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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Marina Carr’s By the Bog of Cats. . . : Hester’s Becoming-Ghost 마리나 카의『고양이 늪』─헤스터의 유령-되기
  • 비영리 CC BY-NC
ABSTRACT
Marina Carr’s By the Bog of Cats. . . : Hester’s Becoming-Ghost
KEYWORD
Carr , bog , grotesque , carnival , becoming-ghost , middle , Euripides , Synge , Bakhtin
  • I.『 고양이 늪』의 공연

    1998년 할로윈(Halloween)을 맞아 애비극장(Abbey Theatre)은 패트릭 메이슨(Patrick Mason)이 연출한 『고양이 늪』(By the Bog of Cats..., 1998)을 무대에 올렸다. 이 극은 당대 아일랜드의 대표적인 여성 극작가 마리나 카(Marina Carr, 1964- )의 작품으로 그녀의 다른 두 작품들, 『더 마이』(The Mai, 1994)와 『포샤 커클란』(Portia Coughlan, 1996)과 더불어 “중부지방 희곡들”(the midlands plays)이라고 불리는 삼부작 중 마지막 작품이다. 아일랜드 중부지방을 배경으로 한 이 삼부작을 통해 카는 그녀 자신의 글쓰기 공간이자 새로운 생성의 공간으로 “중간”을 구축하고 있다. 그리고 특히 마지막 작품인 『고양이 늪』에서 카는 “중간”을 죽음과 생성의 의식을 무대화하는 축제적 시공간(chronotope)으로 창조하기에 이른다(The Dialogic Imagination 84). 할로윈 시즌에 애비극장에서『고양이 늪』의 공연을 기획한 것은 우연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아일랜드 민중 문화의 축제에서 유래한 할로윈을 맞아 애비극장에서 『고양이 늪』을 공연했다는 사실은 단순한 우연이라기보다는 필연적인 결과를 가져온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그 공연은 오늘날 자본주의 시장의 마케팅 전략에 의해 상업주의적 이벤트로 변질된 할로윈을 아일랜드 민중문화로서의 할로윈1의 축제로 복귀시키려는 기획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카의『고양이 늪』의 애비극장 초연은 여주인공 헤스터 스완(Hester Swane)의 유령-되기 의식인 동시에 아일랜드 특유의 유령들을 만날 수 있는 새로운 할로윈 축제 의식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리고 빅토리아 화이트(Victoria White)가 격찬하듯이, 이러한 공연 의식을 통해 카는 남성중심적 민족주의의 애비극장을 페미니즘 연극 무대로, 즉 애비극장을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하나의 국가적 공간으로 재창조하는 성과를 마침내 이룰 수 있었다( “‘Poetry Shite’” 155 재인용).

    1980년대 중반이후 아일랜드의 사회적 관심사들을 다루는 상당수의 아일랜드극작가들이 고전, 특히 그리스 비극의 각색에 주력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McDonald 16). 카의 삼부작들 역시 그리스 비극을 각색한 작품들로 읽힐 수 있다. 물론 카의 각색 의도는 다른 작가들과는 정반대이다. 그들이 고전적 권위에 기대어 아일랜드의 현실적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면, 카는 그녀의 관심사를 다루기 위해 오히려 고양된 비극적 형식의 권위를 전복시킨다. 그러나 그녀의 각각의 삼부작은 그리스 비극을 원전으로 한 다시 쓰기임은 분명하며, 그 가운데 『고양이 늪』은 에우리피데스(Euripides)의 『메데이아』(Medea, 431 BC)의 다시 쓰기로 간주된다2. 즉 카는 『고양이 늪』에서 그리스 비극 세계를 현대 아일랜드의 중부 지방으로 옮겨 와, 예언과 운명 그리고 억울한 여자의 복수라는 『메데이아』의 주제들을 다루는 일종의 다시 쓰기를 하고 있다. 이러한 그리스 비극의 다시 쓰기를 통해 『고양이 늪』의 무대는 그리스인들의 초자연적이고 신 화적인 세계와 아일랜드의 시적이면서 실제적인 중부지방의 늪의 풍경 사이의 위태로운 “중간”에 위치하게 된다. 사실 작가가 직접 묘사하듯이, 작품의 무대가 되는 아일랜드 중부지방은 “세계들 사이의 교차로의 은유”(the metaphor for the crossroads between worlds, The Dazzling Dark 311 재인용)이다. 그리고 이 작품의 공연은 세계들 사이의 교차로이자 위험한 “중간”으로의 모험으로 관객을 유도한다. 애비극장에서의 초연이후『고양이 늪』은 아일랜드 관객뿐 아니라 국제적 관객 역시 그 중간으로의 탈주선을 찾는 모험으로 빠져들게 하는 일련의 성공적인 공연들로 무대에 올려졌다. 예컨대, 미국에서는 M. K. 마르티노비치(M. K. Martinovich)의 성공적인 초연에 이어, 9·11사태 직후 산호세레퍼토리극단(San Jose Repertory Theatre)역시 홀리 헌터(Holly Hunter)를 헤스터로 등장시켜 성공적인 공연을 하였다. 사실 9·11사태 직후 공연 일정이 잡혀, 그 공연이 화려한 미국 사회의 외양이 폭파로 찢겨져 드러낸 잔혹성에 당혹한 미국 관객을 좌절의 심연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게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았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그 공연은 오히려 관객을 좌절의 심연 속에서 탈주선을 찾도록 유도할 수 있는 성공적인 공연으로 평가되었다(“Reflections”108). 즉 그 당시 잔혹한 현실의 충격에 휩싸인 미국 관객을 좌절의 늪에서 탈주와 새로운 생성의 “중간”으로 끌어내는데 성공한 공연이었다는것이다.3

    『고양이 늪』의 배경인 아일랜드 중부지방은 “무인지대, 폐소공포증적인 함정 지대, 마음의 상태, 그리고 궁극적으로 반유토피아로서”(as a no-man’s land, a claustrophobic zone of entrapment, a state of mind, and ultimately as a dystopia, “Tragic Destiny” 438) 그 은유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중부지방을 배경으로 한 『고양이 늪』이 구축한 “중간”은 헤스터가 대면하는 유령들처럼 괴로운 기억들을 가진 슬픈 영혼들이 떠돌고 있는 경계적인 공간, 즉 살아 있지만 완전히 살아 있지는 않은 사람들(the unliving)과 사라졌거나 죽었지만 완전히 죽지 않은 사람들(the undead)이 함께 공존하는 공간이다. 카가 어느 누구도 감히 또는 기꺼이 들어가고 싶어 하지 않는 이러한 “중간” 속으로 관객을 끌어들인 것은 여주인공 헤스터의 유령들과의 대면과 그녀 자신의 유령-되기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흔히 여주인공 헤스터는 가부장적 비극의 희생자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녀는 냉혹한 가부장제의 희생자가 아니라 그러한 체제를 탈영토화 하는 탈주의 주체로, 사실 폭력의 희생자라기보다는 폭력의 주체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주체로서 그녀의 난폭한 살인과 자살은 안토닌 아르토(Antonin Artaud)가 주장하는 “잔혹의 불가피성”(the necessity of cruelty)에 근거한 탈주로 설명될 수 있다(65). 헤스터의 이러한 격렬한 행동은 살아 남아있는 자들에게 “실체적인 찢긴 상처”(tangible laceration, 65)를 입히며, 이 극이 극화하고 있는 “딜레마의 긴박성과 폭력성”(the immediacy and violence of the dilemmas, “Tragic Destiny” 449)을 상기시킨다. 다시 말해, 헤스터의 유령-되기는 “불가피한 것”(the inevitable, “Writing in Greek” 87), 즉 공적 사회의 영토화와 재영토화를 끊임없이 위협하기 위해 그녀가 선택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행동인 것이다.

    이러한 헤스터의 유령-되기는 아일랜드 민중 문화와도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 사실 카는 아일랜드 농촌을 중심으로 민중문화에 관심을 가졌던 싱(J. M.Synge)의 연극 전통을 수용한 작가로 간주되기도 한다. 베르나데트 부르케(Bernadette Bourke)가 지적하듯이, 특히 아일랜드 중부지방 방언을 사용하고 아일랜드 픽션과 민담의 초자연적인 인물들이 등장하는 『고양이 늪』은 싱의 『서부의 멋쟁이』(The Playboy of the Western World, 1907)의 그로테스크한(grotesque) 그리고 카니발적(carnivalesque) 요소들을 공유하고 있다(130). 따라서 『고양이 늪』은 『메데이아』의 다시 쓰기일 뿐 아니라, 애비극장의 대표적인 선대 남성극작가들 중 한 사람인 싱의 초현실주의적 희극인4『서부의 멋쟁이』의 90년대 식 다시 쓰기로도 읽힐 수 있다(Bourke 134). 물론 빅터 메리멘(Victor Merriman)처럼 카와 싱의 연관성에 대하여 회의적인 비평가도 있지만 (“‘Poetry Shite’” 158), 카는 싱의 다시 쓰기를 통해 애비극장을 중심으로 한 아일랜드 민중 연극의 전통을 수용하면서 또한 그것을 전복함으로써 새로운 전통의 생성을 시도하고 있다.

    따라서 카의 『고양이 늪』은 『메데이아』의 다시 쓰기로 그리스비극과의 “창조적 교섭”(Carr’s creative negotiation, Wallace 437) 뿐 아니라 『서부의 멋쟁이』의 다시 쓰기로 애비극장의 민족주의적 연극과의 창조적 교섭을 시도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중적인 다시 쓰기를 통해 카가 지향한 연극은 바로 새로운 현대 아일랜드 페미니스트 연극임을 본고는 주장한다. 사실 헤스터의 그로테스크한 자식살해(filicide)와 자살은 자신과 딸 죠시 킬브라이드(Josie Kilbride)의 피를 제물로 바치는 용감한 탈주이며, 새로운 생성을 위해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카의 『고양이 늪』은 헤스터의 유령-되기를 통해 “바다/어머니에게로 가라”(aller a` la mer/mere)라는 엘렌느 식수스(He´ le`ne Cixous)의 페미니스트 연극 선언을 용감하게 실천하는 무대라는 것이다.

    1켈트족은 11월 1일에 새해가 시작된다고 믿었으며 1년의 끝은 10월 31일로, 이날 밤에는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가족을 방문하거나, 정령이나 마녀가 나온다고 믿었다. 이들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가면을 썼고, 불을 피웠으며, 또한 가족의 묘지를 참배하여 초를 켜놓기도 했다. 이와 같이 할로윈은 기분 나쁘고 무서운 것을, 즉 죽음이나 신화의 괴물들을 연상하게 하는 풍습에서 유래되었지만,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는 축제이다.  2『더 마이』와 『포샤 커클란』은 소포클레스(Sophocles)의『 엘렉트라』(Electra)와 『안티고네』(Antigone)를, 『고양이의 늪』과 『래프터리 언덕』(On Raftery’s Hill, 2000)은 유리피데스(Euripides)의 『메데이아』를, 『에리얼』(Ariel, 2002)과 『여자와 허수아비』(Woman and Scarecrow, 2006)는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Oresteia)를 각색한 작품들로, 『더 마이』이후 카의 거의 모든 작품들은 그리스 비극에 대한 다시 쓰기들로 읽을 수 있다.  3한국에서도, 우리 사회의 부도덕성과 폭력성의 분출을 보여준 황우석 사태와 군부대 내에서의 총기사건과 같은 대형사건이 난무했던 2005년, 낯선 아일랜드 여성 극작가의 작품 『고양이 늪』은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 내면에 억압되었던 잔혹성을 직면하여 탈주를 찾는 “중간”의 공간을 우리에게 제공하는데 일면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초연(한태숙 연출)으로 무대에 올려졌다.  4부르케는 『서부의 멋쟁이』를 초현실주의적 희극으로 분류하지만, 일곱 가지의 장르로 읽는 것이 가능하다고 언급된다. 즉 “반 비극”(semi tragedy), “자유 희극“(free comedy), ”디오니소스적 희극“(Dionysiac comedy), “풍자”(satire), “모방영웅시”(mock heroic),“희비극”(tragi-comic piece)과 “비극”등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것이다(김소임 47-48 재인용). 또한 브레더톤(George Bretherton)의 분석처럼 “축제적 광기” (carnival madness)를 보여주는 극으로 볼 수 있다고 지적된다(김소임 48). 본고에서는 『서부의 멋쟁이』를 특히 축제적 광기를 극화하는 의식의 극으로 보고 이러한 극의 전통과 연결하는 부르케의 『고양이 늪』의 읽기를 논지 전개에 참조한다.

    II.“ 고양이 늪”―카의“중간”지대

    『고양이 늪』을 쓴 직후 카는 한 강연에서 자신의 글쓰기를 “죽은 자들을 상대하기”에 비유하여, 죽은 자들의 세계인 다른 세계로 넘어가서, 뭔가 새로운 것을 가지고 돌아와야 하는 용기 있는 탈주로, 즉 탈주를 통한 생성 또는 생성을 위한 탈주로 설명한다( “Dealing with the Dead” 191). 다시 말해, 딸이자 어머니로서 헤스터가 고양이 늪을 떠도는 유령들과 용감하게 대면하여 도전적이고 단호한 탈주를 시도하듯이, 카 역시 그녀의 글쓰기 공간인 산 자와 죽은 자들의 세계 사이의 “중간”지대에서 선대 작가의 유령들을 상대하여 탈주의 글쓰기를 한다는 것이다. 『고양이 늪』에서 카가 자신의 글쓰기를 위해 용감하게 들어간 다른 세계는 고대 그리스 문화와 선대의 아일랜드 민중문화, 그리고 아일랜드 중부의 현대 문화의 세계들의 사이, 즉 권위적인 공식 문화와 비공식 문화의 세계들 사이의 “중간”이다. 이 중간 지대는 또한 다수 언어의 소수화가 이루어지는, 즉 강제적으로 통일하고 표준화하려는 언어 체제의 구심력에 저항하는 미하 일 바흐친(Mikhail Bakhtin)의 다중언어(heteroglossia)가 다수 언어의 독단을 해체하고 금지된 의미를 해방시키는 공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 중간은 중심으로부터 멀어지려는 것의 해방적 힘이 작동할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Lachmann 115). 그리고 물론 이 중간 지대는 죽은 자들의 유령들이 출몰하는 세계로, 카니발적 시공간이 되기도 한다. 즉 할로윈을 맞아 아일랜드 국립극장 무대는 카가 불러낸 유령들이 출몰하는 카니발의 공간으로 변한 것이다. 그러나 그 공간은 위태로운 중간 지대이기 때문에, 일단 빠지면 나오기가 힘든 “고양이 늪”이며, 여기로부터의 탈주는, 호머(Homer)가 강조하듯이, 제물의 피를 받쳐 야하는 용기 있는 모험인 것이다(“Dealing with the Dead” 191).

    또한 『고양이 늪』의 무대는 들뢰즈가 설명하는 “소수 연극”(minor theatre)의 무대로서의 “중간”을 구축한다고 볼 수 있다. 카의 “고양이 늪”은 아일랜드의 어느 특정 시대와 역사에 국한된 장소가 아니라, 서로 다른 시대와 공간과 소통할 수 있는 들뢰즈의 “중간”과 상응하는 공간이다. 다시 말해, 카의 중간과 거기서 일어나는 것에 대한 그녀의 관심은 바로 들뢰즈의 소수 연극의 중간과 관심사와 일치한다. 헤스터의 유령-되기가 일어나는 고양이 늪은 들뢰즈가 설명하는 “되기, 운동, 속도, 소용돌이”를 경험하게 되는 소수 연극의 중간으로, 결코 평균으로서의 중간(mean)이 아니라 “잉여” (excess)로서의 중간이다(Deleuze 242). 그리고 바로 그 잉여에서 생성이 일어날 수 있음을 들뢰즈가 강조하듯이, 카의 늪 역시 잉여로서 생성의 공간이 된다. 캐시디(Cassidy)와 킬브라이드(Kilbride) 집안사람들을 비롯하여 현대 아일랜드 물질주의 사회의 “다수”를 대변하는 마을사람들은 고양이 늪에 유랑인으로 떠돌며 사는 헤스터를 비롯한 삼대의 모녀들과 그곳에 출몰하는 유령들을 잉여로, 또는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의 “비체”(abject)로 배제한다. 다시 말해, 다수 사회의 영토화를 불안하게 만드는, 즉 탈영토화로 흐르는 욕망의 공간인 “중간”을 떠도는 “소수”는 정화된 사회를 위해 폐기처분되어야할 쓰레기같은 비체로 취급된다는 것이다. 메리멘이 지적하듯이, 헤스터는 켈틱 타이거 시대 아일랜드의 새로운 문 화적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 정화되어야 할 “아일랜드성”(Irishness)의 부정적인 양상들을 보여주는 “백인 쓰레기”(white trash, “Decolonisation Postponed” 313)로 취급되어 늪에 던져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늪에 빠진 잉여로서의 비체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무엇인가로 솟아나기를, 즉 생성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카의 중간은 소수 연극의 중간일 뿐 아니라 가부장적 비극적 운명의 고전적 권위를 강화하는 그리스 비극작가와 민족주의적 아일랜드 남성 극작가, 즉 죽은 아버지 유령들의 억압적 굴레로부터 카가 탈주해서 진입하는 바다/어머니, 즉 새로운 생성의 공간이다. 다시 말해, 카의 중간은 고전주의적 고급 서구문화와 민족주의적 아일랜드의 “남근적 신비화”가 억압해온 어머니 유령과의 대면, 즉 본원적인 모녀관계 맺기를 위해 어머니에게로의 귀환이 일어나는 페미니스트 연극 무대를 구축한다(Cixous 339). 사실 카의 중부지방 삼부작은 새로운 아일랜드 페미니스트 연극을 지향하는 일련의 과정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예컨대, 첫 작품 『더 마이』는 모가장인 더 마이(The Mai)의 마더 아일랜드의 신화적 공간 구축과 전복을 보여주고, 그곳으로부터의 포샤(Portia)의 탈주를 보여준다. 두 번째 작품 『포샤 커클란』에 이어 마지막 작품 『고양이 늪』은 어머니의 무덤이자 자궁을 상징하는 “중간”에서의 헤스터의 유령-되기를 통해 본원적인 모녀관계의 회복과 생성을 시사함으로써 페미니스트 연극 무대를 본격적으로 지향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나아가 이러한 페미니스트 연극을 지향하는 『고양이 늪』의 무대는, 엔리카 세르코니(Enrica Cerquoni)가 지적하듯이, 새로운 조국 아일랜드가 생성되고 있는 공간을 구축하기에 이른다(179). 즉, 처음부터 무대와 여성과의 밀접한 연계를 설정하고 극을 시작하는 카의 무대에서 우리는 하나의 늪인 동시에 많은 늪들, 그리고 하나의 아일랜드인 동시에 많은 아일랜드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179). 이러한 맥락에서, 카의 페미니스트 연극 무대는 다양성의 아일랜드가 생성하고 있는 새로운 아일랜드 민중 연극을 구축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III.『 메데이아』의 다시 쓰기로서의『고양이 늪』

    카의 『더 마이』와 『포샤 커클란』은 각각 소포클레스(Sophocles)의 『엘렉트라』(Electra)와 『안티고네』(Antigone)의 다시 쓰기이다. 소포클레스는 그리스 비극의 다시 쓰기들을 시도하는 현대 아일랜드 남성 극작가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작가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소포클레스가 여자를 주인공으로 한 비극에서 여주인공을 주인공이라기보다는 중재자로 재배치하는 전략을 사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현대 남성극작가들이 아일랜드의 현실적 상황을 다루기위해 그리스 비극을 각색하는 이유는 고전의 권위에 힘입어 소포클레스의 전략을 여성을 타자화하는 그들의 전략으로 이용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소포클레스와는 달리, 당시 그리스 관객으로부터 반감을 불러일으킨 에우리피데스는 여주인공인 이방인 메데이아를 중재자로 배제하는 대신 그녀의 정열, 사랑, 복수의 내면적 감정을 강조하여 비극의 강렬한 주인공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사실, 에우리피데스가 메데이아를 비극의 여주인공으로 부각시킨 것은 그의 경쟁자 소포클레스의 권위에 도전하기 위한 일종의 전략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권위에 도전하기 위해 마리 보나파르트(Marie Bonaparte)의 “도난당한”(purloined) 여성성을 부각시킨 것처럼(187-90), 에우리피데스 역시 억압된 여성성을 부각시킴으로써 소포클레스에 대한 도전을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카는 남성 극작가들이 선호하는 소포클레스의 다시 쓰기들을 염두에 두고, 소포클레스에 대한 도전을 시도하는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의 다시 쓰기를 통해 “비극과 여성성의 관계에 대한 재고려”(Doyle 42)를 본격적으로 시도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달리 말해, 카는 에우리피데스의 고전적 권위를 이용하는 동시에 그의 고전적 권위에 대한 도전 전략을 도난하여 『고양이 늪』에서 여성의 타자화에 대한 저항과 전복의 전략으로 전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 작품, 『래프터리 언덕』에서도 카는 『메데이아』의 다시 쓰기를 통해 그 전략을 본격적으로 사용하여, 기존의 비극과 여성성의 관계에 대한 전면적인 전복을 시도하고 있다. 따라서 카가 삼부작을 통해서 오히려 초기작의 “유쾌한 풍자적 페미니즘에서 냉혹한 가부장적 비극”(Murphy 390 재인용)으로 복고적인 방향 전환을 했다는 기존 평가는 전면적으로 재고될 필요가 있다.

    『메데이아』의 다시 쓰기로 『고양이 늪』은 『메데이아』에서 다루는 “운명, 예언, 배제, 복수 그리고 자식살해의 인식들”(ideas of fate, prophecy, rejection, revenge and infanticide)을 모두 다루고 있다(Martinovich 117). 사라 B. 포머로이(Sarah B. Pomeroy)가 지적하듯이, 에우리피데스는 메데이아를 이기적이고 사악하지만 주장이 강한 강력한 여성으로 창조함으로써(117 재인용), 메데이아에게 남성등장인물들인 이아손(Jason)과 크레온(King Creon) 사이의 중재자가 아니라 비극의 주인공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하게 부여하고 있다. 『고양이 늪』의 헤스터 역시 파괴적이지만 도전적이고 단호한 여성으로 메데이아와 같은 비극적 여주인공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헤스터는 그리스 비극의 고귀한 여주인공과는 거리가 먼 비천한 여자로 등장한다. 따라서 카의 헤스터는 그리스 비극의 여주인공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 비극의 “소수화”(minorer)를 통해 창조된 “소수 연극”의 주인공이라고 말할 수 있다(Deleuze 243). 즉 카는 메데이아를 소수화하여 그리스 시대와는 다른 현대의 “반-영웅적인 시대”(antiheroic age)의 탈신비화된 여주인공으로 헤스터를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A Cautionary Tale” 265).

    우선 『고양이 늪』과 『메데이아』의 여주인공들의 가장 두드러진 공통점은 그들 모두 이방인들이라는 사실이다. 메데이아는 콜키스(Colchis)에서 온 이방인이고, 헤스터는 아일랜드의 “국내 이방인”(Martinovich 118 재인용)으로 일컬어지는 집단들 중 하나인 유랑인(traveller)5에 속한다. 따라서 그들 각각의 정부, 이아손과 카르타지 킬브라이드(Cartage Kilbride)는 지배계급에 통합되기 위해, 이방인들인 여주인공들을 배신하고, 각각 코린토스(Corinth)의 공주 글라우케(Glauce)와 마을 지주 자비에(Xavier Cassidy)의 딸 캐롤라인 캐시디(Caroline Cassidy)과의 결혼을 선택한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두 작품은 결혼식 날 하루 동안 일어나는 사건들을 전개하는 공통된 구조를 지닌다. 그러나 카의 의도적인 다시 쓰기로 두 작품들 사이의 이와 같은 유사점이 제공됨에도 불구하고, 『고양이 늪』의 초연에서 관객들은 『메데이아』의 플롯을 발견해내지 못했다고들 한다. 사실 헤스터와 메데이아는 모두 이방인들이지만, 전혀 다른 신분의 여주인공들이기 때문에, 그들 사이의 연관성은 쉽게 감지될 수 없다. 메데이아는 콜키스의 공주이자 태양신 헬리오스(Helios)의 손녀이고, 반면에 헤스터는 아버지 뿐 아니라 어려서 어머니에게도 버림을 받고, 마을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비천한 신분의 유랑인 집단에 속하는 여자이다. 이미 카는 『포샤커클란』에서도 셰익스피어의 정숙한 숙녀 포샤(Portia)와는 극단을 이루는 포샤를 창조하듯이, 여기서도 메데이아와는 너무도 다른 헤스터를 등장시킨다. 장님 예언가 캣우먼(Catwoman)이 알고 있듯이, 헤카테(Hecate)를 숭배하며 마법을 쓸 수 있는 메데이아처럼 헤스터도 마녀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메데이아의 위력적인 마법과는 달리 헤스터의 마녀로서의 자질은 그녀를 위력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기피 대상의 존재로 만들 뿐이다.

    『메데이아』와 그것의 다시 쓰기로서의 『고양이 늪』사이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메데이아와 헤스터의 복수에서 드러난다. 메데이아가 이아손의 배신에 분노하여 그에게 복수하기 위해 글라우케와 크레온 왕을 독살한다면, 반면에 헤스터는 복수를 위해 캐롤라인과 자비에를 죽이는 대신 “가부장적 질서의 집”(the house of patriarchal order, “The House of Woman” 212)과 가축들을 불태운다. 간단히 말해, 헤스터는 메데이아의 복수와 같은 복수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차이점은 그들의 자식살해의 동기에서 찾을 수 있다. 메데이아는 이아손에 대한 최종적인 복수로 두 아들들을 살해한 반면, 헤스터의 자식살해는 카르타지에 대한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헤스터가 딸 죠시를 살해한 것은 자신이 겪었던 버림받음의 절망으로부터 딸을 해방시켜 주려는 모성애의 발로이지 복수는 아니라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있는 설명이다. 또한 메데이아는 이아손을 돕기 위해 남동생 아비시르투스(Absyrtus)를 살해했지만, 헤스터가 남동생 죠셉 스완(Joseph Swane)을 죽인 것은 카르타지를 돕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죠셉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질투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헤스터가 행한 난폭한 행동들은 복수를 위한 것이 아니며, 헤스터가 원한 것은 메데이아가 원한 복수와는 다른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간단히 말해, 복수의 화신 메데이아가 원한 것은 이아손의 합법적인 아내가 되는 것이었다면, 헤스터가 원하는 것은 카르타지의 합법적인 아내가 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헤스터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카르타지와 정식 결혼을 통해 공식적인 사회에 통합되는 것이 아니고, 그 반대로 그녀와 함께 카르타지를 그녀가 속한 비체의 세계에 붙들어 두는 것이다.

    따라서 두 작품의 결말 역시 정반대로 끝을 맺는다. 『메데이아』는 메데이아가 성공적인 복수를 한 뒤, 할아버지 태양신 헬리오스의 마차를 타고 아테네로 떠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즉 메데이아의 아테네로의 탈주는 마치 아버지 제우스에게로 돌아가는 “아버지가 인정하는” 페미니스트로 불리우는 아테네처럼 재 영토화를 시도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Jardine 125). 다시 말해, 『메데이아』의 결말은 에우리피데스가 인정할 수 있는 페미니스트로서의 한계를 반영하는 메데이아의 탈주로 끝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고양이 늪』은 헤스터가 딸과 자신을 죽이고 고양이 늪을 떠도는 유령이 되어 그곳에 남기를 선택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메데이아가 비극적 여주인공이 되는 것은 도시국가 코린스의 정화된 몸을 위해 밀려나야할 잉여 또는 비체 취급을 받는 이방인으로서 자신을 배제하는 가부장적 남성 세계에 속하고자 하는 그녀의 강력한 욕구 때문이다. 비록 메데이아는 이아손에게 난폭한 복수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지만, 그녀의 욕망은 공식적인 세계에 통합되는 것이며, 따라서 복수에 성공한 그녀는 코린스를 떠나 더 강한 가부장적 세계인 아테네로의 탈주를 선택한다. 반면에 헤스터의 선택은 그 가부장적인 세계를 떠나는 대신 그 세계를 교란시키는 “비체”로, “잉여”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선택에 따라 헤스터는 고양이 늪을 떠나지 않는 가장 강한 어머니의 유령을 직면하여, 유령-되기로의 진입을 마침내 시도함으로써, 딸 죠시와 함께 고양이 늪을 떠도는 유령으로 끊임없이 출몰할 것을 다짐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이 고양이 늪을 배회하는 유령-되기를 선택한 헤스터는 피오나 맥킨토시(Fiona Macintosh)가 정의하는 “경계성”(liminality)을 지닌 비극적 인물, 즉 “세계 속에 부재하면서도 동시에 현존하는”(absent and present in the world at one and same time, 78) 인물이라는 정의의 비극적 주인공과 일치한다. 그러나 헤스터의 선택은 메데이아와는 달리 “냉혹한 가부장적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라 그로테스크한 “죽음의 무도”(death dance, 341)의 스펙터클을 위한 카니발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고양이 늪』의 결말은 비극적 결말이라기 보다는 아일랜드 민중문화의 초자연적인 인물인 유령장수와의 죽음의 무도로 연출된 헤스터의 유령-되기 의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공식적인 카니발은 일시적 혼돈 상태만을 허용하고, 결국은 사회적 질서의 회복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는 기능을 수행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고양이 늪』에서 구현되고 있는 카니발 의식은 그러한 순기능의 카니발의 결말을 거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신부 캐롤라인의 결혼식 피로연에 “모의-신부”(mock-bride)로, 즉 카니발이 전개됨에 따라 파괴될 우상(effigy)으로 자발적으로 등장한 헤스터는 기존 카니발의 기능을 전면적으로 전복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다시 말해, 공동체 내의 이방인으로서 카니발이 완성되기 위해 파괴되어 제거되어야할 우상의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기대되는 헤스터는 오히려 자신을 파괴시킴으로써, 그러한 공식적인 카니발의 완성이 지향하는 공동체의 질서 회복을 위협하는 존재로 영원히 남기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즉 헤스터의 자살은 “지속”(duration)을 상징하는 영원한 늪 속에 동화됨으로써 죽음을 껴안는 동시에 패배시키는, 즉 무덤인 동시에 자궁으로서의 땅에 대한 민중 신앙을 실천하는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 따라서 헤스터의 죽음은 현재 실종된 아일랜드 민중의 새로운 생성을 위한 쇄신과 풍요의 모태로의 귀환, 그 모태가 되는 늪을 떠도는 유령-되기의 실천으로 이해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이러한 헤스터의 유령-되기는 공식적인 사회 공동체에 끊임없는 위협과 두려움을 초래하는 비공식적인 카니발의 전복적인 결말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때, 카의 『고양이 늪』에 대한 가장 적절한 읽기는 『메데이아』의 다시 쓰기와 더불어 싱의 『서부의 멋쟁이』의 다시 쓰기로서의 상호적인 읽기라는 주장은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5마을사람들의 헤스터에 대한 반감은 그녀가 “땜장이(tinker) 혈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아일랜드 땜장이는 역사적으로 노점에서 물건을 놓고 팔며 유랑하는 양철장이(tinsmith)였었다. 그러나 기계화된 노동의 유입으로 그들은 전통적인 직업을 잃어버리게 되었지만, 일반적으로 “유랑인”(travelers)으로 불리우며 계속 유랑을 하였다. 이와 같이 아일랜드 집시들로 간주되는 유랑인은 사회적 차별과 폭력의 위협에 종종 처하는 국내 이방인 집단을 이룬다.

    IV. 그로테스크한“죽음의 무도”의 카니발

    『고양이 늪』에 대한 『서부의 멋쟁이』의 다시 쓰기로서의 읽기는 플롯 상의 유사점들과 차이점들의 비교보다는 두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로테스크한 그리고 카니발적인 요소들의 비교를 통해 효과적으로 전개될 수 있다. 『고양이 늪』은 첫 장면부터 그로테스크한 요소들로 충만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즉 하얀 눈 위에 핏자국을 남기는 죽은 흑조(Black Wing)와 그 시체를 난폭하게 끌고 들어오는 헤스터의 그로테스크한 몸들의 등장으로 극은 시작한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고 있는 헤스터의 유령을 데리러 온 아일랜드 저승사자(Irish Grim Reaper)인 유령장수 역시 그로테스크한 요소를 더해준다. 잠시 후 등장한 고양이 눈과 발바닥으로 장식한 고양이 털옷을 입은 눈먼 예언가 캣우먼(Catwoman)은 첫 장면의 그로테스크한 몸들의 강력한 시각적 효과를 더욱 강하게 부각시켜준다. 바로 이러한 그로테스크한 몸들의 이미지로 시작하는 카의 극을 부르케는 바흐친의 “그로테스크 리얼리즘”(grotesque realism)의 전통에 속하는 싱의 『서부의 멋쟁이』의 다시 쓰기로 읽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Carnival Ambivalence” 195). 바흐친에 의하면,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은 “고상한, 영적인, 이상적인, 추상적인 모든 것의 하락”(the lowering of all that is high, spiritual, ideal, abstract), 즉 “비천”(degradation)을 기본적인 원칙으로 한다(205-206). 따라서 이러한 비천을 극명하게 나타내는 그로테스크한 몸의 이미지들로 충만한 카의 극은 싱의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아일랜드 민중 연극의 전통을 잇는 작품으로 평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시작부터 그로테스크한 요소들이 충만한 『고양이 늪』은 헤스터의 그로테스크한 격렬한 죽음, 유령장수(Ghost Fancier)와의 “죽음의 무도”로 연출한 카니발의 스펙터클로 끝난다. 즉 이 극은 크게 나누어 카르타지와 캐롤라인의 결혼 피로연이 벌어지는 마을 잔치와 함께 이 세상과 다음 세상 사이를 서성거리는 헤스터의 유령장수와 죠셉의 유령, 그리고 부재한 어머니를 비롯하여 다양한 유령같은 존재들의 대면과 그녀의 유령-되기 의식으로서의 죽음의 카니발로 끝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고양이 늪』은 공식적인 카니발 의식과 그 의식의 전도, 즉 반-의식(counter-ritual)인 카니발이 함께 진행되는 바흐친의 카니발의 기호들을 생산하는 공간의 무대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 무대는 헤스터가 “나와 연결된 모든 것이 여기에 있어”(everythin’I’m connected to is here. 273)라고 피력하는 “중간”으로서의 늪과 연속성을 이룬다. 즉 그녀가 결코 떠날 수 없는 그녀의 공간이자, 공식적인 아일랜드 문화의 규범 속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욕망을 가진 “유랑인,” “비체”가 속한 여성의 공간과 연속성 속에 있는 공간을 이룬다는 것이다.

    카르타지와 캐롤라인의 결혼식 날이자 헤스터의 최후의 하루 동안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여주는 『고양이 늪』의 1막은 고양이 늪가에 있는 안정된 공동체를 상징하는 헤스터의 집과 그녀의 유랑인의 삶을 상징하는 카라반을, 2막은 자비에의 집을, 그리고 3막은 다시 1막의 배경을 각각 무대로 한다. 헤스터의 마지막 하루의 사건들을 전개하는 일련의 이러한 무대들의 연속은 헤스터가 머물기로 선택한 공간으로서 늪이 안정된 공동체와 유랑인 사회의 중간임을 강조해준다. 중간으로서 고양이 늪은 더 마이와 포샤의 집처럼 그들을 질식하게 하는 폐쇄적 공간이 아니라, 아울레이크(Owl Lake)와 벨몬트 강(the Belmont River)처럼 카의 여자들이 떠나지 못하고 배회하는 공간이다. 특히 고양이 늪은 헤스터가 떠나지 못해서라기보다는 떠나지 않기로 한 중간이라는 점에서 마이와 포샤가 속한 중간과는 유사성과 더불어 차별성을 띄는 중간으로서의 여성의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흐친이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을 “카니발적인” 이미지들과 연결하듯이, 카의 그로테스크한 몸들 역시 희극적이고 기괴한 몸들로 비천하지만, 오히려 고상하고 영적인 것, 죽음과 지옥과 같은 두려운 것들을 역전시킬 수 있는 전복적인 카니발적 이미지로 연결될 수 있다. 다시 말해, 현대 아일랜드의 지배적 문화속에서 가장 낮은 계층의 몸으로 격하된, 즉 배설물과 같은 “비체”가 된 카의 그로테스크한 몸들은 비천해짐을 통해 오히려 카니발적인 이미지의 전복적인 기능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카니발적인 이미지와 연결되는 그로 테스크한 몸은 한 개인적인 인간의 몸이라기보다는 초자연적인 동시에 자연적인 몸으로 보편적인 또는 아일랜드 민중의 몸으로 새롭게 생성될 수 있는 몸인 것이다. 즉 이 몸은 바흐친이 설명하고 있는 바로 “생성 중에 있는 몸”(a body in the act of becoming, 233)이다. 따라서 그로테스크한 몸의 헤스터가 파고 있는 그의 분신 흑조의 무덤 그리고 그녀의 무덤이 될 고양이 늪은 무덤이자, 새로운 생성의 모태가 될 수 있음은 극의 시작부터 시사되고 있었다. 바흐친을 빌면, 헤스터의 “그로테스크한 몸은 다양한 자연 현상과 합체를 할 수 있는”(can merge with various natural phenomena) 몸, 즉 고양이 늪과 합체를 하여, “전 우주를 채울 수 있는”(can fill the entire universe) 생성의 몸이 된다는 것이다(Rablais 318). 따라서 초연에서 헤스터 역할을 맡았던 올웬 푸에레(Olwen Foue´re´)는 “우주를 완전히 삼키고, [그녀] 주변의 세계의 직물을 찢는”(to totally devour the universe, to rip the fabric of the world around [her], 161) 여자로서 헤스터를 느낄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카는『고양이 늪』의 2막인 카시지와 캐롤라인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카니발의 전복적 전략을 명백하게 사용하기 시작한다(Bourke 142). 그녀는 공동체 사회의 질서 회복을 상징하는 공식적 의식인 결혼을 축하하는 마을 잔치인 피로연 장면에 일련의 그로테스크한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접시에 와인을 부어 후루룩거리며 먹는 캣우먼과 피를 묻힌 죠셉의 유령의 그로테스크한 몸들이 등장하는 피로연의 시작은 결혼이라는 공식적인 의식의 전도, 즉 반-의식의 카니발로 전개될 것임을 이미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피로연의 여주인공인 “진짜”(true) 신부 캐롤라인은 “변장한”(disguised) 행복한 신부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며, 반면에 흰 드레스를 입은 킬브라이드 부인(Mrs. Kilbride)은 “변장한” 신부로 등장하여 캐롤라인의 자리, 즉 아들의 “진짜” 신부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함으로써 결혼식 자체를 전복하려는 역할을 암암리에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142). 이어서 이교도 예언자인 캣우먼과 그녀의 팔짱을 끼고 등장하는 쇠약한 늙은 윌로우 신부(father Willow)의 커플은 카니발의 신성모독 그 자체를 수행한다. 특히 이교도 캣우먼을 숭배하는 카톨릭 신부로서 윌로우 신부는 실제 신부라기보다는 입고 있는 신부복 밑으로 빠져나온 파자마로 인해 오히려 카니발 의상으로 신부복을 입고 있는 변장한 신부처럼 보인다. 이와 같이 마치 카니발의 변장한 인물들과 같은 그로테스크한 인물들의 등장은 유쾌하지만은 않은 냉소적인 애매한 카니발적 웃음을 자아낸다.

    그러나 곧 웨딩드레스를 입은 헤스터의 등장으로 이러한 애매한 카니발적인 웃음도 더 이상 가능하지 않는 상황으로 분위기는 급전한다. 다시 말해, 웨딩드레스를 입고 베일을 쓴 헤스터가 마치 살로메처럼 유혹적이며 성적인 압도감을 자아내는 춤을 추며 등장함으로써, 이제 카니발은 통제 가능성을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한편으로 이러한 헤스터의 입장은 카니발의 완성을 위해 파괴될 “신부-조상”(bride-effigy, 143)의 등장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헤스터가 죽는 것은 카니발의 완성을 위한 희생이며, 그러한 희생을 통해 마을 공동체의 평정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전통적인 카니발의 목적이 성취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메리멘이 읽어내듯이, 따라서 이 작품은 새로운 부르주아 아일랜드의 공적 사회를 지지하는 보수적인 정치성을 구현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Decolonisation Postponed” 315). 사실 그녀의 자살은 희생물로서 사라짐을 통해 공적 사회에 질서 회복을 가져다주는 대신 끊임없이 그 사회를 위협하는 유령으로 남기 위한 그녀의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해석이다. 따라서 카의 카니발은 전통적인 카니발의 보수적인 정치성을 지향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또한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유희적인 코믹성을 유지하고 있는 싱의 카니발보다도 더 강력한 전복성의 정치성을 구현하고 있다는 주장을 펼 수 있다.

    카는 싱의 다시 쓰기를 함에 있어서 싱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에 내재된 “유희성”(playfulness)을 배제시키는 것으로 가장 두드러진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Bourke 136). 부르케는 자비에가 치명적인 스트리키닌을 바른 개를 이용해 그의 약한 아들 제임스 캐시디(James Cassidy)를 고의적으로 죽였다고 주장하는 헤스터의 이야기(329)를 그 예로 제시하고 있다. 어린 아들이 아버지가 고의로 독을 발라둔 개의 목을 껴안고 산채로 불타서 죽은 것에 대한 헤스터의 야만적인 이야기는 『서부의 멋쟁이』에 나오는 지미 파렐(Jimmy Farrell)의 개에 대한 잔인하면서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두 이야기모두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구현하지만, 카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에는 싱의 코믹한 유희성은 배제되고 잔혹성만 더욱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카가 싱의 유희성을 버리고 잔혹성을 부각시킨 이유는 강력한 가부장적 권위를 위해 약한 아들을 독살하는 가부장적인 자비에의 잔인성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서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자비에의 아들 독살은 메데이아가 글라우케와 크레온을 독살하기 위해 그녀의 아들들에게 독을 바른 옷을 들려 보냄으로써 아들들까지 독살하는 것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카가 코믹성이 배제된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사용한 더 중요한 의도는 가부장적 잔인성을 강조하고 그것에 대한 복수의 잔혹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잔혹성 자체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사실 메데이아처럼 복수를 위한 독살은 하지 않지만 헤스터 역시 가축들을 불태워 죽이고 딸을 살해하는 잔혹한 행동을 한다. “그것은 땜장이들이 하는 것이지, 그렇지, 떠날 때 모든 것을 태우는 것이지?”(That’s what the tinkers do, isn’t it, burn everythin’after them? 322)라고 모니카 뮤레이(Monica Murray)가 지적하듯이, 헤스터는 유랑인처럼 그곳을 떠나기 전 가축과 모든 것 들을 태워 자연으로 돌려보낸다. 다시 말해, 그녀의 잔혹한 행위는 복수가 아니라 불가피한 잔혹성이며, 자연과의 충동적인 유대감의 행동인 것이다. 그녀의 딸 살해 역시 자비에의 아들 독살과는 달리 자연으로 함께 돌아가려는 모성애적인 행동이다. 나아가 그녀의 이러한 잔혹성은 그녀를 이방인, 비체로 타자화시키는 카르타지와 마을 사람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유령-되기의 불가피성을 드러내 보인다. 따라서 헤스터는 잔혹성의 그로테스크한 그리고 카니발적인 전략의 모든 가능성을 다 취하여 강력한 전복성을 행사할 수 있는 유령-되기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V.“ 떠나는 이방인”과“떠도는 이방인”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의 강력한 전복성을 행사하는 카의 헤스터는 싱의 그로테스크를 연구한 토니 오브라이언 존슨(Toni O’Brian Johnson)이 지적하는 싱의 “바보”(fool)6와 일치하는 인물로 볼 수 있다. 존슨에 의하면, 바보는 공식적인 사회에 의하여 바보로 인식되는 소수자로, 스스로 안정된 사회 구조 외부에 자신을 자리매김하기를 선택하는 “이방인”(outsider)을 의미한다(Bourke 136 재인용). 이러한 “바보”로서 헤스터와 싱의 『서부의 멋쟁이』의 주인공 크리스티 마혼(Christy Mahon)를 비교해 볼 때, 크리스티보다도 헤스터가 휠씬 더 강화된 바보의 특성들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달리 말해, 헤스터는 비천한 이방인이 됨으로써 오히려 현명할 수 있는 들뢰즈의 소수 연극의 “바보”역할을 크리스티보다 더 성공적으로 수행한다는 것이다(Deleuze 243). 또한 두 인물들 모두 아일랜드의 구전문화전통을 이어온 유랑시인(filidh)처럼 스토리텔링에 능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스토리텔링의 목적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크리스티의 경우는 강한 남성적인 자아를 다시 만들어 정착된 사회로 동화하려는, 즉 재영토화의 욕망을 구현하기 위해 그의 스토리텔링의 능력을 발휘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헤스터는 스토리텔링을 통해 유랑시인으로서의 어머니 빅 죠시와의 유대 관계의 회복, 즉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려는 탈영토화의 욕망을 구현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헤스터의 스토리텔링은 사회로의 동화가 아니라 오히려 영원한 이방인, 즉 유랑인-되기를 위한 것이다.

    따라서 헤스터는 그녀의 대리 어머니 역할을 하는 캣우먼과 모니카가 들려주는 빅 죠시에 대한 회상들로 만들어 낸 어머니에 스토리텔링에 집착한다. 헤스터가 딸 죠시와 함께 부르는 노래, 즉 “죠시 스완의 노래들”(Songs of Josie Swane) 역시 유랑시인으로서의 어머니에 대한 갈망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애비극장의 대표적인 극작가 예이츠가 본격적인 관심을 가졌으며, 그의 영향으로 싱 역시 지대한 관심을 보인 유랑시인은 민담의 출처이자 화자로 아일랜드 민중문화의 전통을 전승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헤스터가 스토리텔링과 노래를 통해 구현하고 대면하고자 하는 유랑시인 빅 죠시는 예이츠와 싱이 관심을 가진 유랑시인과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가장 큰 차이점은 싱의 유랑시인은 그가 속하고자 하는 사회에서 거부당함으로써 그 사회를 떠나는 유랑인이라면, 카의 유랑시인은 이방인으로 거부를 당함으로써 오히려 그 곳을 떠나지 않고 떠도는 유랑인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헤스터가 스토리텔링을 통해 발견하는 것은 빅 죠시가 어린 그녀를 버리고 떠났지만, 결코 그녀의 유령은 그녀와 고양이 늪을 떠난 적이 없으며, 항상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하염없이 기다려도 결코 오지 않는 빅 죠시가 그녀가 중간지대에서 상대해야할 유령들 중 가장 벅찬 유령으로 그곳에 항상 있어 왔으며, 진정한 유랑, 즉 탈주를 위해 대면해야 한다는 사실을 헤스터가 스토리텔링을 통해 알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헤스터가 갈망한 것은 가부장적 사회의 규범으로부터 일탈한 자유로운 유랑인이 된 어머니와의 새로운 관계 맺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헤스터의 갈망과 결단은 가부장적 모성 이데올로기가 나쁜 어머니로 규정하는 빅 죠시와의 새로운 관계 맺기를 위해 “고양이 늪/어머니에게로 가라”는 페미니스트 연극 선언을 실천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녀는 캣우먼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적 사회의 탈영토화를 위해 어머니의 유령, 그리고 딸의 유령과 더불어 결코 떠나지 않고 늪을 떠도는 유령-되기를 선택한 것이다. 이러한 헤스터의 선택은 싱의 중심적인 모티프인 “떠남”(departure, Bourke 138)의 모티프와는 정반대의 선택이다. 『서부의 멋쟁이』는 크리스티가 그를 거부하는 폐쇄된 사회를 떠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즉 그는 스토리텔링의 생생한 활력으로 그 사회에 일시적인 생기를 가져다주었지만, 여전히 그를 거부하고 재영토화를 지향하는 닫힌 사회를 등지고 “떠나는 이방인”(departing outsider, 138)의 역할을 선택한 것이다. 반면에 헤스터는 떠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진정한 유랑인, 즉 탈주선을 찾는 노마드가 되기를 선 택한 것이다. 따라서 카는 결코 고양이 늪을 떠나지 않는 이방인, 즉 “떠도는 이방인”(haunting outsider)의 역할을 선택한 이러한 헤스터를 통해, 싱의 떠남의 모티프를 “떠돔”의 모티프로 전복하는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탈주의 “떠남”의 모티프로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이로써 카는 또한 싱이 부흥시키고자한 아일랜드 민중문화의 전통을 수용하는 동시에 전복을 통해 새로운 민중문화의 생성을 지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6헤스터는 존슨이 지적하는 싱의 바보가 지니는 세 가지 양상들을 모두 지니고 있다. 첫째, 싱의 “바보”는 내부인(insider)보다 더 자연에 가까우며, 본능적이고, 생기가 넘치며, 충동적이다. 둘째, 바보는 비합리적이라서, 한편으로는 사물의 핵심을 뚫어 볼 수 있는 예언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능력이 광기로 여겨져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배척을 당하기도 한다. 셋째, 바보는 “이방인으로 남아 있다”는 점을 존슨은 싱의 바보에서 주목한다. 헤스터는 이러한 싱의 바보의 특성들을 모두 지니고 있다(Bourke 136-38 재인용).

    VI. 생성의 공간―고양이 늪

    패트릭 버크(Patrick Burke)는 1980년대말 이후 아일랜드 연극이 사적인 영역, 즉 여성의 경험 세계에 집중적인 관심을 갖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한다(“Tragic Destiny” 433 재인용). 마르트노비치를 비롯하여 많은 비평가들이 카의 극 역시, 특히 『고양이 늪』은 여성적인 그리고 내적인 영역을 다루고 있다고 간주한다(118). 물론 카가 관심을 가지는 영역이 외적인 영역, 즉 아일랜드의 정치적 문화적 상황 자체만은 아니다. 그러나 카의 관심 영역을 사적, 여성적, 내면적 세계에만 국한시키는 것 역시 무리가 있다. 애나 맥뮬란(Anna McMullan)이 현대 아일랜드 여성극작가들의 중요한 임무가 아일랜드 역사의 화려한 외양의 직물을 풀어 헤치는 것이라고 주장했듯이(“The House of Woman” 214 재인용), 사실 카의 주요 관심사는 중간 지대를 통해 1980년대 말 전례 없는 경제적 성장으로 화려한 외양을 갖게 된 아일랜드의 숨겨져 있는 내면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포스트밀레니움의 유럽적인 아일랜드(postmillennium European Ireland)가 맞은 현재 상황은 남과 북아일랜드 주민들, 도시와 시골, 정착, 반정착 그리고 유랑인들, 이민자들의 유입 등으로 더욱 복잡해진 구성원들, 특히 경계선상의 사람들 사이의 현존하는 경계선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하고 있다. 다시 말해, 현재의 아일랜드는 다양한 세계관들과 “혼성”(hybrid) 정체성들이 초래하는 심각하고도 복합적인 문제들을 직면하고 다루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중간 지대를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하나의 아일랜드 그리고 동시에 많은 아일랜드를 보여주는 카의 『고양이 늪』의 성과에 대한 세르코니의 높은 평가는 바로 새로운 아일랜드의 생성을 위한 카의 중간 지대의 구축에 대한 성과를 인정한 것임을 알 수 있다(174).

    『메데이아』와 『서부의 멋쟁이』의 다시 쓰기를 통해, 과거와 강한 유대를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미래와의 충돌 과정에 있는 현대 아일랜드 농촌사회의 이면을 드러내기 위해 『고양이 늪』에서 구축한 중간 지대는 현실과 초현실,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리스의 상류문화와 아일랜드의 민중 문화 사이의 경계가 무너진 중간의 공간이다. 이러한 중간에 카는 그리스 비극의 인물들을 아일랜드 민중문화의 인물들로, 즉 죽음의 사자를 새벽과 황혼을 구별하지도 못하는 유령장수로, 맹인 예언가 테이레이시아스(Teiresias)를 쥐를 잡아먹는 캣우먼으로, 그밖의 다른 고귀한 신분의 등장인물들을 혐오스러운 노파, 근친상간의 아버지, 잔인한 형제자매들로 비하된, 즉 소수화된 비체들로 등장시키고 있다. 카는 이러한 비극의 소수화와 함께 싱의 그로테스크 리얼리즘 연극의 전복과 확장을 통해 카니발의 정수인 전복성을 최대한 발휘한 연극성이 더욱 강화된 중간지대 삼부작의 마지막 작품으로 『고양이 늪』을 창조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고양이 늪』을 창조함으로써 카가 지향하고 있는 것은 바로 새로운 아일랜드 민중연극의 생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흐친의 그로테스크 리얼리즘과 카니발 전통에 속하는 싱의 『서부의 멋쟁이』가 크리스티의 떠남으로 끝나듯이, 싱의 아일랜드 민중연극은 여전히 일시적인 대혼란이후 질서 회복으로 종결하는 전통적인 카니발의 재영토화를 시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카의 『고양이 늪』이 헤스터의 떠돔으로 끝나듯이, 카가 지향하는 새로운 아일랜드 민중연극은 관객을 혼돈의 늪 한가운데로, 화려한 지배 문화의 외양을 위해 바깥으로 밀려난 비체들이 버려진 중간 지대로 끌어들여, 새로운 무엇인가의 생성을 끊임없이 찾게 만드는 탈영토화의 동인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고양이 늪』의 마지막 스펙터클은 헤스터가 베어낸 그녀의 심장이 “검은 새의 깃털처럼”(like some dark feathered bird, 341) 그녀의 가슴 위에 놓여져 있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이, 몸의 내부가 외부로 나온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의 스펙터클은 몸과 세계 사이의 경계, 내부와 외부, 나와 우리, 정체성과 타자성 사이의 경계의 소통을 보여주는 바흐친의 신체기호학으로 설명될 수 있다(Lachmann 152). 또한, 밖으로 나온 헤스터의 심장은 일종의 전복적인 잠재성을 지닌 “신체 없는 기관”(organ without body)으로 볼 수 있다(Zˇizˇek 172). 즉 『고양이 늪』은 “창자가 튀어나오도록 웃게”(to laugh your guts out, Lachmann 152) 만드는 카니발적 전복과 희화화를 넘어서서, “심장이 튀어나오도록” 강렬한 강도의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그림과 같이 정적인 폭력을 방사하고 있는 마지막 스펙터클로 막을 내린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새로운 민중연극의 생성을 지향하는 『고양이 늪』의 끝은 아일랜드 현실 세계 이면에 내재되어 있는 본원적인 충동들의 세계를 드러내 보이는 폭력을 방사함으로써 우리를 끊임없이 새로운 생성으로 유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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