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ask of the Translator: Walter Benjamin and Cultural Translation

번역자의 책무―발터 벤야민과 문화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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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On recognizing the significance of Walter Benjamin’s “The Task of a Translator” in recent discourses of postcolonial cultural translation, this essay examines the creative postcolonialist appropriations of Benjamin’s theory of translation and their political implications. In an effort to dismantle the imperialist political hierarchy between the West and the non-West, modernity and its “primitive” others, which has been the operative premise of the traditional translation studies and anthropology, newly emergent discourses of cultural translation actively adopts Benjamin’s notion of translation that does not prioritize the original text’s claim on authenticity. Benjamin theorizes each text — translation as well as the original — as an incomplete representation of the pure language. Eschewing formalistic views propounded by deconstructionist critics like Paul de Man, who tend to regard Benjamin’s notion of the untranslatable purely in terms of the failure inherent in the language system per se, such postcolonialist critics as Tejaswini Niranjana, Rey Chow, and Homi Bhabha, each in his/her unique way, recuperate the significatory potential of historicity embedded in Benjamin’s text. Their further appropriation of the concept of the “untranslatable” depends on a radically political turn that, instead of focusing on the failure of translation, salvages historical as well as cultural potentiality that lies between disparate cultural entities, signifying differences, or disjunctures, that do not easily render themselves to existing systems of representation. It may therefore be concluded that postcolonial discourses on cultural translation of Niranhana, Chow, and Bhabha, inspired by Benjamin, each translate the latter’s theory into highly politicized understandings of translation, and this leads to an extensive rethinking of the act of translation itself to include all forms of cultural exchange and communicative activities between cultures. The disjunctures between these discourses and Benjamin’s text, in that sense, enable them to form a sort of theoretical constellation, which aspires to an impossible yet necessary utopian ideal of critical thinking.


  • KEYWORD

    Walter Benjamin , Tejaswini Niranjana , Rey Chow , Homi Bhabha , translation , culture , cultural translation , postcolonialism , disjunction , language

  • I. 탈식민주의 ‘문화번역’ 담론

    기존의 번역학 혹은 번역 연구가 텍스트의 절대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번역 행위가 지니는 역사성, 정치성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것과 달리, 지난 20-30년 동안 활발히 진행되어 온 ‘문화번역’(cultural translation) 논의는 번역 자체를 정치적인 것으로 보며, 구체적인 역사적·사회적 맥락이 암시하는 정치권력의 구도에 주목하여 문화 간의 접촉과 교섭을 일종의 번역 행위로 여긴다. 즉 번역을 문자 텍스트들 사이의 간언어적 교환행위로 보는 데서 나아가, 언어 자체를 넘어서는 상이한 문화들 간의 교류를 이해하는 틀로 번역의 패러다임을 확장하고 응용하는 것이다. 번역이 “식민주의 지배의 중요한 테크놀로지”라고 강조하는 테자스위니 니란자나(Tejaswini Niranjana)의 주장은 서로 언어와 문화가 다른 사회 사이에서 벌어지는 의미의 생산과 전달 행위가 지극히 정치적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번역을 탈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이론화하는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21). 니란자나를 비롯한 탈식민주의 비평가들이 지적하듯, 번역이 식민지배의 중심적 기술이 되는 이유는 두 문화가 접촉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언어적 상호작용이 상이한 언어, 문화 사이에 위계질서를 생성하여 작동시키고 불균등한 권력관계를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서구문명중심적 입장에서 그와 다른 사회문화를 ‘타자’로 기술하는 인류학이 아직도 상당 부분 일방통행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탈식민주의의 주장은 바로 그러한 점에 근거를 두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인류학은 타 문명을 자언어로 옮기고 자기문화의 논리에 의거하여‘타자’로 설명하는 행위에 크게 의존하였는데, 이때 번역은 두 문화의 조우 혹은 충돌을 가시화하는 작업으로서 흔히 서구의 ‘보편성’과 비서구의 ‘특수성’이라는 인식론적 위계질서를 이미 전제로 삼고 있으며 그 전제를 영속화하는 데 기여한다. 서구와 비서구 사이의 간문화적 소통이 봉착하는 일종의 “인류학적 교착상태”(anthropological deadlock)는 지난 수 세기 동안의 서구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로 인해 생겨난 결과라고 레이 초우(Rey Chow)는 말한다(Chow 1995, 176).1

    이 교착상태는 서구 인류학자들이 ‘원시적’인 사회를 관찰하고 기록하고 분석하는 식의 구도가 좀처럼 역전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에서 파생되는 부정적 함의들을 가리킨다. 비서구를 서구의 보편 가치와 대비되는 개별적 타자로, 그리고 근대성과 대비되는 ‘원시’로 탈역사화하는 고전적인 인류학의 작동 방식은 제국주의의 시선이기도 하며, 바로 그러한 이유로 서구의 주체적 지위를 보장하기 위한 기제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의 탈식민주의 담론의 노력은, 이러한 구도를 벗어나는 문화적 접촉 및 그 재현의 가능성에 대한 탐색이기도 하다. 하지만 민족 고유의 전통이 지니는 가치 혹은 우월성을 강조하며 그것을 민족 문화의 본류적 기원으로 상정하는 민족지학(ethnography)적 입장에도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며, 탈식민주의에서도 이러한 점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발견된다.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적 민족지학이 흔히 지니는 문제점은 바로 그것이 서구와 비서구 사이의 불균등적 이분법에 그대로 의존하면서 위계적 관계를 역전시키고자 하는데 그친다는 점이다. 문화번역은 이처럼, 문화적 재현과 수용의 문제를 둘러싼 여러 의제들에 새삼 주의를 환기시킨다.

    그렇다면 비서구에 대한 논의는 이러한 인류학, 민족지학의 제국주의적 이분법을 벗어나서 과연 가능한 것인가? 서로 다른 문화들이 서로 소통하고 서로를 재현하는 일은 언제나 권력의 불균형 혹은 위계질서의 구도 속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가? 다른 언어로 타문화를 재현한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인가? 지금 이 시대에도 지식과 문화의 분배는 널리 서구 사회와 비서구 간의 불평등과 불균형을 강화하고 영속화하는 방식으로써 조직화되고 경험되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서구와 비서구의 조우는 한 쪽이 다른 쪽을 정치적·문화적으로 지배하고 인식론적 보편의 지위를 독점하는 가운데 진행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문화번역은 기존의 인류학, 민족지학의 문제점들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는 대안적 실천 가능성을 모색하는 가운데 등장하는 사고틀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번역 작업이 흔히 ‘원작’의 우월성 혹은 진본성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거나, 두 언어 중 한 언어가 보편성을 독점하는 방식으로 일종의 힘의 불균형 상태 속에서 행해졌음을 고려하면, 번역은 불균등한 권력 관계 속에 놓인 문화들의 상호작용과 유비적 관계에서 이론화될 수 있다. 일방적 특권화의 구도를 벗어나는 대안적 번역을 꾀하는 과정인 문화번역은 일방적인 지배 관계를 해체하는 문화적 소통을 실천적으로 모색하는 작업이다. 언어간 번역행위의 테두리를 확장하는 실천은 필연적으로 우리 모두를 번역자로 규정한다. 이질적 언어들과 문화들 사이의 공간에 처한 주체들 사이에서는 “발화 개시와 수용이라는 행위가 번역의 행위로서 일어나며, 모든 듣기와 읽기의 수행에서는 번역이 이루어진다”는 사카이 나오키(Sakai Naoki)의 언술은(9), 문화번역의 일상적 실천의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그것이 주체 자체를 구성하는 실천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문화번역의 비평적 실천은 그런 점에서 서구 근대성을 보편으로 상정하는 인식론을 벗어나는 담론뿐 아니라 새로운 주체성의 생성 가능성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글 「번역자의 과제」(“The Task of a Translator”)는 번역을 비평적 실천으로 보는 연구들 중 가장 잘 알려진 저작일 것이다.2 벤야민의 번역론은 흥미롭게도, (대안적) 번역 행위에서 식민주의적 권력 작용에 대한 저항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탈식민주의 이론가들이 가장 즐겨 인용하고 이용하는 글이다. 이 점이 특히 흥미로운 것은, 언어의 본질에 관한 독자적 철학에 근간을 두고 간언어적 교환행위로서의 번역을 논하고 있는 벤야민의 글에서 탈식민주의 담론과의 접점을 발견하는 일 자체가 상당히 유의미한 일종의 이론적 번역 행위이기 때문이다. 문화번역의 이론적 사유에 벤야민의 번역론이 미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가령 호미 바바(Homi Bhabha)가 『문화의 위치』(Location of Culture)에서 벤야민의 번역이론에 기대어 문화 간의 접촉 방식을 논한 것을 비롯하여 벤야민이 여러 문화번역 논의에 비중있게 등장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탈식민주의적 문화번역론이라는 담론적 흐름 자체가 벤야민의 번역론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이다. 이 글은 필자가 그동안 벤야민을 접해왔던 것과는 동떨어진 맥락, 즉 탈식민주의 문화번역론이라는 다소 예기치 않은 처소에서 벤야민이 이토록 자주 등장한다는 점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되었다. 벤야민과 탈식민주의가 어떻게 접목될 수 있을지에 대한 약간의 의구심에, 벤야민의 번역론을 확장하고 응용하는 작업의 생산적인 가능성을 모색하는 문화번역의 시도에 대한 호기심이 더해지게 되었다. 흔히 번역을 말할 때 상정하는, 원언어에서 번역어로의 변환이라는 일방적 흐름의 틀, 그리고 원텍스트 및 원언어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는 언어 간의 존재론적 위계질서를 벤야민의 번역론이 전면 부정한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 점이 탈식민주의론자들에게 벤야민의 논고가 지니는 호소력을 짐작해 볼 수 있게 하며, 이 글에서 필자는 탈식민주의적 문화번역의 입장이 이 점을 어떻게 활용하여 다른 논의로 나아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글은 번역 행위를 문화적·정치적 실천으로 보고 탈식민주의적 관점에서 대안적 문화재현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문화번역에 관한 일련의 논의들이 발터 벤야민을 어떻게 차용하여 전유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우선 벤야민의 번역론을 다시 읽으면서 문화적 실천으로서의 번역행위에 대한 그의 철학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짚어 보아야 할 것이며, 동시에 그의 번역론이 문화번역의 여러 다른 논자들에 의해 어떻게 해석되고 전유되는지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벤야민의 번역 이론이 그들에게 각각 어떤 유용성을 지니는지, 그리고 벤야민의 이론을 차용하는 입장들은 과연 얼마나 설득력을 지니는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벤야민의 사유가 탈식민주의 문화번역론에 기여하는 바를 밝히는 것이 이 글의 중점적 목표이다. 하지만 문화번역의 다양한 논의들은 번역론을 넘어서는 벤야민 사유의 여러 측면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기도 하다. 일찍이 근대 자본주의 문화에 대한 비판적 개입의 단초를 풍성히 제공한 벤야민에게서 문화의 비평적 실천으로서의 번역에 대한 논의들이 영감을 받는 것은 어쩌면 놀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 영감, 영향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또 설득력 있게 문화번역론 안으로 ‘번역’되어 들어갔는지에 대한 평가는 해봄직 하다. 벤야민의 사유가 탈식민주의 담론과 만나 차용되는 과정에서 일종의 부조화 혹은 불일치가 감지된다는 생각도 들기 때문이다. 그 균열의 지점을 적시하고 해명하는 것 또한 이 글의 또 다른 목표라고 할 수 있겠다.

    1이러한 점에 대한 문제의식은, “1900년 이래로 비서구의 사물들은 일반적으로 원시 예술 아니면 민족지학적 표본, 둘 중 하나로 분류되어 왔다”는 점을 지적하는 제임스 클리포드(James Clifford)의 논고 등에 힘입어 꾸준히 지속되었다(Clifford 198, 원래의 강조).  2이 논문에 인용된 벤야민의 글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경우 Walter Benjamin: Selected Writings Volume I, 1913-1926에 수록된 영역본을 필자가 번역한 것이다. 벤야민 텍스트의 제목 “The Task of a Translator”는 국역본에서 「번역가의 과제」로 옮겨졌다. 그러나 ‘번역가’라는 말이 번역을 직업으로 삼는 전문가를 가리키는 경향이 있는 반면, ‘번역자’는 번역행위를 수행하는 사람을 널리 지칭하는 말이라는 생각에서, 그리고 문화번역에서 의미하는 번역이란 전문적 번역을 벗어난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수행되는 일상적인 문화적 소통행위들을 모두 포함한다는 뜻에서, 이 글에서 필자는 ‘translator’를 ‘번역자’로 옮기기로 한다.

    II. 「 번역자의 과제」―문화번역 속의 벤야민

    벤야민은 번역을 원언어가 지니는 의미나 정보를 그대로 전달하는 행위로 정의하지 않음으로써 번역에 대한 통념을 깨뜨린다. 이는 원문(original text)도 어떤 본래적 의미의 기원(origin)은 아니라는 벤야민의 독특한 발상에 기인한다. 어느 한 언어도 모든 언어가 공유하는 언어의 본래적 의미, 의도를 단독으로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이 이 글에서 드러나는 벤야민의 언어철학의 중요한 명제이다. 이것은 언어들 사이의 친화적 관계 속에서 “서로를 보완하는 의도들의 총합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그것이 바로 어떠한 개별 언어와도 일치하지 않는 “순수언어”(pure language)이다(Benjamin 257). 벤야민은 “어떤 언어 혹은 언어적 창작물에도 전달될 수 있는 것에 더하여 소통될 수 없는 것이 있다”(261)고 말하며, 따라서 원텍스트 역시 언어의 의도를 완벽히 전달할 수는 없다고 한다. 벤야민에게 번역자의 작업이란 바로 이 “소통될 수 없는” 원문의 무엇을 끌어내는 노력에 다름 아니다. 즉, “이질적인 언어들 가운데서 추방상태에 놓여 있는(exiled) 순수 언어를 자신의 언어로 풀어 주는 것, 작품 속에 갇혀 있는 언어를 그 작품의 재창조를 통해 해방시키는 것이 번역자의 과제”라는 것이다(261).

    벤야민에게, 원문의 언어와 번역의 언어는 서로를 보충하고 서로에게 있어 결핍으로 드러나는 순수 언어의 의미를 함께 구성하는 과정 속에서 상호 영향을 미치는 관계를 이루게 된다. “번역은 원문의 의미를 모사하는(imitating) 대신에, 원문이 의미작용하는 방식을 애틋하게 그리고 상세히 통합해 들여야 하며, 그럼으로써, 파편들이 그릇의 일부인 것처럼 원문과 번역문 양자를 더욱 큰 언어의 파편들로서 알아볼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260). 따라서 벤야민의 번역론은 원언어의 의미작용을 더 근원적인 것이나 더 우월한 것으로 설정하지도 않고, 번역 행위를 자기중심적 환원의 논리와도 철저히 분리시킴으로써, 번역을 제3의 창조에 가까운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원본과 번역본 사이의 “존재론적 서열을 깨고 원본과 번역 각각이 고유한 별처럼 순수언어라는 원천의 잠재성을 실현할 수 있는 ‘단독적’ 길을 열어두면서, 동시에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전체로서 ‘성좌’(constellation)를 구성할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 벤야민 번역론의 매력이자 강점이다”(이명호 237). 그리하여 이질적인 문화들 사이에서 권력의 불균형이 자아내는 위계질서의 문제들에 저항하는 문화적 실천의 가능성이 벤야민에게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장 라플랑쉬(Jean Laplanche)가 벤야민의 이론이 “번역을 자기 폐쇄적인 것, 타자를 자아의 조건들로 환원하는 행위가 되게 하지 않고 오히려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움직임으로” 만드는 “반-민족중심주의적”(anti-ethnocentric) 이론이라고 평한 것은 이러한 의미일 것이다(Chow 189에서 재인용). 이처럼 벤야민의 「번역자의 과제」는 원언어와 번역어, 원본과 번역본, 의미와 형식 사이의 전통적 위계질서를 뒤흔드는 번역의 이해로서, 기존의 위계질서에 도전하고 그것의 단순한 전복이 아닌 대안적 질서를 모색하는 탈식민주의 실천의 담론들에 커다란 추동력을 제공한다. 벤야민의 번역론은 또 탈식민주의 문화번역론에서, 민족 문화의 고유한 ‘본질’을 강조하면서 흔히 문화교류의 교착상태를 영속화하는 데 공모하는 방어적 토착주의의 한계를 드러내는 데에도 유용한 틀이 된다.

    테자스위니 니란자나는, 식민주의의 역사에서 번역이 차지했던 중요성을 지적하고 탈식민주의 담론 안에서 번역을 재이론화하고자 했던 초기의 문화번역 이론가들 중 한 명이다. 니란자나는 그의 저서 『번역의 자리를 찾기』(Siting Translation)에서, 번역이라는 행위를 근대 제국주의가 타자를 기술하는 행위의 정치학적 맥락 위에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번역은 간언어적 의미 전달 과정 이상의 그 무엇으로, 인류학, 민족지학, 문화비평 등과 같은 학문 영역 전체의 기능을 좌우하는 것인 만큼 다양한 학제와 담론을 관통하는 문제틀 자체이다. 니란자나는 번역에 대한 기존의 관념과 실천들이 상정하는 이분법적·위계적 사고의 틀이 곧 식민주의적 세계관에 근거한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고 그 틀에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방식들을 모색한다. 문학 텍스트의 실제 번역 사례들을 다루는 니란자나의 논의는 복잡하지만, 그 의도와 요지는 비교적 분명하다. 타자를 향한 오리엔탈리즘적 기술방식으로서의 서구중심적 번역을 피식민자들의 문화적 저항의 장으로 적극적으로 변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번역이 모사에 기반을 두는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닌 창조(invention)라고 주장하는 니란자나의 입장은 앞서 살펴본 발터 벤야민의 번역론에 힘입은 것이다. 하지만 니란자나가 주창하는 번역자의 과제는 스스로도 언급하듯이 「역사철학 테제」(“Theses on the Philosophy of History”) 등을 비롯한, 벤야민의 역사의식을 드러내는 다른 논고들과 함께 읽어야만 더욱 분명해진다. 니란자나는 벤야민의 ‘성좌’(constellation) 개념을 차용하여, 번역이야말로 언제나 이미 이질적인(heterogeneous) 원본의 성질을 드러낼 수 있으며, 번역자는 과거와 현재가 성좌처럼 공존하는 문화적 맥락에 주목하는 역사가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결국 니란자나에게 번역이란 언어를 사용하여 역사성을 가시화하는 정치적 작업인 것이다. 문화번역이 역사성에 대한 숙고를 필수적으로 요구한다는 점을 역설하는 것은 니란자나의 특성이자 장점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역사성(historicity)과 구분하여 “역사주의”(historicism)를 비판하는데, 즉 해체론 등의 후기구조주의와 논쟁적 좌파지식인들이 역사를 분석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글쓰기의 한 양태로 환원한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실제로 니란자나에게 벤야민이 중요한 것은 벤야민의 번역 이론 그 자체의 유용함보다도 벤야민이 역사성에 대한 고려를 번역론 안에서 간접적으로 이론화한다는 점에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벤야민의 번역론에 대한 이명호의 명쾌한 설명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텍스트들의 성좌적 공존이 드러내 보이는 벤야민의 순수언어는 니란자나에게, 번역이라는 작업이 가시화하는 이질적 시간성들 사이의 연관을 통해 구체화되는 역사성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니란자나는 벤야민의 번역론을 차용하면서 그의 역사관의 기조를 함께 자신의 탈식민주의적 관점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에, 비서구의 역사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서구의 비서구 번역이 대체로 탈역사적이었음을 비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기존의 번역행위에 내재해 있는 서구와 비서구 사이의 불균형적 관계 안에서 서구가 불충실한 번역자였음을 비판하고, 원전으로서의 비서구가 지니는 역사성을 벤야민적 아우라(aura)로 복귀시키는 새로운 번역을 제3세계가 능동적으로 실천할 것을 요청한다. 물론 니란자나가 이 실천의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지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서구의 역사가 어떻게 번역을 통하여 아우라처럼 텍스트 안에 기입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이론적 처방은 불가능하다.

    또 다른 문화번역이론가 레이 초우는 『원시적 열정』(Primitive Passions)에서, 니란자나의 문화번역이론이 원문과 번역문 사이의 위계질서를 그대로 인정하는 텍스트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초우에게 이러한 텍스트중심주의는 “서구뿐 아니라 비서구 사회 내에서도 계급 간의 위계질서를 세우는 문화의 지점”이다(192). 그리고 시각성을 중심으로 조직화되는 근대의 경험은 문자텍스트의 영역을 넘어서는 더욱 넓은 의미의 문화번역 개념을 통해서만 논의될 수 있다는 것이 초우의 전제이다. 초우는 서구의 비서구 번역이 줄곧 가져 온 식민주의적 관점에 대한 니란자나의 비판에 적극 공감하면서도, 그러한 비판에 입각한 번역의 시도가 비서구의 탈식민주의적 자기 재현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역설한다. 근대 이후 비서구는 서구와의 접촉을 통하여 서구화되고 타자화되었으며, 비서구의 전통이라는 것은 이미 본질이나 시원, 즉 오염되지 않은 원텍스트로 전제될 수 없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레이 초우는 “민족지학의 주관적 기원”을 반성적으로 돌아볼 필요성이 있다고 말한다(180). 한때 인류학적 관찰과 기록, 분석의 대상이었던 이들이 탈식민주의적 맥락에서 능동적으로 스스로의 문화를 관찰, 기록, 분석하는 자기재현 행위를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각적 대상으로 노출되는 것이 식민주의적 권력의 시선에 의해 대상화되는 것을 의미했다면, 민족지학은 자기 문화를 다른 방식으로 대상화하여 시각적으로 드러내고 재현하는 행위이다. 자문화를 재현하는 과정도 결국 일종의 ‘원텍스트’로 상정되는 문화를 특정한 방식으로 번역해내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초우에게 원본으로서의 문화란, 스스로의 진본성을 보증하는 동시에 번역의 가치 또한 보장해 주는 절대적인 것으로 상정되지 않아야 한다. “진정한 문화번역은, 두 항—동양과 서구, 원본과 번역—을 . . . 양자 모두 충만하고 물질적이며 십중팔구 똑같이 오염된, 똑같이 데카던트한, 현 시대 세계 문화의 참여자로 볼 때에만 가능하다”(195). 원본 역시 이미 “매개된” 것, “번역된” 것이며, 번역은 “이미 매개된 정보 내용”(already mediated data)을 서로 다른 매체 사이에서 이동시키는 행위(transportation)로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193). 바로 그렇기 때문에 초우에게 “근사/근접한 의미작용—즉 상이한 문화적 문자성들 혹은 체계들 안에 자리잡은, 가치들의 중재자(arbiter)로서의 의미작용”으로서의 번역이 관건이 되는 것이다(Chow 2008, 568, 원래의 강조). 그렇다고 해서 초우가 ‘차연’(différance)의 개념에 입각하여 의미의 ‘기원’을 부정하고 원문 자체가 일종의 실패라고 주장하는 식의 해체론적 사유를 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 선행하는 것으로서의 원문을 특권화하지 않는, 즉 권위 있는 원본을 모사하거나 재현하는 차원과 구분되는 창의적 행위로 번역을 이해한다고 볼 수 있다. 니란자나와 마찬가지로 초우에게도 이와 같은 인식의 지향은 매우 정치적인 결정을 내포한다. 서구를 보편 의미의 절대적인 기원으로 상정하는 것이나, 서구의 타자로서의 비서구를 그에 대응되는 또 다른 양태의 순수한 기원으로 치환하는 것은 서구와 비서구 간에 존재하는 불균형한 힘의 관계를 해결하는 방법이 될 수 없기에, 원본과 번역본, 기원과 차이 사이의 관계에 대한 기존의 관념들을 깨뜨리고 그것을 재정의하고 재구성하는 방식으로서 문화번역을 이론화고자 하는 것이다.

    벤야민이 근대적 매체로서의 사진과 영화에 주목했던 것과 유사하게, 초우는 근대의 경험이 대중문화의 시각적 특성으로써 가장 대표적으로 드러난다고 보고 영화를 문화번역적 실천의 가장 대표적인 장르로 간주한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영화는 사실중심주의(factualism)에 입각한 기존의 민족지학과 다르며 객관성이라는 개념 자체를 일종의 허구로서 해체하고 재구성하므로, 초우는 영화가 기존 인류학의 문화 재현의 방식에 도전하는 “재형식화된 민족지학”이자 문화번역의 새로운 매체가 된다고 주장한다(Chow 1995, 181). 탈식민주의적 주체성의 시각적 재구성은 시각의 장에서 주체와 대상, ‘보는 나’와 ‘보이는 그들’을 대립적으로 구분했던 전통적 인류학의 구도를 허무는 새로운 시도이다.3 초우에게 영화가 중요한 것은 또 그것이 벤야민적 의미에서의 “투명한” 번역을 가능하게 하는 문화적 매체라는 생각 때문이다. 초우는 문자텍스트중심적 문화행위는 전근대적 엘리트주의의 잔재이고, 텍스트 뒤에 숨은 의미를 궁구하는 해석학적 모델은 더 이상 다각화된 근대의 경험을 충분히 담아낼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해석이 개입하지 않는 “표피적” 번역행위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초우에게 벤야민의 「번역자의 과제」에 나오는 “축어성”(逐語性; literalness) 개념은 특히 유용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여기서 벤야민은 번역이란 원본의 언어가 담고 있는 의도나 깊은 의미를 발굴하여 다른 언어로 바꿔 쓰는 것이 아니라, 단어 하나하나를 그대로 번역함으로써 원본이 지향하는 순수언어에 함께 다가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초우는 벤야민의 “축어성”이 “시간과 공간에서의 타자성이 아닌, 동시성,” “여기, 지금을 지향하는 전달가능성”을 의미한다고 본다(Chow 1995, 200). 이것은 원본에 숨어 있다고 여겨지는 고정된 진리를 전달하려는 작업과는 사뭇 다르다. 벤야민은 문장의 의미를 의역하는 것이 순수언어의 의미를 가로막는 장벽이 될 수 있다고 보고, 각 단어의 축어성에 집중하여 충실히 직역을 하는 것으로써 순수언어의 의미를 통하게 하는 구성물, 아케이드를 건축하고자 하는 것이다. 벤야민이 말하는 번역이 아케이드로서 빛을 통과시키는 단어들의 구성물이라면, 단어의 축어성은 곧 초우에게서는 영화 등의 시각 매체가 제시하는 이미지의 파편성, 표피성, 투명성으로 전용된다. 초우에게 영화는 (그 상업성, 조야함 등에도 불구하고—혹은 바로 그러한 특성들 때문에) 근대의 문화적 경험을 투명하게 전달하는, 즉 축어적 문화번역을 가능하게 하는 “아케이드”가 되는 것이다.

    초우는 기호학적으로 매개된 상호작용의 과정에서 번역의 개념을 확장함으로써 “가장 기본적인 의미들의 상호작용에 관련되어 있으면서도 번역에 대한 더 실증적 혹은 학술적 접근에서는 쉽게 다루기 어려운, 문자로 읽을 수 없는 것들, 즉 액센트, 어조, 질감, 습관, 역사성, 부분적 기억, 오류이지만 빈번히 반복되는 것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야기되지 않은 것들까지도 고려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Chow 2008, 568). 초우에게, 전근대 및 비서구를 향하는 환상을 상업주의 문화의 연물(戀物; fetish)로 매개하는 서구 테크놀로지로서의 영화는 비서구와 서구의 근대적 교착뿐 아니라 문자중심적 의사소통의 차원을 벗어나는 의미작용을 번역해 내는 적절한 매질(媒質)이다. 초우는 영화를 비롯한 대중 문화의 시각매체가 “서구 지배의 (문학적, 철학적, 인식론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데 일조하고 문화들 사이의 조우를 유동적이며 열린 경험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Chow 1995, 197). 근대적 경험이 영화 등의 대중매체와 소비문화를 통해서 상품의 형태로 그리고 시각적으로 매개된다는 점에 대한 공감 때문에, 벤야민의 이론은 초우에게 더욱 유의미한 것이 된다. 이 공감은 상업화된 근대의 대중매체가 지니는 일종의 혁명적인 전복가능성에 대한 공감이기도 하다. 벤야민의 “축어적 번역”에서 착안하여, 시각 이미지들을 투명하게, 표피적으로 전달하는 영화매체가 근대적 경험의 탈식민주의적 “아케이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초우는 벤야민의 번역이론을 벤야민의 문화이론 전체로 확대하여 자신의 탈식민주의적 문화번역론과 접목시키는 시도를 했다고 할 수 있다.

    니란자나나 초우의 시도도 흥미롭지만, 벤야민의 번역이론을 더욱 독창적으로 ‘번역’한 사람은 역시 호미 바바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 전지구화의 시대에 문화적 차이와 동일시를 어떻게 의미화할 수 있는가는 다른 이론가들에게와 마찬가지로 물론 호미 바바에게도 중심적 의제이다. “탈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전지구적 공간의 문제를 다시 쓴다는 것은, 문화적 차이의 위치를 인구통계학적 복수성(plurality)의 공간으로부터 문화번역이라는 경계선적 협상으로 옮겨가는 일이다”(Bhabha 223, 전자는 원래의 강조; 후자는 필자의 강조). “주제(subject matter)의 전달을 넘어서는 번역의 요소,” “더 이상의 번역에 쉽게 스스로를 내주지 않는 번역의 요소”(Benjamin 257-58), 원언어와 번역어 모두를 비껴가는 그 무엇을 강조하는 벤야민의 번역론은 바바의 논의에서, 존재론적 틀 속에서 인식될 수 있는 어떤 총체적이고 초월적인 동일성의 개념에 의거하는 것이 아닌 ‘차이’의 의미화 및 경계선상의 접촉을 설명하는 데 매우 유용한 틀로 사용된다. 바바에게 문화적 차이란, “과거나 미래에서 찾아볼 수 있는, 좀 더 총체적이고 초월적인 동일성(혹은 정체성)의 효과”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Bhabha 219). 차이는 자아와 타자 사이의 침입적(侵入的; interstitial) 공간에서 수행적으로 경험되고 재현되는 것이며, 바바는 자아와 타자 중 어떤 하나를 특권화하는 것이 아닌, 차이들의 “수행”을 문화번역으로 보고자 한다. 문화적 차이의 수행성은 행위로서의 번역과 연계된다. 번역은 “정지상태의 언어”가 아니라 “행위 중인 언어”이기 때문이다(228).5 이로써 벤야민의 번역이론은 자본에 의해 탈중심화된 전지구적 공간에서의 행위주체로서 소수자의 담론이 지닐 수 있는 틈새적 수행성의 문제로 전환된다.

    ‘빵’이라는 물체를 의미하는 두 다른 언어의 낱말들이 빵을 가리키되 빵의 의미를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다는 벤야민의 진술(257)은, 기본적으로 차이들을 통해 작용하는 사회적, 문화적 의미화의 체계 속에서 끊임없이 각축하고 부유하는 기호들로 언어를 이해하는 바바의 (해체주의적인) 언어관에 의해 새롭게 조명된다. “모든 번역이 단지 잠정적으로 타협할 수밖에 없는 언어의 낯설음(foreignness of languages)”(Benjamin 257)을 바바는 문화 간의 소통에 있어서 손쉽게 전달되지 않는 그 무엇으로 설명하며, 이 낯설음은 의미화되지 않는 차이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벤야민이 과육과 분리된 껍질, 왕의 몸과 맞지 않게 풍성한 주름을 유비로 삼아 강조하는 번역의 “불일치”(disjunction)(258)는 바바에게는 틈새의 의미작용을 드러내 주는 이질성으로 이해되기에, 문화적 차이 속에서 차연적 정체성을 중요시하는 바바의 논의에서 의미심장한 은유로 작용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바바는 이 (언어적) 불일치에서 새로운 것의 도래를 가능하게 하는, “틈새가 지니는 미결정의 시간성”을 발견하면서 그것을 역사의 문제로 해석한다(Bhabha 227). 원텍스트의 의미작용은 매 순간의 시간성들 속에서 끊임없이 이 불일치와의 협상을 거친다. 그리고 문화적 차이가 번역되는 틈새의 공간에서 바바는 벤야민적인 현재의 시간성을 발견한다. 벤야민이 말하는 현재적 시간성은 연속체로서의 역사를 드러내는 것일 뿐 아니라 변화가 이루어지는 순간 자체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바바는 벤야민이 말하는 정지(standstill)의 순간은 바로 “역사적 전환의 글쓰기가 기이하게(uncannily) 가시화되는 현재를 정의하는 것”이며(224) 역사가 기술되는 바로 그 순간으로서의 현재라고 말한다. 바바의 이런 입장은 벤야민의 역사관을 탈식민주의적 세계관과 접목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번역은 두 언어 사이의 의미 교환에 불과한 것이 아니기에, 문화번역은 재현불가능한 상이한 공간성과 시간성의 경계들을 협상하는 문화적 소통의 행위일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번역은 시간과 공간의 불일치 가운데서 그 불일치들을 통하여 작동하는 것으로, 바로 이러한 번역개념을 연장하여 바바는 사회적 공간을 이분법적으로 구분(안/밖, 하부/상부구조 등)하는 기존의 사유틀 안으로 수렴되지 않는 소수자 담론의 수행적 가능성, 그리고 그에 기반을 두는 소수자 공동체의 의미화가 가능하다고 암시한다. 소수자의 담론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단순한 복수성의 문제가 아니라, “통약불가능한(incommensurable) 입장들 사이에서 행위주체성(agency)을 생산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231).

    3“‘viewed object’ is now looking at ‘viewing subject’ looking” (Chow 180-81).  4참고로, 국역되어 나온 발터 벤야민 선집의 번역은 약간 다른데, 다음과 같다. “진정한 번역은 훤히 비쳐나오는 번역으로서 원작을 덮지 않고 원작에게 빛을 가리지 않으며, 오히려 순수언어를 번역 자신의 매체를 통해 강화하여 그만큼 더 원작 위로 떨어지게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구문(構文)의 번역에서의 직역이 해낼 수 있으며, 바로 직역이야말로 문장이 아니라 낱말이 번역자의 근원적 요소임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문장이 원작의 언어 앞에 세워진 장벽이라면, 직역이 좇는 낱말은 홍예문(虹霓門, 아치문)이기 때문이다”(벤야민 137-38).  5“It [Translation] is language in actu (enunciation, positionality) rather than language in situ (énoncé, propositionality)” (Bhabha 228). 이것은 로돌프 가셰(Rodolph Gasché)의 표현을 바바가 차용한 것이다. 또 이는 언어 자체의 역사성과 변이 가능성, 원언어와 번역어 모두가 역사적 실체라는 점에 대한 벤야민의 강조와도 일맥상통한다(Benjamin 256).

    III. 문화번역의 책무―불일치(disjunction)와 그 함의들

    번역이 (언어행위가 필연적으로 그러하듯이) 권력의 조건들과 불가피하게 얽혀있다면, 중요한 것은 어떻게 권력이 문화번역의 과정 안에 개입해 들어오는가를 인식하고 거기에 대응하는 문화적 재현과 소통의 방법을 탐색하는 일이다. 그러나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 방법을 이론이 구체적으로 명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이 글에서 살펴본 문화번역론의 입장들이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은 번역이 담론적 실천인 동시에 문화적 교류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비담론적 실천이기도 하는 사실이다. 탈식민주의 지식인/번역자의 임무는 “본질주의적 반식민주의 서사를 해체하고 그것이 제국주의의 거대서사와 공모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Niranjana 167)일뿐만 아니라, 문화들의 접점에서 발견되는 불일치와 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을 직시하고 그것을 균질적 보편주의에 포섭되지 않는 재현의 영역으로 가능한 끌어낼 수 있도록 시도하는 것이다.

    번역의 정치화, 번역의 능동적 탈식민화를 주창한 니란자나에 뒤이어 초우는 유럽 식민주의가 비서구 세계에 남긴 가장 두드러지는 유산으로서의 ‘근대’ 속에서, 더 이상 ‘기원’으로서 존재하지 않는 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근대의 언어로 기술하는 일이야말로 오늘날 문화번역의 큰 과제라고 본다. 상이한 문화적 집단들 사이의 차이뿐 아니라, 상이한 시간성 사이의 차이가 근대의 우월성을 전제하는 관점에서 번역되는 데에 문제를 제기하는 초우는, 전근대와 근대의 역사적 단절과 간극을 가로지르는 소통의 차원에서 번역의 문제를 재고한다. 문화 번역이 서구의 비서구 번역이나 비서구의 서구 번역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통에서 근대로, 문학에서 시각성으로, 엘리트 학자적 문화에서 대중문화로, 토착적인 것에서 외래적인 것으로의 변화들, 또 그 반대 방향으로의 변화들을 포함하는 활동의 영역 전체를 아우르는 과정”(Chow 1995, 192)을 고려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번역이 지녔던 문자중심적 전통을 해체하고 니란자나의 이론보다도 더욱 급진적으로 번역의 의미와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이다. 그가 꼽는 문화번역의 가장 절실한 과제들 중 하나는, 자문화에 대한 이해와 재현의 차원에 고착되어 있는 식민주의적, 서구중심적 인식틀을 비판하는 실천이다.6 초우와는 다른 관점에서, 호미 바바는 역사와 시간의 틈새적 위치를 점유하는 소수자, 이주민의 정체성이야말로 “쉽게 번역에 스스로를 내주지 않는 그 무엇”으로서, 전지구적 관점에서의 현대를 특징짓는 재현불가능성을 가시화하는 지점이라고 본다.

    이러한 이론적 전유의 유용성에 공감하더라도, 질문들은 남는다. 벤야민이 모든 언어들 사이의 공통적 의미로 규정한 ‘순수언어’는 번역의 최종적 지향인데, 그렇다면 문화번역의 벤야민 차용에서 이 순수언어의 내용이나 역할은 무엇인가? 이 점을 쉽게 설명하기란 어렵다. 벤야민의 순수언어는 존재하는 언어의 차원으로 편입되지 않는, 언어체계를 넘어서는 언어의 영역을 가리키는 것이기에, 오염된 텍스트들이 담아낼 수 없는 순수한 전통(초우의 경우)으로나 혹은 의미화되지 않는 이질적 문화들 사이의 차이(바바의 경우)로 그 의미를 한정할 수 없다. 일종의 유비적 관계를 설정하여 문화번역론이 벤야민의 번역론을 차용하면서 생겨나는 이 문제는 벤야민이 언어철학의 기반 위에서 시적인 모델을 표면적으로 염두에 두고7 번역을 논했던 것과 달리 니란자나를 비롯하여 초우와 바바 모두가 번역을 정치적인 모델로 확장한 데서 오는 불일치의 지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문화번역은 지배와 피지배의 역학 속에 놓인 언어들이 번역의 과정을 통해 공동 저자의 관계로 재규정될 수 있다고 믿는다.8 초우는 이러한 재규정이 폴 리쾨르(Paul Ricoeur)가 번역자의 책무로 규정하는, 상이한 언어·문화들 사이의 등가성(equivalence)의 재확립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이 등가성의 정치적 확립이 일종의 문화적 균질화로 이어질 현실적 우려 역시 끊임없이 경계해야 할 문제다. 게다가 이 등가성을 “번역이 미리 상정해 두는 것이 아니라 번역에 의해 생산되는 것”(Ricoeur 35, 원래의 강조)이라고 보는 리쾨르는, 이 등가성을 생산해내는 ‘완벽한’ 번역이란 상실된 이상임을 암시하고 있다. 원언어와 번역어 사이의 위계질서를 부정하는 벤야민의 논리가 궁극적으로 번역될 수 없는 그 무엇에 대한 지향을 바탕으로 하는 것과도 유사하다. 문화번역은 리쾨르가 말하는 등가성의 생산이 특히 식민주의의 역사적 현실 안에서 손쉽게 성취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생겨난 담론적 실천이지만, 벤야민이 가리키는 ‘번역불가능’한 영역을 가능성으로 전환하려는 사고틀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벤야민의 번역론과는 궁극적인 불일치의 지점에 서 있다.

    하지만 이 불일치와 생산적인 전유는 상호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번역을 이론화하는 벤야민의 텍스트를 일종의 순수언어, 즉 절대적 의미를 담지하는 기원적 서사로 간주해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폴 드만(Paul de Man)을 비롯한 탈구조주의 해체론의 입장이 벤야민의 번역론을 철저히 기호체계로서의 언어의 논리 안으로 한정시켜 해석하면서 벤야민 특유의 역사관을 충분히 살려내지 못하고 번역의 ‘불가능성’과 필연적 ‘실패’라는 차원에 치중하는 크나큰 문제점을 지녔던 반면,9 탈식민주의 문화번역 담론은 벤야민의 번역론의 기저에 놓인 역사와 해방의 가능성들의 가치에 특히 주목한다. 레이 초우가 언어 텍스트만으로 번역의 범위를 한정하는 데 회의적이고, 니란자나가 언어중심적 관점에서 번역에 접근하는 입장에 특히 비판적인 것은, 폴 드만 식의 해체적 독법이 언어담론의 해체를 이야기하면서도 역사조차 언어작용으로 환원하는 언어중심주의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점에 대한 각성 때문일 것이다. 문화들 사이의 경계적 공간에서 부유하는 소수자의 위상,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의 미결정성은 문화의 번역불가능한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미결정성의 영역을 해방을 기다리는 ‘잠재성’으로 해석함으로써, 순수언어는 문화번역적 실천에서 그 정치적 의미작용의 가능성을 부여받게 된다. 그리고 호미 바바는 벤야민의 번역이론을 탈식민주의적 틀로 유용하게 번역해낼 뿐 아니라 자신의 벤야민 번역을 구체적인 이주의 역사 속에 위치짓고 접목하는 시도를 함으로써, 니란자나 등이 문제시하는 탈역사화 혹은 평면적 역사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다.

    벤야민의 사유를 추동하는 역사가 유물론의 역사라면, 궁극적으로 바바를 비롯한 탈식민주의 이론가들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역사, 그리고 이산의 역사이다. 만약 그렇다면, 두 사유가 교통하는 가운데 둘 사이에 존재하는 불일치를 우리는 또 어떻게 문제화하고 이론화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불일치에 대한 인식 및 그에 대한 성찰이 벤야민을 차용하는 탈식민주의 문화이론에 전적으로 부재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가령 바바는 전지구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그의 탈식민주의적 문화번역론의 배경으로 도입해 옴으로써 벤야민적 역사관의 유물론적 기반과의 조우를 시도한다. 자본과 전지구화를 비판하는 포스트 계열의 이론들 대부분이 마르크스주의를 자본주의 비판의 도구로 부분 채택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대부분을 폄하 혹은 기각하는 것과는 다소 다르게, 적어도 이 글에서 살펴본 탈식민주의 문화번역론은 벤야민의 번역론과 근대문화에 대한 비판의 관점들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여 전유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더 저항적인 힘을 도출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불일치는 이론의 의미화에 스스로를 쉽게 내주지 않는 이론의 순수언어, 모든 이론적 사유가 공유하되 완성해내지 못하는 바로 그것,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비평적 담론의 유토피아적 이상, 그것의 현재적 불가능성을 가리키는 것일지 모른다. 탈식민주의 문화번역론들은 이와 같이 벤야민의 번역론과 함께 성좌적 관련성을 형성하며, 그 관련성 안에서 이론의 순수언어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불가능성을 실패로 환원하지 않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잠재성의 흔적으로 정치화하는 것이 비평의 윤리이기도 하다.

    문화번역은 통약불가능한 것들 사이의 불일치를 인식하는 동시에 가로지르는 시도이다. 하지만 어쩌면 문화번역이 물어야 할 더 근원적인 질문은, 오늘날 문화라는 것이 어떻게 정의될 수 있으며, 과연 그 문화를 재현할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지, 서로 구분되는 문화적 실체들이 있다면 그것들 사이의 ‘경계’는 과연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이 질문들에 대한 답 또한 수없는 불일치들의 충돌과 재생산일 수밖에 없다. 탈근대와 탈제국주의, 탈식민주의 시대에도 “주로 제국주의적 그리고 자본주의적 성공으로 동력을 얻은” 특정 언어 및 사고틀은 여전히 “그보다 약하거나 덜 성공을 거둔 다른 언어들을 가치절하 하는 척도로서의 보편적인 등가물로서, 메타언어 혹은 메타체계로서 인정을 받는다”(Chow 2008, 570). 그런 점에서 레이 초우가 상기시키듯, 상이한 언어와 문화들 간에 존재하는 불균형을 가로지르는 번역자의 노력은 언제나 일종의 배반이 될 수도 있다. 불가능을 가능성으로 전환하는 노력이 이론적 사유의 영역에서 이룰 수 있는 성취는 아직 미미하다. 탈식민주의적 문화번역론이 추구하는 통약불가능한 문화들 간의 반식민주의적 소통은, 가령 실제 언어학습시장의 현실이 단적으로 드러내는 서구언어와 비서구언어들 사이의 시장수요 즉 힘의 불균형을 생각하면 아직도 요원한 과제이다. 그러나 벤야민의 번역론이 역설하는 번역의 불가능성은 이러한 정치적 현실과 문화적 주체의 딜레마에 대한 적실한 비판적 사고의 출발점임이 틀림없다.

    6레이 초우의 이러한 입장은 「배신자로서의 번역자, 애도자로서의 번역자」(“Translator, Traitor; Translator, Mourner”)와 같은 최근의 논고들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7잘 알려진 바와 같이 「번역자의 과제」는 벤야민이 보들레르의 시를 독일어로 번역한 후 그에 대한 서문 격으로 쓴 글이다.  8이 점에 대한 논의로는 특히 리디아 리우(Lydia H. Liu)의 글(특히 34-37면)을 참조할 것.  9벤야민의 번역론에 대한 드만의 해석은 그의 저서 『이론에 대한 저항』(The Resistance to Theory), 73-105면을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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