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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비무장지대(DMZ) 문화유적 현황과 보전방안 Status and Preservation of Cultural Relics in the Demilitarized Zone
  • 비영리 CC BY-NC
ABSTRACT
비무장지대(DMZ) 문화유적 현황과 보전방안
Abstract

There are 35 cultural properties of fourteen kinds in the Demilitarized Zone known so far, but this number is expected to increase in the future.

Among them, Cheolwon-Doseong and Jeongol-Chong of Gimhwa should be the first step toward conservation efforts by conducting a joint investigation through the collaboration of North and South Korea. In particular, the joint investigation of Cheolwon-Doseong will not only remind the North and South that they are the same people who have had common history and cultural traditions for a long time, but will also give symbolic meaning to convert the demilitarized zone into a stage for peace.

Since Jeongol-Chong is a mass grave of the fallen soldiers of Pyeongan Province who fought against the invasion of the Qing of China, it should be managed as a national designated cultural asset through joint investigation.

In addition, the Demilitarized Zone should become a World Heritage Site because of its importance to the legacy of the Korean War, an international war caused by an ideological confrontation. Furthermore, it has more than 6,000 kinds of temperate forests in addition to 100 species of endangered species and natural monuments. The DMZ is very qualified to be a World Natural Heritage Site, and should be included as a World Complex Cultural Heritage Site that qualifies as a World Heritage and World Natural Heritage Site.

In the Demilitarized Zone, we can also find numerous highlands, tunnels and posts used during the Korean War, as well as surveillance posts, a military demarcation line, barbed wire fences, and Panmunjom, which were created by the armistice agreement. it would be desirable to select some of its sections and war facilities and to register them as modern cultural heritage assets.

Finally, it is necessary to reconstruct the Dorasan Signal Fire Site, which was the communication facility of a traditional era which connected the South (Dorasan) and North (Gaesong). This would symbolize smooth communication between the two Koreas.

In order to prepare for the reckless development of the Demilitarized Zone due to the upcoming cease-fire, the government and cultural asset experts will have to work hard to identify and preserve the cultural properties of the Demilitarized Zone, and they will also have to maintain consistent control over matters such as indiscriminate investigation and mine clearance.

KEYWORD
비무장지대(DMZ) , 철원도성 , 전골총 , 세계복합문화유산
  • Ⅰ. 서언

    비무장지대(Demilitarized Zone : DMZ) 안에 놓여 있는 역사유적, 그 중에서도 철원도성에 대한 남북 공동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은 2015년 개성 만월대 발굴 후 남북 학자들에 의해서였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이 문제에 대하여 보다 확실하고 구체적인 새로운 제시는 2018년 4월에 발표한 판문점선언을 이행하기 위한 2018년 9월 19일 남북 군 수뇌에 의해 합의된 ‘남북군사분야합의 서’에서이다. 본 합의서 2조 ④항에서는 ‘쌍방은 비무장지대 안의 역사유적에 대한 공동조사 및 발굴과 관련한 군사적 보장대책을 계속 협의하기로 하였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우리 정부는 이 2조 ④항에 대한 구체적인 해설로 ① 비무장지대 내 역사유적에 대한 민간 차원의 공동조사 및 발굴 추진, ② 민간 차원의 공동조사 및 발굴을 지원하기 위해 지뢰 제거, 출입 및 안전보장 등의 군사적 보장대책 마련, ③ 우선 ‘태봉국 철원성’ 등 발굴사업 추진을 위한 남북 군사 당국 간의 지뢰 제거, 출입 및 안전보장 대책 마련 등 군사적 보장 합의 선행 필요 등을 제시했다.

    이상의 ‘남북군사분야합의서’ 2조 ④항과 정부의 그에 대한 해설자료를 종합해보면 비무장지대 내 유적의 공동조사 및 발굴을 민족 정체성 회복의 계기로 삼으며 태봉국 철원성의 조사·발굴을 우선 사업으로 하고 이를 위해 지뢰 제거, 출입 및 안전보장 등의 군사적 대책을 먼저 시행해야 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물론 태봉국 철원성 조사 및 발굴을 우선시하되 쌍방의 합의에 의해 다른 역사유적도 조사·복원이 가능함도 언급하고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앞으로 비무장지대 내 유적의 남북 공동조사 및 발굴에 대비하여 현재 비무장지대 내에 있는 유적 전체 현황을 살펴보고 그 보전대책으로서 남북 공동조사가 필요한 유적, 세계복합유산 등재 가능성, 그리고 등록문화재 지정 등에 대하여 검토해 보고자 한다.

    Ⅱ. 비무장지대 내 문화재 현황

    비무장지대 내에 어떠한 문화재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전체적으로 조사된 바가 없는 실정이다. 그것은 우선 비무장지대 출입 자체가 엄격히 통제되어 있기 때문이며, 또 허가를 받아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지뢰 및 폭발물 등 위험요소가 산재하여 극히 제한된 통로나 지역 이외엔 자유로운 통행과 조사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아래에 제시한 비무장지대 내 문화재 현황은 필자가 과거 현역 군인으로서 육군사관학교 사학과 교수 신분으로 조사했던 것과 그 외 향토사가들이나 현지 거주자 등을 통해 확인한 내용들이다. 현재까지 비무장지대 내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문화재는 14종 35개소로서 다음의 표1에서 요약하였다.

    앞으로 비무장지대 내 문화재는 비무장지대 남북의 지형 및 인근지역의 문화재 등과 연계해보면 장차 더 많이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파주·개성 등 서쪽 일대에서는 고려시대 역사유적을, 연천과 임진강 일대에서는 구석기나 적석총 등 청동기유적과 삼국시대 관방유적 등이 확인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뿐만 아니라 철원과 김화 일대에서는 선사유적이나 삼국시대 취락 등의 유적을 생각해볼 수 있으며 영동지방 일대에서는 청동기 유적과 삼국시대 유적이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비무장지대 내의 이들 문화재에 대하여 다소 상세하게 언급해 본다.

       1. 비무장지대

    1) 설정

    1951년 7월 10일부터 휴전을 위한 협상이 시작되었으며,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유엔군 수석대표 윌리엄 해리슨 중장과 공산군 수석대표 남일 대장 간에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휴전협정 제1조 1항에 의거해 군사분계선(MDL : Military Demarcation Line)이 설정되고 이로부터 남북으로 각각 2㎞ 이내의 구간을 비무장지대로 규정하여 무력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완충지대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비무장지대는 서쪽으로 임진강 하구에서 동쪽으로는 강원도 고성까지 155마일(248㎞)이며 면적은 907㎢에 해당된다.

    비무장지대로서 완충지대의 역할을 기대했던 비무장지대는 처음부터 예상이 빗나갔다. 수많은 감시초소인 GP들이 늘어나는가 하면 그 안에 다양한 중화기들이 배치되어 비무장지대는 사실상 중무장지대로 변모하였다. 뿐만 아니라 남북방 한계선은 남북 쌍방이 점차 비무장지대 안으로 전진 배치하여 실제 비무장지대의 면적은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다.

    [표 1] 비무장지대 내 문화재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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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무장지대 내 문화재 현황

    2) 잔존 전쟁유적

    그 이전부터 비무장지대는 줄곧 6·25전쟁의 격전장이었던 곳이다. 즉 한국전쟁 기간 1,127일 중 3분의 2에 달하는 764일을 이 비무장지대 일대에서 싸웠으며, 전쟁 형태는 고지쟁탈전이고 진지전이며 교착전이었다.

    따라서 비무장지대 안에는 수많은 고지를 중심으로 격전장들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어 비무장지대는 한국전쟁의 유산일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의 유적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철의삼각지 일대의 백마고지, 피의능선, 김화의 저격능선, 연천 임진강의 베티고지, 그 외 티본고지, 에리고지, 아이스크림고지 등 한국전의 고지들은 세계 전사상 유례가 없는 처절한 고지쟁탈전으로 붙여진 이름들이다.

    또한 휴전협정과 관련된 시설이 남아 있는 곳도 바로 이 비무장지대이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을 체결한 장소인 구 판문점 휴전협정 조인식장 건물이 이 안에 위치하고 있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지 65년이 지났지만 그간에도 비무장지대는 평온하지는 못했다. 남북 GP간의 포격전이라든지 기습이나 총격전 등 북한의 도발은 간헐적으로 이어져오고 있어 비무장지대는 사실 한국전쟁 재발의 화약고로 인식되어져왔다.

    세계인들이 우리의 비무장지대에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6·25전쟁이 단순히 북한과 남한이 싸운 전쟁이라기보다는 공산세계의 침략에 대항하여 평화와 자유를 지키겠다는 자유민주세계가 유엔을 통해 표명한 결연한 의지의 천명이며 16개국의 대공 결사항전이었기 때문이다.

       2. 철원도성지(鐵原都城址)

     • 소재지 : 강원도 철원군 북면 홍원리와 어운면 가칠리 일원의 풍천원 일대

    궁예도성의 정확한 위치와 규모 등을 최초로 밝힌 것은 1996년 육사박물관이 편찬한 『강원도 철원군 군사유적 지표조사 보고서』에서이다.1 이 보고서는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와 1918년 일제강점기의 지도 및 1993년 군사지도와 1951년 항공사진 등을 바탕으로 철원도성의 위치와 규모 및 형태 등을 개괄적으로 제시하였으며, 그후 필자는 20여 년간 여러 차례 비무장지대에 놓여 있는 철원도성을 답사하면서 철원도성에 대한 연구보고서를 작성·제출한 바 있다.

    철원도성은 현 월정역 앞 비무장지대 안에 놓여 있다. 도성의 형태는 2중의 방형(方形)인데 내성은 외성 안에 있지만 내성의 북벽은 따로 있지 않고 외성의 북벽을 내·외성 모두 같이 사용하였다. 내·외성 모두 방형이지만 남북의 길이가 동서보다 긴 편이고 9.5° 우측으로 기울어져 있다.

    도성은 철원과 평강의 가운데 지점인 풍천원(楓川原) 언덕에 자리하고 있으며, 이곳의 고도는 280m 내외이며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고도가 낮아져 240m에 이르게 되며 기울기 각도는 약 2.5° 정도이다. 광활한 평원에 방형의 대규모 도성을 쌓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닌데 궁예는 장안성을 모방한 발해의 동경성을 모델로 하여 이 성을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도성의 재질은 외성은 토축으로, 내성은 토석혼축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현장 확인 결과 기록과 거의 일치하나 외성은 부분적으로 현무암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의 지도와 항공사진으로 볼 때 외성의 둘레는 약 12.5㎞, 내성은 7.7㎞ 정도이고 성의 단면은 내·외성 모두 사다리꼴 모양인데 도성의 규모에 대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1942년)의 기록에 의하면 그 규모는 다음 표와 같다.

    [표 2] 철원도성의 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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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원도성의 규모

    내성과 외성은 동시에 축성하지 않고 내성을 먼저 축조 후 외성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위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외성의 폭과 높이는 같지 않았고 외성이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외성의 경우 1942년 당시 성벽 하단 폭이 최대 10.9m이고 높이는 3.6m였음을 볼 때 10세기 초 축성 당시 성의 폭과 높이는 이보다 더욱 컸을 것으로 보인다.

    내성 안의 북쪽에는 사다리꼴 모양의 성터가 보이는데, 이는 궁성으로 둘레가 1,850m 정도이다. 기록과 현지에 거주했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축대를 쌓고 그 가장자리에 다시 성을 쌓아 올린 것으로 보인다. 철원도성을 중국의 장안성이나 발해의 동경성과 비교할 때 특이한 점은 철원도성의 내성 규모가 장안성이나 동경성의 경우 보다 훨씬 크다는 점이다. 장안성의 내성은 외성 면적의 9.8%, 동경성의 경우는 8.3%인데 비해 철원도성의 경우는 무려 36.0%에 이른다. 철원도성의 내성이 이렇게 큰 것은 철원도성의 내성 구조가 장안성이나 동경성과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장안성이나 동경성은 내성의 경우 위의 궁성과 아래의 황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궁성은 왕과 그 가족들의 사적 건물이라면 황성은 왕의 공적 업무시설이나 사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철원도성의 경우 최근 두 가지 지도와 항공사진만으로는 궁성과 황성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지 않고 앞에서 언급한 1,850m의 궁성지 하나만 보이고 그 아래에 석등을 포함한 폐사지(둘레 600m)가 보이고 있을 뿐이다. 그 외 내성 남쪽에는 아무런 유구나 유적의 흔적이 없다. 이것은 아마도 일제강점기 조사 당시 이미 붕괴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발굴을 통해 밝혀내야 할 문제이지만 아마도 내성의 남쪽 안에 관아를 두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장안성이나 동경성의 경우 관아는 내성 밖, 즉 외성의 윗부분에 둔 것이 확인되었다. 즉 내성은 오로지 왕과 왕실 관련 시설만으로 제한했던 것이 특징인데, 궁예의 경우는 포정전·만세궁 등 집무시설이나 궁실 관련 건물과 관아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연접해서 배치했던 게 아닌가 추정해본다.

    현재 철원도성의 성벽이 얼마나 남아 있는가 하는 문제는 1918년의 지도와 1993년 군사지도를 비교하여 확인할 수 있다. 1918년의 지도에는 외성의 서벽 남쪽 일대가 나타나 있지 않고 내성의 경우는 동벽의 70% 정도가 없는 실정이다. 그에 비해 1993년 군사지도에는 1918년에 없었던 외성 서벽 남쪽 선이 분명히 나타나 있는 반면에 1918년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내성 남벽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내성 동벽의 경우는 1993년 지도에는 아예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우선 외성의 서남벽 일대의 경우 1918년 지도에는 없는데 1993년 지도에는 명백히 나타난 것은, 1913년의 군사지도는 삼각측량에 의해 지도를 제작한 반면 그보다 75년이나 지난 후인 1993년 지도는 항공사진을 바탕으로 지도를 제작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즉 1918년 지도에서는 이 부분의 성벽이 잘 남아 있는 서벽보다 많이 붕괴되어 높이가 낮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제외시킨 반면 1993년 지도는 일정한 높이 이상의 성벽은 사진상으로 파악이 가능하므로 비교적 높이가 낮은 서남벽 부분도 모두 성벽으로 파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1918년 지도에는 있었으나 1993년의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내성의 남벽은 그 사이 많이 붕괴되어 퇴락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실제로 필자의 수차 현장조사 시에도 두 지도에 모두 표시되어 있는 성벽들은 일단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했으나 내성의 남벽이나 동벽 등은 육안으로도 확실히 성벽 선을 찾기 어려웠다.2

    이 두 지도의 성벽 선의 차이를 확인하기 위해 1951년 항공사진을 확인해보면 두 지도상에는 모두 없는 것으로 표시된 내성 동벽이나 그 외 두 지도상에서 일치하지 않는 내성의 남벽이나 외성의 서남벽 일대도 성벽 선이 확인되고 있다. 즉 항공사진에는 내·외성 모든 선이 확인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궁성지라고 언급한 부분도 명확히 나타나 있다. 다만 내성의 남벽이나 동벽, 그리고 외성의 서남벽의 성벽 선은 다른 성벽 선보다 선명도가 다소 떨어지고 있기는 하다.

    그 외 최근에 아리랑위성에서 촬영한 철원 일대의 항공사진은 1951년의 것보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성벽의 모든 선이 확인 가능하다. 따라서 앞으로 도성의 성벽을 실제로 조사할 경우 두 지도상에 일치하지 않는 도성의 내성이나 외성의 성벽 선은 모두 확인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내성이 왕을 중심으로 한 통치자들과 관련된 성곽이라면 외성은 백성들의 보호와 통제 및 효율적 지배를 위한 공간이다. 궁예가 축조한 풍천원의 도성과 비슷한 장안성이나 발해의 동경성은 모두 평지의 방형도성이다. 장안성이나 동경성은 모두 철저히 방리제(坊里制)에 의해 내성과 외성 지역을 구획하였다. 철원도성도 이들 두 도성과 마찬가지로 새로이 축조되었는데, 새로이 축조한 도성을 방형으로 하는 것은 도읍을 효율적으로 조성하고 관리하기 위함이다.

    방리제란 내성의 바깥 지역을 남북과 동서로 여러개의 십자형의 큰 도로를 만들어 바둑판처럼 수십 개 내지 수백 개의 사각형 구획인 격자 모양의 방(坊)을 만들어 이를 행정단위로 함과 동시에 기능적인 구역으로 시설을 배치하여 운영하는 도시구획 체제이다.3

    장안성과 동경성은 모두 외성 한가운데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넓은 주작대로(朱雀大路)를 조성하고 이와 나란히 남북을 연결하는 도로를 조성했을 뿐만 아니라 동서로도 직선도로를 구획하였다. 장안성은 남북으로 11개조, 동서로 10개조의 도로가 구획되고 110개의 격자 모양의 방이 형성되었는가 하면 동경성은 남북 9개조, 동서 12개조 모두 82개의 방이 형성되었다.

    각 방들은 그 안에 가옥들과 소로들을 갖추고 있어 하나하나가 행정단위가 되기도 하였다. 주작대로 좌우의 방에는 일반적으로 백성의 주택이 들어서 있지만 국가에 서 운영하는 큰 규모의 시장들이 있었는가 하면 도자기, 금속물, 화폐, 기타 지방에서 올라온 특산물 등을 보관하는 대형 창고들도 있었으며, 생산도구나 필요한 도기와 토기 등을 생산하는 시설들도 갖추어져 있었고 주민들의 군사훈련을 위한 치마대·활터 등 각종 연무장들이 갖추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방리제에 의한 도시계획은 지세가 고르지 못한 지역이나 자연적으로 성장한 도시에는 적용하기 힘든 것이었으며, 광범위한 평야에 조성되는 새로운 도읍지에, 그것도 상당한 수용 인구를 갖추고 있을 때 시행하기 적합한 제도이다. 풍천원의 철원도성 내부가 방리제에 따라 조성되었다는 문헌자료는 없다. 다만 철원도성이 장안성이나 동경성처럼 평지 방형도성이며 계획적으로 조성되었다는 점에서 방리제를 적용했을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4

    장안성이나 동경성의 경우 내성 지역에 있는 궁궐이나 황실 및 기타 사찰, 정원 등 시설은 규모가 다양하여 철저한 방리제 적용이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철원도성의 내성의 경우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면적이 매우 넓고 궁궐과 황궁 외에 다른 관아 및 다양한 공공시설 등이 조성됨으로써 내성에도 어느 정도 방리제를 적용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처음 실측된 궁예도성 일대의 지적도(1,200분의 1)의 토지 분할 상태를 확인할 경우 오래전에 실시했을 것으로 보이는 방리제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지금까지 철원도성에 남아 있는 유적은 적은 편이다. 내성의 북쪽 일대는 통치자와 관련된 시설들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었을 것이고, 내성의 남부 일대와 외성 지역은 피통치자들과 관련된 시설들이 있던 곳이다. 우선 군사분계선 북쪽 일대는 둘레 1,850m 정도의 궁성터가 확인되는데 이곳에 포정전·만세궁 등의 궁궐들이 있었을 것이며, 그 아래에 둘레 600m 정도의 사찰터가 확인되며 그 가운데 일찍이 국보 제118호로 지정되었던 석등(石燈)이 서있는 사진이 있으나 거주민의 증언으로는 6·25전쟁 이전에 이미 석등은 붕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울러 궁성 바로 우측에 인접하여 ‘고궐동(古闕洞)’이란 마을이 존재한 것으로 보아 이곳에 관료·귀족들의 저택이 집중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여 필히 발굴해보아야 할 지점이다.

    남쪽으로는 외성 남벽 우측 지점에 ‘남대문지(南大門址)’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남대문은 성벽 중앙 주작대로와 흔히 연결되므로 이곳은 남대문이 아니라 3~4개의 남문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 ‘궁예시대석 탑’이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조선고적도보』에 의하면 이 탑을 또 다른 석등으로 설명 하고 있다.

    그 외에 왕실 전용 우물인 어수정(御水井)이 남벽 서쪽 끝에 해당하는 홍원리에 있었다는 말이 전해져오고 있는데 그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 외에 『조선고적도보』에는 석등 옆에 귀부(龜趺) 사진이 있는데 등에 있었던 비석은 보이지 않는다.

    끝으로 비록 비무장지대 안에 있지는 않지만 궁예와 관련된 유적 중 철원도성과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유적을 소개한다. 이는 장차 철원도성 조사연구 시 언젠가는 조사가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기대해보는 마음에서이다.

    그 첫 번째는 궁예 무덤에 관한 문제다. 궁예는 918년 왕건 세력에게 축출된 후 북으로 패주하다가 부양(평강) 부근에서 농민에게 살해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무덤이 그 어디에 있다는 이야기는 전해져오지 않고 있다. 다만 최근 『청구도』에서 경원선의 안변역 못 미쳐 삼방이라는 곳에 ‘궁왕묘(弓王墓)’라고 그의 무덤을 표시 해놓고 있으며, 최남선이 1924년에 쓴 「풍악기유(楓嶽記遊)」에서 삼방협 일대에 전해져오는 궁예 죽음과 관련된 설화와 그가 그곳에서 자살하였으며 궁예의 무덤이 그곳에 있음을 설명하고 있고 궁예 무덤의 사진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음도 확인되었다. 철원도성 조사사업이 진행될 경우 남북이 공동으로 확인해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3. 고분(古墳) 및 고총(古塚)

    1) 전골총(戰骨塚)

     • 소재지 :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읍내리 성재산(310m) 북쪽 기슭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12만군이 조선을 침공하여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해 들어가자 각지에서 근왕군이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 평안감사 홍명구(洪命耈)와 평안병사 유림(柳琳)은 근왕군 5천명을 이끌고 내려와 김화읍에서 청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홍명구와 유림은 작전에 대한 의견 대립으로 홍명구군 2천명은 읍내 좌측 향교 부근의 개활지에 진을 쳤고 유림군은 개활지 남쪽의 백동산(백전) 일대에 진을 쳤다. 1637년 1월 28일 청군의 기마전술에 말리어 홍명구군 1천여명은 전사하였으나 유림은 4차의 침입을 막아내고 역습하여 청군을 궤멸시킨 후 근왕군의 임무 수행을 위해 남한산성으로 떠났다. 당시 김화현령 이휘조는 전쟁터 주변에 전사자들의 유해를 몇 군데로 나누어 가매장하였다. 그 후 1645년 김화현령 안응창이 흩어져 매장되었던 유골을 한데 모아 크게 분묘를 만들었으며, 그 후부터 이 무덤이 전골총으로 불리어오고 있는데 전골총의 위치에 대해서는 그간 세 곳이 거론되었으며 그 위치는 아래 표와 같다.

    [표 3] 추정 전골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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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정 전골총 위치

    (재)국방문화재연구원은 2014년 추정 전골총 1과 2에 대해 시굴조사를 실시하여 지형이나 지질 등을 확인해 보았으나 무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간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어온 것이 비무장지대 안에 놓여 있는 ‘추정 전골총 3’ 지역이지만 출입이 자유롭지 못해 조사를 실시할 수 없었다.

    이 무덤은 높이 7m, 폭 20m로서 남북으로 긴 타원형의 모습을 하고 있는 대형 봉토분으로서 남방한계선에서 10m 떨어진 비무장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2) 매두분(埋頭墳)

     • 소재지 : 철원군 김화읍 읍내리 배고개 정상 부근

    김화지역은 예부터 교통의 요충지로서 고려에서 조선시대까지 외침이 있을 때마다 전화에 시달려온 지역인 데 이 매두분은 홍건적과 관련된 무덤이다. 홍건적은 원나라 말기에 중국에서 일어난 도당으로 만주와 요동을 휩쓸고 1359년 우리나라에 침입하여 서경 등지를 노략하고 일부가 김화의 오성산 지역으로 진출하였으나 이곳에서 원군에 의해 토벌되었다. 김화군민들이 홍건적 사체를 배고개에 모아놓고 돌로 덮어 매장해놓았는데 그 후부터 이 돌무덤을 매두분이라 불러왔다고 한다. 이 매두분은 오랫동안 남아 있었고 유물도 많이 수습되었으나 현재는 비무장지대 북쪽 지역에 남아 있다.

       4. 전적지(戰跡地)

    1) 병자호란 김화전투 전적지

     • 위치 :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읍내리 성재산(463m) 남쪽 들 및 백동산(399m)

    김화 백전전투는 1637년 1월 하순 남한산성을 향해 남진하던 평안도 근왕군과 조선 근왕군의 수도권 진입을 차단하려는 청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평안감사 홍명구와 평안병사 유림이 합동으로 이끄는 5천명의 근왕군과 청군 우익군 일부인 6천명이 백동산과 그 앞 들에서 격전을 치러 조선군이 대승을 거둔 것이다. 홍명구와 유림 두 장수의 진지 편성 개념이 달라 홍명구군은 성재산 남쪽의 평야에 진지를 구축하고 유림군은 홍명구 진영 남쪽(백동산 399m) 고지 일원에 포진하였다. 당시 토성리에 진을 치고 있던 청군은 첩자를 앞세우고 1천명의 기병을 앞세워 돌진하여 홍명구군을 유린하여 홍명구군은 모두 전사하였다. 청군은 이어 4차례에 걸쳐 유림군을 공격했으나 결국 청군은 태반이 전사한 채 퇴각하였다. 이 백동산전투는 전라도 근왕군이 승리한 광교산전투와 함께 병자호란 2대 승첩의 하나로 꼽힌다.5

    병자호란이 끝난 후 김화현민들은 1644년 ‘평안병마절도사유림대첩비(平安兵馬節度使柳琳大捷碑)’를 원래 전투지인 김화읍 생창리 향교골 백동산 아래에 세웠고 이어 다음해인 1645년에는 ‘평안도관찰사홍명구충렬비(平安道觀察使忠烈碑)’를 향교골에 건립하였으며, 1650년에는 홍명구 제향을 위하여 백전읍 주민들이 충렬비 옆에 사당을 건립했는데 1652년(효종3년) 사당이 충렬사(忠烈祠)로 사액(賜額)되었다. 1940년에 이르러 김화 유림들의 합의로 유림대첩비가 홍명구충렬비 옆으로 나란히 이건 되었고 충렬사에 충장공 유림이 함께 배향되었다.6

    그 후 6·25전쟁으로 인해 충렬사가 소실되면서 비무장지대가 된 그곳에 다시 충렬사를 재건할 수 없어 근남면 육단2리에 임시로 사우를 건립한 바 있으나 1997년부터 1999년까지 원래 자리인 향교골에 현 충렬사를 재건하여 홍명구와 유림을 함께 배향하고 있으며 유림대첩비와 홍명구충렬비도 비각 안에 넣어 함께 관리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충렬사는 강원도기념물 제72호로 지정되어 있다.

    2) 백마고지 전적지

     • 위치 :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산명리

    백마고지 전투는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철원 북단의 요충지인 백마고지(395m)에서 한국군 9사단과 중공군 38군 간에 벌어진 고지쟁탈전이었다. 중공군의 침공으로 시작된 이 전투는 10일간 계속되었는데 중공군은 봉래호의 수문을 폭파해 역곡천을 범람시켜 한국군 9사단을 고립시키며 집요하게 공격해왔다. 결과적으로 10일간 12차례의 고지쟁탈전을 반복하면서 고지 주인이 7회나 바뀌는 혈전 끝에 중공군은 1만3천여명의 전사자를 낸 채 고지는 최종적으로 한국군 9사단의 수중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백마고지 전투는 6·25전쟁뿐만 아니라 세계 전사에서 가장 치열했던 고지전투로 이름을 남겼으며 한국군의 전투능력을 세계에 과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3) 저격능선 전적지

     • 위치 :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구 근동면 광산리)

    저격능선 전투는 1952년 10월부터 11월까지 42일간 김화 저격능선 쟁탈을 놓고 한국군 2사단과 중공군 15군간에 벌어진 고지쟁탈전이었다. 한국군 2사단은 오성산 남쪽의 북한군 전초기지를 쟁탈하기 위하여 공격작전을 시작하였고, 중공군 15군도 저격능선 확보를 위해 반격을 가해왔다. 낮에는 한국군이, 밤에는 중공군이 차지하는 6주간의 주야 공방전으로 양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으나 결국 저격능선은 한국군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하여 김화-금성 간의 도로망 확보와 군사분계선 설정 시 유리한 지형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중공군은 그들이 오성산을 지켰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 전투를 ‘상감령전역’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백마고지전투와 함께 철의삼각지 주요 전투로 6·25전쟁 시 승전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다.

    4) 베티고지 전적지

     • 위치 :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고장리

    한국전쟁 막바지인 1953년 7월 15~16일에 한국군 1사단 16연대 6중대 2소대장인 김만술 상사는 고장리 임진강 건너의 베티고지에 투입되어 13시간 동안 중공군 2개 대대의 공격에 맞서 19차례 고지 방어 전투를 수행하여 끝내 베티고지를 지켜냈다. 중공군 전사자는 356명이었고 34명의 2소대원 중 24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12명이 살아남았다. 6·25 전사상 가장 용맹하고 전설적인 전투이다. 이 전투로 소대장은 한국의 최고 무공훈장인 금성태극훈장을 받았다.

       5. 철도지

    1) 경원선

     • 위치 : 강원도 철원군 북면 월정리 및 어운면 가칠리 일대

    경원선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한반도 북부의 물자를 경성이나 일본으로 반출하는 등 군사·경제·정치적으로 한국을 지배하기 위하여 1914년 8월 완공하였다. 서울에서 원산까지 총 길이는 223㎞이며, 과거에는 용산~신탄리의 89㎞만 운행되었는데 2012년 11월 백마고지역이 개통되어 현재는 총 94.4㎞가 운행되고 있다. 경원선은 비무장지대 앞에 있는 철원도성 안 동쪽을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는데 비무장지대 내 총 길이는 약 4.6㎞이며 6·25전쟁 후 철로는 제거됐지만 철로 제방은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2) 금강산 전기철도

     • 위치 :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일원

    1924년 8월 철원~김화 구간이 개통된 이후 1931년 내금강까지 전 구간 116.6㎞가 개통되었다. 금강산전기 철도주식회사가 관리·운영하는 철도로서 북쪽의 유화철 등 지하자원을 일본에 반출할 목적으로 부설하였으나 오히려 금강산 관광과 자원 수송에 큰 역할을 하였다. 현재 김화 험석동 일대로부터 성재산 북쪽 아래의 탑골, 방아다리, 배재 등을 지나 암정리까지의 약 11㎞가 비무장지대 안 남쪽 구간을 통과하고 있으나 이미 철로는 제거된 상태이다.

    3) 동해북부선

     • 위치 : 강원도 고성군 송현진리, 대강리 일원

    원래의 동해북부선은 양양~안변 간 192.6㎞ 구간으로 1937년 12월에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분단 후 기차는 운행되지 않고 철로도 철거되었다. 현재 비무장지대의 동해북부선은 고성군 송현진리로부터 7번 국도(금강산 가는 길)와 나란히 철로가 놓여 있다. 바닷가를 따라 가다가 감호 왼쪽으로 돌아 내륙으로 향한다. 비무장지대 내의 철도 길이는 약 4.2㎞인데 철로는 제거되었고 교각 등은 남아 있는데 제방도 대개 남아 있는 편이다. 현재 정부가 동해북부선 복원을 추진 중이며 공사가 이루어질 시노선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4) 경의선

     • 위치 :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동장리

    서울~신의주를 연결하는 복선 철도로 1906년 4월3일 개통되었다. 일본이 한국 지배와 대륙 침략을 위해 러일전쟁 중 일본군대에 의해 군용철도로 개설하였다. 2000년 경의선 복원이 논의된 후 2003년 6월 복원되었다. 구 경의선은 구 장단역과 함께 남아 있다. 4.1㎞ 정도가 비무장지대 안에 놓여 있다.

       6. 봉수지(烽燧址)

    1) 도라산(都羅山) 봉수지

     • 위치 :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도라산리 고지(167m) 정상

    도라산 봉수터로 알려져 있는 지점은 도라산 전망대 동쪽 군부대 관측소가 설치되어 있는 곳으로 봉수의 유구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조선시대 전국에 설치 된 5로의 직봉노선 중 3로에 해당한다. 이 3로 직봉노선은 강계의 여둔대를 기점으로 하여 압록강변을 따라 내려오다가 의주를 거쳐 평안도 내륙을 통과하여 개성의 국사당에서 도라산을 거쳐 파주의 대산 등을 지나 무악동봉을 거쳐 목멱산에 이른다. 도라산 봉수는 내지 봉수에 해당한다. 언젠가 이 봉수지가 복원될 경우 평양·개성을 거쳐 서울로 연결되는 봉수노선을 활용해 남북 간의 중요한 행사를 연결하는 상징적 통신노선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2) 소이산(所伊山) 봉수지

     • 위치 :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계웅산(604m)

    이 봉수는 옛 김화현 동쪽의 계웅산 정상에 있기 때문에 계웅산 봉수지라고도 불린다. 계웅산 정상 중 비교적 평탄한 남동쪽 봉우리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 이 일대는 군의 관리 하에 있으며 봉수지로 추정되는 남동쪽 봉우리 정상이 많이 변형되고 삭평되어 봉수 유구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소이산 봉수노선은 제1로 직봉 노선상에 해당된다. 이 노선은 두만강변의 서수라를 기점으로 하여 두만강변을 따라 올라가다가 다시 함경도의 해안선을 따라 내려와 강원도 내륙을 지나 서울 목멱산에 이른다. 소이산 봉수는 북동쪽으로는 금성의 아오산 봉수와 연결되고 남서쪽으로는 평강의 진촌산 봉수와 대응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내지 봉수에 해당한다.

       7. 산성(지)(山城址)

    1) 성재산성(城齋山城)

     • 소재지 : 철원군 김화읍 읍내리 산121 성재산(471m)

    옛 기록과 구전을 통해 볼 때 그 명칭이 「성산성(城山城)」, 「고성(古城)」, 「성재산성(城齋山城)」, 「가등산성(加藤山城)」, 「자모산성(慈母山城)」 등 다양하다.

    1996년 『강원도 철원군 군사유적 지표조사 보고서』(육사박물관)에서 개략적인 윤곽과 규모가 처음으로 밝혀졌으며, 그 후 2000년 육군사관학교 사학과에서 정밀측량을 바탕으로 한 『철원군 성산성 지표조사 보고서』에서 정확한 모습이 밝혀졌다.7 김화읍 읍내리는 조선시대 김화현의 관아 소재지인데 성산성은 여기서 1.5㎞ 북서쪽에 위치한 성재산 정상부와 남쪽 계곡을 포함하여 쌓은 복합식 산성으로 둘레 982m, 잔존 성벽의 최대 높이는 5.2m 이다. 성벽은 많이 붕괴되었지만 남서벽, 남벽, 북동벽 일대는 높이 2~5m의 성벽이 잘 남아 있으며 삼국시대 성벽으로는 잔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축성 기법 등으로 볼 때 삼국시대 산성으로 보이며 초축 이래 조선시대까지 김화현의 진산의 진성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면석은 많이 붕괴되었지만 내탁은 그대로 잘 남아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특히 내탁이 격자 모양으로 잘 짜여 있어서 성벽이 5~6m 정도로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잘 남아 있는 편이며, 산성 안 남쪽 계곡부 평지에 비교적 큰 건물지들이 확인되고 있고 최근까지 군부대에서 식수로 활용한 우물 2곳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현문 형식의 5개 문지와 4개의 치성, 그리고 남벽과 서벽 밖의 보축 등이 확인되고 있다.

    유물도 다양하여 주로 신라·고구려 계통의 토기·도기류가 많이 나오고 있다. 축성의 견고성이나 규모, 성 내부 구조, 건물지 및 성의 위치 등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남북 통로를 장악하는 군사·정치적 산성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고려~조선 시는 김화현의 진산에 있는 피난성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화 일대는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그 피해가 큰 지역으로서 이 성산성을 중심으로 하여 토벌작전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시는 함경도로 진출했던 가등청정(加藤淸正)군이 퇴거 시 이 산성에 주둔했다는 전설 때문에 이 성산성을 가등산성으로 부르기도 하며, 병자호란 시는 이 성산성 바로 아래서 이른바 김화 백전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청 태종의 침입으로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를 구하기 위한 평안도 근왕군은 성산성 아래에서 청군과 결전(김화 백동산전투)을 벌여 청군을 궤멸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6·25전쟁 시 김화는 철원·평강과 함께 철의삼각지의 하나로 최대의 격전장이기도 하였다. 성산성이 위치한 김화 일대는 이와 같이 남북·동서로 통하는 교통·군사의 요충지로서 삼국시대로부터 6·25전쟁에 이르기까지 이민족의 침입으로 끊임없이 전란이 지속된 곳이며, 그 모든 역사적 전쟁의 중심지가 바로 성산성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한반도 중동부의 요충지에 위치하여 고대에는 남북 세력 간의 대결, 그리고 고려·조선시대에는 이민족의 침입에 맞서는 중심기지 역할을 해왔던 역사적인 산성이다.

    원래 성산성은 남방한계선 북쪽에 있었으나 철책선을 북으로 조정함에 따라 지금은 성산성 북벽으로 남방한계선이 지나고 있다. 현재 성산성은 강원도기념물 제72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의 역사적 기능을 확인할 뿐만 아니라 더 이상 붕괴되지 않고 보존하기 위하여서도 발굴조사와 그에 따른 보존대책이 요망된다.

    2) 승양산성(承陽山城)

     • 소재지 : 철원군 인목면 승양리 성산(290m) (현재는 연천군 신서면으로 편입)

    이 산성은 풍천원 철원도성의 북쪽 북방한계선의 북쪽에 있으며 해발 290m의 성산에 축성된 테뫼식 석성이다. 현재는 오랜 세월로 인해 폐허화되었으나 일부 석축이 확인되고 있다. 이 산성 좌우로는 능선이 길게 뻗어 있고 또 남쪽으로도 능선이 뻗어 있어 지리적으로 동서남으로 통하는 중요한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산성의 축조시기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으나 삼국시대에 쌓았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이며 궁예가 철원도성을 방비하기 위하여 활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3) 중어성(中禦城)

     • 소재지 :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 281m 고지 앞

    이 중어성은 철원도성 서쪽 12㎞에 있는 281m 야산 앞의 평평한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산 뒤로는 역곡천이 남서쪽으로 흐르고 있어 그 위치가 지리적·전략적인 교통의 요지에 해당된다. 동쪽으로는 철원을 경유하여 김화 방면으로 나아가고 북쪽으로는 평강, 남쪽으로는 마장면으로 통한다. 중어성의 위치가 지리적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어 6·25전쟁 시에도 격전장의 한 곳이 되었다.

    현장 확인 결과 이 성은 삼국시대의 전통적인 축성법과는 많이 달랐다. 기단 조성도 잘 안 되었고 석재는 화강암이나 편마암인데 잘 다듬어진 석재가 아니라 절반 정도 다듬어졌으며, 돌의 크기가 가로 1~1.5m, 세로 0.7~1.0m, 높이 0.5~0.8m 정도로 비교적 큰 편이었으며 불규칙하게 쌓은 형태였다. 성은 방형으로 되었고 크기는 동서 50m, 남북 20~30m, 높이 1~1.5m였다.

    성의 위치나 축조방식 및 규모 등에서 볼 때 전통적인 삼국시대나 후삼국시대 석성으로 보기는 어려웠고 단시간 내 쌓은 것으로 보였다.8

    4) 고장리산성(古莊里山城)

     •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베티고지 정상

    이 산성은 6·25전쟁 시 격전을 치러 산 정상이 훼손되면서 그 실체가 드러난 산성이다. 오랜 연륜과 6·25전쟁의 전흔으로 붕괴되었지만 일부 남아 있는 성벽 등으로 볼 때 삼국시대의 석성으로 보이나 연천·파주 일대의 삼국시대 천연 고성들과 함께 일찍이 퇴락하여 조선시대 지리서에도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빠른 시일 내에 이 산성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길 기대해본다.

       8. 사지(寺址)

    1) 창화사지(昌化寺址)

     • 소재지 : 파주시 장단면 도라산리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장단지』에 이미 언급되어 있는 사찰이며 도라산 남방한계선 부근 북사면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위치 확인은 어려운 실정이다. 일찍이 폐사되고 ‘영수암’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는 상태이다. 삼국시대의 사찰로 추정되며 왕건이 만년을 이곳에서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기곡리사지(基谷里寺址)

     • 소재지 : 연천군 왕징면 기곡리

    기곡리는 원래 삼팔선 이북이었으나 6·25전쟁 이후 군사분계선이 가운데를 지나가게 되어 지금은 남북으로분리되어 있으며 기곡리사지는 군사분계선 북쪽의 비무장지대 내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지리서에는 전혀 언급이 없고 일제강점기의 『문화유적총람』에서 처음 언급되었다. 이 절의 명칭에 대한 언급은 없으며 삼국시대에 건립되었으나 일찍이 폐사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고 기곡리사지에 석불좌상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실제로 조사된 바는 없다.

       9. 충장사(忠壯祠)

     • 위치 : 강원도 철원군 김화군 근동면 하소리 갈동

    충장사는 조선 효종 시 여주목사 겸 경기·강원방어사를 지낸 충장공 원호(元豪) 장군을 모신 사당으로 그가 순절한 김화군 갈동에 3칸 규모로 건립되었다(1656년). 원호(1533~1592)는 임란 당시 남한강 지류인 섬강을 건너는 왜군을 격멸하였고 그 후 함경도 방향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을 김화군 갈동의 537.7m 고지에 진을 치고 방어 하며 왜군에게 큰 타격을 주고 왜병의 진출을 저지하였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결전 중 순직하였다. 일제는 조선을 점령한 후 충장사를 철거해버렸으며 충장사 터는 현재 김화읍 북쪽 비무장지대에 놓여 있다.

       10. 등록문화재

    1) 파주 구 장단면사무소

     • 위치 :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동장리 515번지 외 2필지

     • 지정번호 : 등록문화재 제76호(2004년 2월 6일 지정)

    1934년에 지은 철근콘크리트 1층 건물로 6·25전쟁 이전까지 장단면의 행정업무를 관할했던 곳으로 구 장단역에서 700m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연면적 295.4㎡, 건물 높이 3.5m이며 골조는 남아 있으나 부식이 심하여 폐허화된 상태이다. 근본적으로 복원을 서둘러야 할 근대 문화재이다.

    2) 파주 경의선 구 장단역 터

     • 위치 :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동장리 198번지

     • 지정번호 : 등록문화재 제77호 (2004년 2월 6일 지정)

    1937년 경의선이 개통되면서 건립된 장단역 플랫폼으로 길이 304m, 폭 7m의 규모이다. 당시의 장단역사는 폭격으로 장단역 기관차와 함께 불에 탔고 지금은 승강장, 화물하역장, 철로 일부가 남아 있다.

    3) 파주 경의선 장단역 죽음의 다리

     • 위치 :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도라산리 894번지

     • 지정번호 : 등록문화재 제79호 (2004년 4월 6일 지정)

    이 다리는 장단에서 연천 고랑포로 나가는 국도상의 교량으로 1937년 경의선이 개통되면서 건립되었다. 높이 8m, 길이 7.2m, 폭 5.5m로서 옛 장단역에서 남쪽 300m 지점에 있다. 6·25전쟁 시 이곳에서 많은 미군이 전사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1. 김화 현치소(縣治所)

     • 위치 :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성재산 앞

    김화는 조선시대에 현이었으며 향교나 관아가 성재산 남쪽 산자락 충렬사 일원에 있었으나 그 중심지는 성재산 북쪽 앞 일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6·25전쟁 후 이 일대에서 군 생활을 한 제보자의 증언을 통해 이 일대에 96개의 비석이 있었다는 ‘비석거리’를 확인하게 되었다.

       12. 조선시대 인물 묘

     • 위치 : 경기도 파주시 연천 일원

    지금까지 육안을 통해 확인된 조선시대 묘는 홍세공(조선 중기 문신), 허종(이시애의 난 평정), 박병(조선 중기 문신), 윤두수(16세기 문신), 김안국(조선 전기 유학자) 등 5기이나 앞으로 비무장지대 안에 고려 및 조선시대 관리들의 무덤이 더 많이 확인될 것이다.

       13. 한강 하류 재두루미 도래지

     • 위치 :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신남리와 김포시 하성면 석탄리의 동서해안과 삼각주 일원

    이곳은 천연기념물인 재두루미의 오랜 도래지로서 천연기념물 제250호로 일찍이 1975년 2,314만3,564㎡의 넓은 면적을 지정하였으나 갈대지역의 확산과 이 일대의 개발로 인한 오염·소음 등으로 먹이가 부족하여 재두루미의 도래가 급격히 감소하여 현재는 거의 기능이 상실된 상태로서 극히 일부분만 도래지로 되어 있다.

       14. 휴전협정 조인 건물 : 구 판문점

     • 위치 :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널문리

    원래 휴전회담은 개성 북쪽의 내봉장에서 시작되었으나 본격적인 회담은 1951년 장단군 진서면 널문리에서 진행되었고 휴전협정 조인을 위하여 이곳에 200평의 목조 건물을 지어 이곳에서 조인이 이루어졌다. 휴전 조인 후 종전위원회와 중립국 감독회의실 등이 필요하여 1960년대에 현재 위치에 ‘평화의집’(남), ‘통일각’(북) 등 새로운 판문점 건물들이 들어섰다. 따라서 휴전과 관련하여 가장 의미를 지니는 건물은 현 판문점에서 동쪽 800m 지점의 북한 비무장지대에 있는 구 판문점 건물이 우선일 것이다.

    Ⅲ. 남북 공동조사가 필요한 유적

    비무장지대 내에 있는 문화유적들은 남북이 모두 관심을 갖고 언젠가는 공동으로 확인해야 할 유적들이지만 현시점에서 남북이 공동으로 조사해야 할 유적은 일단 다음과 같은 성격의 것들이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첫째, 조사 대상 유적이 남북 모두에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어서 양측이 모두 공동조사의 필요성을 공감하는 유적.

    철원도성은 그 위치가 비무장지대 남북 전체에 걸쳐 있으며 군사분계선 남북 면적이 비슷하여 공동조사가 필수적이다. 또 북측은 우리나라의 역사 주체를 고구려-고려로 연결시키는 경향을 보이는데 태봉은 고구려와 고려를 연결하는 가교로 보고 있어서 부정적이지 않으며 남측은 순수 학술적 차원, 즉 궁예와 태봉을 연구하는 차원에서 도성의 구조·규모·실태에 대한 학술적 자료를 획득코자 한다.

    또 전골총은 병자호란시 평안도 근왕군 중 홍명구 감사 휘하 전몰 군사들의 집단무덤이라는 점에서 북한의 관심이 클 수 있을 것이다. 남측은 미확인 전골총의 실체를 규명하여 이를 국가문화재로 보존하는 차원에서 관심이 크다.

    둘째, 유적의 역사적 중요성이 크고 규모 및 성격이 명확한 것.

    철원도성은 후삼국의 패자였던 태봉의 도성이며 10세기에 새로이 설계하여 만든 대규모의 웅장한 역사도시라는 점이며, 전골총은 당대 최강인 청의 침입에 대항하여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면서 희생된 조선군 전몰자의 무덤이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크다.

    셋째, 조사 결과 남북 모두에게 민족의 동질성을 일깨워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유적.

    철원도성은 10세기에 계획적으로 조성된 대도시로 그 규모가 크고 웅장하며, 전골총은 대제국 청과 싸워서 대승을 거둔 전쟁이라는 점에서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시킬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넷째, 공동조사에서 남북의 긴밀한 협조가 요구되며 비교적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조사가 필요한 유적.

    철원도성 조사는 남북 공동조사단을 중심으로 하여 진행되어야 하므로 남북은 하나의 팀워크를 구성하여 상호 소통, 지뢰 제거 등 여러 분야에서 긴밀한 협조가 이루어져야 한다. 또 철원도성 조사는 규모나 성격으로 보아 장기적 조사일 수밖에 없다. 위와 같은 점에서 비무장지대 내의 유적 중에 현재 남북이 공동 발굴조사가 가능한 유적은 철원도성과 병자호란 김화전투 전골총 등이 가장 유망한 것으로 보인다.

       1. 철원도성 남북 공동조사의 필요성

    남북은 ‘남북군사분야합의서’(2018.9.19)에서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우리 문화유적을 공동으로 조사하는 데 합의하였다. 문화유산을 공동으로 확인하고 조사하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같은 문화유산을 오랫동안 공유해온 한 민족이라는 ‘민족의 정체성’을 일깨워줌으로써 대결과 상장의 상징인 비무장지대를 스스로 포기하고, 나아가 평화와 화합을 위해 남북이 공동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줄 것이다.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문화유산 중 가장 특징적이며 민족의 정체성을 가장 잘 나타내줄 수 있는 유적은 태봉국 철원도성이며, 남북 간에 우선조사 대상 유적으로 철원도성을 선정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철원도성의 남북 공동발굴은 우리가 한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일깨워줄 뿐만 아니라 대립과 대결의 상징인 비무장지대를 평화의 장으로 전환시키는 상징적 의의를 갖고 있다 할 것이다.9

    철원도성은 비무장지대에 꽉 찬 유적으로 10세기 초 태봉이라는 제국의 도읍지이며 지금까지 방치되어온 역사도시인 것이다. 따라서 비무장지대 안에 잠들어 있는 철원도성은 숙명적으로 남북이 공동으로 조사하도록 운명지어져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더욱이 궁예와 태봉국은 단명했을 뿐만 아니라 비운으로 인해 도읍지도 황폐화되고 퇴락했기 때문에 자료의 부족으로 인해 그에 대한 역사적 실체를 밝히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이제 태봉이라는 제국의 도읍인 역사도시 철원도성의 발굴은 우리 역사에서 많은 왜곡과 오해에 파묻힌 태봉과 궁예를 올바르게 파악하고 인식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해줄 것이다.

    철원도성의 남북 공동조사를 위해서는 다음의 몇 가지 기본 전제를 서로 준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첫째, 조사 대상이 도읍지를 둘러쌓고 있는 내·외성의 성 자체라기보다 성 안에 조성된 대규모의 역사도시, 역사적 도읍이라는 점이다.

    둘째, 조사 대상이 10세기 초 제국의 도읍이라는 점과 이 도읍이 모두 폐허화되어 지하에 묻혀 있다는 점에서 조사기간이 장기적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장기적인 발굴을 위한 계획이 수립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철원도성과 유사한 대규모 평지도성을 조사해왔던 중국의 장안성이나 발해의 동경성, 그리고 일본의 평성경(平城京)의 발굴조사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장안성 발굴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발해 동경성 발굴은 1930년대부터 일본이 발굴을 시작한 이래 1960년대에는 중국과 북한이 공동으로 발굴을 실시한 바 있으며, 최근에는 중국이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위해 발굴조사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도 평성경 발굴조사를 수십 년간 꾸준히 해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킨 바 있다. 이와 같이 장안성이나 동경성 및 평성경 모두 수십년간의 장기적 발굴조사를 실시해오고 있는 실정이다.

    셋째, 철원도성의 발굴조사는 남과 북이 하나가 되어 공동으로 조사해야 한다는 점이다. 철원도성이 군사분계선 북쪽에 절반이 있고 남쪽에도 있다고 하여 북쪽 유적은 북측이, 남쪽 유적은 남측이 서로 나누어 조사해서는 안 되고 공동조사단이 구성되어 단일팀으로 같이 조사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공동 발굴조사단의 구성이 필수적이며 남북의 긴밀한 협조와 소통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이미 개성 만월대 조사에서 이미 경험했고 확인되었다.

    다음으로 앞에서 제시한 세 가지 전제를 상호 충분히 이해하고 공동발굴을 실시하기 위한 현실적인 준비사항으로는 첫째, 남북 간에 철원도성 공동 발굴조사에 대한 ‘조사합의서’ 작성이 먼저 채택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지난 9월 19일 채택된 이른바 ‘군사합의서’는 비무장지대 내 유적의 공동발굴 시행을 위한 군사적 분야의 지원에 관한 합의서였지 발굴조사 합의서는 아니었던 것이다. 즉 비무장지대 내의 유적 발굴조사는 ‘군사합의서’의 한국 측 해설자료에서도 밝혔듯이 ‘민간 차원의 공동조사 및 발굴’로 추진한다는 내용이었다. 과거에 개성 만월대 발굴이나 고구려 고분 공동발굴 시에도 남과 북은 민간 차원의 개별적 ‘조사합의서’를 채택하였다. 따라서 ‘철원도성 공동발굴 합의서’는 민간 차원 중심으로 체결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남북 간에 이루어져야 할 준비사항은 지금까지 매설된 지뢰 및 불발탄 등의 위험요소를 제거하는 지뢰 제거에 관한 합의일 것이다. 지뢰 제거에 관해서는 남북이 공동으로 참여하되 제일 먼저 북은 북쪽 지역을, 남은 남쪽 지역을 각각 맡아 지뢰 제거를 해서도 안 되고 공동발굴 시작 전에 먼저 지뢰 제거를 광범위하게 시행해서도 안 된다. 지뢰 제거는 유적의 입지나 조건과 무관하게 일률적으로 도성 전체를 한꺼번에 실시하는 것이 유적의 조사나 발굴에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뢰 제거는 반드시 발굴조사와 공동으로 추진하여 조사 지역 및 시기 등에 맞추어 발굴조사팀과의 협조 속에 순차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뢰 제거는 전 세계적 관심사이므로 유네스코가 규정하고 있는 절차와 방법 등과도 긴밀히 협조해야 할 것이며, 필요시는 유네스코와의 협력을 통해 경험이 많은 국가와 지뢰조사 기관의 협조도 고려할 수 있다. 따라서 지뢰 제거를 위한 전담기관 등의 설치가 반드시 필요하되 독자적 행위를 하지 않고 도성 발굴 전체 업무를 관장하는 가칭 ‘철원도성 남북 공동발굴 및 복원 추진 협의회’의 산하기구로 편성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철원도성 조사사업을 원만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남북이 공동으로 참여하여 조직하는 조사 및 발굴에 필요한 중심기구, 가칭 ‘철원도성 남북 공동발굴 및 복원 추진 협의회’를 조직하여 이 기구에서 발굴조사 종합계획의 수립, 조사 단계 및 방법, 조사단 구성, 조사 인력 및 장비의 확보, 조사 예산 조달 및 조사 시간 계획 등을 논의해야 할 것이다. 그 중에 조사 단계 및 방법으로는 ①지표조사, ②물리탐사, ③시굴조사, ④발굴조사의 보편적인 단계를 거쳐야 할 것이다.10 다만 지뢰 및 출입의 여건 등으로 지표조사가 여의치 않으므로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군의 항공사진 지원, 드론을 통한 도성지 확인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도성의 남북 공동조사의 관건은 발굴조사 종합계획 수립인 만큼 이를 위해서도 조사단 구성에 있어서는 발굴 전문가 및 기관, 군 관련 전문가, 남북 정부 관계자, 재정 전문가, 다양한 자문 인력, 지뢰 제거 전문팀 등 다양한 전문가들이 참여하여야 할 것이다. 조사 시간 계획은 장기적인 조사발굴을 추진하되 기본적으로 5년을 조사 단위로 하는 장기적 계획이 수립되어야 할 것이다.

       2. 병자호란 김화전투 유적 공동조사의 방향

    1) 전골총 남북 공동 발굴조사의 필요성

    병자호란 김화전투(백동전투)는 조선군의 대승으로 끝나긴 했어도, 전투 초기에는 성재산 남쪽 기슭과 평지에 진을 치고 결전을 벌였던 평안도관찰사 홍명구군 1천여명이 청군의 기병 전술과 포위기습 전술에 의해 홍명구는 물론 모두 희생되었다. 홍명구를 포함한 근왕군 1천여명의 전몰 유해는 피난에서 돌아온 김화현령 이휘조에 의해 전쟁터 주위에 6~7기로 나누어 가매장되었다(1637년). 홍명구의 시신은 그 후 여주 이포의 선영에 안장되었고 그가 전사한 곳에는 충렬비가 세워졌으며(1645년), 1650년에는 충렬사가 세워졌다.11

    그 후 1645년 김화현령 안응창이 여러 곳에 가매장되었던 시신을 성재산 양지바른 곳에 모아 크게 성토하여 묘를 만들었는데 이 묘는 전골총으로 불려오고 있다. 그간 전골총의 위치에 대해서는 본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세 곳이 거론되었으나, 본 연구원의 발굴 결과 읍내리 246번지 논바닥의 독립 구릉은 무덤 유구를 쓸 수 없는 원지형이었으며, 읍내리 430번지의 성재산 남쪽 기슭 군부대도 조사 결과 무덤 유구가 확인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의 유리 원판 사진상으로 보아서는 이 군부대 일대의 대형 봉분이 전골총일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군부대의 이전으로 지형이 많이 훼손되어 원래의 봉분 위치를 정확히 찾을 수 없어 인근 연접지역을 조사해보았지만 유구를 찾을 수는 없었다.12

    이제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어온 읍내리 702번지 비무장지대 안 성재산 북녘의 긴 타원형 모습의 무덤을 발굴해야 할 시점이 다가올 것으로 보인다. 높이 7m, 폭20m로서 남북으로 긴 타원형의 모습을 한 제3의 전골총 후보지는 반드시 발굴조사되어 그의 실체를 확인해야 할 것이다. 그간 이 전골총 후보지에 대해서는 찬반양론이 많이 제기되었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문헌의 위치 표시와 전골총의 위치가 다르며 봉분의 형태가 자연 구릉 모습과 비슷하다는 점이었으며, 지지하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곳이 전골총으로 전해져왔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전골총은 남방한계선 안 10m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발굴조사를 하려면 북측의 동의 없이 정전위원회의 허가를 받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대형 무덤이 병자호란시 멀리 평안도에서 내려온 홍명구 관찰사 중심의 근왕군임을 고려하면 비무장지대 출입이 허락하는 한 남북이 공동으로 조사해야 할 대상임은 불문가지이다. 특히 청나라 여진족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한 전투였다는 점에서 전골총 발굴은 남과 북이 함께 발굴조사를 해야 함이 마땅하다. 그리고 이 조사를 통해 370여 년간 방치해온 전몰 장병의 원혼을 달래고 이들을 제향하는 시설을 국가가 준비함은 물론 이 전골총을 마땅히 국가 사적으로 지정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2) 병자호란 김화전투 전적지 재정비 논의

    현재 전장 주위에는 홍명구의 충절을 기리는 충렬사와 충렬비가 서있는가 하면 유림대첩비가 이건되어 충렬비와 함께 서있으며, 충렬사 안에 유림 장군 영정이 홍명구와 나란히 걸려 있을 뿐 이곳이 병자호란의 대첩 장소임을 알려주는 다른 시설은 전혀 없다. 목숨을 바쳐 싸웠다는 점에서 홍명구를 기리는 충렬사를 건립하고 충렬비를 세운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유림 장군의 대승과 관련된 것은 대첩비 이외엔 없을 뿐만 아니라 유림 장군의 영정이 충렬사 안에 홍명구의 영정과 나란히 걸려 있다는 점도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생각하게 된다. 이 일대의 뜻 있는 분들이 김화전투와 관련하여 유적지에 대한 새로운 정비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첫째, 김화전투 유적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전투가 오히려 유림의 대승인 만큼 발굴조사를 통해 전쟁무대인 백전지역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는 점, 그리고 백수봉 일대에 잣나무를 다시 심고 적을 퇴치하는 데 사용 된 바위들을 현장에 수집·배치해야 한다는 점.

    둘째, 전쟁에서 유림군의 승리 요인을 밝히기 위해 김화대첩 관련 기념실을 만들어 전쟁 관련 무기자료, 병력 배치 및 전법, 전쟁 요도 등을 비치하여 유림의 승전요인을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는 점.

    셋째, 충렬사는 홍명구 관찰사에 관한 자료를 위주로 전시하고 유림의 영정이나 그 후손에 관한 자료들은 새로 건립하게 될 유림 기념관으로 옮겨야 할 것.

    넷째, 유림대첩비도 원래 위치인 백수봉 아래로 옮길 것.

    다섯째, 참전자 및 전몰자를 위한 위렵탑 조성이 필요함.

    끝으로 현재 강원도기념물 제72호로 지정되어 있는 병자호란 김화전적지를 국가 사적으로 승격시키고 이곳을 국가 차원의 역사안보 사적공원으로 조성할 것 등의 의견이 제시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정비방안을 참고로하여 (재)국방문화재연구원은 이 전적지의 정비보고서를 발간한 바 있다.13

    그러나 이런 차원의 병자호란 김화전투 지역의 정비가 북한과는 관련 없이 남한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김화대첩의 두 장수나 전투요원들이 모두 평안도에서 내려온 5천명의 근왕군들이었기 때문이다. 전투가 벌어지자 김화현령 등은 피신하여 직접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김화현의 주민들이 이 전투에 다소 참여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게 볼 때 김화전투는 청나라 여진족의 침입을 맞아 평안도 근왕군을 중심으로 하고 김화현민들이 가세해 남북이 합동으로 이민족의 침입에 대항하여 싸운 전투로서 상당한 손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자호란 전투에서 유례없는 대승을 거둔 전투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김화전적지의 종합정비는 한국 정부가 지자체와 협조하여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전투주체가 평안도인이었음을 생각하면 정비복원계획의 내용이나 실제 복원사업 추진 시에 북한과 소통하면서 가능하면 공동으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그 외에 김화전투를 재조명하는 남북 간의 학술회의 등을 개최하고 복원 후 제례행사 시에는 남북이 공동 참여하는 방안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Ⅳ. 비무장지대의 세계복합유산 등재 가능성

    2000년대 들어 비무장지대를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하거나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등재하는 방안과 더불어 비무장지대를 세계자연유산이 아닌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자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2018년 남북이 군사분야 합의서를 통해 비무장지대의 성격을 바꾸어 평화의 지대로 만들기 위해 비무장지대 유적의 공동조사를 결정함에 따라 비무장지대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문제는 한걸음 더 현실로 가까이 온 듯한 느낌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주지하다시피 문화유산과 자연유산, 그리고 복합유산으로 구분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1972년 채택한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보호협약’을 통해서 관리되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1987년 이 협약에 가입하였다.

    세계유산의 등재 기준은 현저한 보편적 가치(OUV : 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지닌 유산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최고의 가치(Best of Best)를 지닌 것들이어야 한다.

    세계유산의 등재 기준은 세계문화유산 등재 기준 6개항과 세계자연유산 등재 기준 4개항으로 이 중 1개항이 해당되면 등재 가능하다. 이 등재 기준을 제시하면 아래 표와 같다.

    [표 4]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기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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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기준표

    [표 5]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등재기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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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등재기준표

    현재 우리나라와 북한이 유네스코에 등재한 세계유산은 다음 표와 같다.

    [표 6] 한국의 세계유산 등재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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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세계유산 등재 목록

    [표 7] 북한의 세계유산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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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의 세계유산 목록

       1. 비무장지대의 전쟁유산으로서의 성격

    첫째, 비무장지대는 국제적 이데올로기 전쟁이었던 한국전쟁의 중심 무대였다. 공산 진영의 남침과 이를 저지하기 위해 유엔 결의를 통한 자유 진영의 참전, 즉 두 진영 간에 벌어진 국제적 전쟁으로서 전쟁기간 1,127일 중 3분의 2에 해당하는 764일 동안 이 비무장지대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둘째, 비무장지대 전투는 장기간의 교착 상태에서 벌어진, 세계 전사에서 유례 없는 고지쟁탈전으로 19개국이 참전하여 220만명의 사상자를 낸 국제적인 전쟁이었다.

    셋째, 격전 도중 휴전선언으로 전쟁이 중단되었으므로 전쟁시설, 지형, 장비 등이 그대로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군사분계선, 판문점, 감시초소, 남북방한계선, 군사분계선 등 휴전협정과 관련된 시설물들이 동시에 그대로 남아 있다.

    넷째, 완충지대 기능을 수행하도록 고안된 비무장지대이지만 그 후 끊임없는 북한의 도발로 인해 비무장지대가 아닌 중무장지대화하여 오늘날까지도 전쟁 재발의 가능성이 가장 높은 화약고가 된 셈이다. 결론적으로 비무장지대는 국제적 이데올로기 전쟁이었던 한국전쟁의 핵심 무대로서 전쟁의 시설, 무기, 의지, 장비 등이 그대로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휴전시설 등도 잘 남아 있어 비무장지대가 오히려 중무장지대화한 살아 있는 6·25전쟁 박물관이라는 점에서 전쟁의 참상을 가장 리얼하게 일깨워 주는 잊어서는 안 될 부(負)의 세계적 전쟁유산이다.

    위와 같은 성격의 비무장지대를 앞에서 제시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기준 6개항에 비추어 그 적정성을 살펴본다면 다음의 ③항, ⑤항, ⑥항에는 충족되는 것으로 보인다.

     

    ③항 :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아주 오래된 것.

    ⑤항 : 사회·문화·경제의 변혁으로 파괴되거나 상처받기 쉬운 것.

    ⑥항 : 현저한 사상이나 신념 등과 연관이 있는 것.

     

       2. 비무장지대의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서의 자격

    평강·철원 일대의 현무암 용암이 빚어낸 한탄강·임진강의 주상절리가 보여주는 지질학적 특징과 특수한 자연미(⑦항, ⑨항에 해당), 사향노루·수달·검독수리 등 1백여 종의 멸종위기 야생동물과 식물 등 6천여종이 서식하는 온대림이 자연유산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고 있어(⑧항, ⑩항에 해당) 생태 및 생물 전문가들은 비무장지대 일원이 세계자연유산의 조건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강조하고 있다.14

    따라서 최근에는 비무장지대는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의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어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하는 것이 오히려 더 바람직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정부도 이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비무장지대를 ‘생태의 보고’ 정도로 보거나 6·25전쟁 개별 유산의 지정을 넘어 마지막 분단국가의 세계적 복합유산으로 남겨 후손과 세계인의 ‘전쟁과 평화의 기념공원’으로 만드는 방안에 대하여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난개발이 이루어지기 전에 복합유산의 지역·범위 등을 연구하기 위하여 문화재계·생태계 전문가들과 정부 관계자가 뜻을 모아 보다 세밀한 연구와 준비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비무장지대의 유네스코 복합유산 등재 신청은 현실적으로는 우리 정부가 최근 들어 그 필요성을 인정하고 이를 추진하려고 하지만 비무장지대는 남한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북한에도 있는 이상 세계복합유산 등재는 남과 북이 공동으로 추진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문화재나 자연유산 등이 군사분계선 남북으로 분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말하면 비무장지대의 세계복합유산 등록은 그 대상지가 비무장지대 남북 모두 해당되므로 남북이 공동으로 추진해야 할 사업이다. 이를 위해서는 구체적인 문화유산이나 자연유산에 대해서 남과 북이 견해가 일치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비무장지대세계복합유산 등재 노력은 북한과 공동 보조를 맞추어야 하므로 이를 위해 남북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다.

    즉 복합유산 대상지 선정이나 등재 시기 등에 관해서 남북 간의 협력이 반드시 요구되므로 복합유산 등재가 이제부터 시작하는 단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북한이 이 문제에 대하여 남측과 의견이 다를 경우 남측 비무장지대만이라도 등재를 추진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유네스코와 협의해야 할 것이다.

    Ⅴ. 6·25 전쟁유적의 등록문화재 추진 문제

    현재 비무장지대 안에는 파주시 장단면에 있는 구장단면사무소, 경의선 구 장단역 터, 경의선 죽음의 다리 등 3건만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격전을 치렀던 전쟁터나 시설 등은 모두 등록에서 제외되어 있다. 비무장지대 안의 6·25전쟁 관련 시설이나 격전장은 현재 남북이 대치하고 있어 출입이 어렵고 군의 작전통제 등이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등록문화재 지정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등록문화재 지정의 특징은 현재 사용되고 있으며 소유가 변동될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를 가능한 한 등록하여 이를 보존하고자 하는 것이 그 취지이다. 물론 아직도 군의 작전지역이고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등 위험요소가 하나둘이 아니다. 그러나 비무장지대는 현재 전쟁 상태에 놓여 있지는 않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6·25전쟁 관련 격전장 시설 등은 지금 등록시켜 놓는 것이 더 필요하며, 나아가 쉽게 없어질 수 있는 6·25전쟁 관련 유적을 군이 관심을 갖고 보호하도록 하는 측면도 있다. 그런 점에서 6·25전쟁의 최대 격전장이었던 철의삼각지 좌측의 백마고지 전적지나 우측의 김화 저격능선고지는 물론 전설과 신화가 되어버린 연천의 베티고지 등도 일단 등록문화재로 지정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6·25전쟁으로 파괴되어 폐허가 된 건물이나 시설의 등록도 의미가 있지만 치열하게 싸워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기여했던 비무장지대 내의 격전지나 전쟁시설은 당연히 등록문화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 6·25전쟁 전적지는 낙동강 철교라든지 설마리 전적지, 연천의 유엔군 화장터, 부산의 유엔군 묘지 등과 같이 대부분 후방에 있는 것들이다. 등록문화재 제도는 현재 살아 움직이고 변하는 시설들 중 중요한 대상을 등록시켜 가능한한 이러한 유적들의 붕괴와 파괴를 막아 보존하려는 노력인 만큼 소유자와 관리자 간의 마찰과 애로가 없을 수 없다. 6·25전쟁 관련 전적지나 시설 등의 등록문화재 지정은 오히려 가장 치열했던 비무장지대의 전적지나 시설이 우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비무장지대에 남아 있는 GP시설이나 군사분계선, 철조망, 남북방한계선, 판문점 등 휴전협정과 관련된 시설 등도 등록 대상이 될 수 있으리라 본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남측의 시설부터 등록을 추진해야 할 것이며 국방부, 문화재청, 관계 전문가들 간의 긴밀한 협의와 노력이 필수적으로 요망 된다.

    Ⅵ. 도라산 봉수지의 복원과 활용

    도라산 봉수의 위치는 도라산 전망대 동쪽의 군 통신시설이 위치한 지역이다. 현재 이 지역은 삭평되어 봉수와 관련된 유구나 유물은 찾아볼 수 없는 상태이다. 도라산 봉수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북쪽으로는 개성의 국사봉 봉수에 응하고 동남쪽으로는 파주 대산 봉수에 응한다.

    우리나라의 봉수제도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그 체계와 운영 및 관리 면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정교하고 잘 다듬어진 전통시대의 통신체계였다. 비록 전쟁이 없어서 오랜 평화가 계속되었던 시기에 운영이 다소 부실했던 점은 있으나, 끊임없이 점검하고 관리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도라산 봉수의 제3노선은 현실적으로 평양을 거쳐 개성으로 내려와 서울의 목멱산 봉수로 연결되고 있어 앞으로 남북이 긴장을 완화하고 상호 소통을 중시할 때 평양-개성-도라산-서울로 연결되는 봉수를 복원하여 필요시 시연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앞으로 남북 간에 평양이나 서울에서 의미 있는 상징적 행사를 거행할 시에 이 봉수를 활용하여 상호 연락함으로써 우리나라 봉수제도의 진면목을 이해하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리나라 봉수제도는 다른 국가의 그것들과 비교할 수 없이 잘 발달되고 체계화되었다. 그런 점에서라도 봉수 연구자들을 위해서, 또 봉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봉수박물관 하나 정도는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우리나라가 세계 최강의 IT 국가인 것도 과거 봉수제도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Ⅶ. 결어

    본고에서는 우선 현재 비무장지대 내에 있는 것으로 확인된 문화재 14종 35개소에 대하여 개괄적으로 언급하였고 그 다음으로 비무장지대의 35개 문화재 중 철원도성과 김화 병자호란 관련 유적인 전골총과 백수봉 일대의 전적지 정비사업이 남북 간 공동으로 조사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유적이라고 보았다.

    특히 철원도성의 발굴은 그 위치가 비무장지대 안에 놓여 있어 남북 공동조사가 필수적이라는 점과 이 유적의 공동발굴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일깨워줄 뿐만 아니라 중무장으로 위장한 비무장지대를 평화와 화합의 장으로 이끄는 상징적 의미가 가장 큰 것으로 보인다.

    철원도성 발굴에 앞서 명확히 인식해야 할 점은 발굴조사 대상이 도성의 성벽보다 태봉국의 새로운 도읍지, 즉 10세기 초 새로이 건설한 거대한 역사도시라는 점과, 그로 인해 장기적인 발굴조사가 불가피하며 5년 단위의 축차적 발굴조사가 바람직하다는 점, 남북 공동발굴이 필수적이지만 남과 북이 따로따로 발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하나의 발굴단을 만들어 공동조사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구체적 발굴단계에서는 ‘철원도성 공동발굴 합의서’를 우선 체결하여야 하며, 발굴기관으로서 가칭 ‘철원도성 공동발굴 및 복원 추진 협의회’라는 발굴 주도기관을 만들어 이 발굴기관 아래에 발굴, 지뢰 제거, 군사 협의, 남북 협력, 소요 예산 및 장비 지원, 자문 등의 기능이 통합되어야 할 것이다. 그 중에 지뢰 제거 문제는 전체적으로 선 지뢰 제거, 후 발굴조사의 개념으로 추진될 것이 아니라 발굴계획에 따라 발굴단의 통제를 받아 발굴과 지뢰 제거가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 외에도 도성 발굴은 남북의 많은 인원이 참여하게 되고 장기적 발굴기간, 소요 예산 및 장비 등이 상당한 규모를 요할 것이므로 필요시 특별법을 제정하여 공동발굴을 지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골총 공동발굴은 전몰자 대부분이 평안도 근왕군이라는 점과 지금까지 수백 년간 방치되어왔다는 점에서 공동발굴을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하며 발굴 후 제향 및 위령제단의 설치나 사적으로의 지정 등이 당연히 뒤따라야 할 것임을 제안했다. 그 외에 병자호란 김화전투 전적지의 정비사업도 우리 정부가 주도하되 필요시 북한 관계자의 초청 및 협의, 남북 학술 세미나 등의 행사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 정비사업에는 전적지 발굴 및 범위 설정, 전적지 현장 정비, 위령비 건설, 기념관 건립, 사적 지정, 유림대첩비의 이건 문제 등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병자호란 김화전투 전적지를 남북이 협력하여 대대적으로 정비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김화전투가 평안도 근왕군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으며 그 희생도 승리도 그들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비무장지대는 자연 생태의 보고 정도로 인식하고 몇 개의 지점을 지정하는 방식을 취했는데 이제 이를 지양하고 비무장지대가 세계자연유산과 세계문화유산의 자격을 갖추었으므로 비무장지대 전체를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이는 비무장지대가 전쟁유산으로서뿐만 아니라 세계문화유산의 6가지 조건에 상당수 일치하고 세계자연유산 4가지 조건에도 완벽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다만 비무장지대 중 남한 지역만 등재할 것이 아니라 북한 지역도 마땅히 포함되어야 하므로 그 범위·지정시기 등을 조율하기 위해 북한과 공동 추진을 위한 노력이 요망된다. 문화유산에는 탁월하고 오래된 문화유산도 중요하나 6·25전쟁 관련 전적지, 중무장한 GP, 군사분계선, 철조망 등도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세계인들이 비무장지대에 관심을 갖는 것은 6·25전쟁이 특이한 세계적 전쟁유산이며 그 전쟁유적의 총체적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문화재 중 6·25전쟁과 관련된 전적지·기념물 등을 등록문화재로 등재하는 방안도 필요할 것이다. 6·25전쟁은 3분의 2 기간이 바로 비무장지대에서 이루어진 교착전으로서 수많은 전적지와 전쟁기념물이 바로 비무장지대 안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비무장지대는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그 이전에 6·25전쟁 격전지인 백마고지, 저격능선, 베티고지 등과 현재 남아 있는 군사분계선, GP, 철조망, 판문점 등도 근대 문화재로 등록되어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해 문화재청과 국방부의 긴밀한 협조가 요망된다.

    비무장지대에 있는 2개의 봉수지 중 도라산 봉수는 그 위치나 남북관계로 보아 평양-개성-서울로 연결되는 비무장지대에 있는 만큼 내지 봉수 형태로 복원하고 북한도 송악의 국사봉 봉수를 복원하여 필요시 봉화로 남북을 연결하는 상징적 행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탁월했던 우리나라 봉수제도를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아울러 봉수 연구자 등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봉수박물관도 이 기회에 설립을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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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표 1 ]  비무장지대 내 문화재 현황
    비무장지대 내 문화재 현황
  • [ 그림 1 ]  비무장지대와 주변 지역(출처: 네이버).
    비무장지대와 주변 지역(출처: 네이버).
  • [ 표 2 ]  철원도성의 규모
    철원도성의 규모
  • [ 그림 2 ]  1918년 일제강점기 지도상의 궁예도성지.
    1918년 일제강점기 지도상의 궁예도성지.
  • [ 그림 3 ]  1993년 군사지도상의 궁예도성지.
    1993년 군사지도상의 궁예도성지.
  • [ 표 3 ]  추정 전골총 위치
    추정 전골총 위치
  • [ 사진 1 ]  추정 전골총(읍내리).
    추정 전골총(읍내리).
  • [ 사진 2 ]  충렬사 전경(김화).
    충렬사 전경(김화).
  • [ 사진 3 ]  금강산 전기철도 잔존 교량(김화).
    금강산 전기철도 잔존 교량(김화).
  • [ 사진 4 ]  동해북부선 잔존 교각.
    동해북부선 잔존 교각.
  • [ 사진 5 ]  성재산성 서남벽 모습.
    성재산성 서남벽 모습.
  • [ 사진 6 ]  중어성 남벽 모습.
    중어성 남벽 모습.
  • [ 사진 7 ]  파주 구 장단면사무소(출처: 문화재청).
    파주 구 장단면사무소(출처: 문화재청).
  • [ 사진 8 ]  파주 경의선 장단역 죽음의 다리(출처: 문화재청).
    파주 경의선 장단역 죽음의 다리(출처: 문화재청).
  • [ 사진 9 ]  구 판문점에서 진행된 휴전협정 모습(출처: 우리역사넷).
    구 판문점에서 진행된 휴전협정 모습(출처: 우리역사넷).
  • [ 표 4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기준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기준표
  • [ 표 5 ]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등재기준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등재기준표
  • [ 표 6 ]  한국의 세계유산 등재 목록
    한국의 세계유산 등재 목록
  • [ 표 7 ]  북한의 세계유산 목록
    북한의 세계유산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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