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ju Island is located at a strategic position, making it an important waypoint on the sea routes of East Asia. As a result, the island suffered many foreign invasions throughout history. Especially, it is widely known that Japanese pirates frequently invaded the island as the island was located on their way as they were sailing to China. Therefore, they built various defensive structures across the island. Fortresses, where a small number of defenders may fend off an enemy, were built in multiple places on the island. This was a strategy for the island to defend itself, as it was almost impossible to get prompt support in an emergency from the mainland due to the long distance.
Fortresses, or walled cities, were the center of politics, culture, and economy of many areas. Therefore, they are a valuable resource to study the history and geographical characteristics of a place. For this reason, studies on fortresses started quite early on. However, studies on such relics in Jeju Island began very late. The research on fortresses was launched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for most mainland areas. However, studies on the relics on Jeju Island began as late as the 1970s. This was because scholars did not understand the importance of the city walls and fortresses on Jeju Island, and there were no researchers who specialized in city walls or fortresses on the island, as well. As archeological research on Jeju Island began to gain momentum, the studies on city walls and fortresses saw progress; however, these studies are still of an elementary level.
In this study, the author summarized the status of studies on the city walls and fortress relics in Jeju Island and their preservation/maintenance status by era. According to the findings of this study, there were two Corean-era city wall/fortress relics and thirteen from the Chosun era., The researcher analyzed and presented the status of studies and the current condition of the relics. The status of attached structures was also documented.Furthermore, a short review of the maintenance work performed so far was provided. Also, the researcher mentioned the problems that accompanied the maintenance process of these relics, along with suggestions for improvement that could be referred to in future restoration/maintenance projects.
제주도는 북쪽으로는 한반도를 비롯하여 동쪽으로는 일본의 큐슈지방, 서쪽으로는 중국, 남쪽으로는 유구열도로 둘러싸인 동중국 해상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는 동아시아 해로의 중요한 중간 기착지가 된다. 그러므로 과거로부터 주변세력의 침입을 빈번하게 받아왔다. 고려시대에 원나라가 일본 정벌을 위한 전초기지로 삼았고, 조선시대에는 왜구가 자주 침입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도서지역인 제주도는 내륙과 떨어져 있어 적의 침입시 중앙정부로부터 신속한 지원을 받기가 어려운 관계로 스스로 방어하기 위한 자구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런 이유로 소수의 인원으로도 많은 적을 물리칠 수 있는 성곽을 쌓아 해안으로 들어오는 적을 상대하였고,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잦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제주도 곳곳에 성곽을 축조하여 효율적으로 대응하였다.
지금 제주도에 남아 있는 성곽은 고려시대에 해안을 둘러서 쌓은 환해장성과 항파두리 토성이고 대부분은 조선시대 들어와 축조된 것이다. 특히 조선 세종대에 들어 중앙정부는 잦은 왜구의 침입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도록 연해지역에 많은 읍성을 축성하도록 하였는데 제주도에도 비슷한 시기에 많은 방어시설이 갖춰졌다.
성곽은 군사적 목적을 갖고 요지에 설치한 시설물이지만, 평시에는 해당 지역을 관장하는 행정적 기능도 갖고 있었기에 성곽을 통해 지역의 정치·경제·문화 등 해당 지역의 역사 전반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성곽을 중심으로 행정구역이 구분되어져서 지방의 행정체제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따라서 지방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정치·경제·문화·군사의 거점 기능을 가지고 있는 성곽은 중요한 연구대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제주도의 성곽 유적에 대한 조사는 다른 지역에 비해 상당히 늦은 편에 속한다. 다른 지역의 성곽에 대한 조사는 고고학 분야의 조사와 비슷한 시기인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되었으나
따라서 본고에서는 지금까지 제주도 지역의 성곽 유적에 대해 이루어진 연구 현황과 보존·정비 현황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다. 또한 그동안 이루어진 성곽 정비의 문제점을 파악하여 개선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향후 성곽 유적 정비 및 복원에 필요한 기초자료를 제공하려 한다. 선배 동학들의 의견 제시와 비판이 있기를 바란다.
일제강점기인 1942년 조선총독부는 『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서 전국에 산재된 성곽 유적에 대한 소재지 및 규모 등에 대해 간략히 소개했다. 아마도 이 책의 간행을 위한 조사가 한국 성곽에 대한 가장 이른 시기의 조사가 아닌가 한다. 하지만 제주도 지역의 성곽에 대한 내용은 없다.
제주도 성곽에 대한 조사는 1970년대에 들어 「제주도 문화재 및 유적 종합조사보고서」(제주도 1973)를 간행하기 위해 처음 시작되었다. 그러나 후속 조사가 이어지지 않았다. 그 뒤 1986년부터 성곽 복원 사업이 실시되면서 고고학 조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이것이 제주도 성곽 유적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아닌가 한다. 이처럼 성곽 유적에 대한 조사는 다른 지역에 비해 늦게 시작되었고 그 수준도 부진을 면치 못하였는데 최근 들어 점차 성곽 유적에 대한 중요성이 제기되면서 조금씩 조사가 활기를 띠어가고 있다.
본장에서는 제주도 지역에 분포하는 성곽 유적 현황을 먼저 제시하고 그동안 이루어진 연구 현황을 살펴보겠다.
제주도의 성곽 유적 분포 현황에 대해서는 크게 시대별로 구분하여 살펴보겠다. 우선 고려시대의 유적으로는 제주도 해안을 둘러쌓아 해안으로 들어오는 외적을 방어하였던 환해장성과 여몽연합군에 항쟁하기 위해 삼별초에 의해 축성된 항파두리 토성이 있다. 그리고
이 외에도 제주도에는 축성 목적이 다른 성(城)이 존재하고 있다.
고려시대 축조된 제주도 성곽 유적 현황
<표 1>은 고려시대에 축조되어 현재까지 남아 있는 성곽 유적에 대한 현황 자료이다. 환해장성은 1270년(원종 11) 11월 중순 삼별초가 제주도를 장악할 때까지 제주도 해안 300여리에 급하게 쌓은 성곽이다.
항파두리 토성은 1271년(원종 12) 5월 진도에서 삼별초를 이끌고 탐라에 들어 온 김통정 장군이 귀일촌에 쌓은 토성이다. 삼별초는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여몽연합군에 맞서 항쟁하다가 결국 2년 후인 1273년(원종 14) 1만여명의 여몽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제주도의 조선시대 성곽 유적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 표와 같다.
<표 2>는 조선시대 제주도의 성곽 유적 현황으로, 성곽의 규모는 『濟州邑誌』의 기록을 기준으로 작성하였다.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중앙집권화의 일환으로 방어체계가 강화되면서 성곽 축조 및 증·개축 등의 정비가 시작 되었다. 특히 세종대에 이르러 하삼도(下三道)의 연해읍성 축성에 중점을 두었다. 이는 고려 말, 조선 초에 왜구의 잦은 침략으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방위시설을 확충하고 성내(城內) 주민들의 방위 능력 향상을 위한 조치였다.
조선시대 성곽 유적 현황
당시 제주도에 마련되었던 성곽과 관련해서는 다음에 제시하는 『耽羅巡歷圖』를 통해 그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그림 1>은 1702년(숙종 28) 4월 15일 당시 제주목사 이형상에 의해 제작된 『耽羅巡歷圖』 중 ‘한라장촉’으로, 당시 제주도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과 현실이 잘 반영된 지도이다. 지도에는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등 당시 3읍 관아의 위치와 9개소의 진성 위치를 구체적으로 표기해 놓았다. 그리고 중산간 지대에 설치되어 있었던 목마장과 그 경계를 표시했었던 돌담, 즉 잣성의 모습도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위 지도를 살펴보면 진성이 설치된 곳은 3읍 중간 중간 요충지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3읍 사이에 방어상 공백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진성을 축조하여 혹시 모를 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방어책으로 판단된다. 현재는 9개 진성의 성곽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유적이 일부 남아 있으나, 차귀진성과 모슬진성은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그 형태를 파악하기 어렵다.
앞서 살펴본 제주도의 성곽 유적들은 대부분 현재까지 제주도 곳곳에 잔존하고 있다. 따라서 유적에 대한 연구 환경은 비교적 좋은 편이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제주도의 성곽 유적에 대한 연구 성과는 다른 지역에 비해 낮은 수준이다. 실제 고려시대 유적인 항파두리 토성을 제외한 나머지 성곽 유적들에 대해서는 기초적인 고고학조사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 제주도의 성곽 유적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연구자의 부재와 성곽 유적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지금까지 제주도의 성곽 유적 연구 현황은 특정 유적에 치우치게 되었고 나머지 유적에 대한 연구 수준은 걸음마 단계라 표현을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그러면 현재까지 이루어진 연구 현황을 고고학적 연구와 학술적 연구로 나누어 살펴보고 연구 성과를 살펴 보겠다.
우선 고려시대 성곽 유적인 항파두리 토성과 관련해서는 그동안 여러 차례 고고학조사가 있어왔다. 1993년 제주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한 추정 남문지 긴급조사를 시작으로 토성 단면 확인조사, 발굴조사, 토성 지표조사, 토성 내부에 대한 2차 지표조사, 토성 내 시굴조사, 내성 건물지 발굴조사 등 지속적으로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현재도 내성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제주도 고고학조사 여건상 개별 유적에 대한 조사 성과로서는 비교적 많이 이루어진 곳이 항파두리 토성이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항파두리 토성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 현황과 성과는 다음에 제시하는 표를 참고할 수 있다.
<표 3>은 지금까지 이루어진 항파두리 토성에 대한 고고학조사 현황과 성과를 간략하게 정리한 것으로 조사 내용 및 결과는 최종보고서를 참고하여 요점만 제시하였다. 그리고 조사 결과 유물 및 유구가 확인되지 않은 경우에는 표에서 제외시켰다. 따라서 일부 누락된 조사 현황을 감안해도 항파두리 토성에 대한 고고학조사는 많이 이루어진 것이다.
<표 3>에서 알 수 있듯이 1993년도에 긴급조사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항파두리 토성 전반에 대한 고고학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조사 결과 토성의 규모 및 토성 내 존재했던 건물지와 배치 현황, 토성 내 여러 부속시설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출토되는 유물을 통해 삼별초 당시의 성 내 생활 모습 등을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전시 상황에서 긴장을 풀기 위해 당시 병사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누놀이판’의 출토가 이채롭다. 또한 삼별초 관련 유적인 강화도의 성곽 유적인 ‘강화중성’과 진도의 ‘용장성’과의 관계를 추정하는 데에도 이상의 고고학조사 결과가 많은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항파두리 토성 조사 현황
다음은 고려시대 성곽 유적에 대한 학술 연구 현황이다. 연구 현황을 조사한 결과 항파두리 토성에 대한 직접적인 연구는 거의 없다. 즉 토성의 축성 방법, 규모, 부속 시설 등에 대한 정밀한 연구는 충분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연구 현황을 확인해본 결과 그 대부분이 유적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특성상 삼별초와 관련된 연구이며 그 중에서도 대몽항쟁과 관련된 것이 중심이었다.
한편 같은 고려시대 성곽 유적인 환해장성에 대한 연구 현황은 부진한 편이다. 우선 현재까지도 지표조사 및 발굴조사 등의 고고학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진 바가 없다. 주로 문헌 기록 등에 의지해 환해장성의 축성 배경과 시기, 규모, 분포와 형태에 대한 연구가 있을 뿐이다.
다음은 제주도의 조선시대 성곽 유적에 대한 연구현황을 살펴보겠다. 조선시대 성곽 유적에 대한 연구 현황은 앞에서도 지적하였듯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매우 부진하다. 특히 체계적으로 정밀 지표조사를 먼저 실시한 후 성벽의 분포 현황을 파악하여 성곽 평면도를 작성하고 축조 방법, 축조 시기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져야 하나 아직까지 많은 성곽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성곽을 연구하는 연구자 입장에서는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조선시대의 성곽 유적에 대한 연구 현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 표와 같다. <표 4>는 제주도의 성곽 유적 중 조선시대에 축조된 13개소의 성곽에 대한 고고학조사와 학술조사 현황을 조사하여 간략하게 정리한 표이다.
<표 4>에는 개별 성곽마다 이루어졌던 연구 방법과 시기, 조사기관 등 개략적인 연구 현황을 알 수 있도록 작성하였다.
한편 제주도의 성곽과 관련한 연구사를 검토한 결과를 살펴보면 우선 제주도의 관방시설 전체에 대한 문헌 기록을 정리하고 성곽의 규모, 부속시설 현황, 축성 방법 등을 개괄적으로 살핀 것이 있다.
두 번째로는 제주도 읍성의 축조 시기, 규모, 축조 배경, 증·개축 시기, 부속시설 등을 다룬 연구가 있다.
조선시대의 제주도 성곽 유적 연구 현황29
다만 이 연구에서는 고고학적 검증보다는 주로 문헌에 나타나는 기록 중심으로 제주도의 읍성에 한하여 연구가 이루어졌다. 세 번째로는 조선시대 읍성 중 특히 도서지역에 위치한 읍성을 살펴보면서 제주도에 축조된 읍성들의 규모 및 축성 방법, 성곽 부속시설물 등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본 연구가 있다.
마지막으로 조선시대 제주목사 이형상이 제주도 곳곳을 순회한 모습을 기록한 화첩인 『耽羅巡歷圖』를 통해 제주도의 성곽 유적의 건축 특성과 읍성의 규모, 성문 위치와 건물 공간 구조를 고찰한 연구가 있으며,
이 외에도 제주도의 성곽에 대한 다양한 연구
최근 제주도 지역은 성곽을 정비하거나 복원하는 사례가 점차 늘어가고 있는 추세다. 이는 전국적인 추세로도 볼 수 있다. 다만 성곽 보존을 위한 복원·정비 과정이 성급하게 이루어지면서 원형을 상실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제주도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나타나는 부작용이기도 하다. 따라서 본장에서는 제주도의 성곽 유적에 대한 정비 현황을 살펴보고 이에 대한 부작용의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향후 보존·정비에 대한 정책적 제언을 하는 것으로 맺음말을 대신하도록 하겠다.
제주도 성곽 유적의 보존을 위한 정비는 그동안 여러 차례 이루어져왔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성곽 유적 전체에 대해 이루어지기보다는 특정 유적에 한해 보존·정비가 이루어져서 전체적으로 성곽 유적의 보존 상태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이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보호를 받는 성곽들에 한해 보존·정비가 이루어지는 관계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다보니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성곽 유적들은 정비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급변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개발 등 외적 요인으로 인하여 훼손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그러면 지금까지 이루어진 제주도 성곽 유적의 정비 현황 중 대표적인 사례를 제시하여 살펴보겠다. 우선 고려시대 축조된 항파두리 토성의 경우 1993년 긴급조사를 시작으로 여러 차례의 고고학조사와 학술조사가 이루어지면서 보존·정비가 이루어졌다. 특히 토성은 70% 이상 복원이 이루어진 상태이며 발굴조사 등 고고학조사도 장기간에 걸쳐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동 시기 성곽 유적인 환해장성의 경우에는 보존을 위한 정비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고고학조사는 물론 제대로 된 성곽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부 환해장성들은 인위적 요인에 의해 그 원형이 멸실된 곳도 있다. 이는 환해장성 전체에 대해 문화재 지정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지역별로 위치한 10개소에 대해서만 부분적으로 문화재 지정을 한 까닭에 지정되지 않은 곳은 제도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앞서 언급했지만 환해장성은 고려시대에 처음 축조되었으나 조선시대까지 수차례 개보수를 하며 해안을 방어하였던 성곽으로, 제주도 해안 전체를 둘러쌓았던 성곽인데 성벽이 남아 있는 일부 지역에 한해서만 문화재로 지정을 하였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힘들다. 남아 있는 성벽을 포함하여 고고학조사 및 문헌 기록 등을 참고하여 전체적으로 지정을 하였다면 지금과 같이 멸실되거나 훼손되는 사례는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정된 환해장성 역시 성벽 복원 등이 이루어지다가 지금은 거의 중단되어 있는 상태이다. 복원 과정에서 성벽 축조 재료 및 축성 방법 등이 환해장성의 원형을 변질시키고 있다는 지적을 해결하지 못하자 복원사업이 중단되고 말았다.
다음은 읍성 및 9개소의 진성 유적에 대한 보전·정비 현황이다. 제주에 축조된 읍성과 진성은 모두 현무암질의 돌로 쌓았다. 현무암질의 돌은 제주 전역에 고르게 분포하고 있어 원거리에 별도의 채석장을 지정하여 재료를 공급하기보다는 인근에서 쉽게 채집 가능했다. 그런 까닭에 채석과 운반에 들어가는 공력을 덜 수 있었다. 또한 물 빠짐이 좋기 때문에 집중 호우 시 성벽 붕괴 등의 피해에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따라서 잔존하는 성벽을 살펴보면 현무암질의 석재를 다듬어 쌓은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의 제주도 성곽 유적 보존·정비 현황은 다음의 표와 같다.
<표 5>는 조선시대의 제주도 성곽 유적에 대한 보존·정비 현황을 간략하게 정리한 자료이다. 표를 통해 성벽 복원 현황과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성벽 잔존 구간이 남아 있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성곽 부대시설인 치(雉), 성문(城門), 옹성(甕城) 등을 설치하여 성벽의 취약점을 보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잔존 구간이 남아 있음에도 아직까지 이에 대한 체계적인 고고학조사를 통한 보존·정비가 이루어지지 않은 점은 아쉬움을 남긴다.
성곽 유적 정비의 기준은 일반적으로 유적이 활용되었던 시점을 기준으로 정비함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그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 문헌의 기록을 바탕으로 복원 시점을 정해야 한다. 가령 제주읍성의 예를 들어보면 증·개축 시점에 대한 기록이 문헌에 명확하게 남아 있기 때문에 기록을 바탕으로 성곽 규모를 검토하고 고고학조사를 통해 성벽의 위치를 확인하여 정비해야 한다. 즉 1차적인 정비 목표를 설정할 때 우선적으로 문헌조사를 바탕으로 고고학 조사 범위를 정하고 조사 결과에 따라 성곽에 대한 종합정비의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곽의 정비 복원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문화재 복원이라는 미명하에 정비 계획과 고고학조사 없이 바로 성곽을 복원하다가 중단되는 일도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앞에서 지적한 환해장성의 사례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환해장성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성곽 위치의 오류 때문에 발생한 문제인데, 우선 다음 제시하는 사진과 그림을 통해 참고할 수 있다.
[표 5] 조선시대의 제주도 성곽 유적 보존·정비 현황
조선시대의 제주도 성곽 유적 보존·정비 현황
<사진 1>은 사전에 고고학조사를 하지 않고 환해장성을 복원하기 위해 계획된 현장 사진이다. 당초 계획에는 <사진 1>의 붉은 실선으로 표시한 기존 석축을 해체하고 줄눈을 맞추며 성곽을 쌓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사진 2>를 보면 환해장성의 지대석들이 기존 석축 전면에서 발굴되었다. 이런 이유로 성곽 복원 위치가 변경되었는데 이는 제시된 <그림 2>과 <그림 3>을 통해 성곽 진행 방향이 변경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고고학조사 과정 없이 복원에 급급하여 바로 복원이 이루어지다 보니 발생한 것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정밀 지표조사를 통해 성곽에 대한 평면도를 작성하고 축성 방법 등을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조사 과정에서 전문기관의 자문 등을 통해 획득한 내용과 문헌의 기록을 비교 연구하는 과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성곽 복원의 궁극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는 원형 복원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성곽 복원 시 사용하는 성돌과 축성 방법에 대한 문제다. 성곽이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현재 복원되고 있는 성곽들은 기존 성곽과 매우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복원 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이다. 복원이라고 하기보다는 새로 쌓았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다음의 사진을 통해 그 심각성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 3>은 별방진성 서측 잔존 성곽이며 <사진 4>는 복원된 동측 성곽이다. 사진에 나오는 성곽은 동일한 별방진성임에도 상당히 이질감이 느껴진다. 그 이유는 기존 구간의 성벽은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성돌의 거친 면만 다듬은 후 협축 형태로 불규칙하게 쌓았는데 복원한 구간의 성벽은 인위적으로 깬 돌을 재료로 하여 정형화되게 쌓았다. 그런 이유로 동일한 성곽임에도 이질감이 많이 느껴지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제주도의 석성(石城)은 성곽 축성 시 별도의 채석장을 두지 않고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석재를 다듬어 성돌로 사용하였으며 대부분 협축 형태로 축조하였다. 그리고 복원 과정에서 성벽 구조와 규모를 고려하지 않은 채 쌓아 올려 잘못된 복원이라는 지적이 있다. 이런 이유로 역시 진성 정비 복원도 대부분 중단되었고 태풍이나 폭풍에 의해 훼손된 성벽을 일부 보수하는 선에서만 현재 보존·정비가 이루어지고 있다.
제주도에 축조된 성곽들은 다른 지역과 달리 산성은 거의 존재하지 않고 대부분 읍성 또는 진성으로 이루어져있다. 이는 제주도의 지리적 여건상 해안으로 침입하지 않고서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해안으로부터 들어오는 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축성 입지를 해안 또는 해안과 인접한 평탄한 대지로 잡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현대사회로 접어들면서 성곽이 위치했던 입지는 교통의 편리성과 인구 이동이 용이한 관계로 도시화로 접어들기 위한 개발의 표적이 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성곽 유적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는 다면 제주도 독자적인 문화가 파괴되거나 변질되는 것은 시간문제인 것이다. 나아가 성곽은 성문을 비롯한 성 내외의 다양한 부속시설과 건물까지 포함하는 개념이기에 종합적인 시설물로 폭 넓게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