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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蘇州 瑞光寺塔 出土 北宋初期의 佛敎文獻 硏究 A Study on the Early North Sung Period Buddhist Literatures Found in the Pagoda of Suzhou Ruiguangsi
  • 비영리 CC BY-NC
ABSTRACT
蘇州 瑞光寺塔 出土 北宋初期의 佛敎文獻 硏究

In 1978, there was an investigation before the repair of the pagoda in Suzhou Ruiguangsi (蘇州 瑞光寺) and many Buddhist literatures were found in the center of pagoda‘s 3rd floor. This study is the analysis of the forms and values of the literatures. Since there were 123 ea of precious literatures made from Tang (唐) period to early North Sung (北宋) period among the found Buddhist literatures, they have very important meaning in the bibliography for the time. Suzhou Reiguangsi (蘇州 瑞光寺) was built by the first king of Wu (吳), Sun Quan (孫權). He built this Buddhist temple to meet Monk Xingkang (性康) from Kangjuguo (康居國). When it had been first built, it had been called Puji Chanyuan (普濟禪院) and it was renamed as current Ruiguangsi (瑞光寺) after the major expansion in the early period of North Sung (北宋). The Ruiguangta (瑞光塔) was built by Sun Quan (孫權) in A.D. 247 immediately after the temple had been built. Sun Quan built this pagoda as a 13-floor pagoda to pray for the easy passage into eternity of his mother, national prosperity and welfare of the people. As time passed by, the pagoda was largely damaged and it was newly built in A.D. 1017 (天禧 1) of early North Sung (北宋) period; while it was named as Duobaota (多寶塔). The literatures found in Ruiguangta consist of 107 ea of 3 sets dharani (陀羅尼) scripture and 16 volumes of 5 books, total 123 ea. Especially, there were 7 books of full set transcript of Lotus Sutra (法華經) in relatively complete form. This sutra written in gilt lettering on dark blue paper was made in Middle Tang (中唐) period and it is believed to be the only one existing in East Asia as a scripture written in gilt lettering on dark blue paper (紺紙金字寫經). There were also 6 books of small letter edition of Lotus Sutra (法華經) in complete form, which was published during the early North Sung (北宋) period. This specific edition is incorrectly stated in most general reference books published in China as having been engraved in early Tang period (初唐) since a Japanese scholar wrongly introduced it as having been engraved together with Nakamura edition (中村本). It is meaningful that this error can be corrected by the finding of this study.

KEYWORD
서광사 , 서광탑 , 다보탑 , 손권 , 감지금자법화경 , 소자본법화경 , 대수구다라니
  • I. 緖 論

    일반적으로 동아시아에 있어서 목판인쇄의 기원은 대체로 8세기를 전후한 시기로 보아 오고 있다. 이 시기에 중국에서는 목판인쇄 활동과 관련된 기록과 단편적 실물자료가 보이며, 우리나라에는 8세기 전반에 <無垢淨光經>을 목판으로 인쇄한 실물자료가 현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 후에 낱장의 印本陀羅尼는 간헐적으로 출현하였으나, 비로소 정형적인 서적은 868년에 돈황본 <金剛經>에서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이처럼 한국과 일본에서는 8세기 인쇄자료가 출현한 이후 근 3백여년 동안 이와 유사한 실물자료가 나타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다행스럽게도 근래에 이러한 출판 공백기를 보충할 새로운 인쇄자료들이 하나 둘 출현하고 있어 동아시아 서지학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 먼저 최근 한국에서는 9-10세기 인쇄자료로 추정되는 <華嚴經>1)과 <法華經>2) 여러 종이 새로 발굴되었으며, 중국에서도 10-11세기 사이의 인쇄자료로 응현 석가탑에서 수습된 거란본을 비롯하여 五代에 간행된 목판본 법화경이 현재 高平市博物館과 緣督室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공개되었다. 또한 일본에서도 중국 송나라에서 가져 온 불상의 불복에서 이때 간행된 <金剛經>과 <熾盛光經> 등이 새로 등장하여 판본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주목되고 있다.

    이처럼 새로 공개되거나 발굴된 인쇄자료는 대체로 9-11세기에 목판에 판각 간행된 목판본인데, 이 시기는 동아시아 서적발전사에 있어서는 사본에서 판본으로 변화하는 전환기에 간행된 실물자료라는 점에서 실로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겠다. 이러한 여러 인쇄자료 중에 소주 서광사탑에서 출토된 소자본 <법화경>의 경우, 이와 동일한 잔권 일부가 일본의 書道博物館과 龍谷大學圖書館에 분리된 체 소장되어 있는데, 오래 전에 나가자와(長澤)가 이를 8세기 초기 刊本으로 밝힌 이래 중국에서 발행된 대부분의 개설서에 지금까지도 현존 최고의 목판 인쇄본으로 소개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후 지난 1966년 우리나라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자 은연 중에 중국의 관련 학자들은 이 소자본 <법화경>의 위상을 더욱 강조하는 분위기가 팽배한 실정이다. 그런데 지난 1978년에 소주 서광사탑에서 일본의 잔권과 동일한 소자본 <법화경>이 무려 6권이 완전한 상태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고고학 연속간행물인 『文物』에 소개된 바 있었다.3) 그러나 중국의 소주 서광사탑에서 이처럼 중대한 실물자료가 발견되었으나, 국내에는 아직까지 전혀 소개된 사실이 없다.4)

    그리하여 필자는 지난해 복단대학의 陳正宏 교수의 도움으로 이 자료가 소장되어 있는 소주박물관을 방문하여 실물을 실사한 후 관련 보고서를 수집하였다.5) 따라서 이 글에서는 1978년 1차 조사와 1980년 추가 조사에서 출토된 불교문헌을 중심으로 그 형태서지적 특징을 소개하고 나아가 동아시아 서적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II. 蘇州 瑞光寺와 瑞光塔

       1. 瑞光寺 沿革

    서광사는 소주 서남쪽의 盤門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이다. 이 절은 후한이 망하고 魏·蜀·吳 삼국이 서로 패권을 다투던 시기에 오나라 赤鳥4(241)년에 孫權이 서역 강거국에서 온 승려 性康을 맞이하기 위해서 지금의 자리에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립 초기에는 普濟禪院으로 이름하였으나, 북송 초에 대대적인 중창하면서 지금의 瑞光寺로 개칭하였다.6) 그 후 이 사찰을 세운 손권이 적조 10(247)년에 모친의 극락왕생과 국태민안을 기원하기 위해 절 내에 13층탑을 세웠다.

    그러나 이 사찰과 불탑은 전란과 풍화로 인하여 훼손되어 북송 초기에 새로 건축되었으며, 이후에도 남송에서 청대에 이르는 동안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 특히 청나라 咸豊 10(1860)년에 전란으로 피해를 입어 사찰이 전소되었으나, 同治 11(1872)년에 대대적으로 보수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불탑은 다행히 크게 피해를 당하지 않았으나 오랫동안 방치된 상태였다.

       2. 瑞光塔 槪要

    이처럼 서광탑은 멀리 오대에 손권의 발원으로 처음에는 13층으로 건립되었으나, 이후 새로 중건되고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본래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7층으로 되어 있다. 지난 1978년 4월 제3층 탑심부에서 발굴된 지류문화재의 관련 기록으로 보아 이 탑은 북송 초기 天禧 1(1017)년에 새로 건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 탑에서 발견된 소자본 법화경의 施納記의 기록을 살펴보면, 天禧 元年(1017) 9월 15일에 雍熙寺 永宗스님이 『妙法蓮華經』 1부 7권을 옮겨 와 瑞光院에 새로 세운 多寶塔 相輪部의 寶珠에 納入하여 위로는 四恩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三界에 도움을 주어 복리가 깃들기를 바란다는 내용으로 보아 1017년에 새로 세운 사실을 고증할 수 있다. 또한 이때 신축한 탑을 ‘多寶塔7)’이라 부르고 있어 오늘날 부르는 서광(사)탑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시납한 <相輪陀羅尼經>의 기록에도 같은 해에 봉납한 기록이 보이고 있어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8)

    북송 초 1017년에 새로 건축된 서광사탑(본래 多寶塔)은 7층에 팔각형 양식으로 나무와 벽돌[木磚]을 혼합하여 축조되었는데, 탑의 높이는 53.6m에 달한다. 탑신은 벽돌로 축조한 송대 목전탑의 기본 구조를 잘 반영한 양식으로 현존하는 중국 고탑에서는 보기 어려운 사례이다. 벽돌로 쌓은 塔身은 外壁·回廊·塔心의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벽은 전목으로 斗栱하고 중간처마와 平座를 목조로 결구하였다. 제1층은 4면의 벽에 문이 만들어져 있으며, 이와 달리 제2층과 3층은 8면에 벽문이 나 있고 제4층에서 7층까지는 상하교착식 4면에 치문을 두었다. 탑문을 들어가면 회랑을 지나게 되어 있으며, 회랑 양벽은 나무 대들보를 연접하였고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다. 제2층과 4층의 모퉁이에는 위에 月梁이 있고 내외를 倚柱로 연결하였으며, 회랑 안에는 탑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있다.9)

    다양한 문화재가 출토된 3층은 이 탑의 핵심부분으로 양방식 탑심 기좌를 마련하고 말각 및 과릉형의주, 그리고 액방·벽감·호문 등에 ‘七朱八白’과 ‘折枝花’ 등 빨강과 하양의 두 가지 색으로 벽을 칠한 송대 양식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에는 1978년에 다양한 문화재가 발견된 天宮이 탑심 안에 있다. 이 탑은 정교하게 축조되어 있고 조형미가 뛰어나 송대에 건축된 樓閣式 木塔의 대표작으로 중시되고 있다. 그러나 청대 동치 11(1872)년 이후 수리하지 않은 체로 100년 동안 방치된 상태로 겨우 지탱되었다.

    그 후 1954년에 더 이상의 훼손을 막기 위해 저층의 壺門과 佛龕을 벽돌로 쌓아 오래 동안 폐쇄하였으며, 1963년 탑을 실측하는 과정에서 불상과 명문이는 벽돌을 수습하였다. 그리고 1978년 4월에 제3층의 塔心部에서 眞珠舍利寶幢10)을 비롯하여 만당에서 북송 초에 조성된 불교문화재가 다수 발굴되었다. 불교문화재를 수습한 이듬해 1979년에 먼저 탑정과 벽을 수리하여 붕괴위험을 막고 정원에 담장을 쌓아 보호하였으며, 동시에 상세하게 측량하여 중수할 설계방안을 세웠다. 이후 1987년부터 3년 동안 塔頂과 刹柱를 전면적으로 수리하고 각 층의 외벽과 탑심 등 목조구조물을 견고하게 보강하여 1990년에 준공하였다.11) 이러한 보수과정을 거치게 되어 비로소 송대 목탑의 전형적인 풍모가 일신하게 되었다.

    III. 蘇州 瑞光塔 出土 佛敎文獻

    지난 1978년과 1980년 2차에 걸쳐 소주 서광사 내에 소재하고 있는 서광탑 3층 천궁에 시납된 불상과 전적 등 불교유물이 다수 발굴되었다.12) 이때 발굴된 지류문화재는 종이에 필사 또는 인쇄된 인본다라니와 전적이 포함되어 있는데, 상세한 서지적 특징은 아래의 표와 같다.

    [<표 1>] 서광사탑 출토 불교문헌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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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광사탑 출토 불교문헌 현황

    당시 발굴된 불교문헌은 다라니 107점과 전적 16권으로 당대에서 북송 초기에 필사 또는 간행된 귀중한 지류문화재이다.

       1. 陀羅尼類

    서광사탑에서는 3종 107점의 다라니가 수습되었는데, 이 중 2종은 목판에 새겨 인쇄한 것이며, 다른 1종은 황지에 묵서한 것이다. 먼저 목판으로 인쇄한 인본다라니 2종은 <大隨求陀羅尼>로 圓周形과 長方形으로 되어 있다.13)

    원주형은 중앙에 석가상을 배치하고 그 주위로 한문으로 번역한 다라니경을 시계방향으로 둥근 원형의 모습 27겹으로 둘러 싼 형태로 배열되어 있다. 그리고 사면의 가장자리에 사천왕상이 마치 비천에 쌓인 형상으로 배치되어 있어 다라니경을 호위하는 상징적 의미를 보여 주고 있는 듯하다. 상단의 중앙에는 만다라의 그림이 배치되어 있고 하단의 중앙에는 이 다라니의 조성과 관련된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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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단의 조성 기록으로 보아, 이 다라니는 사천성 검남의 서천성도부에 있는 중경사의 義超가 전법사문 蘊仁과 蘊謙 등과 募緣하여 함평4(1001)년에 항주의 趙宗覇가 간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다라니의 좌우에는 쌍선으로 테두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각각 다음과 같은 중요 공양자가 직위에 따라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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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록은 하단부에 기재된 명단이 주로 스님과 일반인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주로 주요 관직에 있는 관리들을 구분하여 좌우측면에 특별히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맨 끝부분에 진사 郭宗孟이란 사람이 다라니를 쓴 것으로 기재되어 있어 그가 세소자로 쓴 정서본을 바탕으로 판각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장방형은 중앙에 변상도를 배치하고 그 주위를 범자로 새긴 대수구다라니 47행이 배열되어 있다. 중앙에 배치된 변상도는 석가상이 안치된 상단을 중심으로 좌우 3단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그 주위에 둥근 쌍선 4개의 원안에 사시를 상징하는 12宮 圖像이 배열되어 있다.14) 그리고 다라니 상단에는 좌우로 금강저를 두고 그 안에 보상화문으로 장엄하였으며, 좌우에는 쌍선으로 테두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각각 판관 형상의 14신상을 배치하고 있다. 이러한 배치 형식으로 보아 중앙에는 12계절의 별자리를 주관하는 12궁의 도상과 좌우에는 28개의 천문운행을 주관하는 28宿의 도상이 자리하고 있어 우주의 삼라만상을 상징화한 일종의 天文圖 다라니로 보인다.

    하단에는 좌우에 천상을 배치하고 그 사이에 한문으로 번역한 대명왕대수구다라니경과 조성발원문이 차례로 기재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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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록으로 보아 범학사문인 秀璋이 위로는 황제의 무병장수와 아래로 일반 백성의 安泰를 발원하고 돌아가신 부모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경덕 3(1005)년에 다라니를 간행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이 다라니는 다라니 주문은 물론 일년 12달의 별자리를 상징하는 12궁과 하늘의 운행을 상징하는 28숙 도상을 좌우에 배치하여 지상의 황제로부터 일반 백성의 안녕을 기원할 목적으로 간행한 것이다. 이는 중국의 전통적인 천문 운행을 상징하는 28숙과 서양에서 유입된 점성술을 상징하는 12궁이 결합된 형식의 다라니라는 점이 의미가 있다. 이후 이러한 의미를 반영한 만다라가 동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유포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른 1종의 다라니는 황지에 <상륜다라니>를 먹물로 필사한 것으로 모두 105점이 수습되었다. 105점의 다라니는 상하간의 크기가 15.5㎝로 대략 흡사하나 길이는 90-100㎝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다라니는 황지에 주묵으로 사선을 그은 계선안에 10-11자씩 필사하였다.

    이 다라니는 만일 善男子가 불탑을 오른쪽으로 돌거나 예배하거나 공양하면 마땅히 授記를 받고 아누다라삼약삼보리에서 물러나지 아니하고, 모든 업장과 온갖 죄업이 모두 소멸할 것이며, 내지 나는 새나 축생들까지도 이 탑 그림자에 들어가면 축생의 갈래를 영원히 여읠 것이고, 비록 오역죄를 지었더라도 탑 그림자 속에 들어가거나 탑에 몸만 스쳐도 모든 죄업이 소멸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죄업을 소멸하기 위한 방편을 상륜다라니에서 찾아보면, 선남자가 응당 법대로 이 주문 구십구 벌을 써서 상륜당의 사방 주위에 두고, 또 이 주문과 주문의 공덕을 써서 상륜당의 속에 비밀스럽게 넣어 두면, 곧 구만 구천의 相輪堂을 세우는 것이 되며, 구만 구천의 불사리를 모시는 것이 되며, 구만 구천의 부처 사리탑을 조성하는 것이 되며, 구만 구천의 菩提藏塔을 조성하는 것이 된다. 만일 진흙으로 작은 탑을 만들고 그 안에 이 다라니를 모시면, 이는 곧 구만구천의 작은 보탑을 만들게 되어 죄업이 소멸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서광탑이 새로 중건되자 인근의 여러 신자들이 죄업을 소멸하고 재액을 막아내기 위해 이 <상륜다라니>를 써서 봉안하였던 것이다. 이때 납입한 다라니의 말미에는 아래와 같이 다양한 발원문이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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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발원문을 보면, 소주 지방의 吳縣과 長州縣에 거주하는 불제자들이 죄업을 소멸하기 위해 <상륜다라니>를 필사하여 天禧 1(1017)년에 서광탑에 시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서광탑은 송나라 진종연간인 1017년에 廢塔된 예전의 불탑 자리에 새로 중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2. 典籍類

    가. 寫經

    1) 紺紙金字 妙法蓮華經

    이 사경은 대승불교의 대표적 경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妙法蓮華經』을 紺紙에 金泥로 쓴 것이다. 이 불경은 일반적으로 ‘法華經’으로 약칭하기도 하며, 불교의 동진과 더불어 여러 구법승에 의해서 인도의 서북지역으로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전래되었다. 중국에 전래된 법화경은 모두 6차례 한역되었는데, 그 중 鳩摩羅什이 406년에 28품으로 번역한 한역본이 가장 간결하고 유려한 역본으로 알려져 있다.15) 이러한 까닭에 현존하는 隋·唐代의 敦煌本 寫經은 대부분 이 역본을 저본으로 사경하였으며, 서광사본 또한 구마라집 역본을 저본으로 금니로 정성스럽게 쓴 것이다. 구마라집이 번역한 법화경은 그 내용이 모두 28품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국에서 유통되고 있는 현존본은 대부분 7권본으로 裝軸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서광사탑에서 발견된 법화경 사경본은 전 7권이 비교적 완전한 상태로 발굴되었으며, 모두 권자본 형태로 장황되어 있다. 각권의 권수에 裱竹이 권말에는 木棒으로 되어 있으며, 軸은 금동으로 장식하였다. 표지는 牧丹花와 그 주변에 寶相華紋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주로 금니와 은니를 사용하여 그렸으며, 좌측 상단부에 금니로 제첨을 만들고 그 안에 經名을 썼으나 부분적으로 훼손된 상태이다. 각권은 품의 분량에 따라 22장에서 28장으로 粘連되어 있으며, 이에 따라 전체 紙長은 951-1215㎝이고 紙幅은 27㎝내외로 약간씩 다르다. 각장의 길이는 44㎝ 정도로 전체 25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 행에 1.76㎝ 폭으로 金線을 긋고 17자씩 배자되어 있다.

    그리고 각권의 권수에는 변상화가 배치되어 있으며, 권에 따라 그림이 다르나 주로 금니로 그리고 부분적으로 은니를 사용하였다. 변상도는 사주에 테두리를 두고 여러 문양으로 장엄하였으며, 크기는25.2×34.2 cm이다. 변상도 다음에 卷首題가 보이고 있으나, 구마라집이란 역자표시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이처럼 권수제가 經題와 品題가 구분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역자명도 기재되어 있지 않다. 또한 제2권 이하는 권수제 아래에 작은 글씨로 卷次로 보이는 ‘二’·‘三’ 등의 숫자가 기입되어있다. 이러한 권수제 형식은 돈황의 장경동에서 발견된 당대 사경과 동일한 양식으로 사성시기를 추정하는 절대적 기준으로 판단된다. 경문은 상하에 금니로 단선으로 계선을 가늘게 긋고 은니로 사성하였다. 사경 서체는 전형적인 돈황 사경과 동일한 寫經體의 특징을 잘 보이고 있는데 기본적으로는 사경을 전문적으로 쓰는 사람이 구양순체를 바탕으로 사성한 것으로 보인다.

    사경의 조성과 보수에 관련된 기록이 권1과 권2의 말미에 각각 수록되어 있다. 권1의 끝에 “常州建元寺長講法華經 大德知☐記”이란 기록이 보이고 있고, 권2의 말미에도 “太和辛卯(931)4月28日修補” 라는 묵서가 보이고 있어 상주 건원사 스님인 知☐이 소지하고 있던 사경을 오대 931년에 보수한 것으로 보아 中唐무렵에 사경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권7의 말미에 “顯德3(956)年丙辰12月15日 弟子朱承惠特捨淨財, 收贖此古舊損經7卷, 備金銀及碧紙請人書寫, 已得句義周圓, 添續良因, 伏願上報四重恩, 下救三塗苦, 法界含生, 俱沾利樂, 永充供養”이 金書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대 顯德 3(956)년에 주승혜가 훼손된 사경 7권을 입수하여 다시 수보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내력을 지닌 서광사탑에서 출토된 법화경 사경은 비록 부분적으로 훼손되어 있으나, 전 7권이 온전한 상태로 갖추어 있고 권수에 변상도와 표지장식화가 우수하며, 각 권말의 말미에 보수와 관련된 기록이 남아있어 寫成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결정적 근거를 확보하고 있는 사경으로 현전본이 극히 희귀하여 서적사는 물론 미술사 및 서예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2) 紺紙金字 佛說阿彌陀經

    이 사경은 정토왕생을 위해 아미타불을 염불하는 내용으로 鳩摩羅什이 한역한 역본을 저본으로 晩唐때 감지에 금니로 쓴 것이다. 예로부터 아미타경은 극락세계의 아름다운 모습과 三惡道가 없는 세상으로 사람들이 만약 아미타불의 명호를 듣고 일심으로 염불하게 되면 임종할 때 아미타불의 영접을 받아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널리 신봉되었던 불경이다. 그리하여 일반 신도들 사이에 가장 많이 유포되어 독송되던 경전으로 <無量壽經>과 <觀無量壽經> 등과 함께 淨土三部經이라한다. 대부분의 불경은 제자들의 간청에 의하여 석가모니가 설법한 것인데 비하여 이 불경은 부처가 자진해서 설법한 ‘無問自說經’으로 무량수경에서 핵심 내용을 선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의 한역본은 3종이 있는데, 그 중 문장이 간결 유려하다는 구마라집의 번역본이 가장 널리 독송되고 있다.

    서광사탑에서 출토된 『불설아미타경』은 구마라집 역본을 저본으로 감지에 금니로 사성하고 권축장으로 장황한 사경이다. 전체 크기는 22.5×211cm이며, 모두 123행으로 한 행은 17자씩 배자되어 있다. 경문은 상하 사이에 金絲欄을 긋고 해서체의 단엄하고 준경한 사경체로 간혹 신라 및 고려 초기 사경에서도 동일한 서체가 보이고 있다. 권수제는 ‘佛說阿彌陀經’로 되어 있으나, 역자표시는 보이지 않고 있다. 이처럼 권수제에 ‘불설’ 2자가 첨입되어 있고 역자명이 없으며, 경문 중에 보이는 ‘土’자는 어깨 아래에 점이 찍힌 당대 사경체의 특징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만당이나 늦어도 북송초기에 쓰여 진 사경으로 보인다.

    3) 白紙墨書 佛說天地八陽經

    이 사경은 헛되이 邪見에 빠져 악업을 짓지 말라는 천지팔양경을 저본으로 북송초기에 백지에 묵서한 것이다. 그러나 이 불경은 당나라 삼장법사 義淨이 번역한 불서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중국의 도교와 습합한 과정에서 만들어진 위경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본래의 경전명은 ‘佛說天地八陽神呪經’이며, 이를 줄여서 ‘佛說八陽經’ 또는 ‘八陽經’이라고 한다. 경명의 의미에 대해서 “天은 陰이고‚ 地는 陽이고‚ 八은 分別이고‚ 陽은 明解”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따라서 이 불경에서는 陰陽의 화합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곧 ‘正見之法’이며‚ 헛되이 邪見에 빠져서 占卜에 현혹되면 악업만 짓게 되어 결국 죽어서는 지옥에 떨어져 괴로움을 받을 것이라고 경계하고 있다.

    그래서 전체적인 내용은 세존이 無礙菩薩의 요청에 따라 사견에 물들어 있는 중생들을 위해 정견법을 설법하는 내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천지간에 인간이 가장 존귀한 존재이지만‚ 사견에 빠짐으로 인해서 인간은 온갖 악업을 짓게 되고 이로 인해서 고통과 죄과를 받게 되는데‚ 이때 이 경전을 1만번 이상 독송함으로써 그러한 악업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제시하고 있어 민중 속에 널리 유포되었다.

    서광사탑에서 출토된 불설팔양경은 백지에 묵서하여 권축장으로 장황한 사경이다. 전체 크기는 27.5×386cm이며, 모두 207행으로 한 행은 16-18자씩 배자되어 있다. 권수제 앞쪽에 “弟子樓閙, 爲自身幷家屬保安, 造此經, 永充供養”이란 묵서가 보이고 있는데, 불제자 樓鬧가 본인 자신과 집안의 안녕을 위해 이 불경을 직접 써서 시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경문은 어떠한 형식도 없는 無絲欄 상태인데, 해서체에 행서가 가미된 유려한 서체로 쓰여 져 있어 전형적인 당대 사경체와는 거리가 있다. 권수제는 ‘佛說天地八陽經’로 되어 있으나, 후대본에 보이는 ‘三藏法師 義淨’이란 역자표시는 보이지 않고 있다. 이처럼 권수제에 역자명이 없으며, 경문이 정자체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북송초기에 서광탑이 중건되어 納塔을 위해 쓰여 진 사경으로 보인다

      >  나. 板經

    1) 小字刻本 妙法蓮華經

    중국에 전래된 법화경은 모두 6차례 한역되었는데, 그 중 이 판본은 鳩摩羅什이 406년에 28품으로 번역한 한역본을 저본으로 한 장에 88행을 배열하고 1행에 24자씩 배자한 소자본이다. 서광사탑에서 발견된 소자본 법화경은 전체 7권 중 1권이 결본인 6권만 수습되었다. 각 권은 분량에 따라 길이에 약간의 편차를 보이고 있으나, 모두 권축장으로 장황되어 있으며, 소자본 법화경 6권의 세부 형태서지적 특징은 아래의 표와 같다.16)

    [<표 3>] 瑞光寺塔本 <法華經>(6卷)의 形態書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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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瑞光寺塔本 <法華經>(6卷)의 形態書誌

    이처럼 위의 표에 보이는 바와 같이 각 권의 규격은 상이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각 권은 대략 5-6장으로 粘連되어 있으며, 이에 따라 전체 길이도 251-319㎝로 상당한 편차를 보이고 있다. 보통 1장의 길이는 51.5-55.5㎝로 약간씩 편차를 보이고 있으며, 紙幅은 16.9-17.1㎝로 미세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목판에 글자를 새긴 字面의 匡高는 13.0-13.2㎝로 미세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또한 자면을 보면 상하에 변란이 없고 계선도 보이지 않은 ‘無邊無界’의 상태이다. 각장의 행자수는 일반적으로 88행 24자로 구성되어 있어 전체적으로는 조밀한 인상을 주고 있다. 따라서 사진으로 본 느낌과는 상당한 괴리감을 주고 있어 실물을 본 느낌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각 권은 紺紙[碧紙]로 卷軸裝 형태로 장황하였는데, 표지의 기능을 하는 裱紙[褾, 包首]의 길이는 대략 14-18㎝로 약간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제1권의 표지 안쪽에는 이 책을 탑에 捧納하면서 기록한 발원문이 朱墨으로 쓰여 져 있는데, 이는 건탑과 간행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어 주목된다. 표지에 기록된 발원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捧納朱書發願文>17)

    이 발원문의 내용으로 보아 북송 초기 1017년에 雍熙寺의 스님 永宗이 가지고 있는 법화경 전7권을 서광원에 다보탑을 새로 세울 때 상륜부 천궁보주에 봉납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 기록을 근거로 서광사탑이 1017년에 건립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법화경 7권을 시납한 인물이 옹희사의 永宗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또한 이를 통해 영종이 봉납한 소자본 법화경은 늦어도 1017년 이전에 판각되어 印出한 것이라는 사실도 고증할 수 있다.

    법화경 고판본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이 卷首題의 구성형식이다. 서광사탑본 법화경을 살펴보면 비록 2행으로 되어 있으나, 역자표기와 판각위치가 일정하지 않다. 각 권의 권수제 형식을 보면 모두 동일한 형식으로 ‘經題+品題+品次’로 구성되어 있으나, 역자표시는 권1은 ‘三藏法師’로 冠稱되어 있어 다른 권이 ‘後秦三藏’으로 기재한 것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板首題형식을 살펴보면 점련부분의 앞쪽에 ‘五卷■五’로 되어 있는데, 고판본의 경우 축약 판제 없이 단순하게 숫자로만 권차와 장차를 기재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과도 일치하고 있어 이를 보완하고 있다.

    이 책의 인출에 사용한 종이는 소주박물관측의 분석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뽕나무 껍질[桑皮]을 주재료로 여기에 대나무를 혼용한 桑竹紙(7+3)로 파악하고 있다.18) 字體는 나가자와(長澤)가 지적한 則天文字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則天武后의 이름자인 照자 조차도 ‘曌’자가 아닌 이체자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9-10세기 고판본에서 보이는 사경체자가 간헐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특이하게 異體字로 光자가 ‘灮’로 표기된 경우가 드물게 보이고 있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서광사탑에서 발견된 법화경은 북송 태조 재위시기에 판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9) 이 무렵 吳越國에서는 錢弘俶의 발원으로 <寶篋印陀羅尼經>이 두 번이나 간행되었던 시기이며, 또한 소주와 거리상으로도 그다지 멀지 않은 동일 문화권으로 당시의 출판 분위기와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따라서 서광탑본 법화경은 당시 불교를 널리 신봉하고 있으며 이미 출판지로 알려진 항주지역에서 간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20)

    2) 木板本 金光明經

    이 책은 1980년 서광탑을 추가 조사하였을 때 발견된 목판본 불경이다. 『금광명경』은 懺悔滅罪라는 본래적 속성과 동시에 護國安民을 바라는 진호적 성격을 지닌 불경으로 중인도의 바라문 출신인 曇無讖(385-433)이 5세기 초반에 北涼에서 한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이 불경은 703년 당나라 義淨이 새로 번역하여 ‘金光明最勝王經’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담무참이 번역한 불경을 舊譯本이라 부르며, 의정의 번역한 불경을 新譯本으로 구분한다. 구역본은 전체적으로 신역본에 비해서는 다소 간략한 편이지만 총 19품으로 구성된 내용은 크게 다를 바 없다. 특히 진호적 성격이 강한 불경으로 <仁王般若經> 및 <法華經>과 함께 국가를 수호하는 3대 호국경전으로서 매우 중시되어 일찍부터 동아시아 국가에 널리 유통되었던 불경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경을 근거로 신라와 고려시대에 金光明道場을 자주 개최하여 국태민안을 기원하였다. 삼국시대는 담무참의 구역본(4권본)이 널리 유통이 되었으나, 라말여초에는 의정의 신역본(10권본) 또한 중시되었던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담무참이 한역한 금광명경은 경명이 바로 여래의 법신을 지칭하고 있으며, 전체 19품으로 구성되어 일반적으로 이를 4권으로 장황하고 있다. 19품의 주요 소재와 교의 내용은 般若經·法華經·華嚴經등의 여러 대승경전에 의거 발췌하였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부처님의 수명이 영원함을 밝힌 壽量品, 참회를 권장하는 懺悔品, 부처님을 찬양하고 공덕을 강조하는 讚歎品, 대승불교의 중심교의인 空을 설법하여 대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여래의 法身을 구할 것을 강조한 空品등이 핵심적인 부분이다.

    그러나 동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이 불경을 호국경전으로 존숭하여 널리 유통된 원인은 제5품 이하의 四天王品·正論品등에서 기인한 것이다. 사천왕품에서는 사천왕과 大辯天등의 여러 신들이 이 경을 신봉하여 이를 독송하고 강설하게 되면 국왕과 백성을 수호하고 국난과 재액을 소멸하여 국가의 안녕과 풍년을 가져 온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한 정론품에서 국왕을 天子와 동격체로 인정하여 국왕이 백성 속에 있으면서도 여러 천신의 은택을 받고 그 덕을 나눔으로서 국왕의 권위를 세움과 동시에 국왕에게 치세의 요체를 설법하고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밀교적 색채가 농후한 불경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금광명경을 유포하고 수지 독송하게 되면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고 기근과 질병을 소멸해 준다는 사상이 발현하게 되어 한역 직후부터 고사경과 고판본이 많이 유통되는 계기가 되었다.

    지난 1980년 서광사탑에서 추가 조사과정에서 발굴된 금광명경은 초기의 고판본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잔권에 불과하여 그 전모를 살피는 것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발굴 당시 이불경은 硬黃紙에 인쇄된 목판본으로 일정한 간격으로 접은 형태인 折帖裝으로 소개되었다.21) 잔권의 분량은 43절 217행으로 길이는 382㎝에 이른다. 한 장의 크기는 대략 27.0×51.0㎝이며, 1折은 5행씩으로 접어 6절로 되어 있다. 인쇄된 광곽 크기는 23.6㎝이며, 1행은 16-17자로 배자되어 있다. 권수부분이 훼손되어 권수제 형식은 알 수 없으며,22) 字體또한 사경체와 정자체가 혼재되어 있어 대략 10세기 후반 북송시대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IV. 瑞光塔 出土 典籍類의 特徵

       1. 寫經本

    서광사탑 3층 천궁에서 감지금니와 백지묵서 사경 3종 9권이 수습된 바 있다. 이 중 감지금니사경은 법화경과 아미타경 2종으로 예로부터 국가와 민중이 중시했던 불경이다. 법화경에는 931년에 보수한 사실이 묵서되어 잇는 것으로 보아 대략 당나라 중기에 사성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아미타경 또한 늦어도 만당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보다 권수제의 특징을 살핌으로서 보다 구체적으로 고증할 수 있다.

    법화경과 아미타경 2종의금자사경에 보이는권수제를살펴보면, 모두 1행으로 되어 있을 뿐 어떠한 추가적 기재사항이 없다. 특히 28품으로 구성된 법화경의 경우에는 경제와 품제가 1행에 기재되어 있으며, 그 아래에 권차가 작은 글씨로 기입되어 있다. 물론 역자표시도 기재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권수제 기술방식은 송대와 고려시대에 제작된 동일 사경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으나, 오히려 돈황의 장경동에서 발견된 수·당대사경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러한 특징으로 보아 2종의 금자사경은 중당에서 만당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금자로 조성된 사경은 동아시아에서 일본을 제외하고 한국과 중국에서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실정이다.

    다만 중국에서는 지난 2000년 돈황 장경동 발견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가 북경의 역사박물관에서 개최되었는데, 이때 당대의 금자법화경 권1이 소개된 바 있다.23) 이 돈황본 금자사경은 현재 돈황연구원에 수장되어 있으며, 전시회 당시에 발행된 도록에는 唐代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돈황본의 권수제 또한 1행으로 경제와 품제가 구분되어 있지 않으며, 역자표시도 보이지 않고 있다. 이처럼 돈황본은 서광탑본과 동일한 형식을 보이고 있어 당대에 조성된사경으로판단된다. 그러나 사경서체를 비교해 보면 돈황본에 비해 서광탑본이 전체적으로 품격이 높은 것으로 보아 전문 사경사에 의해 사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아미타경의 단독 금자사경은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유일한 사경으로 보인다.24) 사경 서풍이 일본 경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8세기 <紫紙金字華嚴經>과 매우 흡사한데, 이는 당시 주요 사경 서체의 한 서풍으로 자리 잡은 것으로 생각된다. 권수제에는 경명만 기재되어 있을 뿐 역자표시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이에 비해 경도 寶積寺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본 은자사경에는 구마라집이 역자로 표시되어 있어 唐代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2. 木板本

    중국 소주에 소재하는 서광탑에서는 목판으로 인쇄한 목판본 <법화경>과 『金光明經』 2종 10권이 출토되었다. 이들 목판본은 天禧1(1017)년에 서광탑이 새로 중건하면서 시납되었으므로 늦어도 그 이전인 북송초기에 간행된 불경이다. 이들 불경은 동아시아 여러국가에서국태민안과 진호국가를 위해 가장 많이 사경하거나 인쇄된 경전이다. <법화경>은 소자로 판각한 목판본 전 7권 중 6권이 완전한 상태로 발견되었으며, 『금광명경』은 추가로 수습된 목판본으로 잔권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까닭에 『금광명경』은 권수제 부분이 훼손되어 그 특징을 고찰하는데 한계가 있어 완전한 상태인 소자본 법화경을 중심으로 권수제 형식을 살펴보겠다.

    서광탑본 법화경의 권수제 형식을 살펴보면 경제와 품제가 1행, 그리고 역자표시가 1행 등 모두 2행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처럼 각 권의 권수제 형식을 보면 모두 동일한 형식으로 ‘經題+品題+品次’로 구성되어 있으나, 卷次는 표기되어 있지 않다. 또한 역자표시는 권1은 ‘三藏法師’로 기재되어 있으나, 이하 다른 권은 ‘後秦三藏’으로 기재한 것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후대 간본에서 일반적으로 ‘姚秦三藏法師’로 국호가 추가된 것과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처럼 권수제는 모든 서적의 맨 앞부분에 기재된 서명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서지목록을 작성할 때 으뜸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권수제의 구성방식은 8-10세기에 간행된 고판본의 여부를 판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대체로 이 시기에 간행된 고판본은 권수제 형식이 經題와 品題가 구분되어 있지 않은 1행으로 기재되어 있고 다음 행에 역자표시가 없는 상태이다. 이에 비해 <開寶藏>(971-983년)이 간행된 직후로부터 간혹 역자표시가 나타나고 권수제 또한 경제와 품제로 분리되면서 2행에서 3행의 형식으로 변화되었던 현상을 보이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현전하는 법화경 중 가장 이른 시기에 간행된 판본은 한국의 영광 불갑사에 소장되어 있는 고판본으로 대체로 10세기 중기에 開板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25) 불갑사본의 권수제는 역자표시가 없는 1행으로 되어 있어 다른 판본과 비교에 기준이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권수제가 1행으로 구성된 경우는 ‘經題+品題+品次’, 그리고 그 품차 아래로 ‘卷次’가 小字로 기재되어 있으며, 譯者는 표시되어 있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서광탑에서 출토된 小字本은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권수제 형식이 2행으로 역자가 표시되어 있어 주목되는 변화된 모습이다. 이러한 변화는 10세기 후반 북송에서 개보칙판대장경이 조성되어 유통되면서 서적의 식별기준을 삼고 있는 권수제의 형식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 개보장이 보급된 이후 반세기 후에 간행된 법화경이 거란이 세운 응현 목탑에서 다수 발견되었다. 이 중 胡蝶裝本은 유일하게 권수제가 역자표시가 있는 2행으로 되어 있어 중국 내지로부터 변방의 주변국으로 변화가 확산되는 조짐을 감지할 수 있다.

    이처럼 동아시아에서 대장경이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11세기부터는 권수제의 구성방식이 ‘경제+권차/역자/품제+품차’로 구분되는 3행의 형식으로 변화되었다. 이러한 변화현상은 宋元本은 물론 高麗本과 북방의 주변국 판본에서도 예외 없이 모두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11세기부터 목판본의 권수제가 급격히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아시아 서적발달사적 관점에서 보면, 이는 11세기 전후의 사본시대로부터 본격적인 판본시대로 전환되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 외에 字體의 특징 또한 고판본을 판정하는데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만약 경문의 자체에서 수·당대 고사경에 보이는 特異字 또는 古體字와 異體字 등이 보이고 있다면, 대체로 11세기 이전에 간행된 판본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가 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8세기 초기에 목판인쇄술이 등장하였으나, 적어도 2세기동안은 사본과 병행하여 서적이 보급되었다. 목판본이 본격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한 것은 동아시아에서 10-11세기 사이에 대장경이 대량으로 보급된 이후에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과도기 시기에는 자체의 특징에서도 사경에 쓰인 특이한 글자들이 자주 나타나고 있으며, 대장경 보급 이후에는 모든 特異字들이 해서체의 정자로 변화되었던 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서광탑본은 소자본이라는 특성 상 印書體의 특징이 강하게 보이고 있어 서예미적 감각은 다소 부족해 보인다. 그렇지만 서광탑본에서도 서체의 미적 특징과는 달리 字體에는 ‘能·勝·願·正·足·定·因·隱’ 字등에서는 다분히 寫經體와 正字體가 혼재되어 있는 특징이 여실히 보이고 있다. 이 또한 동아시아 板本史에 있어서 사경에서 판본으로 전환되는 시기에 나타난 과도기적 현상으로 보인다.

    V. 結 論

    이상에서 지난 1978년과 1980년 2차에 걸쳐 중국 강소성 소주시에 소재하는 서광사 경내에 세워져 있는 송대 서광탑[다보탑]에서 수습한 불교문헌을 중심으로 그 특징과 가치를 고찰한 결과, 대략 다음과 같은 사실이 밝혀졌다.

    첫째, 소주 서광사는 赤鳥4(241)년에 오나라 첫 번째 왕이었던 孫權이 강거국에서 온 승려 性康을 맞이하기 위해서 세워진 사찰이며, 창건 당시에는 普濟禪院으로 부르다가 북송 초기 원희 연간에 와서 대대적으로 중창하고 지금의 서광사로 개명하였다.

    둘째, 서광탑은 서광사가 완공된 직후인 赤鳥 10(247)년에 손권이 모친의 극락왕생과 국태민안을 기원하기 위해 사찰 내에 13층탑을 세웠으며,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 이 탑이 크게 파손되어 天禧 1(1017)년에 새로 중건하고 다보탑이라 하였다. 이 탑은 나무와 벽돌을 사용하여 八角七層의 樓閣式으로 축조한 송대의 대표적 木磚塔이다.

    셋째, 지난 1978년 서광탑의 수리를 위해 사전에 실시한 조사과정에서 3층 탑심부의 천궁에서 다량의 불교문화재를 수습하였다. 당시 수습한 문화재에는 당대에서 북송초기에 조성된 귀중한 불교문헌 123점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 문헌자료는 서광탑이 新建된 천희 1(1017)년에 시납한 것으로 재액을 소멸하고 국가의 진호를 위한 법사리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넷째, 불교문헌은 크게 다라니류 3건 107점과 전적류 5종 16권으로 분류되었다. 다라니는 대수구다라니 2건 2점이며, 상륜다라니 1건 105점으로 파악되었으며, 전적류는 법화경 2종 13권, 아미타경 1종 1권, 천지팔양경 1종 1권, 금광명경 잔권 1권 등 모두 16권이 포함되어 있다.

    다섯째, 불교문헌을 刊寫 형태로 파악해 보면, 다라니는 목판으로 인쇄한 인본이 2건 2점이며, 백지에 묵서한 필사본이 1건 105점이다. 또한 전적류는 사경이 3종 9권이며, 목판본이 2종 7권으로 분석되었다.

    여섯째, 이들 불교문헌은 늦어도 서광탑이 완성된 1017년 이전에 조성되었던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 간사시기로 분석해 보면, 당대에 사성된 사경 2종 8권과 북송초에 간사된 6종 115점으로 판별되었다.

    일곱째, 특히 전적류 가운데 법화경 사경은 당대에 감지에 금자로 조성된 것으로 전 7권이 비교적 완전한 상태이며, 동아시아 국가에 현존하는 감지금자사경 가운데 최선본으로 평가할 만하다. 또한 소자본 법화경은 일본 서도박물관과 용곡대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동일본이 한때 일본학자에 의해 8세기 초기에 인쇄한 세계 최고의 인쇄자료로 주목되었으나, 서광탑본의 출현으로 북송초기에 인쇄된 것으로 확인할 수 있어 그 위상이 재평가되었다.

    이상과 같이 소주 서광사탑에서 출토된 불교문헌은 당대 사성한 감지금자사경을 비롯하여 북송초기에 간행된 인쇄자료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대 금자사경 전 7권이 완전하게 보존된 경우는 극히 희귀한 경우이며, 또한 북송초기 목판본이 6권이나 완전한 상태로 발견되어 그동안 일본학자가 이와 동일본을 初唐本으로 소개한 이후 모든 개설서에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데, 이 연구를 통해 오류를 수정할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 의미가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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