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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The Abjection of The Mother/Colonial Country in Jamaica Kincaid’s Annie John 자메이카 킨케이드의『애니 존』에 나타난 어머니/식민지 본국의 비체화*
  • 비영리 CC BY-NC
ABSTRACT
The Abjection of The Mother/Colonial Country in Jamaica Kincaid’s Annie John
KEYWORD
Kincaid , Annie John , pre-oedipal phase , paradise , Kristeva , abjection , Bhabha , ambivalence , colonialism
  • I. 카리브계 여성 문학과 『애니 존』

    카리브계 여성 문학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이후 탈식민 이론, 탈식민주의 비평이 대두되면서부터이다. 1989년 패멀라 모레카이(Pamela Morecai)와 베티 윌슨(Betty Wilson)이 카리브계 여성작가들에 관한 앤솔로지인 『그녀의 진짜, 진짜 이름』(Her True-True Name)을 펴냈고, 1990년 캐럴 B. 데이비스(Carol Boyce Davies)와 일레인 S. 피도(Elaine Savory Fido)가 『쿰블라로부터: 카리브 여성들과 문학』(Out of Kumbla: Caribbean Women and Literature)이라는 비평서를 출판했다. 이들은 그들의 저서에서 필리스 S. 올프레이(Phyllis Shand Allfrey)와 자메이카의 민담 시인인 루이스 베넷(Louise Bennett) 등 알려지지 않은 카리브계 여성작가들을 발굴하는 작업과 더불어 기존의 여성작가들인 베릴 길로이(Beryl Gilroy), 로자 가이(Rosa Guy), 실비아 윈터(Sylvia Wynter), 메를 호지(Merle Hodge), 미셀 클리프(Michelle Cliff), 폴 마샬(Paule Marshall)과 같은 작가들의 문학 전통을 확립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Brancato 15-17 참고).1 그러나 이들 카리브계 여성 작가들은 대부분 이전에 영국의 식민지였던 카리브 지역의 여러 섬 국가에서 태어나서 자라기는 했지만 카리브 지역을 근거지로 삼아 작품 활동을 하기 보다는 유년 혹은 청소년 시절 자신의 모국을 떠나 세계 곳곳으로, 특히 뉴욕, 마이애미, 런던, 토론토 등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교육을 받고 활동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들 여성 작가들은 그들의 출신배경과 이주경험을 바탕으로 주로 카리브지역의 역사와 문화, 식민주의와 인종차별, 독립과 정체성, 그들이 경험한 이산과 이주 등을 중심주제로 다루고 있다.2

    본고에서 논하고자 하는 킨케이드(Jamaica Kincaid)도 예외가 아닌데, 킨케이드는 카리브지역의 역사와 그 지역에서의 자신의 경험을 그녀의 작품의 창조적 원천으로 삼고 있는 카리브계 미국 작가이다. 킨케이드의 작품의 대부분은 어머니와 딸 간의 파괴적인 관계에 초점을 맞추면서 가족 이야기, 어머니에 대한 애증, 모국 앤티가에서 겪었던 식민주의와 인종차별, 종속과 소외, 집 떠나기와 교육 과정 등 자신의 자서전적 성격을 띄고 있다. 이런 특징은 단편모음집인 『강기슭에서』(At the Bottom of the River)(1983)에서부터 『애니 존』(Annie John)(1985), 『루시』(Lucy)(1990), 그리고 『내 남동생』(My Brother)(1997)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특히 본고에서 논하고자 하는 『애니 존』은 1950년대 동안 작가 킨케이드를 대신하는 여주인공 애니가 열 살 시절부터 열여섯살에 모국 앤티가를 떠나기 전까지 어머니, 친구들, 선생님들에게서 겪었던 소외와 상실의 가혹한 성장과정을 그리고 있는 킨케이드의 자서전적 소설로서 그녀의 대중적인 평판을 높이게 한 첫 작품이다. 총 8장으로 구성된 『애니 존』의 각 장은 1983년 11월부터 1984년 7월까지 『뉴욕커』(The New Yorker)지에 연재 형식으로 먼저 게재되었고, 1985년 이를 묶어서 한 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애니 존』은 1985년 출판된 이후 카리브 지역에 관한 교양소설(Bildungsroman) 혹은 성장 소설의 한 예로 여겨지면서 미국 내 고등학교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소설들 중 한 권이 되었고, 1985년 『라이브러리 저널』(Library Journal)이 선정한 가장 훌륭한 책들 중 한 권으로 뽑혔다. 1993년 『스쿨 라이브러리 저널』(School Library Journal)은 중고등학교 영어수업 목록에 『애니 존』을 여성작가들이 쓴 가장 훌륭한 책들 중 한 권으로 추천할 만큼 킨케이드의 『애니 존』은 출판된 이후 꾸준한 인기와 찬사를 받아왔다(Mistron xi). 많은 비평가들은 『애니 존』의 꾸준한 인기의 원인을 어린 소녀가 어머니로부터 고통스럽게 단절되어지는 과정, 어린 소녀의 우정, 교육, 사고의 형성, 자신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가족 및 조국과 이별하는 과정을 포함하여 어린 소녀의 사춘기를 묘사하는 성장 소설의 “보편적인” 요소와 카리브지역에 위치한 작은 섬 국가로 영국의 식민지였던 앤티가에서 주인공 애니가 겪는 문제들을 앤티가의 역사, 문화, 관습, 종교, 음식과 관련하여 잘 결합시키는 “독특함”의 두 요소를 잘 조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Miston, xi; Natov 1; Caton; Paravisini-Gebert 29-30). 그런데 이런 매혹적인 논평의 대부분은 『애니 존』에서 킨케이드가 보여주는 어머니와 딸 간의 유대의 강렬함과 역설적인 목소리에서 기인한다. 특히 정신분석학적인 글들은 애니 존이 어떻게 똑같은 강도로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증오를 동시에 보여줄 수 있는 가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하고 있다. 다른 비평가들은 『애니 존』을 자서전적인 교양 소설의 관점에서 애니가 추구하는 낭만적인 자아 탐색에 초점을 맞추었다.3 그러나 그런 한 가지만으로 접근하는 것은 결코 다른 적절한 문제들을 분석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교양소설 혹은 성장 소설로 『애니 존』을 읽는 것은 다분히 애니의 자아 탐색의 과정을 낭만적으로 접근하는 우를 범할 수 있고, 어머니와 딸 간의 합체와 분리에 대한 분석은 주인공 애니의 자아형성을 논의하는데 있어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정신분석학적인 분석에 그치는 경우 어머니와 딸 애니와의 관계를 통해서 『애니 존』에서 킨케이드가 드러내고자 하는 식민주의 이데올로기를 간과하거나 부차적인 영역으로 치부할 위험이 있다.

    본고에서 필자는 어머니와 딸 애니와의 관계를 통해 『애니 존』에서 킨케이드가 노골적으로 표면화하지는 않지만 그 관계 속에 숨겨진 권력관계와 식민주의 이데올로기를 분석하고자 한다. 『애니 존』에서 어머니라는 인물은 사랑, 보살핌, 창조성의 원천이자 억압, 권위, 지배의 이중적인 의미로 재현되어진다. 어머니/모국과 연관하여 유년시절의 세심하고 사랑을 주는 어머니는 보호와 행복을 제공하는 아프리카에 뿌리를 둔 카리브 세계이고, 바로 식민지화되기 이전인 전-오이디푸스의 시기를 대표한다. 이 시기는 애니에게 낙원, 유토피아로 묘사 되어진다. 반면에 전-오이디푸스(pre-Oedipal)기가 파괴되었을 때인 사춘기 단계에서 재현되는 어머니는 경멸적이고, 억압적인 어머니로 딸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지배적인 식민지 본국을 대표한다. 따라서 이 시기에 어머니와 딸의 갈등은 어머니/제국과 딸/식민지 간의 갈등의 알레고리로 읽혀질 수 있다. 사춘기 시기에 어머니와 영국식민주의는 모두 애니의 행동을 통제하려 하고, 애니를 식민주의이데올로기에 복종하는 주체로 남게 하려하고, 애니가 무엇을 생각하고 느껴야만 하는 가를 명령하려고 한다. 즉, 이런 두 권위는 모두 애니가 독립적으로 성장하고 개인적인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위협을 가한다. 애니의 어머니는 애니를 자신의 연장으로 보는 것처럼 보이고, 애니가 독립적인 정체성의 징후를 보일 때 애니를 거부한다. 식민지의 권위는 앤티가 주민들을 그들 자신의 역사, 문화,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로 보는 것을 거부하고 대신에 영국적인 가치를 주입한다. 학교에서 배운 가치들은 현실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고, 사실상 앤티가 원주민의 현실을 삭제하는 것처럼 보일 때 애니는 자신의 정체성과 자아상실의 고통을 겪는다. 그러므로 갈등하는 두 세계인 아프리카에 기원을 둔 카리브 세계와 영국에 기원을 둔 세계는 어머니라는 모순적인 인물 속에서 상호공존한다. 따라서 본고의 목적은 『애니 존』 속에서 노골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지만 암시적으로 나타나거나 추론해볼 수 있는 어머니의 이중적 측면, 즉 어머니가 딸 애니와 맺는 관계 속에서 어머니/모국과 어머니/제국 간의 연관성을 분석하는 것이고, 또한 애니가 개인적인 자율성을 찾는 과정 속에서 애니가 취하는 여러 저항 방식 등을 읽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어머니 혹은 식민주의에 대한 애니의 태도는 증오와 사랑의 양가성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주인공 애니가 어머니와 식민주의에 대해 드러내는 양가성을 읽어내는데 있어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와 낸시 초도로우(Nancy Chodorow) 등의 페미니스트 정신분석학자들에게서 논의되는 몇몇 관점과 호미 바바(Homi K. Bhabha)의 “흉내내기(mimicry)”와 “양가성(ambivalence)”의 개념은4 이 논문에서 논의하는 관점에 중요한 분석틀을 제공해 수 있다는 점에서 이들 이론가들의 몇몇 논의를 중심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킨케이드의 『애니 존』에서 애니와 어머니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애니의 심리과정의 변화와 정체성 형성, 혹은 애니/모국과 어머니/제국과의 관계 속에서 애니/모국이 어머니/제국을 배제하는 과정은 크리스테바의 “비체화(abjection)”의 상황 속에서 가장 분명하게 설명되어질 수 있기 때문에 『애니 존』을 분석하는데 있어 크리스테바의 비체화 이론은 가장 중요한 분석틀이 될 수 있다. 본문에서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1이외에도 미리엄 챈시(Myriam Chancy)의 『안전한 장소를 찾아: 아프리카계 카리브 작가들』(Searching for Safe Space: Afro-Caribbean Writers)(1997), 해럴드 블룸(Harold Bloom)의 『카리브 여성작가들』(Caribbean Women Writers)(1997), 아델 뉴썬(Adele Newson)의 『변화의 바람: 카리브 여성작가들 및 학자들의 변화하는 목소리들』 (Winds of Change: The Transforming Voices of Caribbean Women Writers and Scholars)(1998), 메리 콘데(Mary Condé)의 『카리브 여성들과 젠더』(Caribbean Women and Gender)(2000), 브린다 메타(Brinda Mehta)의 『디아스포라의 위(전)치: 인도계 카리브 여성작가들은 칼라 파니를 뚫고 나아가다』(Diasporic(Dis)Locations: Indo-Caribbean Women Writers Negotiate the Kala Pani)(2004)와 같은 많은 앤솔로지들은 카리브계 여성 작가들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는데 공헌했다(Brancato 15-17 참고).  2카리브 지역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등의 유럽계 백인 식민주의자들이 그 곳에 살았던 원주민들을 몰살시키고 아프리카에서 엄청난 수의 흑인 노예들을 강제로 이주시켜서 사탕수수 농장 등을 건설한 곳이다. 지금도 대영제국 중심의 용어인 “서인도제도”로 통용되는데서 알 수 있듯 이 지역은 서구 식민주의가 아직도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곳이다. 카리브 지역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카리브 여성 작가들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논의는 이경순(2008), 이경란(2008), 정은숙(2011)을 참고할 것.  3정신분석학적인 분석을 하는 대표적인 글은 Particia Ismond(1988), Wendy Dutton(1989), Helen Pyne Timothy(1990), Donna Perry(1990), Roni Natov(1990), H. Adlai Murdoch(1990), J. Brooks Bouson(2005) 등이 있고, 교양소설 혹은 자서전의 관점에서 분석한 글은 Caton(1996), Lizabeth Paravisini-Gebert(1999), Geigh Gilmore(1994, 2001)가 대표적이다. 특히 여성 교양소설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정은숙(2011)을 참고할 것.  4흉내내기와 양가성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추후 본문에서 설명하겠다.

    II. 유년 유토피아로의 갈망과 파괴

    사춘기는 제 2의 개별화 과정으로 여겨질 수 있다. 십대들이 부모에게서 벗어나서 자율권을 확보하기 시작할 때 종종 억압되어진 갈망은 아이가 어머니와 공생관계에서 살았을 때인 전-오이디푸스의 상태를 표면화한다(Blos 11-14).5 블로스에 따르면 “여자아이들은 청소년기 동안 더 강렬하게 대상관계와 투쟁하는데, 오래 끄는 그리고 고통스러운 어머니로부터의 분리가 이 시기의 주요한 임무이다”(66). 블로스의 주장을 따르면서 여성 정체성의 기초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단계가 아니라 전-오이디푸스 단계에 있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정신분석가는 초도로우이다. 전-오이디푸스의 단계에서는 남근 결여가 아니라 어머니와 딸의 유대가, 거세가 아니라 연관성이 여성 정체성을 특징짓는다. 초도로우는 “사춘기 전기 동안 혹은 사춘기 동안 여자아이는 자신의 전-오이디푸스 시기의 일차적 사랑과 일차적 동일시 요소를 유지하는 경향”이 있고, 이것은 “어머니와의 의식적인 성 역할 동일시에 의해 강화되면서 몇 년에 걸쳐 만들어져온 것”이라고 주장한다(136). 다시 말해 초기 유년시절에 어머니의 지배와 어머니와 딸의 친밀한 동일시 때문에 여성은 특징적으로 여성적인, 우호적인, 상관적인 자아의식을 획득한다. 사춘기 초기에 표면화되는 전-오이디푸스기로의 갈망은 초도로우가 지적하는 것처럼 특히 여자아이들에게 강력하다. 초도로우는 어머니들은 “남자들과의 관계에서” 다소 “성취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타자와 합일하려는 욕구로 인해 딸들에게 더 집착한다”고 지적한다(212). 어머니가 그녀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받은 것을 딸에게 전수하는 순환방식은 세상의 경험을 유동적이고 경계 없는 것으로 영속화시킨다.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에 깊이 영향을 받은 페미니스트 이론가인 크리스테바도 초도로우와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 크리스테바는 전-오이디푸스의 시기를 “기호계(semiotic)”과 연관 짓고 있는데, 기호계는 언어 이전의 양식들인 “음성, 몸짓, 색체”등을 통한 의미의 창조이고(Revolution 28), 기호계는 어머니-아이가 한 쌍으로 이루어진 공간, 어머니와 아이가 어떤 분리된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영역이다. 이 시기에 유아는 어머니의 몸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고 어머니의 몸에 강한 집착을 갖는다. 이런 집착은 블로스와 초도로우도 주장했듯이 사춘기시절 남아의 경우보다 여아의 경우에 더 강하다.

    『애니 존』은 유년 시절에 완료된 전-오이디푸스기의 과정으로 되돌아가는 시기인 사춘기 초기에서 시작하고 있고, 전-오이디푸스기를 상징하는 킨케이드의 가장 뛰어난 낭만적인 메타포는 ‘낙원’ 혹은 ‘유토피아’의 개념이다. 타락하기 이전의 유기적 통일체를 환기시키는 낙원의 개념은 어머니와 딸의 유대가 언어 이전의, 전-오이디푸스 시기의 완벽한 조화 속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함축한다. 어머니가 재배하는 허브들을 애니가 뽑으며 노는 정원은 애니의 낙원이고, 그 낙원은 어머니의 사랑과 “키스”로 가득하다(25). 그 낙원 속에서 애니는 “어머니를 쫓아다니면서 어머니가 하는 모든 방식들을 관찰하면서 하루를” 보내기도 하고(15), 어머니를 자신의 “모든 활동 속에 포함”시키기도 한다(17). 애니가 “나는 언제 그것이 실제로 내 어머니이고, 언제 그것이 나와 세상 나머지 사이에 서있는 그녀의 그림자인지를 확신할 수 없었다”(107)라고 묘사하고 있듯이 애니는 어머니와 한 몸인 것처럼 느끼고 어머니의 존재 속에서 안전을 느낀다. 이것은 애니와 어머니가 “같은 천으로 만든 옷”(25)을 입고 있는 것에 의해 상징되어진다. 애니와 그녀의 어머니는 마치 한 존재처럼 자연세계의 것들인 “여러 다른 종류의 나무껍질과 꽃들, 온갖 종류의 오일들을 넣고 끊여진”(14) 물들로 채워진 욕조에서 함께 목욕을 하는데, 이 장면은 “세상과 인간의 통합, 자연과 인간의 낭만적 연관성을 암시”하기도 하고(Caton 130), “어머니와 아이를 연관시켰던 양수”를 암시하기도 한다(Natov 4). 애니는 어머니에게 나는 냄새조차도 어머니를 자연과 연관 짓고 있는데, 어머니의 냄새는 “레몬, 때로는 세이지 약초, 때로는 장미, 때로는 월계수 잎”(22) 냄새로 표현된다. 이렇듯 킨케이드는 『애니 존』의 초반부에서 애니와 어머니가 맺는 관계 속에서 타락이전의 에덴동산을 상기시키는 총체성과 순수의 분위기를 만든다. 실제로 애니는 에덴동산의 메타포를 “내가 사는 곳은 바로 그런 낙원이다”(25)라고 묘사하면서 그녀의 유년시절 어머니와의 유대관계를 유토피아의 세계로 설정하고 있다.

    애니는 “때때로 나는 더 이상 그녀가 말하는 말이 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단지 그녀가 말을 하면서, 아니면 웃으면서 입을 열거나 닫을 때 그녀의 입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22)라고 묘사하고 있듯이, 어머니와의 결정적인 유대의 순간에 어머니와 “기호계”의 체계를 이용해서, 즉 언어의 문화적 체계를 이용하지 않고 소통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렇듯 애니가 어머니에 대해 품는 사랑은 유년시절의 나르시시즘과 연관된 에로틱한, 감각적인 찬미이다. 뤼스 이리가레이(Luce Irigaray)가 어머니의 몸에 대해 “이 (모성의) 흐름은 고정된 둑 없이 존재하고, 이 몸은 고정된 경계 없이 존재한다”(215)고 주장한 것처럼, 이 시기에 애니는 유아처럼 어머니의 몸과 자신의 몸 사이의 어떤 경계도 경험하지 못한다. 애니는 어머니의 등에 업혀 “바다 포유동물”처럼, 한 몸이 된 채 수영을 하고, “마치 큰 조개껍질 소리를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머니의 목에” 자신의 “귀를 대곤했고, 그것은 마치 주변의 모든 소리, 바다 소리, 바람 소리, 새들의 지저귐은 그녀 속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라고 느끼듯 어머니에게 동물처럼, 본능적으로, 상호적으로 반응하고 있다(42, 43). 이 전-오이디푸스기의 낙원 속에서 아버지는 애니에게 주변적인 존재에 불과하지만 어머니는 찬미 받아야 할 모든 것을 포괄한 여왕 혹은 여신과 동일시되어진다.

    전-오이디푸스기의 애니는 자신의 정체성을 어머니와의 통합을 통해 모색하고 있고, 이 시기에 어머니와 분리된 정체성을 추구하려는 어떤 암시도 없다. 이 시기에 어머니는 보살펴주고 사랑을 주는 아프리카에 뿌리는 둔 식민화되기 이전의 카리브 세계, 애니가 행복하다고 느끼게 하는 아름다움과 순수의 세계이다.

    그러나 유년의 행복한 유토피아의 공간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는 현실들이 나타난다. 애니는 막연하게나마 그런 현실들을 죽음의 이미지를 통해 인식하게 된다. 가족이 세인트 존스(St. John’s)에 있는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바로 애니 어머니의 친구의 어린 딸이 “의사에게 가던 도중에” 애니의 “어머니의 품에 안긴 채” 죽는다(8). 애니의 어머니는 남편에게 관을 짜달라고 부탁하며 죽은 소녀를 목욕시키고, 옷을 입히고, 관에 눕히는 등 장례식을 준비하는 것과 관련된 모든 일을 도맡아 한다. 이 사건은 애니에게 트라우마를 남기는데, 애니는 자신의 욕망의 유일한 대상인 어머니가 자신만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머니의 친구의 딸의 죽음을 통해 어머니가 다른 아이들을 보살피는 어머니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막연하게 깨닫는다. 그래서 장례식이 끝난 후 애니는 “죽은 소녀를 무릎에 여전히 눕혔던” 어머니의 “양손”이 자신을 만지거나 혹은 그 양손을 보는 것을 참을 수 없어한다(6).6

    애니가 어머니와의 분리를 경험하는 또 다른 사건은 애니가 사춘기로 접어들 때 어머니가 “이제 너는 너무 커버렸다. 이제 너는 네 자신의 옷을 따로 갖게 될 때이다. 너는 네 인생의 나머지 동안 나와 같은 모습으로 다닐 수는 없다”(26)라고 말하면서 같은 옷감으로 옷을 만드는 관행을 끝내기로 결정한 것과 애니가 어머니에게 트렁크를 보겠다고 졸랐을 때 “절대로 안 돼! 너와 난 이제 그것을 볼 시간이 더 이상 없다”(27)라고 말하는데서 발생한다. 애니가 어머니에 대해 갖는 동일시의 감정은 어머니의 이런 결정들로 인해, 고통스럽게 분열되고, 마치 애니가 어머니에게서 잘려져 나가는 것처럼 “나는 내 밑에 땅이 꺼져버리는 것 같았다”(26)는 말로 그녀의 고통을 표현한다. 그러나 애니가 여러 죽음의 이미지 속에서, 그리고 어머니가 같은 옷감을 이용해서 옷을 만드는 것을 거부하는 것에서, 어머니와의 분리에 대한 불안을 막연하게 의식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단계에서 여전히 애니는 식민주의자의 침입을 의식하고 있지는 못한다. 마치 카리브 지역이 식민주의자들의 침입을 받기 전 상황처럼, 애니는 어머니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유년의 유토피아 속에 끊임없이 머무르려 한다. 그것은 애니가 새로 들어간 학교에서 자서전적 에세이를 쓸 때 그것의 내용을 조작하는 데서도 나타난다. 애니는 이 에세이에서 어머니가 자신을 등에 업고 수영했던 어느 날 오후에 발생했던 일화를 묘사한다. 수영을 하지 못했던 애니는 어머니가 혼자 수영하고 다이빙 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만 근처를 지나가는 배를 보느라 어머니를 시야에서 놓친다. 애니는 “나는 서서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지만 어떤 소리도 내 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런 뒤 거대한 검은 공간이 내 앞에서 열렸고 나는 그곳으로 떨어졌다. 나는 내 앞에 있는 것을 볼 수도 없었고, 내 주변의 어떤 소리도 들을 수도 없었다”(43)고 말하면서 점차 시작되고 있는 어머니와의 분리를 시사한다. 그러나 애니는 이 글의 “결말”을 어머니가 해변에 나타나서 “애니를 품에 안아” 주고, 이 일이 있은 후 애니가 계속해서 어머니가 자신과 헤어진 채 “바위 위에 앉아 있는 악몽”을 꾸게 되자,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면서” 애니를 “껴안아 주고”있는 것으로 바꾼다(44). 어머니와의 분리에 대한 두려움은 애니로 하여금 자신의 자서전적 에세이의 결말을 조작하게 하고 있지만, 실제 삶에서 애니가 자신의 악몽을 어머니에게 이야기 했을 때 어머니의 반응은 애니에게 “등을 돌린 채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익지 않은 과일을 먹지 말라는 싸늘한 대답뿐이다”(44). 그런데 애니는 자신의 글쓰기를 통해 어머니와의 분리와 앤티가가 식민지화 된 상황을 함께 연결 짓고 있다. 애니가 수영하던 어머니를 시야에서 놓치게 한 것은 “지나가던 세 척의 배”(43) 때문이었고, 바로 이 “세 척의 배는 콜럼버스가 처음 세 척의 배를 이끌고 서인도로 항해해 와서 식민지 이전의 조화를 깨뜨린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킨케이드는 어머니의 배반과 분리 이면에 식민지의 침입이 자리하고 있음을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Brancato 69). 킨케이드는 애니의 이 자서전적 에세이를 통해 결국 애니에게 어머니도, 앤티가도, 시한폭탄으로서의 낙원임을 보여주고 있다. 어머니/모국은 모두 집 혹은 낙원으로서의 그들의 정체성을 보유하지만 어머니와 앤티가의 아름다움과 힘은 끔찍한 어떤 것으로 변화될 위기에 처해 있음을 킨케이드는 “세 척의 배”와 애니의 자서전적 글을 통해 제유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두 번째 장의 「돌고 도는 손」의 거의 끝부분에서 애니는 유년 시절의 낙원이 어머니에 의해 어떻게 파괴되었는가를 묘사하고 있다. 킨케이드는 『애니 존』의 초반부에서 아이들이 죽는 이미지를 통해 애니가 어머니와의 관계 속에서 느끼는 균열과 불안감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어머니와의 균열을 분명히 하는 가장 큰 사건은 애니가 주일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서 부모님의 성관계를 목격할 때 발생한다.7 어머니의 “하얗고 뼈만 앙상한 손이 아버지의 등을”(30) 애무하는 모습은 애니에게 트라우마로 자리잡는다. 애니는 아버지를 만졌던 어머니의 손이 “결코 다시는 나를 만질 수 없게” 할 것이고, 결코 다시는 “그녀가 내게 키스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다짐한다(32). 죽은 소녀를 안고 있던 어머니의 손에 대한 막연한 거부에서 이제 애니는 어머니의 손을 “상실, 배반,” 소외와 연관 짓게 되고, 좀 더 확실하게 어머니의 배반은 “어머니의 상징적인 죽음”과 연관된 것으로 인식되어진다(Murdoch 333). 애니는 부모님의 성관계를 목격한 후 어머니에 대한 환상은 깨어지고, 애니는 버림받았다는 감정과 어머니에게 배신당했다는 복잡한 감정으로 “전에는 결코 하지 않았던 말대꾸”(30)를 처음으로 한다. 이 사건은 『애니 존』에서 애니에게 발생하는 여러 사건들의 사슬 속에서 심리적으로, 서사적으로 주요 전환점을 형성하고 있고, 『애니 존』에서 애니가 어머니에게 보이는 경멸과 반항의 단초가 된다. 이 장면은 또한 어머니와의 분리를 알리는 트라우마일 뿐 아니라 애니에게 어머니의 “하얀 손”의 이미지를 통해 어머니/모국이 어머니/제국으로 전환되는 것을 암시함으로써 앤티가가 통제할 수 없는 어떤 역사적 문화적인 힘들에 종속되어야만 하는, 식민지화된 현실을 인식하게 하는 트라우마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사건 이후 애니와 어머니의 갈등은 어머니/식민주의자의 권위를 관찰하는 것과 뒤섞이는 것으로 표출된다. 이 사건 후 애니는 “주름투성이의 여성이 머리에 왕관을 쓰고, 목에 한 아름의 다이아몬드와 진주를 매단”(40) 빅토리아 여왕의 얼굴이 그려진 옛 공책을 없앤 것에 대한 안도감을 표현한다. 즉 생물학적인 어머니에 대한 탈신비화는 애니가 자신의 성적, 정치적인 의식을 하게 될 때 식민지 본국에 대한 탈신비화와 일치한다. 이제 애니는 곧 자신의 낙원이 무너지고 있고, 따라서 어머니/모국은 낙원의 천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제 애니는 모든 사춘기 소녀에게 공통적인 성애의 각성과 닥쳐올 성인기의 감정적 갈등을 겪어야만 할 뿐 아니라 그녀의 식민지 생활을 특징짓는 문화적 갈등과도 타협해야만 한다. 따라서 애니의 정체성 형성의 과정은 인종, 젠더, 계급의 문제들과 관련되어진다. 애니는 식민지 논리에 종속되어있는 어머니와 자신의 자아의식에 억압적이고 위협적인 식민지화된 사회를 헤쳐 나가야만 한다. 즉, 애니는 순수의 세계에서 경험의 세계로 통과해야 하고 혹은 행복한 무지로부터 현실 인식의 원숙한 단계로 이행해야만 한다.

    5전-오이디푸스 시기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형성 이전의 정신·성 발달기간이다. 전-오이디푸스의 시기에는 남녀모두에게 어머니에 대한 애착이 지배적이다. 이 용어는 프로이트의 말년의 저서에 나타나는데, 여성의 성을 논의하는 문맥에 등장한다. 그러나 라캉은 전-오이디푸스기를 어머니와 아이 사이의 ‘이자관계’로 보지 않고, 중재할 수 있는 어떤 제3항이 존재한다고 여겼다. 전-오이디푸스기의 삼각관계에서 모아간의 이자관계를 중재하는 제 3의 요소는 둘 사이에서 일련의 교환으로 순환하는 상상적 대상인 남근이다. 1957~58년 세미나에서 라깡이 상상적 삼각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전-오이디푸스기가 아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첫 번째 ‘시기’로 표현한다(J. Laplanche & J.B. Pointalis 328-329; Dylan Evans 149-50 참조).  6브룩스 부썬(J. Brooks Bouson)은 “애니가 어머니의 보살피는 손, 즉 아이를 어루만지고, 목욕시켜주고, 옷을 입혀주는 손과 아이의 죽음을 연관 짓고 있다는 사실은 『애니 존』의 서사 속에서 가족의 비밀, 바로 어머니의 학대의 비밀을 감추려 할 때조차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지적한다(45).  7이 사건은 애니에게 심리적 관점에서 “원장면(primal scene)”을 구성한다. “원장면은 아이가 부모의 성관계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 것으로 “그것은 아이에게는 아버지의 폭력행위”로 이해된다 (Laplanche & Pontalis 335). H. 아들라이 머독(H. Adlai Murdoch)은 폭력의 속성이 “성 행위의 자세 즉 남성 우월적인 자세와 연관되어질 수 있고, 따라서 아래쪽에 있는 사람은 수동적이고, 무력하고 열등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애니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더 큰 육체적, 남근적 힘에 굴복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어머니가 배반했고 권력을 상실한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설명한다(333).

    III. 어머니/제국의 비체화

    『애니 존』에서 크리스테바의 “비체화(abjection)”의 개념은 애니가 어머니로부터 분리되는 개별화의 양가성을 설명하는데 특히 유용하다. 크리스테바는 『공포의 힘: 비체화에 관한 글』(Powers of Horror: An Essay on Abjection)에서 비체화에 대한 이론을 상세히 설명한다. 비체는 주체의 자아 규정 혹은 문화의 자아 규정으로부터 거부되거나 억압된 것은 무엇이든 의미한다. 크리스테바는 “비체(abject)”에 대해 “정체성, 체계, 질서를 교란하는 것” 혹은 “경계들, 위치들, 규칙들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4). 크리스테바는 비체를 “ ‘상징계(symbolic system)’로부터 버려진 것” 혹은 “사회적인 합리성, 사회적인 집합체가 기반하는 논리적인 질서를 회피하는 것”과 연관 짓고 있다(65). 즉, “비체화”는 개인과 문화가 스스로를 비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상적인 나를 확립하기 위해 전개하는 분리와 추방의 과정이다. 크리스테바가 예로 들고 있는 “비체”는 “음식물, 더러움, 오물, 시체”(4) 혹은 “배설물, 월경수”(71)와 같은 “불결하고 부적절한 것”에서부터 “반역자, 거짓말쟁이, 양심을 속이는 범죄자, 파렴치한, 강간범, . . . . 비수로 나를 찌르는 친구”(4) 등, 내가 혹은 문화가 외부로서 규정하거나 혹은 자아로부터 추방된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즉, 비체는 인간생활과 문화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있어 “부적절하고, 불결한”것으로 여기는 대상, 말 그대로 자신에게 ‘타자’로 간주되는 것을 의미하며, “비체화(abjection)”란 그런 “타자”인 것처럼 보이는 것을 억압하고 “추방하는”한 과정으로서(4), 주체의 “경계들을 정하는 규범”(68) 혹은 수단이다. 크리스테바의 비체화의 이론을 따르자면 상징계와 그 속에서 성적, 심리적 정체성의 습득이 가능해지는 것은 “깨끗하고 적절한 몸의 경계”(73)를 정하는 것을 통해서일 뿐이다. 다시 말해 비체화의 논리에서 정체성은 내가 총체성이 있다는 내 환상을 지지해주는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내 차이와 결여를 상기시키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거부하고, 추방시키는 것에 의존한다.

    크리스테바는 주체 형성의 과정을 논하면서 ‘기호계(모성의 공간)’으로 언급하는 것들과 ‘상징계(법, 언어, 문화 등)’로 언급하는 것들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와 비체화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들 개념들 중 어떤 것도 다른 개념과 서로 분리시켜서는 완전히 이해되어질 수는 없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기호계와 상징계는 상호의존적이고,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 없이는 작동할 수 없는 상호규정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다시 말해 크리스테바의 이론에 따르면 기호계와 상징계가 모두 함께 주체를 구성하고 있다. 크리스테바에게 의미작용은 기호계와 상징계의 변증법적 관계 속에서 주체가 효과적으로 계속해서 균형을 잡고 교섭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주체는 항상 시험 중에 있고 과정 중”(37)에 있는 변화하는 주체이다. 특히 크리스테바의 이론은 기호계의 형태 속에서 어머니가 상징계의 질서에 혁명을 일으키는 영향을 강조하고 있다. 크리스테바는 “상징계의 전제조건인 기호계는 상징계를 파괴하는 것으로서 드러나고”(50), 결국 “기호계는 상징계의 담론을 분쇄해서(pulverize) 결국 그것을 새로운 장치로 만든다”(51)고 주장한다. 이 분쇄는 기호계가 천천히 효과적으로 상징계를 혁명화하는 방법으로서 아이가 어머니와 분리해서 분열된 주체가 되는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일련의 비체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크리스테바를 연구하는 철학자인 켈리 올리버(Kelly Oliver)는 아이에게 “비체화는 어머니와의 일차적인 나르시시즘적인 동일화를 거의 거부하는 한 방식”이라고 주장한다(60). 즉, 비체화의 첫 번째 대상은 사회 속의 여성의 위치를 예시하는 전-오이디푸스기의 어머니이다. 비체화는 “어머니였었던 존재가 비체로 바뀔 것에 대항하는 투쟁”이다(Powers 13). 그런데 비체인 어머니의 몸은 정확히 그것이 “욕망을 불러일으키지만 동시에 무시무시하고, 자양분을 주면서 동시에 잔혹하고, 매혹적이면서 동시에 비체인”(54) 양가성 때문에 상징계로 진입하는데 요구되는 어머니로부터의 분리는 매우 어렵고, 주체는 계속해서 어머니에게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 몸의 유동체와 같은 어머니의 잔여물들에 대한 비체화에 둘러싸인다. 주체가 되기 위해 아이는 어머니와의 동일화를 포기하고, 자신과 어머니 사이의 경계를 그어야만 하지만, 노엘 맥아피(Noe¨lle McAfee)가 지적하듯이 아이가 “어머니의 경계를 확인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 아이는 어머니와의 나르시시즘적인 통합에 대한 갈망과 주체가 되기 위해 이 합체를 포기해야 할 필요성의 이중적인 속박 하에 놓인다”(48). 『애니 존』에서 어머니에 대한 애니의 감정은 양가성 속에 머물고 있고, 그런 양가성은 몸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즉, 딸이 어머니와의 동일시 속에서 어머니와 분리를 시도하는 것은 곧 자신의 자아 일부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머니에게서 벗어나려는 투쟁은 딸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고 이것은 사랑과 증오, 통합과 분리, 승인과 부인, 권력과 종속의 양가적 성격을 띠게 된다.

    학교에서 애니는 처음에는 자신의 분리된 정체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머니와 영국인 선생님들과 동일시하면서 그들이 비체로 규정한 것들을 추방하고, 그들의 승인과 사랑을 얻어서 그들의 권력을 대행하려 한다. 애니는 자전적 에세이로 인해, 그리고 자신의 총명함으로 인해 반 친구들과 선생님을 감동시키고 그들의 호의를 얻는데 성공한다. 애니는 자주 “반 아이들을 감독하도록”(49) 지정되어지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힘을 행사하고, 비체로 여겨지는 것들을 밀어내려 한다. 이것은 『애니 존』의 초반부에서 죽은 아이의 시체를 만졌던 어머니의 “손”을 애니가 거부하는 행위에서부터 “어머니가 분만 중에 죽은 소니아(Sonia)”라는 “저능아 소녀”를 돕다가도 그 소녀를 비천하고 “수치스런” 존재로 여기면서 그 아이를 계속해서 꼬집고 괴롭히면서 배제하는 행위(7-8), “한 소녀에게서” 애니 자신의 “약한 자아를 발견하고, 냉혹하고 잔인하게”(49) 괴롭히는데서 알 수 있듯이, 애니는 취약하고 혐오스런 몸으로 여겨지는 것들을 배제하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 제국이 합법적으로 인정한 것을 수용하는 어머니/식민주의자의 대리인 역할을 떠맡는다. 특히 애니의 친구들인 ‘그웬(Gwen)’과 ‘붉은 소녀(the Red Girl)’는 애니가 자신의 성격을 규정하고 미래의 길로 나아갈 때 애니에게 열려 있는 “두 가지 다른 자아들”을 반영한다(Paravisini-Gebert 112). 그웬은 애니가 어머니와 선생님들에 의해 배우도록 요구되어지는 선함과 깨끗함의 모든 이미지를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상적인 대상이다. 그웬의 스커트의 주름은 항상 제자리이고, 그녀의 면양말은 항상 말쑥하게 발목까지 오고, 그녀의 구두는 반짝반짝 윤이 난다(47). 애니는 마치 그웬과 한 몸인 것처럼 “심장은 말할 것도 없고, 어깨, 엉덩이, 발목에서 서로 연결된”(48) 것처럼 느끼면서 함께 학교를 다닌다. 애니는 그웬에 대해 “이른 아침인데도 이미 하늘에 높이 솟아오른 태양은 그녀에게 비추었고, 거리는 온통 그웬과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이 완벽해지도록 갑자기 텅 비어있었다”라고 묘사하면서 그웬을 숭배한다(46-47). 애니를 밀쳐내는 어머니와는 달리 그웬은 그들 두 사람이 성장한 뒤 그들 자신의 집에서 함께 사는 것에 동의한다. 그런 점에서 애니가 그웬과 맺는 관계는 전-오이디푸스기의 어머니와의 합체를 부정하는 동시에 그 합체를 지속적으로 경험하게 한다.

    『애니 존』에서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고 단지 ‘붉은 소녀’로 언급되는 소녀는 중심에서 벗어난 가장 비천한 주변인이라 할 수 있다. 붉은 소녀는 보호자인 부모도 없고, 주변 소년원의 불량소년들과 어울리고, 몸은 씻지 않아 “끔찍한 냄새”가 났고, 머리는 늘 “헝클어져 엉켜” 있고, 옷을 갈아입지도 않는다(57). 붉은 소녀는 모습에서건 출신에서건 ‘깨끗하고 적절한 몸’에서 벗어나서 가장 비천한 모습을 하고 있다. 애니는 그웬과 함께 잃어버린 이상인 어머니의 사랑을 재생산하고 균형 잡힌 애정을 교환하고 있다면, 애니는 붉은 소녀와 함께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증오, 권력과 종속 관계의 덫에 갇힌다. 애니는 붉은 소녀가 나무에 열린 과일을 따기 위해 나무를 타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결코 전에 소녀가 이런 것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소년들은 모두 자신들이 원하는 과일을 따기 위해 나무를 오르고 소녀들은 모두 나무에서 과일들을 떨어뜨리기 위해 돌멩이들을 던졌다. 그러나 그녀가 어떤 소년들보다 더 잘 나무를 타다니”(56)라고 놀라워하면서 애니는 붉은 소녀에게서 젠더 역할을 전복시킬 가능성을 확인하게 된다. 앞에서 “내가 사는 곳은 바로 그런 낙원이다”(25)라고 묘사하면서 어머니와의 합체를 낙원으로 묘사했던 애니는 이제 완전히 정반대의 어두운 세계에서 완벽함을 발견한다. 애니는 “오! 그녀는 대단한 천사이다. 그녀는 참으로 천국 속에 살고 있도다!”(58)라고 말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질서와 훈육을 강조하는 어머니와 식민지의 교육에 저항하고 있고, 붉은 소녀의 훈육되지 않는 자연적인 이미지를 앤티가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 이전의 자연 상태, 바로 낙원의 상태와 은유적으로 연관 짓고 있다. 붉은 소녀는 또한 애니와 어머니 사이의 거리를 촉진시켰던 월경과 더불어서 애니의 성애와 연관되어진다. 붉은 소녀는 애니가 몇 일만에 약속장소에 나타났을 때 애니의 몸을 “꼬집고” 이에 애니가 아파서 눈물 흘리자 “꼬집어서 고통을 주었던 몸의 모든 곳에 키스”를 퍼붓기 시작한다(63). 애니는 “오, 그 기분이란 얼마나 달콤했던 가”(56)라고 표현하면서 붉은 소녀와 함께 맺었던 에로틱한 사랑의 어둡고 금지된 부분, 죄와 분노로 결합된 사랑, 고통과 쾌락이 함께 결합된 사랑을 실행에 옮김으로써 어머니/식민주의자의 “법”을 깨고 순수에서 경험의 세계로 옮아간다. 애니는 붉은 소녀와의 만남을 통해 비체로 여겨지는 것들, 동성애, 거짓말, 훔치기 등을 실행에 옮긴다.

    그러나 붉은 소녀와의 만남은 애니가 지하실에서 공기구슬들을 숨기고 나오다가 어머니에게 발각된 후 불가능해진다. 애니가 공기구슬들을 숨긴 곳을 찾는데 혈안이 된 어머니는 애니가 실토를 하지 않자, 어머니는 자신이 머리위에 이고 있던 무화과 열매 위에 검은 긴 뱀이 앉아있었던 일화와 자신의 오빠를 존경했지만 “의사도 병명을 모르고” 단지 “오베아(obeah)9 여성만이 알고 있던 어떤 것” 때문에 죽은 이야기를 해준다(69). 애니는 마법에 걸린 듯 어머니의 “따뜻하고, 부드럽고, 믿을 수 없는” 목소리를 듣고, 백일몽에서 막 깨어나서 실토하려는 순간 애니는 공기구슬들을 어디에 숨겼는지 이야기하라는 어머니의 강요를 받는다(70; 필자 강조). 어머니의 뱀 이야기는 어머니 쪽에서 애니의 실토를 받아낼 심리적으로 유리한 거의 성공에 이른 책략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런 어머니/뱀의 속임수 전략을 애니가 그대로 모방해서 애니/뱀은 자신의 “따뜻하고, 부드럽고, 새로 획득한 믿을 수 없는 목소리로” 자신은 공기를 숨기지도 않았고, 공기놀이를 한 적도 없다고 거짓말 한다(70; 필자 강조). 이 지점에서 애니는 점차 스스로 어머니/제국이 추방하기를 원하는 비체/붉은 소녀가 되어감으로써 호미 바바(Homi K. Bhabha)가 표면적인 정중함 속에 피식민지인의 저항을 숨긴 “교활한 공손함(sly civility)” 속에서 “흉내 내기(mimicry)”의 가면을 획득하고 있다(93, 85). 바바에 따르면 “흉내 내기”는 “‘거의 동일하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은 차이의 주체로서’ 바뀐(reformed) 인식가능한 타자를 지향하는 욕망”이다(86). 다시 말해 “흉내 내기”는 흉내 내는 대상과 닮기는 하지만 그 원래의 대상 자체일 수는 없는 주체를 재현한다. 따라서 “흉내 내기 담론은 효과적이 되기 위해서 ‘양가성’을 중심으로 구성되고, 끊임없어 그것의 미끄러짐, 초과, 차이를 생산”한다(86). 즉, 흉내 내기는 식민지 통치를 위해 식민주의자들이 의도했던 것과는 달리 계속해서 원래의 대상에서 벗어나서 대상과는 다른 것들을 끊임없이 재현하기 때문에 “차이”에 의해 초래된 결과들을 통제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흉내 내기 담론의 힘은 불확정성에 있다. 애니가 어머니/식민주의자를 “흉내”내는 것은 영국의 식민지하에서 생존으로서 가면을 쓰는 과정, 즉, 감추고, 억누르고, 부정하고, 형태를 바꾸어 지배세력의 태도를 떠맡는 과정을 보여준다. 피식민지인/애니는 어머니/식민주의자의 시각을 “전유”하는 것을 통해 점차 어머니/식민주의자의 권위를 조롱하는 힘을 확보하게 된다(86).

    그러나 어머니/제국의 제도 속에 편입되기 위해서는 애니가 하지 말아야할 부적절함의 개념들을 구현하는 붉은 소녀는 애니의 몸에서 추방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붉은 소녀가 다른 섬으로 떠나는 것으로 표현된다. 비체로서의 애니의 또 “다른 자아”인 붉은 소녀는 ‘깨끗하고 적절한’ 사회로부터 추방됨으로써 애니는 성공적으로 다시 한 번 내부의 타자를 외부로 추방시킨다. 하지만 이렇게 추방당하고 비체화된 공간은 그 속성상 제자리에 머물려 하지 않고 기회만 있으면 상징계로 귀환하여 말끔한 공간의 질서를 교란시키고자 한다. 비체는 의식 혹은 무의식의 주변에 어렴풋한 존재로 항상 머물고 있다. 의미심장하게도 애니는 붉은 소녀의 추방을 “승화”시킨다(Powers 7). 애니는 꿈을 통해 이를 실현시키고 있다. 붉은 소녀는 꿈을 통해 애니의 무의식적인 억압 속에 남게 된다. 애니는 꿈을 꾸는데 꿈속에서 붉은 소녀가 탔던 배가 갑자기 바다 한가운데서 산산 조각이 난다. 애니는 붉은 소녀만을 구하고 모든 승객들은 익사해서 죽는다. 애니는 붉은 소녀를 섬으로 데리고 가서 영원히 함께 산다(70-71). 그런데 “사람들로 가득한 유람선이” 근처를 지나갈 때 애니와 붉은 소녀는 유람선이 “근처 바위에서 충돌”하도록 “혼란스런 신호”를 보낸다(71). 앞에서 “세 척의 배”를 통해 킨케이드는 카리브 지역과 콜럼버스를 병치시킴으로써 애니가 어머니와 보냈던 전-오이디푸스기의 낙원 파괴와 연관 지었다면, 이제 “사람들로 가득한 유람선”은 바로 앤티가를 포함한 카리브 지역에 들어왔던 식민주의자들로 대표되는 백인 농장주들, 하급관료들, 선생님들, 선교사들, 의사들, 여행객들을 의미하고, 킨케이드는 애니를 통해 그들을 죽게 함으로써 식민주의자들의 “기쁨의 외침”을 “슬픔의 외침”으로 바꾸고 있고(71), 애니는 꿈을 통해 식민주의자들에 대한 복수를 실행하고 있다. 킨케이드는 애니의 꿈을 빌어 점차 애니가 어머니/제국을 자신의 몸에서 추방시키면서, 그것의 힘을 전유할 미래를 예시하고 있다.

    로라 도일(Laura Doyle)은 현대 소설과 문화의 맥락 속에서 “어머니”라는 인물은 “젠더정체성 뿐” 아니라 “인물들과 화자들의 인종적, 민족적, 국가적 정체성과 ” 복잡하게 얽혀 있고, 이 “어머니와 연루된 정체성의 복잡함”은 “실험소설의 비정통적인 서사 관행”을 조장한다고 주장한다(4). 도일의 주장은 킨케이드의 서사에도 적용된다고 할 수 있는데, 킨케이드의 서사는 전-오이디푸스기에 딸과 어머니 간의 유토피아적인 통합에서 분리로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고통스런 불화를 묘사하고 있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머니와 딸의 플롯은 인종, 계급, 젠더가 서로 맞물리는 카리브 지역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을 반영한다. 다시 말해 애니가 어머니와의 동일시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자율성의 징조를 드러낼 때 어머니는 칭찬과 승인 대신 비난과 경멸을 드러내고, 자신의 종속 하에 두려고 하는데 이것은 아프리카에 뿌리를 둔 카리브 세계와 유럽 세계가 충돌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표출된다. 킨케이드도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는 것처럼, 어머니와 딸의 플롯은 어머니/제국과 딸/식민지 간의 갈등의 알레고리로서 읽혀질 수 있다.

    어머니가 애니에게 강요하는 교육은 바로 제국이 요구하는 교육을 답습하는 것이다. 마치 식민 담론에서 백인 남성이 보통 아이들로 비유되는 미개발 상태의 원주민들을 보살펴야한다는 식민주의자의 부담처럼 『애니 존』에서 어머니와 영국인 선생님들은 식민주의자의 표상으로서 피식민지인을 복종하도록 훈육하고 길들이는 임무를 띠고 있다. 그런 훈육의 과정 속에서 애니는 식민통치로 인해 억압되고 침식당한 문화와 자아를 창조하거나 회복하려는 투쟁과 저항을 드러낸다. 애니는 영국인들에 대해 “그들이 씻지 않는” 것이 어머니가 “싫어하는 유일한 것”이라고 서술하면서 어머니와 제국 간의 동일화를 드러낸다(36). 식민주의 체제와 공모하는 애니의 어머니는 영국인 중류계급의 방식과 관행을 모방하고, 그런 기준들을 지침으로 삼으려 한다. 애니의 어머니는 딸의 신체, 확대하자면 딸의 ‘흑인성’을 삭제하려는 노력 속에 애니의 부각되는 성격과는 반대로 영국인의 기준에 적합한 젊은 숙녀로 딸을 키우려고 하지만, 애니는 무의식적으로 저항의 징조들을 드러낸다. 애니는 젊은 숙녀처럼 “정중하게 인사하는 법”을 배우도록 어머니가 보낸 예절 교습소에서 “방귀뀌는 것 같은 소리”를 내서 쫓김을 당하거나, “피아노” 교습소에서 “피아노 위에” 장식으로 둔 “자두”를 먹는 바람에 내쫓김을 당한다(28). 이에 대해 애니의 어머니는 애니에 대한 “혐오감으로” 애니를 외면하거나 아니면 “불찬성의 표시로 입 꼬리를 내리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애니에게 반복해서 수치감과 모욕을 준다(28).

    그러나 애니는 식민지 교육이 앤티가 토착민의 문화를 학교에서 배우는 영국 문화보다 열등하다는 인식을 자신에게 심어주고 있고, 피식민지인의 개별성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권력을 비추는 거울로 전환시켜서 유럽의 종속 모델을 ‘흉내 내는 원숭이’로 만드는데 목적을 둔 식민주의 사상을 주입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될 때, 애니는 식민지 교육을 통해 복종을 형성하는 것만큼 확실히 반역을 형성하는 양가성을 드러낸다. 애니가 학교에서 콜럼버스 그림을 훼손하는 사건은 바로 그런 한 예이다. 학교는 식민 통치를 위해 애니를 포함하여 모든 학생들에게 콜럼버스가 “역사적으로 위대한 영웅”이고, “앤티가 섬을 발견한” 비범한 항해자이자 탐험가이고 신대륙의 창립자라고 가르친다(82). 애니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오래 전에 죽은 빅토리아 여왕의 생일”(76)을 기리고, 더 나아가 콜럼버스를 포함하는 유럽 역사를 찬양하기 때문에 자신이 주인의 편인지 아니면 노예의 편인지를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식민통치의 옳고 그름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애니는 “무슨 일이 정말로 발생했었는지를 누가 아주 잘 알겠는가”(76)라고 말하면서 학교 교과서를 통해 배우는 공식적인 가치와 사람들의 일반적인 가치 사이의 모순이 존재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고, 이런 의문 속에서 제국주의의 공식적 해석에 반하는 해석을 표명한다. 애니는 콜럼버스가 세 번째 항해 후 사슬에 묶인 채 스페인으로 호송되는 그림을 보았을 때 “보통 승리에 찬 콜럼버스가 그렇게 낮게 배 바닥에 앉혀져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 이 그림은 얼마나 훌륭한가!”(77-78)라고 생각하면서 초라한 패배자의 모습으로 그려진 콜럼버스의 그림을 보며 기뻐한다. 애니는 콜럼버스 그림 밑에 고대 영어 글자로 “위대한 남자는 더 이상 일어서서 걸을 수 없다”(78)라고 쓴다. 애니가 적은 이 글귀는 사실상 애니의 어머니가 아버지와 다툰 후 도미니카를 떠나게 되고, 후에 그 아버지[애니의 외할아버지]가 걸을 수 없다는 편지를 받고, 애니의 어머니가 했던 말이다. 애니는 이 부분에서 식민지의 지배와 가부장적인 압제를 병치시키면서 어머니가 외할아버지에게 했던 도전적인 말을 그대로 ‘모방’하고 자신의 것으로 ‘전유’해서 콜럼버스에 대한 징벌로 이용하고 있다. 애니가 적은 이 문구는 콜럼버스의 항해로 인해 카리브족이 몰살당하고, 이후 카리브 지역에 노예제도를 낳게 한 장본인인 콜럼버스가 제국주의적인 관점에서 마치 카리브지역을 창조한 신처럼 신격화되는 거짓 역사에 대해 애니가 행하는 징벌이자 역사 수정이다. 애니는 사실상 한 문화의 확고한 기존 권위에 도전해서 자신의 의지를 부과함으로써 실제로 자신의 의지력으로 자신 속에 있는 어머니/제국을 비체화하고 있고, 그것의 권위를 위협하고 있다.

    애니는 콜럼버스 그림 훼손을 통해 피식민지인이 식민지의 구조 속에서 제국의 명령을 어떻게 거부할 수 있는 가를 보여준다. 애니는 스스로 어머니/제국의 합법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비체로 규정되었던 것들을 거부하고 부인하는 행위에서 벗어나서 오히려 합법적인 어머니/제국을 비체화함으로써, 어머니/제국의 관점에서 보자면 애니 자신이 비체가 됨으로써, 어머니/식민주의자의 힘을 모방하고 전유하는 과정을 통해 어머니/제국의 힘에 도전하고 있다. 크리스테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체는 추방당한 곳으로부터 그 주인에게 맞서 도전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Powers 2)고 주장했듯이 비체는 어머니/제국의 제도권 바깥에서 제도의 타자로서 제도의 정돈된 공간의 질서를 교란하고 제도 자체를 웃음거리고 만들 수 있는 존재이다. 즉, 타자화된 비체는 공손하게 그런 폭력에 순응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자신을 비체로 만들고 있는 주체의 공포를 조롱하면서 모욕을 가한다. 애니는 주체와 비체의 양가성 속에서 타자화된 비체가 됨으로써 어머니/식민지의 권위를 조롱하고 있다.

    영국인 선생님은 애니가 저지른 그림 손상을 “신성모독”(82)이라 부르며 처벌하는데, 이 일로 인해 애니는 반장의 직위도 박탈당하고, 존 밀턴(John Milton)의 『잃어버린 낙원』(Paradise Lost)의 제 1권과 2권을 베껴 쓰는 처벌을 받는다. 다이앤 시몬스(Diane Simmons)가 주목하는 것처럼 “밀턴의 작품은 루시퍼(Lucifer)라는 사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고, 루시퍼는 감히 도전할 수 없는 권위에 도전한 벌로서 낙원에서 추방당하고, 절망과 영원한 추방의 암흑 속으로 떨어진다”(113). 그런데 이 지점에서 킨케이드는 애니가 처벌받는 것을 통해 다시 한 번 식민지 교육이 애니를 그 권위에 복종하게 하는 것 뿐 아니라 그 복종 행위 속에서 반역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킨케이드는 콜럼버스의 도착 후 어머니/제국에 의해 카리브 지역이 식민화되었고, 밀턴의 ‘잃어버린 낙원’처럼 식민지 이전/전-오이디푸스 시기의 조화를 상실하게 되었다는 점을 상기시킴으로써, 제국의 문학인 『잃어버린 낙원』 베끼기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식민지배자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있고, 제국의 추악한 역사와 권위를 패러디하고 조롱하고 있다. 또한 애니가 밀턴의 『잃어버린 낙원』을 베껴 쓰는 동안 식민통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는 것이 아니라 루시퍼의 도전과 반역을 모방하고 전유함으로써 장차 애니가 원하는 방식으로 권위적인 텍스트를 재해석하고 다시 쓸 수 있게 하고 있다는 암시를 준다. 바바에 따르면 “식민지의 욕망이 분절되어지는 것은 항상 타자[식민지 지배자]의 위치에 대한 관계 속에서”(117) 즉 “적어도 동시에 두 장소에 존재하는 이중의, 변장하는 이미지”(45)를 통해 식민지의 권위는 그 자체의 자아를 완벽하게 복사할 수 없음으로써 스스로를 훼손시킨다고 주장한다. 즉, 바바는 “식민지의 현존은 원본과 권위로서의 그것의 출현과 반복과 차이로서의 분절작용 사이에서 항상 양가적이고 분열되어진다”고 결론짓는다(107). 여기에서 바바는 “거의 동일하지만 아주 똑같지는 않음”이라는 양가성의 개념 속에서 발생하는 “분열”의 간극을 통해 식민 담론의 실패를 드러내는 저항의 장소가 형성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89). 그러나 바바는 “저항은 반드시 정치적 의도를 지닌 적대적 행위는 아니다. 그리고 저항은 한 때 차이로서 지각되었던 다른 문화의 ‘내용’에 대한 단순한 부정이나 배제도 아니다. 저항이란 지배담론이 문화적 차이의 기호들을 분절하고 식민지 권력의 차별적인 관계들(위계절서, 규범화, 주변화 등) 속에 그 기호들을 재연루시킬 때, 지배담론의 인식의 규칙들 내부에서 생산되는 양가성의 효과이다”라고 주장한다(110). 바바의 이 지적은 『애니 존』에서 애니가 취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애니는 밀턴의 『잃어버린 낙원』베껴 쓰기를 통해 영국인 선생님/식민주의자가 의도한 “원본”을 정확히 “복사”하고 그것의 사상과 권위를 보존하고 존중하는듯하면서도 오히려 루시퍼라는 인물의 반역을 “모방”하고 “전유”함으로써 지배 담론의 틈을 뚫고 들어가 그 권위를 “분열”시키고 전복시키는 저항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9영국 식민지였던 서인도 제도에서 아프리카 종교들 중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것 중 하나가 오베아 신앙이다. 오베아 신앙은 마법과 주술 등을 이용한다. 오베아는 고객 혹은 피해자가 원하는 효과를 얻기 위해, 주로 그릇된 짓을 한 사람에게 복수하기 위해, 특정 장소에 특별한 약초 혹은 다른 물질 혹은 물건들을 놓아두기도 한다. 또한 병을 치료하거나 병을 유발시키기 위해, 심지어 독을 넣기 위해, 오베아의 도움을 구하기도 한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부정적인 주문을 걸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다른 오베아 주술사를 찾아가서 선한 마법으로 악한 마법을 퇴치할 수 있게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Mistron 68-69).

    IV. 파괴와 재탄생

    애니가 콜럼버스 그림 훼손으로 처벌 받은 후 “어머니의 키스와 포옹으로 위로” 받기를 원하며 집으로 오지만 애니는 다시 한 번 어머니의 책략에 직면한다(83). 어머니는 애니가 “몹시 싫어하는 빵나무로 만든 음식”을 “벨기에에서 수입된 쌀”인 것처럼 속여서 그녀에게 먹게 한다(83). 애니는 어머니가 자신을 속인 것을 알았을 때, 어머니에 대한 배신감은 극에 이른다. 이 일로 인해 애니의 소외감은 가정에서나 공적인 영역에서 되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애니는 자신을 복종적인 제국의 아이가 되도록 훈육하는 학교도, 어머니도, 모두 믿을 수 없는 공간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애니는 “내 어머니와 나는 각자 곧 두 얼굴로 되어갔다. 한 얼굴은 내 아버지와 세상의 나머지 사람들을 위한 얼굴이었고, 다른 얼굴은 우리가 서로 홀로 우리 자신들을 발견할 때의 얼굴이다”(87)라고 서술하면서 애니는 어머니/제국의 이중성에 대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서 자신 또한 이중적이 되어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애니의 불행은 네 명의 소년들에 의해 모욕을 당할 때 더욱 깊어진다. 그 소년들은 영국인 식민주의자들을 흉내 내면서 애니에게 “안녕하세요, 아가씨? 오늘 오후 어떤가요?”(95)라고 그녀를 희롱한다. 애니는 소년들이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의 행동이 “악의적”이고, 자신은 “그곳에 서있는 것을 제외하고 그런 모욕을 당할 어떤 짓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95). 애니는 그 무리의 소년들 중 한 명을 알아보는데, 그 소년은 애니가 어린 시절 애니를 심하게 놀리고 학대했던 놀이 친구 미뉴(Mineu)이다. 애니는 그 소년과 했던 식민주의자와 피식민지인의 역할과 또한 성인의 젠더 역할을 흉내 내는 어린 시절의 놀이를 회상한다. 그 놀이에서 그 소년은 항상 주인 혹은 “지도자”의 역할을 했고, 애니에게는 “하인”의 역할 혹은 “덜 중요한 역할”을 하게 했던 것을 기억한다(96). 미뉴가 애니를 알아보고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할 때, 애니는 미뉴와 그의 친구들이 그녀를 놀리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고, 애니는 수치감을 느끼면서 이를 목격하는 증인들 속에서 굴욕감을 느낀다.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애니는 어린 시절 미뉴가 자신을 발가벗게 한 뒤 침이 있는 붉은 개미 둥지 위에 앉게 해서 여성의 은밀한 부분이 개미들에 찔리게 하는 성적 학대를 저질렀던 것을 떠올린다(100). 애니는 “마치 몸이 타들어가는 듯 느껴지고” 갑자기 자신의 몸이 “너무 커져서 몸이 전 거리를 차지”했다가 다시 “너무 작아져서” 아무도 그녀를 “알아볼 수 없고, 심지어 울어도 알아볼 수 없게” 되는 육체적으로 혼미한 상태에 빠진다(101). 몸의 크기가 바뀌는 애니의 느낌은 어린 시절 미뉴에게서 겪었던 성적인 위협과 현재 소년들에게서 받은 모욕이 함께 교차되면서 심한 수치감이 극대화되기도 하고, 그런 뒤 자신의 무시당하고 무의미한 존재인 것처럼 작아지는 느낌이 반복되는 애니의 혼란스런 감정상태를 드러낸다.

    애니는 소년들로부터 당한 모욕에 더해 자신이 소년들과 우연히 만났던 장면을 어머니가 가게 안에서 목격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애니의 어머니는 애니가 점차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애니의 성애를 억누르려 하면서 애니에게 소년들 앞에서 “매춘부”(102)와 같은 행동을 했다고 노골적으로 애니에게 모욕을 준다. 어머니의 이 조롱은 애니의 억눌렀던 분노와 수치감을 자극하고 “자신을 구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어머니의 경멸을 되받아서 애니는 킨케이드 자신의 사생아 신분을 떠올리게 하는 “그 어머니에 그 딸이죠”(102)라는 말로 응수한다. 그러나 “모전여전”이라는 딸의 말은 어머니의 분노를 자극하고, 애니는 “방 한 가운데에서 함께 만났던 두 개의 검은 것들이 분리되어”(102), 각자에게로 되돌아가고, 서로 “깊고 넓은 분리를 형성”(103)한다는 말로 어머니와의 영원한 분리를 서술한다. 킨케이드는 『애니 존』에서 애니 속에 타자화된 비체로 존재하는 애니의 흑인성을 포함하여 사회가 비체로 규정하는 불행, 암흑, 죽음, 억압 등의 이미지를 “검은 옷,” “검은 공간,” “검은 뱀,” “검은 공,” “검은 구름,” “검은 것”등 “검은”색으로 표현하고 있다(4, 43, 69, 85, 91, 102).

    이 일로 애니는 자신의 낙원, 즉, 순수, 어린 시절, 어머니 모두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완전히 의식한다. 애니가 꿈을 꾸면서 “내 어머니는 기회가 생긴다면 나를 죽일 것이다. 나는 용기가 있다면 내 어머니를 죽일 것이다”(89)라는 말을 반복하는데서 알 수 있듯이, 어머니/제국은 애니에게 낙원이 아니라 애니를 질식시키는 존재이고 그렇기 때문에 애니가 독립적인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던 어머니/제국이라는 비체를 영원히 자신의 몸과 정체성에서 추방시켜야만 한다. 그것은 애니가 오랫동안 앓게 되는 질병과 그로 인한 상징적인 죽음과 재탄생으로 나타난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배설물과 그것의 등가물(부패·감염·질병·시체 등)은 정체성 형성에 위험이 되는 외부로부터 온 위험을 표상한다. 즉 자아가 비자아로부터 위협당하는 것, . . . . 죽음으로부터 위협받는 삶을 표상한다”(Powers 71). 애니의 오랜 질병은 바로 애니의 정체성 형성 과정에서 어머니/제국으로부터 위협받은 상태를 비유하고, 애니가 최종적인 분리를 위해서는 극복하고 추방시켜야 할 비체이다. 애니는 원인모를 질병으로 침대에 갇힌 채, 침묵, 어둠, 죽음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애니는 침대에 누운 채 부모님이 이야기하는 것을 지켜보지만 부모님의 “말이 공기를 통해” 애니 쪽으로 와서 애니의 “귀에 이르렀을 때 바닥에 떨어져서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109). 애니는 소리들이 “이리 저리 흔들리는” 언어 이전의 기호계의 세계, 바로 전-오이디푸스기의 국면으로 퇴행한다(111). 애니는 또한 육체가 영혼과 분리되어지는 경험을 한다. 애니는 어머니의 어두운 자궁 속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무중력의” 상태인 것처럼 느끼고, 애니는 자신의 죽은 시체로 형상화되는 “검은 것이 그곳에 누워 있는” 것을 보기도 하고 (111), 육체와 분리되어 “천장의 한 대들보 위해 앉아” 죽은 것처럼 누워 있는 자신과 “어머니를 내려다보기도” 한다(116). “죽은 시체”가 몸을 “오염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이 부분에서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는 붕괴되어진다(Powers 4). “세상에서 밀려나고 버려진” 주체는 대상과의 경계가 붕괴된 이 지점에서 죽음/시체와 같아진다(4). 크리스테바가 주장하듯이 “시체는 삶을 오염시키는 죽음이다. 바로 비체이다”(4). 비체는 계속해서 자신의 경계 내·외부를 허물어버린다. 비체는 역겹지만 저항할 수 없다. “상상만으로도 무시무시한 것인 동시에 현실을 위협하기도 하는 비체는” 애니에게 “손짓하고” 결국 애니를 “삼켜”버리는 듯한 자아 상실의 고통을 초래한다(4).

    이런 ‘죽음의 오염’에서 벗어나서 재탄생을 맞이하기 위한 정화의식이 애니에게 뒤따른다. 애니가 물속에서 사진을 씻거나 지워버리는 행위는 재탄생을 위한 정화의식이다. 애니는 몇몇 가족사진을 세면대에 담가서 말 그대로 씻음으로써 모든 불순한 느낌을 그녀 자신에게서 씻어내려 한다. 애니는 고모의 결혼식 사진 속에서 면사포의 접힌 부분을 펴기 위해 사진을 씻기도 하고, 아버지의 바지에 묻은 먼지를 떼어내기 위해 사진을 씻기도 한다(119-20). 결국 애니는 자신의 얼굴 이외는 결혼식 사진에 나온 모든 얼굴들을 지우고 있는데 이것은 그녀가 모든 친척들로부터 최종적으로 분리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새로운 정체성과 독립적인 삶을 위해 익숙한 가족의 유대를 절연하는 것을 의미한다. 애니는 또한 부모님의 사진의 “허리 아랫부분”(129)을 지움으로써 어머니/제국을 자신의 몸에서 영원히 추방하고 삭제하고 있고, 식민지 이전의 전-오이디푸스기의 낙원을 다시 복구하고 있다. 처음으로 성찬식에 참여했던 날 그녀의 모습을 찍은 또 다른 사진에서 애니는 구두만 남긴 채 사진 속의 모든 모습을 지워버린다. 구두를 제외하고 자신의 전 몸을 지워버림으로써 애니는 자신의 옛 존재를 포기하고 있고, 자신 속에 있는 어머니/제국을 비체화하고 있다. 구두만 남긴 것은 즉각적인 출발을 예시하고 있고, 그녀 자신의 자아 의지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애니의 병을 치료하는 사람이 애니의 어머니나 아버지 혹은 서양 의사가 아니라 카리브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는 오베아인 애니의 외할머니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카리브계 인디언 출신의 외할머니 마 체스(Ma Chess)는 도미니카에서 증기선이 다니지 않기로 되어 있는 날 뜻밖에 애니 집을 방문한다. 마 체스는 치료를 통해서가 아니라 상징적인 재탄생과 원초적인 모성애를 통해 애니가 건강을 되찾도록 도와준다. 애니는 “나는 몸을 옆으로 해서 작은 쉼표모양으로 몸을 구부려서 눕곤 했고, 마 체스는 내가 들어갈 수 있는 더 큰 쉼표 모양으로 내곁에 눕곤 했다”(126)라고 애니가 서술하고 있듯이 마 체스는 애니의 치료를 위해 자궁 같은 공간을 제공하면서 태아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모습의 형태를 취하고, 애니를 전-오이디푸스기로 재진입하게 해준다. 애니는 외할머니의 “냄새”와 외할머니의 “숨소리”를 통해 외할머니와 소통한다(125). 오베아인 외할머니는 앤티가 섬이 콜럼버스에 의해 발견되기 이전의 과거 및 아프리카의 문화전통과 연관된다. 마 체스는 헤게모니를 갖고 있는 제국의 문화에 대항하여 카리브 전통과 신앙을 유지하고 있고, 애니가 어머니/제국을 그녀의 몸에서 추방시켜서 재탄생하도록 도와주고 있다는 점에서, 애니는 어머니/제국의 힘을 통해서가 아니라 식민지 이전의 원주민의 문화적 뿌리와 전통을 통해 재탄생하고 있고, 그곳에서 창조력의 원천을 얻고 있음을 보여준다.

    재탄생의 과정은 비가 그치는 부분에서 끝에 이른다. 비가 그친 뒤 그녀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것은 재탄생할 것이고, 억압의 장소인 앤티가, 억압의 원인인 어머니는 모두 애니의 새로 탄생한 자아가 신선한 환경 속에서 번창할 수 있도록 거부당해져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애니는 어머니/제국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애니 존』의 마지막 부분은 애니가 영국으로 향하는 배 속에서 다시 한번 물을 통해 재탄생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어머니의 모습이 사라진 후 애니는 선실로 돌아와서 파도가 배에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마치 물로 가득한 배가 옆에서 천천히 물을 비우고” 있는 소리라고 생각한다(148). 물을 비우는 이 이미지는 출산 과정에서 양수가 흘러나오는 것을 환기시키면서 애니가 자궁에서 나와서 독립적인 자아로 되어가는 것을 상징하고 있고, 그런 점에서 자유와 자아 재탄생의 메타포로 작용한다.

    V. 새로운 시작을 위해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애니가 어머니와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측면에서 볼 때 어머니는 애니에게 중첩된 이미지로 나타난다. 어머니는 애니에게 낙원이자 풍요로움을 제공하는 앤티가가 식민지가 되기 이전의 아프리카에 기원을 둔 카리브 세계를 구현하는 존재이기도 하고, 또한 정체성 형성을 위해서는 배척해야할 지배적이고 억압적인 어머니/제국이기도 하다. 『애니 존』에서 어머니와 딸 간의 갈등은 개인적인 영역을 초월하여 인종, 젠더, 계급, 식민주의 등과 연관되면서 좀 더 큰 사회적, 정치적인 메타포를 유추해볼 수 있게 한다. 어머니와 제국은 모두 애니에게 일종의 트라우마로 작용하고 있고, 애니의 개별화를 봉쇄하고 지연시키는 힘인 것처럼 보인다. 즉, 『애니 존』에서 드러나는 어머니와 딸 간의 갈등은 어머니와 아이가 합체를 이루었던 전-오이디푸스기에서 아이가 분리된 개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보편적인 주제를 분명히 하고 있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갈등은 가난, 인종, 젠더의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는 카리브 지역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 관심을 포함하고 있고, 더 나아가 그 갈등은 제국/어머니와 식민지/딸 간의 관계를 재현해주는 알레고리로 읽혀진다. 즉, 애니가 한 독립적인 개인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어머니와 분리시켜야 하는 것처럼 식민지는 억압적인 제국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분리와 자유를 획득하는 데는 그에 따른 고통과 공허와 상실이 수반된다. 애니가 자신의 몸속에 있는 어머니/제국이라는 비체를 모두 토하고, 자신의 몸에서 추방하고 자신의 개별화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그런 고통, 억압, 암흑, 죽음의 과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아직 미성숙한 그녀 자신의 경계와 자율성을 주장하는데 있어 어머니와의 사회적 관계를 애니는 육체적인 반응으로 표출하고 있는데, 바로 애니의 상징적인 죽음과 재탄생으로 나타나고 있다.

    애니가 어머니/제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니가 가는 곳이 영국이라는 것은 아이러니컬하다. 그러나 루시퍼의 파괴성과 전복적인 힘을 획득한 애니로서는 어머니/제국이 이제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애니가 “내 이름은 애니 존이다”(130)라고 밝히는 것은 바로 애니가 재탄생한 뒤 분리된 정체성을 긍정하는 단계이다. 『애니 존』은 애니가 영국으로 가는 배를 타고 떠나는 열릴 결말로 끝나고 있다. 『애니 존』의 결말은 결코 완전히 씌어지지 않은 채, 이후의 텍스트들에서 그 존재를 재시작하기 위해 되돌아오게 하는 조건으로서 남겨진다. 『애니 존』에서 킨케이드는 이미 암시를 주고 있다. 애니는 어머니/제국과의 대립 속에서 루시퍼의 파괴성, 전복적인 힘, 이중성을 획득함으로써 결국 루시퍼가 되고 있고, 이것은 『애니 존』의 후편으로 알려진 『루시』에서 노골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제 성인화자 애니는 『루시』에서 루시라는 이름을 물려받고 있다. “루시라는 이름은 루시퍼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내 어머니는 나를 악마같다고 생각했다. . . . 나는 루시라는 이름보다는 . . . . 루시퍼로 솔직하게 불리는 것을 더 좋아했을텐데”(153)라고 루시가 밝히고 있듯이 성인 애니는 루시퍼의 전복적인 힘을 획득했음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애니 존』에서 애니가 떠나는 것은 전복을 위한 새로운 시작이다. 『애니 존』이 열린 결말로 끝나는데서 증명되듯이 이후의 텍스트에서 애니의 존재는 이름이 바뀐 루시로 재시작될 것이다. 애니는 루시/루시퍼의 파괴적이고 전복적인 힘을 통해 바로 어머니/제국이라는 비체를 영원히 추방할 것이고, 그것은 바로 애니가 복수를 실행하는 매개인 글쓰기를 통해 미래에 실현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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