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the significance of Buddhist stone art in the cultural zone of Mt. Bukhan. Mt. Bukhan witnessed the prevalence of Buddhist culture in and around it since the introduction of Korean Buddhism and served as the center of Buddhist culture in the nation, where new Buddhist temples continued to be built from the Three Kingdoms Period to the Joseon Period. Of the characteristics of its Buddhist culture, it is very noteworthy that the construction of military temples in and around it in the latter half of Joseon supported the function of Buddhist temples as basic places of worship. These military temples were closely related to the mountain’s geopolitical location, traffic routes, and position in the national defense system-- its mountain fortress was an important defense facility.
The stone art works of Mt. Bukhan can be categorized into various types, including stone stupas, stone pagodas, rock-carved Buddhas, stone Buddhas, towers and monuments (stone monuments), stone lanterns, flagpole supports, and rock-carved sarira pagodas. There are diverse types of stone art left on the mountain. As for its period characteristics, it is clear that the Buddhist art of Silla spread even to the Gyeonggi region, and that most of the works of stone art were created during the first half of Goryeo and the latter half of Joseon. Starting in Goryeo, the Buddhist temples of the mountain maintained close relations with the royal court by operating as the royal buddhist shrine for the royal family. In the latter part of Joseon, the construction of the Bukhan mountain fortress became the most important opportunity to produce stone art. As for the distribution of the stone artwork, it was usually created in the west part of the mountain from Unified Silla to the first half of Goryeo and in the southern and eastern parts of the mountain from the latter half of Goryeo to the latter half of Joseon. It is estimated that central Buddhist temples of the mountain changed due to Silla's military goal of advancing toward the west coast along the Han River in its early days and the construction of the Bukhan mountain fortress in the latter half of Joseon to protect the capital city.
Finally, the stone art of Mt. Bukhan holds very high significance in art history because various types of stone art continued to be created on and around the mountain, the stone artwork of the mountain reflected representative styles for each period, and e rare and ofthe works produced on the mountain exemplified rare and unique styles.
고대부터 명산(名山)은 산신신앙, 산천제 등 산악신앙과 연관이 깊었으며 불교가 전래된 이후에는 불교와도 밀접한 관련을 갖고 많은 사찰과 불교미술이 조성된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으로 볼 때 명산에 불교와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며, 어쩌면 명산으로서의 인문지리적 중요성이 불교유적 형성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서울과 경기북부지역을 아우르고 있는 북한산은 불교가 전래된 이래 신라, 고려, 조선까지 불교 신앙처로 중요시되었고 그 결과 꾸준히 불상, 불화, 석탑, 부도 등 다수의 불교미술이 조성되어왔다. 또한 북한산의 봉우리 이름인 문수봉, 보현봉, 나한봉, 승가봉, 의상봉, 원효봉 등은 불교와 관련된 이름으로 이 역시 북한산이 이 지역 불교 신앙 중심지로 역사·지리적 중요성을 주목해볼 수 있다. 이를 반영하듯 북한산 일원에는 시대적 흐름과 다양한 정치·사회적 사건 속에서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으나 통일신라~고려 및 조선 초기까지의 대부분의 사찰은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북한산에 축조된 북한산성은 북한산 일원의 사찰 건립과 운영에 큰 변화의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현존하는 북한산 일원 사찰의 경우 북한산성의 축조와 관리를 위해 승영사찰(僧營寺刹)로서 조선 후기에 중건되거나 건립되어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산 내 사찰 건립은 불교 신앙 중심지이자 북한산성 관리를 위한 승영사찰 건립 등 인문지리적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배경 아래 북한산 내 사찰 건립은 건축, 불상, 공예, 회화, 석조미술 등 다양한 불교미술의 조성도 가져왔으며 현재는 대부분 고려와 조선시대의 것들이 전해지고 있다.
먼저 북한산의 불교유적에 대해서는 30여 년간 북한산성의 축성과 승영사찰 창건과 중창에 큰 공적을 쌓은 화엄사 승려 계파 성능(桂波 聖能)이 남긴
북한산 불교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는 중흥사지, 삼천사지, 서암사지, 부왕사지 등 사지에서 주로 실시되었다. 중흥사지는 1996년 1차 발굴조사를 실시
지금까지 북한산 내 불교유적과 불교미술에 대한 선행연구를 살펴본 결과 사지, 불교조각, 석조미술 등에 대한 현황 파악과 사지 또는 유물 중심의 개별적인 고찰은 어느 정도 이뤄진 것으로 생각되나 북한산이라는 문화 영역에서 갖는 의의를 밝히기 위해서는 이들을 종합적으로 고찰하는 시도가 필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중 석조미술은 다른 분야에 비하여 이전이 어렵고 대부분 조성 당시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북한산 일원 불교미술의 시대별 추이와 전개과정을 살피기에 비교적 용이하다.
이에 본 논문은 북한산 불교 석조미술에 대한 종합적 분석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연구 방법은 양식 분석 위주로 시대적 특징을 파악하는 미술사적 방법을 기초로 하며 문헌자료, 발굴조사 성과 등의 자료를 반영하고자 한다. 이에 선행연구 성과를 검토하여 양식 및 시대별 특징을 확인할 수 있는 북한산 불교 석조미술 39기를 연구대상으로 선별하여 석조미술의 현황 및 양식 특징에 대해 고찰하여 시대별 특징과 분포 상황이 의미하는 지리적 특징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 북한산의 인문지리적 환경, 교통로 및 관방체계와 석조미술의 조성이 어떠한 관련성이 있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북한산 불교 석조미술의 미술사적 의의에 대해서 고찰해보고자 한다.
북한산이 있는 서울·경기지역
7세기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북한산에 사찰이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데 장의사(莊義寺), 안양사(安養寺), 청담사(靑潭寺), 승가사(僧伽寺)가 기록과 절터 유적으로 확인된다. 장의사(莊義寺)는 태종무열왕이 659년 황산벌에서 백제와 싸우다 전사한 장춘랑(長春郞)과 파랑(罷郞)의 후손들에게 상을 내리고 명복을 빌기 위하여 북한산주에 세운 사찰로 현재 세검정초등학교 자리이다. 절터의 흔적은 거의 확인할 수 없으나 당간지주가 남아 있어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장의사는 고려 초 원종대사 찬유(燦幽, 869~958)가 구족계를 받았으며 법인국사 탄문(坦文, 900~975), 자정국존 자안(子安(彌授), 1240~1327) 등 고승들이 주석했으며 예종, 인종, 의종 등이 남경을 순행하면서 다녀가는 등 지속적으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또한 조선 태조~명종에 이르는 역대 왕조 실록의 기록을 보면 장의사에서 기우제(祈雨祭), 수륙재(水陸齋)를 지내거나 선왕 및 왕비의 기망재(祈望齋)를 지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 왕실과의 밀접한 관계는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후 1504년 2월 연산군이 장의사를 철거하고 불상과 승려를 삼각산 안팎의절로 내보내고
안양사(安養寺)는 661년 고구려 장군 뇌음신(惱音信)과 말갈 장군 생해(生偕)가 술천성(述川城, 지금의 여주)을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는데, 북한산성의 성주(城主) 동타천(冬陀川)이 적군의 공격으로 파괴된 망루(望樓)를 보수하기 위해 안양사 창고를 헐어 그 재목을 사용하였다는 기록
승가사(僧伽寺)는 756년 신라 수태(秀台) 스님이 서역 출신 승가대사(僧伽大師)의 행적을 듣고 그를 경모하는 뜻에서 절을 지어 굴에 승가대사의 상을 모시고 승가사라 했다고 전한다.
고려시대에 들어서 북한산의 사찰들은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앞서 언급한 장의사를 비롯하여 청담사는 목종(穆宗)이 태후의 원찰로 삼은 사찰
삼천사(三川寺)는
이밖에 북한산성 대남문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문수사(文殊寺)는 고려 예종 4년(1109년)에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1167년 의종이 승가사, 장의사에 행차할 때 문수사에도 행차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도선사(道詵寺)의 전신은 도성암(道成庵)인데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구체적인 기록이나 이를 입증할 만한 유물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고려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전하고 있어
조선 초기에는 고려 때 건립되어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사찰들이 여전히 유지되며 왕실과 밀접한 모습을 보이는데 위에서 언급한 장의사, 진관사, 승가사, 도선사 등을 볼 수 있다. 조선 후기가 되면 북한산 사찰건립은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도성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산성을 축조하기로 했고 숙종 37년(1711년) 10월 북한산성이 축성되었다. 이때 전국 사찰의 많은 승려들이 축성과 방위에 동원되었고 승군이 주둔하는 승영사찰이 성내에 새로 건립되게 된다. 북한산성 승영사찰의 건립은 화엄사 승려 계파 성능이 산성에 주둔한 승도(僧徒) 전체를 지휘·감독하며 이뤄졌다. 성능은 산성이 완공된 후 승대장 겸 팔도도총섭의 직책을 맡아 30여 년간 머물면서 산성 내의 승군을 지휘·감독하였다. 축성 당시 산성 내에는 중흥사(重興寺)만 존재하였으므로 축성 및 승군이 머물기 위한 사찰 건립이 필요했다. 중흥사는 1713년 136칸 규모
지금까지 기록이나 유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북한산 사찰 현황을 창건시기를 기준으로 정리하면 다음의 <표 1>과 같다.
이를 종합해보면 북한산은 불교가 전래된 이후부터 불교문화가 성행했으며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꾸준히 사찰이 건립된 불교문화의 중심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많은 사찰들이 고려~조선시대 동안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고려시대는 서울이 남경(南京)으로서 중요시되었고, 조선시대는 도성과 가까웠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가장 많은 사찰 건립과 중창은 조선시대에 이뤄졌는데 조선 후기 북한산성 축성으로 인해 승영사찰 건립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나아가 조선 후기 북한산 승영사찰의 건립은 기본적으로 신앙 기도처로서 사찰의 기능을 가졌지만, 북한산성 축성이 중요 배경으로 작용한 만큼 북한산의 지정학적 위치, 교통로, 관방체계와도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는 점이 매우 주목되는 북한산 불교문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미술 중에서 석조미술은 비교적 원위치를 고수 하고 있고 재질 특성상 내구성이 강하여 고의에 의한 훼손을 제외하면 대체로 제작 당시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사찰의 운영시기 및 불교미술의 변화와 전개과정을 검토하는 데 유용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불교 관련 석조미술은 석탑, 석불, 석조부도, 석비(탑비), 당간지주, 마애불, 마애사리탑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북한산 불교 석조미술을 유형별로 살펴보면 석조부도, 석탑, 마애불, 석불, 탑비(석비), 석등, 당간지주, 마애사리탑 등으로 구분되는데 비교적 다양한 유형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수량으로 보면 석조부도가 가장 많이 남아 있고 석탑, 석불, 마애불 순으로 확인된다. 석조부도는 대지국사탑, 원증국사탑 등 고려시대 2기를 비롯하여 주로 조선 후기에 석종형 부도가 집중되어 있다. 이와 함께 탑비 3기는 대지국사탑, 원증국사탑, 성월당대선사탑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석조부도와 세트로 구성되어 있다. 석탑은 대부분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이 남아 있으며 도선사에 조선 후기에 건립된 칠층석탑 1기가 확인된다. 마애불은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삼천사지 마애여래 입상, 도선사 마애불입상이 대형 암벽에 조성되어 있으며 상운사에 선각마애불좌상 1기가 확인된다. 석불은 진관동 석조보살입상, 진관동 아미타불좌상과 함께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상이 고려시대의 것으로 잘 남아 있으며 상운사 석조여래좌상은 1497년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후기에는 도선사 석조독성상 1기가 확인된다. 석등은 삼천사지에서 발견된 방형 연화대좌가 석등 부재로 확인되었고 도선사에 조선 후기 건립된 석등 1기가 확인된다. 당간지주는 장의사지 당간지주 1기만 확인되며, 마애사리탑은 도선사 김상궁 마애사리탑 1기가 확인된다. 이들 가운데 원형이 잘 남아 있는 주요 석조미술을 중심으로 양식 특징을 검토하여 북한산 불교미술의 전개 양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북한산 사찰 건립 현황
대지국사 부도는 발굴조사에서 지대석과 측면에 안상이 조각된 하대석만 확인되었고 탑신부와 상륜부는 결실되었다. 대지국사탑비는 비신은 파손되었고 귀부와 이수는 분리되어 있다. 귀부는 지대석과 동일석으로 조성되었고 지대석은 방형이나 상단은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하였다. 앞·뒷발 모두 ‘ㄴ’자형으로 전방을 향하고 있으며 발 부분에 귀갑대를 접어 올려 표면에 주름문을 표현 하고 있고, 다리 뒤쪽으로는 중첩된 타원형 모양으로 주모(肘毛)
원증국사 부도는 태고 보우(1301~1382)의 사리탑으로 기본적으로 팔각원당형 부도의 구성을 따르고 있다. 장대석 8매를 이용하여 지대석을 마련하였고 그 위로 기단부를 올려놓았다. 기단 하대석은 평면 방형에 측면마다 이중의 음각선으로 장방형 액(額)을 구획하여 장식하였고, 상면에는 팔각형의 낮은 받침을 두고 그 위로 8엽의 복련 연화문을 조각하여 중대받침을 두었다. 중대석은 팔각형으로 각 모서리마다 원형으로 기둥을 모각하였고, 각 면은 장방형 액을 구획하고 그 안에 십자형으로 꽃문양을 장식하였다. 상대석은 하대석의 복련 연화문과 대칭을 이루는 앙련으로 연판 내의 고사리형 장식이 동일하다. 탑신석은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석종형으로 표면에 글자나 장식은 없다. 탑신석이 팔각형에서 원형으로 변화하는 것은 정토사 홍법국사 실상탑(1017년)에서부터 나타나는데 송광사 불일보조국사 감로탑(1213년), 연탄 심원사 석조부도(고려 말기) 등에서 볼 수 있다. 옥개석은 팔각형으로 아래 부분에 탑신석을 끼우는 1단 받침을 두고 그 외곽으로 16엽의 연화문을 배치하였다. 옥개석은 팔각형으로 전체적으로 두껍고 둔중한 인상인데 모서리 귀꽃 장식 높이만큼 처마를 두껍게 표현하였다. 귀꽃 문양은 상대석, 하대석 연화문 연판 내에 장식된 문양과 유사하다. 두꺼운 처마 부분에는 장막형 장식이 3개씩 드리워졌다. 이러한 장식은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 나주 서문 팔각 석등, 전(傳) 선봉사지 칠층석탑
조선 후기에는 주로 석종형 부도가 남아 있는데 삼천사, 태고사, 봉성암, 승가사, 진관사 등 고루 분포되어 있다. 태고사에는 조선 후기 석종형 부도 3기가 나란히 있는데 3기의 형태가 전부 다르다. 승가사 성월당대선사탑은 일반적인 석종형 부도의 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탑신 표면에 ‘성월당대선사(城月堂大禪師)’라고 당호가 음각되어 있다. 성월당은 1780년 승가사를 재건한 승려로, 탑비의 ‘가경7년임술8월일립(嘉慶七年壬戌八月日立)’ 명문으로 1802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석조부도 중 특히 승영사찰 중창을 주도한 성능대사의 것으로 전하는 석조부도가 남아 있는 것도 주목되는 점이다. 전(傳) 성능대사의 부도로 알려진 석조부도는 봉성암 사역 내에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팔각원당형을 유지하고 있는데 4매의 장대석을 엇물려 지대석을 마련하고 1매의 방형 하대석을 올렸다. 하대석 상면은 원형의 높은 받침을 마련하여 중대석을 받치고 있는데 모서리 부분은 중심이 안쪽으로 들어가 호형을 이루는 꽃잎 모양으로 조각하여 나름 장식성이 보인다. 중대석은 위아래가 눌린 원구형의 형태로 표면엔 아무런 조식이 없다. 상대석은 팔각형으로 측면에 한 단턱을 마련한 것 외에 별다른 장식이 없으나, 상면에는 모서리 각마다 음각선을 한 줄 새겨 약간의 장식성과 기능성을 더한 것으로 보인다. 탑신 역시 팔각형으로 표면에 별다른 조식이 없지만 위로 갈수록 둥글게 치석하고 있다. 옥개석은 아랫부분에 호각형의 여러 단을 조출하였고 지붕선은 완만하며 처마를 두껍게 표현하였다. 옥개석 모서리마다 귀꽃을 새겼는데 음각선으로만 고사리 문양을 장식하였다. 우동선은 두툼하게 표현하였으며 상륜부는 보륜과 보주를 올렸다.
전(傳) 성능대사 부도의 건립시기는 조선 후기로 추정되고 있으나 이와 유사한 작례로 용문사 정지국사 부도(1398년)를 볼 수 있어 검토가 필요하다. 먼저 용문사 부도의 경우 전 성능대사 부도와는 달리 상대석과 하대석이 연꽃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고, 비록 한 면뿐이지만 탑신석에 문비가 조각되어 있는 등 이전 시기의 부도들이 보여준 장식적인 요소가 여전히 남아 있어 각 부분에서 장식적인 요소들이 생략된 성능대사 부도는 조선 후기의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석탑은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영취사 오층석탑과 도선사 칠층석탑뿐이고 대부분은 탑재가 부분적으로만 남아 있다. 남아 있는 것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진관동 석탑재인데 측면에 안상이 장식된 석탑 기단석은 안상 내부에 꽃머리 장식 표현이 제천 사자빈신사지 석탑과 같은 요소로 고려 11세기 석조미술 특징으로 보인다.
북한산에 조성된 마애불 중 승가사의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은 통일신라 마애불 양식을 충실히 계승하면서 고려적인 요소가 반영된, 북한산에서 가장 대형의 마애불이자 가장 이른 시기의 불상이다. 화려한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있으며 선정인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발가락, 손가락, 가슴의 유두 표현 등이 매우 사실적이고 대담하며, 상호는 부조로 표현된 신체에 비해 거의 환조에 가까운 고부조로 표현하였다. 머리 위에는 연화문이 화려하게 장식된 팔각형의 보개석을 올렸으며 주변의 광배 바깥으로 사각형의 홈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보호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
진관동 자씨각 내 석조보살입상은 보관을 쓰고 여래형 대의를 입은 보살상으로 나말여초기에 등장하는 새로운 유형이다.
불상은 아니지만 승가사의 승가대사상도 석불의 한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승가대사상은 현재는 호분을 제거하여 원래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등신대의 크기에 결가부좌한 자세로 두건을 쓰고 있으며 왼손은 옷 속에 감추고 있고 가슴 앞으로 올린 오른손은 검지를 올리고 있는데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목에도 힘줄이 표현되어 있고 얼굴은 뺨과 이마에 주름까지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다. 승가대사상의 뒤에는 화려한 석조광배가 배치되어 있는데 뒷면의 명문을 통해 태평 4년(1024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등은 삼천사지 발굴조사 당시 B지구에서 방형 연화대좌가 발견되었는데 상면에 사각형의 홈이 시공되어 있어 석등 부재로 보인다. 조선 후기 건립된 석등은 도선사에 1기가 확인되는데 도선사 마애불과 칠층석탑이 조성되었던 무렵에 함께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석등은 방형 평면의 사각석등으로 대좌와 화사석까지 1석으로 조성되었고 옥개석은 별도의 1석으로 올렸다. 조선 후기 왕실의 원찰로 후원을 받았는데 이러한 이유로 왕릉의 장명등과 강한 친연성을 보이는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산에 남아 있는 가장 이른 시기의 석조미술은 통일신라 중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장의사지 당간 지주이다. 북한산 주변뿐만 아니라 서울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불교 관련 석조미술품이다.
마애사리탑은 도선사에서 용암문 방향으로 오르는 중간쯤 위치하고 있는데 상부에 사각형 홈을 마련하였고 하부에 일반적인 석비의 형태로 안쪽을 파내어 마애비를 새기고 ‘김상궁정광 화지사리탑(金尙宮淨光 花之舍利塔)’을 2줄로 음각한 후 왼쪽에 ‘동치계유10월일립(同治癸酉十月日立)’이라 음각하여 부도의 주인공은 김상궁이고 1873년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표 2 참조).
지금까지 북한산 불교 석조미술을 유형별로 구분하여 양식적 특징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조성시기를 함께 검토하였는데 시대별로 정리해보면 통일신라 1기, 고려시대 19기, 조선시대 18기, 근대 1기 등으로 39기를 확인하였다. 수량을 보면 고려~조선시대에 집중 조성되었는데 앞에서 살펴본 사찰 건립 현황과 같은 흐름을 보이고 있어 이 시기에 석조미술 조성이 매우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표 3 참조).
북한산 불교 석조미술 현황
시대별로 석조미술의 전개과정과 조성 흐름을 살펴 보면 삼국시대부터 북한산에 불교문화가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와 관련한 불교미술은 확인되지 않는다. 통일신라시대 석조미술은 장의사지 당간지주 1기만 확인되고 있다. 신라는 일찍부터 영역 확대를 위한 교통로를 사방으로 개설하였고 이는 통일의 기반이 되었으며 통일 후에는 이러한 교통로를 통해 경주 중심이었던 신라의 문화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는데 불교미술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9세기 신라 석조물은 전국에 걸쳐 분포되어 있으면서 각기 특정한 지역에 밀집되어 있는 현상을 볼 수 있는데 각 지역 내 주요 사찰이 건립된 명산(名山)을 중심으로 석조미술이 활발히 조성되었다.
[표 3] 북한산 불교 석조미술 유형에 따른 시대별 수량 현황
북한산 불교 석조미술 유형에 따른 시대별 수량 현황
고려시대는 전기·후기 모두 석조미술이 활발히 건립 되는데 고려의 수도가 개경으로 정해지자 서울지역이 남쪽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에 해당하고 이에 따라 남경이 설치되는 등 고려사회에서 중요한 지역으로 떠오르게 된다. 북한산은 파주-고양과 연결되는 지점이고 왕들의 행차를 위한 행궁이 파주 혜음원에 건립되게 되자 쉽게 접근이 가능했다.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건국 초기부터 숭유억불을 기조로 점차 불교가 위축되게 되자 북한산 불교문화도 새로운 사찰 창건보다는 기존 사찰의 중창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그러나 이들도 대부분 왕실의 후원이 있는 경우만 해당되었다. 따라서 북한산 불교 석조미술도 이 시기에 가장 적은 수량만 남아 있어 전반적으로 조선 전기의 상황을 대변해준다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는 임진왜란 이후 승군의 활약과 더불어 영·정조대의 문화 융성기를 맞아 많은 사찰들이 중창 또는 창건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불교미술 역시 활발하게 조성되었다. 특히 이 시기에 승군의 활약으로 인해 승려에 대한 예우가 높아지고 석조부도의 건립이 성행하게 되는데 북한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 후기 북한산 불교 석조미술의 폭발적 증가는 단연 석조부도로 조선 후기 석조미술의 전체 수량에서 50% 이상의 비중을 차지한다. 이는 북한산성의 축성에 따른 승영사찰이 중창된 것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승영사찰 중창을 이끈 계파 성능의 부도부터 다수의 석종형 부도가 전해 지고 있어 조선 후기 북한산에서 활약했던 승려가 매우 많았으며 승려들의 지위가 조선 전기에 비해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석탑, 석등, 마애불, 마애사리탑 등 다양한 유형의 조선 후기 석조미술이 도선사에 집중되어 있는 것도 주목되는 점인데, 왕실의 후원은 물론 김상궁 마애사리탑에서 보듯이 궁녀의 후원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왕실기도처로서의 중요성과 함께 이 시기 불교미술의 흐름을 종합적으로 살필 수 있는 좋은 사례로서 의의가 있다. 마지막으로 근대에 북한산에 조성된 인수봉 마애불은 북한산 불교미술의 흐름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북한산 불교 석조미술의 분포 현황을 살피기 위해 기본적으로 방위를 기준으로 지형과 능선 형태, 현재 주로 이용되는 등산로 현황, 사찰과 석조미술의 현황 등을 고려하여 네 지역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백운대·인수봉에서 북쪽 방향으로 우이령으로 내려가는 능선의 북쪽지역, 의상봉·증취봉·나한봉·문수봉 자락에서 삼천사·진관사 방향으로 내려가는 능선의 서쪽지역, 용암봉·일출봉으로 연결되는 북한산성 성곽을 포함하여 동쪽자락으로 내려가는 능선의 동쪽지역, 승가봉·비봉·향로봉으로 연결되어 그 아래쪽 능선으로 내려가는 남쪽지역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이렇게 구분한 지역별로 석조미술이 분포하고 있는 현황을 살펴보면 북쪽지역은 근대에 조성된 인수봉 마애불 이외에는 남아 있는 석조미술이 없으며 주요 사찰도 남아 있지 않다. 이는 인수봉 아래 지형이 험준하고 북쪽으로 교통로 상으로도 연결되지 않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생각된다.
남쪽지역에는 북한산에서 가장 이른 시기 석조미술인 장의사지 당간지주가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은 남쪽에서 서울로 진입할 경우 한강을 건너자마자 바로 맞닿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일찍이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차지한 후 영유권을 과시하기 위해 순수비(巡狩碑)를 세운 북한산 비봉(碑峯)은 한강과 그 이남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특히 서울을 관통하는 한강이 서해 쪽으로가는 것이 잘 조망되고 있어 한강유역과 서해로 진출하기 위해 북진한 신라에게 이 지역은 매우 중요한 방어 거점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북한산 불교 석조미술이 가장 많이 분포하는 곳은 서쪽지역과 동쪽지역이다. 그러나 두 지역에 조성된 석조미술을 살펴보면 집중 조성된 시기에서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대체적으로 서쪽지역은 고려 전기 석조미술이 분포 되어 있고 동쪽지역은 고려 후기에서 조선 후기의 석조미술이 집중되어 있다. Ⅱ장에서 살펴본 결과 고려시대 왕과 왕실 관련 인물들이 진관사, 승가사, 향림사, 신혈사, 문수사 등 주로 북한산 서쪽과 남쪽지역에 위치한 사찰로의 행차가 많았음을 확인하였다. 삼천사 주지로 있던 법경 스님은 현화사의 초대 주지로 임명되는 등 마찬가지로 왕실과 관계가 깊다. 이렇듯 북한산 서쪽지역에 고려 전기에 해당하는 사찰과 석조미술이 집중 분포되어 있는 것은 당시의 교통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려 전기에 개성에서 서울 방향으로 향하는 길은 개성-장단-적성-양주-의정부-서울로 통하는 길과 장단-임진나루-파주-고양-서울로 통하는 길, 두 가지였다. 전자는 삼국시대 이후 고려시대까지 계속적으로 사용되어온 길이고 임진나루와 혜음령을 연결하는 길은 주요 교통로로 사용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문종 21년(1067년)부터 남경을 건설하기 시작하면서 양주를 거치지 않고 파주를 거쳐서 남경으로 통하는, 즉 개경과 남경을 연결하는 가장 빠른 길인 파주-(혜음령)-고양 교통로가 새로운 교통로가 각광받게 되었다.
북한산 동쪽지역은 고려 후기부터 조선 후기까지의 석조미술이 집중되어 있다. 물론 서쪽지역과 남쪽지역 일대에도 조선 후기 석종형 부도가 확인되지만, 특히 동쪽지역에 다수 집중되어 있다. 고려 후기에는 태고 보우가 중흥사에 주석하면서 불사를 중창하고 태고암을 짓고 머물렀던 까닭에 보우의 부도와 탑비가 여기에 건립되었다. 그리고 조선 후기 석조미술의 증가는 북한산성의 축성이 계기가 되었다. 북한산성 주변의 승영사찰 가운데 석조미술이 남아 있는 곳은 상운사, 태고사, 용암사, 부왕사, 봉성암 등으로 상운사를 제외하면 모두 동쪽지역에 해당한다. 아무래도 승영사찰의 중심인 중흥사가 동쪽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이 일대가 석조미술 조성이 활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쪽지역에 해당하는 상운사도 조선 후기에 중 창된 승영사찰로 고려시대 석탑부터 석조미술은 아니지만 조선 후기 18세기에 조성된 목조아미타삼존불상이 남아 있는 등 조선 후기 북한산 서쪽지역에서 불교미술이 가장 활발했던 곳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동쪽지역에서 다수의 석조미술이 분포하고 있는 곳이 도선사인데, 조선 전기부터 왕실 원찰로서 사세가 매우 컸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후기 다시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중창된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 석탑, 석등, 마애불의 조성은 물론 법당과 대방, 칠성각 등의 중수와 신축이 있었는데, 칠성각 신축은 조선 후기 안동김씨의 중심인물로 세도정치를 폈던 김좌근(1797~1869)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북한산 불교 석조미술은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 조선, 그리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조성되었다. 이들은 시대 양식을 반영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한국 석조미술의 흐름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지만 북한산의 전체적인 불교문화 흐름 속에서 석조미술의 조성을 검토해본 결과 시대별로 분포 현황이 변화하고 다양한 유형이 등장하고 있으며 그 안에서 나름의 주목할 만한 양식 특징을 보여주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에 본 장에서는 지금까지 살펴 본 내용을 종합하여 북한산 불교 석조미술의 미술사적 의의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먼저 북한산 불교 석조미술 가운데 이전에 없던 새로운 유형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진관동 석조보살입상은 여래형 복식을 착용하고 있는 보살상으로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에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여래상이다.
다음으로 북한산 불교 석조미술 중 승가사 석탑의 경우 옥개석 처마 부분에 장엄공(莊嚴孔)
세 번째, 상운사 석탑의 초층탑신받침에 별석받침이 삽입되어 있는 것을 주목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석탑에서 초층탑신받침은 갑석 상면에 받침이 조출되는 형식으로 나타나는데 통일신라시대부터 받침을 별석으로 삽입하는 방식이 등장한다.
네 번째, 북한산 석조부도 중 분사리 부도가 건립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분사리 부도는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거나 불교계에서 상당한 예우를 받았던 고승이 입적한 후 다비식을 거쳐 수습된 사리를 고승이 생전에 주석했거나 하산한 사찰, 입적한 사찰, 중수한 사찰, 법인(法印)을 이어받은 제자들이 주석하고 있는 사찰 등에 사리를 나누어 부도를 세운 것을 말한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서산대사 휴정 이후부터 분사리 부도 건립이 본격화된다. 임진왜란·병자호란 등 전란을 겪으면서 승려들을 중심으로 불교계가 보여준 호국불교로서의 대응은 조선 후기 불교의 위상과 승려들의 지위를 격상시키는 역할을 하였고, 이후 불교계가 정비되면서 고승들이 사회 전면에 등장하면서 주도세력 역할을 하게 됨에 따라
마지막으로 도선사에 조성된 다양한 석조미술을 통해 조선 후기 당시의 불교미술의 성격과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조선 후기는 이전에 위축되었던 불교계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면서 전국적으로 불사가 늘어나고 불교미술의 조성도 활발하던 시기였다. 특히 서울·경기지역에 많은 사찰이 중창되는데 왕실이나 유력 가문의 후원으로 가능했다. 대표적으로 흥천사, 화계사, 흥국사, 보광사 등이 왕실의 후원으로 중창되거나 신축 되고 다양한 불교미술이 조성되었다. 이중 도선사는 석조독성상, 마애불, 칠층석탑, 석등, 김상궁 마애사리탑 등 한 사찰 내에 매우 다양한 석조미술이 조성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특히 마애불-석탑-석등이 한 공간에 조성 되어 있는데, 이와 같은 예불 공간 조성은 매우 드문 사례이다. 한편 독성신앙은 우리나라에서는 민간신앙과 결합해 불교적으로 새롭게 전개된 독특한 신앙 형태로서 조선 후기에 널리 유행하였다.
북한산은 고대부터 산신신앙의 중심지였으며 불교가 전래된 이후에는 불교 신앙처로서 중요시되어온 명산이다. 명산이 갖는 지리적 특징, 사상, 종교, 그리고 그 안에서 생활했던 사람들이 결합해 만들어진 결과물이 우리가 오늘날 볼 수 있는 다양한 문화유적일 것이다. 따라서 명산에 문화유적이 많음은 오히려 이 산이 명산인 또 다른 이유인 것이다. 이러한 배경 아래 본 연구는 서울·경기지역을 대표하는 명산인 북한산에 조성된 불교 석조미술의 유형과 양식 특징을 살펴보고 시대별 전개에 따른 특징 및 분포에 따른 특징, 북한산 불교 석조미술이 갖는 미술사적 의의에 대해 종합적으로 분석하고자 하였다.
북한산은 불교가 전래된 이후부터 불교문화가 성행했으며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꾸준히 사찰이 건립된 불교문화의 중심지였다. 특히 많은 사찰들이 고려~조선시대 동안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고려시대는 서울이 남경(南京)으로서 중요시되었고, 조선시대는 도성과 가까웠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가장 많은 사찰 건립과 중창은 조선시대에 이뤄졌는데 조선 후기 북한산성 축성으로 인해 승영사찰 건립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 북한산 승영사찰은 기본적으로 신앙 기도처로서 사찰의 기능을 가졌겠지만 북한산성 축성이 중요 배경으로 작용한 만큼 북한산의 지정학적 위치, 교통로, 관방체계와도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어 북한산 불교 문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산 불교 석조미술은 석조부도, 석탑, 마애불, 석불, 탑비(석비), 석등, 당간지주, 마애사리탑 등 비교적 다양한 유형이 남아 있는데 통일신라 1기, 고려시대 19기, 조선시대 18기, 근대 1기 등 39기를 확인하였다. 시대별 특징은 신라 불교미술이 경기지역까지 확산되었음을 보여주며 고려 전기와 조선 후기에 석조미술이 가장 많이 조성되고 있다. 고려시대부터 북한산 사찰은 왕실 원찰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조선 후기에는 북한산성 축성이 석조미술 증가에 가장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분포 현황을 보면 남쪽지역에 가장 먼저 불교 석조미술이 조성되었는데 이는 한강유역을 방어하기 위한 거점으로 북한산성을 활용했던 신라의 군사적 목적과 북진 교통로가 배경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산 불교 석조미술이 가장 많이 분포하는 곳은 서쪽지역과 동쪽지역이다. 그러나 두 지역에 조성된 불교 석조미술을 살펴보면 집중 조성된 시기에서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대체적으로 서쪽지역은 고려 전기 석조미술이 분포되어 있고 동쪽지역은 고려 후기에서 조선 후기의 석조미술이 집중되어 있다. 북한산 동쪽지역에 승영사찰의 중심인 중흥사가 포함되어 있고 그 일대에 석조미술이 다수 분포하고 있는 것은 조선 후기 북한산성 축성에 따른 도성 방어 목적으로 사찰의 역할이 변화하면서 북한산의 불교 중심 거점도 변화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북한산 불교 석조미술의 미술사적 의의는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하였다. 첫째, 진관동 석조보살 입상, 승가사 승가대사상 등 새로운 도상과 유형의 등장, 둘째, 승가사 석탑이 서울·경기지역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 유일의 장엄공 장식 석탑이라는 것, 셋째, 상운사 석탑이 서울·경기지역의 유일한 연화문 별석 초층탑신받침을 보인다는 것, 넷째, 원증국사 부도, 전(傳) 성능대사 부도가 고려 후기와 조선 후기의 분사리 부도로 건립되었다는 것, 마지막으로 도선사 석조미술의 다양성과 조선 후기 불교신앙 흐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 별도의 출처를 밝히지 않은 사진은 필자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