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nge of the Flesh: The Return of Sexual and Racial Otherness in Faulkner’s Absalom, Absalom!

‘육체의 복수’―포크너의『압살롬, 압살롬!』에 나타난 성적, 인종적 타자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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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This paper aims to revisit William Faulkner’s Absalom, Absalom! by focusing on the corporeal body and its role in dismantling the Southern ideology of white patriarchy. The latter, which is represented by Thomas Sutpen and his attempt to establish a white male dynasty, is a symbolic space in which the corporeal body turns into a symbolic one through the process of inscribing social ideologies on it. However, this symbolic space is also a contending site between the two bodies. The symbolic body of Sutpen cannot entirely erase its corporeal traces, and therefore the corporeal body, which is buried but nonetheless existent, threatens to undermine rules and premises of the symbolic order. Given that, this paper approaches Faulkner’s critique of the Southern white patriarchal ideology from the tension that the corporeal body and the symbolic body create. The ‘flesh’ roughly corresponds to racial and sexual otherness, namely black flesh and the homoerotic desire of male body. Although they-as the matter of race and that of gender - function in different levels of signification, they still share a common purpose in revealing the logical paradox within Sutpen’s symbolic order. The idea of pure whiteness that Sutpen subscribes to is a concept that prerequisites the existence of blackness. Likewise, his idea of male homosociality based upon patriarchal legacy stands precariously on the verge of disintegrating into homoetoricism. As internal otherness that Sutpen’s symbolic order cannot fully incorporate, the corporeal body functions to indicate the limitation of Sutpen’s Design and its body-signification process.


  • KEYWORD

    William Faulkner , One-Drop Rule , Whiteness as Negativity , Homosociality , Homoeroticism

  • I. 들어가는 말

    미셸 드 쎄르토(Michel de Certeau)에 따르면, 사회규율에 의해 규정된 사회화된 몸(body) 아래에는 일차적이고도 즉물적인 육체성(flesh)이 잔존하며, 후자는 전자의 작동방식에 의해 완전히 포섭될 수 없는 이질성을 담보한다. “이 담론화된 이미지[사회화된 몸]는 미지의 ‘실재,’ 즉 ‘육체’를 환기시킬 수 밖에 없다. [전자라는] 허구(fiction)와 육체를 상징하는 [후자의] 미지의 영역간의 관계에서 육체는 사회적 주체의 형성에 대한 다양하고도 예측 불가능한 저항을 야기한다. 사회적 몸과 육체가 맺는 관계는 한편으로 허구의 변화를 가져오며 . . . 다른 한편으로는 육체성의 차이(corporeal difference)가 외치는 불분명하고도 담론화되지 않은 고통을 가시화한다” (Grosz 재인용, 118-19). 드 쎄르토의 주장은 사회적 의미를 몸 위에 새김으로써 이 몸을 규정 가능한 대상으로 통제하려는 시도가 육체성에 의해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그가 말하는 “육체성의 차이”는 사회적 가치를 부여받은 몸의 영역으로 완전히 편입될 수 없는 육체성의 존재를 지시(指示)하는 기제로, 담론에 의해 포섭되거나 길들여지지 않는 “예측 불가능한” 존재로써 사회화된 몸의 통일성을 끊임없이 위협한다. 드 쎄르토가 그려내는 육체성과 담론화된 몸은 흥미롭고도 역설적인 관계에 놓여있다. “담론화된 이미지는 . . . 육체를 환기 시킬 수밖에 없다”는 그의 지적처럼, 몸의 담론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은 역설적으로 육체성이라는 이질성이 존재함을 드러내는 과정이며, 이 과정을 통해 소환된 육체성은 사회적 주체가 가지는 허구적(fictional) 본질을 드러내는 역할을 담당한다.

    사회적 담론이 새겨진 몸이 그 형성과정에서 육체적 이질성을 환기시킴으로써 오히려 스스로의 불안정성을 드러낸다는 관점은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의『압살롬, 압살롬!』(Absalom, Absalom! 1936)을 이해함에 있어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백인의 순수혈통과 가부장제간의 결합을 기반으로 한 토마스 섯펜(Thomas Sutpen)의 “위대한 설계”는 이성애적 백인남성의 몸에 부여된 가치를 통해 당시 남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와 합일된 상징적 몸을 지향한다. 그러나 섯펜의 질서가 지향하는 이른바 “아버지의 명령과 금지에 비례해 육체(flesh)로부터 멀어지는 몸” (Absalom 237)은 안정성을 보장받은 몸이 아니다. 오히려, 이데올로기에 의해 상징화된 이 몸은 섯펜의 설계를 와해시키는 내부적 갈등이 구체화되는 장소이다. 섯펜의 설계를 위협하는 요소는 다름 아닌 육체라는 “즉물적인 상태의 부정확한 재현(misrepresentation)이었으며, 이로 인해 결국 그의 설계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은 그도 모르는 사이에 좌절되고 무화되었다” (211). 여기서 우리는 ”부정확한 재현“이라는 포크너의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위대한 설계를 체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시되는 이성애적 백인남성의 몸은 그것의 형성과정에서 억압된 육체성을 배제한 ”부정확한 재현“일 수밖에 없으며, 이 불일치가 환기시키는 육체성은 섯펜이 미처 계산하지 못한 방식으로 그의 설계를 무화한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첫째, 상징화된 이성애적 백인남성의 몸과 괴리를 이루는 육체성은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의 것인가? 둘째, 이 육체성은 어떤 방식을 통해 섯펜이 대변하는 상징화된 몸을 위협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으로 이 글은 섯펜의 아들들이 보여주는 흑인성과 동성애적 욕망에 주목한다. 섯펜의 혼혈아들 찰스 본(Charles Bon)이 상징하는 흑인성, 그리고 섯펜의 백인자손인 헨리(Henry)와 퀜틴(Quentin)이 드러내는 동성애는 섯펜의 상징질서가 완전히 포섭하거나 규율할 수 없는 육체의 즉물성 혹은 욕구에 기반하며, 이러한 육체성은 공통적으로 섯펜의 상징화된 몸이 가지는 허구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흑인성과 동성애는 섯펜의 상징질서가 지시하는 이성애적 백인의 몸 외부로부터 이를 위협하는 종류의 독립적 범주가 아니다. 『압살롬, 압살롬!』이 그려내는 흑인성은 시작점부터 이미 섯펜의 설계를 떠받치고 있는 내부적 요소이며, 그 결과 누구보다도 순수한 백인성을 상징해야 할 섯펜의 몸을 흑인이라는 타자와의 육체적 동일성으로 끊임없이 탈구(dislocate)시킨다. 마찬가지로, 두 아들이 드러내는 동성애적 욕망 역시 섯펜의 가부장적인 자기동일성(homosociality)을 실천하는 과정 그 자체에서 발생하는 종류의 것으로, 이 남성간의 육체적 합일은 역설적으로 그 시발점인 섯펜의 상징적 남성동일성을 교란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압살롬, 압살롬!』비평사에서 흑인성과 동성애 문제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혼종(miscegenation)이라는 당시 미국사회의 지배적 문제의식이 작품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는 에릭 선퀴스트(Eric J. Sundquist)의 역사주의적 접근, 흑인성이라는 숨겨진 인종적 요소가 작품의 가장 큰 핵심을 구성한다는 제임스 스니드(James A. Snead)의 비평, 섯펜이라는 상징적 백인 가부장에 대한 실재의 복귀로 찰스 본을 이해하는 이명호의 정신분석학적 논점, 기존비평이 적극적으로 다루지 않은 퀜틴의 동성애적 요소를 자세히 분석한 크리스토퍼 피터슨 (Christopher Peterson)의 최근연구 등은『압살롬, 압살롬!』이 그려내는 인종과 성의 문제를 참신하고도 정확하게 지적한다. 그러나 기존비평들 대다수는 인종과 성을 분리시켜 설명할 뿐, 작품 내에서 인종과 성이 필연적으로 교차하는 지점을 정확히 짚어내지 못한다. 또한, 작품에 나타난 흑인성이나 동성애적 욕망을 이성애적 백인성에 대한 외적 저항으로 단순화하는 경향 역시 지배적이며, 이는 후자의 내적 구조 자체가 가지는 모순을 간과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에 이 글은 가부장적 백인 이데올로기가 가지는 내적 한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성과 인종간의 교차점을 규명하려 시도한다. 이 글의 주된 목적은 섯펜의 이데올로기가 성과 인종의 결합체로서 이미 그 안에 흑인성과 동성애적 욕망이라는 타자성의 발현 가능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며, 따라서 그 이데올로기의 와해는 성과 인종이라는 양방향을 통해서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음을 논할 것이다.

    II. 백인성의 순수 이데올로기와 흑인 육체성의 반란

    혼종의 문제에 있어『압살롬, 압살롬!』은 그 이전의 포크너 작품들과는 확연히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팔월의 빛』(Light in August 1932)에 등장하는 조우 크리스마스(Joe Christmas)처럼 이전의 작품들이 혼종의 결과물에 주목했다면, 『압살롬, 압살롬!』을 필두로『내려가라 모세야』(Go Down, Moses 1942)로 이어지는 후기 작품들에서는 혼종 이데올로기를 떠받치는 백인성의 순수에 대한 비판으로 그 초점이 상당부분 옮겨간다.1 백인의 순수성에 대한 포크너의 관점은『압살롬, 압살롬!』의 마지막 장면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퀜틴의 룸메이트인 슈리브에 따르면, 섯펜의 위대한 설계가 결국 흑인에다 백치이기까지 한 짐 본드(Jim Bond)로 귀결되는 상황은 단순히 섯펜의 개인적 비극을 넘어 후대의 모든 백인의 미래를 암시한다.

    “너와 연계”되었다는 슈리브의 자기규정은 섯펜가문의 역사에 대한 기나긴 담론을 통해 그 역시 미국남부의 역사 속으로 호출된 상황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연계성을 바탕으로, 슈리브는 남부의 상징적 자손인 퀜틴은 물론 캐나다인으로서 미국의 인종질서 바깥에 위치한 자신 역시 언젠가는 흑인의 피와 하나가 될 것이라 예견한다. 이 인용문에서 특히 중요한 부분은 슈리브가 사용하는 시제이다. “될 것”이라는 미래형을 통해 백인/흑인간의 혼종이 남북전쟁의 패배 이후 남부의 거부할 수 없는 미래임을 암시한다면, “이미 태어난”이라는 현재완료형은 백인성이 과거 어느 시점에 흑인성과 결합해 이미 혼종성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제의 사용이 야기하는 효과는 분명해 보인다. 미래의 혼종행위로 인해 백인성의 순수한 기원을 ‘잃게’될 것이라는 재건시대 특유의 담론 아래에는 그 순수한 기원 자체가 이미 흑인성이라는 이질성을 포함한 혼합물이라는 작가의 사고가 자리한다. 따라서 피터슨이 정확히 지적하듯, 작품에 나타난 시제의 문제는 인종이라는 개념이 “이미 백인의 현재/현 존재(presence)를 분열시키는”종류의 것임을 암시한다(243).

    흑인이라는 타자가 이미 백인자아의 일부로 자리하고 있다는 포크너의 관점은 남북전쟁 이후 미국의 인종질서 이데올로기가 가지는 모순적 작동방식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 모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시의 인종질서가 어떤 식으로 백인성의 기원적 순수를 확보하려 시도했는가에 대한 설명이 요구된다. 재건시대 미국의 인종질서를 떠받치는 이론적 핵심이 백인성의 순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 방울의 법칙(onedrop rule), 백인여성의 성적욕망에 대한 규제, 플레시 대 퍼거슨(Plessy vs. Ferguson)을 필두로 한 짐 크로우 법(Jim Crow)은 공통적으로 흑인과 백인간의 본질적 배타성을 기반으로 하며, 이 배타성은 백인성이 순수한 기원을 가진 범주라는 믿음에서 기인한다. F. 제임스 데이비스(F. James Davis)가 지적하듯, 재건시대 미국사회가 당면한 가장 큰 두려움은 백인의 몸을 침입하는 보이지 않는 흑인성에 대한 공포였다. 보이지 않는 흑인성이 야기하는 문제는 단순한 혼종의 불안 이상의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흑인성은 흑인의 피라는 규제의 표식이 인종식별에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두려움이며, 더 중요하게는 순수 백인혈통을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는 공포를 의미한다. 보이지 않는 흑인성이 이데올로기(순수의 육체)와 현실(오염의 육체)간의 괴리를 지시한다면, 한방울의 법칙은 백인성의 순수라는 개념을 재포섭함으로써 이 둘 간의 봉합을 시도하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한 방울의 법칙은 한편으로 백인육체의 오염에 대한 편집증적 불안을 드러내지만, 다른 한편으로 오염의 가능성은 역설적으로 백인성의 순수를 증명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오염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우선 순수한 주체의 선행이 요구되며, 따라서 한 방울의 법칙은 백인성을 순수한 (그러므로 한 방울의 피에 의해서도 오염 가능한) 대상으로 상정함으로써 순수 백인혈통이 선험적으로 존재함을 재확인한다.

    흥미로운 점은, 타자의 배제를 통해 순수 백인자아를 확립하는 논리의 이면에는 타자의 존재에 대한 절대적 필요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한 방울의 법칙이 제시하는 백인성의 본질이 오직 부정성(negativity)을 통해서만 구체화 된다는 점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순수 백인성이 오염의 부재로 치환되는 논리속에서, 백인성의 순수는 그 자체가 가지는 긍정적 정의 대신 결여와 배제의 상태, 즉 ‘A가 아닌 것(non-A)’의 형식을 통해서만 가시화된다. 바꿔 말하자면, 한 방울의 법칙이 제시하는 백인성은 본질적 인종성(백인 특유의 생물학적 특징)이라기보다는, 흑인과의 차이를 통해 그 인종적 의미가 구축되는 상호관계적 인종성에 가깝다. 부정성으로 존재하는 백인성은 한 방울의 법칙이 가지는 표면적 가치와 그것이 작동하는 내적 구조 사이의 긴장이라는 모순을 야기한다. 표면적으로 볼 때 흑인은 한 방울의 법칙을 통해 백인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그 결과 순수 백인성은 흑인이라는 타자성의 부재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된다. 그러나 흑인성이 백인성의 존립을 부정적으로 담보하는 내적 구조 속에서, 타자성은 백인자아의 주체형성을 가능하게 만드는 절대적 필요조건으로 자리매김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백인성의 순수가 가지는 이데올로기적 허구성은 보다 분명해진다. 백인성의 순수는 흑인과의 상대성을 전제로 구축되는 개념이지만, 이 상대적 가치를 기원적 순수라는 긍정적 가치로 전이하고 전자의 흔적을 지움으로써 선험적 당위성을 확보한다. 그러나 동시에, 백인성의 존재 여부를 담보한다는 의미에서 흑인성은 이 허구성의 완결을 지연시키는 요소로 작용한다. 『압살롬, 압살롬!』이 제시하는 백인성의 문제가 정확히 이 지점에 위치한다. 이작품이 그려내는 순수한 백인성은 외부의 흑인성에 의해 패배하는 종류의 것이 절대 아니다. 자신이 아프리카 왕의 허벅지로부터 “기원했다”(have sprung)라는 슈리브의 적절한 표현처럼, 흑인이 백인주체의 존재를 성립시키는 근원적 시발점이라는 의미에서 흑인성은 이미 백인주체의 일부분으로 존재한다. 백인의 일부로서의 흑인성은 비록 기원적 순수를 위해 억압되었지만, 그럼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순수한 백인성의 존립을 끊임없이 위협한다.

    섯펜의 설계가 실패하는 근본적 이유가 바로 여기에 놓여있다. 그는 백인성의 순수라는 이데올로기 속으로 호출되어 이를 수행하려 시도하나, 이 시도는 역설적으로 자아 내부에 잔존하는 지워버릴 수 없는 흑인성의 존재를 드러낸다.

    “원래 설계 계획[에서] 내가 스스로 야기한 부정”이라는 섯펜의 고백이 보여주듯, 흑인성은 단순히 외부에 존재하는 위협을 넘어 설계의 작동과정 자체에서 발생한 종류의 것으로 묘사된다. 이는 섯펜의 설계의 시발점이 되는 아이티 장면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아이티는 식민주의에 기반한 경제적 부의 창출과 섯펜 가문의 혈통 보존을 위한 장자의 생산이라는, 이른바 섯펜의 설계를 지탱하는 두 개의 수레바퀴가 작동하기 시작하는 장소이다. 그러나 이 두 축이 공통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순수 백인성을 지향하는 섯펜의 설계가 지워버릴 수 없는 흑인성의 존재이다. 섯펜에게 경제적 이윤을 선사하는 아이티의 대지에는 “땅속으로 스며들었지만 여전히 복수를 외치는 오래되고 잠들지 않는 흑인의 피”가 있으며, 따라서 섯펜이 획득한 “달러 위의 윤기는 금색이 아닌 피의 색”으로 낙인찍혀 있다(201-02). 마찬가지로, 백인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선택한 율레일리어 본(Eulalia Bon)과의 결혼은 “그의 노동과 야망이 쟁취한 왕좌에 대한 잠재적 위협”인 찰스 본의 탄생으로 이어진다(81).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섯펜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검다”라는 스니드의 지적(133)은 섯펜이 직면한 문제의 핵심을 건드린다. 섯펜의 설계는 시작점부터 설계 안으로 포섭된 흑인성을 기반으로 구축된 것이며, 따라서 섯펜과 그의 설계는 그 자체로 이미 검을 수밖에 없다. 백인성의 순수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흑인성의 전제가 요구되는 것과 같은 논리로, 섯펜이 상징하는 백인성의 순수는 “설계가 야기한 부정”이라는 내부적 흑인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흑인성이 처음부터 이미 섯펜의 설계의 일부분으로 자리매김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섯펜에 대한 상당수의 묘사가 흑인과의 동질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은 놀랍지 않다. 섯펜의 헌드레드(Sutpen’s Hundred) 농장을 건설하는 흑인노예들과 섯펜은 “단지 눈과 수염으로만 구별이 가능할”(28) 정도로 동일하며, 이들의 몸은“마치 같은 색의 피부를 가질 뿐 아니라 같은 동물의 털로 덮인것 같은”(20) 유사성을 드러낸다. 농장건설이 완료된 후 농장에 거주하는 흑인하인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섯펜의 얼굴은 “이빨을 빼고는 정확하게 그[흑인 마부]와 일치하는 얼굴”(16)이며, 하인이자 섯펜의 혼혈 딸인 클라이티(Clytie) 역시 “커피색의 섯펜 얼굴”(109)을 하고 있다. 중요한 점은, 이들 모두가 섯펜의 설계를 체화하는 섯펜의 저택을 건설하고 유지하는 흑인들이라는 사실이다. 이들과 섯펜간의 부인할 수 없는 동일성을 통해, 섯펜의 저택은 순수 백인성이라는 설계의 성공을 상징하는 대신 “보이지 않으나 공기를 누르고 응축시키는”(198) 흑인성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장소로 탈바꿈한다.

    흥미롭게도, 백인의 순수 이데올로기와 이를 위협하는 흑인성간의 적대적 관계는 인종담론에 의해 상징화된 백인의 몸과 이를 전복하려는 육체성간의 대결 구도로 구체화된다. 백인의 순수를 대변하는 섯펜은 그 육체성을 철저히 지움으로써 상징화된 몸이다. 이름없는 산골소년에서 백인 가부장으로 변모하려는 그의 노력은 “뼈와 살이 할 수 있는 혹은 해야 하는 역할을 넘어선 것(그렇다, 그것은 [육체성이] 응당 해야 하는 역할을 넘어선 것이다. 육체에게 요구되는 것 이상을 육체가 상징할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은 끔찍한 일일 것이다)”으로 묘사된다(205 필자의 강조). “육체에게 요구되는 것”이 “뼈와 살”로 된 육체의 본래적 특징이라면, 백인성의 순수를 체화하려는 시도를 통해 섯펜은 육체성을 벗어나 “육체가 상징”하는 영역으로 이동한다.2 그러나, 상징으로 존재하는 그의 몸은 동시에 흑인타자와의 육체적 동일성을 가진 몸이기도 하다. 앞서 흑인노예들과의 유사성에서 보여지듯, 흑인타자와 섯펜의 공통점은 단순히 피부색이나 얼굴과 같은 육체적 기표뿐 아니라 “같은 털을 지닌” 동물적 육체성에 기반하며, 이러한 동일성은 섯펜의 몸이 백인의 순수로 호출되기 이전의 육체를 상기시킨다.

    상징화가 지시하는 순수한 자아의 영역이 타자와의 육체적 동질성으로 인해 끊임없이 교란된다는 사실은 섯펜과 찰스 본의 관계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찰스 본은 섯펜이 금기와 언어적 규율을 통해 배척하려는 흑인아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가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뜨겁게 소통하는 육체”(256)를 통해 섯펜과의 육체적 친연성을 끊임없이 드러내는 존재이다.3 실제로 이 둘 사이의 승패 여부는 찰스 본의 육체성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규율하는가에 전적으로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찰스 본의 몸은 한 방울의 법칙에 의해 흑인으로 규정되어야 하는 몸이다. “우리 천여 명의 백인들은 . . . 한 몸의 1/8의 특정 피가 나머지 7/8의 다른 피를 압도한다고 규정한 법까지 만들었다”(91)라는 그의 비판이 보여주듯, 그의 몸은 인종담론에 의해 식별되고 가치가 부여된 육체의 특정 부분이 몸 전체를 대변하는 정체성으로 호출된 몸이다. 그 결과, 섯펜의 백인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섯펜의 헌드레드에 처음 발을 들인 찰스 본은 혼종이라는 육체성을 비워낸 상징으로만 존재한다. “[찰스 본의] 얼굴은 심지어 그 밑에 머리뼈가 있을 필요도 없었다. 거의 무명인 그 얼굴은 단지 누군가의 욕망을 담는 어렴풋한 살과 피의 암시로만 존재하면 되었다”(118). 그러나 백인의 “욕망을 담는” 그의 고정된 정체성 아래에는 이 욕망의 통일성을 교란하는 혼종의 육체가 자리하며, 이 혼종의 육체는 담론화되지 않은 “살덩어리”로서 언제든 담론을 해체할 준비가 되어있다.

    섯펜의 규율이 대변하는 일련의 원칙들(명예, 자긍심, 의지, 인내, 패배, 승리)은 이 살덩어리의 존재를 지우거나 규제할 수 없으며, 오히려 전자가 무의미해질 때에도 후자는 살아남을 것이다. 찰스 본이 언급하는 이른바 ‘살덩어리의 복수’는 섯펜의 저택 이층 방에 놓인 그의 시체를 통해 완성된다. 상징적 몸으로 고착된 흑인도 아니고 섯펜의 딸 쥬디스(Judith)와 헨리가 믿었던 것처럼 순수 백인도 아닌, 그저 썩어가는 육체로 찰스 본은 섯펜의 저택을 ‘오염’시킨다. 섯펜이 백인자아로부터 그토록 배제하고자 했던 육체성은 결국 (썩은 고기라는) 가장 즉물적인 방식을 통해 그의 설계 속으로 편입된다.

    포크너가 제시하는 육체성과 흑인성은 백인의 몸과 인종담론간의 완벽한 봉합이 벌어지는 바로 그 순간을 지시함으로써 순수 백인 이데올로기의 불안정성을 가시화한다는 데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백인의 기원적 순수라는 믿음은 그 개념을 떠받치고 있는 흑인성의 존재 없이는 성립불가능하다. 마찬가지 논리로, 흑/백의 육체를 각각 순수한 몸으로 교착시키려는 순수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배척한 육체성의 복귀를 완전히 막을 수 없다. 흑인성과 육체성의 이러한 반란은 결국 백인의 몸을 유령과도 같은 존재로 변환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흑인의 육체성이 자아의 떼어버릴 수 없는 일부임을 깨달은 섯펜은 “그의 설계의 기반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알던 그의 모습과 진짜 그를 구성하는 저주스러운 골격(skeleton) 사이의 구분을 흐리는”(63) 육체의 역습에 무방비로 노출되며, 그 결과 “걸어다니는 그림자”(139)로 생을 마감한다. 흑인으로서 타자이지만 동시에 형으로서 자신의 일부인 찰스 본을 죽이는 순간 헨리는 “이미 시체이자, 살아있는 한 깨어남과 잠드는 것이 다를 바 없는”존재로 변모한다(298). 비슷하게, 섯펜의 처제 로자(Rosa)는 섯펜의 유산이 결국 짐 본드라는 백치 흑인으로 귀결됨을 목격한 후 “기계로 만든 인형”으로 전락한다(297). 흑인타자가 백인자아의 떼어버릴 수 없는 일부임을 깨닫는 순간, 백인의 몸은 백인의 순수라는 이데올로기를 유지할 수도 없고 혼종성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이른바 회색 지대의 유령으로 떠돌게 된다.

    1흑인성이라는 이질성을 백인의 일부로 상정하는 포크너의 관점은『압살롬, 압살롬!』에서 그 맹아가 드러나지만, 모든 종류의 피(흑인, 백인, 미국원주민을 포함한)가 그 특수성을 초월한 채 상징적 국가의 일부로 포섭되는 과정은『내려가라 모세야』에서 본격화 된다. 캐로서스 맥캐슬린(Carothers McCaslin)이라는, 섯펜과 여러모로 유사한 백인 가부장은 (역시 섯펜과 마찬가지로) 흑인혼혈 자손을 남긴다. 그러나『압살롬, 압살롬!』과 달리『내려가라 모세야』가 그려내는 백인성은 그 순수성이 이미 상당부분 해체된 것에 가깝다. 흑인성이라는 이질성과의 분리가 불가능하다는 사실로부터 모든 갈등이 첨예화되는 전자와 달리, 후자는 이질성을 백인자아의 부분으로 온전히 받아들일 때에만 역사의 “부끄러움”(shame)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고를 보여준다(334). 다시 말해, 전자의 초점이 이질성으로부터 발생하는 불안감과 백인성의 실패에 놓여 있다면, 후자는 백인과 흑인이 미국의 일부로서 이미 하나가 되어있다는 당위성에 주목한다. 『내려가라 모세야』와 관련된 주류 담론들은‘문명과 대비된 자연의 가치’라는 이른바 생태학적 관점을 견지하지만, 이 생태학적 관점이 가지는 궁극적 가치가 인종문제라는 정치성에서 비롯된다는 점은 비교적 덜 논의되어왔다. 이 작품에서 황야가 가지는 궁극적 가치는 단순한 문명과의 대비라기보다는, “낯선 것(the alien)”을 받아들여 황야의 일부로 만드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깡통이나 네 개의 표식처럼 인간들이 남긴 물건들은 “낯설지만 치유되어 이미 황야의 조화로운 일반성 속으로 흡수되었으며 . . . [이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황야가 간직한 수많은 삶의 일부로 전환되며 . . . 죽음이란 여기 없기 때문에 죽음의 전조는 없는 것이다”(313). 이질성의 흡수가 주체의 삶을 담보한다는 사고는 주인공 아이잭 맥캐슬린(Isaac McCaslin)이 이마에 사슴의 피를 묻히는 의식(initiation)에서도 반복된다. 사슴의 피는 그에게 “가치가 있는 명예로운 피이자 낯선 것”(169)이다. 이 “이질적”인 대상과의 합일을 통해 그는 한편으로는 흑인, 미국원주민, 백인의 피를 고루 갖춘, 그야말로 미국의 아버지(Father) 격인 샘 파더스(Sam Fathers)가 간직한 낯선 피들을 받아들이는 동시에(159), “사라지고 잊혀진”역사의 패자들과 하나가 되는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175)   2섯펜의 백인 가부장으로의 전이가 육체성을 지운 상징적 몸으로 구체화된다는 관점은 섯펜의 설계의 원형적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백인 농장주 사건에서도 극명히 드러난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백인 농장주의 저택을 찾아간 소년 섯펜은 농장주의 흑인 하인으로부터 ‘뒷문으로 들어오라’는 말과 함께 정문진입을 거부당한다. 이명호가 정확히 지적하듯, 이 사건을 통해 섯펜은 금기와 규율을 상징하는 상징적 아버지 혹은 “대타자가 도입된 상징적 세계에 들어선다”(327). 실제로 포크너의 설명에 따르면, 이 사건을 기준으로 섯펜은 한 종류의 “순수”(innocence)에서 다른 종류의 순수로 넘어가게 된다. 첫 번째 순수는 백인의 피부에 부여된 이념적 가치 혹은 백인 사이의 계급적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단계를 의미하며, 이 단계에서 섯펜에게 인간의 가치는 “망치를 들거나 눈으로 재거나 많은 양의 술을 마시고도 비틀거리지 않고 걸어나갈 수 있는” 이른바 일차적이고도 육체적인 능력에 의해 온전히 결정된다(183). 반면, 두 번째의 순수는 즉물적 육체성에서 계급적, 인종적 담론이 부여된 몸의 가치로 넘어가는 과정을 통해 획득된다. 이 단계에서 그는 자신을 거부한 흑인 하인을 때려도 소용없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그 흑인은 또 하나의 매끈한 풍선 얼굴에 지나지 않으며, 이 얼굴은 부드럽고 시끄럽고 끔찍한 웃음소리(laughing)로 잔뜩 부풀어있”기 때문이다(189). “신발을 소유할 능력이 있으나 신을 필요가 없는 그 남자[농장주]는 풍선 얼굴을 채운 웃음소리를 통해 자신[섯펜] 같은 사람들로부터 구분되고 보호된다”라는 섯펜의 인식이 보여주듯, 풍선 얼굴의 웃음은 농장주라는 상징적 아버지와 섯펜의 차이 - 따라서 이 차이를 메움으로써 아버지와의 합일을 원하는 섯펜의 욕망 - 를 드러내는 기제이다(189-90). 따라서, 이 단계에서 육체가 의미하는 것은 곧 터져버릴 풍선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육체가 아니라 이 육체라는 껍데기가 사라져도 존재할 웃음소리, 즉 백인 농장주가 상징하는 계급적, 인종적 우월성이 가지는 가치이다. 일차적 육체성에서 벗어나 몸의 가치라는 담론으로 진입한 섯펜에게, 그의 가족은 아직 첫 번째 순수의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일 뿐이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돌아온 섯펜의 눈에 비친 그들은 “소” 혹은 “짐승” 들과 다를바 없으며(191), 그의 생물학적 아버지는 섯펜이 지금 막 발견한 상징적 아버지와 달리 힘없는 술주정뱅이이다. 이에 섯펜은 “집을 생각하자 웃음이 났다”(190)라고 말하며 그날 밤 곧바로 집을 떠나 자신의 설계를 추구하기 시작한다.   3육체성 이외에도, 섯펜과 찰스 본의 동일성은『압살롬, 압살롬!』의 곳곳에서 암시된다. “찰스 본은 [섯펜의 헌드레드라는] 외딴 퓨리턴 시골집으로 들어왔다. 마치 섯펜 그 자신이 제퍼슨으로 왔던 때와 거의 똑같이, 배경이나 과거나 어린 시절이 없이 마치 자기 자신으로 완결된 존재인 것처럼”(74). 출신배경이 애매하다는 점 이외에도, 백인 가부장을 상징하는 남성의 저택 정문에서 진입을 거부당한다는 점 역시 이들의 공통점이다(주 2번 참조). 심지어 이 둘은 남북전쟁 도중 같은 전투에서 동시에 상처입기도 한다(217). 반면, 적통 장자로서 섯펜의 또 다른 자아라 할 수 있는 헨리와 섯펜의 동일성은 작품 전체에 걸쳐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둘 간의 합일에 대한 직접적 묘사는 남북전쟁 중 아버지의 막사로 찾아가는 장면에서 유일하게 발견된다. “섯펜? 섯펜을 찾고 있다”라는 사자(使者)를 통한 아버지의 부름에 헨리는 “제가 섯펜입니다”라고 응답한다(281). 언어적 호명을 통한 둘간의 합일을 묘사하는 이 부분에서 헨리가 찰스 본의 흑인성을 아버지로부터 전해듣게 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결국 네가 견딜 수 없는 건 근친상간이 아니라 혼종인 거야”(285)라는 찰스 본의 유명한 대사가 보여주듯, 헨리는 백인성의 순수를 체화하는 섯펜의 저택에 진입하려 시도하는 찰스 본을 죽임으로써 결과적으로 백인성의 순수라는 아버지의 정언명령을 실천하게 된다. “안돼, 안돼” “내가 저택에 들어 갈 수 없다고?(cannot)” “들어가면 안된다고(shall not)”라는 헨리와 찰스 본의 마지막 대화(285)에서 드러나듯, 헨리의 살인은 아버지의 상징질서가 지시하는 금기(shall not)에 기반한 것이다. 그러나, 헨리를 ‘아버지에 의해 상징질서 속으로 호명되는 인물’로 단순하게 정의내릴 수만은 없다. 다음 장에서 자세히 논의되겠지만, 헨리는 아버지의 질서가 추구하는 남자들간의 자기동일성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동성애적 욕망을 통해 아버지의 가부장적 질서를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해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III. 자기동일성과 동성애적 욕망 사이에서

    섯펜의 설계의 한 축이 백인의 순수한 기원을 확보하는 것이라면, 다른 한 축은 이 이데올로기를 아들에게 물려줌으로써 남성간의 자기동일성을 구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섯펜의 설계는 근본적으로 남성적 원칙에 기반한다. 그의 저택은 “창문, 문, 매트리스 어느 한 군데에도 여성적인 부드러움은 찾아볼 수 없는 . . . 마을에서 가장 거대한 스파르타 건축물”(30)로, 이 남성적 유산을 물려주기 위해 그는 율레일리어-엘렌(Ellen)-로자-소작인 워시 존스(Wash Jones)의 손녀 밀리(Milly)로 이어지는 여성들로부터 한결같이 장자를 요구한다. 섯펜에게 여성은 남성적 자기동일성을 실현시키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에게 [로자]의 존재는 단지 검은 습지와 마구 자란 덩굴과 벌레들의 부재를 의미 할 뿐”이라는 언급이 보여주듯, 로자는 섯펜의 헌드레드를 대대로 번성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134). 마찬가지로, 딸을 낳은 밀리 역시 그에게는 숫망아지를 낳은 말 페넬로페보다 못한 존재이다(229). 이런 그에게, 자신을 거역하고 찰스 본과 떠나 남북전쟁에 멋대로 참여한 헨리는 차라리 “죽은 것보다 못한” 아들이다. 왜냐하면, 헨리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살면서 정통유산을 해칠 것이며, 주위 사람들은[섯펜이라는] 옳은 이름(the right name)을 모르게 될 것” 이기 때문이다(148).

    남성적 자기동일성을 향한 섯펜의 욕망은 그의 백인 장자인 헨리에 의해 반복 된다. 섯펜의 자기동일성이 아버지-아들로 이어지는 수직적 형태라면, 헨리의 자기동일성은 찰스 본과의 형제애에 기반한 수평적 형태를 이룬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헨리에게 있어 여성은 찰스 본과의 동일화를 체현하는 부수적 필요조건이다. 이는 헨리의 여동생 쥬디스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 인용문에서 결혼은 쥬디스와 찰스 본의 결합이 아니라 오히려 헨리와 찰스 본의 남성적 합일을 승인하는 기제로 묘사된다. 통상적 결혼이 남녀에게 남편과 아내라는 관계적 명칭을 제공하듯, 이들 두 남자는 결혼을 통해 “유혹자와 유혹되는 이” 라는 상호관계성을 부여받게 된다. 이는 이브 세즈윅(Eve Sedgwick)이 지적한 “여성 교환(woman traffic)에 기반한 삼각관계” 와 상당히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세즈윅에 따르면, 다수의 영미문학은 남성간의 유대 확보를 위해 여성을 사용 혹은 공유하는 방식을 취하며, 이 속에서 여성은 “남자가 진정한 파트너인 관계 속에서 하나의 통로로 사용될 뿐이다” (26 원 저자의 강조). 합일의 욕망이 한 남성에서 다른 남성으로 향하는 상황에서, 쥬디스는 욕망의 주체는 차치하고서라도 욕망의 대상으로도 존재할 수 없다. 그녀는 남성적 유대를 향한 헨리의 욕망을 담아내는 “텅 빈 그릇” 이자 두 남자의 유대를 실현시킬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점은, 헨리와 찰스 본의 합일이 남성적 자기동일화와 동성에 대한 성적 욕망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상에 위치한다는 사실이다. 위 인용문의 “유혹자와 유혹되는 이” 라는 표현이 보여주듯, 이들의 관계는 종종 추상적 유대감을 넘어 성애(性愛)적 암시를 드러낸다. 찰스 본은 쥬디스와 헨리 중 “헨리를 더 사랑했다. 여동생을 단지 그림자 혹은 그릇같은 여자(woman vessel)로 간주했으며, 그 사랑의 완성(consummate)이 향하는 진짜 대상은 그 청년[헨리]이었다” (86). 찰스 본의 사랑이 성행위를 암시하는 “완성” 이라는 단어로 표현된다면, 이에 응답하는 헨리의 사랑은 의식의 규율 아래 존재하는 무의식적인 종류의 것이다. 헨리는 자신을 “여동생이나 정부(mistress), 혹은 신부(bride)로 변신시켰다. 아마도 이것이 그의 진심이었을 테지만, 이 진심은 계산된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에 깃들어있는 것이었다. 왜냐면 그는 생각하는 대신 느낀 대로 즉각 행동했기 때문이다”(77). 그러나 동시에, 헨리는 이러한 “무의식적인 욕망에도 불구하고 동성이라는 사실이 절망적으로 방해하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을 인지” 하고 있었다(75-76). 찰스 본에 대한 헨리의 사랑은 “무의식적 욕망” 에서 비롯되며, 이 욕망을 통해 헨리는 스스로를 “여동생이나 정부, 혹은 신부” 와 같은 여성적 위치에 둔다. 둘의 관계에서 헨리를 여성으로 비유하는 묘사는 작품 곳곳에서 발견된다. 한 예로, “헨리는 침대에서 마치 여자들이 그러하듯 가운과 슬리퍼만 입고 침실을 돌아다니면서 여자들이 사용하는 약하지만 분명한 향수냄새를 풍기며 여자들처럼 담배피우는 법을 찰스 본으로부터 배우고 있었다” (253).4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헨리와 찰스 본의 관계를 단순히 남성간의 무성적인 유대라고만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분명, 이들의 사랑이 추구하는 가장 일차적인 목표는 남성간의 자기동일성을 향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자기동일성이 구체적으로 표출되는 방식은 상당부분 동성애적 욕망에 기댄다고 할 수있다.

    헨리와 찰스 본의 관계가 자기동일성과 동성애적 욕망이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다면, 섯펜의 자기동일성과 헨리의 그것은 필연적으로 서로 다른 종류일 수 밖에 없다. 한편으로, 헨리의 자기동일성은 가부장제와의 결합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섯펜의 남성적 자아확대와 동일한 기반 위에 서 있다. 앞서 쥬디스의 예를 통해 설명했듯, 이들에게 있어 남성적 유대는 무엇보다 매개체로서의 여성과 결혼이라는 가부장적 틀을 통해 구체화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헨리와 찰스 본의 성애적 관계는 섯펜이 지향하는 가부장적인 전통이 허용하는 경계 바깥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전자는 후자가 지향하는 상징으로서의 남성적 합일을 축자적 의미로 변질시키는 동시에, 후자의 작동과정을 책임지는 자손번식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따라서 헨리가 추구하는 자기동일성은 모순적 상황에 직면해 있다. 헨리와 찰스 본의 유대는 분명 아버지의 상징질서를 떠받치는 가부장제로 부터 출발하지만, 이 자기동일성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동성애적 욕망은 가부장제로 대변되는 아버지의 질서를 오히려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압살롬, 압살롬!』이 그려내는 헨리의 마지막 모습이 아버지의 이름을 발화하는 장면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로자와 함께 섯펜의 저택에 침입한 퀜틴은 헨리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눈다. “그러면 당신은—? 헨리 섯펜이야. 그러면 당신은 여기 얼마동안—? 사 년 동안. 그러면 당신은 집에 온 이유가—? 그래, 죽으려고. 죽으려고? 그래, 죽으려고. 그러면 당신은 여기 얼마동안—? 사 년 동안. 그러면 당신은—? 헨리 섯펜이야” (298). 이 대화는 앞과 뒤가 정확히 일치하는 원형(圓形)적 구조로, 그 구조상 마치 메아리와도 같은 효과를 야기한다. 앞서 언급했듯, 섯펜이 지향하는 남성적 자아확대는 아들로 전해지는 섯펜이라는 “옳은 이름” 을 통해 체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헨리의 동성애적 욕망은 섯펜이라는 이름을 통한 아버지와 아들간의 온전한 봉합을 방해하며, 따라서 헨리가 마지막으로 입에 담는 섯펜이라는 이름은 아버지가 의도한 “옳은 이름” 이 아닌 단지 힘없는 메아리로 자리매김한다.

    『압살롬, 압살롬!』에 나타난 남성적 자기동일성과 동성애적 욕망 사이의 긴장구도는 헨리/찰스 본의 회로를 감싸고 있는 또 다른 회로인 퀜틴과 슈리브의 관계를 통해 더욱 구체화된다. 헨리가 섯펜의 생물학적 장자라면, 퀜틴은 섯펜 가족의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남부 역사로 호출되는 일종의 상징적 장자로 볼 수있다. 그는 하버드 학생인 퀜틴인 동시에, “유령이 되기에는 아직 너무 어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부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유령이 되어야 하는 퀜틴 콤슨” 이기도 하다(4). 역사를 듣는 퀜틴의 행위는 단순히 섯펜과의 동일화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그와 슈리브간의 합일로 이어진다. “살아 숨쉬고 걸어다니는 모든 소년의 육체는 그 불명확하고 손에서 미끄러지는 정체불명의 아버지로부터 파생했으며, 따라서 태양아래 어느 곳에서 왔든 모두 영원히 형제가 된다(brothered)” 는 슈리브의 언급처럼, 섯펜의 역사라는 담론을 거친 퀜틴과 슈리브는 같은 아버지로부터 파생한 피를 나눈 형제로 변모한다(240).

    그러나 헨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퀜틴과 슈리브의 운명공동체적 합일은 섯펜이라는 아버지와의 유대에서 출발하지만 오히려 아버지의 질서가 의도하지 않은 종류의 남성적 합일로 귀결된다. 이는 이들의 대화가 궁극적으로 향하는 결말이 단순한 역사적 유대를 넘어 사랑으로 발전한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초월(overpass)” 이 한 영역의 경계를 넘어 다른 영역으로 진입하는 행위를 의미하듯, 퀜틴과 슈리브의 사랑은 담론을 통해 맺어진 추상적 형제애와는 이질적인 새로운 영역을 지시한다. 둘간의 동성애적 관계에 대한 피터슨의 자세한 분석(247-50)이 보여주듯, 기나긴 대화가 끝난 후 “이제 추운 거실에서 나가 침대로 가자” (287)라는 슈리브의 말로 시작하는 침대 장면은 둘 사이의 동성애적 성행위를 짙게 암시한다. 슈리브와 함께 침대에 누운 퀜틴은 “뜨거운 피가 그의 혈관과 팔, 다리에 흐르는 것을 느끼며 . . . 침대가 삐걱거릴 정도로 강하고도 통제할 수 없는 힘에 의해 온 몸이 경련했고(jerk),” 경련이 지나간 후 ”침대에 평온하게 누워 두 번째의 강하고 예측 불가능한 경련이 오기를 기다렸다“ (288-89).

    퀜틴의 성행위가 가지는 중요성은 단순히 가부장적 금기를 넘어선다는 점 이외에도 이것이 섯펜의 또 다른 금기인 흑인성까지 상기시킨다는 점에 있다. 앞장에서 언급했듯, 섯펜의 저택은 순수 백인성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적 공간이자 흑인성이 침투할 수 없는 금기의 문을 상징한다. 이 문은 찰스 본은 물론 백인 화자들에게도 금기의 문으로 작용한다. 퀜틴과 더불어『압살롬, 압살롬!』의 또 다른 화자들인 퀜틴의 아버지 콤슨과 로자는 문 너머에 존재하는 찰스 본의 시체와 짐 본드의 존재를 알지 못하며, 따라서 백인성에 기반한 섯펜의 설계가 무너진 이유를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못한다. 퀜틴 역시 예외는 아니다. “거기에는 그 역시 넘지 못하는 그 무엇이 있다—바로 그 문 말이다”(139)라는 그의 독백이 보여주듯, 이 문은 그에게도 넘어서는 안될 금기를 의미한다. 이 금기의문을 넘어 짐 본드라는 타자성이 섯펜의 일부임을 발견하는 순간은 퀜틴이 슈리브와의 성행위를 통해 가부장적 금기를 넘어서는 순간과 정확히 중첩된다. “침대에 누운 채 어지럽고도 순수한 어둠을 들이마시며 헐떡이는 숨소리” (291)는 로자와 함께 섯펜의 저택 문을 강제로 열고 침입한 순간 “강렬한 어둠 속에서” 그가 내뱉은 “흐느끼는 헐떡임” (292)과 병치되며, 이 헐떡임은 다시 “메사추세츠의 침대에서 내뱉는 가쁜 숨소리” (295)로 이어진다. 따라서 퀜틴의 성행위는 동성애와 흑인성이 금기의 문을 넘는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함으로써 아버지의 상징질서가 명령한 두 금기가 동시에 해체됨을 알리는 신호탄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섯펜의 생물학적, 상징적 자손들은 모두 아버지의 질서가 완전히 포섭 할 수 없는 영역으로 이동한다. 섯펜의 증손자이자 그의 설계 내부에 존재하는 흑인성을 상징하는 짐 본드는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잡을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고 맘대로 할 수도 없는” 수용 불가능한 인물이다(302). 퀜틴 역시 마찬가지이다. 앞의 긴 인용문에서 “사랑의 영역에는 역설과 불일치가 있을지언정 그르거나 거짓된 것이 있을 수 없다” 라는 언급처럼, 퀜틴과 슈리브의 동성애적 욕망은 아버지의 남성적 합일과 다르다는 점에서 “역설과 불일치” 를 야기하지만, 이 불 일치의 욕망은 “그르거나 거짓된 것” 으로 낙인찍혀 아버지의 율법 속으로 재포섭될 수 없다.

    결론적으로, 퀜틴과 헨리가 드러내는 동성애적 욕망은 그 구조 및 효과 면에서 상당히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헨리의 자기동일성은 가부장제에 기반한 아버지의 남성적 자아확대로부터 출발하지만, 그 과정에서 드러난 동성애적 욕망은 후자의 질서를 교란한다. 비슷하게 퀜틴의 자기동일성 역시 역사적 담론을 거쳐 섯펜과 상징적 유대를 구축하지만, 이 상징적 유대는 “사랑” 이라 표현되는 동성간의 성행위를 통해 초월될 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아들들의 사랑이 아버지의 빚을 갚는 방법이라는 포크너의 묘사는 의미심장하다. “사랑에 대해 걱정할 필요없어. 왜냐하면 사랑은 스스로 알아서 진행될 거니까. . . . [사랑은] 장부의 빚을 청산하는 것이고, 그 오래된 종이 위에 지불(Paid)이라고 써서 마침내 그 장부를 버리든 없애든 할 수 있게 되는 거지. . . . 그가 얻은 그의 아들들이 아니라면 누가 이 빚을 갚을 수 있겠어?” (260). 섯펜이라는 생물학적, 상징적 아버지의 유산이 궁극적으로 백인 가부장에 기초한 남성성의 유지에 놓여 있다면, 이 유산이 초래한 정신적 빚은 아버지의 질서를 해체하는 아들들의 사랑에 의해 청산된다.

    4헨리와 찰스 본의 관계가 남녀의 관계처럼 묘사되는 상황은 곧이어 본문에서 언급될 퀜틴과 슈리브의 동성애적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보여진다. 둘의 사랑이 진행되면서, 퀜틴과 슈리브가 서로를 쳐다보는 시선은 남녀가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과 중첩된다. “그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에는 흥미로운 무언가가 있었다. 흥미롭고 조용하고도 아주 강렬한 무언가가. 이 시선은 두 청년이 통상 서로를 쳐다보는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마치 순수함을 간직한 젊은이와 소녀가 서로를 바라보는 것과도 같았다” (240). 그러나 동성애적 관계가 남녀관계처럼 묘사된다는 필자의 주장은 헨리/퀜틴이 동성애적 관계에서 여성의 역할을 맡는다고 주장하기 위함도 아니고, 이들의 관계를 이성애적 관계로 전유시켜 도식화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필자가 헨리와 여성간의 병치를 언급하는 이유는, 헨리와 찰스 본의 관계가 작품에서 묘사되는 방식이 이성애적 맥락에서 전형적으로 독자에게 성애적 관계를 환기시키는 방식에 기댄다는 점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들의 사랑이 가지는 성애적 측면은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이성애적 묘사를 빌려 우회적인 방식을 통해 표출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압살롬, 압살롬!』이 쓰여진 당시 사회적 상황을 고려할 때, 동성애에 대한 이러한 우회적 언급은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남북전쟁 이후의 남부는 남녀 모두 전형적인 이성애적 역할을 그 어느 때보다 요구받은 시기였으며, 따라서 이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벗어나 있는 동성애의 입지는 그 어느 때보다 좁을 수밖에 없었다. 남북전쟁 이후 백인여성의 몸정치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로빈 위그먼(Robyn Wiegman) 참조. 남부의 백인 남성들이 전쟁의 패배를 통해 자신들에게 부과된 ‘여성화된’ 위치를 벗어나 남성적 가치를 추구했다는 논의는 테디어스 데이비스(Thadious M. Davis) 240-42쪽 참조.

    IV. 나가는 말

    『압살롬, 압살롬!』은 가부장적 질서에 기반한 순수 백인성의 유지라는 이데올로기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이른바 ‘실패의 서사’라할 수 있다. 이 실패의 서사의 중심에는 흑인성(살덩어리, 동물성)과 동성애적 욕망(동성을 향한 육체적 욕구)을 관통하는 육체성이 자리한다. 이 육체성은 섯펜의 상징질서 혹은 더 나아가 남부의 인종적, 성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포섭되거나 길들여지지 않은 채로 그 이데올로기의 개념적 완결을 끊임없이 지연시킨다. 앞서 언급했듯, 이 육체성은 남부 이데올로기의 외부에 존재하는 저항의 요소라기보다는 이 이데올로기가 이미 내포하고 있는 이념적 균열을 가시화하는 기제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백인성의 순수 이데올로기가 가지는 문제를 감안할 때, 섯펜의 노력은 두 층위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다. 백인성의 순수가 비어있는 기표로 존재한다면, 이를 체화하려는 섯펜의 설계 역시 그 자체로 가지는 긍정적 가치를 결여한 채 “연기로 지어져 . . .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공기 중으로 사라지는” 종류의 것이다(215). 또한 백인성의 순수가 전적으로 흑인성에 의존하는 개념이라면, ‘순수한 백인의 몸’을 지향하는 섯펜의 설계는 흑인성을 완전히 배제한 채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섯펜의 이데올로기가 가지는 내적 한계를 드러낸다는 점에 있어, 동성애 역시 인종문제와 유사한 작동방식을 따른다. 세즈윅이 주장하듯, 남성적 자기동일성은 다른 남성을 향한 성적 시선이라는 대립항을 언제나 환기시키며, 이 속에서 전자는 “동성 간의 성애(homoeroticism)로 변질” 될 위험에 항시 노출되어 있다(18). 자기동일성이 작동하는 순간 동성애적 욕망 역시 가시화된다면, 헨리와 퀜틴의 동성애적 욕망은 아버지의 자기동일성이 의도치 않게 그러나 필연적으로 야기한 이질성을 의미하게 된다. 이 둘은 남성간의 유대라는 공통된 목적을 가지며, 따라서 남성적 유대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언제라도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넘어갈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아들들의 동성애적 욕망은 섯펜의 자아확대가 우연히 파생시킨 부산물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성애적 가부장제에 기반한 섯펜의 상징적 남성합일은 역설적으로 그것이 완전히 포섭하지 못하는 육체적 욕구의 존재를 환기시키며, 따라서 전자는 백인성의 순수와 마찬가지로 이미 자신의 설계 안에 존재하는 내부적 이질성에 의해 무화된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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