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말로의 『시바의 여왕』에서 본 ‘지리적 모험’*

L’Aventure geographique dans La Reine de Saba d’Andre Malrau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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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André Malraux, fasciné toujours par les grands mythes, part en expédition aérienne en 1934 pour trouver les ruines de la capitale de la reine de Saba. Du point de vue archéologique, l’expédition n'a pas été un succès. Malgré cela, le quotidien parisien L’Intransigeant commence, dès le 3 mai 1934, à faire paraitre en feuilleton sept articles de Malraux, intitulés “Au-dessus du désert d’Arabie – En survolant la capitale mystérieuse de la reine de Saba.”

    L’écrivain, qui avait refusé de publier ces articles sous forme de livre, en a repris une grande partie dans ses Antimémoires, plus de trente ans après, Cependant, ce récit restait longtemps oublié ou mal compris par le public jusqu'à la parution de La Reine de Saba.

    Bien que celle-ci- sous le titre d’une ‘aventure géographique’- soit un ouvrage qui reprend le récit de Malraux, elle n’a pas pu être publiée par l’écrivain lui-même. C’est Philippe Delpuech qui a présenté et annoté le texte intégral de Malraux pour le faire éditer en 1993. Cette parution a suscité un regain d’intérêt pour son récit et incité à effectuer plusieurs recherches sur l’aventure sabéenne de Malraux

    Notre étude sur La Reine de Saba se déroulera en deux parties. La première partie, les présents travaux, a pour but l’examen de ’l’aventure géographique’ de Malraux et ses reportages. Pour ce faire, en consultant La Reine de Saba ainsi que les récents ouvrages biographiques sur Malraux, nous suivons le parcours de l’expédition malrucienne, à partir de la motivation et de l’objectif de sa recherche jusqu’à la publication de ses reportages, en passant par sa ‘découverte’ archéologique.

    La suite de présents travaux sera consacrée à l’anayse de l’écriture de Malraux, car il insère l’imaginaire et le farfelu dans La Reine de Saba, genre de reportage qui se caractérise par l’exactitude des faits rapportés.

  • KEYWORD

    Reine de Saba , Aventurier , Legende , Farfelu , Andre Malraux

  • 1. 『시바의 여왕』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의 『시바의 여왕, La Reine de Saba』 은 소설이 아니다. 작가가 직접 발표한 책도 아니다. 말로는 1934년 2월부터 3월에 걸쳐 옛 시바왕국의 전설적 도읍을 찾기 위한 모험 비행을 감행한 뒤, 이에 관한 르포를 당시 파리 제1의 석간 『앵트랑지장, L’Intransigeant』에 5월 3일부터 13일까지 연재한 바 있다. 그러나 작가는 이것을 단행본으로 출판하지 않았고,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1993년에 이르러서야 필립델퓌에슈 (Philippe Delpuech)에 의해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이 바로 『시바의 여왕』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60년 동안 완전히 방치되어 있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신문 연재 후에 작품의 출판을 거부했던 작가는 1967년에 발표한『반회고록, Antimémoires』에서 새삼스럽게 이 이야기의 일부를 소개한 바 있다.1) 작가 자신이 가장 애착을 드러내는 작품 안에서 30여 년 전의 이 사막탐사를 ‘회고’한 것이다. 하지만 『반회고록』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이 곧바로 이 모험담에 대한 호기심과 흥미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시바의 여왕』이 출간되기 전에 이 모험담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연구서는 피에르 갈랑트(Pierre Galante)의 『말로, Malraux』(1971)2) 정도가 고작이라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시바 여왕의 전설 그 자체에 관한 숱한 연구들3)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델퓌에슈가 펴낸 『시바의 여왕』은, 소설가 말로의 전성기 작품 가운데 이례적으로 독자의 무관심 아래 오랜 세월 묻혀있던 글을 다시 세상 밖으로 내보냈다는 사실과 함께, 『앵트랑지장』 기사의 전문을 싣고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독자나 연구자들은 이제 요약이나 회고담 대신, 작가 자신의 눈과 입을 통해 직접 전달되는 이 흥미로운 이야기 전체를 다시 접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델퓌에슈는 장 그로장(Jean Grosjean)의 서문에 이어, 자신의 해설과 각주, 관련 사진자료와 신문기사 등 구체적 자료를 첨부하는 한편, 말로의 『반회고록』 중 『시바의 여왕』에 해당되는 대목을 책의 말미에 덧붙여, 두 텍스트의 상호비교까지 가능하게 해 두었다. 말로의 모험비행과 그 탐방기사에 대한 연구가 『시바의 여왕』 발간 이후에 비로소 활발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본 연구 또한 이와 같은 최근의 연구동향과 그 성과를 바탕으로 구상되었다. 『시바의 여왕』에 의해 자극된 호기심이 그 이후의 연구들에 대한 흥미로 이어졌고, 그 호기심과 흥미가 다시 『시바의 여왕』에 관한 또 다른 해석과 평가 가능성에 대한 모색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시바의 여왕』을 읽기 위해서는 먼저 1934년의 ‘지리적 모험’에 대해 알지 못하면 안 된다. 델퓌에슈가 각종 사진자료를 곁들인 해설을 앞세운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우리의 연구 역시 모험의 배경과 그 성과를 검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이 ‘지리적 모험’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시바의 여왕』과 함께, 말로의 전기를 다룬 연구서들을 주로 참고하고자 한다. 그런데 말로의 르포는 신문 연재 당시부터, 항공탐사의 성공 여부를 둘러싼 논란과는 별개로, 또 다른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르포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거나 철학적 내용에, 그 표현 또한 지나치게 서정적이고 시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리적 모험’ 뿐만 아니라 그 모험담의 글쓰기 역시 오늘의 관점에서 다시 읽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하겠다.4) 이 모험 직후에 발표된 『모멸의 시대, Le Temps du mépris』(1935) 서문에서 말로가 지적한 것처럼, “한 작품의 가치는, 그것이 표현하고 있는 것과 그 표현방법 사이의 조화에서 탄생된다.”5) 우리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시바의 여왕』이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본 연구의 주된 분석대상으로 삼고, 후속연구를 통해 그 ‘표현방법’에 대한 분석을 이어가게 될 것이며, 말로가 강조한 양자의 ‘조화’ 여부는 본 연구와 후속연구의 전 과정에 걸친 지속적 검토의 대상이 될 것이다.

    1)André Malraux, Antimémoires, Paris, Gallimard, 1967 (이하, AM으로 약기), pp. 103-132.  2)Pierre Galante, Malraux, Paris, Librairie Jules Tallandier, 1971, pp. 83-121. (저자는 말로의 모험과 관련된 주변 자료, 관련인물들의 회고담, 증언 등을 구체적으로 확보하고, 말로가 연재했던 신문기사 내용을 비교적 상세하게 인용하고 있다. 단, 환상, 전설, 서정적 묘사 등은 과감하게 건너뛰는 대신, 사실적, 객관적 기록 중심의 발췌로 일관하고 있다).  3)André Malraux, La Reine de Saba, Paris, Gallimard, 1993 (이하, RS로 약기), p. 17 (Philippe Delpuech의 해설) 참조.  4)본 연구의 발표 지면을 감안할 때, 르포의 글쓰기에 관한 심층 분석은 후속연구를 통해 이어가야할 것으로 판단된다.  5)(...) la valeur d’une oeuvre n’est fonction ni de la passion ni du détachement qui l’animent, mais de l’accord entre ce qu’elle exprime et les moyens qu’elle emploie. (André Malraux, OEuvres complètes (tome I), Paris, Gallimard, , 1989, p. 776.)

    2. 시바의 여왕을 찾아서

    ‘지리적 모험(aventure géographique)’ 이라는 부제가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시바의 여왕』은 1934년 2월 22일부터 3월 23일까지 말로가 주축이 되어 감행한 지리적, 고고학적 탐사에 관한 르포이다. 아라비아 사막속으로 사라져버린 전설의 시바왕국 수도6)를 발견하고자 에멘(Yémen) 상공을 비행했던 모험가가 쓴 일종의 항공일지인 셈이다. 3천 년 가까이 시바왕국이 끈질기게 전설의 땅으로 전해 내려온 배경에 시바의 여왕이 자리 잡고 있음은 물론이다. 시바의 여왕 발키스(Balkis)7)는 성경에 등장하는 유일한 여왕이다.8) 코란에도, 고대 로마의 전설에도, 그리고 에티오피아, 페르시아의 이야기꾼들이나 대상들(caravanes) 사이에서 전승되는 이야기에도 시바 여왕에 관한 찬란한 전설은 어김없이 등장하지 않는가.9) 말로 일행10)의 탐사를 후원했던 『앵트랑지장』이 그들의 모험 비행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붙인 제목은 과연 “아라비아 사막 위에서 - 시바 여왕의 신비스러운 수도를 발견하기 위해(Au-dessus du désert d’Arabie - A la découverte de la capitale mystérieuse de la reine de Saba)”였다.

    그런데 그들이 잠시 기항했던 카이로에서 바로 이 『앵트랑지장』의 특파원이 비행사 코르니글리옹-몰리니에(Corniglion-Molinier)에게 던졌다는 질문은 이 모험이 얼마나 무모한 것이었는지를 말해준다. “어떻게 이런 일에 뛰어들 수가 있었지요? 이미 수 세기 전에 사라져서 정확한 위치 조차 알지 못하는 도시의 사진을 찍겠다고 적대국 상공을, 그것도 비행가능 시간을 아슬아슬하게 채워 날다니요? 그리고 당신들 가운데 고고학자는 아무도 없지 않소? 사막에선 그저 한 차례 바람이나 안개만 덮쳐도 계획이 전부 수포로 돌아갈 텐데 말입니다.”11)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보다 며칠 전, 모험을 향한 여정이 시작되는 날인 2월 22일, 파리 근교의 투쉬-르-노블(Toussus-le-Noble) 공항을 이륙하기 직전에 말로가 이미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미지의 땅을 향해 떠납니다. 무착륙비행으로 1,500km를 주파해야 합니다. 지상에 착륙한다면 그건 바로 죽음입니다. 도시가 언덕 비탈에 있는 경우에도 그 상공을 초저공비행 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적이 비행기 고도보다 높은 위치에서 사격할 경우엔 격추되기 십상이니까요. 하지만 이 모험에 최고의 매력을 주는 건 바로 위험 그 자체입니다. (...) 목숨을 잃을 확률이 절반 이상이죠.”12) “수업에서 해방된 학생처럼 기쁨에 들뜬”13) 말로의 이러한 인터뷰 기사는 당연히 그날 저녁의 『앵트랑지장』을 장식한다.

    1934년 3월 7일에 그들은 드디어 목적지를 향해 떠난다. 『시바의 여왕』과 말로의 전기 작가들의 연구서를 종합하여 이 날의 탐사비행을 재구성 해보면 다음과 같다. 그들의 출발기지는 프랑스령 소말리아의 지부티(Djibouti)이다14). 새벽에 지부티를 이륙한 비행기는 예멘의 수도인 사나(Sana’a) 상공을 지난다. 목표지점의 상공에 이른 것은 지부티 이륙 후 약 5시간 이상이 경과했을 때이다. 그런데 그들의 비행기는 최장 10시간 무급유 연속비행이 가능하다. 당장 유적지를 발견하지 못하면 귀항 도중에 연료가 바닥날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바로 이 때 말로가 코르니글리옹의 팔을 잡아끌면서 지평선의 한 지점을 가리킨다. 드넓게 펼쳐진 유적지에 탑들이 솟아 있는 광경이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유적지 상공에서 마이아르와 말로는 신속하게 사진을 찍고 스케치를 한다. 이제는 기수를 정북으로 돌려, 무려 2,000기나 되는 무덤이 있다는 ‘무덤 계곡(Vallée des Tombeaux)’을 발견할 차례다. 하지만 연료는? 그들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4시간 15분 남짓이다. 무덤 계곡이 지척에 있다고 믿으면서도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회항을 결정한다.

    그런데 비행기가 대초원(steppe) 의 굽이진 계곡 위를 지날 때 갑자기 그들 앞에 거대한 묘지의 폐허가 나타난다. 그들이 찾던 바로 그 ‘무덤 계곡’이다. 현 위치보다 더 북쪽에 있을 것으로 생각한 말로의 계산이 틀렸던 것이다. 기쁨에 들떠 항공사진 촬영을 마친 일행은 늦은 오후에 무사히 지부티에 귀항한다.

    항공탐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말로와 코르니글리옹은 그날 저녁에 바로 파리로 전보를 보낸다. “시바 여왕의 전설적 도읍 발견 스톱 20개의 탑인지 사원인지가 아직도 건재함 스톱 루발-칼리(Rub‘Al-Khali) 북쪽 경계에서 스톱 『앵트랑지장』을 위한 사진 촬영 스톱 안녕. 코르니글리옹-말로”15)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전보는 24시간 이상 지연되어 이튿날인 3월 8일에야 발송된다.16) 전보를 받은 『앵트랑지장』은 10일자 신문의 제1면에 이 전보문을 발표해 탐사의 성공을 알리고, 국내외의 다른 매체들도 일제히 이 소식을 다루게 된다.

    이 아마추어 고고학자들이 전설의 도시를 발견했다는 사실이 기사화되면서 그들의 ‘발견’을 둘러싼 논란이 시작된다. 고대 예멘 전문가들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그들은, 말로 일행이 엉뚱한 도시나 오아시스 상공을 비행했을 뿐이며, 그 전설적 도시와 흡사한 무엇을 힐끗 보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17)이러한 공격에 대해 말로는 “우리가 본 도시의 정체를 확인하면서 만약 우리가, 누구나 그렇듯 착오를 할 가능성이 있다면, 우리를 반박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생전 본 적도 없는 도시의 정체를 확인하면서 훨씬 더한 오판을 할 우려가 있으니... 우리는 결코 그들이 짐작하듯 시바 연맹의 도시를 모카(Moka)와 혼동하지는 않는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샹젤리제와 혼동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18)라고 응수한다.

    그러나 이 논란은 곧 잊혔고, 그들이 파리에 돌아온 지 한 달이 훨씬 지나서, 정확하게는 5월 3일부터 『앵트랑지장』에 말로와 코르니글리옹의 르포가 연재되기 시작한다. 총 10회 연재된 기사 가운데 『시바의 여왕』에 수록된 것은 말로가 쓴 일곱 편의 기사이다 (5월 3, 4, 6, 8, 9, 10, 13일자).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나머지 세 편은 조종사 코르니글리옹의 글이다 (5월 5, 11, 12일자 기사).19) 말로는 대초원 상공의 비행과 유적지 발견에 관해서, 코르니글리옹은 이 발견 전후에 일어난 일에 관해 쓰기로 미리 상의한 결과라고 한다.20) 말로가 작성한 기사의 제목과 발간일은 다음과 같다.

    그런데, 지금껏 이 모험과 모험담에 관한 연구는 거의 예외 없이 ‘참’과 ‘거짓’ 의 구분에 집중되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 모험에 관해서는, 말로 일행이 발견한 것이 과연 시바 여왕의 수도인지를 문제 삼고, 모험담에 관해서는 르포르타주의 진실성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모험의 성격이 고고학적 탐사인 만큼, 발견의 성공 여부가 관심의 초점이 될 수밖에 없고, 르포의 기본이 사실의 정확한 전달에 있는 만큼, 진실성에 관한 문제제기는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발견의 신빙성에 관한 논의는 지리학자, 고고학자, 역사학자와 같은 이 분야 전문가들의 몫이다. 따라서 말로의 전기 작가들 역시 말로 일행이 목표 지점을 혼동했을 것이라는 이들 전문가들의 견해를 수용하는 입장이다. 라쿠튀르(Lacouture) 같이 균형감 있는 전기 작가도 이 일화를 ‘사막위의 막간극(intermède)’, ‘엉터리(fallacieuse) 폐허’를 향한 비행으로 묘사할 정도이다.22) 르포의 내용을 보는 라쿠튀르의 시각도 다른 연구가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그는 기사의 진위를 일일이 따지는 대신, 말로 자신이 30여 년의 간격을 두고 쓴 두 개의 글, 즉, 1934년 5월 9일자 기사의 일부와 『반회고록』의 관련 대목을 나란히 대비시키는 편을 택하고 있다. 라쿠튀르가 인용한 두 가지 버전의 핵심적 부분만 따로 떼어 비교해 보기로 하자.

    탐사 직후 확신에 차 있던 작가의 묘사가, 30여 년 후의 다소 방어적인 회고와 효과적으로 대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노트르담 사원의 탑이라 할 만한 것, 코란에서 말하는 궁전, 이집트 풍의 사원, 신전 입구” 등의 구체적 묘사가 “문화의 흔적들, 돌 더미들, 용도를 알 수 없는 것들”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바의 여왕』이 출간된 이후의 연구는 이 모험과 모험담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우리는 가장 최근에, 그리고 가장 대조적인 관점에서 기술된 두 편의 저서를 나란히 검토함으로써 보다 객관적인 시각을 확보하고자 한다. 먼저 검토할 저서는 말로 탄생 100주년이자 서거 25주년을 맞아 2001년에 출판된 올리비에 토드(Olivier Todd)의 말로 전기『앙드레 말로, 삶, André Malraux, Une vie』이다. 말로의 삶 전반에 대한 전기적 연구인만큼, 1934년의 모험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거나 이와 관련하여 새로운 사실을 밝혀낸 바는 없다. 반면에, 말로 연구자인 랑글루아 교수가 올해 발표한 『앙드레 말로, 시바 왕국을 찾아서, André Malraux, À la recherche du royaume de Saba』는 제목 그대로 말로의 아라비아 모험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결과물이다. 따라서 이 두 연구를 동일한 범주안에서 단순 비교 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말로의 항공 탐사에 관한 다양한 평가와 분석 가운데 가장 분명한 입장을 밝히고 있는 연구라는 점에서 이들의 관점을 검토해 보기로 한 것이다.

    토드의 견해는 지금까지 나온 그 어떤 연구자의 경우보다 신랄하다. 그는 말로가 “고고학의 세계에도, 리포터의 세계에도 그다지 부합하지 않는 세계를 꾸며낸”25) 것으로 단정 지어 그의 모험과 모험담을 동시에 문제 삼고 있다. 먼저, 이 모험 자체가 황당한 것은, 토드가 보기에, 그 존재 자체를 입증할만한 어떤 과학적 근거도 없는 대상, 즉 ‘발견할 수 없는 왕국, 사라진 도시’26)를 발견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또한, 제대로 된 지도가 존재하지 않으니 목표 지점의 정확한 위치조차 알 도리 없는데, 사막의 일기가 예측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고려하지 않는 이 무모한 탐험대는, 고고학자도 지리학자도 지질학자도 아닌 “작가 한 명, 비행사 한 명, 정비사 한 명”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의 비행기는 10시간 비행 가능한 연료밖에 실을 수 없어 편도 비행 5시간 이내에 목적을 달성해야 했다. 그때 “강변의 거대한 자갈더미”가 그들의 눈에 들어 왔고, 그들이 본 것이 무엇이었든 그것은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 고로 바로 그것이 된다.(Ca devrait le (=ce qu’ils recherchent) etre, donc c’est)”27))라는 것이 토드의 추론이다. 그는, 말로의 필사본에 있던 다음과 같은 대목이 실제 신문 기사에서는 통째로 누락되어 있다는 사실을 들어, 말로 역시 자신의 발견에 대한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시바의 여왕은 성서와 코란을 통해서만 알려져 있다, 한 마디로, 신들만이 여왕에 관해 기록한 것이다. 우리는 여왕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전설로 여길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이 도시는 무어란 말인가? 이 도시 역시 전설만이 그 실재를 전해 주었지만, 지금 엄연히 존재하는 이 도시 말이다. 여러 정황상 약간의 착오가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 이 도시는 이미 알려져 있는 그 어떤 시바의 도시도 아니다. 온전하게 서 있는 거라곤 이미 하나도 남지 않은 도시 마렙도 아니요, 고작 망루 몇 개, 소규모 신전 하나, 길이 400m도 채 안 되는 성벽밖에 남지 않은 도시 메인(Mein)도 아니다.”28)

    같은 맥락에서, 말로와 코르니글리옹이 신문사에 보낸 전보 역시 지리적, 역사적, 지질학적 검증을 도외시한 무책임하고 경솔한 행위가 되는 것이다.

    탐사의 성과 그 자체와는 별개로, 말로의 르포 역시 토드의 눈에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이 “작가-탐험가-사진작가-고고학자-시인”29)의 글을 르포라기보다는 “서정적 에세이”라고 정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원고지 메우기”, “문체 연습”, “이야기-르포-시“(30)로 조롱한다. 결국 토드는, 말로 역시 내심으로는 이러한 실패를 인정했다고 단정하면서, 말로가 이 르포의 출판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 이 사실을 증명한다고 주장한다.31)

    반면에, 가장 최근에, 그리고 가장 치밀하게 이 모험을 추적하고 관련자료들을 분석했던 랑글루아는, 말로 일행이 발견한 것이 비록 시바 여왕의 수도는 아닐지라도, 그의 모험담이 일련의 사실들과 실제 사건들에 바탕을 둔 것은 분명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말로와 코르니글리옹이 항공일지에 갈겨 쓴 메모들, 급하게 촬영한 항공사진들과 단편 영화, 각각 다른 도시에서 시차를 두고 진행되었던 인터뷰에서 코르니글리옹과 말로가 전하는 내용들이 일치한다는 점 등을 종합해보면, 그들이 사막에서 무언가를 정말로 발견했다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32)라는 것이다. 그는 특히, ‘발견’을 둘러싼 일련의 논란에 불씨를 제공했던 3월 8일 전보문의 배경을 끝까지 추적하여 대단히 새로운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 전보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두 가지 의문점을 갖고 있다. 하나는 전문 발송이 24시간 이상 지연되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엉뚱한 장소를 유적지의 위치로 언급했다는 점이다. 그는 먼저, 7일 오후에 탐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귀항지에 무사히 도착한 탐사반이 이튿날, 그것도 저녁 7시가 되어서야 전문을 발송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납득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의문은, 코르니글리옹 같은 노련한 프로가 루발-칼리 남서쪽의 유적지를 루발-칼리 북쪽, 즉 사막과의 경계지역과 혼동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근본적인 의문에 대해서 랑글루아는, 지부티의 식민지 관리가 말로의 전보문 내용을 일부 수정하여 하루 늦게 발송했을 개연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 관리는, 단순한 관광객으로 알았던 프랑스인들이 예멘 상공을 비행했을 뿐 아니라 예멘과 사우디아라비아 사이의 민감한 국경 지역에서 중요한 고고학적 유적지를 발견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경우에 생길 수 있는 외교적 문제와 개인적 문책을 우려했을 것이며, 당시에는 이러한 조작이 예사였다는 사실을 실명들을 제시하면서 설득력 있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33)

    한편, 랑글루아의 저서는 애초에 말로와 코르니글리옹의 모험 그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진 연구이다. 말로의 르포에 대해서는, 기존의 평가를 반복하면서 “19세기 위대한 낭만주의자들의 서정적 문체”, “서정적, 철학적, 심지어 형이상학적 울림” 정도로 언급하는 데 그치고 있는 이유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말로의 아라비아 모험의 성과에 대한 여러 분야 전문가들의 견해를 검토해 보았다. 우리가 섣불리 독자적 취재나 분석을 시도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지리적 모험에 관해서는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를 객관적으로 종합하는 데 만족하는 대신, 아직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된 바 없는 르포의 글쓰기에 관해서는 지금부터라도 심층연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독히도 집착하던” 공쿠르 상34)을 수상한지 불과 몇 달 뒤에 앙드레 말로를 “살아 돌아올 확률이 절반 이하”인 모험으로 이끈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35) 이 질문에 가장 명쾌하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그 자신이다. 마침 작가 역시 『반회고록』에서 유사한 자문으로 이 모험에 대한 회고를 시작하고 있다. “나는 어쩌다가, 30년 전에, 시바 여왕의 수도를 다시 찾아내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라는 자문이 바로 그것이다. 곧바로 이어진 그의 대답은 이렇다. “지금은 시들해 졌지만, 당시에는 지리적 모험의 매혹이 상당했다.”36). 델퓌에슈 역시 이 자문자답에 주목하여 『시바의 여왕』에 ‘지리적 모험(Une aventure géographique)’이라는 부제를 단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정작 말로는 이 ‘지리적 모험의 매혹‘ 만으로는 독자를 납득시키기에 미흡하다는 듯. 마침내 “이 전설의 땅들은 기인奇人들을 불러 들인다 (Ces terres légendaires appellent les farfelus).”37)라고 덧붙이기에 이른다. 거부할 수 없는 마력으로 모험가를 유혹하는 전설의 땅과, 이 부름에 맹목적으로 응답하는 모험가의 비현실성을 그는 이렇게 요약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전설과 기인, 그리고 모험이라는 세 낱말이 『시바의 여왕』을 보다 깊이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열쇠- 말이 되는 셈이다. 우리의 논의도 자연스럽게 이 키워드를 따라 이어질 것이다.

    6)현재의 마렙Mareb 혹은 마립Marib.  7)코란에서는 Balkis라 부르고, 아비시니아, 즉 지금의 에티오피아 인들은 Makeda라 부른다. (Pierre Galante, 같은 책, p. 84). 시바의 여왕을 가리키는 더 많은 이름에 대해서는, 니클러스 클랩, 『시바의 여왕, 3천년 잠을 깨다』, 이창식 옮김, 김영사, 2005, pp. 390-391 참조.  8)Curtis Cate, Malraux, Paris, Perrin, 1993, p. 317. (성경에 등장하는 다른 여왕들 즉, 에스더, 와스디, 간다게 등은 모두 왕의 아내들이다. 니컬러스 클랩, 같은 책, p. 408.)  9)AM, p. 85.  10)말로와 비행사 코르니글리옹-몰리니에(Corniglion-Molinier), 그리고 정비사 마이아르(Maillard)를 말함. (랑글루아에 따르면, 3월 7일의 탐사비행에는 아랍인 통역자도 한 명 동승했다고 한다. Walter G. Langlois, André Malraux, À la recherche du royaume de Saba, Paris, Jean-Michel Place, 2014, p. 137.)  11)Olivier Todd, André Malraux, Une vie, Paris, Gallimard, , 2001, p. 212.  12)Walter G. Langlois, 같은 책, pp. 99-100.  13)위의 책, p. 99.  14)목적지와의 거리를 계산하면 지부티보다 아덴(Aden)에서 이륙하는 편이 더 유리하다. 아덴이 목적지에서 40km 이상 더 가까우므로 탐사에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의 허가 없이는 Aden, Perim 상공의 비행이 불가능하므로 현실적인 최고의 테크닉 기항지가 지부티였고, 항로 역시 홍해를 따라 역풍을 받으며 우회하는 노선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Pierre Galante, 같은 책, p. 94; Walter G. Langlois, 같은 책, p. 9). 실제로 예멘 외교부는 말로 일행이 비행 허가 없이 그들의 영공을 비행한 것에 대한 강력한 항의 서한을 프랑스 외교부에 보냈다고 한다.(RS, p. 35 각주).  15)RS, p. 35.  16)랑글루아의 주장에 따른 것임. 랑글루아 이전의 모든 연구자들은 전보 발송 시각인 8일 19시가 당연히 전보문 작성 시각이었을 것으로 여겨왔다.  17)랑글루아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이 논란을 기사화한 것은 Le Temps이 유일하다. (4월 6일자 제8면에 탐험가 J. Beneyton이 보낸 편지를 발표하고, 여기에 대한 말로의 반박문을 10일자 신문에 실음). 이 문제에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그리고 재빠르게 개입한 것은 New York Times 이다. 말로가 이 모험 직전인 1933년 12월에 공쿠르 상을 수상한 터라 NYT는 처음부터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3월 10일 아침의 NYT는 제1면 기사에서 말로와 코르니글리옹의 전보 내용을 소개하면서 “전문가들은 이 발견에 대해 회의적이다.”라는 단서를 단다. 3월10일과 11일자 기사는 NYT가 자문을 구한 저명한 전문가들(미국인 5명, 영국인 2명, 프랑스인 1명)의 주장을 싣고 있는데, 그들은 말로 일행이 발견한 곳의 위치, 그곳과 시바 여왕과의 관련성 등에 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표명했다. (Walter G. Langlois, 같은 책, pp. 161-165, P. 280.)  18)RS, p. 37.  19)이 모험을 주도했던 말로는 코르니글리옹이 조종하는 비행기의 조수석에 앉아 처음으로 비행기를 경험하게 된다. 장차 스페인 내전 초기부터 전투비행중대 ‘에스파니아España’를 조직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리게 될뿐더러, 이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가히 ‘항공소설’이라 할 『희망, L’Espoir』(1937)을 집필하게 될 앙드레 말로는 이이러니하게도 평생 비행기는커녕, 자동차 운전도 배운 적이 없었다고 한다. (Curtis Cate, 같은 책, p. 320.)  20)Walter G. Langlois, 같은 책, pp. 144-145. (랑글루와는, “말로의 인상주의적 비약(envolée impressionniste)과는 대조적으로 코르니글리옹의 기사는 실제 일어난 일에 관한 분명한 생각을 제시하고 있다”고 양자의 글을 비교하고 있다).  21)첫 두 편은 지부티에서 사나까지의 비행, 세 번째는 사막 상공 비행, 네 번째에서 여섯 번째까지는 옛 도읍과 왕들의 무덤 상공 비행이 주요 내용이며, 마지막 편은 모험의 정당성을 피력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22)Jean Lacouture, Malraux, une vie dans le siècle, Paris, Éditions du Seuil, 1973, pp. 133-140 참조.  23)Jean Lacouture, 같은 책, p. 137. (라쿠튀르는 5월 9일 기사라고 쓰고 있으나, 인용문의 앞부분은 실제로 8일 기사의 일부임).  24)위의 책, pp. 137-138.  25)Olivier Todd, 같은 책, p. 218.  26)위의 책, p. 897.  27)위의 책, p. 214.  28)위의 책, p. 219. (이 대목은 말로의 마지막 글인 5월 13일자 기사의 필사본 가운데 한 단락이었으나 인쇄 전에 삭제되었다. RS, p. 93.)  29)위의 책, p. 219.  30)위의 책, p. 217.  31)위의 책, p. 220.  32)Walter G. Langlois, 같은 책, pp. 144.  33)위의 책, pp. 147-150 참조.  34)Jean Lacouture, 같은 책, p. 131.  35)말로의 원래 계획은 이보다 훨씬 더 무모한 것으로서, 페르시아인으로 변장하여 사막을 통해 육로로 마렙에 잠입하려는 것이었다. 항공기를 이용하면 보다 쉽고 안전하게 유적지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고, 더 훌륭한 사진을 얻을 수 있다는 코르니글리옹의 조언에 따라 애초의 계획이 항공탐사로 수정된 것이다.  36)AM, p. 83.  37)위의 책, p. 87. (‘기이한 (것)’, ‘엉뚱한 (것)’ 등으로 번역되는 farfelu는 프랑스에서도 별로 사용되지 않다가 앙드레 말로에 의해 부활되다시피 한 어휘이다. 전위예술에 심취해 있던 젊은 시절에 말로가 쓴 환상적인 우화들 가운데 하나의 제목이 Royaume-farfelu(1928) 일 정도로 말로는 farfelu에 심취해 있었다. 그가 본격적인 소설 창작기로 접어든 이후로는 사용되지 않던 이 어휘가 『반회고록』의 서문에서, 그리고 본문 가운데 아라비아 모험을 상기하는 대목에서 다시 등장한 것이다. 『시바의 여왕』 서문에서 Jean Grojean은 “젊은 시절의 말로는 풀 수 없을 정도로 얽히고설킨 두려움과 희열을 ‘farfelu’한 상징들로 말하기 시작했다.”라고 쓰고 있다. (RS, p. 9.)

    3. 전설의 땅과 기인들(farfelus)

    시바의 여왕은 과연 실존했던 인물인가? 아니, 그 이전에 시바라는 왕국이 존재하기는 했던 것일까?

    말로가 모험을 감행했던 1930년대 초에, 시바의 여왕은 그야말로 신기루와도 같은 존재였다. 여왕의 이야기는 성경과 코란을 통해서 알려진 이래로 오랜 세월 끊임없이 이어내려오고 있었지만, 고대의 그 어떤 지역의 사료에서도 여왕에 대한 언급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38) 또한, 당시의 역사학계는, 여왕과 솔로몬의 만남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여왕과 솔로몬 시대 사이에는 3백 년의 간격이 있다고 믿고 있었으므로 시바 여왕이 실존인물일 수는 없다고 보는 입장이었다.39) 그런데 실제로는 기원전 10세기경이 시바 여왕과 솔로몬 왕의 시대이며, 이 시기의 마렙이 대규모 교역으로 번창했던 거대한 문명 도시라는 사실이 확인된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여왕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여왕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시바 여왕과 그 도읍이 얼마나 많은 신비와 수수께끼 아래에 감춰져 있는지를 말해준다.40)

    그렇다면 그 숱한 전설은 과연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걸일까? 비록 역사적 문헌은 아닐지라도, 가장 먼저 시바 여왕을 등장시키고 있는 기록은 구약성경이다. 「열왕기 상」10장 1절에서 13절에 걸쳐, 여왕이 솔로몬을 찾아왔다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기까지의 이야기가 소개되고,41) 「역대기 하」9장 1절에서 12절까지에서 거의 동일한 이야기기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지 천 년 이상 지난 후에 코란의 「안트, The Ant」장에서도 여왕이 중요 인물로 등장한다.42) 그 이후로도 유태교, 그리스도교, 이슬람, 에티오피아, 페르시아의 전승을 통해,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는 작가들의 이야기, 회화, 조각, 오페라를 통해, 그리고 아라비아의 탐험가들과 여행객들을 통해 여왕의 전설은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43)

    말로가 아라비아의 마력에 빠지게 된 것은 1929년에 아내 클라라(Clara)와 함께 페르시아를 방문한 이후부터라고 한다.44)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이스파한(Ispahan) 광장의 떠돌이 음유시인들이 들려주는 시바여왕과 그 전설적 도읍의 이야기에 꼼짝없이 사로잡혔다는 것이다.45)

    그런데 그 전설의 땅이 아직 미지의 세계로서, 아라비아인들에게조차도 신비의 땅이라는 사실이 그의 열정을 더욱 자극한다.46) 그는 고대 작가들의 저서를 연구하는 한편, 지리 학회에 가입하여 마렙에 관한 자료를 찾기 시작한다. 그곳에 발을 들여 놓았던 최초의 유럽인 아르노(Thomas Arnaud)에 관한 이야기와 그의 보고서가 말로의 결심에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실제로 아르노는 마렙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살아 돌아온 단세 명의 유럽인 가운데 가장 먼저 이름을 올린 사람이다.47) 그의 엉뚱하고도 기이한(farfelu) 모험담에 매료된 말로의 모습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이 전설의 땅이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신비를 간직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곳이 바로 금단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왕국의 수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렙은 해발 3천 미터가 넘는 아찔한 산봉우리들이 솟아있는 산악지대와 아득한 사막으로 둘러싸여 있다.49) 게다가,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잔인한 불복종 부족들로서, 오늘날까지도 이 신비의 도읍에 대한 접근을 가로막고 있을 정도이다.50) 정확한 위치도, 심지어는 그 실재 여부도 확인된 바 없는 시바 왕국의 수도가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탐험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해온 것은, 여왕의 전설과는 별개로, 금단의 땅이 불러 일으키는 매혹 때문이라 할 것이다.

    다다르지 못하는 땅이 불러일으키는 온갖 상상과 몽상으로 채색된 “이 전설의 땅들은 기인들을 불러들인다.” 누구보다 먼저 말로와 코르니글리옹이 이 기인들에 포함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시바의 여왕』 서문의 각주에서 델퓌에슈는 말로가 1934년에 장 그르니에(Jean Grenier)에게 보낸 자필 편지의 일부를 각주를 통해 전하고 있다. “퐁티니(Pontigny) 건으로 말하자면, 저는 그때 시바의 여왕을 찾아 아라비아에 가있을 걸로 생각합니다. 제게 아직도 비현실적인(romanesque) 면이 상당히 있다는 증거겠지요...”51)라는 말이 그것이다. 전설의 땅의 부름에 응답하는 기인을 곧 ‘비현실적’ 인물로 정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코르니글리옹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반회고록』에서 말로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무엇에 이끌렸던가? 아마도 우정에, 그리고 아에로포스탈(Aéropostale)이 이 탐사에서 ‘무모하다’고 보았던 그것에 이끌렸을 것이고, 결국에는 비현실성(romanesque)에 이끌렸을 것이다.”52)

    『시바의 여왕』에 등장하는 대표적 기인은 아일리우스 갈루스(Ælius Gallus)와 아르노이다. 말로는 그의 두 번째 르포(5월 4일) 대부분을 이 두 사람의 이야기에 할애하면서 그 제목을 ‘사막의 유령들(Fantômes de sable)’이라 붙였다.

    로마 군단의 사령관 아일리우스 갈루스가 시바 정복을 위해 이끌고 온 군대는 시바에 채 이르지도 못한 채 바닷가를 헤매다 마침내 모래 속에 파묻혀 전멸했다고 한다. 『시바의 여왕』에서 말로가 전하는 그의 이야기는 물론 실제 역사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말로가 페르시아의 이야기꾼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그 자신의 상상력이 덧씌워졌기 때문이다. 작가는, 사막과 태양이 불러일으킨 광기에 사로잡혀, 도시 대신 바다를 정복하기로 작정한 이 사령관을, 아테네에 입성하지 못하자 에게 해에 채찍질을 가하도록 명령했다는 크세르크세스(Xerxès)53)에 비유한다. 아일리우스 갈루스의 명령에 따라 전투 대형을 이뤄 바다와 대적하는 군대, 정복의 표시로 투구 가득 조가비를 채우고는 대오도 정연하게 로마를 향해 뜨거운 사막을 행군하는 병사들의 기묘한(farfelu) 풍경이 이 두 번째 르포의 전반부를 압도한다.54)

    후반부의 주인공은 아르노이다. 그는 1843년에 페르시아 인으로 변장한 채 마렙에 잠입해서 56개의 비문을 발견하고는 구둣솔로 탁본을 뜬 다음 무사히 탈출에 성공한 인물이다. 피에르 갈랑트로부터 아르노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말로는 그를 “약간 기묘한(un peu farfelu) 프랑스 약제사”로 묘사했다고 한다.55). 그 시절에, 떠도는 전설만을 믿고 단신으로 무작정 마렙에 잠입했던 아르노는, 말로가 보기에도 광기에 사로잡힌 자, 비극적 환상에 쫒기는 자56) 였던 것이다.

    비밀의 탁본을 지키기 위한 아르노의 온갖 노력, 자웅동체 당나귀와의 동고동락, 탁본을 숨긴 채 천신만고 끝에 마침내 젯다(Djeddah)로 귀환했을 때는 장님이 되어 있었던 아르노, 종이 위에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리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마치 모래성을 쌓는 어린아이처럼 바닷가의 축축한 모래 위에 엎드려 더듬더듬 마렙의 제방과 사원, 신전 기둥을 되살려내는 이 장님의 기발한 도전이야말로 가히 말로를 사로잡을만한 기인의 그것이 아니겠는가?57) 이런 식의 엉뚱하고도 기이한 이야기로 넘쳐나는 이른바 ‘탐방기사’를 접한 그 당시 신문독자들의 반응을 그려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듯하다.

    38)니컬러스 클랩, 같은 책, p. 26.  39)위의 책, p. 28 ; Olivier Todd, 같은 책, p. 211.  40)니컬러스 클랩, 같은 책, pp. 355-391 참조. (여왕의 무덤뿐만 아니라 시바 왕실의 그 어떤 무덤도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고 한다. 올해 3월 7일, 4월 29일, 5월 2일자 『조선일보』는 고세진 대한성서고고학회 회장의 기고문을 “에티오피아 ‘시바 여왕’ 발굴 현장 리포트”라는 제목으로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기고문 그 어디에도 시바 여왕의 무덤을 찾았다거나 발굴했다는 언급은 없다. 또한, 고세진 회장은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와는 달리, 옛 시바 왕국이 현재의 에티오피아 북부의 악숨(Aksum, Axum) 지역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그런데 위의 기사는 기고자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전달할 뿐 아니라, 그의 글 속에 한 마디도 없는 내용을 제목으로 제시하여 독자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41)스바 여왕이 주님의 이름 덕분에 유명해진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까다로운 문제로 그를 시험해 보려고 찾아왔다. 여왕은 많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향료와 엄청나게 많은 금과 보석을 낙타에 싣고 예루살렘에 왔다. 여왕은 솔로몬에게 와서 마음속에 품고 있던 것을 모두 물어보았다. 솔로몬은 여왕의 물음에 다대답하였다. 그가 몰라서 여왕에게 답변하지 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 여왕이 임금에게 말하였다. “내가 임금님의 업적과 지혜에 관하여 내 나라에서 들은 소문은 과연 사실이군요. 내가 여기 오기 전까지는 그 소문을 믿지 않았는데, 이제 직접 보니, 내가 들은 이야기는 사실의 절반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임금님의 지혜와 영화는 내가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납니다. (...) 임금님의 하느님께서 임금님이 마음에 드시어 임금님을 이스라엘의 왕좌에 올려놓으셨으니 찬미 받으시기를 빕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영원히 사랑하셔서, 임금님을 왕으로 세워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게 하셨습니다. (...) 한편 솔로몬 임금은 그의 손에 걸맞게 스바 여왕에게 선물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여왕이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청하는 대로 다 주었다. 여왕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http://info.catholic.or.kr/bible.)  42)니컬러스 클랩, 같은 책, p. 36. (코란 제 27, 개미의 장 15-45절에 기록된 이야기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다윗왕의 뒤를 이은 솔로몬왕은 새들의 말도 알아 듣고 인간이나 정령을 통치하는 명군 현인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그는 정령과 인간과 새들로 된 군대를 동원해서 개미의 골짜기로 가서 새들의 열병을 받았는데, 새들 중에 프드프드 새(꿩)만이 보이지 않아 성이 났는데 곧 그 새가 와서 시바 나라(고대 남아라비아의 나라)에 한 여왕이 있는데 그 왕좌는 거대한 부에 싸여 있으며, 신을 대신해서 태양을 숭배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솔로몬왕은 곧 그 진위를 알아보기 위해서 그 새에게 명해서 그 왕궁에 초대장을 보냈다. (...) 왕은 여왕의 발이 산양이나 나귀와 같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한다. 시바의 여왕이 왕궁으로 들어가는데 그 궁전 바닥에 물이 가득 차 있는 것같이 보여서 여왕은 무심코 치맛자락을 들어 올려 두 발을 노출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솔로몬왕의 설명에 따라 그 바닥을 자세히 보니 그것은 수정 바닥이었다. 그래서 여왕은 솔로몬 왕의 지혜에 감복하고 지금까지의 불의를 뉘우치고 솔로몬 왕과 같이 만유의 주 알라 신에게 귀의하기로 맹세했다고 한다.” http://kcm.kr/bible/old/bib01/old5.html).  43)구체적인 인명, 작품 등은 RS, pp. 16-26 참조.  44)페르시아는 지금의 이란 지역임. 이 지역에 매료된 말로 부부는 1930년과 1931년에도 페르시아를 방문했다고 한다.  45)RS, pp. 16-26 ; Jean Lacouture, 같은 책, pp. 124-125 ; Olivier Todd, 같은 책, pp. 170-208 참조 (단, 토드는 말로 부부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만난 독일인 Jacobsthan 으로부터, 시바 여왕의 수도로 추정되는 폐허에 묻혀있는 보석과 황금 더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곳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주장이 설득력 없는 이유는, 말로의 항공탐사는 애초에 지상 착륙을 고려하지도, 고려할 수도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46)“19세기 중반 이후로는 어떤 유럽인도 그곳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고, 어떤 고고학 탐사반도 그곳을 연구할 수 없었다. 오직 전승되는 이야기들만이 그 위치를 알려줄 뿐이었다.” (AM, p. 84.).  47)Curtis Cate, 같은 책, p. 318. (니컬러스 클랩에 따르면, 이 세 사람은 프랑스 약종상 조제프 토마스 아르노(1843년), 요제프 할레비(1869년), 독일의 금석학자 에두아르트 글라서(1892년)이다. (니컬러스 클랩, 같은 책, p. 258). 말로가 『반회고록』 84쪽에서 “19세기 중반 이후로는 어떤 유럽인도 그곳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없었고”라고 한 것은 아르노만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48)RS, p. 58. (여기에서 양초를 언급한 이유는, 아르노가 마렙에서 빠져나올 때 생계를 위해 양초 장수 노릇을 했기 때문이다. 양초를 탐낸 이슬람 수도승 때문에 그는 나룻배에 탁본과 자웅동체 당나귀 한 마리를 싣고서 또 다시 도망쳐야 했다. 적들은 그에게서 약탈한 양초에 불을 붙여 자축을 하는데, 말로의 르포에서는, 나룻배 뒤로 펼쳐진 아름다운 황혼녘을 밝히고 있는 양초 불빛이 몽환적인 분위기로 그려지고 있다. RS, p. 56.)  49)Curtis Cate, 같은 책, p. 317.  50)Pierre Galante, 같은 책, p. 87 ; Walter G. Langlois, 같은 책, pp. 210-211. (20세기 초에 대부분의 이슬람 세계가 서구인들에게 문호를 개방했을 때에도 예멘은 예외였는데, 부족장들의 외국인 혐오증, 특히 서구인들에 대한 적개심이 그 이유라고 한다. 말로는, “시작은 고고학이지만 그 끝은 보호령”이라는 이유로 유럽인들의 유적지 접근을 철저히 차단했던 부족장을 현자로 평가한다.(RS, p. 92) 마침내 1951년에 미국인류학연구재단에서 파견된 최고의 탐험대원들이 거대 자본을 투입하여 소함대 규모의 트럭과 왜건을 동원한 유적지 탐사에 착수할 수 있었다. 초기에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던 이 탐사조차 결국에는 탐험대가 사막으로 도망쳐서 겨우 목숨을 구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고 한다. (니컬러스 클랩, 같은 책, pp. 259-265 참조).  51)RS, p. 16.  52)AM, p. 85.  53)페르시아 제국의 제4대 왕 (B.C. 519?~B.C. 454). B.C. 480년에 그리스를 침공했으나 Salamis 해전에서 패배하여 퇴각하였다. 그리스 침공 시, 폭우로 다리가 끊어지자 에게Égée해에 300번의 채찍질을 하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54)RS, pp. 52-54.  55)Pierre Galante, 같은 책, p. 84.  56)RS, p. 55.  57)RS, pp. 55-57.

    4. 모험가

    말로를 수식하는 여러 어휘들 가운데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모험가’이다. 말로 연구가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듯, 그는 어린 시절부터 모험가들에게 열광했고 언제나 위대한 모험가가 되기를 꿈꾸었으며, 자신의 삶 속에서 그 꿈을 실현해 나갔다. 말로 소설의 모든 주인공 역시 모험가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영웅적이라기보다는 비극적인 모험가, 실패한 모험가들이다. “승리는 모험가를 죽인다.”58)라는 말로의 단언이 옳다면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모험가인 셈이다.

    그렇다면 그와 그의 분신들은 왜 하나같이 무모한 도전, 비극적인 시련에 뛰어드는가? 그들이 모험의 성공을 도외시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역사학자 실뱅 베네르(Syivain Venayre)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프랑스의 신풍조 가운데 하나는, 가히 ‘모험지상주의(mystique de l’aventure)’라 할 만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오로지 모험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순수 모험에 대한 예찬으로서, ‘목적’이 아니라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것이었다. 베네르는 그 모험의 동기를 대략 자아실현, 자기 운명의 파악, 그리고 세계의 숨겨진 의미를 드러내는 것 등으로 요약한다. 이러한 풍조의 중심에 있는 것이 아마도 말로의 모험이었을 것이다.59) 말로가 그의 행동과 글을 통해 모험 또는 모험가에게 부여하고 있는 ‘의미’는 이 가운데 특히 무엇이었을까?

    먼저, 말로가 항공탐사 직후에 평론가 르네 랄루(René Lalou)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을 인용해 보자. “죽음을 무릅쓰는 것은 죽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영웅주의가 인간의 자세를 나타내는 하나의 표현이라면, 그 자세 위에는 우리가 발견해야 할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있습니다.”60) 모험가가 ‘발견해야 할’ 이데올로기가 무엇일까? 우리는 그것이, 말로의 전 생애와 전 작품을 가로지르는 유일한 화두인 인간 운명의 극복이라고 판단한다. 언젠가 사르트르가 그를 ‘죽음을-위한-존재(un etre-pour-la-mort)’로 규정했을 때, 그는 “죽음을 ‘위한’ 이라고 말하는 대신 ‘맞서는(contre)’이라고 한다면 어떨지?”라고 응수하지 않았던가?61) 『절대의 악마, Le Démon de l’absolu』의 서문에서 말로가 정의한 모험가의 의미 역시 같은 맥락을 이룬다. 말로에 따르면, 인간은 어느 시대건 그 시대 나름으로 헤라클레스의 신화를 추구하기 마련이다. 인간 조건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오랜 열망이 이 신화를 탄생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열망의 신화적 화신이 헤라클레스라면, 모험가는 그 오랜 열망의 대중적 화신이라는 것이다.62)

    그의 작품 속 모험가들이 추구하는 열망은 어떠한가? 『빈회고록』에서 클라픽(Clappique)이라는 가공의 인물이 창작한 것으로 소개되는 시나리오를 보자. 이 가공의 작가가 집필한 가공의 시나리오 속 주인공은 인도차이나에서 실존했던 모험가인 메레나(Mayrena)이다. 그는 파리의 추종자 무리에게 “내가 했던 모든 일, 그건 자네 같은 사람들도 꿈을 꿀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자 했던 일”이라고 말하면서, 그들 역시 인간 조건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찾으라고 부추긴다. 그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이제 내 전 생애를 파악해 볼 순간이군. 지나간 매순간 속에서가 아니라 후일의 면모 속에서 말이지. 내 운명과 같은 운명은 반드시 그 전설을 만들어낼 테니까.”라고 확신하는 인물로 묘사된다.63)

    이와 같이, 말로 자신이든 그의 분신이든, 그들은 모두 모험을 통해 무엇을 성취하느냐가 아니라 모험의 ‘의미’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실뱅 베네르가 말한 ‘모험지상주의자’의 전형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아라비아 모험을 통해 확인하고자 했던 ‘의미’는 이와 다를 것인가? 말로의 르포에서 아르노에 관한 대목을 읽고 랑글루아가 놀라움을 표현한 이유를 들어보자. 그가 보기에 아르노가 이룬 가장 중요한 성과는 바로 마렙에서 비문들(inscriptions)을 발견했다는 사실인데, 말로는 이 발견에 그다지 의미를 두지 않고 단 한 문장으로 그것을 요약해 버렸기 때문에 놀랐다는 것이다.64)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르포에서 말로가 자신의 고고학적 탐사에 대해 내린 평가 역시 “우리가 이 도시에서 기대했던 것은 고고학 이상의 것, 바로 아름다운 인간적 모험(une belle aventure humaine)이었던 바, 이 도시는 우리에게 그것을 주었다.”65)라는 것이다. 아지즈 베니스(Aziz Benni)s가 “말로는 미지의 땅의 실체를 발견하고야 말겠다는 탐험가의 집착을 갖고 있지 않았다.”66)고 주장한 것도, 티종-브라운(Micheline Tison-Braun)이 “아라비아 사막 비행에서 말로가 진짜로 원했던 것은 ‘그저 전설의 땅에 다가가는 것’”67)이라고 본 것도 마찬가지 맥락에서일 것이다.

    “그저 전설의 땅에 다가가는 것”은, 말로가 『침묵의 소리, Les Voix du silence』에서 말하는 ‘사라진 문명의 불굴의 내면의 목소리’를 듣기 위함이다. “과거의 위대한 예술은 지금까지 살아남아, 이미 사라진 문명의 불굴의 내면의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기”68) 때문이다. 그것은, 한낱 인간이 건설한 도시, 그것도 사막 한가운데에 세운 도시, 전설로만 그 존재가 전해 내려오는 도시가 3천 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견디며 버티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요, 시간의 지배력에 맞서 완강히 저항하는 ‘초시간(intemporel)’의 인간 의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불가역의 시간을 거스르고, 시간의 지배력을 초월하는 ‘반운명(anti-destin)’의 상징에 다가감으로써 모험가는 마침내 전설의 땅, 신화적 세계와 조우한다.,

    실제로 말로는 일찌감치 『왕성의 길, La Voie royale』에서 그의 또 다른 분신인 인도차이나의 모험가 클로드(Claude)를 통해 모험과 예술과 ‘반운명’ 그리고 신화의 관계를 밝힌 바 있음을 상기해 보자.

    결국 말로에게 있어 아라비아 모험이 갖는 ‘의미’는 아마추어 고고학자가 위대한 전설과 신화의 세계를 넘봤다는 시도 그 자체이지, 전설의 땅이 어디에 있는지를 기어이 증명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말로가 『빈회고록』에서, 마렙의 위치가 “사막의 남쪽이며 아덴의 동쪽”70)이라는 예전의 어이없는 오류를 굳이 바로잡지 않은 것은 과연 단순한 실수일까, 아니면 의도적인 방치일까?

    58)Gaëtan Picon, Malraux par lui-même, Paris, Seuil, 1953, p. 78.  59)이 시기에 프랑스를 대표하는 모험가로는 말로 외에도 Saint-Exupéry, Mermoz와 같은 비행사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모험이 직업적 성취를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모험을 위한 모험’과는 구분된다.  60)Olivier Todd, 같은 책, pp. 215-216에서 재인용. (강조는 작가에 의함).  61)Jean Lacouture, 같은 책, p. 437.  62)André Malraux, OEuvres complètes (tome II), Paris, Gallimard, , 1996, pp. 819-823 참조.  63)AM, pp. 464-469.  64)Walter G. Langlois, 같은 책, p. 211.  65)AM, p. 96.  66)Aziz Bennis, André Malraux explorateur à la recherche de la capitale de la reine de Saba, in www.malraux.org, p. 1.4  67)Micheline Tison-Braun, Ce monstre incomparable..., Paris, Armand Colin, 1983, p. 76.  68)André Malraux, Les voix du silence, Paris, Gallimard, 1951, p. 628.  69)André Malraux, OEuvres complètes (tome I), Paris, Gallimard, , 1989, p. 398.  70)AM, p.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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