 한다. 일반 공연에서는 무대 중심에 초점이 모아지는 것이 상례지만, 포사이스의 무대는 전체가 균일하다. 말하자면 <헤테로토피아>의 공간은 들뢰즈의 용어에 따르면, 균형 잡힌 수목(樹木)이 아니라 전체가 그리고(et), 그리고(et), 그리고(et)의 접속사로 조직되어 있는 리좀(rhizome)이라 할 것이다.22) 리좀의 공간에서 움직이는 몸 역시 몸의 모든 지점이 시작이자 끝이며, 중심이자 변경이 된다. 공간과 그 곳에 함유된 몸에서 동시에 진정한 탈경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무용수들의 몸은 발레에서처럼 주로 수직적 몸통 주위의 팔다리로부터 자극을 얻기보다는 어느 지점에서든지 움직임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으로 예상되며 이로부터 움직임은 끊임없이 확산되고 분산되며, 탈중심화되고 예측불가능하게 발생한다.”23) 원근법이 하나의 점(소실점)으로 수렴되는 원형적인 것에 비해 다수의 점으로 수렴되는 타원형적인 현대 회화의 특징을 여기서도 발견할 수 있다.

       3.2. <헤테로토피아>와 텍스트

    탈경계의 관점에서 포사이스의 발레 미학을 데리다의 텍스트(texte)와 더불어 조망할 수 있다. 데리다의 유명한 명제, “텍스트 바깥은 없다”(Il n’y a pas de hors-texte)24)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데리다가 기존 저자들의 텍스트 자체에 집요하게 매달려 해체하고자 하는 의도를 지니고 있으며, “시간과 공간의 복합체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데리다의 사유에서는 텍스트로 간주”25)될 수 있다는 뜻도 된다. 책(livre)과 구분되는 데리다의 텍스트는 저자도 없고 유목적이다. 안팎도 경계도 없고 시작과 끝도 없다. “텍스트의 논리는 비논리적이다. 즉 바깥과 안, 같음과 다름의 대립을 지우는 접목과 문자의 논리다. 텍스트의 작동은 절대적 종말도 시작도 이미 없는 무한한 운동으로 일반화된 접목의 작동이다.”26) 텍스트는 직물(textile) 조직처럼 이질적인 것들이 얽혀 있는 세계의 지도를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텍스트에서 하나의 원천적인 중심 개념이 있을 수 없다.27) 텍스트는 작가의 고유한 목소리를 담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한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를 그리고 다른 텍스트는 또 다른 이전의 텍스트를 복제하거나 반복한다. 텍스트는 복사(simulacrum)이며 심연 속의 심연이며 무대 속의 무대인 것이다. 따라서 텍스트는 개별적이고 독창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텍스트 안에서 중심, 존재, 고유 이름을 찾는 것이 아니라, 기존 텍스트의 재해석, 번역의 번역, 혹은 상이한 반복이라는 뜻이다.28) 포사이스의 무대 역시 중심이나 고유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이질적인 그곳은 문자, 소리, 몸동작의 지속적인 미끄러짐과 흔적으로 직조된 텍스트에 다름 아닌 것이다. 날실과 올실로 짜여 있는 텍스트는 자신과의 동질성을 추구하지 않고 항상 또 다른 텍스트와 외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상호텍스트성을 지닌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첫째, 바깥(le dehors)과 안(le dedans)의 형식적 구분과 경계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둘째, 보탬(+)과 모자람(-)의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셋째, 외부에서 첨가되는 것은 첨가를 받아들이는 어떤 것의 부족을 메워주는 역할을 하지만, 그 첨가가 ‘안의 바깥’(le dehors du dedans)에 관계할 뿐만 아니라 그 안의 바깥이 바로 ‘안의 안’(le dedans au dedans)에 속한다는 의미다.29) 텍스트의 안과 밖은 경계 지어진 것이 아니라, 안이 밖이 되고 밖이 안이 되는 보충대리가 된다. 안과 밖은 보탬과 모자람이 상호교차하고 서로 얽혀 완성의 종말이나 출발의 신호 없이 주고받기를 계속하게 될 것이다.30)

    <헤테로토피아>를 텍스트의 성격으로 간주한다면, 또한 무대를 안으로 객석을 밖으로 본다면, 안과 밖은 형식적 경계가 사라진 상호 보충대리로 볼 수 있다. 흔히 공연예술에서 언급되는 작용과 반작용, 이를테면 무용수(연기자)의 행동이 관객에 반향을 일으키고 관객의 반향이 무용수(연기자)의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것처럼, 젓가락 운동31) 방식의 주고받기가 지속적으로 일어나면서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상황과 역동이야말로 공연예술에서 무대와 객석 사이의 특징적 관계가 된다. 안과 밖이 구획되어 있지 않고 예기치 않은 작용과 반작용이 형성될 때 그 공연의 결과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게 된다. 예술 작품에는 확고한 경계가 없다는 것이 데리다의 근본적인 생각이다.32) <헤테로토피아> 역시 탈경계 속에서 이질적인 것들을 혼합하고 탈중심화를 일궈내고자 한다. 이 영역에서 예술가는 더 이상 성역에 존재하지 않으며 관객과 더불어 공동 창작에 임하는 자가 된다. 관객 또한 예술가가 제시하는 전언을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수용자적 존재로만 머물지 않는다. 실제로 <헤테로토피아>에서 무용수와 관객의 면대면의 고정된 위치는 해체된다. 관객의 자리는 주어져 있지 않고 유목민처럼 유동적이며 선택은 자유롭다. 관객은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 곳이나 자리를 잡을 수 있고 공연 중이라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이러한 비고정적인 무대야말로 텍스트 자체가 된다. “텍스트는 유목민족의 그것에 적합하다. 유목민족에게는 삶의 중심처가 없다. 끝없이 여기와 저기의 차이와 관계에서 생활을 영위해야 하기에 그들에게는 자기 안과 자기 밖의 경계라는 것이 무의미하다. 안팎의 구분이 무의미하듯, 같은 것과 다른 것의 구획도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33) 관객의 움직임은 시각 전반에 변화를 주고, 공연의 흐름을 변화시키므로 적극적인 참여 행동이 된다. 자신의 작업을 완결품이 아닌 변화와 해체의 과정으로 인식한 포사이스는 관객의 변화적 시각을 통해, 무용수의 움직임이 흔적을 남기면서 변화하는 과정으로 보았던 것이다. “해체주의자들처럼 그는 완결된 작품보다는 검토하고 재평가하는 과정에 더 관심을 갖는다. 그에게 있어 춤과 극의 언어를 문제시하고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 바로 그 동일한 언어들을 통해 그것을 실행한다.”34) 명확한 주제, 독창적인 주제를 제시하지 않는 <헤테로토피아>에는 정형화된 양식이 없다. 이는 해체예술의 특징이기도 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정형성은 고정된 스타일의 지배에서 벗어난 복합된 스타일의 추구, 복합성, 모순, 모호성의 가치와, 장식과 의상의 재수용, 예술작품의 상호 참조성의 강조와 같은 미학적 특징들을 보이는 것이다.”35) 텍스트로써 해체 예술은 개인의 독창성과 창조성이 발현되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순간순간 변화되는 관계를 형성해 나간다. 나는 타인과 구별되는 주체로서의 나가 아니라 타인의 타인으로 변화된다. 원본(현존)은 사라지고 모방의 모방, 그 모방의 흔적들만 남는다. 중심(나, 주체)이 없다는 것은 원본이 없다는 것이며 원본과 중심이 없는 곳에는 오로지 복제만이 쌓여 있다는 것이다. “텍스트의 세계에서 주객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주인이 손님이 되고 손님이 주인이 되는 그런 세계가 바로 텍스트의 본질이다.”36) 텍스트-무대에서 주객의 구분은 사라진다. 무용수가 관객이 되고 관객이 무용수가 되는 세계가 텍스트의 본질이다. 이곳에서는 더 이상 원본을 재현하지 않는다. 재현이 아닌 예술은 액자구조(심연화 하기, mise en abyme)를 지니며 서로를 끝없이 반영하는 두 개의 거울과도 같다.37) 당연히 두 거울 속에 비친 심상(image)에서 원본 찾기는 실패할 것이다. 원본과 재현의 이분법적 구조가 해체되었기 때문이며, 어느 것이든 중심(주체, 원본)이 될 수 있으며, 어느 것이든 복사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주체, 현존재, 원본이 사라지는 순간 진정한 탈경계가 가능할 것이다.

    15)인위적으로 건축된 건물에서 벗어난 거리극이나 마당극은 예외적일 수 있다.  16)김보현, 『데리다 입문』, 문예출판사, 2011, 161쪽.  17)“Forsythe is American. His dance style is from Russia, via New York. He lives and works in Germany (where Pina Bausch’s Tanztheater is another influence). His movement theories are derived from a Hungarian, Rudolf Laban. His conceptual theories come from French post structuralism.” Sanjoy Roy, theguardian.com, 2008. http://www.theguardian.com/stage/2008/oct/07/william.forsythe.dance  18)J. Derrida, Positions, 21쪽, 김형효, 『데리다의 해체철학』, 민음사, 2001, 23쪽 재인용.  19)물론 데리다에 따르면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은 말이나 소리가 아니라, 문자가 지닌 차연”(데리다, 『해체』, 16쪽)이다. 그런데 <헤테로토피아>의 문자는 차연을 통해 의미가 생겨난 기표가 아니다. 그 문자는 아예 우리의 상식과 지식에서 벗어난 문자인 것이다.  20)이러한 예는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일 것이다. 특히 저 유명한 포조의 장광설은 줄거리는 사라지고 말만 남는 경우라 하겠다.  21)데리다는 서구에서 줄기차게 추구되어 온 논리적 공간이 아닌 공간을 ‘모순적인 이중인화’(une surimpression contradictoire)라고 부른다. 문자 그대로 모순적인 이중인화는 동일한 표면에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영상이 흔적과 환영으로서 접목되는 기술과 같다.(김형효, 앞의 책, 347쪽 참조) 각기 독립적인 장면들이 한꺼번에 펼쳐지는 <헤테로테피아>의 무대 역시 이미지들이 겹치는 이중인화와 흡사하다고 할 것이다.  22)<헤테로토피아>에서 나타나는 이질적인 것들의 조합, 언제나 변형 가능한 잠정적이고 우연한 배치, 리좀의 특징을 들뢰즈의 기계(machine)와 더불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들뢰즈의 기계는 단절과 연결, 이접과 통접을 안고 있는 연접의 체계로써 한 치의 오차나 일탈을 허용하지 않는 기계 일반과는 다르다. 확고하고 일사불란한 유기체적인 체계,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계는 기계적(machinique)이 아닌 기계론적(mécanique)이 될 것이다. 한 마디로 기계적은 리좀적이며 기계론적은 수목적인 것이다. “들뢰즈는 기계론적이고 개념적인 체계를 ‘수목적인 것’이라고 부르고, 기계적이고 이념적인 체계를 ‘리좀적인 것’이라고 부른다.”(박영욱, 앞의 책, 125쪽) 수목적인 것은 수직적·균형적이며 엄격한 체계가 존재하지만 리좀적인 것은 수평적·비균형적이며 다양체로 존재한다. 경계가 명료하여 상호 교류가 단절되고 각 영역에서 동질적인 것으로만 구축되어 있는 공연이 수목적이라면 경계가 불분명하고 이질적인 것들의 잡동사니로 이루어진 공연은 리좀적이 될 것이다. 리좀적 성격의 기계를 무대와 객석으로 대입하면 무대-기계와 객석-기계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공연-기계에서 무대-기계와 객석-기계는 상호에게 영향을 행사하면서 이접과 통접을 수시로 교환하는 것이 될 것이다. 어제의 공연과 오늘의 공연이 다른 것은 그만큼 공연-기계들의 연접이 다양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새로운 기계들의 연접으로 지금 이 순간의 고유한 공연이 생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수목은 수직적이며 위계적인 구조를 상징하며 통일성과 동질성을 특성으로 한다. 반면, (...) 리좀은 수평적이고 탈중심적이며, 무한한 생산성과 다양성, 개방성이 특징이다.”(박영욱, 위의 책, 126쪽) 결국 다양한 이질적인 것들의 모음이자 개방적이면서 무한한 의미를 생산해 내는 <헤테로토피아>는 탈경계적, 수평적, 탈중심적, 리좀적, 기계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3)조은미, 앞의 책, 9쪽 재인용.  24)J. Derrida, Grammatologie, 227쪽 ; D., 42, 50, 364쪽. 김형효, 앞의 책, 20쪽 재인용.  25)김형효, 위의 책, 20쪽.  26)S. Kofman et al., Ecarts, Quatre Essais à propos de Jacques Derrida, 116쪽. 김형효, 위의 책, 21쪽 재인용.  27)김형효, 위의 책, 100쪽.  28)김보현, 앞의 책, 175-182쪽 참조.  29)김형효, 위의 책, 196-197쪽.  30)김형효, 위의 책, 197쪽.  31)젓가락 운동은 약이자 독인 ‘파르마콘’처럼 보충대리를 의미한다. 젓가락 운동은 두 개로 젓가락으로 이루어지지만 한 점을 지향하므로 이원론적 운동이 아니다. 둘이되 하나이며 하나이되 둘인 차연의 논리와 같다. 김형효, 위의 책, 182-195쪽 참조.  32)데리다는 “예술작품의 근원적인 의미는 파레르곤처럼 무의미와 의미의 중첩이며, 어떠한 확고한 경계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박영욱, 『데리다&들뢰즈: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김영사, 2009, 108쪽.  33)김형효, 앞의 책, 21쪽.  34)조은미, 앞의 책, 10쪽 재인용.  35)Walker, John A., 『대중매체 시대의 예술』, 정진국 역, 열화당, 1988, 96쪽.  36)김형효, 앞의 책, 206쪽.  37)박영욱, 앞의 책, 106쪽 참조.

    4. <헤테로토피아>와 파레르곤

    해체예술에서 탈경계의 문제, <헤테로토피아>에서 보여준 탈경계의 상황은 파레르곤과 에르곤의 개념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예술의 장식 개념으로 파레르곤을 언급하고 있다.38) 이에 데리다는 『회화에서의 진리』39)에서 칸트의 예술론을 비판하면서 특히 회화에 있어서 종래의 관점인 내용과 형식, 안과 밖의 대립에 의하여 규정된 모든 칸막이와 울타리를 넘어서고자 한다.40) 데리다는 회화를 대상으로 하여 파레르곤을 언급하고 있으나 경계 규정의 측면에서 이를 공연 예술에 적용시킬 수 있다고 본다. 데리다가 보기에 회화에서 틀을 경계 삼고, 틀 안에서만 예술이 성립한다는 논지는 “전체성의 철학, 유기체적 자폐성의 철학과 다를 바 없다.”41) 고대 그리스 이후 전통적으로 신전의 기둥, 조각상을 덮는 휘장, 그림의 틀을 파레르곤으로 간주하고 예술품 자체인 에르곤과 구별하여 왔다. 즉 에르곤은 본질인데 반해 파레르곤은 에르곤의 부속품이나 장식물 정도로 여겼던 것이다. “파레르곤은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주제만을 초점으로 겨냥해 왔던 희랍철학자들과 지식인들에 의하여 푸대접을 받아왔다. 파레르곤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그런 장식이거나 열외작품(hors d’oeuvre)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42) 사실 기둥, 휘장, 틀은 예술품의 주변적인 장식으로 여겨질 만한데, 이러한 논리는 말/문자, 이성/감성, 본질/재현의 엄격한 이원론적 구조에 적용시킬 때 에르곤/파레르곤의 형식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데리다는 『회화에서의 진리』에서 칸트와 헤겔, 하이데거의 예술론의 유산을 무너뜨리고 대체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사유한다. 그는 회화의 진리를 논하기 위해 네 가지 분석틀을 제안하는데 그 중 하나가 파레르곤이다. 작품(ergon)도 아니고 작품의 바깥(hors d’oeuvre 혹은 parergon)도 아닌 것으로 이 둘을 나누는 구분법을 해체하는 동시에 작품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분명한 존재를 파레르곤으로 보고 있다.43) “파레르곤의 ‘논리’는 한 작품의 가능성이자 동시에 그것의 궁극적인 불가능성을 나타내는 결핍의 기표인 셈이다.”44) 따라서 데리다는 파레르곤이 결코 예술작품의 외적인 것이 아니라고 결론짓는다.45) 예를 들어 그림틀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그림과 잘 조화를 이룰 때 그림 자체를 한결 돋보이게 한다. 같은 영화라도 대형 화면의 극장에서 보는 것과 다운로드를 받아 컴퓨터 화면으로 보는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관객의 반응에 따라 공연 자체가 달라지는 것 역시 파레르곤이 결코 외적인 것으로만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 데리다의 논지에 따르면 가변적 양상을 지니는 객석이라는 파레르곤은 공연의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에르곤(무대)과 수평적 관계 속에서 적극적 역할을 수행하는 어떤 것이다. 에르곤과 구분이 없어질 때, 파레르곤이 에르곤에 묻히고 삭제될 때 예술의 힘은 증폭된다. “파레르곤이 에르곤에서 떨어져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라지면서, 자신을 묻어버리고 삭제하며 사라지는 그 순간, 가장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조직적으로 행동을 전개한다.”46)

    데리다는 안과 밖을 엄격하게 구분해 의미를 가두는 예술을 폭력으로 간주한다.47) 즉 일방적으로 수용하기를 강요당하는 관객의 수용미학은 데리다에 이르러 그들이 결코 주변적 요소가 아니라 예술과 동등한 관계임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엄격한 사실주의가 휩쓸고 지나간 후 현대에 들어와 공연예술에서 탈경계화 작업은 심심치 않게 이루어졌다. 그것이 무용과 연극 같은 장르 간의 크로스오버는 말할 것도 없고, 공간에 있어 연기자가 객석으로 아니면 관객이 무대로 침입하는 현상이 생겨났으며, 개방된 외부 공간에서 지나는 행인을 대상으로 하는 공연 역시 에르곤과 파레르곤이라는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자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헤테로토피아>에서 취한 다각적인 공간의 운용은 무대와 객석간의 경계 허물기이며 나아가 일상과 비일상, 현실과 환상같은 이질적인 것들로 가득 찬 새롭고 다양한 천 개의 얼굴을 한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48)의 공간이라고 할 것이다. 예술이 생생한 창작물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담는 공연 터가 변화무쌍의 공간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38)“칸트가 ‘이성의 한계 속에서의 종교’(Religion within the Limits of Reason Alone)의 각 장에 덧붙인 총론(General Remark)의 담론으로서의 지위 및 성격과 관련하여 이 개념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건대, 파레르곤은 본론에 속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무관한 것도 아닌, 일종의 덧붙여진 담론이자 그렇게 덧붙여진 담론의 필요성과 중압감에 대한 언급을 동시에 가리킨다.” 강우성, 「파레르곤의 논리: 데리다와 미술」, 영미문학연구, 제 14권, 2008, 9쪽.  39)J. Derrida, La Vérité en peinture, Éditions Flammarion, 1978.  40)김형효, 앞의 책, 352쪽.  41)김형효, 위의 책, 352쪽.  42)김형효, 위의 책, 354-355쪽.  43)강우성, 앞의 책, 8쪽 참조.  44)강우성, 위의 책, 10쪽.  45)박영욱, 앞의 책, 93쪽.  46)Derrida J., 『해체』, 454쪽.  47)박영욱, 앞의 책, 101쪽.  48)푸코의 ‘헤테로토피아’는 대략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첫째, 헤테로토피아는 어디서든 존재한다. 헤테로토피아는 인간 집단이 지니는 불변수(constante)다. 둘째, 헤테로토피아의 형태는 매우 다양하고 모호하다. 셋째, 헤테로토피아는 유동적이다. 과거에 존재했던 헤테로토피아가 사라질 수 있고 앞으로 새로운 헤테로토피아가 생겨날 수 있다. 양립할 수 없는 여러 다른 공간들이 실제 장소에서 함께 할 수도 있다. 넷째, 헤테로토피아는 유토피아의 실현화이며 상상력이 살아있는 구체적 공간이다. 이 공간에 생동감을 주고 헤테로토피아가 되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상상력이다. 그러므로 헤테로토피아는 절대적으로 ‘다른 공간’이다. 이선형, 「관계 속의 공간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 사이버스페이스 그리고 연극-」, 드라마연구, 제 42호, 2014, 173-174쪽 참조.

    5. 나오며

    <헤토로토피아>를 해체적 시각에서 바라볼 때 어떤 의미를 추출할 수 있는가? 경계가 모호하게 하는 공간의 해체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사실 이러한 질문은 고정적 분석틀을 거부하는 해체의 관점에서 크게 의의가 없을지도 모른다. 탈- 에서 전하고자 하는 전언은 처음부터 아예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한 명백한 결과를 원하는 것은 진행이나 과정보다는 그 결과를 중시하는 인식론적 습관에 익숙해진 탓이다. 특히 해체예술에서 모든 표현은 진행형일 뿐이므로 결과로 고착화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질문한다. 무질서와 비형식과 연결고리 없는 파편들의 모음인 <헤테로토피아>에서 과연 무슨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가? 이 물음은 애당초 방향이 틀렸다. 포사이스는 분명하게 대답한다. “나는 무엇을 표현하기 위해 작업하지 않는다.”49) 그러므로 제목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푸코의 ‘헤테로토피아’와 연결시키려는 노력은 허사일지 모른다. 포사이스 자신도 푸코 철학이 유용하긴 하지만 하나의 도구일 뿐이라고 말한다. 작업을 시작할 때 하나의 모티브를 제공하지만 작업이 끝날 때는 사라져 버리고 없다고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은가.50)

    그럼에도 포사이스에게서 나타나는 탈경계의 의의를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 할 수 있다. 첫째, 발레는 이렇다는 전통적 개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것은 장르의 혼합이자 확산이자 해체가 될 것이다. 둘째, 공간의 운용에서 중심(주체)이 정해진 것이 아닌 평등한 공간, 리좀적인 공간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셋째, 무용수와 관객의 위치와 상황과 태도가 고정되지 않음으로써 차연의 공연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헤테로토피아>는 고정과 습관에 함몰된 우리 사고의 근본을 재구성하는데 역점을 둔다고 하겠다. 마치 데리다의 해체가 “고정된 지금의 체계와 형식을 파격적으로 수정하여 기존의 제도와 관점을 움직이게 하기 위한 것”51)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다음의 질문이 필요하다. 구태여 무대가 필요한가? 구태여 객석이 필요한가? 경계가 애매한 무대와 객석을 구분할 필요가 있는가? 그러나 경계에서 탈피한다고 해서 차이를 없앤다면 예술은 아무런 가치가 없을 것이다. 뒤샹의 변기가 예술품으로 평가받는 반면, 다른 변기는 생활용품으로 평가받는 것은 차이를 없애서가 아니라 차이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변기라는 재질과 형태는 같지만 변기의 상황과 맥락은 전혀 다른 것이다. 무대와 객석은 경계를 해체하되 오히려 차이를 드러내야 한다. 결코 어떠한 것도 다른 것과의 차이가 없이는 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52) 연기자(무용수)는 관객과 다르다. 이 다름으로 인해 공연의 공간에서 연기자는 연기자로서 공연을 하게 된다. 그런데 관객이 없다면 연기자도 없다. 관객이 있어야만 연기자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 자기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다른 것(타자)과의 관계에서 시간적 연기나 대기운동이 필요하고 또 공간적 거리나 간격이 요구됨은 당연하다.”53) 무대와 객석의 탈경계는 각각의 영역을 와해시키려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탈경계로 인해 연기자는 연기자가 되고 관객은 관객이 될 수 있다. 하나의 예로, 배우들이 거리를 활보하면서 일반인들과 섞이는 거리공연을 한다고 하자. 어떤 경우라도 배우는 행인이 될 수 없고 행인은 배우가 될 수 없다. 그렇지만 또한 배우와의 만남의 순간에 행인은 배우가 될 수 있고 배우는 행인이 되기도 한다. 행인이자 배우, 배우이자 행인인 뒤섞임이 끊임없이 일어나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시금 배우는 배우로 행인은 행인으로 변한다. 이 섞임과 귀환이라는 변화가 공연 내내 지속된다. 배우와 행인은 각자 배우이자 행인의 흔적을 지니면서 즉 연기되면서 지속적으로 차이를 드러낸다. 차이와 연기 속에서 남게 되는 흔적, 이것이 곧 차연이다. 흔히 무대와 객석 사이의 정서와 기의 순환, 작용과 반작용이 공연예술의 중요한 핵심사항이라고 언급하는데 이를 차연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공연은 자체적인 것으로는 완성될 수 없고 객석과의 차이와 연기로써 지속적으로 흔적을 남기면서 하나의 공연으로 맺음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해체철학에 따르면 유토피아(utopie) 신화는 허구다. 유토피아는 그리스 이데아 철학과 기독교의 존재신학이 만들어 낸 유일점이자 중심점을 대변한다. 동질성, 통일성, 보편성을 내세우는 유토피아는 이질성과 다양성의 헤테로토피아를 거부한다. 유토피아의 주체는 이원구조의 대립을 강조하며 지배세력과 피지배세력을 구분하려 든다. 그들은 선과 악은 마치 빛과 어둠의 세계처럼 명백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데리다가 보기에 이러한 구분은 자체적으로 폭력이고 전쟁이다. 삶 속에 죽임이 있고 죽음 속에 삶이 있는 것이지, 삶과 죽음이 따로 떨어져 있다면 인간의 생(生)은 어찌 되겠는가. 한 문화권에서 영웅(선)이 다른 문화권에서 테러리스트(악)가 되듯이 선과 악은 경계 지을 수 없다. 왕래가 폐쇄된 경계는 폭력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공연예술에서 당연시 되어 왔던 관습적 경계 지음은 해체되어야 마땅하다.54) 이것이 포사이스의 <헤테로토피아>에서 읽을 수 있는 전언일 수 있다고 본다. 진정한 의미의 탈경계는, 세상의 모든 존재를 무한한 잠재성의 존재로 인식하고 이들이 지니고 있는 잠재성이 실현될 수 있도록 상호침투가 가능한 유연한 지대가 아닐까 생각한다.

    49)성남아트센터 공연 팸플릿, 2013.  50)“Philosophy(Foucault) can be a very useful tool. But it doesn’t have to demand or function as an imperative. Foucault was useful to start something. But I don’t know if he was useful to finish it. I’ve used Foucault on a number of occasions. And I find that he is very suggestive in terms of procedurals.” William Forsythe on Foucault’s ’space of otherness’, 2013. http://m.koreaherald.com/view.php?ud=20130410000930&ntn=0  51)Derrida J., 앞의 책. 264쪽.  52)김형효, 앞의 책, 212쪽.  53)김형효, 위의 책, 213쪽.  54)이 경계의 해체는 관객과의 소통을 이유로 별 이유 없이 객석에 불을 밝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배우의 객석 난입의 행위에 있어 진정한 경계 허물기의 철학이 없이 이루어진다면 오히려 관극의 집중도를 떨어트리면서 어설픈 공연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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