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e de 1870 chez Rimbaud

랭보와 1870년*- 두 편의 소네트 읽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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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Aux yeux de Rimbaud de 16 ans, Charleville, sa ville natale, n’était qu’une ville idiote supérieurement entre les petites villes de province. Mais en 1870, après l’entrée en fonction comme nouveau maître de rhétorique de George Izambard, cette Charleville a connu beaucoup de changements qui ont influé Rimbaud dans plusieurs domaines idéologiques, par exemple l’antibonapartisme, et républicanisme et anticléricalisme etc. Surtout, la guerre franco-prussienne ne contribue pas peu à l’émancipation idéologique du poète Rimbaud : ce qu’il voit autour de lui l’amène à réfléchir sur l’injustice sociale, la nature du pouvoir, l’oppression des peuples par les Etats qui programment la consommation de leurs propres enfants. Les caricaturistes de presse lui donnent pour ses propres poèmes l’idée d’exploiter les contrastes, de forcer le trait jusqu’à la charge. Dans les sonnet <le Mal> et <le Dormeur du val>, peut-être écrits en été de 1870, Rimbaud attaque l’alliance de l’Eglise et du pouvoir de l’Empire. D’après lui, Dieu ne peut rien faire devant le destin des populaires et des malheurex qui ont payé de leurs vies dans cette guerre absurde. Rimbaud dit que le mal est donc Dieu, symbole de l’ordre politique du Second Empire. Cette anticléricalisme n’est qu’une transformation de l’antibonapartisme rimbaldien.


  • KEYWORD

    Rimbaud , La Guerre franco-prussienne , l’Anticlericalisme , la Revolte , la Fugue de 1870

  • 1. 들어가는 말

    막 16세가 되는 랭보에게 있어서 1870년은 시인의 길지 않은 삶 중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로 평가할 수 있다. 어쩌면 남은 20여년의 삶을 반항적 공화주의자이자 진보적 자유주의자 또는 끝없이 인간 영혼의 무한성을 탐구하고자 했던 시의 구루이자 신비주의자이며 견자 즉, 예언자이기도 했던 랭보를 예감하고 만들어갈 프랑스 문학사의 출발점이 바로 1870년이기 때문이다. 특히 8월 29일은 랭보의 문학적 연대기 사상 소위 최초의 가출이 감행된 날이었고, 순탄치 않은 여정을 거쳐 파리 북역에 도착하자 마자 바로 붙들려 마자스 감옥에 갇히는 좌절의 개인사가 기록되어 있는 해였다. 정치적으로는 나폴레옹 3세의 제 2제정이 몰락하는 역사의 해였을 뿐만 아니라 그해 10월에 시도된 두 번째 가출에서 브뤼셀까지 입성하는 과감함을 보여주기도 한 해였다.1) 그러나 무엇보다도 1870년이 갖는 랭보 연구사의 예외적 중요성은 어린 시인에게 샤를르빌이라는 그 후미진 마을을 버리고 광대하고도 새로운 세계로의 탈주를 꿈꾸게 만든 문학적 스승이자 동지인 21살의 조르주 이장바르라는 수사학 선생을 만난 사건에 집중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아직 중학생이었던 랭보는 새로 부임한 수사학 선생으로 부터 문학적 정치적 사상적 특별 지도를 받았으며 자주 답답한 학교를 벗어나 그와 함께 당대 프랑스와 그 정치적 혼란에 대한 독특한 인식을 갖추게 된다.

    본고는 랭보의 대체 아버지이기도 했던 이장바르로부터 받은 문학적 사상적 교육과 영향을 점검하고 나아가 이로 인해 시인 자신이 당대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이런 것들이 실제 1870년 여름에 썼던 랭보의 몇몇 시편에 어떻게 투영되고 있는가를 검토할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이장바르와의 만남과 당대의 역사적 상황이 랭보에게 어떤 사상적 정치적 연대로 이어졌는가를 살펴보고 이어서 그 영향이 가장 확실해 보이는 1870년의 소네트 두 편2)을 분석함으로써 이 시기에 드러난 랭보의 문학적 정치적 사상적 세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1)Rimbaud (A.), OEuvres Complètes, Gallimard, 1972. pp. XL - XLI 참조  2)<골짜기에 잠든 자 Le dormeur du val> 과 <악 Le Mal> 이 그것이다.

    2. 이장바르 그리고 1870년 샤를르빌

    랭보가 다녔던 콜레쥬 드 샤를르빌에서 오랫동안 수사학을 가르쳤던 늙은 푀이야트르 선생이 병이 나는 바람에 그의 뒤를 이어 1870년 1월, 젊은 공화주의자이자 반체제적 성향의 새로운 수사학 교사 이장바르가 무슨 행운처럼 아즈부루크에서 부임하게 된다. 전임지였던 아즈브루크에서 가벼운 행실과 전위적인 언행, 조심성 없는 행동으로 교장으로부터 인사이동 요구를 받았던 적이 있었던 이장바르에게 샤르르빌 중학교장은 그에게 ‘신중하고 용의주도할 것’을 특별히 당부했을 정도였다. 이장바르는 아즈브루크 시절에 공공연하게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힘으로써 그 지방의 보수주의자들을 놀라게 했으며 주일 미사에 불참하는 반교권주의자이자 학생들을 너무 친하게 대하는 태도와, 약간의 청각 장애 때문에 교사의 권위를 세우지 못하고 교육의 질을 떨어뜨렸다다는 혐의가 인사이동 요구서에 기록될 만큼 소위 불온한 인사였다.3)

    그는 부임하자마자 “가녀리고 수줍지만, 그 수줍음은 순수한 내면적 자존심, 즉 매정한 거절에 의해 극한까지 내몰리면 몹시 화를 내고 격해져서는 급기야 반항으로 나타나는 자존심 덩어리인 꿈꾸는 엄지동자 Petit Poucet rêveur 랭보”4)를 눈 여겨 보았다. 그리고 그는 랭보에게서 지적욕구와 탐구, 엄청난 욕망아래 감춰진 나약함과 억제된 에너지를 꿰뚫어 보고 그를 자신의 집에 자주 드나들게 함으로써 지적이며 정신적 지도와 교류를 시작한다. 이장바르는 랭보의 시를 읽고 고쳐주거나 랭보의 문학계획과 독서를 지도했으며, 랭보에게 당시의 금서에 가까웠던 자신의 책을 빌려주거나 시에 대한 확고한 자신의 생각을 넣어 주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고민과 외로움 나아가 사사건건 훈계를 늘어놓는 어머니 비딸리 랭보의 편협하고도 편집증에 가까운 간섭에 대해서도 세심하게 이해를 하고 있었다. 특기할 것은 이장바르 또한 자신의 부모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어머니는 자신을 낳자마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버지는 어린 이장바르를 이웃집 여자 카롤린 쟁드르에게 남겨놓고 나머지 형제를 파리로 불러들였기 때문에 특히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서도 큰 상처가 있었다. 랭보 또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들의 만남은 비록 다섯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으나 아버지 부재라는 같은 결핍으로 인해 스승과 제자이자 동시에 형과 동생으로 발전했으며 문학에 대한 엄청난 열정으로 인해 아주 짧은 시간에 문학적 정치적 동지가 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랭보에게 이장바르는 고립되고 후미진 샤를르빌의 갑갑하고도 전망없는 일상을 흥분과 전율의 그것으로 변화시켜 준 안내자이자 형제였던 것이다.

    1870년 봄부터 랭보는 모든 일상을 감시하고 억압하는 어머니를 피해 특별 수업을 핑계로 저녁이면 스승 이장바르의 하숙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 시간은 바로 정치적 철학적 대화로 변질되거나 또는 랭보가 집에 가져갈 엄두도 낼 수 없는 책들을 읽는 것으로 채워졌다. 그 중에서도 랭보는 1758년 출판되자마자 왕과 의회, 소르본, 파리의 대주교, 그리고 로마로부터 화형을 선고받은 엘베시우스의 『정신에 관하여 De l’esprit』라는 악마적인 책에 관심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의 두 번째 저서인 『인간에 대하여 De l’homme』를 탐독했다. 이 책에서 그는 “새로운 사고와 의구심 그리고 또 다른 사회에 대한 꿈을 품게 된다. 엘베시우스와 함께 모든 반항은 바람직한 것이 되었으며 모든 내적인 연구는 자신의 진실을 찾아가는 유일한 방법”5)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너무나 자연스럽게도 랭보는 엘베시우스의 글에서 새로운 언어로 된 매우 신랄한 반교권주의를 발견하게 된다. 그에게서 랭보는 자신의 열망과 자신의 삶이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며, “마치 그 철학자가 랭보의 마음속에 들어와 감각의 가치에 대한 그의 의식을, 인간에게 봉사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재편성하려는 욕구를, 종교에 대한 비판적인 감정을, 반항은 삶에서 불가피하며 삶에 의미를 준다는 믿음을, 앎과 표현으로 이끄는 유일한 것인 자아 분석 취미를 읽어낸 것”6)만 같았다.

    엘베시우스만이 랭보를 붙들고 있지는 않았다. 랭보의 친구 들라이에의 증언에 의하면 “랭보는 루소에게서 자신과 유사한 영혼, 즉 불안하고 근심하고 대담하고 뜨겁고 논리적이며 대단한 양식으로 무장한 영혼을 발견”7)했다. 『인간불평등에 대한 담론 Discours sur l’inégalité』에서 랭보는 “장 자크의 영감과 진지함과 온화함, 그리고 이성보다 감각이 우월하고 정신보다 마음이 우월하다는 끊임없는 선언, 자유와 걷기와 도피와 자연 속에서의 방황을 좋아하는 그 취향, 자기 자신으로의 후퇴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몰두인 그 내면적 탐구, 악은 인간 자체가 아니라 제도나 사회 때문에 생겨난다는 그 깊은 확신, 약한 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그 연민 등에 대해 깊은 관심”8) 을 갖게 된다. 뿐만 아니라 『사회계약론 Contrat social』을 통해서는 “통치권 및 정치활동은 오직 국민에게 속하는 것이기에 정부는 주인, 즉 국민에게 종속된 권력일 뿐이며 법은 사적인 모든 인과관계의 보증일 뿐”9)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 이를 두고 랭보의 친구 들라이에는 “교만과 지배로 이루어진 낡은 사회에 맞서는 투쟁과, 개인의 이익과 공동의 이익이 뒤섞이는 그런 사회에 대한, 이 민주주의 이상에 대한 랭보의 열정”10) 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랭보는 루소에 의해, 그리고 루소를 통해 세상을 보았으며 그로 인해 새로운 사회를 꿈꿀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해 3월 17일 데스두에 교장이 우수한 성적을 거둔 수사학반 학생인 랭보에게 그 보상으로 라 브뤼에르의 『성격론 Caractères』을 줄 때만 해도 랭보는 적어도 겉으로는 자신의 모범적인 행실을 그만두지 않았던 것으로 보였다. 랭보는 이장바르의 집에서 스승이 구독했던 『현대 고답시집 Parnasse contemporain』이라는 시 잡지를 탐독했으며 특히 <열여섯 송이의 새로운 악의 꽃 16 nouvelles Fleurs du mal>을 발표한 보들레르에게 심취하였다. 그리고 이 보들레르를 통해 랭보는 “시인이란 그저 평온한 시 작가가 아니라는 것, 시란 반항이며 또 여러 세상의 모호한 융합 속에서 악마나 신의 시선 아래에 금지된 세상을 탐구하는 것이라는 것, 시란 맞서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하며 심지어 그것이 시의 의무라는 것”11)을 배웠다.

    또한 랭보는 이 『현대 고답시집 Parnasse contemporain』을 통해 베를 렌느와 말라르메 그리고 테오도로 방빌이라는 당대 최고의 시인들에 대해서도 주목했다. 그리고 그해 4월에 이장바르의 진취적 성향이 랭보의 시세계에 직접 영향을 끼친 사건이 발생한다. 중세시대의 작품이나 작가들이 너무 관능적이고 신성모독적이며 현실주의적이기 때문에 학교에서 다루는 것이 금기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장바르는 프랑스어 작문 주제로 <교수형에 처해질 위험에 빠진 프랑스와 비용 F. Villon을 구하고자 샤를르 도르레앙이 루이 11세에게 보낸 편지>라는 파격적인 숙제를 낸다. 이 숙제는 바로 랭보의 스승이 당시의 체제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한 진보적인 교사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물론 랭보는 이 과제를 통해 스스로 비용이 되고자 열망했으며, 모든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는 진정한 시적 자유를 향해 자신을 던지기로 결심하기도 했다. 외딴 작은 국경도시의 이름없는 교사에 불과했던 이장바르가 수업을 위한 공부와는 별도로 자신의 지적 호기심과 현대적 취향을 랭보를 비롯한 시골학교 학생들에게 과시한 것은 어쩌면 더없이 행운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애 처음으로 전혀 새로운 세계와 문학과 접촉했던 랭보의 샤를르빌에 여름이 찾아왔다. 그해 7월 초 세상은 프랑스와 프로이센 간의 전쟁의 위기로 술렁이기 시작했고, 이장바르는 자신의 랭보에게서 일어나는 빠른 변화를 눈 여겨 보았다. 그가 보기에 “랭보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었으며 이해력이 향상되고 있었고 그의 판단력은 점점 더 개성적으로 눈에 띄었다. 오만한 침묵 뒤에서 거부와 분노가 노호하고 있었다. 불안하게 감시당하고 제어당하고 지배당하는 이 아들의 내면에서 난폭함이 지적으로 분석되고 내면화되고 숙고되며 또 폭발할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의 시 속에 어떤 말들이 터져 나오는데 그 말들은 부차적이고 복합적인 의미 아래 욕설과 비난을 감추고 있기 때문에 더욱 사악하였다.”12)고 장콜라는 보고하고 있다.

    이런 시기에 지적 활동이 왕성한 랭보는 정치적 위기 상황과 자신의 정치적 이상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는 프로이센에서 스페인까지에 걸쳐 카를 5세의 제국이 다시 건설되는 것을 우려하여 레오톨트 대공이 스페인 왕관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프로이센은 이 요구가 무례하다고 여겼으며 비스마르크는 그 와중에 프랑스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흥분하고 있었고 1792년의 추억이 진동하며 오랫동안 금지되어온 <라 마르세이예즈 La Marseillaise>를 다시 불러내고 있었다. 이 와중에 랭보는 한편으로는 “전복을 꿈꾸는 공화주의자들에게 감동을 포기하지 않았고 이런 사회적 혼란이 오히려 랭보를 기쁘게 한 것은 이런 불안정이 새로운 삶을 위한 낡은 세상의 전복, 즉 변화를 엿보게 하기 때문”13)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혼란기에 랭보는 “『르 페이 Le Pays』지의 편집장이자 나폴레옹 숭배자인 폴 드 카사냐크가 쓴 <영광과 민족 정서에 호소하는 글>을 읽고 구역질을”14)느낀다. 랭보는 카사냐크 류의 전쟁을 선동하는 이들이 프로이센인들을 물리치고 공화국을 지켰던 로렌 지방의 과격 공화파들을 나폴레옹 3세의 신봉자로 전락시키는 것에 크게 분노하였다. 저 유명한 <발미의 전사자들에게 Aux morts de Valmy>라는 제목으로 “92년과 93년의 주검들 Morts de quatre-vingt-douze et de quatre-ving-treize”로 시작되는 소네트의 배경으로 자주 거론되는 사건이 바로 이것이다. 이 시에서 랭보는 국민들을 선동하기 위해 1792년의 전사자들을 들먹이는 것은 그 숭고한 죽음을 조롱하는 것이며 특히 그들이 탄압해온 공화주의자들에게 프러시아 군대와 맞서 싸우라고 호소하는 것은 정치적 위선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결국 프랑스는 7월 14일 화요일에 정식으로 프로이센에게 선전포고를 했으며 랭보의 학교는 흥분으로 술렁거렸다. 샤를르빌에는 예비군들이 도착했고 모두들 흥겹게 노래를 불렀으며 시민들은 승리를 확신하는 영웅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그들이 영광스럽게 조국을 구해내리라는 것을 믿었다. 이 무리 속에서 구경만 하던 랭보는 이것이 무능하고도 정신병자인 나폴레옹 3세의 명령에 의한 부조리한 전쟁임을 간파했다. 이 와중에 그의 형 프레데릭크 랭보가 전선으로 가는 부대를 따라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랭보 집안과 그의 어머니 비탈리의 비탄과 근심은 극에 달해 버렸다. 전황은 프랑스에게 극도로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잠시 자신을 키워준 쟁드르 집안으로 여름 방학을 보내기 위해 샤를르빌을 비운 이장바르의 서가에 박힌 채 랭보는 책만 읽었다. 세상은 혼란스러웠고 그럴수록 그는 책이나 신문 등에 빠져들었다. 이 당시의 랭보에 대해 장콜라는 이렇게 쓰고 있다.

    다음에서 우리가 읽고자 하는 소네트 <악 Le Mal>과 <골짜기에 잠든 자 Le Dormeur du val>은 이런 전기적 환경을 갖고 있다. 장콜라의 추정대로 1870년 여름에 쓴 것으로 보이는 이 두 편은 시를 쓴 배경이나 사상, 이미지 그리고 시인의 당대 상황 인식이 상당부분 겹치는 것으로 봐서 1870년의 랭보의 시적 상상력이나 사회적 반감 그리고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 역할을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3)클로드 장콜라, 『랭보, 바람구두를 신은 천재시인 1』(정남모 역), 책세상, 2007, p.144.  4)Ibid., pp.146-147.  5)Ibid., p.152.  6)Ibid., p.158.  7)Ibid., p.158.  8)Ibid., p.162.  9)Ibid., p.162.  10)Ibid., p.163.  11)Ibid., p.171.  12)Ibid., p.214.  13)Ibid., p.214.  14)Ibid., p.215.  15)Ibid., p.216.

    3. 소네트 <악 Le Mal>의 반교권주의

    랭보가 다녔던 제 2 제정 하의 콜레쥬 드 샤를르빌은 공화주의적 사고를 접할 수 있는 자유스런 학풍의 학교였으나 수사학반은 그 절반이 신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수적인 사고와 공화주의적 신념이 항상 충돌하였다. 신학생들은 정부가 보낸 교사들의 교육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어서 종교에 대한 약간의 공격이 있거나 자신들이 적대시하는 종교에 대해서 약간이라도 호의적인 해석을 보일라치면 곧장 수도원장에게 보고하는 그런 곳이었다.16) 이런 곳에서 랭보가 체득한 것은 당연히 반교권주의적 태도였으며 그것은 나폴레옹 3세를 혐오하는 반제국주의와의 연장선상에서 배태된 자연스런 의식이었다. 1870년 여름에 쓴 것으로 알려진 소네트 <악 Le Mal>은 이런 랭보의 사상이 함축되어 있는 시로 평가된다. 이 시는 형식상 앞의 4행절은 보불전쟁의 참상을 조롱조로 환기시키며 죽어간 자들을 애도하고 있으며 뒤의 3행절은 그러한 사회 정치적 불행 속에서도 종교가 누리고 있는 호사를 풍자하고 있다. 어린 시인 랭보가 보기에도 1870년 당시의 프랑스는 교회와 제정의 결탁으로 귀족과 교회만 살찌는 모순 구조를 심화시키고 있었으며 나아가 국가의 존망마저 기로에 선 그런 시기였다. 그는 이런 당대의 정치적 사회적 현상을 조롱하고 비판하는데 자신의 시적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포탄이 난무하는 가운데 프랑스군이나 프러시아군 모두 양 진영이 모두 “왕”의 외면과 멸시를 받으며 군인들 자신도 누구를 위해 그리고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 채 무더기로 죽음으로 몰려가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첫 4행절의 메시지는 얼핏 보아 적과 아군의 구별이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군인들은 그저 왕이 시키는 전투에 참가해 그를 대신해서 몸을 던지고 있을 뿐이라는 이른바 전쟁 무용론을 강변하고 있기도 한다. 위의 인용시에서 대문자 “Roi”로 표기된 왕이 나폴레옹 3세를 지칭하든 아니면 프러시아의 왕을 지칭하든 이는 문맥적으로 아무차이가 없다. 이 “왕”은 인류 역사에 인간의 불행을 초래했던 왕이며 나아가

    에서 처럼 제단의 화려함을 즐거워하고, 평화를 갈구하는 인간들의 찬송과 기도에는 눈을 감아버린 어떤 ‘신’처럼 인간의 참화를 즐기고 조롱하는 존재의 상징이다. 주목할 것은 이 ‘신 ’앞에 부정관사 ‘un’이 달려있다는 점이다. 이는 불어표현으로 실제의 신을 뜻하는 ‘Dieu’나 ‘le Dieu’ 가 아니라 ‘한 명의 신 un Dieu’ 이라는 뜻을 내포한다. 따라서 그는 ‘이곳’ 또는 ‘여기 가까이’에 있는 한 명의 신이며 종교적인 의미의 신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존재하는 정치 권력자를 의미한다. 어쩌면 교황이나 교회 권력자를 지칭하는 용어일 수 도 있는데 결국 이들은 랭보가 혐오해 마지않는 교회지상주의자들이다. 그리고 랭보가 보기에 이들을 지지하는 지식인과 군인들이 앞장서서 세상을 전쟁의 광기로 몰아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세 번째 3행절에서 이 ‘신’과 ‘왕’은 지상과 천상에서 하나의 짝을 이루며 현재형으로 인간을 지배한다. 특히 지상의 왕인 나폴레옹 3세는 약 20년 동안 공화주의에서 제정으로 정치체제마저 바꾸어가며 백성들 위에 신처럼 군림했고, 이제는 전쟁까지 일으켜 무고한 젊은이들을 전장의 화염으로 사라지게 하는 악이자 나쁜 ‘신’이다. 랭보가 이 한 명의 신 나폴레옹 3세와 그를 추종하는 보나파르트주의자들에게 혐오감을 가졌던 이유는 국민의 희생을 외면하고 자신의 정치적 목적과 계략에 따라 정당성 없는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정당성 없는 전쟁은 수십 만 명에 이르는 죽음을 초래하여 그 불쌍한 주검을 여름날 풀밭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게 버려둔다. 그리고 이런 주검을 자연만이 성스럽게 만들어줄 뿐이다. 여기서 왕과 신은 2번째 4행절에서 ‘자연’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자연’이란 인간이자 성스러운 군인들을 만들어낸, 어쩌면 랭보가 지향하는 공화국이며, 이 공화국에서 “고뇌 속에 움추린 어머니”들이 낡아빠진 검은 모자를 쓰고 전장에 나가 죽어가는 자식들을 위해 흐느끼는 긍휼과 자비의 자연이다.

    손수건에 싸들고 온 동전 한 닢에 감동한 자연이 깨어날 때 시인은 교회와 그 교회를 통해 자신의 세속 권력을 유지하는 왕들과 귀족들을 향해 비난과 비판의 화살을 겨누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더불어 세상을 바꾸어 나가려던 웅대한 시적 모험에 전율했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쓴 랭보의 시 <황제들의 분노 Rages de Césars>가 제정의 몰락을 염원했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었을 것이다.

    한편, 주목해야 할 것은 시 <악 Le Mal>의 7-8행 “--- Pauvres morts! dans l’été, dans l’herbe, dans ta joie,/ Nature! Ô toi qui fis ces hommes saintement!”은 이어서 살펴볼 <골짜기에 잠든 자 Le Dormeur du val>와 묘사 상 상호 연관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곧 “여름날, 풀밭에서 죽어 누워있는 병사”들을 성스럽게 만들어주는 자연을 노래하는 이 대목은 시 <골짜기에 잠든 자 Le Dormeur du val>의 창작의 출발점이자 나폴레옹 3세와 전쟁을 혐오하는 시인의 당대 인식이 동시에 이 시에도 그대로 반영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다음 장에서 이를 확인해 보기로 하자.

    16)George Izambard, Rimbaud tel que je l’ai connu, Mercure de France, 1963, p.57.  17)Rimbaud (A.), Op. Cit., p.30.  18)Ibid., p.30.  19)Ibid., p.30.  20)Ibid., p.30.

    4. <골짜기에 잠든 자 Le Dormeur du val> 와 보불 전쟁

    이 불규칙 소네트의 초반부는 무엇보다 자연에 대한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묘사가 두드러진다. 그리고 시가 환기하는 이미지의 외관상 전쟁이라든지 그 참혹함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평화로운 공간에는 당대 현실이 가지고 있는 혼란스럽고도 잔인하기 그지 없는 전쟁의 영상이 가려져있다.

    녹음이 우거진 골짜기의 묘사에서 시냇물과 풀잎, 태양과 산 그리고 다시 골짜기로 이어지는 전경은 그림을 보는 듯 선명하다. 그리고 ‘푸른 녹음’, ‘은빛’, ‘반짝임’ 그리고 ‘빛으로 된 거품’ 등의 시각적 이미지를 자극하는 단어들이 ‘노래’와 결부되어 있어서 읽기만 해도 경쾌한 느낌이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그야말로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조화속에서 느껴지는 평화의 충만한 이미지가 베르길리우스 풍의 낭만을 잔뜩 머금고 있다. 하지만 두 번째 연에 들어서면 앞서 묘사된 자연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군인 하나가un soldat’이라는 단어가 이 낭만을 깨우며 갑작스런 비극을 준비한다.

    포근하고 부드러운 자연 속에서 ‘자는’ 것처럼 병사는 평온하다. 풀의 환유로 연결되는 자연은 부드럽게 모든 사물을 감싸고, 특히 잠들어 있는 병사를 포근히 잠재우고 있다. 그는 편안히 자고나서 군화와 철모 그리고총을 챙겨들고 전우들이 있는 대열에 합류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창백한’과 ‘빛이 울고 있다’라는 어휘들이 첫 연의 밝고 경쾌한 시각적 묘사와는 대조를 이루고 있어 잠자는 병사에게 슬픈 일이 일어날 것을 예고하는 어감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두발을 글라디올러스에 담근 채 얼어붙은 몸으로 잠이든 어린 병사를 자연의 힘으로 데워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시인의 염원은 허망하게 울릴 뿐이다. 향기에 반응도 하지 않는 콧구멍과 ‘자는’이란 어휘가 ‘평온한’이라는 원래의 뜻과는 반대로 불안을 야기하며 죽음을 연상시킨다. 독자들은 불규칙한 연주곡을 듣는 것처럼 불길한 기분으로 묘사된 병사의 모습에 주목한다. 그리고 맨 마지막 행에서 오랜 전투와 행군에서 깜빡 잠이 든 군인이 아니라 무자비한 총알을 가슴에 두 방을 맞고 즉사한 군인의 사실적인 이미지가 제시됨으로써 독자들은 비로소 이 시의 주인공이 총에 맞아 죽은 사실을 알아차린다.

    이런 갑작스런 장면의 전환으로 인해 독자들은 총격을 받은 병사만큼 충격을 받는다. 아름답고 부드러운 자연을 대변하는 첫 연의 ‘초록의 구렁’과 대립되는 색채인 붉은 두 구멍으로 인해 “총=전쟁=죽음”이라는 영상이 뚜렷이 환기된다. 평온한 공간은 불안과 죽음의 영상으로 변하며 독자는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 있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원초적 불안과 그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이성적 사고가 격한 풍랑에 휩싸인 듯 뒤섞이고 난후에야 독자들의 가슴에 전쟁에 대한 끔찍함과 두려움이 들어선다. 그리고 병사에 대한 연민이 몰려든다. 이 시는 자연과 인간, 전쟁의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평온함과 불안함, 감미로움과 잔인함을 뒤섞은 한 장의 그림처럼 전쟁의 끔찍함을 각인시키고 있다. 마지막 한 행의 절제된 묘사와 자연과의 절묘한 대비 등으로 전쟁에 대한 잔인함은 배가되고 이어서 전쟁의 무자비성만 뚜렷이 각인되고 있는 것이다.

    21)Ibid., p.32.  22)Ibid., p.32.  23)Ibid., p.32.

    5. 나오는 말

    어린 랭보가 보기에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후미진 샤를르빌은 1870년 초부터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젊은 공화주의자이자 진보적인 교사 이장바르가 새로운 수사학 선생으로 부임하고, 그의 특별 수업에 따라 랭보는 비로소 낯설고 금지된 세계를 체험하거나 열망하게 된다. 그런가하면 1870년 7월 14일에 프랑스가 프로이센에 선포한 전쟁은 어린 랭보의 삶을 흥분시키고 그의 시작에 주요한 모티브로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사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베랑제 Berranger의 지적처럼 이 잔인한 전쟁은 정부가 국민에게 행하는 억압과 권력의 본질을 이해시켰을 뿐만 아니라 불합리한 사회에 대한 불만을 유도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통해 랭보는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급격하게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24) 정치적인 인식만 하더라도 현 정체를 부정하고 혐오하는 랭보에게 보나파르트주의자들이 행하는 일련의 행동들은 그의 반 제국주의적 성향을 더욱 부채질했음에 틀림이 없었다. 그는 순진한 그의 형프레데릭처럼 선동된 애국심에 불타 전장에서 적들과 싸운다든가, 정부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결심도 아예 없었다. 심지어 맹목주의적인 애국심이나 그 애국심을 가장하여 거들먹거리고 뽐내며 순찰이나 도는 위선적인 사람들을 경멸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는 샤를르빌을 떠난 지 한달이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그의 스승 이장바르에게 보낸 랭보의 편지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 편지를 쓸 당시의 랭보의 머릿속에는 많은 계획들이 차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직접 토로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이장바르에게 만은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어 했을지도 모른다. 이 편지의 추신을 보면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26) 줄임표를 군데군데 동원한 바람에 더욱 비밀스러워 보이는 이 문장은 조만간 어떤 일을 벌이기 위해 뭔가 마음의 결정을 미루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들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며칠 동안 랭보는 자신의 ‘멍청한 idiote’ 고향마을에서 더욱 더 갇힌 듯한 기분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곳에는 따라야할 아버지도 없고, 그로부터 이어받아야 할 직업도 없었기에 랭보에게는 다른 아이들처럼 미리 결정된 어떤 삶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 랭보는 자유로웠으며 그의 미래는 오히려 샤를르빌 밖에 있었다. 그리고 1870년 여름이 끝날 무렵, 학교에서 상으로 받은 두꺼운 책을 몇 권 팔아 여비를 마련한 랭보는 마침내 파리로 향하는 여정에 올랐다. 정확히 8월 29일 목요일이었다.

    24)Berranger (M.-P.), 12 poèmes de Rimbaud, Marabout, Alleur (Belgique), 1993, p.315.  25)Rimbaud, Op. Cit., p.238.  26)“P.-S. --- A bientôt, des révelation sur la vie que je vais mener après ..... les vacances.....” Ibid., 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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