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tudy on the Aesthetics of Park Chan Wook’s movie Through the Plot of Revenge

복수의 플롯을 통해 본 박찬욱 영화의 영화미학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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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The plot of director Park Chan Wook’s ‘revenge trilogy’is examined above, and by doing so, the aesthetic experience and attitude are sought. The common feature of the three films is that the outcome of revenge does not necessarily end up with complete justice. Victim is a victim, but also another harmer, at the same time. Therefore, audience cannot be sympathetic to them. Sometimes, they turn to more vicious harmer than the original harmer. Park wants to say that it is human destiny that they cannot escape from the vicious circle of revenge. To tell the aesthetic attitude revealed from the trilogy of revenge of Park, it is the aesthetics of redemption, in which existence human beings as a mere animal is described and, paradoxically, craving redemption. His works, which share the philosophy, uses various methods and attitudes in contents and style, showing his unique art world not belonging to a place in Aristotelian traditional movie aesthetics or anti-Aristotelian movie aesthetics.


    본 논문은 박찬욱의 복수시리즈 3부작의 플롯을 분석하여 그 미적 태도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이들 작품은 그 추구하는 내용과 형식에서 일관성을 보이지 않고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다양한 이들 세작품의 공통점을 추출해본다면, 이들 작품에서 복수의 귀결이 완전한 정의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관객은 복수의 플롯을 통해 억울함과 분노를 느낀다. 그리고 그러한 분노로부터 관객을 지키기 위해서는 완전한 정의가 세워져야 한다. 즉 이러한 플롯을 사용할 때는 도덕적 근거를 분명히 제시해서 정당한 행위와 정당하지 못한 행위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나 박찬욱의 복수시리즈 3부작에서는 그러한 명확한 구분이 없다. 피해자는 피해자이면서 또 다른 가해자이다. 그러므로 관객은 이들을 동정조차 할 수 없다. 때로는 이들은 가해자보다 더욱 악랄한 가해자로 변모한다. 이러한 복수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는 것이 박찬욱이 말하고자 하는 바인 것 같다. 그런 경우 인간에게 구원은 가능한 것인가. 그러므로 이들 복수시리즈의 플롯분석을 통해 본 박찬욱 영화의 미학적 특징은 바로 이와 같이 영상표현으로는 폭력의 미학을 보여주면서도 역설적으로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이중적인 관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점이 플롯분석을 통해서 박찬욱 영화의 영화미학을 고찰하고자 할 때 드러나는 새로운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즉 박찬욱 영화의 영화미학은 그동안 영상이미지의 측면에서 폭력의 미학을 중심으로 이야기되어 왔다면, 플롯분석을 통해 그에 못지않게 박찬욱 영화에 있어서 구원의 의미가 중요함을 밝힘으로써 박찬욱의 영화미학의 특징이 바로 이러한 내용과 형식의 불일치, 이중적 관점에서 비롯함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박찬욱 영화에 대한 시야를 확대하고자 하는 시도이며, 어떤 면에서는 이러한 이중적 관점으로 인해 박찬욱 영화가 한국과 그리고 세계에서 동시에 인정받는 요소로도 작용할 수 있다고도 본다.

  • KEYWORD

    plot of revenge , Aesthetics , coincidental event , characteristic fault , empathy

  • 1. 들어가는 말

    영화는 종합예술이다. 이와 함께 영화가 현대문화의 정수라는 점에서 영화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문화와 예술, 그리고 사회와 과학 분야, 또한 각종 산업과 기술분야에서 다양하게 다양한 관점으로 조망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러한 다양한 관점을 한편의 논문을 통해 일목요연하게 조망하거나 혹은 일일이 열거하기는 어려운 시점이라고 여겨진다. 이제 영화는 각 연구자의 입장에서 각자가 영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관점을 제시하면서 각각의 입장에서 보는 영화연구로 한정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본 논의는 영화를 드라마의 관점에서 보는 입장을 취하도록 하겠다. 본 연구자는 이러한 입장을 이미 표명한 바 있는데, 극문학이라는 공통분모 아래서 희곡과 시나리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지적하면서 연극과 영화의 관계에 대한 두가지 다른 태도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1) 즉 영화가 연극으로부터 독립되고자 하는 바람이 하나의 입장이라면, 다른 한가지의 입장은 영화를 또 다른 차원에서 드라마 양식을 발전시킨 것으로 보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본 논의는 이러한 입장 중 후자의 입장을 지지하며, 이는 영화와 텔레비전과 같은 영상매체가 극적인 이야기를 시간적ㆍ공간적 제약 없이 표현할 수 있게 했으며, 강력한 시각적 이미지의 이야기를 가능하게 한 것으로서, 영화와 텔레비전을 20세기가 낳은 새로운 드라마 매체로 이해해야 한다는 입장인 것이다2)

    영화를 이러한 드라마의 관점에서 봤을 때, 영화를 분석하는 도구로서 플롯 분석은 매우 유용한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창작을 위해서는 이 플롯분석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여겨지는데, 그것은 이 플롯의 개념을 제일 처음 사용한 이론가가 아리스토텔레스였고, 그가 이러한 개념을 제시한 이후 극작법의 기초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로 인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최초의 문예비평론이면서, 동시에 창작론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영화를 드라마의 관점에서 봤을 때 플롯분석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했듯이 창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본 논의는 이 플롯분석을 통해 시나리오창작방법론을 모색해보고자 하는데 궁극적인 의의를 두고자 한다. 그리고 시나리오가 영화를 위한 극본이라는 점에서 한 영화작품이 표현하고자 하는 미학의 근본개념을 함유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이 플롯개념을 통해 궁극적인 영화미학까지 도출해보고자 하는 것이 본 논의의 의도이다.3)

    이와 같이 플롯의 개념을 통해 영화의 궁극적인 의미를 살피고자 하는 시도의 이론적 기초는 마이클 티어노의 『스토리텔링의 비밀』에서 찾을 수 있다. 마이클 티어노는 이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으로 영화를 설명하면서, 영화 한편을 총괄하는 하나의 핵심적인 개념으로서 플롯의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즉 플롯은 넓은 의미로 볼 때, 스토리텔링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며 이때 플롯은 시청각적인 이미지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종래의 영화연구가 시청각적 요소와 같은 영상표현에 주목하여 이루어져 왔다면, 마이클 티어노는 영화에서 시 청각적 이미지는 극적 행동의 강도를 높여준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고 말하고 있다.4) 즉 시청각적 이미지는 “관객들이 반드시 간직하고 집중해야 할 플롯라인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고, 즉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강도를 더할 수 있도록 플롯라인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은 시나리오 창작에 있어서 더욱 유효한 관점이라고 여겨지는데, “시나리오 작가는 카메라 앵글이나 자세한 숏의 기법에 관해 쓸 책임이 없다. 그것은 작가의 일이 아니다. 무엇을 어떻게 찍을 것인가를 감독에게 일러주는 것이 시나리오 작가의 일은 아니다.”5)라는 것이 대부분의 시나리오 작법서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D.하워드와 E.마블리 또한 영화가 관객에게 어떻게 보여지는가에 대한 시발점을 제공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시나리오이지만, 시나리오 작가의 제안은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고 있다.6)

    본 논의는 이와 같은 관점에서 플롯분석을 통해 박찬욱의 복수시리즈 세작품에 나타난 영화미학을 고찰하고자 한다.7) 플롯중심의 전통적인 미학은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기대게 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관객으로 하여금 카타르시스에 이르게 할 수 있도록 플롯이 정교하게 조직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드라마의 궁극적인 체험이 이 카타르시스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8) 다른 한편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에 반박하면서, 브레히트는 소외효과를 주장하게 되는데 소외효과는 동일화와 몰입을 통한 카타르시스와는 달리, 심미적 거리와 관객의 이성적이고 비판적인 인식을 주장하는 상반된 태도를 보임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와는 그 미학적 태도를 달리한다.9) 이와 같이 플롯을 중심으로 한 영화미학의 대표적인 두 가지 태도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예술관과 그에 반발한 반아리스토텔레스적 예술관을 들 수 있다면, 본 논의는 박찬욱의 복수 시리즈 3부작 <복수는 나의 것>, <올드 보이>, <친절한 금자씨> 에 나타난 복수의 플롯을 통해 박찬욱이 과연 어떠한 영화미학을 드러내고 있는지 규명해보고자 한다. 이들 작품은 박찬욱의 일련의 연작시리즈로서 공통적으로 복수의 플롯을 차용하고 있다. 한 작가가 하나의 플롯을 연작시리즈로 만들어낸다는 것은 작가의식에 있어서 그 플롯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작가의 작품세계와 그 미학적 특징을 추출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졸고, 「<날보러와요>와 <살인의 추억>의 비교 연구」, 『한국문예창작』, 한국문예창작학회, 2005,12.  2)『극마당: 기호로 본 극』에 나타난 마틴 에슬린의 입장이 이런 것이고, 또 『스토리텔링의 비밀』의 입장 또한 이러한 관점을 취한다. 마틴 에슬린 지음, 『극마당: 기호로 본 극』, 김문환 김윤철 옮김. 현대미학사, 1993, 마이클 티어노, 『스토리텔링의 비밀』, 김윤철 옮김, 아우라, 2008.  3)“한 영화가 가지고 있는 최초의 비전은 어디까지나 시나리오작가의 전유뮬이다”라고 다음의 책은 말하고 있다. D.하워드ㆍE.마블리 공저, 『시나리오 가이드』, 심산 옮김, 한겨레신문사, 2004, 21쪽  4)마이클 티어노, 앞의 책, 169쪽.  5)사이드 필드, 『시나리오란 무엇인가』, 유지나 옮김, 민음사, 2008, 188-189쪽.  6)D.하워드ㆍE.마블리 공저, 앞의 책, 149쪽.  7)이 지점에서 플롯분석을 통해 드러난 영화미학이 과연 누구에게 귀속되는가 하는 논의가 제기될 수 있지만, 본 논의에서는 플롯개념이 시청각적 이미지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감독에게 마지막으로 귀속된다고 보고 있다.  8)서인숙은「미학적 분석비평」에서 ‘감동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예술은 훌륭한 미학성을 지녔지만 그렇지 못한 작품은 미학적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이런 보편적 판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부터 하나의 정석으로 굳어지면서 미학의 정론으로 오늘까지 영향력과 권위를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서인숙, 『영화비평의 이론과 실제』, 집문당, 1998, 153-159쪽.  9)위의 논문, 156쪽.

    2. 우연적인 사건과 카타르시스의 부재: <복수는 나의 것>

    복수의 플롯은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패턴이다.10) 이후 이러한 복수의 플롯은 일정한 형태로 많은 문학과 예술작품에서 반복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대중영화를 통하여서도 이러한 복수의 플롯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형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복수의 플롯은 일반적으로 3단계로 이루어지는데, 첫 번째 단계는 범죄로서 주인공과 그의 사랑하는 사람은 갑자기 일어난 끔찍한 사건으로 인해 행복을 빼앗기게 된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는 주인공이 복수를 계획하면서 시작되고 따라서 복수의 계획과 추적이 다루어진다. 그리고 세 번째 단계는 대결의 국면으로서 마지막 범죄자가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복수의 3단계를 통해서 관객은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깨끗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카타르시스의 핵심, 곧 감정의 정화인 것이다11)

    그런데 <복수는 나의 것>에서 보여주는 복수의 플롯과 그 정서는 이러한 카타르시스에 이르게 하는 정서와는 구분된다. 그렇다고 해서 카타르시스에 반발하여 이성적이고 비판적인 감상효과를 노리고자 했던 브레히트의 서사극의 정서에 맞닿아 있는 것도 아니다.12) <복수는 나의 것>은 전통적인 복수의 플롯을 차용하면서도 어느덧 그것을 비껴나 있다. 이러한 정서와 태도는 어쩌면 ‘복수의 플롯을 통한 카타르시스의 부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점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복수는 나의 것>은 류(신하균 분)의 열악한 상황에 대한 묘사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류와 류의 연인 영미는 류를 해고한 사장의 딸을 유괴하기 위해 사장의 집으로 간다. 그런데 그곳에서 사장의 딸과 친구인 자신의 딸을 데리고 가기 위해 우연히 나타난 동진(송강호 분)을 보게 된다. 그곳에서 동진이 해고한 직원의 행패를 보게 되자, 만약 자신이 자신의 사장의 딸을 유괴할 경우, 제일 먼저 용의자선상에 오를 것임을 알게 된 류와 영미는 정말 우연히 나타난, 그리고 자신들의 인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동진의 딸을 유괴하기로 한다.

    그리고 류는 동진에게서 누나를 수술할 수 있는 돈을 받아오지만, 그사이 누나는 류가 자신 때문에 해고당하고 더구나 자신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이까지 유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자살하고 만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오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과도 같은 플롯 유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을 팔지만, 역시 상대방도 자신과 똑같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가장 아끼는 것을 팔아버림으로써, 원래 그것이 필요했던 이유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그 이유가 누나의 생명이었다. 누나의 생명을 위해 해고당하고 사기당함으로써 돈과 신장까지 잃어버리고 아이까지 유괴해서 마침내 수술비를 마련해오지만, 그러한 돈이 필요했던 이유, 즉 누나는 자신의 생명이 구차스럽다며 동생을 위해 스스로 삶을 마감해버리고 만 것이다.

    이로 인해 류가 누나의 시신을 강가에 묻으러 가자 아이는 물장난을 하다 물에 빠진다. 그 사이 청각장애인인 류는 아이의 절규를 듣지 못하고, 아이는 물에 빠져 죽게 된다. 아무런 의도 없이 단지 우연한 사고로 아이가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류는 범죄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범죄의 가해자가 되고 만다. 이로써 또 다른 복수의 주체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아이의 아버지인 동진인 것이다.

    동진 또한 류와 마찬가지로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왔던 사람이다. 그로 인해 동진은 자신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나름대로 착하게 살았다. 도대체 왜 날⋯⋯’ 이와 같이 착하게 살아왔던 사람이 어느 날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했을 때, 누구라도 한 번씩은 읊조렸음직한 대사를 동진도 내뱉게 되는 것이다. 단지 딸의 친구를 우연히 배웅해주었다는 이유로 류와 영미의 표적이 되어버린 동진은 이내 물에 빠져죽은 딸의 환상을 본다. 마치 햄릿의 아버지가 유령이 되어 햄릿에게 나타나 복수를 부탁한 것처럼, 동진은 딸의 환상을 보고 복수를 결심하게 된다. 그로 인해 여기까지 복수의 플롯의 1단계가 완성된다. 이제까지 주인공과 그의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일어난 범죄로 인하여 행복을 빼앗기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관객과 주요 인물들 간에 강한 정서적 다리를 놓아주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후의 과정은 그러한 복수의 플롯의 2단계로서 주인공이 복수를 계획하고 추적해가는 과정을 그린다. 다만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그러한 추적자가 두 명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이 두명의 입장을 관객들이 모두 공감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점에서, 1단계에 상당부분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고 할 수 있다.13)

    이후 2단계에서는 이 두 명의 추적자가 동시에 자신의 가해자를 찾아 나서면서 복수를 계획하고 실행한다. 류는 영미와 함께 장기밀매사기단을 유인할 계획을 짜고 동진은 죽은 류의 누나가 아이에게 남긴 전화번호를 단서로 추적을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동진은 자신이 해고한 노동자를 유력한 용의자로 삼고 그의 집을 찾아가지만, 그의 가정은 이미 집단자살을 시도한 후이다. 동진 또한 의도는 없었지만, 또 다른 가해자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동진은 그중 살아있는 아이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병원으로 옮긴다. 그리고 류의 집을 찾아가 단서를 추적해가는 중, 영미의 차번호를 알게 된다. 영미는 류를 위해 장기 밀매사기단의 위치를 파악한 후이다. 그로 인해 류는 장기밀매사기단의 본거지를 찾아가 잔혹한 방법으로 복수를 실행하고, 동진은 영미를 찾아와 전기고문을 하여 영미를 죽인다. 류와 동진의 이와 같은 추적장면은 교차편집을 통해 번갈아 보여지며, 이 과정에서 보여지는 복수의 잔혹성과 폭력성은 한때 이들이 착하고 선량했던 사람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잔혹한 본성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한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복수를 ‘야생의 정의’라고 불렀다. 문학에서 이 플롯의 지배적인 동기는 분명하고 당당하다. 그로 인해 독자는 불의에 격분하고 잘못을 바로잡고자 한다14) 그런데 <복수는 나의 것>에서 류와 동진은 정의를 실행하는 사람들로 보여지지 않는다. 복수의 첫번째 원칙은 처벌은 범죄와 맞먹어야 한다는 것이다.15) 그런데 이들의 복수는 과도한 것으로 보인다. 류는 장기밀매사기단 3명의 신장을 꺼내 씹어 먹는다. 그리고 동진은 영미를 전기고문하여 죽인다. 장기밀매사기단이 류의 신장을 꺼내 팔아버렸다는 점, 그리고 아이가 우연히 물에 빠져 죽었다는 점을 통해 볼 때, 이들의 복수는 과도하게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물론 복수는 정서적으로 강렬한 플롯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억울함과 분노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이러한 플롯을 사용할 때는 도덕적 근거를 분명히 제시해야 하고 관객을 그러한 끔찍한 분노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는 완전한 정의가 세워져야 한다. 그런데 류는 사기단의 신장을 씹어먹고, 동진은 오줌을 질질 싸는 영미에게 담요를 덮어씌워 고문을 한다. 복수의 3단계에 가면 동진이 류와 똑같은 부류의 사람으로 변하게 된다는 점을 통해 볼 때, 박찬욱은 과연 이 적나라한 장면들을 통해 무엇을 의미하고 싶었을까. 인간이란 겉으로는 문명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한꺼풀 벗기면 동물이나 다름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 2단계에서 관객은 어떤 것이 정당하고 정당하지 못한 행위인지 명확히 구분이 되지 않은 채 3단계를 맞이하게 된다. 피해자들도 가해자와 충분히 똑같아질 수 있는 사람들이며, 오히려 가해자들을 능가할 수도 있다는 것이 이들 장면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여하튼 이러한 추적과정을 통해 마침내 류와 동진은 맞닥뜨리게 된다. 3단계의 대결장면으로서 이 3단계에서 동진이 프로타고니스트가 된다. 류는 2단계에서 자신의 복수를 이미 완성하였으므로 이제 자신의 범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동진은 이 3단계에 이르러 류와 똑 같은 사람이 된다. 결말부분에서 동진은 류를 어떻게 하면 너무 쉽지 않게 죽일 수 있을까를 연구하며 류를 죽이고 그의 사체를 토막내어 묻으려 한다. 그러한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이다. 해고노동자의 아이가 마침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후, 시신을 찾아가라는 말에 전화 잘못걸었다며 냉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리는 장면에서 동진의 변화를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서로 물고 물리는 복수의 대장정이 비로소 끝나는가 하는 순간에, 한 일행이 찾아와 동진을 한사람씩 칼로 응징하고, 판결문을 동진의 가슴에 꽂고 돌아간다.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의 일원으로서 자기를 죽이면 아저씨도 죽는다는 영미의 말이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던 것이다. 죽어가는 동진은 자신이 왜 죽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서 죽어가는 순간에도 자신의 가슴에 꽂힌 판결문을 읽어보려 한다. 그러나 그는 끝내 자신이 왜 죽는지 알지 못하고 죽어간다. 그리고 동진과 함께 관객도 그 이유를 끝내 알지 못한다. 동진이 자신의 복수를 추적해가는 중에 우연히 집단의 일원을 건드려 그 집단으로부터 응징 당한다는 사실 외에는⋯⋯.

    이와 같이 <복수는 나의 것>은 범죄가 시작되어 프로타고니스트가 그를 추적해가고, 마침내 안타고니스트와 대적하여 그를 물리치고 정의를 세운 다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는 전통적인 복수의 플롯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복수의 플롯의 3단계를 차용하면서도 어딘가 그를 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본 연구자는 그러한 원인을 이러한 플롯을 연결시켜가는 계기점이 우연적인 사건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찾고 있다. 범죄가 우연한 사건에 의해 이루어짐으로써 우리가 범죄에 대해 명확하게 부정적인 감정을 가질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명확한 나쁜 의도도 없이 우연한 사건에 의해 범죄가 이루어짐으로써,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그러한 과정이 물고 물리면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피해자와 가해자가 될 수 있음으로 해서 선과 악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것이다. 또한 피해자가 가해자보다 더욱 악랄한 범죄를 자행할 수 있게 됨으로 해서 우리가 과연 이들 인물들에게 동정심을 가질 수 있는지조차도 의문스럽다. 그러므로 <복수는 나의 것>은 완전한 정의나 도덕적 근거를 제시하여 관객들에게 감정의 정화를 이루게 하는 카타르시스와는 달리,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동물적인 존재인가를 확인시켜주며 그러한 복수가 끊이지 않고 순환되어갈 것임을 암시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그러한 복수의 악순환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어두운 인식에 갇히게 함으로써 감정의 정화라는 전통적인 카타르시스와는 거리가 먼 관극체험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인식이 소외효과와 같은 냉철한 이성적인 거리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이 작품은 강렬한 시각적 효과와 잔혹하고 선정적인 장면들을 통해 관객들을 정서적 충격에 몰아넣음으로써 그러한 이성적 거리감을 확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 작품에 나타난 시청각적 이미지는 이야기의 흐름을 전개시키기보다는 이야기를 과장하고 일그러뜨리는 시각적인 강렬한 이미지와 폭력적인 사건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와 같은 미장센은 감독이 하나하나 공을 들여 정밀하게 만들어낸 시각적 이미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모습은 그로테스크함이나 과감한 중략으로서 점프컷, 그리고 알몸과 성, 폭력과 같은 원초적인 이미지를 적나라하게 노출하는 것, 그리고 류의 초록머리와 같은 일탈된 이미지 등을 통해 우리의 일상을 낯설게 하고 비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낯설게 하기는 성찰의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 강렬하고 폭력적인 이미지로 인해, 오히려 이작품의 드라마틱한 효과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 변형을 통해 카타르시스의 부재를 느끼게 하는 독특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0)로널드 B. 토비아스는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스무가지 플롯』(김석만 역, 풀빛, 2009)에서 그리스 비극 <메데이아>를 과도한 복수의 예로 설명하고 있다. 이와 함께 그리스 비극에서는 복수의 플롯을 많이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당시 자신의 인척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복수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회ㆍ 문화적인 풍습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분위기는 당대 3대 극작가 중의 한 사람인 에스킬러스의 <오레스테스> 3부작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오레스테스가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자 복수의 여신들이 그를 쫒아다니고, 아테나 여신이 이들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11)이상의 복수의 3단계와 카타르시스에 대한 설명은 앞의 책, 「복수의 플롯」 부분을 참조할 것. 172~189쪽.  12)브레히트는 ‘소외효과’를 위한 새로운 연극의 개념으로 ‘서사극’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이원양, 『브레히트 연구』, 두레, 1988, 24~73쪽 참조. 본 논문에서 ‘소외효과’와 ‘서사극’의 개념은 종종 혼용되어 사용되게 될 것이다.  13)작품에 나타난 시간배분의 양상은 김윤정의 「박찬욱 복수 3부작에서의 ‘복수’의 의미」,『한국 현대문학 연구』20집, 한국현대문학회, 2006, 12, 637~662쪽 참조.  14)로널드 B. 토비아스, 앞의 책, 172쪽.  15)위의 책, 175쪽

    3. 사소한 성격적 결함과 카타르시스의 부재: <올드 보이>

    <올드 보이>의 플롯은 <복수는 나의 것>에 비교해볼 때, 인물의 성격이 강조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주인공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복수에 휘말려 들어가는 우연한 상황들이 주목되었던 것에 비해 보면, <올드 보이>는 오대수와 이우진의 대결이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로서 작품의 중심축을 이루어 강렬한 충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충돌이 오대수의 사소한 성격적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전통적인 그리스 비극에서 보여주는 주인공의 성격적 결함에 의한 운명비극이라는 플롯으로 보여질 수도 있지만, 그러한 플롯과는 약간 구분되는 지점이 있다. 그것은 오대수의 성격적 결함이 매우 사소한 것이어서 오대수의 운명을 그렇게 신체적 정신적으로 황폐화시키는 대재앙을 몰고 올만한 것이었는가에 대해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성격적 결함으로 인한 운명비극’이라는 전통적인 플롯을 차용하면서도 그러한 플롯이 주는 카타르시스라는 관극체험과는 다른 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운명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운명비극이라기보다는 복수로 인한 하나의 대참극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점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작품의 시작은 오대수가 건물옥상에서 자살하려는 남자를 붙들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이야기 속에서 오대수는 평범한 남자였다. 그런데 그가 아무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납치를 당하여 15년동안 군만두만 먹으며 감금된다. 관객은 이와 같은 오대수의 이야기를 통해 복수의 플롯의 첫번째 단계를 체험하게 된다. 범죄로 인하여 선량하던 가족이 피해를 입게 되는 지점, 즉 오대수가 납치를 당하고 그의 아내가 살해되며 본인이 살해범으로 지목되어 도망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보통사람이 이런 일을 당한다면 얼마나 끔찍할 것인가라는 생각에 오대수에게 동정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15년이 지나 오대수가 스스로 탈출할 수 있게 되기 바로 직전, 오대수는 최면이 걸리고 건물옥상에서 풀려난다.

    그러므로 작품의 시작은 바로 복수의 플롯의 2단계, 즉 복수의 계획과 추적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복수플롯의 1단계는 오대수의 이야기 속에서 설명되며, 작품의 배경이야기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감금방에서 풀려난 오대수는 이제 복수를 계획하며 추적을 시작한다. 일식집 요리사인 미도를 만나고 미도의 도움으로 자신의 가족의 소식을 알게 되고, 자신이 감금되었던 곳을 찾아나선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오대수는 스스로 복수를 계획하고 추적에 나서는 것 같지만, 누군가 그들을 감시하고 조종하고 다음 행동을 위한 힌트를 제시하고 있는 것 같은 것이다. 그리고 오대수가 마침내 자신이 감금되어 있던 감금방을 찾아내어 그 패거리들을 초인적인 괴력으로 일망타진하고 돌아 오는 지점, 괴물이 되어버린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오대수를 감금했던 당사자인 이우진(유지태 분)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다. 이우진은 섬세하며 깨끗하고 단정하게 생긴 얼굴로 범죄와는 거리가 먼 사업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더구나 괴물이 되어버린 오대수와는 달리 그는 냉철하고 이성적이기까지 한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숙제를 내준다. 왜 이우진이 오대수를 감금했는지, 이유를 알아내면 자기가 죽을 것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 미도를 죽일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우진의 제안에 오대수는 마침내 그 이유를 알아낸다. 고등학교시절, 오대수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 재주가 있어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그렇고 그런 껄렁한 학생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우진의 누나와 우진의 에로틱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고, 전학을 떠나는 날 가장 친한 친구에게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라면서 그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후 오대수는 자신의 삶이 바빠 그런 사실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그 장면을 자신의 삶에 전혀 관련짓지 않고 살아간다. 그런데 그 말 한마디로 인해 소문이 퍼져 우진의 누나는 자살하게 되고 그 때문에 우진이 자신에게 복수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미도가 “말도 안돼, 말 한마디 때문에⋯⋯”라며 이제 이유를 알았으니 복수가 끝났다고 말하지만, 오대수는 이제 복수심이 내 성격이 되어버렸다고 하며 이우진에게 복수하러 간다. 이로 인해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의 대결이라는 복수의 3단계가 시작이 되는데, 이 대결에서 오대수는 지금까지의 상황보다 훨씬 더 끔찍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비극적인 상황을 초래한 원인이 단지 말이 많았다는 점, 이야기를 실감나게 묘사한다는 점, 그리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철부지였다는 점에서 비롯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너무 가혹하고 과도한 복수로 보인다.

    우진을 찾아간 오대수는 우진에게 “넌 누나와 잤다” 그리고 “이제 내가 이유를 알았으니 죽어라” 하고 말한다. 그러나 우진은 오대수가 틀린 질문만 해대서 답을 못 찾은 것이라며, 왜 가뒀을까가 아니라 왜 풀어줬을까를 질문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오대수에게 가족앨범을 보여주는데, 거기에서 충격적인 반전이 일어나게 된다. 바로 미도,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인 미도가 자신의 딸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의 역전이 일어난다. 오대수는 지금까지 자신을 불행에 빠트린 장본인과 그 이유를 추적해왔다. 그리고 대결의 순간에서 안타고니스트에 대해 정의를 행사하려는 순간, 자신의 이제까지의 삶이 모두 안타고니스트인 이우진에 의해 기획되어온 것임을 알게 된다. 자신이 이제까지 계획하고 추적해왔던 모든 것이 결국 이우진이 설치해놓은 덫에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여온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제까지의 삶은 자신의 복수가 아니라, 이우진의 복수이며 자신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이우진의 복수극에서 꼭두각시노릇을 해온 것이다. 이우진은 누나의 죽음을 계기로 자신과 똑같은 상황으로 오대수를 몰아가기 위하여, 그리하여 미도가 커서 오대수와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되는 5년을 기다려 왔던 것이다. 그러한 복수를 위해 이우진은 감정도 없는 인간으로 변하여, 오로지 오대수를 향한 복수의 일념으로 오대수에게 응징하기 위하여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은 반전으로 인해 오대수는 비로소 상황을 자각한다. 그리고 미도에게만은 제발 알리지 말아달라며 이우진에게 매달린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자기 세치 혀때문이라며 혀를 자른다. 이와 같은 상황은 <오이디푸스왕>에서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살인범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눈을 스스로 찌르게 되는 상황과 유사해보인다. 그러나 오대수가 “모두 다 내 잘못이야 ”라며 자신의 혀를 자르는 것은, 자신의 죄과에 대한 각성이나 자각이라고는 보여지지 않는다. 다음 장면에서 여전히 우진을 죽일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점을 통해 볼 때, 오대수는 어떻게 하면 우진이 쳐놓은 덫에서 미도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안간힘에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하나의 몸부림으로 자신의 혀를 자른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죄과에 대한 각성이라면, 우진에 대한 복수심을 여전히 불태우지는 않을 것이다. 여하튼 이러한 오대수의 노력에 의해 우진은 미도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고, 미도와 오대수의 정사장면을 녹음한 테이프를 오대수에게 들려주면서 ‘누나와 난 다 알면서도 사랑했어요. 너희도 그럴 수가 있을까’라는 말을 남기며 스스로 자살하고 만다.

    이 지점에서 이 작품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모호해진다. 마지막 장면에서 프로타고니스트는 오대수에서 이우진으로 바뀌고 이우진은 ‘비극의 전통적 결말에 따라 죽음을 맞는다.’16) 그러나 복수의 플롯이 정의를 갈구하는 상황을 창조해 강력한 정서를 유발시킨다면, 이우진은 과연 정의를 세웠는가. 오대수는 과연 이우진이 자신의 평생을 바쳐서 복수할 만큼 악인인가.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자신의 누나를 죽였는가. 그래서 오대수의 인생을 파멸시키는 것이 자신의 삶의 의미가 될 정도로 중요한 인물인가.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오대수는 어쩌다가 재수가 없어서 지독한 놈에게 걸려든, 말많은 하찮은 인간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올드 보이> 역시 <복수는 나의 것>과 마찬가지로 감정의 정화라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사소한 성격적 결함으로 인한 행동이 과도한 복수를 불러일으킴으로써 오히려 관객들은 오대수를 동정하기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대수의 남은 인생이 이우진이 택한 죽음보다 더한 형국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비롯한다. 오대수는 작품의 말미에서 최면술사를 찾아간다. 이제까지의 사건을 이야기하고 자신의 기억을 지워달라고 하는 것이다. 최면술사는 기억이 엉클어질지도 모른다고 경고하면서, 그래도 “짐승같은 놈도 살 권리는 있는 것 아닌가요”라는 말 때문에 움직였다면서 오대수의 기억을 분리한다. 그러한 오대수에게 미도가 다가와 ‘사랑해요 아저씨’라고 말한다. 그러자 대수는 알듯말듯하게 웃다가 우는 표정을 짓는다. 미도가 자신의 딸이라는 것을 기억하든 하지 못하든, 관객에게는 오대수와 미도의 삶이 더 이상 행복한 관계로만 여져지지 않는다. 관객은 이제 그들의 관계가 더 이상 어쩌지 못하는 비극적인 상황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대수의 남은 삶은 죽음보다 못한 형국이 될 수 있다.17) 이와 같이 오대수가 단지 말하기를 좋아했다는 점이 오대수를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는 짐승같은 놈”의 부류에 들어가게 했단 말인가.

    이 작품을 운명비극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대수의 불행은 어쩔 수 없는 운명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관객으로 하여금 어디서 재수 없이 지독한 놈을 만나지 않을까 두렵다는 공포심에 사로잡히게 한다.18) 이러한 점은 이 작품의 시청각적 이미지를 통해서도 드러나게 되는데, 이 작품에서 시청각적 이미지는 주로 오대수라는 인물의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운명비극이 되기 위해서는 주인공이 평범하거나 그 이상의 인물이어야 하지만, 이 작품에서 오대수는 평범 이하의 인물로 표현되어진다. 즉 작품의 시작부분에서 오대수는 대사로는 평범한 인물이라고 말해지지만, 시청각적 이미지로는 평범 이하의 인물로 묘사된다. 경찰서에서 오줌을 싸려하고 옷을 벗고 난동을 부리는 인물인 것이다. 이후 이 작품의 시청각적 이미지는 오대수가 감금된 감금방으로 한정되어, 오대수라는 인물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감금방에서 풀려나온 날, 오대수는 산낙지를 씹어먹는 괴물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오대수라는 인물의 괴력을 시각적으로 보여준 장면이, 오대수가 감금방을 다시 찾아가 그 일당과 대결하는 격투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롱테이크로 보여진 이 장면에서 관객은 몬스터가 된 오대수의 실상을 시각적 이미지로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평범 이하의 인물이 주인공일 때, 관객은 비극의 주인공으로서 그에게 공감할 수 없게 된다. 이로 인해 관객은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이상한 교훈을 가슴에 새기게 된다.

    16)로널드 B. 토비아스, 앞의 책, 186쪽.  17)가장 비극적인 일은 가족 사이에 비극적인 관계가 형성될 때이다. 마이클 티어노, 앞의 책, 99~102쪽 참조.  18)황진미 역시 「파시스트의 분풀이」라는 글에서 이우진이 자신의 죄과를 오대수에게 덮어 씌워 분풀이하고 있으며, 그것을 정당한 복수인 양 가장하고, 언어(소문)가 본질인 양 호도한다고 말하고 있다. 『올드보이북』, 박찬욱 외, 올리브, 2005, 26~29쪽

    4. 감정이입이 안 되는 시각적인 화려함 : <친절한 금자씨>

    박찬욱은 원래 복수시리즈 3부작을 처음부터 기획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 보이>를 만든 다음 이 두 작품이 과잉공급된 증오와 분노, 그리고 폭력을 보여주었다는 자각아래 새로운 복수, 즉 우아하고 고상한 그러면서도 섬세한 폭력을 그리고 싶어서 <친절한 금자씨>를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다.19) 그로 인해 복수의 주체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뀌어 있다. 남성들의 복수가 잔혹하고 폭력적인 성향을 보인다면, 여성의 복수는 아마 그와 달리 섬세하고 좀 더 아름다운 복수로 표현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을 것이라고 보인다. 그러한 이유에서인지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시리즈의 3부작 중 앞의 두 작품과는 작품의 톤과 형식에 있어서 다르게 나타난다. 그리고 또 다른 차이점을 든다면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인물들의 감정이 잘 드러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 보이>가 자신의 적의 인육을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과도한 분노와 복수의 감정을 드러낸다면,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그러한 감정은 극히 절제되어 있다. 특히 금자씨의 경우, 다른 인물들이 그녀에게 변했다는 말을 자주 하는 것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이, 복수를 계획하고 추적해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본래 마음이 어떤 것인지 거의 드러내지 않고 있다. 이는 아마도 복수를 시각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하기 위하여 정작 금자씨라는 여성인물의 마음과 감정에는 무심했던 결과로 보여지는데, 이로 인해 관객은 복수를 시도하는 금자씨의 감정이나 입장에 공감하거나 동정심을 가지기 어렵게 된다. 작품을 통해 감정의 정화라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기는커녕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심미적 거리감을 유지하게 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브레히트가 말한 이성적이고 비판적인 거리는 아니고 관객은 시종일관 구경꾼으로 머물러 있게 된다. 그러한 점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작품의 시작은 금자가 감옥에서 출소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내레이션을 통해 금자가 감옥에 가게 된 배경이 짤막하게 소개된다. 유괴 살해 혐의로 13년간을 복역하고, 금자는 그동안 감옥 안에서 ‘살아있는 천사’ 그리고 ‘친절한 금자씨’로 불려 왔던 것이다. 그런데 13년간의 복역을 끝내고 나온 금자는 달라졌다.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전도사가 주는 두부를 뒤엎으며 ‘너나 잘하세요’ 라고 말한다. 이후 감옥에서 금자가 친절을 베풀었던 재소자들을 찾아가 만나며, 그들에게 복수를 위한 도움을 받는다.

    복수의 플롯을 통해 볼 때,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의 1단계를 건너뛰고 2단계에서 바로 시작한다고 할 수 있으며, 1단계는 생략되어 있거나 작품의 중간 중간에 간간히 금자가 상황을 설명하는 정도로 나오게 된다. 그로 인해 관객은 금자와 연대감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이는 <복수는 나의 것>이나 <올드 보이>에서 복수의 주체들이 복수를 결심하고 계획하게 되기까지 상당부분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관객과 주요 인물들 간에 강한 정서적 다리를 놓아주었던 것과는 구분되는 점이다. 그러한 복수의 플롯의 첫 번째 극적 단계는 범죄로 구성된다. 주인공과 그의 사랑하는 사람은 갑자기 일어난 끔찍한 사건으로 인해 행복을 빼앗긴다. 그러나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그러한 범죄장면은 단순한 배경이야기로 처리된다.20) 그러므로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이러한 감정이입이나 연대감을 관객과 주요인물들 사이에 형성할 여지가 없게 된다. 금자씨가 복수를 계획할 만큼 분노에 사로잡히게 되는 과정을 목격하지 못함으로써 관객 또한 그냥 구경꾼에 머무르게 되고 말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작품의 시작은 복수의 두 번째 극적 단계의 플롯으로 시작하여, 바로 주인공의 복수의 계획과 추적이 다뤄진다. 금자는 그 과정에서 자신이 복수를 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조금씩 설명하는데, 출소해서 만난 빵집 종업원 근식에게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게 된다.

    즉 백선생(최민식 분)이 자신에게 좋은 유괴와 나쁜 유괴가 있다고 해서 자기가 도왔는데, 그만 백선생이 자신이 유괴한 원모를 죽이고 금자가 그 죄를 뒤집어쓰지 않으면 금자의 딸마저 죽이겠다고 해서 금자가 감옥에 들어가게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금자가 복수를 하게 된 범죄의 장면이 관객에게 목격되지 않고 금자의 입을 빌어 설명됨으로써, 관객은 금자의 동기에 대해 거리감을 지니게 된다. 이와 같은 설명은 이후 금자가 직접 하는 것도 모자라 내레이션의 역할이 시종일관 작품의 전반에 걸쳐 금자의 감정에 대해 설명해주는 것으로 나타남으로써, 이러한 거리감은 작품의 전반에 걸쳐 형성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거리감은 금자와 딸의 관계를 통해서도 드러나게 되는데, 금자는 출소 후 호주로 입양간 딸인 제니를 찾아와 함께 머물고 있다. 그런데 이 모녀는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아 영어사전이나 통역이 없이는 대화가 불가능한 상황인 것이다.

    여하튼 금자는 이러한 추적의 과정을 통해 마침내 백선생과 대결하게 되는 복수플롯의 세 번째 극적단계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백선생을 처벌하기 위해 폐교에 묶어서 데리고 온다. 이때 제니는 금자에게 자신을 버린 이유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요청하는데, 그러한 제니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금자는 백선생의 통역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로 인해 마지막 대결장면에서 안타고니스트가 대가를 치루게 될 때, 그러한 이유를 스스로 자신의 입을 빌어서 말할 수 밖에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복수가 정서적으로 강렬한 플롯을 만들어낸다고 할 때, 이 경우 그러한 강렬한 정서는 표출될 수가 없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당사자인 백선생을 통해서 금자가 복수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설명된다거나, 금자의 내면의 감정이 전달된다는 점에서 관객은 역시 금자의 내면감정에 대해 거리감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전달된 금자의 내면의 감정 또한 백선생이 자신과 제니의 삶을 파괴했다는 데에 대한 분노에 있지 않다. 금자는 그 아저씨가 자신을 죄인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죽이려는 것이고, 자신의 죄가 너무 커서 제니를 가질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무슨 죄를 지었냐는 제니의 질문에 이 아저씨가 아이를 죽였는데 엄마가 도와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죄지은 사람은 행복할 수도 없다는 금자는 제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연거푸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대결장면에서 금자가 행하려는 복수는 일반적인 복수의 플롯에서 보이는 정의의 행사가 아님이 드러나게 된다. 그것은 죄의식이라는 해결되기 어려운 추상적인 문제로서, 종교와 같은 다른 차원에서 해결이 가능한 문제인 것이다. 이로 인해 이 작품의 결말부분은 통상적인 복수의 플롯에서 보이는 해결장면과는 많이 다른 결말을 제시한다.

    금자는 마침내 복수를 집행하려는 순간, 백선생이 원모 외에도 다른 네 명의 아이를 더 납치하여 살해한 사실을 알게 된다. 금자는 이들의 부모들을 폐교에 불러 모으고, 이들은 백선생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단지 요트를 사기 위해 자신의 아이들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다 같이 집단으로 복수하자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본다. 그러므로 금자는 복수를 이들에게 일임하고 이미 죽어버린 백선생의 사체에 총알 두 번을 쏘는 것으로 복수를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금자는 자신의 복수를 양보하기까지 하는데, 이는 통상적인 복수의 플롯의 해결장면과는 많이 다른 것이다. 3단계의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의 대결장면에서 프로타고니스트가 복수를 위해 마지막 장면에서 범죄자가 대가를 치르게 하는 순간은 강렬함과 장엄함을 주는 순간이다. 복수를 위해 외곬으로 달려온 주인공이 마침내 범죄자를 소탕하고 장렬한 죽음을 맞이 하든지 아니면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던지 하는 것이 전통적인 복수의 플롯이라면, 이 마지만 장면에서 금자는 돌연히 자신의 복수를 양보하고 집단의 이름으로 정의를 행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지막의 장렬하고 통쾌한 복수는 처벌의 방식을 놓고 갑론을박하는 집단의 토론장으로 바뀌고 그 처벌은 누구하나 빠져나갈 수 없는 공모이며, 의식(ritual)이 된다.

    그리고 처벌이후 눈이 온다. 다들 새로 태어나는 것 같이 생일축하노래를 부르고 케이크의 불을 끈다. 그러나 금자는 ‘그토록 원하던 영혼의 구원을 끝내 얻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래도 그렇기 때문에 나는 금자씨를 좋아했다’고도 말한다. 여기서 노골적으로 내레이션이 ‘나’라는 대상을 지칭하고 있는 것처럼, 이 지점에서 박찬욱은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복수를 통해 영혼의 구원을 꿈꾸었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이며 조건이 아니겠냐고 말하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대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정당함을 당당히 주장한다. 복수의 행위를 정당화하며 그로써 해방감을 맛본다. 그는 마지막까지 살아남는다. 그리고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변화한다. 과거 작품의 주인공에 비하면 훨씬 더 작은 대가를 지불하는 셈이다”21)

    이와 같이 현대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복수에 대하여 당당하다. 금자가 그러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백선생은 요트를 사기위해 아이를 유괴하여 살해했고, 금자를 살인범의 누명을 씌워 금자와 그녀의 딸의 인생을 파괴했다. 명백한 범죄자인 것이다. 그리고 백선생은 그가 살해한 아이들의 부모에 의해서 정의의 이름으로 집단으로 처벌되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그러한 점은 이 작품에서 금자가 복수에 나서게 된 동기가 백선생이 그녀의 삶을 파괴했다는 것에 있지 않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러한 동기는 백선생이 금자를 죄인으로 만들었다는 점에 있고, 금자는 죽은 원모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백선생을 도와 그를 죽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녀의 삶이 백선생에 의해 파괴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원모를 죽음에 이르게 한 죄의식으로 인하여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죄의식은 과도한 자의식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보인다. 금자는 유괴를 의도한 것도 아니고 나쁜 뜻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단지 백선생에 의해 이용당했을 뿐인 것이다. 더구나 금자는 백선생이 저지른 범죄의 최대 피해자가 아닌가.

    그러므로 박찬욱은 이 작품을 통해서 복수와 같은 방법으로는 마음의 평안이나 구원에 도달할 수 없다는 불변의 진리를 말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마음이 여리고 죄책감이 강한 여성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복수를 아름답게 표현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복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름다운 복수가 과연 가능한가.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용서가 그러한 아름다운 복수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러한 종교적인 해결을 제시하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종교적인 구원을 갈망하고 있다. 그러므로 작품의 형식과 내용이 층위가 맞지 않고 차원이 다르며 이로 인해 관객은 모호함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복수는 인간적인 차원에서 가능한 행위이다. 어떻게 보면 한 대 맞으면 한대 때리는, 동물적인 세계에서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그러한 행위인 것이다.22) 그런데 이러한 되갚음 행위를 통해 영혼의 구원을 꿈꾼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두 세계를 섞어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두 차원이 연결되기 위해서는 복수라는 원색적인 플롯을 다른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연결점이 필요하지만, 이 작품을 통해서는 그러한 연결점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관객 역시 복수의 플롯을 통해 감정의 정화라는 카타르시스의 감정을 느끼게 되기보다는, 해결할 수 없는 모호함으로 빠져들게 된다. 우리 모두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이고, 아무리 착한 사람도 다 원죄를 지니고 있고, 그러한 숙명에서 우리가 결코 벗어날 수 없다면, 그것은 인간적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 문제이다. 더구나 정의를 행사하고자 하는 복수의 플롯을 통해 차원이 다른 종교적 구원의 문제나 원죄의식의 해결을 모색한다는 것은, 내용과 형식의 불일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주제를 전달하고자 한다면, 차원이 다른 두 세계를 연결시키거나 아니면 관객의 공감을 통해 설득력 있게 전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관객은 감정이입이 안 되는 주인공에 대해 시종일관 구경꾼에 머무르며 작품의 시각적 화려함에만 반응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적이고 비판적인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도 아니라 모호함 속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한 모호함은 이 작품의 시청각적 이미지를 통해서도 드러나게 되는데, 먼저 금자의 경우 감옥생활로 대변되는 작품의 전반부에서는 성녀와 같은 이미지로 보여지고 있다. 친절한 금자씨로서 다른 죄수들의 어려움과 애로사항을 도맡아 해결해주는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보이고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출소후 금자의 이미지는 그와는 정반대로 팜므파탈과 같은 요부의 이미지로 표현된다. 즉 성녀와 요부의 이미지가 결합되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이중적 이미지는 이 작품의 전반에 걸친 시청각적 이미지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즉 이작품은 감각적이고 화려하고 부드러운 여성적 색감과 이미지로 여자들의 복수를 은근하고 간접적인 것으로 나타내고자 하였으나, 그와는 반면 금자의 자해 장면이라든지, 감옥 안에서 마녀의 동성애 장면 등을 폭력적이고 원초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여전히 과장되고 강렬한 폭력의 이미지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이중적인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 이 작품의 말미에 있는 백선생에 대한 집단보복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합의된 복수로서 제의와도 같은 의식(ritual)으로 복수를 승화해보고자 하는 시도였으나, 결국 금자가 영혼의 구원을 얻지 못함으로써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는 이러한 이중적 이미지는 작품의 내용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시청각적인 이미지를 통해서 동시에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로 인해 인간은 구원의 가능성 없이 서로 죽고 죽이는 복수의 악순환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19)“<복수는 니의 것>과 <올드 보이>, 즐겁게 만들었고 그중 하나는 흥행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자 본의 아니게 두개의 복수극을 연거푸 만들어놓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잖았겠나. 당연히 그 내면을 들여다 본 결과 두 작품에 과잉 공급된 분노와 증오와 폭력이 독이 되어 내 영혼마저 황무지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관측되었다. 그리하여 분노와 증오와 폭력을 버렸다는 얘기를 하고 싶지만, 그러면 얼마나 좋았겠나. 사실은 좀더 우아한 분노, 고상한 증오, 섬세한 폭력을 도입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는 얘기다. 마침내 일종의 속죄행위로서의 복수, 영혼의 구원을 모색하는 인간에 의해 수행되는 복수극을 만들어보이고 싶었다. <친절한 금자씨>는 그렇게 탄생했다” 박찬욱,「금자씨 비긴즈–‘복수 3부작’은 어떻게 발상되었나」, 『박찬욱의 몽타주』, 마음산책, 2005, 96~98쪽.  20)“장면을 너무 압축시켜서 독자들이 범죄를 목격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서는 안된다. 독자들이 정서적으로 사건을 경험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누군가 당신의 가족에게 잘못을 저질렀는데 다른 사람들도 당신과 같은 분노를 느끼기를 원한다고 해보자, 다른 사람들의 감정이입을 얻어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범죄를 목격하게 하는 것이다. 이 장면은 독자와 희생자 사이에 강한 연대감을 맺어준다. 독자는 희생자인 양 느끼면 분노하고 복수를 강하게 원한다. 독자가 작품을 읽기 전에 범죄를 일으킨다면 그것은 감정이입을 만드는데 적절치 못할 것이다. 동정은 얻을 수 있겠지만, 감정이입은 아니다. 이 플롯의 중요한 목적은 독자와 주요 인물들 간에 강한 정서적 다리를 놓아주는 것이다.” 로널드 B. 토비아스, 앞의 책, 176쪽.  21)로널드 B. 토비아스, 앞의 책, 187쪽.  22)물론 우리는 인간이 동물임과 동시에 좀 더 고등한 존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마이클 티어노,, 앞의 책, 215쪽 참조.

    5. 맺음말

    이상에서 박찬욱의 복수시리즈 3부작의 플롯을 분석하여 그 미적 태도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이들 작품은 그 추구하는 내용과 태도에서 일관성을 보이지 않고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먼저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 보이>는 전통적인 복수의 플롯 형식을 차용하면서도 그를 벗어난 변형된 양상을 보여줌으로써 전통적인 복수의 플롯이 의도한 카타르시스가 부재하는 양상을 보인다. 그것은 사건의 진행이 우연적이거나 혹은 사소한 성격적 결함을 원인으로 하여 전개된다는 점에서 관객을 피해자와 가해자가 불분명한 상태인 모호함과 그로 인해 선과 악의 경계가 불분명한 어두운 인식으로 데려 간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작품은 정의의 수행으로 인한 감정의 정화라는 전통적인 복수의 플롯유형을 기본적으로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그런데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친절한 금자씨>는 이와는 달리 다른 두 작품과는 다른 톤과 형식을 드러내고 있어 이들 3부작의 공통점을 하나로 설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친절한 금자씨>에서 관객들이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점은 박찬욱이 이 작품을 통해서는 이전 작품들과는 다른 미학적 경향을 시도해보려고 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즉 이전 작품이 과도한 정서적 분노나 증오, 그로 인해 잔혹하고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냈다면, 이제는 복수를 객관적으로 미학적으로 세련되게 표현해내고 싶은 의도가 작용했으리라고 보인다. 그러나 복수의 플롯은 원래 정서적으로 강렬한 플롯을 만들어낸다. 그로 인해 관객은 억울함과 분노로 이끌어지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감정의 정화가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이 생략된 복수의 플롯은 관객을 단순히 구경꾼으로 남게 한다. 이는 브레히트가 의도한 심미적 거리를 통한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관객을 이끌고 가자는 의도일 수 있으나, 그러한 과정을 통해 박찬욱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복수를 통해서는 영혼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이성적이고 비판적인 인식이라기보다는 종교적 성찰에 가까운 인식이라는 점에서, 역시 이러한 거리감이 브레히트가 의도한 심미적 거리감과는 맞아떨어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로 인해 <친절한 금자씨>는 강렬한 정서를 유발하는 복수의 플롯을 사용하면서도 정작 관객이 작품에 정서적 관련을 맺을 수 없는 특이함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다양한 이들 세작품의 공통점을 추출해본다면, 이들 작품에서 복수의 귀결이 완전한 정의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관객은 복수의 플롯을 통해 억울함과 분노를 느낀다. 그리고 그러한 분노로부터 관객을 지키기 위해서는 완전한 정의가 세워져야 한다. 즉 이러한 플롯을 사용할 때는 도덕적 근거를 분명히 제시해서 정당한 행위와 정당하지 못한 행위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나 박찬욱의 복수시리즈 3부작에서는 그러한 명확한 구분이 없다. 피해자는 피해자이면서 또 다른 가해자이다. 그러므로 관객은 이들을 동정조차 할 수 없다. 때로는 이들은 가해자보다 더욱 악랄한 가해자로 변모한다. 이러한 복수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는 것이 박찬욱이 말하고자 하는 바인 것 같다. 한마디로 인간을, 한대 치면 되받아 치는 동물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로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경우 인간에게 구원은 가능할 것인가. 박찬욱에게서 그러한 가능성을 발견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렇지만 구원을 갈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고, 그렇기 때문에 박찬욱이 계속 영화를 만드는 이유인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궁극적으로는 구원을 이야기하고자 하면서도 정작 작품 속에 나타난 시청각적 이미지는 폭력적인 이미지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에서 박찬욱의 영화미학을 하나의 일관된 태도로 설명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이는 내용과 형식의 불일치로서 시각화된 영상이미지의 미학은 폭력으로 나타남으로써, 이와 같은 과도하거나 불일치한 영상표현을 통해 역설적으로 구원을 의미하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의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우리 일상과 현실의 폭력에 더욱 초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내용과 형식의 불일치로 인해 작품의 의미가 모호해지고 이중적 관점이 형성되고, 그로 인해 미학적 태도가 일관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적 관점은 이들 작품전반에 걸쳐 형성되게 되는데, 먼저 <복수는 나의 것>에서 류와 동진은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이다. 이는 <올드보이>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나 오대수와 이우진은 프로타고니스트이면서 동시에 안타고니스트이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는 성녀와 요부의 이미지가 결합된 이중적인 이미지로 표현된다. 이러한 이중적 태도로 인하여 이들 작품은 복수의 플롯을 차용하면서도 정작 그 궁극적인 미적 체험이라고 할 수 있는 카타르시스는 부재하는 양상을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반아리스토텔레스적 미적체험이라고 할 수 있는 비판적 이성과 성찰의 경지를 의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 박찬욱이 시청각적 이미지를 하나하나 공들여 조합하여, 그로테스크하고 과도하고 원초적인 일탈의 이미지를 보여줌으로써 우리 일상을 낯설게 하고 비틀게 하기를 시도하였지만, 그러한 시도가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하고 성찰하게 하기보다는 강렬한 폭력적 이미지로 인해 관객으로 하여금 오히려 정서적 충격을 받게 함으로써 드라마틱한 효과를 강화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 복수시리즈의 플롯분석을 통해 본 박찬욱 영화의 미학적 특징은 바로 이와 같이 영상표현으로는 폭력의 미학을 보여주면서도 역설적으로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이중적인 관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점이 플롯분석을 통해서 박찬욱 영화의 영화미학을 고찰하고자 할 때 드러나는 새로운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즉 박찬욱 영화의 영화미학은 그동안 영상이미지의 측면에서 폭력의 미학을 중심으로 이야기되어 왔다면, 플롯분석을 통해 그에 못지않게 박찬욱 영화에 있어서 구원의 의미가 중요함을 밝힘으로써 박찬욱의 영화미학의 특징이 바로 이러한 내용과 형식의 불일치, 이중적 관점에서 비롯함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박찬욱 영화에 대한 시야를 확대하고자 하는 시도이며, 어떤 면에서는 이러한 이중적 관점으로 인해 박찬욱 영화가 한국과 그리고 세계에서 동시에 인정받는 요소로도 작용할 수 있다고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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