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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에드워드 본드(Edward Bond) 작품에서 드러나는 ‘그로테스크’의 미학적 의미* The aesthetic meaning of the ‘grotesque’ in Edward Bond's work
  • 비영리 CC BY-NC
ABSTRACT
에드워드 본드(Edward Bond) 작품에서 드러나는 ‘그로테스크’의 미학적 의미*

Influenced by post-modernism, Korean theatrical circles have formed a new paradigm through various interpretations of traditional plays and parodies since the 1990s. With discussions here, this study looks into the concept of the ‘grotesque’ in Edward Bond's work, as a new aesthetic writing, providing clues to the ‘form of sensuous experience’ recipients (as spectators) have, the ‘ways of visibility art reveals’ and the ‘system of interpretation’. Any discussion on the ‘grotesque’ has its limit in that it addresses comic characteristics and defines its concept as something horrific and bizarre, often from a literary perspective.

In fact ‘grotesque’, “is around the consciousness of the perceived and unperceived, the sensed and un-sensed”, raising questions about the way we systemize the world and the way we perceive pre-existing experience in a continuum. ‘The image grotesque’, which is twisted and modified in connection with the un-combinable, is non-linguistic and non-intermediate, de-familiarizing previous things in a clash of contradictory principles, lending ‘an experience of dislocation’, that is, a foreign, extraordinary emotional experience. It is none other than a moment of neutralization, and theater at this moment is like a museum where the heterogeneous exist together where a commitment for free community is to be achieved.

This study examines ‘grotesque’ appearing in Au petit matin, Si ce n’est toi, and Lear by Edward Bond(1934-), an English naturalist playwright of the late 20th century. In a process of analyzing his work, it will extend the horizon of understanding of his theatrical pieces that have so far been addressed from a pre-existing Brechtian perspective. The concept of ‘grotesque’ this study deals with provides ‘an experience of dislocation’ through the unconscious inhuman ‘grotesque’, and ‘grotesque’ existing between reality and unreality. This study aims to extend the horizon of contemporary theater and arrange a foundation to shed new light on the concept of ‘grotesque’ by examining Bond’s theatrical techniques.

KEYWORD
에드워드 본드 , 그로테스크 , 정치적 글쓰기 , 탈구경험 , 장 프랑수아 리요타르
  • 1. 들어가며

    후기구조주의와 함께 태동한 포스트모더니즘은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함께 형이상학의 극복이라는 과제를 이어받으며, 비형이상학적 사유에 대한 질문, 혹은 비형이상학적 삶의 가능성에 대해 질문한다. 이런 물음은 자연스럽게 형이상학의 본성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지며, 형이상학이 지니고 있는 이분법적 사유의 위계적 폭력성을 폭로하며 탈중심론으로서 기존의 형이상학을 해체하고자 한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자신의 해체전략을 ‘탈구성(la déconstruction)’으로 표기했다. 하지만 이 탈구성으로서의 해체는 단순 파괴가 아니라, 재구성의 작업과 병행하는 작업임을 뜻한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세계를 체계화하는 방식과 기존의 경험들을 연속체로서 인식하는 기존체계의 방법에 의문을 제기하는 그로테스크는 현대 극작술에서 그 의미를 지니며 소환되어진다. 먼저, “일그러진 형상(la déformation)”의 비유를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라고 불렀던 칸트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현실을 파괴하고 있을 수 없는 것을 궁리해내며 서로 이질적인 것을 끼워 맞추는” 그로테스크는 “기존의 것을 낯설게 만드는”1) 힘을 지닌다. 그로테스크가 잘 알려진 낯선 것이라는 점은 그로테스크가 “비현실성의 영역에 함몰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 안에서 갑자기 마주치게 되는 모순적 상황이란 점”2)이다. 그리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가 제공하는 감각적 경험은 기존의 이성적 사유에 대한 전도로서 그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반합리적(l'anti-rationalité)이다. 이 단계에서 수용자 ‘주체의 경험’에 의해 환기되는 효과로서 그로테스크는 합리적으로 보이는 세계와 이성적으로 잘 체계화되었다고 여겨지는 세계에 대해 회의하게 하며 기존 세계의 방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그래서 해석체제의 반향을 일으키는 그로테스크가 기존 권력체제의 억압과 횡포에 맞서 저항적인 개념으로 ‘반성적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탈구’의 경험을, 즉 이질적이고 예외적인 감각적 경험을 가능하게 하면서 그로테스크의 미학적 의미를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현실적 사회 상태에 대한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이기도 하다.

    사실, 그로테스크한 예술 작품들은 1960년대 이후 똥오줌을 뭉개고 있는 퍼포먼스, 자신의 몸을 끊임없이 성형해가는 퍼포먼스, 잘려진 신체와 보기에도 오싹한 사진들을 통해 이미 부각되어졌다. 이들 예술작품들을 바라보면서 형성되는 고통과 공포는 근대 미학에서 논의되었던 불쾌가 쾌로 변화하는 과정중에 고양되어지면서 환기되는 숭고의 개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에게 ‘탈구’의 경험을 가능하게 하며, 사람들에게 금지된 의미를 떠올리게 하여 이 금기의 주체인 권력에 도전하게 한다. 그리고 이 순간 쾌가 발생한다. 이때 발생하는 쾌에 대해 장 프랑수와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 1924~1998)는 아방가르드 예술의 “재현불가능한 것의 부정적 재현”으로 언급하며 ‘숭고’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그의 숭고는 더 이상 근대적 개념의 초월적인 것으로 의 고양의 문제가 아니라 “강력한 긴장(l‘intensification)의 문제”로서 언급된다. 리오타르의 이 개념은 그로테스크한 예술이 초대하는 예외적인 경험의 순간으로서의 감각적 경험을 그로테스크와 연결시키는 지점이다. 이런 관점하에서 그로테스크 개념은 총체성 담론의 억압과 횡포에 맞서 인간이 진정으로 어떤 존재인지를 ‘증언’하는 저항적인 것으로, 자본주의 논리 하에 형성된 실용성의 논리와 함께 점점 기계화되어가는 인간에 대한 반성적 사유’를 촉진한다. 그래서 그로테스크는 현대의 후기자본주의 논리에 의해 초래된 물화되고 기계화되어가는 인간에 대처하기 위한 일종의 해독제와도 같은 역할을 가능하게 한다. 그로테스크에 의한 이 감각적 경험은 분리되지 않은 예술과 삶의 경험이 된다.

    본 연구는, 이 그로테스크 개념과 함께, 20세기 후반 영국의 ‘자연주의’ 작가인 에드워드 본드(Edward Bond, 1934~ )의 작품 <새벽에 Au petit matin>, <만약 네가 아니면, Si ce n'est toi>, <리어, Lear>에 나타난 그로테스크를 고찰하고자 한다. 사실 본드는 극작가이자, 이론가이며 연출가이고 또한 번역자이기도 할 만큼 다양한 재능을 가진 작가로서 1969년에 런던의 로얄커트에서 ≪본드시즌 Saison Bond≫이라 하여 한 시즌 연극을 그에게 헌사 할 만큼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 작가이다. 그러나 상당히 많은 번역극이 쏟아지고 있는 우리 연극계에서 불행히도 그의 작품은 『리어』한권이 번역되어 있을 뿐 아니라, 작가 에드워드 본드에 대해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물론 영문학과의 논문이나 현대영미드라마학회와 셰익스피어 학회에 간혹 몇몇 논문들이 존재하지만, 대부분이 그의 희곡의 폭력성(김미량, 「분노와 제의의 비극」, 김영덕의 「새로운 역사그리기:전쟁극에 나타난 에드워드 본드의 폭력의 극화」, 박동률의 석사학위논문 『Edward Bond 희곡의 폭력성』, 이은희의 석사학위논문, 『Edward Bond의 작품에 나타난 폭력의 문제』)을 다루거나 작가가 그토록 싫어하는 브레히트적 개념 하에서 연구(김미량의 박사학위논문, 『Edward Bond 의 희곡연구』, 「에드워드 본드의 Restoration 연구:서사극적 특성을 중심으로」)만이 있을 뿐이다.

    물론, 우리 연극계에서도 2008년에 본드의 작품, <리어>가 박재완 연출에 의해 원더스페이스 세모극장에서 공연되어지면서 그의 이름이 조금 알려지긴 했지만, 실제로 이 작품은 본드 극작술의 자연주의적 의미를 알리기보다 소개의 차원에 머물렀을 뿐 아니라, 공연 역시 작가 본드가 자신의 작품에 대한 브레히트적 해석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었음에도, 브레히트적 관점에서 연출된 작품이었다. 사실, 본드의 작품은 유럽에서도 과장된 작위성과 폭력성의 관점에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런 과정에서 다비드 레스코(David Lescot, 1971~ )는 본드의 <전쟁과 평화의 파라독스에 관한 세 작품들 les Pièces de guerre et le paradox de la paix>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을 『전쟁의 드라마투르기, Dramaturgies de la Guerre』로 출판하였는데, 그는 본드의 작품을 단순히 브레히트적 용어의 게스투스와의 연관성 안에서 ‘agit-prop(정치적 동요와 선동)’의 관점에서 편협적으로 다루었다. 그래서 레스코는 본드의 다른 작품들을 이해하는데 자가당착의 혼란을 가지기도 했다. 또한 프랑스의 연극전문잡지인 테아트르 퓌블릭(Théâtre /Public)의 111호가 본드에 헌정되어지면서 그의 극작술에 대한 다양한 소논문들이 실렸지만, 유령에 대한 약간의 언급들을 제외하고, 그로테스크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이루어진 논의는 없었다. 사실, 작가 본드에 대한 대부분의 논문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서사극적 작용과 그리고 폭력성의 문제를 형상화하는데 그치고 있다. 하지만, 다행히 알랭 플랑송(Alain Flançon, 1945~ )같은 연출가는 그의 희곡작품을 브레히트적 관점에서 연출하지 않아 본드가 가장 신뢰하는 프랑스 연출가 중의 한명이며 본드와 가장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게다가 본드가 프랑스에서 연극스튜디오(Auteur associé au Théâtre-Studio d'Alfortville)에 직접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자신의 작품이 자신의 나라 영국보다 프랑스에서 더 잘 이해되어짐을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유럽에서조차 그의 작품해석이 편협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그의 작품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그의 작품에서 그로테스크 개념과 연관지어 구체적으로 다룬 논문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본 연구는 먼저 기존의 브레히트적 관점으로만 다루어진 본드의 희곡작품을 그로테스크의 개념으로 살펴봄으로써 그의 작품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확장하고자하는 목적을 지닌다. 게다가, 본 연구에서 다루어질 그로테스크 개념은 감각적 경험에 의한 ‘탈구의 경험’을 제공하면서,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는 ‘미학적 글쓰기’를 제공하여 현대연극의 지평을 확장시키는 그로테스크3)를 새롭게 재조명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자 한다.

    1)Wolfgang Kayser, The Grotesque in art and Litterature, trans., Ulrich Weisstein, Indiana University Press, 1963, 이지혜 역,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아모르문디, 2011, 268쪽.  2)전영운, 류신, 「그로테스크의 형식· 내용· 수용–Wilfgang Kayser와 Arnold Heidsieck의 이론을 중심으로」, 『인문학연구』 31집, 중앙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1, 153쪽.  3)그로테스크에 대한 연구는 문학적 분야, 특히 독문학에서 프리드리히 뒤렌마트(Friedrich Dürrenmat, 1921〜1990), 빌헤름 라베(Wilhelm Raabe, 1831〜1910)와 오덴 폰 호르바트(Ödön von Horváth, 1901〜1938)에 대한 논의와 한국연극연출가들, 오태석(1940〜 ), 박근형(1963〜 )의 작품들에서 약간의 논의가 있었지만, 이들 논의가 그로테스크를 희극적 특성이나 끔찍하고 괴기한 것이라는 문학적인 관점에서만 다룬 점에서 그 한계를 지닌다. 본 연구를 통해 수행하고자하는 그로테스크의 개념은 이 용어의 영역을 단순히 문학적인 개념을 너머 미학적 개념으로 더욱 확장시키는 목표를 지닌다.

    2. 그로테스크 용어의 미학적 의미

       2.1. 용어의 역사

    본 연구의 중심개념인 그로테스크는 로마문화의 초기 기독교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예술양식으로, 당시 하나의 그림 속에 인간적인 요소와 동식물적 요소들이 함께 얽혀 결합된 양식이 발전된 것이다.4) 그로테스크의 이해를 촉진하기 위해 로마문화의 초기 기독교 시대의 그로테스크의 의미와 16~7세기에 이르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그로테스크 용어의 변화과정5)을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그로테스크는 그로타(grotta)라는 이탈리아어에서 유래하였는데, 그로타는 ‘동굴’과 ‘발견’의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 단어의 형용사형인 그로테스코(grottesco)와 명사형인 그로테스카(la grottesca)는 15세기 말 로마를 위시해 이탈리아 곳곳에서 발굴된, 이전에는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특정한 고대장식미술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로마문화의 초기 기독교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그로테스크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섞여있는 형식으로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용어는 16세기에 몽테뉴(Michel de Montaigne, 1533〜1592)에 의해 비미술분야로까지 확장되어 발전한다. 그는 자신의 에세이를 가리켜 “그로테스크하고 괴이한 것들, 잡다한 형상에서 따온 조각들을 정확한 형태도 없이 (…) 제멋대로 짜깁기해 놓은 이것은 무엇인가?”6)라고 말하면서 이 용어를 문학영역으로 확장시켰다. 또한 이 시기에 그로테스크 용어는, 패러디와 풍자적 글쓰기를 하던 프랑수아 라블레(François Rabelais, 1483/1494~1553)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Gargantua et Pantagruel』에서 그로테스크를 주로 신체부위를 언급하는데 사용되면서 문학으로 확대되었다. 그런데 1694년 이후 편찬된 『프랑스 아카데미 사전』에서는 그로테스크가 “표상적으로 우스꽝스럽고(ridicule) 기이하며 괴상한 것을 지칭”한다고 정의되면서, 섬뜩함보다 가벼운 웃음을 자아내는 우스꽝스럽고 기이하며 익살스러운(burlesque) 의미를 드러내게 된다.7) 그리고 18세기에 와서 그로테스크는 영국과 독일의 경우, 특히 18세기 미학가들에 의해 ‘캐리커츄(carricature)'와 관련되어 주로 논의되었다.

       2.2. 미학적 의미로의 확장

    그로테스크가 미학적 의미를 가지기 시작하는 시기는 19세기 프랑스의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1885)에 와서이다. 미학적 분석과 비평적 평가의 대상이 된 어원과 발전과정을 위고의 「크롬웰서문 Préface de Cromwell」에서 살펴보면, 그로테스크는 총체적이고 광범위한 고찰의 주요 주제로 등장한다. 이 글에서 위고는 그로테스크를 낭만주의 문학을 위해 쓰여진 것으로, 낭만주의 이전의 예술과 대립한 예술양식으로 다루고 있다. “고대사회에서는 보지 못했던 낯설은 원칙이었으며 문학에 도입된 새로운 유형이 있다. (…) 그 유형이 바로 그로테스크”라고 언급하면서, 위고는 그로테스크를 고대 이래의 예술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차별화된 양식으로 간주한다. 그는 아름답고 숭고한 것의 옹색한 한계에 비해볼 때 그로테스크의 양상으로서 드러나는 희극적인 것, 무시무시한 것, 그리고 ‘추한 것’이 갖는 무한한 다양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추한 것을 모방의 유형으로 삼고 그로테스크를 예술의 한 요소”8)로 여겼다. 게다가, 위고는 그로테스크를 단순히 공상적인 것과 관련시키지 않고 사실적인 것과 관련시킴으로써 단순히 예술적 범주가 아니라, 우리 주변세계에 존재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바로 이점에서, 독일의 비평가 볼프강 카이저(Wolfgang Kayser, 1906~1960)는 『예술과 문학에서의 그로테스크』에서 그로테스크를 단순히 수사학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하나의 미학체계로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크리스토프 빌란트(Christoph M. Wieland)는 자연과의 유사성이라는 맥락에서의 모든 사실성이 차단된 것이야말로 참된 그로테스크라고 말했으나, 카이저는 관찰자가 느끼는 충격을 현실세계의 파괴에 당면해 발밑이 아득해지는 듯한 충격과 섬뜩함,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당혹감으로 해석할 때, 그로테스크는 인간세계와 은밀한 관계를 맺는 동시에 일정한 ‘사실성’을 부여받는다는 점을 오히려 강조한다. 그래서 그로테스크가 조소와 더불어 섬뜩함을 유발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에게 친숙한, 고정된 질서에 따라 움직이던 세계가 여기서 무시무시한 힘에 의해 ‘생경한’ 것으로 변하고 혼란에 휩싸이며 모든 질서 역시 무너져버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단순히 부조화와 희극적이 것의 조잡한 형태로 이해되었던 그로테스크는 1957년 카이저가 『예술과 문학에서의 그로테스크, The Grotesque in Art and Litterature』를 출간하면서, 주목할 만한 미학적 분석과 비평적 평가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필립 톰슨(Philip Thomson)에 의하면, 그로테스크의 중요한 진전은 기존의 단순한 부조화나 희극적인 형태로부터, “근본적으로 양면적인 어떤 것으로, 대립적인 것들의 격렬한 충돌로, 그리하여 적어도 몇몇 형태에서는 존재의 근원적 문제적 성격에 대한 적절한 표현”9)으로 여겨지게 된 점이다.

    결국, 미학적 분석과 비평적 평가의 대상이 된 어원과 발전과정을 빅토르 위고의 「크롬웰서문」, 그리고 이 영향하에서 볼프강 카이저가 그로테스크를 단순히 수사학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하나의 미학체계로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함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미하일 바흐친(Mikhaïl Bakhtine, 1895~1975)은 카이저가 낭만주의 그로테스크를 근대적 그로테스크의 프리즘을 통해 왜곡하여 이해하고 평가함으로써 그로테스크의 민중적 전통을 거세하는 방향으로 논의가 전개되었다고 비판한다.10) 하지만 『그로테스크, Grotesque』 저자 톰슨은 바흐친의 그로테스크에서 미학적 거리가 소멸되어진다는 점에서 바흐친에게 동조하기보다 카이저의 견해에 동조하면서, 그로테스크의 문학적 관점에서 이 용어의 정의와 그 기능으로서 심리적 효과와 유희와 무목적성의 기능에 관심을 가진다.

    이러한 그로테스크의 의미는 20세기 들어와 포스트모더니즘과 함께 재부상 된다. 레미 아스트뤽(Rémi Astruc)은 자신의 저서, 『그로테스크적 현기증, Vertige grotesque』과 『20세기 소설에서 그로테스크의 새로움, Le Renouveau du grotesque dans le roman du XXe siècle』을 통해 그로테스크가 지니는 미학적 윤리를 드러낸다. 아스트뤽은 그로테스크를 통해 드러나는 현기증, 즉 시인 보들레르가 영국 판토마임을 보며 느꼈던 현기증과 같은 수용자의 충격(choc)의 미학적 의미를 강조한다. 아스트뤽은 마치 돋보기가 하나의 대상을 변형하면서 더욱 정확하게 드러내는 것처럼, 그로테스크한 변형이 오히려 현실을 더 잘 표현해낸다고 말한다.11) 아스트뤽에 의하면, 그로테스크는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현실을 혼란에 빠뜨리며, 현 세계를 바라보는 비전을 변형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로테스크는 문학과 예술의 영역을 넘어 사회, 정치적 그리고 윤리적 영역으로까지 이행된다. 그로테스크는 혼종성을 통해 재현의 질서를 전복하는 것처럼, 현실 세계의 질서를 전복하며 단순히 예술적 기법만이 아니라 참된 정치적, 미학적 도구로서 작동된다.

    이런 관점하에서, 어느 것으로도 확정지을 수 없이 모호하거나 양가적인 그로테스크의 이미지는 평온과 절제 속에서 경험되기보다는 “고통, 발작, 기절”을 수반하며 광기에 이를 때까지 마음을 “비틀고, 쪼개며, 깊이 베어”낸다.12) 이러한 고통을 댓가로 그로테스크는 균형과 비례의 이상적인, 혹은 사실적인 이미지가 줄 수 없는 통찰을 선사한다. 그래서 감각적 경험을 제공하는 그로테스크적 형상화는 관객 스스로 자신이 속한 사회의 규범들과 지배적 이데올로기들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그로테스크한 신체로 변형된 이미지는 이중적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데, 격화된 개성의 의미이거나, 사회적 규칙에 대한 위반이다. 이 둘 모두 ‘전복(la subversion)’의 메카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그로테스크는 감각적 경험을 통해, 기존의 합리화된 이성 중심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가져오는 현실의 불합리한 많은 현상들, 정치권력의 폭력 등을 그려내며 이들의 본질적인 문제를 성찰하고 재고하게 한다. 그래서 전복으로서 그로테스크의 기능은 기존에 정치 사회적 논리에 의해 배제되거나 잊혀졌었던 것들을 새로이 보며 그 잠재적인 가치성을 열게 하는 매개로서 작용하게 될 것임이라는 점을 본드의 작품을 통해 고찰하고자 한다.

    4)Philip Thomson, 김영무 역, 『그로테스크』, 서울대학교출판부, 1986, 15쪽.  5)그로테스크 용어와 역사적 변화과정을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면, Geoffrey Galt Harpahm, On the grotesque의 1장과 필립 톰슨(philip Thomson)의 『그로테스크』 1장 그리고 볼프강 카이저(Wolfgang Kayser)의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의 1장과 2장을 참고하기 바란다.  6)Wolfgang Kayser, The Grotesque in art and Litterature, trans., Ulrich Weisstein, Indiana University Press, 1963, p. 51  7)Wolfgang Kayser, ibid., pp. 26〜27.  8)Victor Hugo, “Préface de Cromwell”, 1827, Classique Larousse, pp. 23〜24.  9)Philip Thomson, 앞의 책 14쪽.  10)Mikhaïl Bakhtine, Rabelais and his world, trans., Helene Iswolsky, Cambridge (Mass.), 1968, 이덕형, 최건형 공역, 『프랑수와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 아카넷, 2004, 86〜87쪽.  11)Rémi Astruc, Vertiges Grotesque, Honoré Champion, 2012, p. 55.  12)ffrey Galt Harpahm, On the grotesque, The Davies Group Publishers, 1982, p. 17.

    3. 에드워드 본드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그로테스크

    20세기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리우는 에드워드 본드는 1934년에 태어나 그의 십대에 이차 세계대전이라는 끔찍한 전쟁을 겪었다. 이 전쟁으로 인해 그가 가지게 된 많은 후유증들은, 그 스스로 자신이 “아우슈비츠의 시민이며 히로시마의 시민이다”13)라고까지 말하게 한다. 본드의 작품, <리어> 서문에서, “폭력을 말할 수밖에 없는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이 시대와 이 사회의 폭력을 말하지 않는 것은 비도덕적”14)이라고 작가는 밝히고 있다. 그래서 그는 동시대의 사회에서 자행되는 무수한 폭력을 통해,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무지를 드러내 보여주고자 한다. 이를 위해 그가 차용한 글쓰기는 그의 말을 빌어 표현하면, 자신은 다만 “침묵하고 있는 이들의 말을 단순히 받아쓰고” 있을 뿐이며 자신의 작품에서의 사건들은 사실적(véridique)이라고 한다. 그의 글쓰기는 현실의 불합리한 모습을 그로테스크하게 그려내면서 독자/관객에게 현실적인 상황의 비현실적인 모습을 생경하게 보여준다. 카이저에 의하면, 그로테스크는 “생경해진 세계이다.”15) 생경해진 세계란 우리가 익숙하고 편안하게 느끼던 것이 별안간 낯설고 섬뜩하게 다가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로테스크는 우리가 세계를 체계화하는 방식과 기존의 경험들을 연속체로서 인식하는 기존체계의 방법에 의문을 제기한다. “인식된 것과 인식되지 않은 것, 감지된 것과 감지되지 않은 것 사이라는 의식의 주변에 있는”16) 그로테스크는 비언어적이고 비매개적인 것으로서 모순적 원칙들이 충돌하며 이전의 것들을 낯설게 하면서 이질적이고 예외적인 감각적 경험을 통해 ‘탈구의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3.1. ‘비인간적’ 모습의 그로테스크

    본드의 작품, <새벽에>는 권력을 매개로 한 비정상적이고 뒤틀린 혼란한 사회와 시대를 그로테스크하게 그려진다. 이 작품에서 빅토리아의 남편인 알베르는 여왕 빅토리아의 권력을 뺏기 위해 제일 수상 디스라엘리와 공모하며 혁명을 일으켜 그녀를 죽이려하고, 빅토리아는 끊임없는 절대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자신의 권력체제를 전복시키고자하는 자신의 남편 알베르를 죽이기 위해 아들, 조오지의 약혼자인 플로랑스를 유혹한다. 이렇게 작품은 음모와 실패한 혁명, 죽었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유령들의 카니벌적 천국, 샴쌍둥이로 태어난 아르튀르와 조오지 왕자의 기형적 모습 등으로 악몽의 연속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샴쌍둥이인 두 아들, 아르튀르와 조오지를 통해 이들로 대변되는 두 대립적인 권력의 격렬한 충돌과 랜과 조이스를 통해 비틀어지고 왜곡된 정치·사회적 폭력을 그로테스크하게 묘사해낸다.

    인용문에서 보여주듯이, 플로랑스와 대화 동안 끊임없이 파리를 죽이는 빅토리아 여왕의 기괴한 행동이 묘사된다. 파리를 계속적으로 잡아죽이고, 밟아죽이며 그리고 죽인 파리의 숫자까지 세는 빅토리아의 모습은 그녀의 공격적 성향을 가시화할 뿐 아니라, 파리가 들끓을 정도로 이미 부패해져 섞어가는 나라의 상황을 그로테스크하게 가시화시킨다. 게다가, 빅토리아가 자신의 아들, 조오지의 약혼녀인 플로랑스를 유혹하면서 자신에게 총애를 받으면 명성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을 하자, 플로랑스가 바로 그녀를 “빅토르”라고 부르는 장면은 자신의 이익 앞에서 노출되는 감정의 경박함과 같은 불합리한 요소에 의해 발산되는 우스꽝스러움을 자아내게 하며 동시에 충격을 준다.

    또한, 플로랑스를 이용해 자신의 남편을 죽이려하면서 플로랑스가 순진해 의심받지 않을 것이라는 여왕의 대사는 거짓된 이미지가 진실을 감출 수 있는 비틀어진 사회의 한 단면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빅토리아가 자신의 정치 권력을 위해 남편 살인을 부탁하면서 내면의 어떤 가책도 없이 행동하는 모습은 인간의 본질을 경직되고 기계적인 마리오네트로 변화시키는 지점이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모습은 <리어> 1막 4장의 아버지 리어의 충실한 신하이자 친구였던 워링톤 경을 고문하는 장면에서 리어의 두 딸 퐁타넬과 보디세를 통해 볼 수 있다.

    고문당하는 워링톤 경, 퐁타넬의 고문 그리고 고문의 장소에서 어울리지 않는 뜨개질 하는 보디세의 세 가지 행위가 동일한 순간의 장면에 병치된다. 퐁타넬은 군인과 함께, 자신의 아버지 리어의 친구였던 워링톤 경을 고문하면서, 그의 혀를 잘라버려 그의 비명을 못 듣는다며 아쉬워할 정도로 잔인하다. 또한, 보디세는 그 장소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다. 이때 퐁타넬의 잔혹한 고문과 함께 충격적이고 섬뜩하게 다가오는 것은 보디세가 행하는 ‘폭력의 일반화된’ 모습이다. 고문의 장소에서 보디세는 어떤 죄의식도 느끼지 않으며 아무렇지 않게 뜨개질을 하며 “오른쪽으로” “왼쪽으로”를 외친다. 고문의 상황에 무관심한 보디세나 군인에게 잔인하게 고문할 것을 요구하는 퐁타넬의 비인간적인 모습들은 오로지 목적을 위해 돌아가는 기계처럼 고문의 잔혹한 장면과 함께 그로테스크하게 그려진다. 인간 영역 밖으로 이끌고 들어간 이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는 독자/관객들을 점점 더 생경하게 만들며 그들에게 섬뜩한 충격을 안겨준다.

    이러한 정서적 무감각은, <새벽에>에서 조이스와 랜의 살인사건을 통해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조이스와 랜은 영화를 보기위해 표를 사고자 줄을 서 있는데, 요셉 홉슨이라는 사람이 그들 앞에 슬그머니 끼어들었기에 그를 죽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의 재판이 있는 법정에서 노래를 부르고, 그날 자신들이 보고자 했던 영화 제목이 서로 맞다며 다툴 정도로 자신들이 저지른 살인에 대해 무감각하며 어떤 죄의식도 느끼지 않는다. 이렇듯 비인간적인 이들의 일그러진 모습들은 본드의 작품을 형성하고 있는 그로테스크의 모티브이다. 작가는 이 폭력성을 생물학적 관점에서 설명한다. 이는 그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이 두려움의 존재와 그들 스스로를 동일시하면서 이 두려움을 잊고자 한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바로 무지한 이들 혹은 가치관을 아직 갖지 못한 어린이들이 그들 사회 안에서 보여진 폭력을 쉽게 배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다시 말해 이들이 행하는 행동은 근본적으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 방어로서의 폭력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은 <리어>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리어는 자신이 통치하고 지배하고 있는 도시를 성을 쌓음으로 적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위해 백성을 혹사시키며 자신이 행하는 모든 폭력을 합리화한다. 이런 논리로 자신의 국가를 지배하고 있었던 리어는 결국 폭력적인 두 딸과 폭력적인 사회를 만들어낸 인물이다. 극의 시작에서 리어의 두 딸이 자신의 아버지의 성벽 쌓는 작업에 반대하지만, 아버지를 몰아내고 전쟁에 이겨 권력을 가지게 되자, 그녀들 역시 리어와 동일하게 성을 쌓는데 몰두한다. 리어가 만들어낸 세계에서 생겨난 딸이라는 점에서 리어의 또 다른 딸이라고 할 수 있는 코델리아는, 자신의 남편이 리어를 불쌍히 여겨 자신들의 집에 머무르게 한 후, 리어를 찾으러 온 군인들에 의해 남편이 죽고 자신에게 가해진 군인들의 성적폭력으로 인해 아이를 유산하는 고통을 겪는다. 하지만, 그녀가 시민정부의 우두머리가 되어 힘을 가지게 되자, 그녀 역시 이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성벽을 쌓게 된다는 사실이다. 작가 본드는 이렇게 자신의 작품들에서 사회에 대한 실망과 사회가 주는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사회의 폭력을 그대로 모방하며 스스로 폭력적이 되어가는 인물들의 왜곡된 모습들을 통해 그 사회의 폭력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인물들의 “리얼리즘”은 바로 “무감각한 존재의 파시즘”17)이라고 본드는 말한다.

       3.2.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있는 그로테스크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로테스크가 공상적이고 비사실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크롬웰서문」에서 위고는 그로테스크를 공상적인 것과 연관시키지 않고 ‘사실적인 것’과 관련시키고 있다.18) 말하자면, 그로테스크는 현실과는 무관한 비사실적인 환상의 영역에서 펼치는 단순한 상상력의 유희가 아니라, 현실 안에서 뜻밖에 부딪히는 모순이다. 그래서 그로테스크는 현실세계인 동시에 현실세계가 아니며, 인간세계와 은밀한 관계를 맺는 ‘사실성’임을 카이저는 언급한다.19) 더 나아가, 카이저는 그로테스크와 공상을 구분하며, 단순히 변칙적이고 일그러지게 희화된 모습들은 단지 몽상적인 영역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에 그로테스크하다고 할 수 없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리고 톰슨 역시, “그로테스크란 황당무계한 공상과 필연적인 친화관계를 맺고 있기는커녕 사실적인 틀 속에서 사실적인 방식으로 제시”20)되면서 그로테스크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그로테스크가 우리에게 섬뜩함을 유발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친숙한, 고정된 질서에 따라 움직이던 세계가 무시무시한 힘에 의해 생경한 것으로 변하고 혼란에 휩싸이며 모든 질서 역시 무너져버리기 때문이다.”21)

    이렇게 알려져 있지 않은 낯선 것이 아니라, “잘 알려진 낯선 것”으로서 그로테스크는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현실 이면에 감춰진 ‘틈새’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로테스크는 비합리적 비현실성이 아니라 반합리적(l'anti-rationalité)인 것, 즉 “이성과 리얼리티가 자의적이고 전환가능한 것”이며 “이성이 지니는 정통성에 대한 전복”22)으로, 반합리적인 것이다. 그래서 일상적이고 낯익은 것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그로테스크는 낯익은 것을 낯선 것으로 변형시키며 세상을 새로이 보게 해주는23) 기능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예를 든 본드의 <새벽에>에서, 정치적 탐욕을 위해 살인을 서슴치 않는 빅토리아, 그리고 자신들의 살인에 대해 무감각한 렌과 조이스의 모습들은 현실적 일상의 삶에서 부딪히는 비현실성이다. 또한 <리어>의 경우에서도 리어의 두 딸이 행한 워링톤 경에 가하는 고문이라든가, 폭력을 당했던 코델리아가 시민군이 되어 그녀 역시 리어의 두 딸과 동일하게 자신의 성을 쌓으며 사람들을 억압하는 일을 하는 장면은 이전의 동일한 체제의 틀을 깨지 않고서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모습들을 생경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작품은 독자/관객에게 현실이 가지는 그로테스크를, 그리고 이 현실이 생경하게 느껴지면서 비현실적으로 전환되어지는 과정에서 조성되는 긴장감을 제공한다.

    현실과 비현실사이에서 오는 충격을, 본드의 <만약 네가 아니라면>을 통해서 살펴보자.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2077년 미래의 영국이다. 하지만, 이 미래의 시간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우리들의 현실적 삶과 동일하다. 다만, 이시기엔 사람들은 더욱 극단의 자본주의적 폐해로 인해 인간적인 모든 것을 상실하고 자살하거나, 기계적이고 물질적인 존재로서 극도의 이기적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작품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극의 시작과 함께 여자 주인공, 사라는 끊임없이 누군가가 자신의 집 문을 두드린다는 환청에 시달린다. 그런 환청에 시달리던 어느 날, 그녀에게 자신의 오빠라는 그리가 찾아온다. 그리고 찾아온 오빠는 그동안 동생 사라를 잊어버리고 살았음을 깨달았다고 말하지만, 사라는 그리가 자신의 오빠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사라와 그녀의 남편 잼은 그리가 자신들의 의자에 앉았다고 화를 내며 그리가 앉은 의자가 서로 자신의 의자임을 주장하는 극도의 개인주의를 넘어 그로테스크한 상황으로 나아간다.

    인용 1에서 보면, 오랜만에 찾아온 오빠를 인정하지 않는 사라와 그리가 앉은 의자를 남편 잼은 자신의 의자에 앉았다고 문제를 제기하며 사라와 다투는 기이한 상황을 보여준다. 게다가, 인용 2에서, 잼은 사라가 인정하지 않는 오빠를 독약을 먹여 죽이려 한다. 이는 아내의 오빠 방문이라는 현실적인 결코 낯설지 않은 사건과 오랫동안 서로 연락을 하지 않고 살았던 오빠를 기억하지 못하는 혹은 기억하지 않고자하는 사라가 인정하지 않는 오빠를 독약을 먹여 죽이려는 남편의 행동은 마치 내 가족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기괴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익숙한 세계를 낯설은 세계로 변형시킨다. 작가는 이 작품의 앞부분에서 오빠, 그리가 동생 사라를 찾아오는 과정에서 본 많은 장면들, 즉 사람들이 더 이상 어떤 것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욕을 갖지 못한 채 다리위에서 뛰어내리며 자살을 하는 모습들, 그리고 폐허가 된 도시를 감시하는 짐의 모습들을 통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세기말적인 그로테스크한 모습을 그려낸다. 작가는 더 이상 인간이기를 멈추는 이들의 모습을 극대화해 현실과의 모호한 경계에서 그려낸다. 그리고 비현실적으로 전환되어지는 과정에서 조성되는 긴장감을 통해, 작가는 현실이면에 감춰진 영역, ‘틈’을 드러내며 더이상 인간이기를 멈추는 이들의 모습이 지니는 당혹스런 충격을 제공한다.

    또한, <새벽에>의 15장에서, 종족말살로 치달은 전쟁으로 인해 절벽 밑에 시체들이 흩어져있으며, 아르튀르의 눈에 보이는 검은 두건을 쓴 유령들이 손을 잡고 무리지어 왔다 갔다 하는 모습, 그리고 조오지가 먼저 죽은 후 조오지의 해골이 아르튀르의 어깨에 매달려 있는 그로테스크한 모습들은 세기말의 표현주의적 풍경처럼 시각화된다. 게다가, 아르튀르가 총에 맞아 죽은 후, 죽은 모든 이들이 모두 ‘천국’에서 다시 살아나는 비현실적 상황이 겹쳐진다.

    이렇게 이미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 아무리 잡아먹혀도 결코 죽지 않는 천국을 통해, 작가는 초자연적 요소를 개입시키며 현실과 비현실적 상황을 겹쳐놓는다. 작품에서 나타나는 이 카니벌적 “천국”을 통해 작가 본드는 결국 어떤 인간적 감정도, 고통도 느끼지 못한 채, 모든 것이 풍부하지만 끊임없이 배고픔을 느끼는 공간으로서 카니벌적 천국, 즉 경박한 카니벌리즘이 가진 문제들을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그려낸다. 샴쌍둥이인 왕자가 인간 존재의 두 부분, 즉 인간의 양심과 ‘사회화된’ 부분을 상징한다면, 아르튀르가 천국에서 모두가 끊임없는 배고픔을 호소할 때 다른 사람을 먹는 것을 거부하며 기아와 맞서고 있는 동안, 이미 그 사회의 삶에 타성화된 조오지는 계속 기아의 고통을 호소하며 다른 이들을 먹고자 한다. 자신의 아이를 잡아먹는 탐욕스런 눈빛이 특징적인 고야의 <크로노스>처럼, 천국에서 보여지는 카니벌리즘, 즉 인간이 다른 인간을 잡아먹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통해 작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격적인 경쟁에 의해 인간이 다른 인간을 악용하는 상황에 대한 은유를, 그리고 자본주의 소비 사회에 대한 은유를 보여준다. 카니벌리즘을 거부하며 결코 다른 사람을 먹지 않고자 한 아르튀르는 빅토리아, 알베르 그리고 조오지에 의해 다시 죽임을 당한다. 그런데, 계속적인 두통을 호소하던 조오지가 아르튀르의 머리를 먹고 난 이후 더 이상 어떤 고통을 느끼지 않는데, 이는 양심으로 상징되는 아르튀르의 죽음을 상징한다. 그래서 아르튀르는 이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빅토리아에겐 하나의 위협이 되었기에 살해된다. 아르튀르가 다시 살아나지 않도록, 다시 자라나는 그의 몸을 계속 먹게 하며, 먹고 남은 그의 뼈를 관에 넣어 빅토리아가 자신의 이빨을 뽑아 박는 그녀의 탐욕스런 모습은 그로테스크하다. 그리고 나서 빅토리아는 사람들(하층민)에게 “당신들이 서로서로를 평화롭게 잡아먹도록 하기위해 죽었다”고 그의 죽음을 합리화하는 위선을 드러내 보인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본드의 작품들에서 비록 등장인물들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의식의 흐름은 비현실에 근거하고 있거나, 그들의 행동 역시 비현실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만약 네가 아니라면>의 남편, 잼의 모습에서, <리어>의 두 딸, 퐁타넬과 보디세의 모습에서, 그리고 <새벽에>의 빅토리아의 모습에서, 그리고 천국에서의 카니벌리즘에서 그로테스크의 존재론적 공간은 현실과 비현실의 팽팽한 긴장사이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형상의 고정성과 확정성을 끊임없이 해체하는 ‘그로테스크한 형상들’은 현실과 비현실, 인간과 세계, 중심과 주변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며, 모순과 역설의 상황을 야기하면서 상징적 영역들을 형성해간다. 그래서 그로테스크는, 본드 본인의 말처럼, 말하지 않은 이들의 말을 그대로 전달하면서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긴장감과 함께 드러나는 생경함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드러내고 있다.

       3.3. 새로운 질서를 드러내는 그로테스크

    현실을 비틀어 해체한 반-자연적 형상을 통해 기존의 것을 낯설게 만드는 것은 그로테스크의 특성이다. 이 특성은 우리에게 세계를 체계화하는 방식과 기존의 경험들에 의문을 제기하게 할뿐 아니라, 이러한 현상 뒤에 있는 본질을 감지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그로테스크는 분열의, 이중성의 그리고 일반화된 것에 대한 전복의 미학으로 정초되기위해 혼종성에 의해 안정된 동일성과 정체성에 대한 타자로서 영입된다. 이 영입은 그로테스크가 산출해내는 ‘낯설음’, 즉 생경해진 세계를 통해 균형과 비례의 이상적인 이미지가 줄 수 없는 통찰, ‘탈구의 경험’과 함께 이루어진다. 그래서 그로테스크는 일상적인 삶의 질서를 해체하고 정체성을 위협하며 그 “무엇을 구체화”24)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로테스크는 ‘미지의 무엇’ 그 새로운 질서를 드러낸다.

    인간이 서로를 잡아먹고, 잡아먹히지만, 다시 그들의 몸이 자라나 여전히 죽지 않고 배고픔에 허덕이는 <새벽에>의 카니발적 ‘천국’장면에서, 아르튀르가 더 이상 서로를 잡아먹는 상황을 거부한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생겨나자, 빅토리아가 이들을 다시 서로 잡아먹는 체제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자신의 아들인 아르튀르를 죽이는 상황은 오늘날 자행되고 있는 경박한 자본주의의 경쟁논리를 그로테스크하게 그려낸다.

    인용에서처럼, 아르튀르의 죽음 이후에, 그를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여전히 일상적 삶, 다시 말해 서로를 잡아먹는 식사를 계속하고 있다는 점은 놀라움을 준다. 작가는 어떤 확신도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하층민들의 모습을 통해 이중적인 성격을 지닌 군중의 모습을 그려내며, 그래서 그는 이들을 ‘하층민(la populace)’이라는 속어로 사용하고 있다. 본드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성은 도구화되어 더 이상 지적인 것이 의미를 갖지 못하며, 그리고 이들의 무감각해진 정서의 경박성만이 있다.

    하지만, 위에 인용된 작품, <새벽에>에서 작가의 지문, “아르튀르 공중으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 플로랑스는 그를 보지 못한다. 그녀는 말없이 울고 있다”을 통해 작품의 끝에서, 얼른 보면 빅토리아가 아르튀르를 죽이고 이긴 듯 하지만, 플로랑스의 눈물을 통해 희망을 의미하는 인간적 감정의 신호를, 새로운 질서를 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품에서 창조된 비현실적인 낯선 세계로 서의 그로테스크는 현실 이면의 ‘틈새’를 제시하는 중요한 비평적 개념으로 기능한다. 이성적이고 체계화된 구조로부터 벗어나면서, 서로 결합될 수 없는 것들이 연결되어 비틀려 변형되어지는 그로테스크적 이미지는 비언어적이고 비매개적인 것으로서 모순적 원칙들이 충돌하며 이전의 것들을 낯설게 하면서 이질적이고 예외적인 감각적 경험을 부여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본드의 다른 작품 <만약 네가 아니라면>에서도 드러나는데, 잼이 사라가 자신의 오빠임을 부정했었던 그리에게 독약을 탄 수프를 먹여 죽이려 했을 때, 사라는 자신의 그릇과 그리의 그릇을 바꾼다.

    잼의 무감각한 행동, 독약이 정말 좋은 효과를 지닌 것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던 그는, 사라가 독약이 든 그리의 수프를 대신 먹어 죽음에 이르게 되면서 고통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다른 사람, 부인의 오빠가 죽을 것에 대해 어떤 고통도 공유하지 못하던 잼은, 자신의 아내 사라의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스스로의 행위의 잔혹함을 깨달으며 자신의 목을 조르고 고통스러워한다. 이 고통을 댓가로, 다시 말해 이 감각적 경험을 통해 그에게 제공되는 통찰은 반성적 사유이다. 그래서 본드는, “인간성은 가끔, 비인간적 행위를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25)고 말한다. 이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접하는 수용자인 관객 역시 배우와의 일원론적 현존을 경험하면서 감각적 경험을 공유하게 된다. 사실, 그로테스크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섞여 혼종성을 드러내며, 비논리적이며, 통합의 반대급부로 기능한다. 하지만 이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는 작가의 말처럼, 상상력에 의해 구성되어 감각적 경험을 불러일으키며 새로운 질서를 드러낸다. 그래서 현재 재소환되어지는 그로테스크는 기존의 체계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반합리적인 것이며 현 세계를 바라보는 생각을 변형시키는 기능을 한다.

    13)Edward Bond, La Trame cachée, L'Arche, 2003, p. 14  14)Edward Bond, Lear, L'Arche, 1998, p. 9.  15)Wolfgang Kayser, Ibid., p. 303.  16)Geoffrey Galt Harpahm, On the grotesque, The Davies Group, 1982, p. 3.  17)Edward Bond, 『Lear』, L'Arche, 1998, p.11.  18)김치수외 편역, 『문예사조』, 문학과 지성사, 1977, 19〜40쪽 참조.  19)Wolfgang Kayser, ibid., p. 72.  20)Philip Thomson, 앞의 책, 11쪽.  21)Wolfgang Kayser, ibid., p. 72.  22)Rosemary Jackson, 서강여성문학연구회역, 『환상성』, 1980, 33쪽.  23)Philip Thomson, 앞의 책, 23쪽.  24)Wolfgang Kayser, ibid., pp. 304〜305.  25)Martine Millon, “Un théâtre politique visionnaire”, 『Théâtre/Public』, n° 111, mai-juin, 1993, p. 19.

    4. 나가며

    상상력에 의해 재구성된 비현실적이고 반자연적인 형상을 지닌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는 비언어적이며 비매개적이다. 그로테스크적 형상이 제공하는 감각적 경험을 통해 도달하게되는 반성적 사유는 이성과 리얼리티에 대한 전복의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반합리적이다. 그래서 그로테스크는 기존의 인식체계의 방법에 의문을 제기하며 “인식된 것과 인식되지 않은 것” 사이라는 의식의 주변에 있다. 그래서 그로테스크적 이미지는 기존의 정체성을 위협하며 ‘미지의 무엇’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새벽에>의 빅토리아 여왕의 그로테스크한 정국에서 아르튀르가 행하는 순수함을, 그리고 천국에서 서로 잡아먹는 그로테스크한 카니벌리즘에서 플로랑스의 눈물을 통해 구체화하며 새로운 질서를 드러내게 된다. 그로테스크적 이미지가 제공하는 의식의 확보는 결코, 논리와 토론의 이성적 방식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정서적 경험으로부터 행해진다.

    결국, 그로테스크는 단일한 중심과 작동논리로 총체화되지 않고, 이질적인 요소들이 공존하면서 대립과 갈등 및 조화를 이루는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형태로서 새로운 탄생을 암시한다. 그로테스크한 형상은 이성중심의 합리주의적 사고에 의해 배제되거나 잊혀져있던 것들을 새로이 보며, 가치부여를 할 수 있는 매개로 새롭게 작용하며 하나의 다른 세계로서의 새로운 질서를 구축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로테스크적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현기증” 즉, 감각적 경험은 어떤 변화를 형성해내는 순간이다. 바로 이점은 포스트모던 연극에서 그로테스크가 재소환되는 지점이다. 결국, 본드의 글쓰기는 현실의 불합리한 모습을 그로테스크하게 그려내어 독자/관객에게 현실적인 상황의 비현실적인 모습을 생경하게 보여주면서 감각적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이 감각적 경험을 통해 모순된 현실을 전복시키며 새로운 다른 현실의 가능성을 열어두고자 한다. 그래서 본 연구를 통해 살펴본 에드워드 본드 극작술의 중요한 요소인 그로테스크 개념의 고찰은 기존의 브레히트의 서사극적 개념하에서만 이해되었던 그의 희곡작품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확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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