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nvironmental Vision in Information Technology Culture and Accelerated Future

정보기술문화와 가속화된 미래에 대한 환경 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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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This paper aims to suggest the compromising vision of nature and technology as the solution to get out of the globally accelerated technology environment in Don DeLillo’s Cosmopolis. This novel intends to emphasize on the importance of physical environment as a precondition for the survival of human. Eric wants to be a posthuman with the cybernetic idea, pursuing to be the digital self in a vast biosphere that integrates both the nature and the technology. His obsessive worship of technology through his quest for the futurity results in the effacement of the humanity and the insulation from the nature. Cosmopolis is DeLillo’s first 9/11 novel, which describes a young-billionaire asset manager Eric’s one-day life in New York in April 2000. Eric can be the third Twin Tower as a symbol of global economic hegemony. By the allusion of the 9/11 catastrophic event, it can be said that Eric’s fall is caused by his hubris and avarice as a global capitalist. Crossing the 47th Street toward the West in his limousine, his journey is revealed as the environmental reflections on his desires to attain the futurity and transcendence by technology. This novel cautions that the abuse of technology can bring out the obsolescence and erasure of the humanity and the nature. DeLillo suggests that the best hope for the evolutionary possibility of posthuman can be realized through the correlation with nature and technology. This future-oriented novel warns that the excessive technology should not lead to the disappearance of community and humanity, and the separation of self and nature. It admonishes that they should not follow pseudo-cosmopolitanism as the greedy world citizens, devoting on the velocity of newest technology. This novel recommends that humans should be the world citizen of global ecosystem, making the ameliorative environment through the correlation with self/environment and technology/nature, and gardening the restorative biosphere and the younger planet.


  • KEYWORD

    Don DeLillo , Cosmopolis , homo technologicus , global capitalism , information technology culture , environmental vision , futurity , posthuman

  • I. 서론

    돈 들릴로(Don DeLillo)의『코스모폴리스』(Cosmopolis 2003)는 주식시장의 버블이 붕괴될 때 광포한 특성을 보여주는 불량 자본주의(rogue capitalism)와 글로벌 자본주의의 실상을 묘사함으로써 기술문명과 자본주의의 이면을 비판하고 있다. 들릴로는 이 소설에서 인간이 기술지배적인 환경에서 기술에 의해 파멸되는 모습을 보일지라도, 물질적인 환경을 유지하고 지속시켜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들릴로는 인간과 기술과 관련성을 중시하는 동시에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엘리스 마르투치(Elise Martucci)의 주장처럼 환경을 단지 자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자연이 결합되는 것임을 제시한다. 이 작품을 통해 들릴로는 전자 미디어, 디지털 정보기술 문화가 생물학적 환경과 상호작용하고 통합된 환경에 서로 영향을 준다는 것을 보여주며, 기술진보에 의해 가속화된 환경에서 인간 생존을 위한 해법을 모색하는 측면에서 문화, 기술, 자연환경의 상호적인 변화과정이 중요함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이 소설은 주식시장의 버블과 대폭락 과정에서 불량 자본주의자인 자산관리사 에릭 패커(Eric Michael Packer)의 몰락을 묘사함으로써 외부환경과 차단된 상태에서 기술에 의해 통합된 사이버 자본의 세계에만 몰입하는 전체주의적 기술 중심의 사고가 인간의 파멸을 초래할 수 있음에 대해 비평적 고찰을 가능하게 한다.

    이 논문의 목적은 가속화된 정보기술 환경에 집착하는 글로벌 자본주의자 에릭 패커가 보여주는 비인간적인 불균형을 지적하고, 기술과 자연의 조화의 관점에서 바람직한 미래지향적 환경적 비전을 모색하려는 것이다. 에릭이 최첨단 기술에 의존하여 미래에 먼저 도달하려고 기술 속에 자연성과 인간성을 모두 흡수시켜서 거대한 단일 통일체를 추구하는 것은 외부환경과 불균형을 이룬 자아의 고립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는 에릭이 정보 데이터에서 자연의 패턴을 발견하고 기술에서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자연환경과 공동사회에서 분리되어 자아 영역에만 몰입하는 것이 어떤 결말을 가져오는지 살펴볼 것이다. 그가 기술적 존재로서 불멸과 미래성(futurity)을 맹목적으로 지향하지만 글로벌리스트의 죽음과 시위자들의 소요에 의한 임시성(temporality)의 발생으로 파국적인 변화를 겪는 것을 고찰할 것이다. 그러므로 에릭이 폭력에 자신의 육체를 내맡김으로써 결국 빗나간 파괴의 행로로 나아가고 암살자에 의해 비극적 최후를 맞는 과정을 통해 들릴로가 인간과 기계의 협력관계에서 진정한 해결책을 제시함을 살펴볼 것이다.

    이 작품에서 에릭은 신체와 외부환경을 도외시하고 기술을 맹신함으로써 환경과 자아관계에서 불균형을 보여준다. 그는 자산관리사로서 투자자로부터 의뢰 받은 자산이 최대수익을 올릴 수 있도록 전문지식에 정통한 자료 분석과 수리계산을 통해 해석하는 예측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대해 지나친 자신감과 경멸감을 가지고 무모하고 모험적인 투자를 함으로써, 그의 고객과 투자자에게 막대한 손실을 가져다준다. 자아 영역에 몰입하여, 특수 방음장치로 강화된 리무진을 소유하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아파트 빌딩에 거주함으로써, 에릭은 돈과 기술에 대한 열망만큼이나 심리적 정서적 병리 증상을 보이며 개인적인 이익만을 위해 전력 질주한다. 다른 사람들의 수천억 달러는 금융시장에서 실행되는 실존주의적 룰렛 게임을 할 때 모두 사라진다. 동시에 온 세상의 수천만 사람들의 안위는 에릭의 엔화 투기가 글로벌 경제 질서를 위협하는 무질서의 폭풍을 야기할 때 대혼란으로 위태롭게 된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에릭이 기술적인 자아로서 미래성을 추구하는 것이 자연성과 인간성을 사라지게 하는 문제점을 초래하므로 그것의 회복을 통한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이익만을 위해 자유의지를 갖는 것의 논리적 결론으로 이르는 고립적인 병폐를 벗어나 자아 영역과 외부환경과의 조화를 갖는 것이 중요함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II. 정보기술문화에서 인간성과 자연성의 사라짐

    들릴로의 환경 의식은 환경이 원시적인 자연으로의 회귀로서 미국의 전원주의적인 자연 경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 환경과 긴밀한 상호작용을 맺고있고 그것의 일부분이라는 관점을 보여준다. 그의 소설에서 환경의 중요성은 원래 상태의 자연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변형된 자연이라는 의식에서 잘 나타난다. 이런 의식은 자연이 고정되고 전체론적이며 항상성을 지닌 것이라는 기존의 일반적인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한다. 이 견해에 따라서 환경이 특정장소에 거주하는 인간의 사회와 문화를 필연적으로 포함한다는 것을, 자연을 문화적으 로 구조화된 개념이라 강조하는 관점에서 이 작품을 고찰할 수 있다.

    들릴로의 작품은 로렌스 뷰엘(Lawrence Buell)의 환경적인 무의식(environmental unconscious)을 담고 있다. 뷰엘은 환경적인 무의식을“언어적 인 한계나 의도적인 억압에 의해 표현되지 않는 것이지만 물질적인 환경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며 인간이 그것과 상호의존성을 갖고 있음을 일깨우는 잠재력”(22)이라고 지적한다. 들릴로의 소설에는 물질적인 세계의 지속가능성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환경적인 무의식이 은유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 에릭이 기술에 의해 가속화된 삶에서 미래에 먼저 도달하기 위해 물질적인 환경과 결별하려는 모습을 들릴로가 드러내는 진정한 근저에는 젤리카 토직(Jelica Tosˇic´ )도 제안하듯“인간 생존의 전제조건인 물질적 공간의 중요성”(46)이 충분히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는 기술에 집착하여 초월하려는 망상이 에릭을 자연과 분리시키고 파멸시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므로, 바람직한 포스트휴먼(posthuman)으로서 새로운 생존 가능성을 열어가기 위해 자연과 기술의 상호관계에서 환경을 가꾸어가는 방식을 찾고자 한다.

    에릭이 가속화된 기술에 몰입해서 미래에 먼저 도달하려 하지만 실패로 드러나는 모습이 9/11의 대재난적인 사건을 연상시키므로, 이 작품은 기술에 의해 파괴된 물질적 환경을 회복시켜야한다는 취지에서 환경과 생태주의 관점으로 해석될 수 있다. 들릴로는 극단적인 모더니티와 기술문명의 집약체인 트윈타워가 무너진 것을 현대 미국문명의 오만과 자만에 의해 파괴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새롭게 다시 회복시켜야 함을 제안한다. 들릴로는 그의 작품을 통해 환경비평의 관점에서 인간과 환경의 상호관련성의 중요성을 제시한다. 들릴로의 작품 은 생태학의 주요 관심사인“첫째 인간은 항상 자연환경 속에 존재하므로‘장소가 없다면 인간의 존재도 불가능’하며, 둘째 21세기의 가장 큰 문제가 지구의 생존”(Tosˇic´ 45)이라는 주장을 잘 반영한다. 이것은 인간의 본질적인 탐색과 그 뿌리를 발견하기 위한 필요성과 인간이 물질적 문화 환경에 동일시될 수 있다는 것과 관련된다. 이 작품은 유기체와 물질적 환경의 관계를 탐색하는 관점에서 인간중심이 아닌 생물중심적인 관점에서 인간이 자연의 거대하고 복잡한 삶 속에서 단지 하나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글로벌 자본주의자 에릭이 다 른 사람들과의 공존을 위한 장소를 경시하고 물질적인 환경을 초월하여 기술에 의해 가속화된 미래 환경 속에 살고자 하는 욕망이 개인적인 추락으로 이르게 됨을 드러내므로 이 작품은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인간이 세상과 지구의 시민으로 행동하고 책임을 가져야 함을 강조한다. 이 작품은 인간의 절멸을 막을 수 있는 진정한 방식은 자연과 분리되어 가속화된 기술 환경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지구의 시민, 세상의 생태계의 시민으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에 전지구적으로 참여해야 함을 일깨운다.

    이 작품은 시간적 배경이 2000년 4월에 설정되어 있을지라도, 들릴로의 첫 번째 9/11 소설이다. 들릴로는『언더월드』(Underworld)의 표지에 세계무역센터트윈 타워의 음산하고 기념비적인 사진을 실음으로써 9/11을 예견한 작가로 인식된다. 『코스모폴리스』는 금융시장 문제와 사이버 자본의 현상학을 제한적으로 다루는 듯해 보인다. 그럼에도 작중인물 비자 킨스키(Vija Kinski)가 예견하는 급작스런 충돌을 공기역학적 건축학적으로 이중적인 의미로 상상하지 않고 에릭의 금융자산 파산에 대한 그의 조언자의 경고로만 읽는 것은 부적절하다. 에릭은‘제 3의 트윈타워’이며, 글로벌경제 주도권의 거대한 상징이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와 폴 비릴리오(Paul Virilio)에 의한 9/11 논평을 볼 때, 에릭의 심리학적 붕괴와 세계무역센터의 붕괴는 무시무시한 유사관계를 가짐으로써 기술적 존재로서 인간(homo technologicus)의 심장부를 향해 둘 다 자살을 하는 것임을 나타낸다. 그래서 킨스키의 예언은 에릭의 추락, 그가 자살을 향해 뛰어드는 것을 기대하게 한다. 자살의 희생자로서 세계무역센터의 이미지는 들릴로와 유사한 견해를 갖는 보들리야르에 의해 가장 기억할 만하게 주장된것이다. 비행기가 거대한 트윈타워를 추락시킨 9/11은 기술진보의 상징물의 심장부에 서양이 죽음을 자초하듯이 끔찍한 궤양암을 처박아 넣은 것으로 보인다.

    보드리야르는 서양이 백인중심적인 획일주의에 스스로 책임을 갖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9/11 항공기 탈취범들을 단순한 저당물로 묘사한다. 그는 9/11에 대해“그들이 그렇게 했지만, 우리가 그것을 원했다”(5)고 명시한다. 그의 관점은 서양의 도덕적 양심으로 수용될 수 없지만 도시의 묵시록을 소재로 다루는 상업적인 영화 장르에 의해 분명하게 증명된다. 비교하자면, 에릭 패커는 그를 반대하는 시위자들의 목표물이 되고 글로벌 자본주의자들의 죽음에 대한 보도를 접하고 그 자신도 생명의 위협을 받음으로써 죽음을 열렬하게 기대하는 분위기 속에서 그의 긴 하루를 보낸다. 에릭은 암살자의 표적이 되려는 그의 열망으로부터 그 자신의 암살자를 불러내는 듯하다. 주도권을 가진 서양에 관한 보드리야르 말처럼“누구라도 이 정도로 주도권을 갖는 세력이 파괴되기를 꿈꿀 것”(5)이므로, 에릭은 그 자신의 파괴를 꿈꾼다. 자발적인 자아부정의 주제는 비릴리오의 9/11 논평에서 또한 중심이 된다. 그에 의하면 9/11은“과학기술적 상상력이 사라짐(disappearance)의 개념—살아있는 세계의 본질을 냉혹하게 벗겨내는 것—을 토대로 600년 동안 그 자체를 구조화”(12-13)해온 결과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트윈 타워의 붕괴는“글로벌적인 자살, 자기보존 본능의 상실”(37)을 드러낸다. 최근 미국문학에서 자아부정을 향한 강박충동을 보여주는 하나의 적절한 인물로서 에릭은 자기 파괴의 경계를 넘어서 살아있는 유기체로서는 사라짐의 개념을 추구한다.

    최첨단 기술에 둘러싸여 있는 에릭의 삶은 시간이 경험을 가속화 하는 것 그리고 역사적인 순간에 거리의 중요성을 축소시키는 것을 의미하는‘시간-공간압축’(time-space compression) 과정에 있다.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의 용어인 시간-공간 압축은“시간과 공간의 객관적인 특성에 변혁을 일으키는 과정”(240)으로 정보기술 문화와 글로벌 금융시장 경제를 포함해서 기술이 공간적 시간적 거리를 단축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비릴리오에 따르면, 시간-공간 압축은 유기체로서는 생명이 사라짐을 보여주는 현대의 삶의 본질적인 단면을 나타낸다. 비릴리오가“오늘날 우리는 가속화된 속도공간으로 들어가고 있다...이 새로운 연결성은 전자 매개체의 하이테크 기계장치이다. 그래서 인간은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프로그래밍에 의해 존재한다”(Decron 71)고 주장하듯, 에릭은 유기체적 존재로서는 사라지고 단지 가속화된 기술 환경 속에서 디지털적인 자아로 남게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에릭이 기술의 혁신성만을 추종하는 편향된 사고를 보여주는 것은 생명지속성을 기반으로 자연과 인간과 기술의 조화로운 관계를 지향하는 태도에 위배된다. 에릭이 글로벌 정보기술의 전자 데이터의 흐름 속에 자신을 몰아넣는 방식으로 돈 벌기에 몰두하므로, 돈에 대한 관심은 그가 열중하는 기술보다는 부수적이다. 최첨단 기술은 그의 삶 속으로 끼어들어가며, 그의 경제적인 부는 기술과 그 자신의 모든 장벽을 제거한다. 그 결과 에릭은 인공두뇌학(cybernetics)과 컴퓨터 전자기술과 완전히 융합될 수 있다고 본다. 세계무역센터 트윈 타워의 상징으로서, 현실을 넘어서 미래를 향해 기술적으로 개척 가능한 영역에 존재하려는 에릭의 태도는 포스트휴먼의 논의와 바람직한 전망의 문제를 고찰하게 한다.

    들릴로가 9/11 한 달 후에 쓴 에세이「미래의 폐허 속에서」“( In the Ruins of the Future”)는『코스모폴리스』를 집필하던 같은 시기에 발표된 것이므로 기술과 자연 환경이 분리되었을 때 궁극적으로 파국적인 결말을 초래할 수 있음을 이 소설을 통해 잘 반영한다. 이 에세이에서 그는 세계무역센터 타워를“진보된 기술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이론적으로 가능한 것을 견고한 형식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기술의 불가항력적인 의지를 나타내는 것”(7)이라 언급한다. 기술의 본질은 추상적인 생각을 실제적인 것으로 증류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정보의 패턴에서 자연을 추출하려는 에릭의 본질과 유사성을 보여준다.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이“전자기술의 도래로 인간은 중추신경체계의 살아있는 모델인, 그 자신을 확장시키고 외부로 나아가게 했다”(53)고 가정했다면, 『코스모폴리스』는 중추신경체계의 본질이 전자기술의 형성력에 의해 재구성되었음을 제시함으로써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이것은 비릴리오의‘과학기술적 상상력’의 용어로 기술이‘기술적 존재로서 인간’이 되는 방식을 의미한다. 들릴로의 언급처럼, “기술은 우리의 운명, 우리의 진리이다...우리가 고안하는 물질과 방식은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주장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우리는 신 혹은 예언가 혹은 다른 경이로움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경이로움 그 자체이기 때문”(36)이다. 기술이 문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이유는 기술이 문명을 만드는 것을 돕기 때문이다. 기술은 자연과 문화가 아닌 그 자체의 삶을 갖는 자만심이란 제 3의 힘으로 인간내부로 확장 침투하는 것으로 보인다. 들릴로의 에세이에서 기술적 구조인 세계무역센터가 서양의 의식구조 속에 내재하는 파괴성으로부터 생기는 집단 문화적 자살의 희생자라고 보는 관점은 보드리야르와 비릴리오의 주장과 유사하다. 이 작품은 자아의 신체를 부정하고 기술 진보에만 몰입하는 전형적인 인물인 에릭이 자살로 이르는 행적을 묘사하듯이 기술이 극단적으로 폭력과 파괴력의 방향으로 갈 때 미래의 파멸을 초래할 수밖에 없음을 명시한다.

    이 작품은 9/11이 일어나기 일년 반 전에 맨해튼에서 펼쳐지는 것일지라도 끔찍한 사건이 어렴풋이 예시되는 도시를 묘사하며 기술의 진부화(obsolescence)에 관한 사색을 다루고 있으므로, 들릴로가 에세이에서 피력하는 사상과 견해가 잘 담겨 있다. 들릴로는 컴퓨터 기술은 인간들을 미래에 살게 하고 과거와 역사에 대한 기억을 삭제했다고 지적한다.

    들릴로는 트윈타워의 붕괴는 기술과 환경의 불균형, 기술 중심 사고, 강력한 모더니티 세력, 기술 추진력의 맹신에 의한 것임을 지적한다. 그는 시위자들이 기술에 의해 가속화된“세계화의 추진력을 감속시키고”(33) 디지털 기술의 미래를 저지하고 과거를 되돌리기 위해 저항하는 것임을 지적한다. 그러나 들릴로는 그들의 저항이 파괴와 폐허의 비전을 기반으로 하므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들릴로는 그들이 기술의 본질에서 파괴의 비전만을 갖는 태도는 죽음과 파멸을 가져다 줄 뿐이므로 긍정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방식으로‘저항 서사’를 기술하고자 한다. 들릴로는“살아있는 언어는 사라지지 않는다. 작가는 이 날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이해하길 원한다...우리는 시간에 의해 쫓기는 듯해 보인다. 시간은 점차 두려워지고 있다. 시간은 강요되고 왜곡됨으로써, 압축되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언어는 그것을 파생시키는 세상과 분리될 수 없다”(37)라면서 저항 서사를 써야한다고 주장한다. 들릴로는 에세이에서 주장했듯이 최신기술에 의해 미래성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것보다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현실을 토대로 하는 녹색의 미래 세상의 소중함을 이 소설을 통해 피력한다. 들릴로는 정치적인 테러리즘과 기술진보에 의한 무서울 정도의 가속화에 저항하는 대항서사 혹은 대항역사를 쓰기 위해 인간성과 자연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책은 작가가 상심한 마음에서 써내려간 흔적을 보여주듯이 절박한 순간에 의해 파손된 스타카토 형식의 문체로서 깊은 의미를 담고 있고, 글로벌 자본주의의 특성인 롤러코스터 같은 속도감과 흥분감을 매우 생생하게 묘사한다. 들릴로는 그의 죽음이 동정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정도로 비열하고 타락한 자산관리사이자 억만장자인, 28세 에릭 패커의 뉴욕시 맨해튼(Manhattan)에서의 삶에서 하루를 묘사한다. 이 소설의 역사편찬의 대망은 첫 페이지에 분명히 나타난다. 2000년 4월 어느 날에 죽음을 상징하는 백경처럼 크고 흰 호화 리무진, 즉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을 갖춘 일종의 무역센터에 편히 앉아서, 에릭은 맨해튼의 47번가를 따라서 서쪽으로 서서히 나아가는 오디세이를 펼친다. 그 여정은 에릭이 그의 아버지가 성장했던 더럽고 낙후된 동네로 이발을 하러가는 도중 기술, 통화, 금융 방면에서 그의 조언자인 고용인들과 잠시 만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범죄와 폭력의 다발지역 헬즈키친(Hell’s Kitchen)에서 끝이 날 에릭의 여정은 라블레(Rabelais)의 묘사 방식으로 제시된다. 이 작품은 피카레스크적인 주인공인 에릭이 우연히 마주치는 여러 거리장면을 묘사함으로써 미래성, 테크놀로지, 글로벌 자본주의, 죽음에 관한 철학적 사색을 담고 있다.

    기술에 의해 미래에 먼저 도달하여 인공두뇌학적인 자아가 되려는 에릭의 모습은 헤일즈(N. Katherine Hayles)에 의해 제시된 포스트휴먼의 요소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헤일즈가 주장하는 포스트휴먼의 의미는 에릭과는 다른 면모를 보이므로 바람직한 자세를 정립해야할 필요가 있다. 헤일즈는 전자기술과 자연이 정보/비정보의 이분법보다 보완과 보충관계를 가져야 하며, 컴퓨터를 통해 텍스트를 만드는 전자시대에는 기표와 기의의 일대일 관계가 아니라 상호작용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정보기술에 의한 교류가 가능해진 문화에서 주 체성이“기술 속에 포함되는 것이라기보다 신체와의 상호관계 속에서 다수적인것”(27)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헤일즈는 정보사회에서 중요해진 기술요소의 우위성을 물질 환경과 자연성의 사라짐으로 오인한다면 그것의 심오하고 함축적인 의미를 이해할 기회를 상실할 수 있으므로“패턴/비패턴의 변증법이 결코 물질성의 세상을 삭제해서는 안 된다”(28)고 주장한다. 헤일즈는 정보기술이 텍스트의 생산, 정보의 보관, 의미의 산포를 통한 변화보다 더 많은 역할을 한다고 본다. 그녀는 라캉이 유동하는 기표(floating signifier)를 통해 텍스트에서 불확정적이고 함축적인 의미를 인정하는 것보다 더 나아감으로써“깜박이는 기표”(flickering signifier, 30)라는 용어를 창안하여 전자의 방식이 재현할 수 있는 예기치 않은 변형, 의미의 산포를 인정한다. 정보과학에서 기표는 코드에 의해 임의적인 관계로 결합되는“표지의 유연성 있는 연쇄 고리”(31)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포스트휴먼은 환경, 기술, 문화, 역사 모든 방면에서 특정한 관계를 맺는 존재로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포스트휴먼을 인간과 거리가 먼 존재로 보는 관점이 아니라 맥루한이 전자 미디어가 인간의 본질을 변화시킬 정도로 매우 광범위하게 재구성할 수 있다고 보는 의식을 따름으로써 인간과 지적인 기계의 공생의 결합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헤일즈는 인간과 기술의 교류를 통한 정체성의 확장이 가능하다고 보는 측면에서“포스트휴먼에게는 육체적 존재와 컴퓨터 시뮬레이션, 인공두뇌학적 체계와 생물학적 유기체, 로봇과 인간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점이나 절대적인 경계선이 없다”(33)하듯이, 바람직한 포스트휴먼은“인간과 기계의 공생의 결합”(34)을 지향해야한다고 주장한다.

    헤일즈는 포스트휴먼으로의 확장 가능성에는 부정적인 면이 있음을 경고한다. 극단적인 방향으로 포스트휴먼의 진화가 일어날 때, “물질성의 체계적인 가치저하”(Hayles 48)가 초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물질세상에서 분리되고 기술 속에 고립될 때는 파멸뿐이란 것이다. 헤일즈는 정보/비정보의 적대적인 관계보다 상호보완 관계의 가능성을 열어두어 것이 인간에게 가장 희망적인 방식임을 제안한다. 이 작품에서 에릭이 기술을 통해 미래성을 추구하므로 기술과 물질 환경의 상대적 관계는 그의 자아 연구를 위한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서 에릭은 기술에만 집착해 자연 환경과는 분리되어 실패하는 양상을 보여주므로, 극단적인 포스트휴먼을 지향하는 인물의 말로를 진지하게 사색하게 한다.

    이 연구에서는 환경을 무시하고 기술을 맹신하는 인물인 에릭의 몰락 과정을 통해 현대인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기술과 자연의 불균형한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바람직한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한다. 에릭이 신체와 외부공간을 벗어나 인공두뇌학적인 불멸을 갈망하는 것이 자기의 몰락을 자초하는 것이므로, 인간과 기술의 통합적 관계에서 어떤 경우라도 인간성과 자연성을 삭제해서는 않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에릭이 기술 중심적인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정보와 데이터의 흐름에서 자연의 패턴과 생태계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환 상에 불과함을 주장하고자 한다. 인공두뇌학적 우세한 존재에 대한 에릭의 열망을 벗어나 자연성을 토대로 인간과 기계사이의 상생의 결합을 추구하는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III. 기술 맹신에 의한 불균형의 자아 영역

    이 작품에서 글로벌 자본주의자 에릭 패커는 시대를 앞선 사람이기 때문에, 현재보다는 미래 세상을 인식하고자 한다. 이 재능은 그를 성공하게 했지만, 시간과 공간에서 그의 존재 위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이것은 이 책의 첫 구절에서, 그를 계속 괴롭히는 불면증의 치료법으로서 독서하는 것에 의해 암시된다. 그는 프로이드를 끝냈고 이제 아인스타인 이론서를 읽고 있듯이, 심리분석을 넘어서 시간과 공간의 상대성에 관심을 갖는다. 에릭의 머리에는 소음, 시간속에 정신만 있을 뿐이므로, 신체를 떠나 정신에 치중해 살고 있다. 그가 죽었 을 때 그는 끝나지 않을 것이고 세상이 끝날 것으로 보인다. 미래에 먼저 도달하는 것에만 집착함으로써 그의 정신이 육체와 외부환경에서 분리되고 뿌리 뽑히게 되는 것은 작품의 끝부분에서 시간과 공간의 일종의 파열로 그의 파멸에 이르게 되는 것으로 드러난다.

    에릭이 이발을 하기 위해 뉴욕 47번가에서 서쪽으로 횡단하는 여정을 시작하지만, 이 책의 결말은 금융자산가 에릭이 파산하고 불만을 품은 자신의 이전 직원의 손에 암살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는“세상에서 가장 높은 주거 타워”(Cosmopolis 8: 이후 인용은 페이지만 기입함)에 있는 그의 펜트하우스 즉, 세상 꼭대기에서 하루를 시작해서 47번가 1번에서 11번 대로로 리무진을 타고 가며 마침내 그것의 주차장으로 간다. 그의 원형적인 정체성을 미국 재계의 거물로 가정한다면, 그의 여정경로는 미국국가의 성립과 발전과정인 동쪽에서 서쪽으로의 움직임을 패러디하는 동시에 그의 삶의 과정을 조롱한다. “세계도시”(88)로의 여정은 새벽에 그의 펜트하우스에서부터 거리에서 시위자의 소요, 엔화 하락에 의한 대혼란을 통해 밤에 맨해튼에서 가장 음산한 지대 헬즈키친에서 상징적으로 끝난다. 아침에 억만장자로 하루를 시작한 그가 죽을 때 시신은 걸인의 것과 유사하다. 양말, 돈, 내의, 재킷도 없고 머리는 반만 이발했고 몸에는 더러운 악취가 나므로‘인간 쥐’가 된다.

    에릭이 미래에 먼저 도달하여“디스크 상에서 살고자 하는”(48, 105) 욕망을 갖는 것은 이 소설이 시간과 공간의 압축이 일어나는 상황과 가속화된 기술 환경에 대한 사색과 탐색임을 잘 보여준다. 그가 여정을 펼치는 장소는 글로벌 도시인‘세계도시’이지만, 어느 곳에도 위치하지 않은 공간이라 정의될 수 있다. 그가 전자감시 장치가 설비된 리무진을 타고 가다가 호텔과 레스토랑으로 잠시 방문하는 것으로 구성됨으로써, 진정으로 에릭은 뉴욕과 상호작용을 거의 하지않는다. 여기서 세계도시는 마르크 오게(Marc Auge´ )가 진정성이 없는 장소로 서“비(非)장소”(non-place 34), 즉 진공상태를 위해 공기를 뺀 병처럼 의미가 없고, 사회적 역사적 문맥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장소이며, 금융시장처럼 현기증 나는 곳이다. 공항, 호텔, 레스토랑은 대도시 사이에 뻗어있으므로 확장의 의미에서 금융시장의 등가물이다. 글로벌 경제에서 편협하게 도구적 역할을 하는 비장소에서 에릭이 경호원, 금융자문가들, 아내와 만나는 것은 자연성과 인간성이 배제된 텅 빈 만남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펜트하우스를 둘러볼 때, 에릭은 데이터를 일일이 탐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아파트의 48개의 방을 통해서”(7) 상어 수족관, 영사실, 러시아 사냥개 우리, 개인집무실로 차례로 걸어지나가는 것은 인간성과 자연성보다는 데이터에 일체감을 갖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이런 특성은 빌딩외부에서 그가 죽음으로의 추락을 위해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그가 사는 고층빌딩과 만족감을 느끼면서 출발하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그가 이 접촉성에서 행복감을 갖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아파트 타워의 89층의 숫자 크기이다. 그는 고층건물이 현 재“시간을 넘어 그 자체를 드러내기”(9) 때문에 미래를 앞서 느끼며 전진하려는 것이다.

    에릭이 수많은 신기술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기술에 뒤처지는 언어에 관해 생각하는 것은 이 작품이 가속화하는 기술 환경이면에 억압되고 소외되어 있는 정신, 과거, 자연성에 관한 사색을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들릴로는 가속화된 기술 환경을 묘사하기에는“현재에는 언어 능력이 부족하다”(Noble 58)고 보듯이 언어의 힘을 회복시키고자 한다. 가속화된 환경은 과거와 현재와는 단절됨을 보여주며, 언어와 사물과 인간관계에서 점차 퇴화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들릴로는 미국을 세계화와 그것의 문제점을 나타내는 소우주인 뉴욕으로 묘사한다. 이 도 시는 시간/공간 변화에 대해 집단적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 혼란 상태로 묘사된다. 앞선 문명에 속하길 원하는 에릭은 급속도로 일어나는 시간/공간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듯해 보인다. 에릭이 현대 언어의 부적절함을 생각하는 것은 글로벌 디지털 미디어 기술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시뮬라르크화된 사회에 대한 반영이다. 보드리야르가“차가운 디지털 세계가 은유와 환유의 세계를 흡수해버렸다”(500)고 주장하듯이, 언어의 진부화 현상에 대한 에릭의 사색은 최신기술에 의해 자연성과 인간성이 억압되고 현재와 과거가 사라짐을 드러낸다. 현재의 언어는 시뮬라르크, 하이퍼 리얼리티를 표현하기에는 부적절해 보인다.

    에릭의 암살자 베노 레빈(Benno Levin/Richard Sheets)이 에릭이“현재보다 더 앞선 문명에 속하길 원한다”(152)고 하듯이, 에릭은 새로운 것만을 생각한다. 그는 기술에 의존해 미래성을 추구함으로써 현재를 초월하고자 한다. 반복적으로 에릭은 현재에 드리운 미래의 반복적인 그림자 때문에 구식이 되고 진부해진 기술을 버려야한다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폐물이 되는 기술은 에릭에게 반미래적인 것에 의해 생성된 모든 쓰레기를 일깨운다. 그는 마천루(skyscraper)를 시대착오적인 단어라며 고층빌딩을“화살모양의 타워”(9)로 지칭하는 것이 더 권 위적이며, 전자수첩(handorganizer)도 폐물이 되었으므로 버려야한다고 인식한다. 그는 경호원 토발(Torval)이 끼고 있는 송신장치(mouthpiece)와 음성 수신기(ear buds)도 진부화된 장치라고 생각한다. 인간존재가 인공두뇌학적 기구 속으로 계속 흡수되고 있음을 보여주듯이, 과학기술 발달은 인간의 사라짐을 수행한다. 그 예는 에릭이 토발의 음성수신기가 진화의 일부분이 되기 위해 토발의 몸의 형태 속으로 이미 끼어 들어갔음을 암시할 때 잘 나타난다. 또한 그는 자동 현금입출금기(Automatic Teller Machine: ATM)도 역사적 유물에 축적 되어야 하며, 자동화된 기계의 명칭에 현금출납계원(teller)으로서 인간존재의 의미가 삽입된 것을 반미래적인 것이라 본다. 그에게 미래적인 기계는 인간존재를 삭제하도록 창안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워키토키(walkie-talkie)를 든 경찰을 볼 때도 빛의 속도로 지어진 스마트 기술 공간에 산업주의 시대의“멍청한 운율”(102)을 가진 장치를 아직도 사용하는 것을 경멸한다. 이처럼 최신기술의 진부화 현상은 것은 반복되는 모티프로 나타난다. “금전등록기”(87), “앰뷸런스”(67), “전화”(88), “컴퓨터”(104)를 포함해 거의 모든 페이지에서 구식이 된 고안 장치를 볼 수 있다. 진부화된 단어에 대한 에릭의 사색은 가속화된 기술환경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는 언어에 관한 논평이다. 진보된 기술 환경에 대 조해서 그 발전 속도를 뒤따르지 못하는 언어 상황을 적절하게 나타낸다. 이런 진부화 현상은“물질적 환경에 대한 연결성이 약화”(Noble 67)되었음을 나타낸다. 시간의 가속화는 신체, 인간관계의 진부화도 가속화한다. 에릭의 인간관계 기간은 점차 짧아진다. 그의 진료를 포함해서 사람들과의 만남이 리무진에서 잠시 이루어진다는 것은 일시성을 잘 반영한다. 가속화되는 노쇠현상은 에릭의 22일간의 결혼생활을 포함한다. 마이클 친(Michael Chin)이“너무 퇴화해서 음식을 씹을 수 없다”(37)하듯이 신체도 퇴화한다. 그의 대저택에 걸린 추상화를 볼 때도, 에릭은“새로운 예술작품에는 위험이 없다”(8)며 새로움만을 선호한다. 글로벌리스트에게 견고한 것이 공중으로 사라지는 현상은 모든 것에서 나타난다. 에릭의 하루도 아침에는 통용되고 저녁에는 완전히 쓸모없어짐으로써 진부화의 연쇄 고리를 형성한다.

    그의 통화 분석가 마이클 친과의 대화에서 에릭은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은“기술과 자본의 상호작용”(23)을 통해 이익을 획득하는 일이라며 기술의 미래성에 집착한다. 에릭에게“육체적 공간”(64) 혹은“현실 공간”(209)은이차적 파생적인 영역이다. 그는 현실공간보다 디지털 기술의 효과에 의존하므로 그의 실제생활은 전자 데이터의 우주에서 일어난다. 그는 컴퓨터 스크린에서 데이터와 숫자의 흐름을 보고 사색한다.

    이처럼 에릭은 숫자와 도표에 생물권이 있다고 믿는 오류를 보이며, 신체와 분리된 삶을 산다. 그는 신체를 이론적으로 분산될 수 있고 정보배열로 이동 전환될 수 있는 구조, 스파이캠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로 생각한다. 대조적으로 그가 스크린에서 통화의 상승과 하락을 관찰할 때, 그는 데이터가 인간의 에너지와 열망과 한밤중의 땀이 빛의 단위로 차갑게 압축된 것이 아니라 전자형식으로 실현된 생명이라고 본다. 그는 정보과학과 생물 생태계의 융합을 당연시함으로써 데이터의 흐름을 통해 자연의 패턴과‘행성의 생물’을 인식할 수 있다고 믿는다. 정보는 실제로 등장인물 역할을 하며, 인간은 정보의 흐름 속에서 산다. 그것의 숭고한 광채는 상징적인 심연의 바다인 디지털 공간을 가득 채운다. 에릭은 인공두뇌학적인 감각기관을 소유한“데이터 처리 장치”(Laist 262)로서 디지털 세계를 통해 움직인다. 그는 데이터에서 주가의 높낮이를 예측하는 동시에 자연을 발견하려는 모순을 보인다. 주식의 미래를 예측해서 이익을 얻는 그의 능력은 그가 실제로 사는 세계가 자연환경보다는 복잡한 데이터 체계이며 그의 세계관이 기술 환경에 있음을 제시한다. 소로우가 자연에서 그의 비전을 진지하게 모색한 것과 달리, 에릭은 디지털 기술 환경에서 살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들릴로는 각종 첨단장비가 설비된 리무진을 인공두뇌학적 가상현실적인 것으로 묘사한다. 경호원 토발도 리무진에 부속된 사이보그처럼 묘사된다. 그의 신체는 몇 개의 가제트로 연관되어 있고, 그는 컴퓨터처럼 짧은 코드로 명령을 받기 때문이다. 시간-공간 압축의 의미에서 에릭이 리무진을 타고 가는 것은 이중적인 시뮬라르크가 되는 것을 반영한다. 리무진은 시뮬레이션화 된 디즈니 관람용 자동차처럼 외부 세계를 내다보는 차로 보인다. 에릭의 리무진은 미래화된 마이크로컴퓨터 환경에 관한 그의 이상을 나타낸다. 리무진은 완벽한 아이디어 로서“플라톤적인 복제품”(10)인 동시에 엄청나게 거대한 물체로서 호소력을 갖는다. 이처럼 그는 이상주의와 물질주의를 변증법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리무진을 통해 완전한 권위를 갖고자 한다. 기술에 집착하는 양상은 에릭이 외부세상으로부터“소음방지 장치”(70)를 하고 차체를 강화시켰다는 리무진의 외골격의 상징에서 뚜렷하게 발견된다. 그가 경호원의 보호 속에서 리무진 안에 있는한, 에릭은 거리에 실제로 들어가지 않고 폭동, 혼란, 온갖 종류의 타자성이 있는 도시를 통과해서 나아갈 수 있다. 리무진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에릭을 외부 로부터 단절(insulation)시키는 것이다. 이런 단절은 그를 육체적으로 외부세상에서 분리시키는 동시에 리무진 내부전체에 충만해 있는 전자기술과 철저하게 연관성을 갖도록 만든다. 에릭의 기술 환경은「스타 트렉」(Star Trek)처럼 빛나는 광선과 비디오가 설치된 벽이 있는 환상적인 것이 아니라 기술이 극도로 경미한 공간특성을 가진 것으로 정의됨으로써 매우 좁고 어두운 공간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에릭의 기술 환경의 감촉성의 차원은 주체와 디지털 기관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공유영역(interface)으로 축소된다. 첨단기술이 공유영역을 삭제했으므로, 에릭은 정보기술과 연속성을 이룬다. 그는 스크린에서 숫자와 도표의 유동적인 흐름을 볼 때“순식간에 자료를 흡수”(13)하며, 데이터 단위처럼 신경계속으로 흘러들어간다. 그의 의식이‘생각하는 기계’의 글로벌 네트워크의 ‘의식’과 유사하게 됨으로써, 에릭은 데이터 전달과정에서 하나의 지점이 된다. 금융시장에 거액을 투자하고 있는 에릭의 기분상태는 데이터 패턴의 변화와 직결되므로, 에릭과 데이터의 관계는 양방향적이다. 그는 기술의 창조물처럼 정보기술의 거울에서 그의 이미지를 바라본다. 그 결과 그는 물질세계와는 분리된 모습을 보여준다. 리무진은 창문 밖의 세상보다 더 실제적이고 추상적인 인공두뇌학의 세상으로 융합을 촉진하듯이, 인간세상에서 에릭을 단절시킨다.

    인간의 사라짐을 통해 미래로 향하는 것은 에릭이 고층빌딩을 보면서 일치감을 갖는 것에서 나타난다. 에릭은 은행 타워와 상호교환성을 가지며 깊은 만족감과 일체감을 갖는다. 에릭에게 고층빌딩은 신의 창공을 스칠 정도의 첨탑을 지을 수 있는 인간 지성에 대한 기념비나 공공의 최상권을 갖는 대성당이 아니라“전몰용사 기념비”(Laist 263)처럼 현재를 능가하는 것을 통해 인간의 사라짐을 나타낸다. 타워들은 현재의 인간 세상에서 기술의 우세함의 상징물로서 도시경관에 있는 건축물이다. 그는 고층빌딩을 현재 공간에서 텅 빈 구조물, 즉 그가 스크린에서 보는 도표와 일치하는 것으로 바라본다. 그는 그것이“미래를 재촉하도록 고안된 것”(36)으로 현재를 넘어서 미래에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에 좋아한다. 그런 구조는 내부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 생성시킨 세상의 부분이므로 외부사회의 종말을 나타낸다.

    에릭과 스크린의 나르시스적인 관계는 그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스크린에서 적절하게 강조된다. 에릭이 리무진에서 잉그램(Dr. Ingram)에게서 진료 받는 동안 모니터로 보는 그의 심장의 이미지는 그의 실제 자아를 압도한다. 그는 “모니터에서 강력하게 고동치는”(44) 디지털 심장의 이미지가 그에게 생명의 황홀감과 경이감을 줄 뿐 아니라 실제의 자아를 엄청나게 위축시킨다고 생각한다. 소형 컴퓨터 모양의 머리를 가진 휴머노이드처럼 마이클 친이 컴퓨터 모니터에 포함된 듯이“세포조직낭 속의 태아의 모습”(36)으로 등을 구부리고 있는 것처럼, 에릭도 스크린에서 그의 신비한 내적존재를 발견한다. 그러나 에릭의 육체가 기술의 은하계에서 신격화된 이미지와 비교될 때, 그의 신체의 감각적 경험은 중요성을 갖지 못한다. 오히려 그의 디지털 심장이 육체가 제거되고 빛의 움직임으로 변모된 에릭으로 보인다. 자아의 디지털화는 그의 이미지를 전송하는 웹캠으로 계속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습관에서도 나타낸다. 인터넷 전송장치는 안전의 이유 때문에 에릭과 경호원에게만 가능한 닫힌 고리이다. 그런 경호장치인 스파이캠은 외면상 생명과 마법을 주는 기능을 할 뿐이다

    이처럼 에릭이 닫힌 체계로 기술과 완벽한 교감을 이루려는 태도를 보여주는것은 그가 물질적 공간과 단절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잉그램이 진료를 끝내고 리무진에서 내려서 가다가 에릭의 전립선이 비대칭이라고 외치는 것은 상징적으로 에릭이 불균형한 삶의 태도를 갖고 있음을 단정한다. 불균형에 관한 지적은 에릭이 신체/정신, 개인/사회를 포함해 삶의 모든 면에서 비대칭의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입증한다. 이런 편향성은 에릭이 은행 밖의 현금인출기 앞에 서있는 한 남자를 볼 때 모니터를 향해 등을 수그린 몸자세에 친숙한 면이 있다고 보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에릭이 현재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나중에 그의 암살자로 드러날 사람에게서 모니터를 향해 등이 구부러진 모습을 가장 먼저 인식하것은 에릭도 기술에 맹신하며 인공두뇌학적 세상으로 빨려 들어가는 불균형한 자아임을 입증한다.

    IV. 자연에서 분리된 자아와 미래성에 대한 경고

    세계화 시대에 시간은 테이블에 진열된 일련의 사진 액자처럼 계속 공간화 되어 나타남으로써 더 이상 중요한 차원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글로벌 경제의 흥분은 정도의 문제로 나타난다. 수익의 기대감이 높을수록 위험성도 더욱더 커지듯이, 금융시장은 휘발성(volatility)의 특징을 갖는다. 세계화 시대에 시간은 에릭의 가까운 미래가 디지털 장소에서 먼저 일어난 직후에 실제로 일어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경험은 에릭의 기술과의 존재론적 동일시가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확장됨을 명시한다. 기술진보의 환상은 인간을 압도하고 대체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의 디지털 이미지가 미래를 향해 앞서감으로써, 육체적 자아는 사이버 자아에서 파생되는 격세유전 양식이 된다. 디지털 기술에 존재론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현재와 미래의 공간이 역전되는 것으로 예시된다. 에릭은 그의 인공두뇌학적 쌍둥이 자아에 의해 그의 실제 자아의 지위가 찬탈되는 일시적인 고리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에릭이 스파이캠에서 자신의 행동을 먼저 본 직후 곧바로 똑같은 행동을 따라하는 경험(22, 52)은 디지털의 미래에 현재가 오히려 뒤처짐으로써 그의 신체가 독립적인 이미지로 미래를 뒤따라가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또한 에릭은 광분한 시위자들이 차를 흔들 때 충격을 받는 모습을 스크린으로 본 후 시위자들이 투하한 폭발물에 의해 반응한다. 에릭은 스크린으로 그의 신체의 움직임과 시위자들의 대격변을 먼저 보는 것이다. 그러나 기술에 의해 그의 미래를 볼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미래의 시작이 될 수 없고, 예측에 의한 이미지는 진정한 미래를 대체하므로‘속력증가’의 징후가 될 수 없다. 그가 미래에 살고 있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며 그는 결코 미래에 살지 못한다. 글로벌 자본주의에 의해 미래의 지평선을 넘어서는 것은 순전히 환상이며 진화와는 반대방향으로 진행할 뿐이다. 미래로 향하는 이미지의 부적합성은 그의 일직선적 여정에 제기하는 일시성과 임시성이 끼어들 때 잘 나타난다.

    에릭은 과학기술적 분석가라는 성직에 임명된 사람으로서 신성한 텍스트인 총체적 통계자료를 해독해주듯이 기술 속에서 자연을 보고자한다. 에릭은 사이버 자본시장에는 심오한 질서가 있고“금융시장과 자연계에는 유사성, 공통영역”(86)이 있다고 주장한다. 미래학자 비자 킨스키는 신탁의 예언자 같은 존재로서 에릭에게 통찰력을 갖도록 권유하는 동시에 도전을 하게 한다. 그녀는 동시대 대사건들의 분석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극단적 추세에 회의주의적 견해를 피력하며, 미래 예측력이 금융상의 데이터 속에만 존재한다고 믿는 에릭을 비난한다. 그의 기술 중심사고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그녀는 자연이 기술 속에 포함되어 통제될 수 없다고 본다. 과학기술에 진리가 존재한다는 믿음에 집착하는 에릭과 달리, 그녀는 진리를 기술적으로 매개화된 상대적인 구조물로 본다. 킨스키는 들릴로를 대변하듯, 에릭이 사이버 자본의 액수에 집착하는 것이 미래에 대한 환상임을 일깨운다. 킨스키는 돈이 지시대상이나 목적성을 갖지 않고“모든 부는 그 자체를 위한 부가 되었다”(77)고 주장한다. 그녀는 에릭이 펜트하우스를 사기 위해 1억 4백만 달러를 쓴 것이 숫자 자체를 위해 돈을 지불한 것이며 글로벌 시대에 재산의 의미는 오로지 지불한 가격에 있음을 지적한다. 소비의 추상적 미학적 가치는 가공할만한 엄청난 숫자라는 것이다. 에릭 같은 글로벌리스트에게 돈의 액수가 절대적인 가치가 되고 기술에 의한 가속화로 흡수되는 것이다.

    기술진보에 의해 속도가 신이며 시간을 넘어서는 것이 그가 열망하는 세계관이므로 그에게 속도 자체는 목적이 된다. 이것은 그가 오피스 타워 표면에서 숫자와 데이터가 현란하게 제시되는 증권시세 속보판을 보면서 최면에 걸려 속도의 의미를 사색할 때도 잘 나타난다.

    에릭은 미래성을 향해 추진력을 갖게 해주는 속도가 가장 중요하며 정보의 흐름을 순수하고 신성한 장관으로 인식하며, 컴퓨터 모니터를 모든 군중이 경이감으로 모여들 수 있는“우상숭배의 존재”(80)라고 본다. 그는 정보기술과 사이버자본을 신으로 여기므로, 숫자와 도표가 시시각각 변하는 증권시세 속보판을 볼 때 종교적 황홀감에 빠진다. 그는 서사시적 순례여행에서 스크린의 번쩍임, 사이버 자본의 백열광에 깊이 매료되며, 미래의 섬광에 의한 기술 경관에 확신을 갖는다. 사이버 자본은 시간을 만들며 시간이 자본주의의 상승을 가속화시킴으 로써 미래를 창조한다. 이것은 에릭에게 미래에 살고 있다고 착각하게 한다. “돈이 시간을 만든다”(79)는 킨스키의 언급은 금융시장이 현재를 희생시키고 가속화한다는 것이다. 시간이 미래와 거대한 투자 잠재력을 향해 빨려 들어가므로 미래만 두드러지는 것이다.

    글로벌리스트 아서 랩(Arthur Rapp)과 니콜라이(Nikolai Kaganovich)의 암살소식에 에릭이 은밀하게 흐뭇함을 느끼는 것은 그가 그들에게 선의의 동료의식이 아닌 경쟁자로서 증오심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에릭의“재능과 적의는 완벽하게 연결”(82)되어 있어서 그의 마음과 신체가 다른 사람을 향해 증오심을 갖는 데서 성장해온 것이다. 그에게 에너지를 주는 것은 생명과 창조력보다는 죽음과 파괴력인 것이다. 또한 시위자들이 반세계화 구호를 외치며 더욱 과격하게 차를 흔들고 내리칠 때, 에릭이 폭동에 매료되며 시위자들에게 동정심을 갖는 것은 그가 그들에게 연루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에릭은 자신이 시위자의 한 사람으로 느끼기 시작한다. 킨스키가 시위자들이 금융시장 체계에 필연적인 존재라고 하듯이, 글로벌리스트를 저지하고 질서를 가져오려는 시위자들은 사회 전체성에서 기능적인 구성요소이다. “기술과 부의 비전”(91), 세계화의 환상이 더 클수록 이면의 그림자는 더 커질 것이고 사람들을 고통과 죽음으로 내몰 것이므로, 시위자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무한질주를 거부한다. 시위자들에게 사치스럽고 밀봉된 리무진은 나쁜 획책을 꾸미는 기계장치를 상징한다.

    그래서 에릭이“언제 세계화 시대가 공식적으로 끝날까”(91)라고 할 때, 킨스키는 리무진이 맨해튼 거리에서 사라지기 시작했을 때라고 하듯이 시위자들과 에릭이 한 쌍의 적대관계임을 지적한다. 그들은 기계장치를 거부하는 적대자라기보다는 파괴의 등가물이 된다. 폭동광경에 에릭이 즐거워하는 것은 그의 이미지에 자아도취적인 만족감을 갖는 것이다. 그들의 파괴력에 반응하듯, 에릭은 시위자들에 의해 살해되도록 그 자신을 허락할 수 있다고 사색한다. 에릭은 반세계화주의자들에게 희생자가 됨으로써 세계화와 전자정보기술이 지배력을 갖는 제단위에서 실제로 죽어갈 것이다. 킨스키가 시위자들에게 에릭을 연결할때, “파괴충동은 창조행위”(92)라는 무정부주의자 바쿠닌(Bakunin)의 견해를 언급하는 것은 시위자가“창조를 위해 파괴”(Valentino 149)를 주장함을 의미한다. 이어서“과거를 파괴하고, 미래를 창조하라”(93)는 킨스키의 언급은 시위자와 에릭이 한 쌍의 관계가 됨을 암시한다.

    에릭과 시위자들 둘 다는 세계금융시장의 요소인 가속화하는 데이터의 흐름과 유동자금에 의한 부의 집중화를 감지한다. 시위자들과 에릭이 스크린에 나온 메시지“자본주의의 유령이 세상을 떠돌고 있다”(96)를 함께 보는 것은 의식을 공유하게 한다. 에릭은 1850년경 공산주의 망령이 떠돌았던 유럽을 암시하는「공산당 선언서」의 유명한 첫 번째 문장임을 인식한다. 그러나 시위자들은 글로벌리스트에 의한 세계화의 추진력을 감속시키고“시간의 가속화를 바로잡고 자연을 정상의 속도로 되돌리길”(97) 추구하므로 글로벌리스트와는 상반된 의식 을 갖는다. 뉴스 단신자막은 그날 하루의 진행을 요약하듯, 이 작품의 유일한 제사(epitaph), “쥐는 통화의 단위가 되었다”(96)라는 최종적인 메시지를 제공한다. 나치에 의해 포위된 폴란드 도시의 삶을 묘사하는 허버트(Zbignew Herbert, 1924-1998)의 장시(長詩) 『포위된 도시로부터 온 보고서』(Report from the Besieged City 1983)의 한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시위자들은 글로벌리스트들이 세계영토에서 대중 집단을 포위하고 지배하는 파시스트 세력임을 나타낸다. 글로벌리스트와 시위자들의 집합점은 에릭이 시위자들의 표어가 허버트의 시 구절임을 인식할 때 이루어진다. 마침내 에릭은 그가 시위자들 중 한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그에게 저항하는 폭도이므로 시위자들에게 매료된다.

    에릭이 시위에 매료되는 것은 한 시위자가 자신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분신자살하는 것을 보고 은밀한 기쁨을 느낄 때 클라이맥스에 이른다. 에릭과 그 분신시위자는 상호교류의 그림자에 의해 연결된다. 글로벌 자본주의의 미래의 끝없는 지평선을 향한 확장 가능성은 그가 분신장면을 목격하고, 과거 현재 미래를 포함하는 시장의 전체성에 의문을 갖기 시작할 때 종결된다. 에릭은“킨스키가 틀렸다. 금융시장은 완전하지 않다”(100)는 결정적인 생각에 이른다. 에릭의 자아파괴의 궁극적인 제스처는 그 시위자와 한 쌍의 역할을 함으로써 그의 존재를 표명하려는 것으로 드러난다. 에릭은 그 시위자의 촉발적인 행위에서 동기를 부여받음으로써 그와 같이 자기 파멸적 행로를 따르고자 한다. 이 책의 후반부를 통해 에릭은 미래가 요구하는 제물이 되는 것에 열중함으로써 점차 자아 파괴적인 행위를 한다.

    에릭이 신의 벌을 받지 않을 정도로 높은 타워에 살며 암시장을 통해 구입한 구소련제 비행기로 하늘로 날려는 욕망을 충족하려는 것은 기술을 통해 불멸을 꿈꾸는 것임이 드러난다. 킨스키는 인공두뇌학적 내세의 삶에 관해 신탁을 전하며, 기술의 미래가 인간에게 덫이 될 수 있음을 추출한다. 사람은 죽고 기술은 진보하므로 사람들이 디지털의 굴레 속으로 전환해 정보의 흐름에 흡수되고 “인간과 컴퓨터가 융합한다면”(105)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포스트 휴먼의 환상은 기술의 열광적인 추종자를 매료시키는 은유이다. 그녀는 에릭이 무덤이 아닌 디스크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인공두뇌학적 가능성을 이론적으로 예시한다. 그러나 하이테크 기술에 초월하려는 이 로봇 공학적인 환상은 그녀가“오늘이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는 바로 그날”(106)이라 예언하듯, 에릭에게 절멸의 장중한 결말을 초래할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녀가“쾅”(106)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그 대재난의 순간이 폭발적으로 일어남을 제시한다. 이것은 마지막에서 에릭의 폭력적인 죽음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예견으로 17개월 내에 뉴욕 하늘에서 일어날 기술 장치의 치명적인 내부파열을 암시한다. 그의 신체가 자동조종장치 위에 놓여 있는, 에릭의 하루는 그녀의 묵시록적 예언의 독립적인 이미지를 따르면서 진행된다. 에릭은 기술을 뒤쫓고, 기술은 그의 미래를 사로잡는다. 그의 분별없는 광란은 기술결정론을 따르는 맹목적인 충동으로 보인다. 그는 포화된 데이터 환경에서 급박하게 미래의 사라짐 속으로 그의 기술의 뮤즈를 뒤따르는 것이다.

    미래성에 대한 그의 편집광적 집착에서, 그는 원형적인 미국인보다는 이 시대의 증권 관리사, 즉 진정으로 미래 그 자체의 지배자가 되길 원한다. 엔화가 상승할수록, 에릭은 그에 대한 생명의 위협을 훨씬 더 나은 것으로 여기며 그 위협이 그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생기를 불어넣어준다고 생각한다. 한 남자의 제물바침 이후에 타임스퀘어에 내리는 비는 에릭에게 생명력을 가져다주는 비가 아니다. 도시에 내린 비가 유발하는 악취는 수증기와 뒤섞여 올라오듯이 그의 몸위에서 무르익어서 더욱 암울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에릭이 죽음에 몸을 맡기 길 결심할 때 생명력과 거리가 먼 파괴력으로 자기 파멸적인 행위를 시도할 것이다.

    V. 기술에 의해 포화된 자아의 파괴로의 빗나간 행적과 추락

    분신자살한 시위자를 에릭과 병치시키고 그가 암살자의 표적이라는 소문에 만족하는 것으로 전반부가 결론지어졌다면, 후반부에서 에릭은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낭만적 휴머니즘에서 영웅적 인물이 주관성과 침착함으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과 달리, 죽음을 향해 에릭이 굳은 결심으로 전진하는 것은 자아 표명이라기보다는 자아 축소로의 진행이다. 정보과학에 신체를 종속시키려는 에릭의 과학기술적 논리는 대재난을 향해 나아간다. 에릭은 생명 본질에 대한 약속을 저버리고 괴물을 만드는 유혹적인 계획에 너무나 광란하는 프랑켄스타인의 창조주 빅터 프랑켄스타인(Victor Frankenstein)같은 인물이 된다. 이런 측면에서 에릭은 기술사회에서 진정한 존재의 사라짐을 향해 무분별하게 돌진한다는 점에서 반영웅으로 보인다.

    전반부에서 그의 신체를 보호 관찰하던 것이 후반부에서 자아파멸적인 자세로 바뀜으로써 에릭은 자신의 파괴와 상실로 존재를 입증하고자 한다. 마침내 그는 세계의 권력자와 재력가의 파괴를 목적으로 스토킹 하는 파이 암살자 페트레스크(Andre´ Petrescue)의 공격을 받는다. 글로벌리스트에게 포스트모던적인 암살을 수행하는 페트레스크는 공적인 인물의 생명이 아닌 이미지를 표적으로 삼음으로써 관습적인 의미에서 암살의 엄숙함과 희생을 거부한다. 앞서 다른 두 글로벌리스트의 암살에 평행하여, 에릭은 파이 공격을 받는 대단한 인물이란 점 에서 자신이 위대해짐을 느낀다. 그럼에도 에릭이 파이공격으로 이미지 손상을 받은 모습을 촬영한 사진사와 페트레스크를 광포하게 내리치는 것은 그에 대한 위협이 죽음이 아닌 파이에 의한 것이란 실망감의 표현이다. 그래서 그는 암살자에게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훨씬 더 절박해진다. 그 이후 에릭은 죽음에 몸을 내맡기기 위해 경호원 토발을 구체적인 이유도 없이 총을 쏘아 살해한다. 그는 인격의 연속적인 층인 그의 돈과 옷, 아내의 돈, 회사, 경호원, 리무진을 제거함으로써 자신과의 대면을 위해 길을 점차 깨끗이 치우는 것이다.

    에릭의 속성은 글로벌리스트를 다른 사람의 양식을 착취하고 모두 먹어치우는 쥐 같은 사람으로 보는 시위자와 암살자 베노의 견해와 일치하게 된다. 쥐의 암시는 끝부분으로 갈수록 극대화된다. 리무진이 그의 본원지인 동네 이발소에 왔을 때 이발사 안토니(Anthony Adubato)는 그를 보고“이처럼 쥐 같은 머리를 가진 사람을 본적이 없다”(160)고 하듯이 에릭은 실제로 쥐의 형상과 일치된다. 안토니가 머리 왼쪽만 이발한 까닭에“오른쪽만 이발하면 양쪽이 똑같아져요”(170)라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불균형한 모습으로 자아파괴의 여정에 박차를 가하며 이발소를 떠난다. 차가 11번 대로로 다가갈 때 에릭은 감시하는 경호회사와의 모든 통신전달 장치를 차단하며 그 스스로 죽음의 위협에 몸을 내맡긴다.

    에릭은 그의 육체의 사라짐에 몰입할수록 점차 폭력에 가까워진다. 암살자 베노는 에릭의 자아절멸에 대해 정신적으로 투사하는 인물이 된다. 이 작품의 두개의 짧은 막간극, 베노의 고백록은 암살자에 의한 죽음과 에릭의 파괴의 긴밀한 관계를 도식적으로 구조화한다. 첫 번째는“밤”두 번째는“아침”이란 부제를 가진 고백록의 순서는 시간적으로 역전되어 있다. 베노는 에릭의 연대기적 서술을 방해하는 두 개의“고백록”(55, 149) 형식으로 이 소설에 늘 붙어있는 존재이다. 첫 번째는 마지막 장의 끝 이후의 순간을 묘사하므로, 에릭이 마지막에서 시계를 통해 보는 시신은 그의 것임을 확증하게 한다. 순환성의 거울 같은구조는 이 작품이‘마음속의 갈등’임을 나타낸다. 그래서 고백록은 에릭의 유죄의 타당성을 넘어서 자아와 외부환경 관계를 성찰하게 한다.

    베노가 고백록에서 기술하는 암살 플롯은 전적으로 공상적이다. 베노가 에릭을 암살하는 이유가 에릭이“인격과 위생의 문제를 가지고 있기”(56) 때문이라 하듯이, 에릭이 세계시민으로서 윤리의식이 없고 생명의 지속가능성을 거스르고 신체와 외부환경을 생태학적인 원리에 입각해서 돌보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한편 베노는 에릭의“인간적인 센서”(153)였다고 밝히듯이, 내면의 또 다른 자아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암살 플롯은 베노 자신의 불안감을 표현한다. 화병과 정신적 공황장애를 앓고 있고, 그날 정오에 은행 밖의 현금인출기에 몸을 구부린 채 서있던 사람이며, 41세의 이마도 벗겨진 쇠락한 중년 남자임을 에릭이 인식하듯이, 베노는 에릭의 실패한 자아, 무의식과 병리학적 자아임을 실체화한다. 베노는 에릭이 경호원 있는 리무진을 타고 다녀 암살시도가 성공할 수 없음에도, 죽음의 위협을 위해 상징적인 전화 통화를 하는 것이다. 마법적으로 베노의 전화 통화는 암살자가 존재하도록 원하는 것으로 에릭에게 영감을 주는 효과를 갖는다. 에릭이 교통정체 속에서 논리를 역행하여 움직이며, 베노가 상상한 것이 사실이 되도록 만드는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에릭은 베노와의 대면을 향해 움직인다. 에릭이 리무진에서 내렸을 때, 불가사이하게도 차고는 베노의 무단주택 거리 바로 맞은편에 있다. 펜트하우스가 에릭의 외면공간이라면 베노의 은신처는 그의 내면공간이다. 들릴로의『리브라』(Libra)처럼 우주적인 메커니즘은 희생적인 제물을 그의 암살자의 총격장면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듯해 보인다.

    임대주택 건물입구에 혼자 남을 때 에릭은 그의 이름을 크게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그것을 심오하게“개인적인”(181) 것으로 생각한다. 베노가 반복적으로 에릭의 이름을 호명하는 것을 에릭이 자신의“주체”(196)가 부르는 것으로 인식하므로, 베노는 에릭의 내면적인 자아로 드러난다. 이 책의 시작부분에서 에릭이 불면증을 갖고 있고, 베노 레빈이란 이름에 에릭이“그건 가명이야. 가짜야” (196)라고 응답하므로, 에릭과 베노 레빈의 대면 장면은 주체의 꿈과 환상에서 일어난다. 베노는 에릭을 따라온 적도 없었고 차도 없다. 에릭은 베노의 은신처에 곧바로 떨어진 듯해 보인다. 에릭이 베노를 추적할 때 설치류같은 사람이 사는 쥐가 들끓는 건물로 들어가므로, 이 작품에서 무수히 언급된 쥐의 상징은 극대화되며 에릭과 베노의 대면으로 응집된다. 두 강박신경증 환자의 부조리한 대화는 익살적인 광대극으로 무너지므로『백색소음』끝부분에서 잭이 윌리 밍크(Willie Mink)와 만나는 장면을 상기시킨다. 베노가 신비롭게 앉아서“왜 여기왔는가”(190)라며, 에릭을 암살하는 이유가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라고 밝히므로, 그는 에릭의 죽음의 천사로 보인다. “공유하는 정 체성”(Cowart 221)을 암시하듯, 에릭과 베노 둘 다는 불균형한 전립선을 가지고 있다. 손대는 것마다 모두 황금으로 바꾸는 미다스(Midas)왕처럼, 에릭은 스스로 판결을 내리듯 자신의 손을 쏜다. 그의 아내의 막대한 재산을 탕진하고, 토발을 살해하고, 막대한 수익을 위해 엔화로 투기함으로써, 이미 그의 발을 스스로 쏜 것처럼 그는 자신을 파멸시킨다. 이런 폭력으로 치달아가는 과정은 이 소설의 저작권 페이지에 기입된 도서관의 분류용 표제어가‘자아파괴적인 행위’를 포함하는 것에서도 당연히 작가의 의도와 일치한다.

    에릭이 죽음의 순간에도 의식과 태도의 개선의지를 보여주지 않으므로, 베노의 비난은 외면상 가치가 있다. 베노가 에릭을 암살하는 정당한 이유는 자선을 전혀 하지 않는 자비심 없는 사람이며, 사회적 무질서(anomie)도 부정하지 않으므로 그가 자아모순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의 삶의 윤리성이 암시하듯, 그는 자신의 펜트하우스 수족관에 있는 상어로 정의될 수 있다. 에릭이 자학적인 발작으로 손을 쏜 후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조용히 앉을 때, 베노는 에릭의 불균형한 삶의 결과를 경고하며 기술과 데이터에 자연성이 포함되어 있다고 믿는 전체주의 사고의 오류를 지적한다.

    베노는 에릭에게 정보와 데이터에서 자연성의 패턴을 찾으려는 일방적 편향적 방식이 초래한 결과를 알아야 했다고 비난한다. 그는 에릭이 기형적인 전체성 속에서 엔화를 추적함으로써 자연환경과 과학기술의 조화의 중대한 의미를 상실했음을 지적한다. 데이터와 숫자의 변동과 순환에서 자연을 찾는 방식은 오류인 것이다. 베노는 에릭의 불균형이 그의 신체에 해답이 있다고 하듯 그가 무시해온 신체와 물질적 환경의 중요성을 상기시킨다.

    결말부분에서 에릭의 추락의 당위성은 하늘을 날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심을 상징하는 인물 이카루스(Icarus)가 과욕과 자만심에 의해 추락하는 것에서 발견될 수 있다. 이카루스가 크레타 섬에서 시실리로 도피하기 위해 명장(名匠) 다이달로스(Daedalus)가 깃털과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그의 아들 이카루스에게 달아줄 때 해준 경고와 충고에도 불구하고, 이카루스는 태양에 너무 가까이 날아서 밀랍 날개장치가 녹아내리는 대재난의 실패를 맞음으로써 지나친 자만과 자아 방종의 희생자로서 추락한다. 이카루스는 에릭 처럼“자아의 전체성”(191)을 맹신하는 인물이다. 이카루스적인 비유는 에릭의 야망과 세계관을 조소한다. 에릭이 서쪽 도로로 접근할 때, 자전거를 탄 전령사는 에릭의 파멸의 상징적인 암시로서“두 팔을 넓게 펼치면서 백조처럼”(181)지나간다. 베노는 에릭을 벌주어 파괴하고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메시아 같은 인물로 보인다. 베노의 애타주의(altruism)는 개인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이카루스적인 인물인, 에릭의 허영심과는 대조된다. 베노는“이카루스의 추락이지. 당신은 그것을 스스로 자초했다. 태양에 녹아내린 것이지. 자신의 죽음에 스스로 뛰어든 것”(202)이라며 에릭의 파멸의 이유를 지적한다. 에릭의 추락 이유는 펜트하우스를 위해 지불한 가격, 매일 진료를 받은 것, 그가 엄청나게 많이 갖고 엄청나게 잃은 것,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호흡할 공기를 배기하는 리무진 때문”(202)이라는 베노의 지적처럼,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에릭의 오만함에서 기인한다.

    에릭이 시계의 스크린에서 비탄의 종말로서 그의 시신을 먼저 보는 것은 기술을 통해 신체를 능가하는 것에 몰두해온 것의 유일한 논리적 연장을 나타낸다. 그가 기술만능주의를 믿고 미래 비전에만 집착한 것은 인간존재의 삭제를 진보의 상징이라 잘못 맹신한 것을 의미한다. 에릭이 그의 미래의 이미지가 먼저 포착된 것을 보는 시계는 이 작품에서“가장 과학소설적인 기술요소”(Laist 272)이다. 에릭이 하루 종일 끼고 있었을지라도 마지막 장면에서 우연히 발견하는 시계의 카메라는 현미경같이 매우 정교한 기술 고안품으로 주변의 이미지를 즉각 수집해 보여주는 신체시계이다. 그는 먼저 머리위에 매달린 전선 위에서 딱정벌레(beetle)가 그것을 나무라고 여기는 듯이“나뭇잎을 갉아먹는 목가주의 속도로 서서히 내려오는 것”(205)을 본 후 시계 스크린에서 그의 시신의 이미지를 본다. 자연의 생물인 딱정벌레는 기술과 대비된다. 에릭이 자연의 생물 중가장 예측력이 뛰어나다는 딱정벌레를 먼저 본 후 시계 스크린에서 이미지를 보는 것은 기술이 결코 자연을 능가하는 최상의 것이 아니며 자연의 생물이 기술에 포함되거나 종속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그는 마침내 시계 상표가 Male Z. 로서 병원 시체 공시소에 있는 신원미상의 시신을 가리킴을 깨닫듯이, 현실에서 그의 미래인 죽음을 먼저 본다. 다른 사람보다 미래에 먼저 도달하려 했던 에릭의 최후는 죽음인 것이다. 이 최첨단 기계장치는 에릭과 베노의 대면이 환상영역인 마법적 기술의 공간에서 이루어짐을 나타낸다. 시계상의 에릭의 시신의 이미지는 그의 자아가 기술에 흡수될 수 있음에 관한 묘사이다. 그의 죽음은 인공두뇌학의 예찬으로서 그가 기꺼이 수용하는 디지털 공간으로의 치환일 수 있다. 기술만능의 환상의 비행에서 그는 디지털 정보 암호화를 통해 불멸성취의 가능 성을 생각한다. 에릭은 신체를 초월하여“컴퓨터의 양자입자”(206)가 되고, 그의 생각과 의식이 디스크 위에서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빛나는 데이터로 구원받아서 살길 원한다. 죽음을 기다리는 마지막 순간에 에릭은 그가 추종하는 유일한 대행자인 기계를 통해 무시무시한 절박감의 순간을 초월하고자 하므로, 포스트휴먼의 상황을 성취하는 것과 유사함을 보여준다.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에릭은 기술이 반(semi)신비적이며 추진력을 갖는 것으로 맹신하기 때문이다. 그는 디지털 메모리 위에서 신경체계를 실제적으로 도형화할 수 있는 진화론적 진보 가 진행되고 있다고 믿음으로써 무한함과 불멸을 꿈꾼다.

    무모한 엔화 투자가 대재난적인 실패로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에릭은 과대망상증의 역설에 사로잡혀있다. 크게 이길 수 없다면, 크게 잃어야 한다. 숫자크기와 비율이 중요할 뿐이다. 베노는 에릭을 과거의 부족 추장에 비유한다.“다른 추장보다 더 많은 재산을 파멸시킨 추장이 가장 강력함”(193)을 갖듯이, 그는 자기파괴를 할 때조차 더 많이 잃고 더 많이 악취를 풍기길 원하는 것이다. ‘이발’이란 말이 주식시장에서 거액의 투자 자금을 잃는 것을 가리키는 의미로 주식 거래자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월스트리트 은어이듯이, 에릭은 그의 야망만큼이나 막대한 자산의 손실을 입고 암살자에 의해 죽음에 당면하는 것이다. 바이킹 선장처럼, 에릭은 그의 죽음을 이기심과 자만심의 광휘로 표현하기 위한 최종적인 기회로 바라본다. 그가 죽는다면 구소련제 폭격기를 타고 태양으로 발사되길 원한다.

    에릭이 신경을 컴퓨터에 접속하기 위해 실제의 고안 장치를 하지 않음에도, ‘수정 구슬같은 카메라 시계’를 가능하게 하는 마법의 논리는 디지털 자아로서의 희망이 전적으로 근거 없지 않음을 의미한다. 기술 속에 자신을 흡수시킬 수 있다는 것은 에릭의 신념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 이 작품의 일시 정지된 결말은 에릭에게 불멸의 욕구를 암시한다. “에릭은 시계의 크리스털에서 죽어 있지만, 총성이 울리길 기다리면서 원래의 공간에 여전히 살아 있다”(209)는 마지막 문장은 지연된 결말을 제시한다. 한편‘인간 에릭’은‘포스트휴먼적인 컴퓨터 프로그램인 에릭’으로 종속하여 결합하길 기다린다. 그가 신체와 외부환경에 분리된 채 기술에 맹종하는 포스트휴먼으로서 불멸을 추구하는 방식은 불균을 초래할 것이다. 또 다른 한편 현실에서 이전 고용인에 의한 에릭의 죽음은 글로벌리스트의 탐욕과 폭력의 결과임을 드러낸다. 에릭이 녹색의 미래를 착취해온 결과는 경직화된 미래와 죽음인 것이다. 기술에 의한 시간/공간의 변화에도 현실의 원래 공간은 여전히 존재한다. 에릭이 디스크 상에 살기 위해 시간을 초월하길 열망할지라도 그의 실제 인간적인 고통은 불멸의 성취를 방해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기술에 의한 영생 추구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포스트휴먼의 이상은 물질적 환경과의 상호적인 관계를 지속할 때 실현 가능함을 일깨운다.

    베노가 에릭을 죽이기 위해 총의 방아쇠를 당긴다면,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베노가 그것을 했지만 에릭이 그것을 원했다고 할 수 있다. 기술 환경과 들릴로의 주요 인물의 관계에 관한 그의 모든 묘사 중에서, 에릭만큼 병리학적이며 자기 파괴적인 것은 없다. 들릴로의 다른 인물들은 가상의 신체(virtual body)를 선망할지라도 공동사회에 합류하려는 욕망에 의해 동기부여된 것이므로 물질공간과 신체를 떠나 가상현실과 디지털 자아를 가지려는 것과는 대립된다. 다른 인물들은 포스트휴먼의 윤리로 삶의 방식을 변경했을지라도 근본적인 열망이 사회적 자비심을 갖기 때문에 동정을 받을만한 것과 달리, 에릭은 전적으로 자신의 인간성의 삭제를 원한다. 마지막 순간에 에릭이 인간의식의 가장 중요한 양상이 데이터로 바뀔 수 없으며 인간이 신의 숭고함과 무한한 정신의 기술로 전환될 수 없음을 인식할지라도, 그는 인공두뇌학적 신격화의 가능성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희생할 것이다. 외부환경과 분리된 기술적 자아로서 포스트휴먼이 되길 갈망한 에릭의 이야기는 과학기술적 열망의 중심부에서 도사리고 있을 수 있는 폭력을 경고하는 우화이다. 에릭의 결말은 과학기술적인 환 상의 계보를 진지하게 성찰하게 한다.

    VI. 결론

    에릭의 실패는 과학기술에 종속되어 가상현실의 자아를 추구할 것이 아니라 기술, 신체, 자연환경의 상호교류를 통해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해야 함을 제시한다. 에릭의 의식과 소형 카메라에 의해 포착되는 경험적인 데이터를 병치함으로써, 들릴로는 인간의 삶을 가상적으로 영속시키기 위해 기술력에만 신념을 갖는 것을 반대한다. 이 작품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승리가 공동사회의 쇠퇴와 패배로 이를 수 있음을 경고한다. 진정한 포스트휴먼의 실현 가능성을 위해 기술에 의해 자아 영역에 유폐되는 것을 벗어나야 함을 일깨워준다. 금융시장의 경 연장에서 지배력과 주도권에 대한 환상을 끝까지 연주하는 반사회적이며 은밀한 파시스트인 에릭을 통해 이기적인 삶의 방식을 고수하는‘세계시민’이 되어서도 않됨을, 무능력한 편협성을 분별하지 못하는‘사이비 세계주의’를 지향하는 것은 파멸에 이를 수 있음을 경고한다. 부와 기술의 지배는 그를 진정한 세계시민이 아니라 정보기술에 의한 금융시장에서 세계시민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공동사회에서 금융시장의 광포함과 기술을 추종하는 사람들에 의해 전적으로 무시되어온 현대에 대한 의미심장한 진단을 제공한다. 에릭의 세계주의는 거짓된 시민의식의 본보기를 드러내므로 단호하게 저지되어야 한다.

    이 작품은 이중적 자아로서‘광기의 인물’에릭과‘현대의 보통사람의 전형’인그림자 같은 존재 베노를 제시함으로써, 광기에 대한 탐구와 현대의 보통사람에 대한 상징적 투쟁을 제시한다. 집 없는 연장자 베노는 성공한 젊은이, 즉 쌍둥이 중의 하나를 없애는 것이다. 현대미국문명의 오만함의 상징적 인물인 에릭의 파멸은 미래 사회가 지향해야할 바람직한 가치관을 일깨운다. 패배한 중년 베노가 아니라 성공한 에릭에 초점을 둠으로써, 들릴로는 젊은 상대자가 진보를 향한 미래성을 맹신하고, 금융시장에 기초한 첨단기술을 무조건적으로 확신하는것에 의문을 제기한다. 들릴로는 기술에 집착하는 에릭의 과열된 열정이 또 하나의 미국의 갱년기의 노화현상임을 예시하지 않는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 젊은 에릭이란 점에서 들릴로는 미국의 새로운 젊은이의 원형을 반어적으로 제시한다. 들릴로는 새로운 젊은 미국인이 자기중심적이며 강력하고 오만하고 탐욕스런 모습이 아니어야 함을 역설적으로 예시함으로써 기술이 신체, 물질 공간, 자연환경과 상호 소통해야 함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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