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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Homosexuality and Utopia: A Reading of Whitman’s Calamus 동성애와 유토피아─휘트먼의『창포』를 중심으로*
  • 비영리 CC BY-NC
ABSTRACT
Homosexuality and Utopia: A Reading of Whitman’s Calamus
KEYWORD
Whitman , homosexuality , utopia , body , Calamus
  • I. 들어가며

    휘트먼의 시학이 지닌 정치, 사회적 함의와 미국 민주주의와의 불가분한 친연성은 휘트먼 연구의 중요한 주제였고, 그 중에서도 특별히 휘트먼의 동성애는 그의 정치시학과 뗄 수 없는 관계로서 휘트먼 연구의 중요한, 그러나 쉽지 않은 과제로 남겨져 왔다. 물론 휘트먼의 정치시학과 성을 함께 아우르려는 많은 시도들이 있어왔지만 태반은 본격적인 동성애 연구에 미흡한 경우가 많았고, 또 그 연구 자체도 일정한 시각적 한계를 노출하며 휘트먼 텍스트의 특질을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가리고 축소하고 억압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휘트먼이 동성애자였는지 여부에 대한 다양한 전기적 접근들이라든지 그의 동성애를 드러내는 경우에도 이를 성애(sexuality)란 큰 범주 속에서 양성애와 동일하게 취급하며 그 특수성을 가리는 접근들이 그 예이며,1 많은 비평들은 동성애를 성기중심적 성적 행동으로 축소하여 누구와 성교하느냐라는 협소한 틀 속에서 동성애 텍스트의 정치, 문화적 파급력을 가리는 한계를 드러냈다.2 그러나 휘트먼은 스스로를 동성애자로 인식할 때조차 자신을 미국과 동일시하며, 남북전쟁 전후 노예제나 영토확장 등을 둘러싼 국가적 분열의 위기를 의식하면서 새로운 미국 건설의 프로젝트 속에 자신의 성애를 겹쳐놓는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동성애는 정치적 담론과 불가분하게 엉켜있는 사안이며 동시에 기존 사회 조직과 상호작용의 양식이기도 하다. 본 논문은 이런 면에서 휘트먼의 시가 협의의 동성애 논의를 보다 넓은 정치, 역사적 맥락 속에 위치시키는 성정치학의 유용한 텍스트라고 보고, 휘트먼이 어떻게 사회, 정치적 문제들을 동성애 문제와 연결시키며, 소위 유토피아 담론으로 일컬어지는 미국 사회의 전망에 어떠한 방식으로 그의 동성애를 기입시키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동성애는 전통적으로 한 사회의 도덕적, 종교적, 지적, 사회적, 경제적 합의들과 충돌을 일으키면서 공동체에 긍정적 요소라기보다는 억압되거나 제거해야 하는 사회적 악으로 간주되어왔다(Ingling 138). 지금도 많은 애국주의적 수사속에서 동성애는 국가 조직에 위협적 실천이자 병적인 징후로 해석되고 있으며, 이런 면에서 유토피아 담론 속에 동성애가 낄 자리는 없었다. 잉링(Thomas E.Ingling)은 미국의 유토피아 담론들이 지배 문화와 차별하기 위해 성과 성애에 관한 견해를 개진하나 실지로는 공동체 유지를 위해 동성애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성적 관행 자체에 억압적일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138). 성적 억압을 동반한 유토피아니즘은 미국문학의 특징이기도 한데, 이는 미국문학이 많은 경우 미국이 어떠해야하며 어떠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또 ‘어떠할 수 있는지’가 반드시 이상주의적 전망을 포함한다는 점, 그리고 여기에 성과 성애는 억압되거나 배제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러하다.3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전반적인 미국문학의 특성과는 상치되게 동성애와 유토피아를 연결시키려는 일련의 흐름이 존재하며, 그 시발에 미국시의 아버지 휘트먼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휘트먼에 의해서 동성애 유토피아가 재현된 이래 미국시에서의 동성애는 배척받기보다는 현상태와는 다른 세계, 동성애자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새로운 정치, 사회, 경제적 공동체에 대한 비전과 연결된다. 물론 이것이 동성애 예술가가 항상 유토피아적 문제의식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미국 시인들의 경우에는 이 두 가지를 함께 그들의 시학 속에서 해결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휘트먼의 뒤를 잇는 크레인(Hart Crane)이나 긴즈버그(Allen Ginsberg)가 휘트먼과 동일하게 동성애를 유토피아적 충동 속에 구현하려던 것이 이를 증명하며, 이들은 저마다 특수한 사회·역사적 환경 속에서 동성애적 비전이 어떻게 미국의 유토피아적 전망과 공존할 수 있는지를 실험한다. 이들의 텍스트 속에서 ‘미국’은 모든 유토피아 담론에서 그러하듯 가상적 실체로서 아직 언어화되고 쓰여지지 않은 무제한의 가능성이자 하나의 수사로 기능하는 기호이며, 이는 동성애가 유예된 상태에 대한 기호이자 정치적이고도 수사적인 구성물이라는 점과 유사하다. 이들에게서 미국과 동성애는 텍스트상의 유토피아적 효과 외에는 어떠한 존재론적 위상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이런 면에서 이들은 동일하게 수사적이며 또 동일하게 정치적이다.

    사실 휘트먼에게서 동성애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그가 푸코(Michel Foucault)가 지적하는 대로 동성애가 성적 관계의 유형에서 특정한 성적 감수성, 특정한 성의 전도로 정의되면서 하나의 종(species)으로 등장하던(43) 이전 시기의 시인이라는 점에서 그 적절성 여부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즉 휘트먼에게서 동성애가 문제가 된다면 이는 동성애 자체의 정치성 때문이 아니라 그가 동성애 개념이 존재하지 않던 시대에 없는 것을 재현했다는 점 때문인 것이다. 물론 휘트먼의 『풀잎』(Leaves of Grass)4이 나오기 20, 30년 전부터 미국사회는 전통적으로 남/녀 각각의 성적 공동체 속에서 노동과 여가를 해결하던 강력한 동성사회적 체제들이 힘을 잃어가면서 오히려 그러한 관계들을 금지하고 문제시하는 동성공포적 경향이 농후해지며 다량의 성담론들이 유포되었던 것이 사실이다(Moon 10). 그러나 이들 성담론들은 산업·상업 자본주의의 팽창과 함께 전통적 제도와 체제에서 벗어난 남성 인력들을 사회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 고안된 자위반대 운동이나 순결 운동 등에 집중되어 있었지 특별히 동성애를 겨냥하던 것은 아니었다(Moon 25). 휘트먼의 시적 작업은 동성애 의식이 형성되기 이전에 이뤄졌고, 물론 이 시기에도 동성애 경험은 존재했지만 이를 설명해주는 어떠한 사회·정치 의식이나 담론은 존재하지 않았다. 19세기 미국에서 의학이나 법적인 텍스트조차도 동성애를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았으며, ‘동성애’라는 용어는 19세기 말이나 되어서야 등장한다(Killingsworth 2000, 122). 동성애가 하나의 수사적 전략과 언어적 관행으로 인정받기 이전, 그것은 사회적 의식의 경계에서 희미하게 나타나는 경향에 불과했고, 휘트먼은 기존 담론과의 관계, 특히 유토피아 담론 속에서 새로이 동성애 수사를 구성하며 그 형성과정을 자신의 텍스트에 기입한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사실 동성애는 담론의 문제이며 다른 담론과의 관계 속에서 역사적으로 자신을 위치시키는 방식이라고 봐야 한다. 비버(Harold Beaver)가 말하는 대로 동성애는 이미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이름이 아니라 새로이 이를 계발시키는 언어망의 문제인 것이며(101), 휘트먼의 독특성은 바로 유토피아 담론과 동성애를 연결하는 새로운 언어망을 계발해낸 것에 있다.

    휘트먼은 젊은 시절 과격한 민주당원이자 노동자 정치학의 기수였으며 ‘자유의 땅 운동’(Free Soil movement. 멕시코 전쟁 후 새로 편입된 미국 영토에서 노예제 실시를 반대하는 운동)의 언론 대변인이었다. 전기작가들은 1850년대 휘트먼이 『풀잎』집필과 함께 정치적 행동주의에서 떠난 것을 문학 창작을 위한 정치적 추구의 포기라고 하지만 사실은 휘트먼에게서 정치와 문학은 복잡한 방식으로 함께 공존하는 동전의 양면이다. 따라서 휘트먼 이해에 있어서는 그의 텍스트를 정치적 실천의 연장선 속에서 보는 것이 필요하며, 동성애 역시 마찬가지로 많은 비평가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더 의미있는’ 민주주의 주제로 대체되거나 환치될 수 있는 가치로서가 아니라, 민주주의 전망을 잉태하고 양산하는 모태이자 유토피아 비전 속에 녹아있는 근본적 충동으로 함께 아우르는 것이 필요하다.

    그럼 동성애가 가능케하는 유토피아적 전망은 어떤 면에서 기존 유토피아 담론과 차별되며, 또 휘트먼은 어떻게 이를 그의 텍스트 속에 구현하는가. 본 연구는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그의 대표적인 동성애 텍스트 『창포』(Calamus)를 중심으로 휘트먼이 그려낸 동성애 유토피아의 양상을 검토하고, 이를 통해 미국 시 전통 속에 그의 동성애 유토피아가 지니는 의미를 종합적으로 평가해보고자 한다.

    1휘트먼의 성을 가리고 지우고 억압하는 이성애자 전기작가들의 왜곡된 해석들은 슈미드걸(Gary Schmidgall)의 비평서 Walt Whitman: A Gay Life (New York: Dutton, 1997) 2장에 연대순으로 잘 정리되어 있다. 휘트먼의 동성애에 대한 비평가들의 뿌리 깊은 거부감은 대표적인 문화연구가인 레이놀즈(David S. Reynolds)가 잘 보여주는데, 그는 10년 간격을 두고 출판된 두 권의 비평서(Walt Whitman’s America: A Cultural Biography (New York: Knopf, 1995); Walt Whitman (Oxford: Oxford UP, 2005))에서 일관되게 육체적 관계가 개입되지 않는 동성 간의 애정이 휘트먼 당대 흔한 관행이었음을 주장하면서 휘트먼의 동성애를 육체가 제거된 중성적인 것으로 변형, 왜곡시킨다.  2세쥐윅(Eve Kosofsky Sedgwick)이 말하는 대로 ‘성애’란 남녀 모두에게 있어 일련의 행위, 기대, 서사, 쾌락, 정체성 형성, 그리고 지식들을 일컫는데, 이는 생식기 감각 주변에 가장 밀도 높게 모이는 경향이 있으나 반드시 그것만으로 합당하게 정의되지는 않는다(29).  3버코비치(Sacvan Bercovitch)는 미국이란 이름 자체가 프랑스나 영국 같은 정치지리학적 이름들과는 다른 함의를 지닌다고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미국에서만 국가주의가 신성스러운 기독교적 의미를 지닌다. 모든 국가의 칭호 중에서 오직 미국만이 종말론과 열광적 애국주의의 결합된 힘을 지닌다. . . . 모든 정체성의 상징 중에서 ‘미국’만이 국가성과 보편성을 아우르며, 시민적이면서도 영적인 자아를, 세속적이면서도 구원적인 역사를, 국가의 과거와 미래의 천국을 하나의 종합적 이상 속에서 통일시킨다.” (Only in the United States has nationalism carried with it the Christian meaning of the sacred. Only America, of all national designations, has assumed the combined force of eschatology and chauvinism. . . . Of all the symbols of identity, only America has united nationality and universality, civic and spiritual selfhood, secular and redemptive history, the country’s past and paradise to be, in a single synthetic idea. 176)  4이하 본 글은 휘트먼의 Complete Poetry and Collected Prose (New York: Library of America, 1982)를 주된 텍스트로 삼고 약자 CP와 함께 인용된 시의 쪽수를 괄호 안에 표기하도록 한다.

    II. 성과 육체, 그리고 휘트먼

    휘트먼은 말년에 트로벨(Horace Traubel)과의 대화에서 “성이 그 모든 것의 뿌리라네(sex is the root of it all)”(Traubel 452-53)라고 하면서 한편으론 1884년 카핀터(Edward Carpenter)에게는 “덮고 감싸야만 하는 진실들이 있다 (there are truths which it is necessary to envelop or wrap up)” (Carpenter 43)고 밝힘으로써 적어도 성에 관한 한 노출과 은닉의 이중적 접근을 구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휘트먼은 카핀터에게 『풀잎』을 쓸 때 암탉이 알을 숨기는 것처럼 느꼈다고 말하는데(43), 이는 휘트먼 자신이 인간의 욕망과 성애에 대한 급진적 견해를 지니고 있음을 십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캐디(Joseph Cady)는 휘트먼의 주된 문제가 “그의 독서 대중이 언어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일반적 문화가 전혀 우호적이지 않는 주제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하는 방식을 찾아내는 것”이었다고 말한다(6). 휘트먼은 19세기 미국에서 성에 관한 진실을 노골적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자신의 육체를 전면화시켜 성을 재현한 후 다른 이들의 육체와 욕망, 성을 포함시키는 전략을 사용한다. 『풀잎』 초판 첫 장에 제시한 도발적인 휘트먼의 초상은 시가 나오기도 전에 건강하고 매력적이며 도전적인 젊은 남성의 육체를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성과 관련된 문화적 긴장과 불안감을 자극하고 교란시키려는 의도를 가시화한다. 또 최근 평단을 달구고 있는 휘트먼 말년의 7장의 전라 사진 역시 그의 과감한 실험성의 연장선에서 나온 산물이라 볼 수 있다.5

    휘트먼은 무엇보다 육체적 삶 일반을 유토피아 정치학과 연결시키고자 한다. 즉 그의 이상적인 민주 공동체에서는 인간의 육체에 대한 전적인 긍정이 필요조건인 것이다. 1855년 집필된 『아담의 아이들』(Children of Adam)의 시 「나는 전율하는 몸을 노래한다」(“I Sing the Body Electric” CP 250-58)는 그의 성정 치학의 내용을 잘 드러내주는 예로서, 이 시에는 경매에 부쳐진 남,녀 몸에 대한 묘사가 나오고 휘트먼은 여기에서 각각 노예제와 매춘을 육체에 대한 영혼의 우위를 말하는 이분법적 사고체계의 산물로 바라본다. 즉 육체를 타락한 것으로 다루는 사회는 인간의 구체적이고도 물질적인 삶을 억압하면서 사회 자체를 타락시키며 노예제나 매춘은 바로 그러한 왜곡된 인식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몸을 영혼과 동등한 위치, 심지어 동일한 것으로 바라보는 것은 모든 존재에 대한 평등성을 보장하는 기반이 되며 차별과 지배가 사라진 유토피아의 초석이 된다. 휘트먼의 육체에 대한 새로운 접근은 많은 저항을 불러일으켰는데, 출판사에 의해 원본이 훼손된다거나 당대 비평가들의 다양한 삭제와 내용 변경 요구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지인 에머슨(Ralph Waldo Emerson)과 뷰커넌(Robert Buchanan)이 거듭 『아담의 아이들』의 삭제를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불응한 유명한 일화는(Mullins 174) 휘트먼에게 있어서 성과 육체가 얼마나 양보할 수 없는 핵심적 개념인지를 보여준다.

    『풀잎』에 나타난 휘트먼의 성애는 크게 이성애와 동성애로 구별될 수 있고 『아담의 아이들』과 『창포』가 각각을 대표하는 텍스트이다. 캐비취(David Cavitch)는 휘트먼이 “신세계 자연의 풍요함 속에서 팽창하는 사회의 개인적 자유를 반영하는 이상적 성을 정의하고 싶어 했다”고 말하며 휘트먼이 특별히 성에 “사회적으로 진보적이며 공적인 유용성을 부여한다”고 말한다(115). 실제로 『풀잎』에는 신대륙의 풍요로운 가능성과 팽창하는 미국에 대한 낙관적 믿음, 또 자유롭고 자율적인 개인들에 의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으리라는 유토피아적 전망이 이성애와 동성애 양자를 포괄하는 욕망과 성에 대한 전폭적 긍정과 수용 속에서 진행된다. 마틴(Robert K. Martin)은 휘트먼이 『풀잎』에서 “일반적인 관찰자들은 꿈도 꾸지 못할 수준으로 이성애와 동성애의 공존을 제안한다”고 지적한다(xvii). 이성애와 동성애의 경계마저 넘나드는 탄력과 변형력은 휘트먼의 힘이자 개성이기도 한데, 문제는 이 양자를 많은 비평들이 그러하듯 ‘성애’라는 커다란 범주로 뭉뚱그리기 보다는 그가 그려낸 성애 속에 이성애와 동성애가 어떻게 다른 내용을 가지며 특히 그의 동성애가 유토피아 구상 속에 어떠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나누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휘트먼의 유토피아 담론에서 이성애는 여성의 동등한 법적·정치적 권리 주장과 모성애 예찬, 그리고 진정한 여성(Real Woman)에 의한 새로운 세대와 공화국 형성에 대한 논의들로 이어진다. 여기에서 이성애는 건강한 번식력을 지닌 여성과 또 그녀로 인해 창조되는 새로운 세대의 도래와 연결되면서 무한한 미국의 가능성을 노래하는 국가주의적 색채를 띠게 된다(Mullins 176). 「한 여자가 날 기다리네」(“A Woman Waits for Me” CP 258)에서도 드러나듯 휘트먼은 여성의 성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하며 여성의 모든 활동, 심지어 노젓고 씨름하고 사냥하는 남성적인 활동마저도 ‘진정한 여성’의 모습으로 바라보며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이나 평등권을 전적으로 긍정한다. 그러나 여성의 권리에 대한 절대적 지지에도 불구하고 휘트먼의 여성과 여성의 성에 대한 언급은 피상적이며 남녀 간의 성관계는 다음 세대를 양산해낸다는 생식의 사회적 기능을 넘어서는 구체적 욕망이나 다양한 정서를 담아내지 못한다. 이런 면에서 휘트먼의 이성애 재현은 유토피아 실현에 필수적이기는 하나 실체로서의 내용은 빈약한 기능적 역할에 머무르는 한계를 노정하며, 오히려 성애적 욕망과 정서의 구체적 내용은 동성애 관계를 통해 확연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이하 본 논문은 『창포』에 수록된 시들을 읽어보면서 그 특성을 알아보고 이를 통해 제시된 동성애 유토피아의 전망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5사진작가 이킨즈(Thomas Eakins) 사후에 발견된 7장의 사진은 전라로 서 있는 노인의 앞, 옆, 뒤에서 촬영되었는데, 다른 사진들이 모델 이름을 밝힌 것과는 달리 ‘노인’(Old Man)이라는 제목만 붙어있고 모델의 얼굴 역시 뿌옇게 처리하여 누구인지 정확히 확인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사진 속의 노인이 휘트먼을 많이 닮아있으며, 이킨즈 자신이 나체를 찬양한다는 점에서 휘트먼의 이념적 동지이자 추종자이며 친구였다는 점, 휘트먼의 남자 친구들을 포함한 젊은이들의 누드만을 찍었던 이킨즈가 유일하게 남긴 노인의 사진이라는 점, 또 실제로 휘트먼의 누드 사진이 있다는 소문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는 점 등은 이 사진을 휘트먼의 것으로 추정할 근거가 된다. 사실 휘트먼이 육체와 성, 성애와 정체성에 대해 지니고 있던 전복적 문제의식을 고려한다면 이 사진은 그리 놀랄만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사진은 폴섬(Ed Folsom)의 글 213-17 참조.

    III. 동성애자의 유토피아

    『창포』의 동성애 텍스트로서의 특징은 그 근간이 되고 있는 「이끼 덮힌 살아 있는 떡갈나무」(“Live Oak with Moss”) 시편들에서 명확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휘트먼은 1859년 봄 12부로 나눠진 「이끼 덮힌 살아있는 떡갈나무」를 쓴 후 그 해 여름부터 창작한 다른 시편들을 함께 모아 1860년 45편으로 구성된 『창포』를 완성한다. 「이끼 덮힌 살아있는 떡갈나무」는 남자를 사랑하는 한 남성 화자의 서정시 연작인데, 화자가 연인에게 열정적으로 몰입하고 버림받고 체념하고 침묵하게 되는 플롯을 지니며, 동성을 사랑하는 것에서 오는 혼란과 고통, 공포의 심리 상태를 생생하게 표현한다. 휘트먼은 특별히 이 시가 “지금 기억하고 과거에도 기억한(Remember now─/ Remember then)”내용이라고 노트에 적고 있는데, 이는 이 시가 자서전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음을 암시한다(Helms 186). 휘트먼은 평생 「이끼 덮힌 살아있는 떡갈나무」를 출판하지 않고 또 언급조차 하지 않았으며, 『창포』를 완성하면서 이 시의 12부 순서를 흩뜨려 배열함으로써 원래 이 시가 지니고 있던 동성애적 내용을 감추고 희석시킨다.6 그러나 과격한 재구성에도 불구하고 이 시의 동성애의 내용과 형식적 특수성은 『창포』전반에 스며들어 있으며, 특히 45편으로 확대되면서 휘트먼의 유토피아적 전망은 더 구체화되고 심화되는 양상을 띤다.

    휘트먼은 1840년대와 1850년대에 동성애를 개념화하고 표현하기 위해 골상학(phrenology)에서 사용하는 ‘점착성’(adhesiveness)이라는 용어를 차용한다. 골상학에서의 점착성은 동성 간의 우정을 의미하며 양성간의 사랑을 표현하는 ‘호색성’(amativeness)과 대조를 이룬다. 마틴의 지적대로 휘트먼은 ‘점착성’의 원래의 의미에 동성 간의 헌신, 충실성, 나눔, 접촉 등의 의미를 더하여 포괄적인 동성애 용어로 변형시킨다(Martin 35). 『창포』의 시들은 바로 휘트먼이 개념화한‘점착성’의 구체적 예들인데, 여기에서야 비로소 휘트먼은 사랑의 다양한 감정들─행복, 만족, 완성감, 상처, 분노, 질투, 소외감 등을 전폭적으로 재현하며, 은밀하고 사적인 만남에서만 가능한 깊은 정서적 연관과 어렵고도 소모적이며 만족스럽지만 동시에 가슴을 찢는 격렬한 애착과 절망을 표현한다.

    「방울져 떨어지네」(“Trickle Drops”)라는 제목의 이 시는 피 흘리며 죽어가는 화자의 이미지를 통해 강렬한 욕망이 수반하는 극도의 고통을 재현한다. 킬링즈워스(M. Jimmie Killingsworth)의 지적대로 시인은 자신을 예수와 같은 순교자로 형상화하는데(1989, 123), 예수가 그러하듯 화자의 상처에서 나오는 핏방울은 죽음이자 재생이며 고통이자 치유인 역설적 의미를 띤다. 방울들은 화자의 푸른 정맥과 얼굴, 이마, 입술, 가슴 등을 통해 흘러나오면서 그가 쓰는 “모든” 시와 노래를 적시며 텍스트 위에서 “부끄럽게” 빛난다. 그의 몸에서 나온 방울들은 “온통 창피하게 어있는” “고백”이 되어 금기와 터부 속에 놓인 동성애를 재현하며, 그가 쓴, 또 앞으로 쓸 모든 작품을 물들이는 것이다.

    이 시의 “방울들”은 일차적으로 상처에서 나오는 피를 일컫지만, 화자의 이마에서 나는 땀방울이나 가슴에서 나오는 눈물, 혹은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정액일 수도 있다. 휘트먼은 7행에서부터 마지막 행까지 “every”와 “all”을 6번에 걸쳐 반복하면서 “방울들”을 “모든 것”을 환기시키는 환유로 만드는데, 이러한 환유적 기법은 동성애 텍스트로서 『창포』가 지니는 특징 중 하나이다. 킬링즈워스는 『창포』가 여타 휘트먼의 텍스트와 세 가지 점에서 차이가 난다고 보는데, 첫째, 자연과의 은유적 동일시가 아닌 환유적 연상을 시도한다는 점, 둘째, 기존 문학적 관습에 대한 거부가 아닌 이에 대한 전유와 전복을 시도한다는 점, 셋째, 완전히 드러내고 보여주는 것이 아닌 감추면서 드러내는 복합적인 상호작용을 보여준다는 점이다(2000, 123). 『아담의 아이들』 시편이나 「나의 노래」(“Song of Myself”) 등 일련의 시 속에서 휘트먼은 자신의 리비도를 자연 속에서의 유사물과 일치시키면서 육체와 욕망을 ‘자연스럽게’보이도록 만드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러나 『창포』에서 휘트먼은 자연에 대해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기 시작하며 「나는 루이지애나에서 살아있는 떡갈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았지」(“I Saw in Louisiana a Live–Oak Growing”)는 이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이 시에서 알 수 있듯이 화자는 더 이상 자신을 자연물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물론 화자는 사랑할 사람 없이 외롭게 홀로 서 있는 떡갈나무에서 자신과의 유사성을 발견하기는 하지만 이끼로 덮인 떡갈나무 가지를 “남성의 사랑”을 떠오르게 하는 “흥미로운 증거물”로서만 바라보지 자신과 전적으로 일치시키지는 않는다. 이성애가 생식과 관련되어 자연의 생성의 원리와 조화롭게 일치되는데 비해 동성애를 노래하는 시인은 자연과의 일체감보다는 거리감을 경험하며, 「나의 노래」의 시인이 자신의 시가 “모든 시대와 모든 땅, 모든 사람의 생각” (the thoughts of all men in all ages and lands CP 204)을 대변한다고 믿는 것에 비해 『창포』의 시인은 그러한 자신감과 확실성을 상실한다. 물론 많은 『창포』의 시가 사랑하는 이와의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만남의 장소로 자연을 택하나 화자는 더 이상 자연에 대한 은유적 동일시를 시도하지 않으며, 『창포』에서 의 자연은 하나의 배경이자 환유적 혹은 연상적 수사의 대상이 된다.

    『창포』에서 나타나는 기존 문학적 관습에 대한 전유와 전복은 휘트먼이 존재하지 않던 ‘동성애’라는 개념을 새로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기존 담론과의 관계 속에 역사적으로 자신을 위치시키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휘트먼은 1855년 『풀잎』서문에서 위대한 시인은 시적 전통에서 해방되어 있음을 주장하는데(10, 26)7『창포』는 휘트먼의 이러한 주장과는 달리 엘리자베스 소네트(sonnet)에서부터 시작되는 세속적 사랑의 서정시 전통이나 낭만주의적 비가 (elegy) 양식 등을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휘트먼의 시학 전반과 차이가 난다. 『창포』에서 휘트먼은 자신만의 시학을 주장하기보다 성애를 표현하던 기존 문학적 관습들을 전유하고 그 이성애적 전제를 전복하면서 전통적 형식들을 재정의한다. 그는 동성애에 관한 한 기존 담론들의 내용을 미결정적이고도 유동적으로 만들어 그 안에 잠복된 전복성을 이끌어내는 방식을 차용하며, 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고 없던 것을 형성해가며 말할 수 없는 것에 이름붙여야하는 동성애 시인의 자구적 노력과 실험성의 결과이자 휘트먼에게서 동성애가 얼마나 자신의 시학과 배리되면서까지 재현하고자 했던 절박한 내용이 었는지를 설명해준다.

    문(Michael Moon)은 휘트먼이 동성애 재현의 어려움을 환유적 대체와 미결정성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고 지적하면서 1876년판『풀잎』서문을 그 예로 든다(9). 여기에서 휘트먼은 『풀잎』을 “살아있고 숨 쉬는 사랑과 우정의 끝없는 흐름”(endless streams of living, pulsating love and friendship CP 1010-11)을 고무시키기 위해 내놓는다고 하면서 “사랑과 우정”이란 표현을 “갈망,” “공감,” “동지애,” “점착성” 등으로 다섯 번에 걸쳐 고쳐 말한다(“this terrible, irrepressible yearning,” “this never-satisfied appetite for sympathy,” “this boundless offering of sympathy,” “this universal democratic comradeship,” “this old, eternal, yet ever–new interchange of adhesiveness, so fitly emblematic of America”CP 1011). 지속적으로 동성애를 여러 가지 표현으로 대체하는 것은 그 지시 대상을 미결정적인 의미의 그물망 속에 위치시킨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는 동성애에 대한 금기와 터부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던 휘트먼이 ‘감추면서 드러내는’ 방식으로서 환유적 대체를 선택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휘트먼이 말하는 “사랑과 우정”은 계몽주의 수사의 온건하고도 이성적인 사회적 쾌락이 아니며, 휘트먼의 어린 시절 미국을 지배한 행복한 가정의 이데올로기를 사회적으로 이상화시킨 것도 아니다. 이는 억제할 수 없는, 그러나 용인되지 않은 강렬한 욕망이면서, 언어화되어 있지 않기에 더욱 두려운 정서의 표현이다. 따라서 이러한 욕망과 정서를 “가장하지 않고 선언적으로”(undisguisedly, declaredly CP 1011) 표현하겠다는 서문에서의 휘트먼의 발언은 역설적으로 사실상 이것이 가장과 부인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휘트먼은 이렇듯 억압과 고통, 소외를 동반한 자신의 동성애 경험을 성적소수자의 주변성에 대한 인식으로 발전시키며 이를 토대로 전복적 유토피아를 구상한다. 즉 그는 인간의 몸과 성애를 지배하는 권력과 정치·역사적 상황들을 비판하고 개선하기 위해 정치와 시학이 결합된 급진적 유토피아를 꿈꾸기 시작하는 것이다. 문의 지적대로 1855년에서부터 1867년에 걸친 『풀잎』의 지속적인 개정은 작품을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북전쟁을 끼고 급격하게 변화하던 이 시기 정치·경제적 상황 속에서 그의 시학을 현실에 맞춰 재조정하기 위해서라고 봐야한다.8 즉 휘트먼의 유토피아는 안일한 낙관적 전망이 아니라 현실을 반영하며 여러 차례에 걸쳐 수정되고 재조정된 구상이며, 여기에는 기존의 성적 욕망과 행동을 지배하는 문화적 코드들에 대한 도전뿐만 아니라 지배문화에 대항하는 광범위한 대안적 성애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많은 휘트먼 연구자들은 그의 유토피아 구상을 현실성과 구체성을 결여한 단순한 이상주의로 폄하하는데, 이들은 휘트먼이 자신의 자아를 국가같은 집단적 실체와 동일시하면서 현실 공동체를 구성하는 다양한 정치 세력들 간의 차이와 긴장을 배제하고 있다는 점, 또 휘트먼의 자아가 백인 남성이라는 특수한 개인을 추상화시켜 보편성의 근거로 삼고 있다는 점을 주로 비판한다. 예컨대 심슨(David Simpson)은 휘트먼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국민 시인이 되려는 야망속에서 “차이에 대한 유익한 인식”(177)을 회피했으며, 그의 시에서 노예제나 빈곤 등 사회문제가 언급되거나 계급, 인종, 성에 따른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기는해도 이들이 상호작용하는 실질적 내용은 결여되어 있다고 말한다(182). 그는 또한 국가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경쟁적 집단으로 구성되어있다는 이해가 휘트먼에게는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디모크(Wai Chee Dimock) 역시 심슨과 비슷한 입장에서 휘트먼이 칸트(Emmanuel Kant)처럼 도덕성을 담보할 보편적 기준을 위해 구체적 개별성과 우연성(contingency)을 억압했다고 지적한다. 디모크는 휘트먼의 시가 어떠한 우연성도 허락하지 않는, “인간 생활의 밀도와 결”(9)이 결여된 텍스트이며, 형식상으로만 민주적이지 공적 영역과 갈등·긴장 관계에 있는 개별적 차이들에 대한 의식은 빈약하다고 말한다(117-20).9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휘트먼의 유토피아는 안일한 이상주의나 비현실적 정치적 몽상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서 비판받고 있는 그의 보편화의 욕구나 팽창적 자아의 양상이 정말로 어떠한지를 냉정하게 살펴볼 필요가 생긴다.

    휘트먼의 자아는 육체적 존재로서 스스로를 인식하며 “내 자신의 몸이 확장된 것”(the spread of my own body CP 211)으로 다른 존재를 느끼면서 그 친근성을 열정적 언어를 통해 공적 영역으로 전이시키는 활동 속에 나타난다. 여기에서 시인은 자아 예찬 속에서도 자신과 타자의 차이 속에 드러나는 공통의 심리적 연대나 일치감을 인지하거나 추구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즉 휘트먼의 보편적 자아란 추상화된 관념이 아니라 자아에 대한 살아있는 인식과 구체적 세계에 대한 생생한 접촉에 의해 매개되며, 휘트먼의 타자 역시 대상화되지 않은 채 주체와의 육체적 교류를 통해 일시나마 역사적 압력을 넘어 차이나 갈등을 극복한 황홀경 속에 나타난다. 따라서 그의 국가나 공동체의 비전은 우연성과 특수성을 사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에 기반하며, 타자에게 자신과 동일한 물질성을 인정하고 구체적 조건 속의 존재를 접촉하고 느끼면서 성취되는 비전이다. 이는 또한 각 개인을 다르게 만드는 것이 오히려 ‘우리’라는 공통의 접점을 만 드는 조건이라는 역설적 인식이기도 하다.

    이 시는 화자가 얼핏 “틈새”를 통해서 본 비전을 담고 있는데, 이는 “노동자와 운전사 무리”사이에 화자가 “눈에 띄지 않게”참여자이자 관찰자로 가담하고 있는 구체적 장면을 묘사한다. 화자는 음주와 욕설로 시끄러운 배경 속에서도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 충만한 순간을 보낸다. 동성애자의 사랑의 순간을 포착한 이 장면은 그 내용 자체만으로도 급진적인데, 흥미로운 것은 휘트먼이 이를 특별한 기교 없이 자연스러운 실제 삶을 순간적으로 포착한 것인 양 제시한다는 점이다(Martin 80). 휘트먼은 노동자나 운전사들과 같이 권력에서 소외된 주변적 위치와 친근하게 밀착하며, 거리낌없는 신체적 접촉과 심리적 공감 속에 “만족하며 행복해”한다. 로우(John Rowe)는 휘트먼의 유토피아가 시인이나 일반 노동자를 육체 활동이란 기준으로 동일하게 취급한다는 점에서 정신을 우위에 놓는 에머슨이나 쏘로우(Henry David Thoreau)의 이상주의보다 진일보한 민주주의 비전이라고 평가한다(147). 휘트먼의 자아는 손쉽고 자연스럽게 계급적, 성적, 인종적 경계를 넘나들면서 타자와 구체적으로 접촉하고 느끼며 그 황홀경을 노래한다. 이는 단지 사랑하는 남성뿐만 아니라 노예나 창녀를 비롯한 다수의 소외된 타자들에게까지 미치는 깊고 넓은 교감의 시도이자 사회와 권력이 구획해놓은 온갖 경계들의 결정력을 아무렇지 않게 무력화시키는 놀라운 전복의 힘이기도 하다.

    포운(Byrne Fone)은 휘트먼이 강렬한 동성 사랑을 표현할 때 흔히 언어가 아닌 침묵을 사용한다고 하는데(164), 이는 휘트먼 특유의 광범위하면서도 장황한 목록(catalogue)과는 정반대의 절제되고 압축적인 형식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위의 시를 비롯한 『창포』의 많은 시들의 차분한 어조나 부드럽고도 내성적인 음율, 한 순간에 초점을 맞춘 이미지 전개 방식 등에선 「나의 노래」에서 드러나던 미대륙과 세계, 우주를 말하던 거대한 자아가 아니라 타자와 공존하며 친밀성 속에 녹아든 수용적 자아가 나타난다. 잉링은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창포』가 제시하는 유토피아의 순간, 즉 기존 질서를 대치하며 들어서는 놀라운 현재적 실천으로서의 유토피아의 모습이라고 말한다(144). 휘트먼의 유토피아는 완벽한 미래의 상이나 특정 장소의 정치지리학적 의미와는 거리가 먼 일련의 전복의 순간들이자 현재적 실천의 영구적 움직임 속에서 찾아진다. 자신을 독특한 개체이자 보편적 존재로 느끼는 휘트먼의 자아는 구체성에 천착하면서도 인간의 연대를 지향하고, 어떠한 목적 없이 스스로의 물질성을 향유하면서도 다양한 차이를 가능케하는 열린 유대를 모색한다. 그리고 이 지치지 않는 운동성 속에서 휘트먼은 지금, 이곳에서 실천 가능한 동성애 유토피아를 제시하는 것이다.

    많은 휘트먼 연구자들은 『창포』시편이 소외나 절망감 등 휘트먼 시 중에서도 보기 드문 정서적 폭과 갈등을 드러내고 있기에 임상적 모델에 입각해 그가 ‘비자연적인’동성애에 빠져있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자연과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죄의식, 불안, 후회 등을 표현한다고 말한다.10 그러나 이러한 지적들은 부분적 해석에 그칠 수밖에 없는 것이, 휘트먼이 『창포』에서 죄의식, 불안, 후회 등의 정서를 주변성에 대한 인식으로 변화시키면서 보편적 연대감으로 승화시키는 차원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동성애로 인해 자연이나 사회로부터의 소외나 절망, 불안을 경험하긴 하지만 휘트먼은 단순히 여기에 머무르기보다는 이를 적극적 의미에서 새로운 유토피아 비전으로 승화시킨다.

    휘트먼의 유토피아는 모든 남성들의 연대 가능성을 보면서 이를 “고귀하고도 당당한 우정”으로 발현시키기 위해 타자를 전적으로 수용하며 그려내는 시적실천 속에서 드러난다. 그의 유토피아는 지역성을 넘어서 보편적 연대를 지향하며, 정치, 경제, 문화적 경계들을 가로 질러 어디서나 평등하게 작용하는 남성간의 본능적 이끌림에 기반한다. 휘트먼의 동성애는 지배 이데올로기와 권력, 관습과 통제들을 전복시키며 미국적 민주주의를 현실화시킬 수 있는 동력으로 서, 『창포』의 일련의 시들(“For You O Democracy” CP 272, “This Moment Yearning and Thoughtful” CP 280-81, “I Dream’d in a Dream”CP 284)은 이러한 동성애적 유대로 맺어진 동지들과 연인들이 이룩할 이상 사회에 대한 믿음을 표현한다. 동성애자의 급진적인 정치적 위치는 「내가 날 저물 때 들었지」(“When I Heard at the Close of the Day” CP 276-77)나 「우리 두 소년이 함께 붙어서」(“We Two Boys Together Clinging” CP 282) 같은 시들에서처럼 자부심과 환희를 동반하는 ‘차이’에 대한 인식과 함께 한다. 사실 『창포』의 리얼리즘은 동성애와 연관된 다양한 감정들의 밝고 어두운 음영들을 가장 사적인 차원에서부터 시작하여 유토피아 비전 속에 재현되는 공적 담론으로 승화시켜 간다는 데 있다.

    휘트먼은 공적 목소리를 취할 때나 권위 있는 시인의 퍼소나를 내세울 때에도 기존 권력을 이상화시키거나 강화시키지 않으며 담론상의 권력을 획득하려는 의도를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휘트먼은 탈주관적 영역에서 거대한 성찰적 기쁨을 해방시키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데, 그의 분출된 쾌락은 많은 경우 기존 질서나 관행들과 갈등을 일으키며, 갈등의 최종 심급에서는 기존 이데올로기가 아닌 개인의 사적 가치가 우선된다. 위의 시는 바로 그러한 특징을 잘 보여주는데, 여기에서 휘트먼은 군함이나 대도시로 상징되는 군사적, 정치적 권력과 거리를 두며, 심지어 자연 묘사라는 문학적 전통도 무시하면서, “소박한 두 남자”의 사랑하는 모습을 재현 대상으로 삼겠노라 선언한다. 이 두 남자는 어떠한 사회적 중요성도 지니지 않은 보통 남자들로서 서사시의 남성들이 보여주는 전쟁이나 기타 공동체 운명과 관련된 영웅주의와는 거리 먼 사람들이다. 두 남자의 키스는 동성적 사랑과 애정의 표현으로서 기존의 동성사회적 권력의 기반을 허물며, 이를 반영하는 서사시를 비롯한 고전적 장르의 전제 역시 허문다(Martin 81). 군중들 속에서 거침없이 상대를 껴안고 키스를 나누는 두 명의 남자는 휘트먼의 유토피아가 남성 간의 자유롭고도 공개적인 애정 교환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어떤 외재적 권력도 침해할 수 없는 남성 간의 가장 친밀한 접촉이며, 언어와 텍스트, 독자 외에는 어떠한 것도 게재되지 않은 관계에 대한 비전이다. 이렇듯 가장 사적인 영역에 충실한 휘트먼의 비전은 세속적 권력과 동성애를 대척점에 세우고 동성 간의 서정적 사랑을 어떤 정치적 역사적 문제보다 우선시한다. 휘트먼은 사적관계의 충일함을 성취하지 못하는 어떠한 사회적 전망도 의미있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듯 그의 텍스트의 급진성은 동성애라는 억압적이면서도 금기적 경험을 권력과 위계, 착취에 근거하지 않는 사회적 관계에 대한 전망으로 자연스럽게 발전시켜가는 것에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그의 시를 진정한 유토피아 텍스트로 보게 만드는 이유이다.

    이 시에서 화자는 “제도를 파괴하려 했다”는 공격에 직면하여 이를 아이러닉한 어조로 받아내면서 자신은 제도들을 “찬성하지도 반대하지도 않으며”그보다는 오히려 기존 제도를 대체하는 동지적 사랑을 제시하겠다고 말한다. 가상의 “비난”을 상상하며 자기변호를 하고 있는 모습은 휘트먼이 자신의 텍스트가 지닌 전복성과 그것이 불러일으킬 사회적 반향을 얼마나 깊이 의식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동성애는 모든 제도들을 파괴시키는 제도이자 “어떠한 체계나 규칙, 수탁기관이나 어떠한 입론들”도 제공하지 않는, 모든 억압의 해체속에 존재하는 특수한 존재 양태로 드러난다. 휘트먼은 미국의 모든 도시와 자연을 아우르는 “동지의 진정한 사랑”이라는 제도를 만들겠다고 공언하는데, 여기에서 그의 유토피아는 특정 장소나 목적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서로에 대한 사랑 외에는 어떠한 법도 허용하지 않는, 욕망의 유동성 외에는 어떠한 기초도 갖지 않는 사회적 관계로 재현된다는 점에서 기존 유토피아 담론과 차별된다. 휘트먼의 유토피아는 권력과 권위의 중심을 해체하면서 기존 질서를 동성애의 유희적 방식으로 새롭게 상상하는 것 속에서 얻어진다. 이는 지금 이곳에서 펼칠 수 있는 현재적 의미와 구체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미래로 유예되는 거창한 욕망의 투사물인 기존 유토피아 담론과 다시 한번 차별된다. 유토피아는 항상 그러했듯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고 또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것을 지칭한다고 할때, 휘트먼의 동성애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고 언어화하면서도 지금 이곳에서 실현가능한 현재적 가치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더군다나 그의 유토피아가 철저히 현실을 반영하고 사회의 억압과 금기, 모순과 차별을 가로질러 배치된다고 할 때, 그의 텍스트는 단순한 수사적 구성물을 넘어서는 급진적 정치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지적대로 “나”라는 것이 타자의 존재에 의존하며 근본적으로 간주관적 성질을 지닌다고 할 때(79-80), 유적 연대나 넓은 차원에서의 정체성 추구는 불가피한 인간의 존재 조건일 수 있으며, 이런 면에서 휘트먼이 제시하는 국가나 공동체 개념은 현실 속의 건강한 자아가 지니는 당연한 지향과 운동성이라 할 수 있다. 휘트먼의 텍스트, 특히 동성애 텍스트 『창포』는 최근 비평이 간과하고 있는 부분, 즉 휘트먼의 자아가 얼마나 특수하고 구체적인 개별성으로부터 시작되는지, 또 그 자아가 공적/사적 영역을 넘나들면서 어떻게 통합적이고도 역동적인 자아의 현실태를 구현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예이다. 사실 공적 영역이란 본질적으로 다양한 사적 영역들의 얽힘을 추상화한 공존의 자리이자 주체가 스스로를 돌아보고 실현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최근 비평이 전제하는 사적 자아와 보편적 자아의 구분은 단순한 이분법이란 개념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휘트먼은 텍스트를 통해 어떠한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려하지 않으며 역사를 해석한다거나 현실적 대안을 찾지 않는다. 대신 그는 우연성과 차이에 기반한 다양한 주체들의 움직임을 역사 형성의 근본적 힘으로 보면서 이들이 지향하는 넓은 정서적 연대와 보편적 합의의 근거들을 탐색한다. 휘트먼의 자아가 보여주는 공동체와의 상상적 동일시는 단순한 추상화나 일반화가 아니라 자아 성찰에 기초한 자발적 연대에 대한 지향이며, 또 집단이 이미 동의한 가치들의 재확인 과정이 아니라 집단이 동의할만한 새로운 가치들을 한 개인으로부터 찾아가는 미래적 움직임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휘트먼의 동성애 텍스트는 욕망과 성, 쾌락을 현실과의 대척점에 세우면서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현실을 재구성할지 꿈꾸게 만들며, 그 “황홀하면서도 독특한 에로스”(Mullins 178)로써 제도와 구조와 권력을 철저히 사유하게 만드는 놀라운 상상의 정치를 가능케 한다.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급진적이며 구체적이면서도 미래지향적인 힘, 그 생생한 비전 속에 휘트먼의 동성애 유토피아는 영원한 현재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6「이끼 덮힌 살아있는 떡갈나무」가 『창포』로 확대 발전되는 와중에 휘트먼은 독자를 좀 더 명료하게 상정하게 되고, 문화적 금기를 더 예리하게 의식하게 되며, 이에 따른 긴 장과 갈등 역시 깊어지는 양상을 보인다(Helms 193).  7비취(Christopher Beach)는 휘트먼의 이러한 입장을 강력한 독립성 주장을 통해 문화적으로 자신을 차별하려는 휘트먼의 문화정치적 전략이라고 해석한다(3).  8이 시기 그의 급진적 시학은 크게 두 가지에 초점이 맞춰 진행되는데, 첫째, 점점 사적이 되가면서 금기의 영역으로 이관되는 몸과 성애에 대한 공적 담론을 지속적으로 확대시키는 것, 둘째, 몸과 성애를 문학 작품을 포함한 글쓰기 일반을 위한 주제로 강력하게 인식시키는 것이 그것이다(Moon 6).  9최근 비평가들은 국가라는 거대 개념 대신 계급, 성, 인종 등의 세분화된 범주를 대안으로 제시하는데, 문제는 이러한 대체적 범주들 역시 국가 개념과 마찬가지로 재현과 함께 다른 층위를 억압하기 시작하며, 이런 면에서 모든 상상적 동일시를 의심하는 해체작업 외에는 현대 비평이 제시할 수 있는 논리적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은 계급, 성, 인종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사회적 프로젝트를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또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자아의 복합적 운동성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부분적 시각이자 제한된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알티어리(Charles Altieri)가 전체주의적이면서도 추상화된 억압적 층위로서의 국가가 아니라, 공동체 일원들에게 고통 분담의 책임감을 공유케하고 더 큰 지평에서 정체성과 자아 의식을 부여하는 순기능적 국가 개념을 제안한 것(296)은 휘트먼 연구의 진일보한 입장이라 할 수 있다.  10이런 입장의 대표적인 비평은 다음과 같다. Stephen A. Black, Whitman’s Journey into Chaos: A Psychoanalytic Study of the Poetic Process (Princeton: Princeton UP, 1975); Clark Griffith, “Sex and Death: The Significance of Whitman’s‘Calamus’Themes”Philological Quarterly 29 (1960): 18-38; Edwin Haviland Miller, Walt Whitman’s Poetry: A Psychological Journal (New York: NYUP, 1968).

    IV. 휘트먼, 그 이후

    휘트먼이 제시한 동성애 유토피아는 이후 크레인과 긴즈버그로 이어지며 명확한 하나의 전통을 성립시킨다. 휘트먼은 후대 시인들의 유토피아 기획에 영감과 영향을 주는 존재로서 지속적인 모방의 대상이 되거나 이들의 작품 속에 구체적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후대 시인들에게 미국은 더 이상 휘트먼에서처럼 쓰여지지 않고 언어화되지 않은 유토피아의 기호가 아니라 구체적인 정치 지리적 실체가 되어 그 상상적 가능성을 상실하며, 따라서 이들의 시 속에서는 유토피아보다는 디스토피아의 비전이 지배적이 된다. 이들은 휘트먼처럼 동성애를 인간과 세계에 대한 해방적 비전으로 나가는 출발점으로 만들 수 없었으며, 따라서 동성애의 정치성을 극대화하기보다는 성기중심적 욕망으로 축소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게 나타난다. 긴즈버그의 「캘리포니아의 슈퍼마켓」(“A Supermarket in California”)같은 예를 보면, 긴즈버그가 휘트먼을 “사랑하는 아버지”(dear father), “외롭고 늙은 용기의 스승”(lonely old courageteacher)이라고 호명하며 젊고 아름다운 미국 남성들의 세계인 캘리포니아 슈퍼마켓을 휘트먼처럼 노래하고자하나, 이는 동성애자로서의 죄의식이나 두려움, 소외의 느낌을 완화시키지 못한 채 미완의 예찬으로 끝나고 만다(Ginsberg 144). 후대 시인들은 휘트먼이 노래한 미국 삶에 대한 긍정을 공유할 수 없었으며, 이보다는 오히려 고립과 외로움, 꿈의 좌절에 대한 분노가 주된 정서로 등장하게 되고, 심지어 유토피아의 좌절이 수동적 성욕 속에 머물려는 퇴행적 정서로 나타나기조차 한다.

    휘트먼은 동성애가 개념화되기 이전, 자신의 텍스트 속에 하나의 유토피아 담론으로 이를 기입한다. 휘트먼의 동성애는 개인의 성적 취향의 문제에 머물지않고 광범위한 연대를 가능케하는 잠재력으로, 또 진정한 민주주의와 평등을 가능케 할 사회적 가치로서 다루어진다. 따라서 그의 동성애 유토피아는 일차적으로는 한 개인의 욕망의 투사이지만 한편으로는 급진적 현실 비판이자 구체적인 현재적 실천이기도 하며, 궁극적으로는 미국을 바라보는 역사적 전망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동성애 텍스트 『창포』는 휘트먼의 보편주의나 이상주의에 대한 우리시대 비판이 얼마나 그의 자아나 텍스트의 특수성을 무시한 피상적 접근에 불과한지 보여준다. 물론 19세기의 휘트먼이 상상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자본의 질서가 공고하게 세계를 장악하고 위협적으로 재편하고 있는 현대에 휘트먼의 유토피아는 애당초 쉽사리 꿈꿀 수 있는 내용이 아닐 수 있다. 더구나 미국이 더 이상 민주주의의 신세계가 아니요 초강대 패권국가로서 그 이상적 내용을 소진한 21세기에는 휘트먼의 비전보다는 그 비전의 상실을 울부짖는 현대 시인들의 노래가 더 현실적일 수 있으며, 휘트먼의 유토피아는 일정한 역사적 시기에나 가능했을법한 또 하나의 미국의 꿈의 기록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모든 유토피아 담론의 전제가 그러하듯, 현실을 상상하고 제도와 구조와 권력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새롭게 바꾸는 것이 현실에 책임 있게 다가서는 방식 중 하나라면, 가장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영역을 아우르며 유래 없이 독특한 동성애 유토피아를 그려낸 휘트먼의 비전은 지금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새로 이 읽게 하고 확대된 지평에서 미래를 열어가게 만든다는 것에 그 현재적 의미가 있다. 이런 면에서 휘트먼의 시는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살아있는 유토피아이자 해방의 공간으로, 또 언제나 새로이 해석되는 전복의 언어로 남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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