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etzsches Kritik an Aristoteles und seine Trgodientheorie

니체의 아리스토텔레스 비판과 비극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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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Nietzsche kritisiert Aristoteles in Hinsicht auf die Reaktion des Zuschauers angesichts des Untergangs des Helden in der Tragödie. Nietzsche weist auf jene problematische Interpretation der Tragödie durch Aristoteles hin, die behauptet, dass der Zuschauer durch die Entladung aufgrund von Phobos und Eleos endlich zu der Katharsis gelangt. Somit spricht sich Nietzsche im Grunde genommen gegen diese Art von Katharsis aus. Nietzsche betont, dass die sogenannten ‘Pessimisten’ einschliesslich von Aristoteles die Tragödie pessimistisch missverstanden und damit die gründliche Lebenskraft im menschlichen Leben verneint haben. Dabei bezieht sich diese Zurückweisung der Lebenskraft eben auf Nietzsches Kritik an der zeitgenössischen Moral. Aufgrund der Umwertung des Begriffs ‘Katharsis’ schätzt Nietzsche eben den Sinn der Katharsis als ästhetisches Spiel und ästhetisches Ereignis. Hier bricht das Pathos der Musik in den satyrischen Chor ein und ermöglicht die Erfahrung des dionysischen Rausches. Damit wird die künstlerische Kraft zur Entladung gezwungen, so dass die Verwandlung des Menschen und daran anschliessend der Verlust der Identität verursacht werden. Dabei wird die Erfahrung der Entgrenzung des Bewusstseins ermöglicht. Dies bedeutet, dass sich die Erfahrung der Liminalität vollzieht. Der Mensch, der von der enthusiasthischen Macht der dionysischen Musik besessen ist, verändert sich in einen Diener des dionysischen Gottes. Infolgedessen wird er aufgrund katharsischer Verwandlung beim Dithyrambus zum dionysischen Satyr. Satyrischer Chor verwandelt sich dabei in einen unbewussten Schauspieler und zugleich wird zu jenem Zuschauer, der die Vision der Szene sieht. So reizt der Chor die Stimmung der Zuhörer. Denn die Zuhörer der griechischen Tragödie stellen sich vor, dass sich der Chor beim Dithyrambus in der Orchestra in den satyrischen Chor verwandelt hat. Dabei identifizieren sich die Zuhörer mit diesem Chor und verwandeln sich selbst. Nietzsche begreift die Tragödientheorie von Aristoteles im Kontext von Sokratismus und kritisiert die sogenannten ‘Hinterweltler’ und somit den Logozentrismus. Dabei geht es um die Kritik an dem Begriff ‘Substanz’, von dem die Philosophie Aristoteles’ ausgeht. Vor dieser Folie kritisiert Nietzsche jene Tragödie von Euripides, die unter dem Einfluss von Sokrates steht. Damit pointiert Nietzsche die Bedeutung des Chors in der Tragödie. Denn Euripides hat die Funktion des Chors so stark eingeschränkt, dass die Tragödie eben den ‘Selbstmord’ begeht hat.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비극 주인공의 파멸에 대한 관객의 정서적 반응과 관련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비판하면서, 포보스(Phobos)1)와 엘레오스(Eleos)에서 나온 격정을 폭발시켜 카타르시스(Katharsis)에 도달한다는 해석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즉 비극 주인공에 대한 공포와 동정을 통해서 나온 위험한 격정을 폭발시키면서 거기서부터 정화하는 것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반대한다. 니체는, 아리스토텔레스뿐만 아니라 ‘염세주의자들’이 비극을 ‘염세주의적’으로 오해했으며, 그 결과 삶의 근원적인 생명력을 부정했다고 강조한다. 이와 반대로 니체는 비극을 통해서 ‘삶에의 의지’가 고양된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개념의 윤리적 해석을 비판하면서 니체는 카타르시스가 가진 ‘미학적 유희(ästhetisches Spiel)’와 ‘미학적 사건’으로서의 의미를 높이 평가한다. 여기서는 음악의 파토스(Pathos)가 사티로스합창단에 강제로 들어가서 합창단의 디오니소스적 도취 경험을 가능하게 하며, 그와 더불어 예술적 힘의 강제적 폭발로 인하여 인간의 변신과 자기정체성의 상실이 야기된다. 그 결과 의식의 탈경계화 경험이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서 리미널리티(Liminality)의 경험이 이루어진다. 디오니소스적 음악의 열광적 권능에 사로잡힌 인간은 디오니소스 신(神)의 시종으로 변신한다. 그러므로 주신찬가(Dithyrambus)때에 카타르시스적 변신에 근거하여 디오니소스적 사티로스로의 변신이 이루어지며, 따라서 사티로스 합창단은 ‘무의식적 배우’로 변신할 뿐만 아니라, 장면의 환영(Vision)을 보는 관객이기도 하다. 여기서 합창단은 청중에게 분위기를 자극하게 된다.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 비극의 청중은 오케스트라석의 주신찬가 합창단이 사티로스 합창단으로 변신했다고 상상하면서 합창단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가운데 스스로 변신하게 되기 때문이다. 니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을 소크라테스주의와의 맥락 속에서 파악하면서 이른바 ‘배후세계론자들’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며, 이런 가운데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진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실체 개념에서부터 출발하는 데 대한 비판과 맥을 같이 한다. 같은 매락에서 니체는 소크라테스의 영향권 하에 있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을 비판하면서 비극에서의 합창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에서는 합창단의 기능이 축소됨으로써 결국 비극이 ‘자살’하고 마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 KEYWORD

    Nietzsche , Aristoteles , Katharsis , asthetisches Spiel , Erfahrung der Liminalitat , Dithyrambus , Kritik am Logozentrismus , tragischer Chor

  • 1. 서론

    한국에서는 연극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 그러니까 연극 철학에 대한 연구는 사실 우리의 학문적 현실에서는 그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비교적 간과되어 왔다. 이런 현실에서 본 논문은 한국 연극에 미친 서양 연극의 영향 중에서도 특히 비극이라는 장르 자체가 가지는 근본적인 의미의 문제를 진지하게 제기하고자 한다. 즉 우리 시대에 이루어지는 다양한 비극 공연들이 우리의 삶에 주는 근본적인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서 비극이라는 개념의 생성 근거와 그 출발점이 되는 고대 그리스 비극에 대한 철저한 질문과 논구를 수행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에 직면해서 바로 니체의 저서 『비극의 탄생』은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대답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며, 우리에게 필요한 시의성의 문제를 천착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왜냐하면 니체는 그리스 비극이 고대 그리스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었는지를 통찰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대 산업사회의 인간들에게 비극이라는 장르가 어떤 새로운 의미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분명한 대답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연구 결과는 한 세기를 넘어서 21세기 현재까지도 여전히 유효하다. 『비극의 탄생』은 비극의 기원에 대한 연구에 근거해서 고대 그리스 문명인들에게 비극과 예술이 삶에 주는 의미에 대한 철학적 인식의 눈을 제시해 줄 뿐만 아니라, 비극이 산업사회 현대인에게 주는 의미 맥락에 대한 학문적 천착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현대적 삶의 문제에 대한 진단 및 나아갈 방향까지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비극이 기계론적인 가치관의 지배를 받고 삶의 생명력이 약화된 현대인들에게 주는 의미의 깊이와 넓이에 대한 연구를 니체는 자신의 저서에서 보여주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니체의 연구는 21세기 현재의 학문적 경향에까지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니체의 비극론과 연극 철학을 통해서, 그리스 비극이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미친 영향 및 현대인들을 위한 새로운 비극의 가능성에 대한 니체의 지적 성찰을 탐구하고자한다.

    니체는 ‘비극적인 것’에 대한 자기 시대의 일반적인 독일 철학적 해석들이나 미학적 단초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새로운 해석을 의도적으로 강조하였다. 이는 특히 니체의 동시대에서 비극론에 대한 사유가 유일하게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출발하고 있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2) 바로 이러한 상황에 대한 니체의 비판과 반대는 그의 저서 『비극의 탄생』에 명료하게 드러나고 있다.3)

    고대 그리스 비극 주인공의 파멸에 대한 관객의 반응과 관련하여 니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윤리적인 해석을 하였다고 비판한다. 니체가 말하는 윤리적인 해석은 결국 관객에게 미치는 비극의 효과라는 측면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윤리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말한다. 즉 비극을 통해서 관객에게 윤리적인 면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니체는, 비극을 통해서 관객은 주인공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삶에의 의지’를 고양시키게 된다고 역설한다.4) 비극 해석에 대한 두 이론가 사이의 이런 현격한 차이는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비극론을 대표하는 이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입장을 고려해 볼 때, 관객에게 미치는 비극의 효과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또 정당화 해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문제들과 관련해서, 본 연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에 대한 니체의 비판의 근거를 살펴보면서 동시에 니체의 비극론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연구를 시도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와 니체의 형이상학적인 입장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며, 더 나아가 니체의 비극 철학적 사유로까지 사고가 확장될 것이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니체가 비극의 문제를 통해서 자신의 철학의 핵심적인 지점까지 도달하는 것에 대해서도 함께 고찰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그의 ‘신’개념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가지고자 하며, 그러한 신 개념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본 연구는 이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에 대한 니체의 비판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보다 깊이 있게 조명하며, 그러한 비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히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니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그리스 비극이 주는 어떠한 효과를 부각시키고자 하는지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자 한다. 여기서 본 연구는 니체의 비극론이 비극 그 자체에 대한 이론적 조명에 머무르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서 그의 동시대인들과 동시대 문화의 문제에 대한 비판의 근거를 확보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철학적 사유를 정제했다는 점을 확인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대 문화에 대한 비판의 맥락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니체의 비판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5)

    1)포보스와 엘레오스는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레싱(G. E. Lessing)의 해석에 따라서 공포와 동정 혹은 연민으로 번역되고 있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하여 고전문헌학자 내지 고전철학자들은 다른 해석을 내 놓고 있기도 하다.  2)여기에 대해서 Enrico Müller, “‘Ästhetische Lust’ und ‘Dionysische Weisheit’. Nietzsches Deutung der griechischen Trgödie”, Nietzsche-Studien, 31, 2002, 134-153면, 136f. 참조.  3)예를 들어 Enrico Müller는 『비극의 탄생』의 광범위한 부분이 바로 체계적인 반아리스토텔레스적 비극론으로 서술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본래 니체의 적수이며, 따라서 니체의 초기 저서에 언제나 나타나는 인물로 간주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여기에 대해서 Enrico Müller, 같은 논문, 137면 참조.  4)같은 맥락에서 Wellbery 역시 니체에서 비극예술이 ‘삶의 광학 하에서’ 위험에 처한 인간의 구원 수단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지적한다. 여기에 대해서 David E. Wellbery, “Form und Funktion der Tragödie nach Nietzsche”, in: B. Menke/ Ch. Menke (Hg.): Tragödie-Trauerspiel-Spektakel, Berlin 2007, 199-212면 중 199면 참조.  5)Enrico Müller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 이후 ‘알렉산드리아적(alexandrinisch)’이며 그럼으로써 역시 현대문화의 특징적 대변자”로서 입증된다고 서술한다. Enrico Müller, 앞의 논문, 140면.

    2. 아리스토텔레스의 신관(神觀)과 비극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저서 『형이상학』 XII권 7장 서두에서 “운동하지 않으면서 운동을 낳는 어떤 것, 영원하고 실체이며 현실적인 작용인 것이 있다”6)고 말하면서 ‘부동의 원동자(unbewegter Beweger)’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부동의 원동자’라는 개념은 실체(Substanz)들 중에서도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우주의 다른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실체를 의미한다. 이는 물론 인간의 경험 세계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인식 세계에서만 알 수 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실체는 개별자로서 설정되며, 이는 시간, 즉 있음의 측면에서 볼 때 다른 것보다 앞선다.7) 여기서 실체는 질료를 바탕으로 생성(生成, Werden)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생성보다 실체가 앞서 있으며, 더 나아가 질료와 형상은 생성을 위한 필요조건이 된다.8) 그러므로 부동의 원동자라는 개념은 결국 신성(神性)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제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모른 것을 움직이게 하며, 더 나아가 생성을 가능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우주에서 유일하게 움직이지 않는 불변의 실체로서 신의 존재가 주어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의 존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우리는 신이 영원하고 가장 좋은 생명체이며, 그래서 끊임없이 지속하는 영원한 삶이 신에게 속한다고 말하는데, 신은 바로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9) 오트프리트 회페(Otfried Höffe)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플라톤의 ‘세계창조자(Demiurg)’에 비교될 수 있다.10)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물론 이신론(理神論, Deismus)적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신의 존재가 목적론적인 우주신학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코스모스적 우주 질서를 가진 신성(神性)을 전제함으로써 그의 신관(神觀)은 윤리(倫理)신학(Ethikotheologie)적 측면을 드러낸다. 『형이상학』 XII권 10장에서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 신학의 목적론적 측면이 잘 드러난다. 여기서 그는 선(善) 및 최고선의 문제와 관련해서 세계와 신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조대호는 “선은 세계의 질서 가운데 구현되어 있지만, 이 선한 질서보다 더 선한 것은 그런 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원리인 신”11)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여기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에서 최고선의 근거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을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관련하여 보다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공포와 동정에 근거한 카타르시스(Katharsis)를 주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카타르시스는 관객이, 주인공이라는 영웅의 희생으로 인하여 얻을 수 있는 정서적 정화이다. 즉 주인공이 하마르티아(Hamartia)에 의해서 파멸에 이르게 되는 것에 대해서 공포와 동정을 느끼게 되는 상황 자체는, 이미 그러한 하마르티아를 최고선의 존재인 신의 관점에서부터 파악하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주인공의 파멸의 원인이 하마르티아에 있다고 볼 뿐만 아니라, 그러한 것을 하마르티아라고 파악하는 근거 자체가 이미 신적인 최고선의 입장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더 나아가 주인공의 죽음에서 공포와 동정을 느끼는 관객의 입장은 이미 그러한 공포를 정당화시켜주는 근거를 바로 주인공의 하마르티아에서 찾고 있다. 주인공의 하마르티아가 그러한 파멸에까지 이를 만큼 중대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의 답 역시 바로 최고선의 존재인 신의 입장에서만 찾을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은 신적 질서를 전제로 하고 그 정당성 위에서만 비극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 해석에 윤리적인 관점이 개입되었다는 근거를 확인할 수 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신론에 인격신론(Theismus)적 의미가 개입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 존재와 비극 주인공의 파멸을 연결해서 생각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이 신에 의한 세계의 지배를 당연시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신은 인간의 성격적 결함을 윤리적인 관점에서 징벌하고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을 정당화시켜주는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하마르티아로 인해서 파멸에 빠지는 비극 주인공을 바라보는 관객 집단은 신적 질서의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비극의 윤리적 영향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는 총체예술(Gesamtkunstwerk)로서의 비극의 다매체적 통일이 단지 행동과 말 사이의 기능적 협력으로만 축소되고 마는 문제점 역시 발생한다.12) 따라서 그리스 비극의 연출에서 중시되어야 하는 춤, 표정술, 제스추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산미학적 요구 앞에서는 무의미해지고 만다. 특히 니체의 비극론에서 중심이 되는, 합창윤무에서의 음악의 역할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단순하게 무시되어버린다. 『시학』의 이러한 방향에 반대하면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매우 의미심장한 표현을 사용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반대. 그는 연출과 음악(MELOS)을 비극의 쾌적한 것에 포함시킨다. [...]”13) 여기서 니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에서의 연출과 음악의 중요성과 깊이를 간과한 채, 그것들을 단순히 쾌적한 대상으로만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비판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 고대 그리스 3대 비극작가들의 작품들이 단순히 독서본의 형태로 이해되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비극 작품들이 공연보다는 독서 텍스트의 형태로서만 우선시 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점은 니체의 동시대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비극에 대한 해석 중심적 미학은 전반적으로 니체 시대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해석에만 기반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그리스 비극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비극의 전반적인 수용 범위를 무시한 채 단순히 분석 대상인 텍스트 자체에만 몰두함으로써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산 미학은 형식화되고 규범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고, 또한 비극을 개념화 하는 작업과 연관을 갖게 된다. 비극의 개념화 시도에서는 무엇보다도 ‘비극적인 것’ 내지 ‘비극의 본질’에 대한 논구가 중심적으로 자리 잡게 된다.14) 그 결과 비극의 수용 미학적 측면이 무시되고 만다.

    6)『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조대호 역해, 문예출판사, 2004, 281면.  7)같은 책, 95f. 참조.  8)위의 책, 145면 참조  9)위의 책, 284면.  10)Otfried Höffe: Aristoteles, München 1996, 150-161면 참조.  11)『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앞의 책, 308면.  12)여기에 대해서 Enrico Müller, 앞의 논문, 138면 참조.  13)Friedrich Nietzsche, Kristische Studienausgabe(이하 KSA) in 15 Bdn. Hrsg. von Giorgio Colli, Mazzino Montinari, Berlin New York 1980, 2. Auflage, Bd 7, 78면, 3[66]. Enrico Müller는 니체의 이 글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6장, 1450b와 관련된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Enrico Müller, 앞의 논문, 138면, 각주 12 참조.  14)여기에 대해서 Enrico Müller, 앞의 논문, 139면 참조.

    3. 니체의 아리스토텔레스 비판과 비극론

       3.1. 니체의 아리스토텔레스 비판 및 이성중심주의 비판

    니체는 비극 주인공의 파멸에 대한 관객의 정서적 반응과 관련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비판한다. 그는 『우상의 황혼(Götzen-Dämmerung)』에서, 공포와 동정에서 나온 격정을 폭발시킴으로써 카타르시스(Katharsis)에 도달한다는 비극해석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즉 비극 주인공에 대한 공포와 동정을 통해서 나온 위험한 격정을 폭발시키면서 거기서부터 정화하는 것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반대한다. 니체는, 아리스토텔레스뿐만 아니라 ‘염세주의자들’이 비극을 ‘염세주의적’으로 오해했으며, 그 결과 삶의 근원적인 생명력을 부정했다고 역설한다. 여기서 삶의 근원적인 생명력의 부정은 궁극적으로 니체의 도덕 비판과 맥을 같이 한다. 니체는 동시대 도덕이 삶의 생명력을 부정한다는 인식에서부터 출발하여 도덕 비판을 하고, 같은 맥락에서 비극 해석에서도 이러한 문제를 발견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로 대변되는 염세주의자들이 비극을 ‘윤리적’으로 해석했다는 점을 니체는 내세운다. 니체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신화 및 비극과 관련하여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윤리를 비판하면서 고대 그리스인들의 “신화와 비극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 보다 훨씬 더 현명하다.”15)고 주장한다. 같은 맥락에서 니체는 “예술을 통해서 인간의 동정과 도덕이 증가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유령이야기”라고 치부한다.16) 또한 니체는 그리스 비극에서의 ‘동정의 폭발’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리스인들은 아주 자주 과도한 동정때문에 괴로워했고 그래서 비극을 통해서 폭발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이러한 경향이 그리스인들에게 일어났다는 것이 얼마나 의심스러운지를 우리는 보게된다.”17) 이처럼 니체는 그리스 비극에서 공포와 동정에 근거한 격정의 폭발을 통한 카타르시스를 내세우는 데 대해서 반기를 들 뿐만 아니라, 이를 “병적 해방”이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비극이 인간의 윤리적인 측면을 증가시킨다는 생각 역시 단호히 거부한다. 이런 관점에서 니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니체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카타르시스에 대한 일종의 특별한 가치전도를 기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카타르시스가 공포와 동정으로부터의 정화에 근거하고 있다면, 이와 달리 니체에게 카타르시스는 한편으로 변용하는 도취와 다른 한편으로 환영(Vision)이 “여러 번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폭발들”18)을 의미하기 때문이다.19) 이러한 도취와 환영은 결국 ‘예술적 상태들(künstlerische Zustände)’로서의 비극을 생산한다.

    니체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는 힘의 감소, 즉 ‘파토스적 긴장 혹은 소질의 약화, 해체, 상실의 과정을 야기한다. 이러한 과정을 카타르시스와 동일시하는 과정이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나타나며, 따라서 이는 결국 삶에 위험하게 작용하게 된다.20) 왜냐하면 바로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파토스와 열정(Leidenschaft)의 추방을 강조하기 때문이며, 이를 위해서 그에게 비극은 단순한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그 반면에 니체는 과도하게 파토스적인 것을 미학적으로 변용시키면서 이른바 파토스의, “삶으로 유혹하는”21) 변화(Metamorphose)를 강조한다.22)

    니체는 비극의 카타르시스의 모든 도덕적 해석을 거부하고, 오히려 비극의 카타르시스를 “미학적 유희(ästhetisches Spiel)”로서 이해한다.23) 즉 비극의 “최고의 파토스적인 것”은 “미학적 유희”로서만 요약 기술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로써 니체는 비극 카타르시스의 병리적 내지 의학적 해석 역시 배척한다. 그럼으로써 이른바 ‘아리스토텔레스의 커다란 오해’를 지적한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삶을 우울하게 하는(deprimierend) 두 가지 격정, 즉 경악과 동정에서 비극의 격정들을 인식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24) 니체는 아리스토텔레스식의 해석은 비극이 오히려 삶에 위험한 예술이 되게끔 한다고 경고한다.25) 니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 예술에 대한 플라톤의 비난을 벗어나려고 시도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고 간주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두 가지 과도하게 쌓인 병적 격정들”을 “유용하게” 정화하기 위해서 비극의 무해성을 과시하고자 했지만,26) 그 역시 플라톤과 정반대의 방식으로 하지만 결국 동일한 논리에 사로잡히게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27) 왜냐하면 그는 소크라테스적 학문중심주의 내지 이론중심주의에 빠져서 비극에서의 파토스와 열정을 추방하고자 애썼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커다란 오해인 것이다.28)

    니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절대적 학문이자, 절대적 신비론으로 간주한다.29)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니체의 비판은 비극론의 차원을 넘어서서 철학 전반의 문제에까지 이르게 된다. 니체는 소크라테스 비판과 같은 맥락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비판하고 있으며, 그것은 결국 니체가 이른바 ‘배후세계론자들(Hinterweltler)’을 비판하는 것과 같은 궤적에 속한다. 배후세계론자들을 니체는 이른바 정신과 이성, 그리고 자아 자체에만 가치를 두고, 몸과 대지(Erde)를 무시하는 철학자들이라고 지칭한다.30) 그러니까 몸에 근거한 철학에서 출발하는 니체는 이성중심주의가 낳은 배후세계가 결국 ‘실체(Substanz)’개념과 일맥상통한다는 점을 간파하고 있다. 즉 실체 개념에서부터 출발하는 철학이 이른바 ‘행위’ 이면의 ‘행위자’를 설정하면서, 실존 세계 뒤의 또 다른 세계를 전제한다는 점을 니체는 비판한다.31)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니체의 아리스토텔레스 비판은 부동의 원동자라는 실체를 전제하는 데 대한 비판과도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부동의 원동자라는 실체는 생성(生成,Werden)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반면에 몸의 철학과 더불어서 니체에게 세계의 본질은 바로 ‘생성’ 자체에 있다. 즉 생성만이 유일한 세계의 본질이 된다.

    그리고 니체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비판은 바로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과 맥을 같이 한다 이런 맥락에서 니체는 몸과 전통적인 이성의 역전을 주도한다. 니체는 몸을 ‘큰 이성(grosse Vernunft)’이라고 간주하면서 이른바 전통적인 이성 개념을 ‘작은 이성(kleine Vernunft)’이면서 동시에 큰 이성, 즉 몸의 도구라고 말한다.32) 여기서 ‘창조하는 몸(der schaffende Leib)’의 의지(Wille)의 한손으로서 이른바 정신(Geist) 내지는 마음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니체는 강조한다.33) 니체는 도구이자 장난감으로서의 감각과 정신의 이면에 존재하는 자기(自己, das Selbst) 개념을 설정하면서 이 '자기'가 바로 사유와 감정을 지시하고 명령하면서 몸 속에 살고 있고, 결국 몸과 하나라는 점을 내세운다. 즉 자기는 바로 몸이 되는 것이다.34) 그리고 이러한 몸이라는 자기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현재 상태를 넘어서서 창조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위버멘쉬(Übermensch)’35)에까지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된다. 그 반면에 전통적인 이성중심주의적 사고는 니체가 말하는 ‘작은 이성’이 설정하는 자아(Ich)에 의하여 지배된다. 하지만 니체가 보기에 이러한 자아를 행위하는 것은 결국 큰 이성으로서의 몸이다. 다시 말해서 몸에 의해서 자아는 지배받고 조정당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니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에서는 ‘디오니소스적인 것(das Dionysische)’이 소멸한다는 점을 강조한다.36) 여기서는 특히 그리스 비극의 관객들에게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어떤 기능을 하는가라는 문제가 관건이 된다. 니체는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에서 코러스의 피상적인 사용을 문제시한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비판한다.37) 왜냐하면 니체는 코러스가 “열광하는 디오니소스적 군중의 재현”38)이라고 단언하면서 그리스 비극의 관객 각자가 자신을 코러스와 동일시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런 맥락에서 니체는 코러스가 스케네(Skene)의 디오니소스적 환영세계(Visionswelt)를 보는 유일한 자이며, 더 나아가 코러스와 일체감을 느끼는 디오니소스적 관객집단이야말로 디오니소스적 현상의 영원한 탄생모체라고 역설한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니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을 에우리피데스의 비극과 같은 맥락에서 비판하는 것이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은 무엇보다 비극합창단의 역할을 무시해 버렸다는 점을 니체는 중시한다.39)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개념에 대한 가치 전도와 더불어서 니체는 카타르시스가 가진 ‘미학적 유희(ästhetisches Spiel)’와 ‘미학적 사건’으로서의 의미를 높이 평가한다. 여기서는 음악의 파토스(Pathos)가 사티로스합창단에 강제로 들어가서 합창단의 디오니소스적 도취 경험을 가능하게 하며, 그와 더불어 예술적 힘의 강제적 폭발로 인하여 인간의 변신과 자기정체성의 상실이 야기된다. 그 결과 의식의 탈경계화 경험이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서 리미널리티(Liminality)의 경험이 이루어진다.40) 디오니소스적 음악의 열광적 권능에 사로잡힌 인간은 디오니소스 신(神)의 시종으로 변신한다. 그러므로 주신찬가(Dithyrambus)의 때에 카타르시스적 변신에 근거하여 디오니소스적 사티로스로의 변신이 이루어지며, 따라서 사티로스 합창단은 ‘무의식적 배우’로 변신할뿐만 아니라, 장면의 환영(Vision)을 보는 관객이기도 하다.41) 여기서 합창단은 청중에게 분위기를 자극하게 된다.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 비극의 청중은 오케스트라석의 주신찬가 합창단이 사티로스 합창단으로 변신했다고 상상하면서 합창단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가운데 스스로 변신하게 되기 때문이다.

       3.2. 니체의 비극론

    3.2.1. 아폴론적 및 디오니소스적 예술충동

    니체의 비극론에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은 바로 ‘의지의 본성(Willensnatur)’으로서의 예술충동이다. 니체는 두 가지 예술충동이 상호 대립적이면서 동시에 상호 자극적이라는 점을 통찰한다. 이 두 가지 예술충동이 곧 아폴론적 및 디오니소스적 예술충동이다. 그리고 니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을 비판하는 가운데 오히려 비극을 통한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경험을 강조한다. 『비극의 탄생』에서 드러난 니체의 비극론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아폴론적인 것(das Apollinische)과 디오니소스적인 것(das Dionysische)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그리스비극의 효과가 입증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니체는 먼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우주적 원충동(Urtrieb)’으로서 파악하고 있다. 그러니까 두 가지 예술충동을 우주적인 차원에서부터 고려하고 있으며, “예술창작이란 결국 이러한 원충동에 복종하면서, 그 기관이 되는 것”이다.42) 니체는 아폴론적인 것을 ‘꿈’을 통해서, 그리고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도취(Rausch)’를 통해서 유비(Analogie)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아폴론적인 예술충동은 ‘예언의 신’이자 ‘빛의 신’인 아폴론에서 유래하고 있으며, 디오니소적인 예술충동은 주신(酒神) 디오니소스에 근거한다.

    니체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개념을 통해서 두 예술충동이 예술 창작의 원형이라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아폴론적 충동은 '개별화원리(Prinzip der Individuation)‘에 입각해 있으며, 이는 “명료한 윤곽을 가진 현상”으로서 “가상의 모든 쾌감과 지혜”를 즐긴다.43) 개별화원리는 “강력한 망상적 기만과 쾌감에 찬 환영들을 통해서, 세계관의 끔찍한 심연과 가장 자극적인 고뇌 능력에 대한 승리자”가 된다.44) 그런데 이러한 아폴론적인 것의 유래는 바로 이처럼 세계와 인간 실존이 끔찍하고 고뇌에 가득 차 있다는 데 대한 체험적 인식에 있다. 이러한 실존의 고뇌를 극복하지 못하고는 삶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미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바로 올림포스 신들의 세계를 창조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올림포스 신들의 세계가 가진 몽환적이고 찬란한 가상(假象, Schein)에 힘입어 실존의 끔찍하고 경악스러운 것을 막아낼 수 있었다. 바로 여기에 아폴론적 예술충동의 근원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아폴론적 예술을 대표하는 예를 니체는 조형예술에서 확인하는데, 이 예술은 “현상의 영원성을 찬란하게 찬양하면서 실존의 고뇌를 극복”한다.45) 같은 맥락에서 아폴론적 예술충동이 생산하는 모든 조형(Bild)은 “보호하면서, 삶에 봉사하는 가면”46)이다. 다시 말해서 아폴론적 예술가는 삶을 찬미하는 가면을 생산해내는 예술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니체는 아폴론적인 것은 어떤 의미에서 자연에 내재하는 ‘고통’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거짓말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아폴론적인 가상의 아름다움은 자연의 특질로서의 고통을 가려버리고, 그 존재를 부정해 버리는 정도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런데 아폴론적인 것이 ‘아름다운 가상’에 기대어 가면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이미 지적했듯이 개별화원리에 철저히 입각해야 하며, 이 원리는 ‘개인의 한계고수’ 및 ‘절제’에서 나온 ‘자기인식’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운다. 즉 “네 자신을 알라”와 “지나치지 마라”는 요구를 무엇보다 덕목으로 삼는다.47) 그 반면에 디오니소스적 충동은 ‘도취’를 그 본질로 하며, 명료한 윤곽을 가진 현상을 부정하게 된다. 이 충동은 “현상의 개별적인 경계 긋기를 파괴하고 세계조화를 재생산”한다.48) 그러므로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자기과시 및 지나침”이라는 특징을 갖게 된다.49) 다른 한편으로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개별화원리에 입각한 인간이 존재의 본질적인 고통의 순간에 부딪치는 순간에 그 힘을 발휘한다. 바로 이 고통의 순간에 인간 내면에서 “환희에 찬 황홀경(wonnevolle Verzückung)”이 솟아오른다면, 이것이 바로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본질이 된다.50)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예술로서 대표적으로 음악을 꼽는다. 음악은 현상을 해체하는 반현상성을 본질로 하며, 비조형성(Unbildlichkeit)을 띠게 된다. 음악가는 망아(忘我)적 도취의 본성 상태를 모방하는 가운데 디오니소스적 원충동 자체를 표현한다.51) 따라서 아폴론적 예술의 조형성과 디오니소스적 예술의 비조형성을 비교해볼 때, 디오니소스적 예술은 결국 아폴론적 예술이 표현하는 조형성의 원인으로서 전제되며, 아폴론적 예술은 그 결과로서 나타나게 된다. 왜냐하면 디오니소스적 예술은 의지를 단순한 충동성 안에서 나타내는 반면에, 아폴론적 예술은 의지의 충동성을 실행하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52) 물론 여기서 음악은 단순한 현상적인 모방의 차원을 넘어서, 현상 앞에 있는 국면을 상징한다.53) 다시 말해서 음악은 아폴론적인 것이 가진 개별화원리를 부수고 사물들의 가장 내면적인 핵심으로 되돌아가면서 모든 현상을 넘어서서 영원한 생명을 표현하는 것이다.

    3.2.2. 비극에서의 두 요소의 상호작용과 궁극적인 효과

    아폴론적 및 디오니소스적 예술은 그렇다면 니체가 생각하는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어떠한 형식으로 표현되며, 서로 어떠한 상호작용을 일으키게 되는가? 이 질문이야말로 니체 비극론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이해하는 키워드가 될 것이다. 여기서는 음악의 디오니소스적인 예술과 조형(Bild)의 아폴론적인 예술이 서로 부딪치고 자극하면서 서로를 고양시키는 일이 이루어진다. 그리스 비극에서는 “디오니소스적 지혜”가 상징적으로 형상화될 뿐만 아니라, 합창단을 통하여 일상현실을 벗어나서 모든 사물들의 보편적인 본질이 개방되는 근본적인 경험이 가능해진다. 이처럼 “비극 합창단의 과정은 연극적 원현상(Urphänomen)”을 형성하며, 여기서 합창단은 “자기 스스로가 변한 것을 보는 것이며, 마치 실제로 다른 몸 및 다른 성격으로 들어간 듯 행동하는 것”이다.54) 즉 디오니소스적 엑스터시의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처럼 디오니소스적 열광자는 마술에 걸린 상황에서 자기 자신 안 그리고 모든 사물들 안에서 발견한 보편적 존재를 점점 더 ‘본성의 신(Naturgott)’인 디오니소스로 확인하게 된다. 그러니까 그러한 보편적 존재를 환각적인 상태에서 디오니소스 신의 현상으로 파악했던 것이다.55) 여기서 디오니소스적 열광자로 변신한 사티로스 합창단의 중요성이 대두한다. 합창단원들은 디오니소스적 사티로스로 변신하는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즉 사티로스 합창단은 장면의 환영에서 디오니소스 신을 본다. 이러한 환영은 디오니소스적 사티로스로 변신하는 낯선 경험이 ‘아폴론적 조형세계’에서 폭발(Entladung)되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디오니소스적 열광자로 변신된 합창단원이 “자기 밖에 있는 하나의 새로운 환영을 보는” 것이다.56) 이러한 아폴론적 환영의 조형세계는 각자에게 디오니소스 신(神)의 토막내어짐의 고뇌를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장면들에서 환각적으로 보게끔 만든다. 즉 폭발되는 아폴론적 환영의 기형적으로 끔찍한 상상적인 것이 바로 여기서는 엑스터시의 상태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환영을 바라보는 자는 디오니소스 신의 고뇌의 광경에 사로잡혀 함께 고뇌를 당하게 된다.57) 따라서 신의 고뇌와 같은 경험을 한다. 결국 그리스 비극의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이 가진 두 가지 예술적 권능이 폭발하는 것이 드러난다. 즉 디오니소스 신의 형상에는 상호 폭발을 자극하는 아폴론적 환영과 디오니소스적인 방종도취(Orgiasmus)의 공동 작업이 전제된다. 합창단의 음악은 디오니소스적인 파토스를 통해서 인간의 변신을 가능하게 하고, 이를 통해서 아폴론적인 내면적 조형성(Bildlichkeit)을 밖으로 끄집어냄으로써 투사된 장면적 환영이 가능해진다. 또한 이어서 이 환영, 즉 아폴론적 조형성은 다시금 디오니소스적인 음악적 파토스의 흥분과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공동 작업을 통해서 결국 상호 폭발의 과정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더 나아가 순수한 미학적 유희이자 사건으로서의 ‘비극적 카타르시스’의 토대가 형성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원비극(Urtrgödie)과 비극의 차이를 알 수 있다. 가장 오래된 시기에 나온 원비극의 상태에서 벗어난 비극은 실제로 디오니소스 신을 보여주려고 시도하였으며, 더불어 환영의 형상을 변용의 틀과 더불어 누구의 눈에나 보일 수 있도록 재현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럼으로써 좁은 의미에서의 ‘드라마’, 즉 연극이 시작된다. 주신찬가 합창단은 그러므로 이제 무대 위 비극 주인공이 볼품없이 가면 쓴 인간이 아니라, 말하자면 청중 자신의 황홀경에서 태어난 환영의 형상(Visionsgestalt)으로 보이게끔 청중의 분위기를 디오니소스적으로 고무하는 과제를 갖게 되었다.58)

    결국 디오니소스적인 엑스터시의 보편적 경험은 아폴론적인 객관화를 통해서 장면으로 실현될 수 있는 형상(Gestalt)이 된다. 즉 디오니소스 신이 겪는 고뇌의 아폴론적 환영을 객관화하여 장면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디오니소스 신은 실제 서술 가능한 형상들로 산산조각이 나게 된다.59) 그리고 비극에서는 ”디오니소스적 엑스터시와 아폴론적 공연사건“이 양극으로서 작용한다.60) 이러한 양극은 결국 이중운동을 통해서 상호간섭적이며 동시에 상호보완적인 효과를 낸다. 비극에서는 음악이라는 예술적 표현에 의해 비극의 신화가 탄생하는 가운데, 신화는 하나의 조형세계이자 비유가 되면서 관객에게 음악이 자기를 위한 최고의 표현 수단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즉 아폴론적 운동은 신화를 전면으로 내세우고, 음악은 뒤로 물러나게 하면서, 마치 음악이 “신화의 조형 세계를 살리기 위한 묘사 수단”에 불과한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나게 한다.61) 다시 말해서 아폴론적 운동은 신화로 하여금 음악이 자기를 위해서 복무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면서 모든 인물과 동작에 대한 최고도의 서사적 명료성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처럼 비극 주인공과 비극 신화는 아폴론적 형상의 착각과 음악이라는 디오니소스적 존재에 의해서만 보편적 사실에 대한 비유적 의미를 얻게 된다.62) 결국 여기서는 디오니소스적인 음악을 통하여 아폴론적인 개별적 세계 형상의 효과가 증대될 수 있다는 고상한 착각이 중요하다. 그 결과 주신찬가에 맞추어서 사티로스 합창단은 자유로운 방종적 도취의 감정에 몸을 맡기고, 춤을 추게 된다.

    신화는 하지만 음악의 힘을 통해서, 말과 조형만으로는 결코 달성할 수 없는 “강렬하고 확신적인 형이상학적 중요성”을 획득한다.63) 즉 음악의 디오니소스적 운동은 비극 공연의 더 본질적인 구성요소이며 아폴론적 조형 생산에 반대되면서도 동시에 언제나 새롭게 아폴론적 조형 생산의 출발점이 된다. 그러므로 디오니소스적 운동은 공연 사건의 연속성을 구성한다.64) 그 반면에 신화와 비극 주인공은 음악의 곁에서 주인공의 실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왜냐하면 비극은, 투쟁하는 주인공의 승리가 아니라 파멸을 통해서 또 다른 실존과 보다 높은 쾌감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비극 주인공은 자신의 파멸과 부정(否定)을 통해서, “사물들의 가장 내면적 심연이 그에게 분명히 들리도록 말하는 것처럼, 듣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65) 그 결과 비극 주인공의 파멸은 새로운 형이상학적 의미를 획득하게 되며, ‘실존의 더 높은 가능성’이 추구된다. 바로 여기서 니체 비극론이 가지는 고유한 의미가 드러난다. 즉 주인공의 파멸이 오히려 관객에게 더 높은 형이상학적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

    결국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운동과 아폴론적인 운동이 가지는 이러한 상호작용에 입각해서 주인공의 파멸에 입각한 비극이 가지는 궁극적인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극적 신화는 디오니소스적 지혜를 아폴론적 예술 수단에 의해서 형상화하는 것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비극적 신화는 현상의 세계를 극한으로까지 몰고 가고, 이곳에서 현상세계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며, 진실하고 유일한 현실의 품안으로 다시 도주하고자 한다.”66) 여기서 ‘진실하고 유일한 현실’이란 주인공의 파멸이라는 현상 세계의 이면에 존재하는 보다 높은 ‘삶에의 의지’와 연관된다. 바로 여기서 니체가 앞에서 말한 형이상학적 중요성이 부각되는 것이다. 즉 비극적인 것을 통해서 염세주의를 극복하고, “아무리 낯설고 어려운 문제들에 처하더라도 삶을 긍정하는 것; 삶의 최고의 실현유형들이 희생되더라도 삶의 무한함을 기뻐하며 삶에의 의지를 가지는 것”에서부터 바로 비극이 가진 형이상학적 의미와 중요성이 발휘된다.67) 결국 비극 주인공의 파멸을 통해서 추구된 실존의 더 높은 가능성은 바로 여기서 확실해진다. 따라서 이러한 니체의 철학적 메시지는 동시대 현대인의 삶에 내재한 허무주의를 단호하게 물리치는 힘을 갖게 된다. 다시 말해서 니체는 고대 그리스 비극이 주는 교훈을 통해서 자신의 동시대에 팽배한 허무주의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3.2.3. 비극의 모형들

    니체는 비극의 두 모형을 아이스킬로스적인 것과 에우리피데스적인 것으로 구분한다. 아이스킬로스적인 것은 니체가 강조하는 그리스 비극의 가장 원형적인 모습을 의미하며, 그 반면에 에우리피데스적인 것은 그가 소위 ‘미학적 소크라테스주의(Sokratismus)’와의 연관성 속에서 파악하는 변형된 형식의 비극을 말한다. 아이스킬로스적인 비극은 이미 위 단락에서 언급한 비극의 형식이며, 그에 반해서 니체는 그리스 비극이 바로 에우리피데스적인 형식으로 인하여 ‘자살’하고 말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소크라테스주의’라는 개념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해야한다. 니체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로부터 이 개념을 정제해내었으며, 그 근거에는 이 철학자의 이른바 ‘이론적 낙관주의’가 있다. 니체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지식의 변증법에 입각하여 존재의 가장 깊은 심연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에게서 니체는 본능이 가진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힘”이 결여된 대신에 과도하게 “논리적 천성”이 발달한 것을 확인하였으며, 따라서 이러한 결함을 니체는 “신화적 소질의 결함”이라고 단언한다.68) 그리고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은 동시대 작가가 바로 에우리피데스이다. 니체는 에우리피데스가 비극에 도입한 것은 “아폴론적 직관 대신에 냉정한 패러독스한 ‘사상’이며, 디오니소스적 황홀 대신에 불같은 ‘격정’”이라고 말한다.69) 니체는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에서 “필연적인 일에 가면을 씌워 우연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고상한 예술가의 재능”을 확인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에서는 프롤로그가 강조된다는 점을 지적한다.70) 이처럼 프롤로그를 강조한다는 것을 니체는 “합리주의적인 방법”이라고 간주하는데, 여기서는 작품의 줄거리와 등장인물에 대한 정보가 사전에 미리 주어짐으로써 결국 관객이 극의 줄거리 진행에서 느끼는 긴장이 배제되는 것이다. 또한 니체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형식에서 합창단의 배제를 심각한 문제로 규정한다. 에우리피데스는 전통적인 아이스킬로스적 비극에서 사용되던 합창단의 규모를 축소하였으며, 더 나아가 합창단을 아예 무대 위로 올려버리는 일을 자행했다.

    그 반면에 니체는 비극의 기원을 비극합창단에서 확인하면서, 비극은 근본적으로 합창이 전부라는 점을 강조한다. 초기 그리스 시대의 주신찬가에서 관객이 보기에 사티로스합창단은 신의 접근에 의해서 엑스터시 상태에 빠진 감격한 도취자로 보였을 뿐만 아니라, 신의 고뇌를 반복하면서 같이 괴로워하는 동지라는 점 역시 확인되었다. 그러므로 사티로스합창단이 관객에게 주는 효과는 실로 지대한 것이다. 관객들은 이 합창단을 통해서 디오니소스적인 관객이 되었으며, 스스로가 합창단원이라는 착각을 하게 된다. 따라서 예술가와 관객 사이에는 분리가 없으며, 모두가 다만 크고 숭고한 합창단이며, 오로지 춤추고 노래하는 사티로스합창단만이 존재한 것이다. 니체가 말하는 비극합창단으로서의 사티로스합창단은 자연의 잔인성을 통찰하는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삶에의 의지’를 주선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와는 달리, 니체는 에우리피테스적 비극에서는 결국 지식중심주의와 학문중심주의적인 사고의 단초를 발견하며, 그것의 근원을 바로 소크라테스에게서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주의는 결국 이성중심주의와 맥을 같이 한다. 여기서 니체는 한발 더 나아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형식을 통하여 마침내 자기 시대의 문제를 진단해낸다. 즉 소크라테스주의에 입각한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형식으로부터 추출해낸 문제를 바로 동시대 현대문화의 문제와 연관 짓는다. 이러한 관계망 안에서 니체는 바로 현대문화에 내재한 소크라테스주의의 문제를 통찰해내는 것이다. 즉 에우리피데스적 비극 형식이 근거한 지식중심주의와 학문중심주의가 니체의 동시대인들의 문화에서도 발견된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15)KSA 8, 6[25], 107f.  16)같은 책, 21[75], 377면.  17)KSA 9, 4[110], 128면.  18)Sokrates und die griechische Tragödie, KSA 1, 610면.  19)여기에 대해서 Iris Därmann, “Rausch als ‘ästhetischer Zustand’: Nietzsches Deutung der Aristotelischen Katharsis und ihre Platonisch-Kantische Umdeutung durch Heidegger”, Nietzsche-Studien, 34(2005), 124-162면 중 127면 참조.  20)KSA 13, 410면, 15[10] 참조. Iris Därmann, 같은 논문, 134면 참조.  21)KSA 7, 7[125], 183면.  22)KSA 13, 14[127], 309면 참조.  23)KSA 1, 142면.  24)Iris Därmann, 133면 참조.  25)KSA 13, 15[10], 410면 참조.  26)같은 책, 410면  27)Iris Därmann, 앞의 논문, 134면 참조.  28)KSA 6, 160면; Iris Därmann, 앞의 논문, 134면, 각주 54 참조.  29)KSA 7, 7[72], 154면.  30)Also sprach Zarathustra,, Stuttgart 1987, 26f.  31)여기에 대해서 KSA 5, 279면 참조.  32)Also sprach Zarathustra, 27면.  33)같은 책, 28면.  34)위의 책, 27f.  35)‘위버멘쉬’ 개념을 이전에는 ‘초인(超人)’이라고 번역했지만, 그럴 경우 개념상의 혼란이 존재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원어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오히려 개념적 오해를 피할 수 있다.  36)KSA 7, 8[48], 241면.  37)같은 책, 9[9], 274면; 같은 책, 8[3], 220면 참조.  38)위의 책, 273면, 9[9].  39)Detlev Baur 역시 에우리피데스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현상을 정확히 지적한다. 여기에 대해서 Detlev Baur, Der Chor im Theater des 20. Jahrhunderts. Typologie des theatralen Mittels Chor, Tübingen 1999, 19면 참조.  40)연극에서의 리밀널리티 경험과 관련해서는 Erika Fischer-Lichte, Ästhetik des Performativn, Frankfurt a. M. 2004, 310-311면 참조.  41)여기에 대해서 Iris Därmann, 앞의 논문, 135면 참조.  42)Bernhard Nessler, Die beiden Theatermodelle in Nietzsches “Geburt der Tragödie”, Meisenheim, 1971, 8면.  43)B. Nessler, 앞의 책, 11면.  44)KSA 1, 37면.  45)KSA 1, 108면.  46)B. Nessler, 앞의 책, 13면.  47)KSA 1, 40면.  48)같은 책, 40면.  49)위의 책, 40면.  50)위의 책, 28면.  51)B. Nessler, 앞의 책, 15면 참조.  52)같은 책, 14면 참조.  53)KSA 1, 50면 참조.  54)KSA 1, 61면.  55)B. Nessler, 앞의 책, 20면 참조.  56)KSA 1, 62면.  57)같은 책, 58면; 63면 참조.  58)위의 책, 63면 참조; Iris Därmann 앞의 논문, 135면 참조.  59)KSA 1, 72면 참조. B. Nessler, 앞의 책, 20면 참조.  60)B. Nessler, 앞의 책, 21면.  61)KSA 1, 134면.  62)같은 책, 107f.면 참조.  63)위의 책, 134면  64)B. Nessler, 앞의 책, 23면 참조.  65)KSA 1, 135면.  66)같은 책, 141면.  67)Götzen-Dämmerung, KSA 6, 160면.  68)KSA 1, 90f.  69)위의 책, 84면.  70)위의 책, 85면.

    4. 결론

    니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체’ 개념에서 출발하여 부동의 원동자라는 개념을 내세우며 궁극적으로 최고선에 해당하는 신 존재를 통해서 비극을 해석하는 문제에 대하여 비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카타르시스는 관객이, 주인공이라는 영웅의 희생으로 인하여 얻을 수 있는 정서적 정화이다. 즉 주인공이 하마르티아에 의해서 파멸에 이르게 되는 것에 대해서 공포와 동정을 느끼게 되는 상황은, 이미 그러한 하마르티아를 최고선의 존재인 신의 관점에서부터 파악하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주인공의 파멸의 원인인 하마르티아가 그러한 파멸에까지 이를 만큼 중대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의 답 역시 바로 최고선의 존재인 신의 입장에서만 찾을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은 최고선인 신의 질서를 전제로 하고 그 정당성 위에서만 비극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 해석에 윤리적인 관점이 개입되었다는 근거를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이 부분에 대하여 니체는 비판을 가한다. 니체는 비극 주인공에 대한 공포와 동정을 통해서 나온 위험한 격정을 폭발시키면서 거기서부터 카타르시스, 즉 정화하는 것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반대한다. 니체는 아리스토텔레스뿐만 아니라 ‘염세주의자들’이 비극을 ‘염세주의적’으로 오해했으며, 그 결과 삶의 근원적인 생명력을 부정했다고 역설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로 대변되는 염세주의자들이 비극을 ‘윤리적’으로 해석했다는 점을 니체는 내세운다. 여기서 삶의 근원적인 생명력의 부정은 궁극적으로 니체의 동시대 도덕 비판과 맥을 같이 한다. 니체는 동시대도덕이 선악이분법에 사로잡힘으로써 삶의 근원적인 생명력을 부정한다는 인식에서부터 출발하여 도덕 비판을 하고, 같은 맥락에서 비극 해석에서도 이러한 문제를 발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에서 나오는 윤리적 해석대신에 니체는 비극을 통하여 형이상학적으로 삶에의 의지를 고양시키는 효과가 발생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바로 이 부분이 아리스토텔레스와 다른 니체 비극론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니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개념에 대한 가치 전도를 이루어낸다. 니체는 오히려 카타르시스가 가진 ‘미학적 유희(ästhetisches Spiel)’와 ‘미학적 사건’으로서의 의미를 높이 평가한다. 여기서는 음악의 파토스(Pathos)가 사티로스합창단에 강제로 들어가서 합창단의 디오니소스적 도취 경험을 가능하게 하며, 그와 더불어 예술적 힘의 강제적 폭발로 인하여 인간의 변신과 자기정체성의 상실이 야기된다. 그 결과 의식의 탈경계화 경험을 통한 리미널리티(Liminality) 경험이 이루어진다.

    더 나아가 니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산미학적 측면대신에 수용미학적 측면을 강조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텍스트 중심적인 비극 해석에 그친 부분과는 달리 오히려 비극에서의 춤 표정술 제스추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총체예술로서의 비극의 중요성을 제기한다.

    니체는 동시대의 지식중심주의 및 학문중심주의를 ‘소크라테스주의’라는 개념을 통해서 비판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른바 ‘배후세계론자들’을 지적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비판한다. 즉 이러한 소크라테스주의와 함께 아리스토텔레스를 배후세계론자들이 내세우는 이성중심주의적 측면에 대한 비판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그는 오히려 이성중심주의를 넘어서 몸 중심의 철학을 전개시킨다. 그리고 니체의 비극론은 바로 이런 관점과 연관된다.

    더 나아가 니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에서는 ‘디오니소스적인 것(das Dionysische)’이 소멸한다는 점을 내세운다. 왜냐하면 니체는 코러스가 열광하는 디오니소스적 군중의 재현이라고 단언하면서 그리스 비극의 관객 각자가 자신을 코러스와 동일시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니체는 코러스와 일체감을 느끼는 디오니소스적 관객집단이야말로 디오니소스적 현상의 영원한 탄생모체라고 역설하며, 따라서 니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을 에우리피데스의 비극과 같은 맥락에서 비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은 무엇보다 비극합창단의 역할을 무시해 버렸기 때문이다.

    『비극의 탄생』에서 드러난 니체의 비극론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우주적 원충동으로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파악하며 이 두 가지 예술적 권능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그리스 비극의 효과가 입증된다는 점이다. 결국 그리스 비극에서는 두 가지 예술적 권능이 폭발한다. 즉 디오니소스 신의 형상에는 아폴론적 환영과 디오니소스적인 방종도취의 공동 작업이 전제된다. 합창단의 음악은 디오니소스적인 파토스를 통해서 인간의 변신을 가능하게 하고, 이를 통해서 아폴론적인 내면적 조형성을 밖으로 끄집어냄으로써 투사된 장면적 환영이 가능해진다. 또한 이어서 이 환영, 즉 아폴론적 조형성은 다시금 디오니소스적인 음악적 파토스의 흥분과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공동 작업을 통해서 결국 상호 폭발의 과정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더 나아가 순수한 미학적 유희이자 사건으로서의 ‘비극적 카타르시스’의 토대가 형성된다. 그리고 아폴론적 운동을 통해서 비극의 신화는 음악이 자기를 위해서 복무하고 있다는 착각을 갖게 되며 모든 인물과 동작에 대한 최고도의 서사적 명료성이 가능해진다. 이처럼 비극 주인공과 비극의 신화는 아폴론적 형상의 착각과 음악이라는 디오니소스적 존재에 의해서만 보편적 사실에 대한 비유적 의미를 얻게 된다. 결국 여기서는 디오니소스적인 음악을 통하여 아폴론적인 개별적 세계 형상의 효과가 증대될 수 있다는 고상한 착각이 중요하며, 그 결과 주신찬가에 맞추어서 사티로스 합창단은 자유로운 방종적 도취의 감정에 몸을 맡기고, 춤을 추게 된다.

    따라서 사티로스합창단이 관객에게 주는 효과는 실로 엄청나다. 관객들은 이 합창단을 통해서 디오니소스적인 관객이 되며, 스스로가 합창단원이라는 착각을 하게 되고, 그 결과 예술가와 관객 사이에는 분리가 없으며, 모두가 다만 크고 숭고한 합창단이며, 오로지 춤추고 노래하는 사티로스합창단만이 존재한다. 결국 니체가 말하는 비극합창단으로서의 사티로스합창단은 자연의 잔인성을 통찰하는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삶에의 의지’를 주선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바로 여기서 니체가 강조하는 삶에의 의지 고양을 위한 비극의 의미가 대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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