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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로부터의 역사’ 서술과 기록의 상호 관계* Reciprocal Relation between ‘History from Below’ and Archives
  • 비영리 CC BY-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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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아래로부터의 역사’ 서술과 기록의 상호 관계*

This research aims to analyze the reciprocal relation between ‘history from below’ and archives and to set forth the overall tides of records management in England. For the Study, the articles published in the History Workshop Journal were analyzed. They used public records and private records such as newspapers, diaries, letters and oral records. Consequently Various kinds of community archives have recently flourished in England and endeavour is being made to expand the horizon of records management by TNA. This can be assessed as a new sort of soil for the history from below.

KEYWORD
아래로부터의 역사 , 역사워크숍운동 , 역사워크숍저널 , 영국국가기록원 , 공동체 아카이브 , 사무엘 , 기록관리
  • 1. 머리말

       1.1 연구 배경

    전문적 역사 연구에 대한 비판 중 가장 빈번하게 제기되는 것이 기존 역사가 지배자의 역사, 승자의 역사, 가진 자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으며 이는 현실 세계와 미래 전망에 대한 왜곡의 함의를 담고 있다는 지적들이다. 여성, 소수자, 노동자는 물론이거니와 지배자, 영웅, 천재가 아닌 일반인들은 역사에서 대변되지 못하고 소외되어 있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포스트모던의 시대를 거치면서 ‘모던 시대’의 거대 담론을 비판하고 역사서술에 숨겨져 있던 권력의 구조를 드러내려는 다양한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E. P. Thompson을 포함한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은 하층계급의 역사적 경험, 행동 및 투쟁을 다루면서 이들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씌여지지 않은 과거를 복원하려고 했다. 이들은 대중을 타성적으로 보는 시각을 거부하면서 하층계급의 경험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경험은 주어진 조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서적·정신적·문화적 의미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현재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서발턴(subaltern) 연구, 민중사, 지방사, 노동사, 여성사, 구술사, 새로운 문화사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연구 경향도 같은 맥락의 시도들이다. 서발턴연구는 근대 역사학의 내적 원리로서의 식민성과 그 식민성 위에서 역사 서술의 권리를 독점해 온 엘리트주의적인 헤게모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로 주목을 받았다(김택현 2009).

    1970년대 독일에서 시작된 일상사 연구는 거대 담론에서 벗어나 한 개인이 살아온 삶의 방식에 주목하고 개인의 일상을 통해 역사를 파악하는 새로운 연구방법론이다. 독일에서의 구술사 또한 68운동 때 대학을 다녔거나 그 변화를 체험하면서 예전과 다른 방식의 삶을 모색한 이들이 사회 구조를 강조하는 기성 역사학계에 반성적인 목소리를 부여하면서 시작되었다(송충기 2013).

    국내에서도 이러한 역사 연구 동향이 확산되고 있으며 다양화되는 추세이다. 특히 구술사에 대한 관심은 상당히 주목할만 하다. 기존의 실증주의를 고사해온 역사학계에서도 구술사를 방법론으로 도입하고 있다.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하던 빈민, 노동자, 농민, 여성, 지방민, 일본군 위안부, 양심수 및 정치적 피억압자, 피학살자 유가족, 이산가족, 재외동포, 해외이주 노동자 등이 역사의 주체로 재현되고 있다(김귀옥 2006). 인류학, 사회학, 여성학 등을 넘어서 다양한 학문 분과에도 구술방법론이 모색되고 있다.

    국내의 구술사 연구도 일정 정도 ‘아래로부터의 역사’ 서술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방송 전문인들의 제작현장과 조직문화, 퇴근 후 일상과 인간관계에 초점을 맞춘 구술생애사의 미시적접근 방법이나(백미숙 2009) 성공한 의사 이야기와 같은 기존의 의학인물사에서 벗어나 고통받는 환자 이야기, 비주류 의료인 및 의약업자 이야기 등에 집중한 연구(신규환 2013) 또한 구술채록을 통해 누락된 역사, 배제된 역사를 복원하고 역사를 재구성 하려는 대표적인 시도들 이다.

    이와 더불어 이전과 다른 새로운 인식을 기반으로 기존 연구 방법을 변화시키려는 노력도 모색되고 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기존의 틀에 박힌 민중에 대한 연구, 민중사, 민중운동사를 넘어서는 새로운 민중사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으며(이용기 2010), 여성사 연구가 작은 사람들, 낮은 사람들, 고통 받는 사람들의 역사를 망각한 왜곡된 역사를 온전한 역사로 바꾸어내는 미래 비전을 가지고 역사 해석의 기존 패러다임에 전체에 도전하고 재해석을 시도해야 한다는 주장도 등장했다(정현백 2012).

    이처럼 20세기 후반부터, 국내에서는 20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이들 새로운 연구들은 역사 연구의 폭과 지평을 확대해 주었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기존 역사서술의 패러다임을 바꾸려는 집단적인 시도로 주목을 받는다. 이러한 연구 경향들을 모두 ‘아래로부터의 역사’로 규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아래로부터의 역사’는 오랫동안 외면되어 왔던 또 다른 목소리와 대화하려 했고 적어도 들으려 하는 노력(Flinn 2012)이라는 측면에서 위와 같은 연구 경향들은 많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 연구의 다변화와 활성화는 기록의 위상을 제고하고 기록관리의 중요성을 확산시킬 수 있는 의미 있는 토대를 제공할 것이다. 소위 ‘아래로부터의 역사’ 구성을 위해 어떠한 기록이 활용되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만약 이러한 기록들이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지 않다면 어느 기관에서 어떻게 선별 또는 수집해 관리할 수 있는지를 진단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최근 기록학계에서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다양한 민간 아카이브에 대한 논의도 진척할 필요가 있다. 한 가지 더 덧붙인다면, 이 글을 통해 다양한 역사 연구자와 아키비스트 및 기록물관리기관 사이의 조응 관계도 고민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졌으면 한다.

       1.2 연구방법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단초를 찾기 위해 이 글은 1960년대부터 영국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역사워크숍운동(History Workshop Movement)에 주목한다. 역사워크숍운동은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사회를 실질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있지만 역사 서술에서 배제되거나 무시되어 왔던 이들을 역사의 표면으로 끌어올리려는 ‘아래로부터의 역사’ 서술을 추구한 집단적인 지식운동과 사회운동이었다.

    이 글은 먼저 역사워크숍운동의 간략한 역사와 의미를 소개했다. 그리고 1976년부터 발간되었던 역사워크숍저널(History Workshop Journal; 이하 HWJ)에 게재된 논문들이 역사 연구의 소재로 어디에 소장된 어떠한 기록물을 활용했는지 분석했다. HWJ에 게재된 논문 전체가 ‘아래로부터의 역사’로 서술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연구결과물들이 일정 정도 역사워크숍운동의 취지를 반영하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더불어 기록 및 기록관리 그리고 기록물관리기관과 관련해 HWJ에서 제기한 이슈들도 정리했다. 4장에서는 역사워크숍운동이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최근 영국 기록관리의 전반적인 흐름과 특성을 정리했다.

    영국의 역사워크숍운동과 HWJ 논문을 분석하고 영국 기록관리의 흐름을 정리하는 이유는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더 풍부하고 심도 있게 진단하기 위한 것이다. 다양한 대안의 모색을 위해서도 이러한 비교사적 방법은 유용할 것이다.

       1.3 선행연구

    역사워크숍운동에 대해서는 국내에 소개된 것이 거의 없다. 이영남이 역사작업장운동이라는 이름으로 1960-70년대 유럽의 역사학 내부에서 일어난 변화의 하나로 거론한 글이 있다(이영남 2012b). 이경래와 이광석의 연구에서 영국 공동체 아카이브의 활성화에 영향을 준 운동으로 역사워크숍운동을 소개하기도 했지만, 간략한 내용으로 인해 역사워크숍운동을 이해하기에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이경래, 이광석 2013). 국내 영국사 전공자들의 모임인 영국사학회 월례발표에서 이 글의 개요를 소개했을 때에도 일부 참석자만 역사워크숍운동과 HWJ의 성격에 대해 파악하는 정도였다.

    역사워크숍운동이나 ‘아래로부터의 역사’ 서술과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지만, 국내에서 많이 제기되고 있는 민간 아카이브에 대한 최근의 다양한 연구들은 이 글을 구성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풀무마을을 대상으로 마을 아카이빙의 방향성과 구체적 방법을 제안한 이영남의 연구(이영남 2008)는 공공기록관리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국내 학계에 새로운 논의의 틀을 제시한 것으로 큰 의미가 있다. 이영남은 전문 아키비스트가 국제표준인 ISAD(G)에 따라 정리하고 기술한 미국 뉴욕 Herstory Collection 과 실험적인 이야기 정리기술 방식을 적용한 풀무학교 전공부 10주년 컬렉션을 비교를 통해 기억의 공동체를 위한 새로운 방식을 제안(이영남 2012a)하는 등 이 분야의 연구와 실천을 선도하고 있다.

    김익한은 마을의 구성에 따른 아카이빙 객체로서 기록의 유형을 적시하고 아카이빙의 주체와 방법 등 마을 아카이빙의 지향과 방법에 대한 구상을 제시하면서 학계의 관심을 환기시켰다. 기록관리와 민주적 제도와의 조응 관계를 강조한 김익한은 공동체 민주주의 실천이 기록학계에서도 기존의 엘리트주의적 모델을 재검토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는 입장이다(김익한 2010). 손동유와 이경준은 직접 마을운동에 참여했던 경험을 토대로 마을 사람들의 일상을 담고, 사람들 사이의 소통과 맥락을 확보하고, 마을 마다의 정체성을 담아내는 기재로서 마을공동체 아카이브를 제안했다(손동유, 이경준 2013).

    곽건홍은 국가기록원의 아카이브 이벤트와 노동 기록 소장 현황 분석을 통해 국가기록원의 철학 부재와 비민주성, 정치적 편향성, 평가수집전략의 부재 등을 질차했다. 그는 실질적으로 국내 유일한 아카이브라 할 수 있는 국가기록원이 거시적 성격의 역사적 사건과 명망가 중심의 기록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분석하면서 보통 사람들의 삶의 기록에 초점을 둔 일상 아카이브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주장했다(곽건홍 2011).

    이러한 움직임과 관련된 해외 동향을 소개하는 연구도 등장했다. 북미 지역을 중심으로 공동체와 공동체 아카이브에 대한 학문적 논의와 성립 배경, 그리고 그 사회적 함의를 소개한 윤은하의 연구(윤은하 2012)가 있다. 앞서 언급한 이경래와 이광석의 연구는 공동체의 내재적 발전의 산물이자 자율적 통제의 특성을 가지면서도 공적 영역과의 협치로 진화하고 있는 영국 공동체 아카이브의 현 단계를 분석하고 있다(이경래, 이광석 2013). 같은 맥락에서 이경래는 미국과 캐나다의 참여 아카이브를 중심으로 공동체 아카이브의 협치 논의를 분석하고 그 함의를 제시했다(이경래 2013). 현문수는 해외 아카이브의 네트워크와 게이트웨이에서의 기술 요소 공유사례를 소개하고 국내 수집형 민간 아카이브의 소재 확인과 자원 공유 방안을 제시했다(현문수 1013).

    이 글은 다양한 유형의 민간 공동체 아카이브를 모색하는 위의 선행연구들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그렇지만 공공기록 관리체계의 개선은 여전히 시급하고도 중요한 문제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나아가 기록학계 연구자와 아키비스트 뿐 아니라 역사학 등 다양한 연구자와의 소통과 협업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기록과 기록관리의 전반적인 위상을 제고하고 기록관리의 지평 확대를 모색하자는 입장이다.

    2. 역사워크숍 운동의 약사

    영국은 정규 교육과정과 별개로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한 여러 성인교육(Workers Educational Association, Trades Union Congress Educational Department 등)의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역사워크숍운동을 주도한 Raphael Samuel도 성인교육을 담당한 연구자였다. 1962년에 옥스퍼드대학 러스킨 칼리지의 사회학 교수로 부임한 사회주의자 Samuel은 1966년부터 일련의 워크숍을 개최했고, 이것이 역사워크숍 운동의 본격적인 출발이 되었다.

    역사는 기존 학계의 기득권을 넘어 확장될 필요가 있으며, 역사 연구 또한 전문 역사가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야 한다는 사고에서 역사워크숍운동은 출발했다. “역사는 너무 중요해 전문 역사가에게만 맡겨 놓은 수 없다”는 명제는 역사에 대한 이들의 생각을 명확하게 제시해 준다(Alexander and Davin 1976). 노동자들이 모인 러스킨 칼리지에서 이러한 생각은 특히 공감을 얻었다. 이들은 역사가 모두 사람들이 동등하고 협력적으로 참여하는 주제가 되어야한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나아가 완성된 연구 결과를 제시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각계각층이 참여할 수 있는 토론과 연구를 자극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를 토대로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복원하고 역사의 민주화를 이루자는 것이 역사워크숍운동의 지향점이었다(Samuel 1977).

    기존의 전문 연구자는 물론 아키비스트, 큐레이터, 교사, 열정을 가진 아마추어, 향토사학자, 가족사협회와 개별 고고학자, 그리고 노동자를 포함한 일반인들이 운동에 참여했다. 그렇지만 주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었기에 초기의 구성은 대부분 노동자와 역사 연구자 그리고 전업 사회주의 연구자의 느슨한 연합의 형태였다(Samuel 1980). 일례로, ‘노동자의 계급의식’을 주제로 1976년 4월에 맨체스터에서 개최된 역사워크숍에서 연사로 나선 사람들은 사무엘을 포함한 연구자와 의원, 대학원생, 교사 그리고 기계, 가구, 건설 등 다양한 업종의 노동자들이었다(History Workshop 1976a).

    역사워크숍운동이 시작될 때에는 이미 노동사연구협회(Society for the Study of Labour History), 노동아카이브 소위원회(Labour Archives Sub-Committee), 노동자계급운동도서 관(Working Class Movement Library) 그리고 마르크스 기념도서관(the Marx Memorial Library in Clerkenwell) 등이 설립되어 있었다(Flinn 2007). 이렇듯 전국에 산재하던 노동사 네트워크들과 협력하면서 역사워크숍운동은 성장을 거듭해 갔다.

    1960년대와 70년대의 10년 가까운 역사워크숍운동의 산물로 1976년에 HWJ이 창간되었다. 창간호에서 Samuel은 “진지한(serious) 역사는 전문 연구자만을 위한 학문이 되었다. ⋯ 우리는 역사가 통찰력의 원천이며 현재를 이해하는 수단임과 동시에 현재를 바라보는 최고의 지향이라는 점을 확신한다. 학문적 분파에 대한 대항으로서 뿐 아니라 역사가 일반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련성을 맺도록 하는 목표를 가지고 우리 잡지는 교육과 연구, 학습과 삶의 일치를 재확인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역사를 더 민주적 활동으로, 더 중요한 대상으로 만드는 일에 헌신할 것이다”고 선언하면서 HWJ를 발간하는 목표를 명확히 했다(History Workshop 1976b).

    창간호의 부제에서 HWJ은 ‘사회주의 역사학자들의 잡지’를 표방했다. 그러나 ‘예언적이지 않고 배타적이지 않은 잡지'를 지향했다. 이것은 당시 소비에트권의 현실 사회주의, 소위구좌파(Old Left)와 분리하고자 하는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역사워크숍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은 1956년의 헝가리 침공과 1968년의 체코민주화운동 무력 진압으로 실상을 드러낸 구좌파와 구분되는 신좌파(New Left)가 중심이었다. 이들은 다양한 목소리를 수용하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Samuel 1980).

    HWJ은 출판사나 정치조직, 사회단체의 지원 없이 참여자의 자발적인 의지에 의존했다. 창간호는 3,500부가 인쇄되었는데 창간호 발간 이전에 900명의 사전 구독자가 모집되어 있었다고 한다(History Workshop 1976c). 초기의 운영자금은 대부분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모금이나 구독료로 충당되었다. 기고가 많아 원래 계획보다 잡지의 크기가 커졌지만 역사의 대중화를 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을 유지하고자 했다. 편집자들은 무보수로 일하거나 아주 소액의 금액을 받았다. 모금을 위해 잡지를 직접 가두판매하기도 했으나 판매상과의 마찰로 중단되기도 했다. 책 판매와 기금 모금을 위한 콘서트를 조직하기도 했고, 연사와 청중간의 비공식 토론을 위한 술집 모임을 정기적으로 개최하기도 했다(Davin 2000).

    HWJ의 발간과 별개로 워크숍도 지속적으로 개최되었으며 원래의 취지에 맞게 독자들의 모임도 제도화되었다. 셰필드에서 1982년 11월 개최된 16차 워크숍은 최초로 편집부의 개입없이 지역 조직 자체의 준비로 만들어진 워크숍이었으며 덴마크인 등 외국인을 포함해 약 750명이 참가했다(Samuel and Monaghan 1983). 독자들은 워크숍이나 독자모임에 참석하는 객체가 아니었다. 워크숍과 독자모임은 ‘짧은 발표와 긴 토론’(History Workshop 1976a)을 원칙으로 했다. 정규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운송노동조합 출신의 노동자가 발표한 논문(Nettleton 1981)이 HWJ에 게재되기도 했다.

    1980년대 이후 역사워크숍운동과 여성운동사이의 유대가 강화되었다. 1982년 봄 호부터 편집부는 ‘사회주의 역사학자들의 잡지’에서 ‘사회주의와 페미니스트 역사학자들의 잡지’로 HWJ의 표제를 변경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성, 꿈, 정신분석 등 집단이 아니라 개인적 문제를 다루는 주제들로 영역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Russell 1997).

    그러나 역사워크숍운동과 HWJ은 학문과 정치 지형의 변화에 따른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역사워크숍운동에서 중심 역할을 수행했던 사회사 등 여러 분과 학문이 빠른 속도로 전문 영역으로 분화되었다. 인식론과 방법론 변화를 논의하고 탐구해야 하는 입장에서 1980년대 초부터 HWJ에는 학계 인물이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HWJ이 야망을 가진 학자를 위한 또 다른 도구가 되고 있다는 불만도 제기되었다(Russell 1997). 정치문화의 우경화 경향도 역사워크숍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1982년에 포클랜드 전쟁이 발발했고 영국 사회에 애국주의의 물결이 강하게 불었다. 영국 경제의 위기와 더불어 M. Thatcher의 보수당이 정권을 장악했으며 노동당 좌파의 분절적인 대응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데 실패했다. 노동당내에도 새로운 노동당(New Labour) 주장하는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1989년부터 동구권 붕괴가 이어졌다. 1990년에 개최된 노동사대회(Labour History Conference) 동안 ‘아래로부터의 역사’라는 개념을 폐기하고 전통적인 톱다운 방식의 노동사 서술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마르크스주의와 노동계급과의 연계를 중심으로 한 기존의 노동사 서술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 사이의 대립이 있기도 했다.

    마침내 1995년부터 HWJ 편집부는 ‘사회주 의와 페미니스트 역사학자들의 잡지’라는 부제도 내려놓아야 했다. 편집부가 스스로 밝힌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우리는 사회주의와 페미니즘에 대한 개별적 열의와 별개로 저자(와 편집자)들이 어떤 명칭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본다. ⋯ 우리가 동의하는 것은 지난 14년 사이에 거의 알아차릴 수도 없이 정치적 상황이 엄청나게 변화했음을 인식해야한다는 사실이다(History Workshop 1995).”

    이때부터 역사워크숍운동과 HWJ의 초기 지향은 퇴조 단계로 접어들었다. “사회주의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이 광택이 나는 잡지가 되었으며 ⋯ 지적으로 너무 추상적이어서 대부분의 논문들을 이해할 수 없다”(History Workshop 1995)거나 “HWJ의 내용과 아마추어 참여자의 활동과 관심 사이에 명백한 괴리가 있다”(Creighton 1992)는 독자들의 항의가 빈번하게 나타났다. “전문 학자의 발표에 대한 지나친 강조와 충분하지 않은 토론, 우파 학자의 초대는 건설적 토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불평도 등장했다(Fleet 1991). 역사워크숍운동 25주년 을 기념해 ‘인종주의: 과거와 현재’를 주제로 개최된 대회는 참석자가 거의 없어 진공(vacuum)상태에서 진행되었다는 한탄이 있기도 했다(Midgley, Saakwa-Mante 1992). 현재 HWJ은 옥스퍼드대학에서 발간하는 수준 높은 또 다른 역사학 잡지에 불과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이다.

    이러한 퇴조에도 불구하고 역사워크숍운동은 과거와 현재에 대한 새로운 사고와 실천을 추구한 급진 운동으로 정리할 수 있으며, ‘아래로부터의 역사’, ‘역사에서 감춰진' 것들의 복원, ‘역사의 대중화’, ‘역사의 민주화’를 지향한 운동이라 평가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지향은 아직도 유효하며 매력적인 부분이 여전할 것으로 생각한다. 역사워크숍운동 및 HWJ과 관련된 자료는 History Workshop Archive와 Raphael Samuel Archive(Bishopsgate Institute)에 보존되어 있다. HWJ에 게재된 논문들은 History Workshop Online에서 찾아볼 수 있다.

    3. 아래로부터의 역사 서술에 활용된 기록의 유형

       3.1 공공기록에 대한 소개와 활용

    HWJ은 먼저 공공 아카이브가 소장하고 있는 기록의 적극적인 활용을 강조했다. 당연하게도 중앙정부의 공공기록을 보존 관리하고 있는 영국 국가기록원(The National Archives; 이하 TNA)이 첫 번째 대상이었다. TNA는 1838년에 공공기록물법(Public Records Act)이 제정되면서 같은 해에 공공기록보존소(Public Records Office; 이하 PRO)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 PRO의 임무는 소장 공공기록을 보호하는 것이었지만 1852년의 추밀원칙령(An Order in Council)에 의해 PRO가 중앙정부기관이 생산한 모든 공공기록의 관리를 총괄하게 되었다. 사실상 근대 최초의 국가 아카이브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PRO는 2003년에 역사기록위원회(Historical Manuscript Commission)와 통합되면서 현재의 TNA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HWJ의 제2호에 이미 PRO와 PRO 소장 기록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The Public Record Office as a Source for Labour History”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논문은 PRO에 지난 1000년간 영국과 세계역사 연구에 필수적인 ‘가장 중요하고 포괄적인 컬렉션’이 구축되어 있으며 1974년에만 90,600명의 연구자가 339,400건의 문서를 열람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노동사연구에 필요한 목록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Swan 1976).

    물론 초기부터 PRO가 기록물 열람을 허용한 것은 아니었다. 1838년의 공공기록물법은 PRO소장 기록물을 열람할 수 있는 전제 조건으로 해당 기록물 생산기관의 허가와 변호사의 입회및 일정한 비용 지불을 규정하고 있었다.

    PRO 부관장(Deputy-Keeper)을 역임했던 Stamp의 회고는 그가 입사했던 1893년 당시 PRO의 기록물 열람 상황을 잘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1878년까지 생산된 대부분의 문서는 일반인의 열람이 가능했다고 한다. 그러나 내무성, 외무성, 식민성의 경우, 1760년 이전까지 생산된 기록만 일반에 공개되었다. 1802년 이전에 생산된 기록은 열람이 가능했지만 엄격한 검열의 대상이었다. 1802년 이후 생산된 기록을 열람하기 위해서는 해당 부서의 사전 허가가 필요했다. 일반에 공개되지 않은 기록을 열람하도록 사전 허가를 받은 연구자와 학생들을 위해 PRO 내에 Government Search Room이라는 열람실이 별도로 운영되었다고 한다. 전쟁성과 해군성의 기록은 좀 더 쉽게 열람이 가능했지만 목록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거나 그나마 있는 목록도 연필로 필사한 것이 많아 해독하기 어려웠다. 그 외에도 열람실의 조명, 청결, 난방 등 열람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고 한다(Stamp 1928). 그나마 19세기 동안 기록물 열람이 가능했던 곳은 PRO를 포함해 British Museum, Lambeth Palace Library, Bodleian Library 등 전문도서관과 일부 지방자치단체의 도서관에 불과했다.

    PRO의 역할은 물론 영국 기록관리의 역사에서 중요한 획을 그은 것은 1952년 구성된 그리그 위원회(Grigg Committee)의 활동이었다. 그리그 위원회는 중앙부처의 모든 영구보존 대상 기록을 PRO로 이관할 것과 50년이 경과한 PRO 소장기록의 공개, 그리고 각 부서는 기록 생산시점부터 기록관리를 책임지고 기록물의 1차 선별(first review)을 담당할 부처 기록관리자(Departmental Record Officer)의 임명을 권고했다. 그리그 위원회의 권고안은 1958년의 공공기록물법으로 제도화되었다. 1967년에 개정된 공공기록물법은 50년 공개가 아닌 공공기록의 생산 후 30년 공개 규정을 명시했다. 2005년 정보자유법(Freedom of Information Act 2000)의 시행으로 현재 영국의 공공기록의 비공개 기한은 20년으로 단축되어 있다.

    역사워크숍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된 시점은 바로 공공기록 관리와 PRO의 역할이 재정립되던 시기와 맞물린다. Swan은 PRO 기록을 잘 활용하기 위해 PRO의 업무 운영 방식을 잘 이해해야 한다며 영구기록물 선별 프로세스를 자세히 설명하기도 했다. 그는 1958년 공공기록물법 이전에 중앙부처들이 폐기일정표에 따라 기록을 관리했다면 이제는 보존의 관점에서 기록을 선별한다고 평하기도 했다(Swan 1976).

    PRO는 초창기 역사워크숍운동 참여자의 역사 연구에 충분히 이용할 가치가 있는 기록보존소였다. HWJ에는 런던 중심부의 Chancery Lane에 있던 PRO를 런던 외곽의 Kew 지역으로 이전하는 것에 대한 반대가 제기되기도 했다(History Workshop 1977). 교통비용 증가로 역사 연구자를 위한 환경이 더 열악해진다는 이유였지만, 다른 차원에서 볼 때, 역사워크숍운동에서 PRO 소장 기록이 차지하는 비중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중앙부처의 공공기록과 달리 영국의 지방행정기관의 지방기록은 공공기록물법의 적용을 받지 않았다. 1899-1901년에 있었던 지방기록위원회(Commission on Local Records)와 1910-1919년에 활동했던 왕립공공기록위원회(Royal Commission on Public Records)는 정부 차원에서 처음으로 지방기록의 부실한 관리 실태를 부각시켰다. 특히 지방사 연구의 활성화는 지방기록 관리 개선과 지방기록물관리기관 설립에 큰 역할을 했다. Samuel에 따르면, 지방사연구에 가장 큰 걸림돌은 활용할 수 있는 기록이 제한적이라는 것이었다. 대부분 교구 기록(parish chest)에 주로 의존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장소에 대한 느낌(a sense of place)과 같이 지역별 특성이나 특징이 드러나기 보다는 동질성과 획일성이 더 부각되는 실정이었다(Davin, Samuel, and Howkins 1975).

    이와 더불어 2차 대전 동안 독일의 폭격 등으로 상당한 지방기록이 손실되면서 지방자치단체들도 기록 보존을 위한 체계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지방기록물관리기관의 설립이 이러한 대책의 중심에 있었다. 1960년까지 영국에서 설립된 지방기록물관리기관은 잉글랜드에 46개, 웨일스에 10개였다(Hardacre 1962). 1965년에 Greater London Record Office라는 이름으로 런던시 아카이브가 설립되는 등 1980년대까지 영국의 지방기록물관리기관 설립이 완료되었다. 영국 최초의 주(county) 단위 지방기록물관리기관은 1913년에 설립된 Bedfordshire Record Office였다. 1924년 설립된 Bristol Record Office는 자치구(borough) 단위의 첫 번째 지방기록물관리기관이었다.

    지방기록물관리기관의 설립으로 영국의 전통적인 사계재판소(quarter-session) 기록과 같은 기본적인 공식 문서에 더해 기증이나 위탁 등의 형태로 많은 유형의 기록이 유입되었다. 이처럼 새로운 컬렉션의 계속된 유입으로 인해 얼마 지나지 않아 기존 목록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될 정도였다고 한다(Hardacre 1962).

    기록물관리기관은 소장 기록의 활용을 촉진하기 위해 다양한 안내서를 발간했다. Bedfordshire Record Office는 1913년부터 44년간의 소장기록 종합 안내서 Guide to the Bedfordshire Record Office를 1957년에 발간했고, Lancashire Record Office Report와 The Oxfordshire County Record Office and its Records와 같은 보고서도 매년 출간되었다. 기록물관리기관의 설립은 역사워크숍운동이 강조하던 생생한 살아 있는 역사, 우리와 관련 있는 역사를 재현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HWJ에 게재된 다수의 논문들은 기록물관리기관이 소장하고 있는 기록을 토대로 했다.

    재판기록과 경찰기록도 ‘아래로부터의 역사’ 연구를 위한 중요한 보고였다. HWJ의 창간호에서부터 사회사 연구를 위한 재판기록의 활용방안이 제시되었다(Vaisey 1976). 센서스 기록 또한 HWJ에서 활용한 주요 기록이었다. 센서스기록은 1841년부터 10년 주기로 작성되었다. 1911년까지의 센서스 기록은 현재 TNA에 소장되어 있고 1921년 이후의 통계와 기록은 국가통계국(Office for National Statistics)의 관할 하에 있다. 런던 기록물관리기관이 소장한 1570년부터 1640년까지 종교재판소 재판기록을 분석해 여성들 사이의 모욕과 명예훼손사건들을 분석한 논문(Gowing 1993)과 1871년 센서스 기록과 법원 재판기록을 토대로 작성된 논문(Ross 1983)은 사회사는 물론 여성사의 관점에서도 매우 흥미롭다.

       3.2 사료로서의 민간기록의 유형과 활용

    앞서 언급했듯이, 출범 초기 역사워크숍운동의 주된 관심은 노동사 연구였다. 창간호부터 노동자와 노동운동 관련 기록을 소장하고 있는 도서관을 소개하는 글이 게재되었다(Shipley 1976). 이어 영국을 넘어 독일의 노동자 도서관들도 소개되었다(Steinberg 1976). 광산 노동자의 희생과 이들의 운동에 대한 기록 소개(Rymer 1976)와 빅토리아 시기의 철도노동자를 주제로 한 긴 논문도 게재되었다(McKenna 1976). The Modern Records Centre at Warwick University 등 노동사 아카이브에 대한 소개와 더불어 노동당의 첫 번째 유급 직원이자 사무총장을 역임했던 Jim Middleton(1878-1962)의 역할을 중심으로 노동당 아카이브의 기원과 소장기록에 대한 포괄적이면서도 상세한 설명이 있기도 했다(Bird 1994).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정당 아카이브이다. 정당의 기록 보존은 민주주의 프로세스의 투명성과 책임성 보장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나아가 정당의 기록은 활용성이 높은 기록유산이자 정보자원이기도 하다. 독일 등 유럽 대륙에서 정당 아카이브의 설립은 법적으로 의무화되어 있고 이에 대한 공적 자금의 지원도 이루어진다. 이에 비해 영국에는 정당 아카이브에 대한 법적 규정이 없다.

    그럼에도 노동당 관련 기록은 1975년부터 Labour History Archive and Study Centre를 중심으로 컬렉션이 구축되기 시작했고 현재 People’s History Museum과 London School of Economics Archive, University of Huddersfield 등에 보존되고 있다. 보수당 아카이브는 당의 공식 역사가였던 Lord Blake와 당 부의장이던 Lady Young의 제안으로 1978년에 옥스퍼드대학 Bodleian Library에 설립되었다. 이후 보수당 아카이브는 1867년까지의 당 출신 7명의 수상과 수많은 외교관, 각료, 언론인의 기록을 수집 보존하고 열람을 제공하고 있다(McIlwaine 2009).

    1980년대부터는 HWJ에는 공공기록 이외에 민간 영역의 전문 아카이브에 대한 소개가 늘어났고 민간기록을 활용한 논문도 많아졌다. HWJ에서 빈번하게 활용한 민간기록으로는 신문과 잡지가 있다. 1951년 노동당에서 보수당으로의 정권 교체에서 행한 여성들의 역할을 고찰한 논문이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이 논문은 보수당 아카이브 소장 기록과 더불어 British Housewives’ League라는 여성단체의 활동에 관한 전국지와 지역신문의 방대한 기사를 주요 사료로 하면서 분석을 진행했다 (Hinton 1994).

    1976년에 영국국립도서관(British Library)이 Colindale에 소장하고 있던 신문들을 마이크로필름으로 제작하고 원본은 열람에서 제외하겠다는 방안을 발표하자 HWJ은 즉각 이러한 발상이 연구자들에게 새롭고도 심각한 위협이라고 반발했다. 마이크로필름은 보존의 장점이 있지만 열람에 단점이 많다는 이유에서였다. HWJ은 신문이 19세기와 20세기 영국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역사 정보를 제공한다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신문 기록의 가치를 강조했다. “독재국가에서는 역사가들이 사회생활의 세세한 부분까지 감시하면서 기록한 풍부한 경찰 기록을 이용할 수 있다. 근대 초기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교구의 법정기록과 장원 문서를 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와 20세기 영국을 연구하는 사회사가들은 신문이나 아카이브 외에 선택할 대안이 없다. Asa Briggs의 선구적 연구는 지역 신문들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최근 지방사 연구의 활성화는 지역 신문의 활용 확대를 의미한다. 이용하는 사람이 크게 증가해 Colindale의 신문도서관 열람실이 두 배 확충되었을 정도이다(History Workshop 1977).”

    영국에서 기록으로서 신문은 특이한 측면이 있다. 영국에서 신문이 체계적으로 수집 관리되기 시작한 것은 1822년부터였다. 이 때 신문사들은 인지세 납부를 위해 신문 몇 부씩을 Stamp Office에 제출했다. 3년이 지나면 이 신문들은 영국국립도서관으로 옮겨졌다. 1869년부터 신문사가 영국국립도서관으로 직접 납본하는 법적 규정이 만들어졌다. 영국국립도서관이 영국 내 모든 신문의 컬렉션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따라서 영국의 신문은 민간 기록이지만 공적으로 관리되는 특성을 가진다. 2013년 11월 Colindale의 신문도서관은 폐쇄되고 West Yorkshire의 Newspaper Storage Building으로 이전이 진행되고 있다. 열람은 마이크로필름과 디지털 컬렉션을 구축한 St Pancras의 영국국립도서관 Newsroom에서 제공하고 있다.

    신문과 더불어 소설과 같은 문학작품을 연구소재로 활용한 경우도 많았다. 역사학이나 지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엄청난 규모로 복잡한 ‘파악할 수 없는’ 존재인 런던과 같은 대도시가 시민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시민들이 어떻게 그 도시를 형성하고 만들어 가는지 파악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소설가의 경험과 상상력에서 만들어진 등장인물을 통해 이를 설명하려 한 논문이 있다(White 2003). 그리고 헤어진 연인의 죽음을 조사하다 동성애의 세계로 빠져 들어간 정신과 의사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런던의 야릇한 ‘지하’ 문화를 다룬 소설을 통해 1950년대 동성애 세계는 현재 우리가 이해하는 의미와 다르다는 점을 밝히려 한 글이 있다(Houlbrook and Waters 2006). 1885년 비인에서 익명으로 출판된 Edmund Eisler의 Ein Zukunftsbild(a picture of the future)를 포함해 1882년과 1920년 사이에 출간된 5권의 시온주의 유토피아 저작(3권은 독일어 2권은 히브리어)에 나타난 젠더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분석한 논문도 흥미롭다(Elboim-Dror 1994).

    사진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한 논문도 등장했다. 사진은 특정 시기의 복식이나 특정 사회계급의 주거 형태, 가구의 모습이나 사용방법 등 문서기록이 보여주지 못하는 여러 가지 측면을 시각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 역사학자들은 사진을 통해 이미지와 활자 사이의 상호 조응을 추구할 수 있고 문서기록을 구체화하거나 장면을 설명하는 데 사용하는 등 상호 보완의 작용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1976년에 HWJ에 발표된 이 논문은 현재 시청각기록의 커져가는 중요성을 감안할 때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보인다(Frank 1976).

    당연한 일이지만, 일기와 편지와 같은 개인기록을 소재로 하는 경우도 많았다. 노동자계급 출신인 부친의 일기, 편지, 기념품과 같은 가족기록을 토대로 어린 시절 형성된 지역 소속감이 1970년대 도시 확장과 ‘뉴타운’ 재개발을 거치면서 어떻게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는지, 기존연구와 달리 전통적 노동자계급의 태도와 행동이 2차 대전 전후 어떻게 점차적으로 그리고 불균등하게 변화해 가는지 등을 연구한 최근 논문이 대표적이다. 가족 기록과 유품은 계급, 성, 도시생활의 맥락 속에서 뒤섞이고 변화하는 가족과 지역에 대한 의미를 제공하고 가족과 지역, 기억과 문화라는 상상의 풍경에 대한 계급 기반의 태도와 행위가 미친 영향 등을 이야기해준다는 것이 필자의 결론이다(Tebbutt 2012).

    가나 출신 부친의 이야기를 통해 유럽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세계주의를 전개하는 방식을 소개한 논문도 색다른 의미를 준다(Caine 2010). 다른 잡지에 발표되었지만, 버뮤다 태생 아프리카 노예여성 메리 프린스 등 5인의 자서전적기록, 사회 엘리트에 속하는 여성의 일기, 교회 등에서 이들을 도운 교육받은 여성의 일기 등 1800년대 이래 카리브 여성의 기록을 자료로 한 논문(Bereton 1998)도 같은 유형에 속한다.

    개인 일기를 중심으로 한 연구 가운데 널리 알려진 것이 Halifax Central Library에 소장되어 있는 Anne Lister의 일기(24권, 6천 페이지, 2백만 단어)를 소재로 한 논문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기존의 연구서와 비교하면서 이러한 방대한 기록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학자들은 뺄것과 선택할 것에 대한 기준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Liddington 1993).

    HWJ에 등장하는 연구 소재 중 가장 흥미로 운 것 가운데 하나는 Staffordshire University의 The Iris Strange Collection을 분석한 연구(Lomas 1994)이다. War Widows Archive로도 알려진 이 컬렉션은 1차 대전 미망인이 보낸 편지 300통을 포함하지만 대부분 2차 대전 미망인이 작성한 8천통의 편지와 일부 신문스크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쟁미망인들의 이 편지들은 모두 1971년과 1992년 사이에 Iris Strange에게 보내진 것들이다. 1971년 Strange는 Jill Gee라는 미망인이 연금에 대한 과세 폐지를 목표로 War Widows’ Association을 결성했다는 라디오방송을 듣고 참여해 사무총장을 맡아 집을 사무실로 바꾸고 1992년 죽을 때까지 편지를 받아 관리했던 것이다. The Iris Strange Collection은 사회운동의 주체들이 스스로 기록물을 생산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기록관리 관점에서도 좀 더 세밀하게 고찰할 부분이 있다고 보인다.

    이렇듯 다양한 민간기록 이외에도 역사워크숍운동 참여자와 HWJ에 나타난 논문들은 기록의 직접 생산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즉 구술자료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당시까지 문서자료가 전문 역사 영역을 지배하고 있었고 사료로 서의 구술 증언은 도외시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지방사, 민속연구, 여성사, 노동사, 소수자 연구 등에 구술 자료의 활용이 늘어갔고 1969년에 British Institute of Recorded Sound의 컨퍼런스를 거쳐 1973년에 구술사협회(Oral History Society)가 설립되었다. 이들과 역사워크숍운동의 자연스러운 결합이 이루어졌다. Samuel은 인터뷰 기록을 수집하는 등 구술기록 컬렉션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구술기록 수집은 공동체아카이브는 전통적인 기록에서 거의 대변되지 못했던 사회 영역으로부터 데이터를 수집함으로써 기존의 전통적인 아카이브 개념에 도전하는 의미가 있었다. Samuel이 사회를 진행한 1974년 11월 2일의 구술사협회 모임에서는 지금까지 진행되었던 주요 구술 프로젝트 현황이 보고되었다. ‘Family Life, work and the community before 1918: the Essex Project’는 에드워드 시기 영국의 사회사 연구에 필요한 기록의 결락부분을 메우려는 시도로 500명 이상 인터뷰를 진행했으며, 1972년부터 시작된 ‘People’s Autobiography of Hackney’는 런던 최대 빈민지역 중 하나인 Hackney의 교사, 사서, 인쇄업자, 건설노동자, 우편집배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해 지역에서 녹음기록을 생산하거나 수집한 프로젝트였다. 이들은 녹음기록을 토의하면서 토론 자체도 녹음했고 그 내용을 정리해 책자로 발간하기도 했다. 1972년과 1973년에는 옥스퍼드셔의 조그만 시골마을인 Charlbury에서 주민의 삶과 경험을 구술하고 녹음한 사업이 진행되어 녹취록이 제작되었다. 이 녹음 기록은 지역 박물관에 기증할 예정이라고 보고되었다(Davin, Samuel, and Howkins 1975).

    구술기록은 살아있는 기억이자 생생한 새로운 자료이다. 다수의 심층 면담을 통해 과거 삶에 대한 아주 다양한 정보를 확보할 수 있다. 망각될 가능성이 있는 사투리, 노래, 전통 뿐아니라 사라져가는 직업이나 관례 등에 대한 아주 중요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문서자료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사람들의 가치, 태도, 생각, 행동 이유 등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삶의 경험이 얼마나 복잡하고 모순적인지를 알려준다는 점이 구술의 주요 강점 중 하나이다. 더욱이 구술의 특성상 현재 진행 중이거나 논란이 되는 사회 상황을 알게 해주고 이를 통해 과거와의 진정한 대화의 가능성을 높여준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나아가 구술은, 현대적인 언어로 표현한다면, 정신적이고 문화적인 복지의 역할을 한다고 평할 수 있다. 구술 면담은 노인을 포함한 구술 대상자에게 치유의 효과도 제공한다. 자신의 삶을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고 그 회상을 흥미 있어 하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는 주장이다(Gittins 1983).

    이처럼 많은 측면에서 구술은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구성하려한 역사워크숍운동과 궤를 같이 하는 측면이 있었다. 당연히 HWJ에도 구술을 활용한 여러 논문이 발표되었다. 양차대전사이 런던 Campbell Road의 룸펜 프롤레타리아를 설명하고 이들이 자본주의 경제 구조에서 차지하는 계급적 위치를 규명하려는 연구(White 1979)는 1920-1930년대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구술 증거를 활용했다. 케냐 Asante 지역선교사와 교사의 ‘모성 제국주의’ 경험을 문서기록(개인 편지, 보고서, 논문)과 아직 생존한 지역 여성의 구술 회고를 보완해 구성한 연구(Allman 1994)도 있다.

    다른 잡지에서도 구술기록을 활용한 연구를 다수 발견할 수 있다. 1995-1999년 사이 영국의 매춘녀 구술 인터뷰를 통해 이들의 가족배경, 어린 시절의 경험, 직업에 대한 생각과 실제, 미래에 대한 생각 등을 분석한 연구(Rickard 2001)와 2000년에 2개 대도시 주민 8,655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 결과를 토대로 부르키나파소의 젊은 도시 거주자의 늦은 결혼 경향과 동거 증가, 직업 불안정이 결혼에 미치는 영향과 이것이 자녀 생산에 미친 영향 등을 연구한 글(Calves and Depledge 2007)도 같은 유형이다.

    사료로서 구술기록의 활용은 대표성의 문제와 기억의 신빙성 문제와 연결된다. 그러나 이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기록이나 데이터에도 해당되는 문제이다. 완벽하고 오류없는 자료나 방법은 없다. 역사가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어떤 기록을 선택하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HWJ에서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스페인내전 당시 영국 민간인의 지원활동에 대한 논쟁이다.

    Buchanan은 공공 및 민간 아카이브에 소장되어 있는 노동조합협의회, 노동당, 개별 노동조합, 주요 인물 등의 기록을 소재로 했다(Buchanan 1991). 반면 Fyrth는 Aid Spain 참여자의 글, 구술과 편지 등의 기록을 활용했다(Fyrth 1993). 다른 사료를 통해 같은 주제를 분석한 두 연구는 스페인내전에 대한 영국 노동운동 지도부의 태도, 그 배경, 지원 운동이 인민전선의 성격을 가지는지 등에 대한 상당한 이견을 보였다. Fyrth 는 Buchanan의 연구를 ‘위로부터의 역사’로규정하고 자신의 연구가 ‘아래로부터의 역사’임을 강조했다.

    Fyrth의 주장처럼 역사연구에 사용한 기록을 통해 ‘위로부터의 역사’와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논쟁이 진행될 만큼 풍부한 기록이 존재하고 이를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워크숍운동은 다양하고 풍부한 민간기록을 수집 관리하고 이를 역사 연구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토양이 되었다.

    4. 역사워크숍운동의 영향과 현재적 의미

    이 장에서는 역사워크숍운동이 영국의 기록관리 발전에 미친 영향과 영국 기록관리 전반의 현재적 흐름을 제시하고자 한다. 1990년대 이후 영국에서 지역 공동체 아카이브가 활성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에는 역사워크숍운동의 영향이 컸다는 평이 일반적이다(Flinn 2007).

    Community Archives and Heritage Group에 따르면, 현재 등록되어 있는 영국 전체의 공동체 아카이브는 491개이다. 잉글랜드에 446개, 스코틀랜드에 7개, 북아일랜드에 16개, 웨일스에 22개가 있다. 등록되어 있지 않은 공동체 아카이브도 상당한 수일 것으로 보인다.

    1980-1990년대 여성평화운동과 1970-1980년대 여성해방운동에 관한 중요 기록을 소장하고 있는 Women's Archive of Wales, 1940년 설립되어 현재까지 활동하는 합창단 기록을 소장한 Birmingham Clarion Singers Archive, 1929년 이래 런던대학 St George's의 병원과 의과대학에서 근무한 100명 정도의 간호사와 중년여성의 기억을 구술 채록한 Nurses Voices, 캠브리지의 대형백화점이던 Robert Sayle와 관련된 사진과 문서, 구술인터뷰를 소장한 Robert Sayle Memory Store, 옥스퍼드셔 농민의 구술 기록을 가진 AgriCultured, Devon의 도자기 산업 관련 기록을 소장한 Ball Clay Heritage Society Archive등 동호회, 지역, 산업, 세대 등을 포괄하는 다양한 공동체 아카이브가 존재한다.

    최근에는 성적 소수자와 소수 인종의 기록을 수집, 보존하는 아카이브들이 다수 등장하고 있다. 런던 지역 성적 소수자의 기록을 소장한 London LGBT Archive: rukus, 1981년부터 영국 내 흑인의 역사와 문화, 유산을 수집한 Black Cultural Archives, 버밍엄 흑인의 역사를 구축하기 위한 버밍엄 시 아카이브와 버밍엄 대학, Warwick 대학의 공동프로젝트(2005-2007)의 산물인 Connecting Histories, 1992년 설립된 힌두여성협회(Hindu Nari Sangh)가 주도하여 타인 위어(Tyne and Wear) 내 아시아인의 영국 이주 이유와 취업 과정 등 구술기록을 소장한 Desh Videsh: Home and Away-A history of the Asian Community 등이 대 표적이다.

    Flinn 등은 이들 공동체 아카이브의 특징으로 ‘독자적(independent) 특성’을 꼽고 있다(Flinn, Stevens, and Shepherd 2009). 영국의 공동체 아카이브들이 자율적인 조직과 독자적의사 결정으로 대표되는 독자성을 강조하는 것도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지향한 역사워크숍운동의 영향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 아카이브 뿐 아니라 국가기록원에 해당하는 TNA도 이러한 변화에 동참하고 있다. 2001년 1월부터 2002년 6월까지 진행된 시범사업인 ‘CASBAH(Caribbean Studies and Black and Asian History)’는 전국에 걸쳐 카리브 연구 및 영국 내 흑인과 아시아인(주로 인도,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등 남부아시아인) 역사와 관련된 역사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해 원본 검색을 가능하게 하는 프로젝트였다.

    본 사업격인 ‘Moving Here'는 지난 200년 동안 영국으로 이주한 4개 그룹(동유럽 출신 유대인, 아일랜드 출신, 카리브, 남부아시아 출신)의 이민사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프로젝트였다. 이를 통해 소수민족 집단의 이민사 기록 수집에 대한 장벽 극복하고 이 기록을 교육을 통해 다음 세대에 전수함으로써 이들의 정체성 확보에 도움을 주고자 했다. TNA가 주도한 이 컨소시엄 프로젝트에는 28개 공공도서관, 박물관, 지방기록물관리기관 및 런던정경대학(LSE) 등 학계가 콘텐트 파트너로 참여했고 5개 기관은 지역 파트너로 참여했다(최재희 2013).

    Out There는 London Metropolitan Archives와 TNA 사이의 공동 프로젝트로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의 역사 연구에 필요한 기록을 수집해 제공한다. TNA의 Out There 홈페이지는 일종의 포털로 관련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링크를 제공한다.

    TNA를 위시한 영국 내 공공 기관들이 이러한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은 정부의 아카이브정책 변화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1997년 집권한 노동당 정부는 사회적 신뢰 회복과 유지가능한 사회 구축을 위해 사회통합을 목표로 제시했다. 이를 위해 아카이브 영역 또한 사회통합이라는 정부의 정책기조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그 이행을 실제적으로 지원하고 이행해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즉, 박물관 및 도서관과 함께 아카이브는 지금까지 수행해왔던 전통적 역할은 물론 새로운 사회적 역할을 부여받은 상황이었다(최재희 2008).

    이처럼 영국의 기록관리는 민간과 공공영역의 구분 없이 새로운 지평의 확대를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이 모든 것을 역사워크숍운동의 영향으로 돌리는 것은 당연히 무리이다. 중요한 것은 역사워크숍운동이 지향했던 ‘아래로부터의 역사’ 서술을 위한 기반이 더욱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공공과 민간 아카이브의 협업과 연계를 강화하려는 경향과 TNA를 중심으로 민간 아카이브를 지원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진행되는 것도 고무적이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변화는 전자시대의 도래에 따른 정보관리의 확대 경향이다. 이것은 기존의 수동적인 정보 공개를 넘어 정보 공유와 자원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유럽연합도 2003년에 이미 공공정보 활용의 중요성 강조하고 이를 위해 2007년까지 각국의 법령을 정비할 것을 요구한 바 있다.

    2003년에 있었던 PRO와 역사기록위원회의 통합도 비용의 측면 뿐 아니라 정보관리를 선도하기 위한 사전 조치였다. 1869년에 Royal Commission on Historical Manuscripts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던 역사기록위원회는 역사연구에 필요한 연구 기관과 주요 가문의 기록을 조사하고 출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역사기록위원회는 영국역사와 관련 있는 기록과 필사본의 위치와 내용에 대한 정보를 등록하고 제공하는 National Register of Archives를 운영하는 책임도 갖고 있었다. 사실상 PRO가 공공기록을 담당하고 역사기록위원회가 민간기록을 관장하는 이중 구조였다. 그러나 양 기관의 통합으로 새로운 이름의 TNA가 영국 전반의 역사기록을 총괄하게 되었다.

    나아가 TNA는 2006년에 공공정보관리국(Office of Public Sector Information) 및 관보국(Her Majesty's Stationery Office)을 흡수 통합했다. 이것은 TNA가 영국의 공공정보활용과 정보 자원화를 주관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2006년까지 “최고의 전문성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세계 최고의 국가 아카이브”를 비전으로 내걸었던 TNA는 2007년에 “정보관리의 변화를 선도”한다는 것을 제1의 비전으로 발표했다. TNA 직원의 명칭은 20세기의 기록조사관(Inspection and Documentation Officer)에서 고객 관리자(Client Manager)를 거쳐 현재 정보관리지원자(Information Consultant)로 변경되었다.

    “TNA는 단순히 역사의 보존소가 아니다. TNA의 임무는 정보에 생명을 불어넣어 다양한 접근과 활용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제 모든 사람이 사회에 기여할 산물과 서비스를 창조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는 것이 TNA 내 정보관리의 책임을 맡고 있는 Lord McNally의 장담이다.

    이전에 사실상 접근하기 힘들었던 의회기록(Hansard)은 온라인으로 쉽게 찾아볼 수 있고 검색도 용이하다. 조만간 상당수 도서와 기록은 디지털로 변환되어 온라인으로 검색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전과 달리 이제는 정보와 기록의 홍수를 우려해야 할 지경이 되었다.

    이러한 경향과 변화는 역사 연구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아래로부터의 역사’와 역사에서 대변되지 못하고 감춰진 이들의 복원, 그리고 난해하고 추상적인 전문 역사가만의 역사가 아닌 열정을 가진 많은 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역사의 민주화를 위한 또 다른 토대가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역사워크숍운동은 퇴조한 상태이다. 그러나 곧 새롭고 흥미로운 역사워크숍운동 2.0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5. 맺음말

    역사가와 기록 사이에 놓여 있는 밀접한 긴장 관계를 새삼 다시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역사와 기록 또는 사료의 관계 설정에 대한 문제는 역사방법론과 역사철학의 중심 주제이기도 했다.

    Collingwood는 독단적(dogmatic) 역사와 비판적(critical) 역사, 구성적(constructive) 역사로 등급을 나누면서 역사가의 능력을 중요한 변수로 제시했다(김현식 2009). 사료에 충실하면서 있는 그대로 사실을 기술해야 한다고 주장한 Ranke는 어떠한 편견이나 선입견에 사로 잡히지 않아야 하는 역사가의 품성을 제시했다. Carr 또한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역사를 재해석하는 데에 있어 역사가의 관점을 강조했다.

    그렇지만 새로운 자료들이 발굴되거나 접근이 확대되기 때문에 역사는 새롭게 해석되기도 한다. 기록은 정치 권력과 문화 권력이 잠재해있는 보고로 이해관계의 충돌이 일어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기록물 수집 보존 정책과 실무는 역사 서술에 필요한 기록물의 존재 자체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Galloway 2006). 공공기관이 아닌 민간 아카이브의 경우 재정적 이유로 필요한 기록을 수집하지 못하거나 보존관리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많은 역사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기록은 항상 어떤 장소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발굴되지 않아 활용되지 못하는 객체가 아니다. 기록의 존재 자체는 치열한 정치적·경제적·문화적 권력투쟁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서술하려는 많은 시도들이 기록의 이러한 특성과 기록관리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역사 연구 소재의 다양화 경향에 대해 김현식은 “역사가의 몸은 더욱 분주해지고 역사가의 정신은 더욱 개방되야 한다. 오늘날 역사가는 인간 육체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야하고, 사람의 냄새가 배어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끌어모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군가 이를 단서삼아 눈에 보이지 않는 사냥물의 모양새나 움직임을 구성해 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면, 이에 기꺼이 귀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고 주장한 바 있다(김현식 2000). 이러한 주장에 대한 동의 여부와 별개로, 김현식이 말한 역사가의 역할 중 전자는 상당 부분 아키비스트의 몫이다. ‘위로부터의 역사’이건 ‘아래로부터의 역사’이건 간에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기록물관리기관 및 아키비스트 사이의 긴밀한 조응이 필요하다.

    영국은 역사 연구와 기록관리의 조응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영국 기록관리체계의 발전에는 역사학계의 역할이 큰 몫을 차지했다. 1921년 설립된 역사연구소(Institute of Historical Research)는 역사 연구의 중추기관이자 역사학회에 해당하는 단체이다. 역사연구소는 일찍부터 역사 연구의 주요 기반으로 아카이브 소장 기록의 활용을 강조하는 운동을 전개하면서 공공기록의 열람 범위를 확대하고 열람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역사학계는 영국 기록관리사에 큰 획을 그은 그리그 위원회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역사연구소의 관장은 위원으로 위원회 활동에 적극참여했다. 당시 PRO 부관장이던 Jenkinson이 재무성과의 의견 차이로 위원회 참여가 배제된 것과 비교된다. Jenkinson이 1954년에 은퇴하면서 후임 Evans를 포함한 PRO 소속 아키비스트들은 위원회 보고서를 실행에 옮기는 것에 중심 역할을 담당했다.

    지방기록 관리체계의 개선에도 역사가들의 역할이 있었다. 1932년 설립된 영국기록협회(British Records Association)와 더불어 지방기록 관리의 개선을 촉구한 것은 역사연구소였다. 2차 대전 이후 지방사 연구의 활성화는 지방기록물관리기관 체계 정립에 빼놓을 수 없는 동인을 제공했다. 몰론 20세기 전반기에 공공기록체계 개선을 주도한 것은 역사워크숍운동이 아니라 기존 학계였다. 역사워크숍운동도 이러한 역할과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우리의 경우에도 1999년 공공기록물법의 제정과 2000년대 중반 기록관리혁신에 많은 역사연구자들이 참여했다. 그렇지만 연구자들은 국가기록원을 포함한 기록물관리기관의 기록을 연구에 활용하는 데에는 적극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김지현의 연구에 따르면, 국가기록원 서울정보센터의 방문 이용자 중 최대한 연구자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 학부생과 석사과정생, 연구원은 전체의 19.2%였다. 논문이나 연구 관련 자료수집을 목적으로 한 경우도 8.5%에 그쳤으며 수업과제를 위한 자료수집을 포함한다 하더라도 14.9%에 불과했다(김지현 2013). 정보공개청구절차의 복잡성 등 정보공개법을 통한 학술 기록정보서비스의 문제점을 분석한 연구도 학술연구자의 이용률이 저조하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윤은하 외 2014).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영국의 역사학자들이 기록관리체계 개선에 적극 참여한 근본적인 이유가 역사연구에 필요한 사료로서 기록물의 활용을 위한 것이었음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공공기록 관리체계의 개선은 여전히 시급하고도 중요한 문제이다. 공공기록은 지배 엘리트의 산물로 의심되어 의도적으로 배제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공공기록은 역사 재구성에 아주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많은 공공기록에는 대중과의 상호 관계를 보여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나아가 지배 엘리트와 행정 부처 사이에는 종종 긴장을 존재할 수도 있다(Higgs 1983). 어떤 입장에서건 공공기록 관리를 외면할 수 없다. 과거의 기록이 잘 보존되어 있지 않다면 현재의 기록이라도 잘 관리 선별되어 보존되고 활용되도록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기록물관리기관의 소장 기록과 열람 현황을 면밀히 분석하고 문제점을 제시하는 것이 공공기록 관리체계 개선의 출발이 될 것이다. 지방기록물관리기관의 설립도 예산과 조직을 관장하는 행정기구에 맡겨놓을 일이 아니다. 관련법률에 반영하던 않던 간에 정당 아카이브의 설립도 시급히 논의해야 할 사안이다. 기록학계 내의 문제 제기도 중요하지만 역사학을 포함한 다른 학문분과와의 소통과 협력을 통해 공동 노력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상 아카이브, 마을 아카이브, 공동체 아카이브, 다문화 아카이브, 구술 아카이브 등 다양한 이름의 민간 아카이브에 대한 논의도 마찬가지이다. 다양한 민간 아카이브가 설립되는 것은 바람직하다. 아카이브 대상 주체들이 아카이브 설립과 운영을 자발적으로 주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역사학 등 유관 분야와의 협력이 필요하며, 무엇보다 국가기록원 등 공공기관 기록물관리기관의 역할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견인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지방기록물관리기관의 설립의 타당성 전파를 위해 민간아카이브의 철학과 비전을 연계시켜 고민할 필요도 있어 보인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 HWJ의 논문들이 활용한 민간기록은 신문, 노동사 아카이브 소장기록, 일기, 편지, 구술 등 매우 다양했다. 쉽게 예상할 수 있던 일이다. 그러나 이들 기록의 소장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연구자들이 활용한 것은 거의 지역 박물관이나 대학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기록들이었다. 정당 아카이브도 당에 부속되지 않은 대학 도서관을 중심으로 설립 운영되고 있으며 영국노총(Trade Union Congress)의 기록켈렉션도 대학 도서관(TUC Library Collection London Metropolitan University)에 구축되어 있다.

    당파에 속하지 않은 대학도서관에 기록이 보존되고 아키비스트에 의한 관리와 기록화가 진행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이는 관련 연구의 활성화를 위한 조치임과 동시에 정파에 휘둘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기록관리를 확보하는 토대이기도 했다. 이는 도서관과 박물관의 역할 확대는 물론 기록물관리기관을 포함한 이들 문화기관 사이의 협력 방향에도 좋은 시사점을 제공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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