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im of this study is to examine how heroic characters with supernatural powers are portrayed, and what shortcomings and desires are present in the societies they are born into, with reference to television series with superheroes such as <I Hear Your Voice>, <While You Were Sleeping>, and <Strong Woman DoBongSoon> out of many motifs of Korean television fantasy series.
The common feature of the superheroes represented in these three dramas is that they are viewed as monsters symbolizing vigilance and alienation instead of being regarded as typical heroes that are the object of praise and admiration. All three dramas criticize the corruption and limitations of bureaucratic powers such as the judiciary, prosecution, and police. The protagonists showcase their heroics by correcting such problems and helping the weak and the victimized by using their supernatural powers. At the same time, they broach uncomfortable topics, highlight truths that some may wish to hide, and also argue the concept of ‘normality’ and the ‘world of naturalness’. For this reason, they are treated as monsters and alienated. Despite being called upon to solve the problems in reality, the deficiencies and contradictions of our society are also revealed by them. The idea of expressing the repressed desires in reality, is similar to the attributes of fantasy in that it criticizes and overthrows reality in order to meet the desires.
This study verified not only the subversive characters of fantasy, but also the limitations when such attributes were combined with the characteristics of the medium of television shows. The significance of this study is to give attention to a genre that had previously been neglected by Korean productions but is now gaining traction, and also to suggest many tasks for researching more subdivided and diversified fantasy dramas in the future.
2010년 이후 제작된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주목할 만한 양상 중 하나는 이른바 판타지의 유행이다.
텔레비전 드라마의 이러한 태생적 속성뿐 아니라 드라마 제작 환경 역시 다양한 판타지적 요소가 충분히 재현되지 못하는 데 중요한 이유로 작용했다. 박노현은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오랫동안 판타지를 찾아보기 힘든 이유로 생산과 소비에 관한 두 가지 요인을 꼽는다. 판타지적 세계와 사건을 시청각적으로 그럴듯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분장과 효과, 세트 등이 필요하다는 생산적 측면에서의 요인과 영화와 달리 일상적 시공간에서 시청되기 때문에 고도의 몰입과 집중이 필요한 화면보다 상대적으로 흘끗보기에 용이한 시의적 화면이 선호되는 드라마 소비 환경의 특수성이 그것이다.
이러한 견고한 관습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 2010년대다. 2010년대로 접어들면서부터 “‘환상’은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의 흐름을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가”
백경선의 논의에 따르면 ‘인간’ 모티프는 다시 인간형에 해당하는 ‘초능력자’ 모티프와 반/비 인간형에 해당하는 ‘상상 존재’ 모티프로 구분된다.
초능력 인물에 대해 논의한 기존 연구들의 공통된 분석 내용 중 하나는 이런 인물의 상당수가 남성 인물이며, 그들은 멜로 서사 내의 ‘왕자님’으로서의 역할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번번이 남편의 폭력에 시달려온 여자가 있다. 결국 그녀는 딸의 피아노 연주회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쓰러진다. 쓰러진 그녀의 블라우스에는 남자 구두 발자국이 가득 찍혀 있다. 함께 있던 그녀의 남편은 구두 발자국을 가리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에 급급하다. 전형적인 가정폭력 사건이다. 이런 상황에 처한 이들에게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찰에 신고해서 법의 도움을 받으라고 말한다. 누군가의 폭행으로 인해 피해자가 되었을 때 경찰이나 법을 찾아 도움을 청하는 것이 당연하고 상식적인 대응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한 당연의 세계가 아니었다. 피해자가 처벌을 원해야 폭행죄가 성립된다는 납득하기 어려운 법의 논리와 그러한 법의 허점을 이용해 피해자인 아내로부터 합의서를 받아낸 덕분에 남편은 처벌을 받지 않았고, 그렇게 가정폭력은 계속된 것이다.
드라마
반면
이렇듯 세 편의 드라마는 모두 사법부와 검찰, 경찰 등으로 상징되는 공적 권력의 한계와 부정을 비판하고 있다. 이때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한 공권력으로 인해 억울한 피해자가 되는 이들은 언제나 사회에서 소외되고 배제된 약자들이다. 누구보다 법과 공권력의 보호를 받아야 할 이들이 실상은 가장 먼저 배제되고 차별받는 부당한 상황인 것이다. 정의가 부재하고 공권력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이 문제적 상황에서 권선징악을 기대하고 정의를 염원하는 대중의 욕망은 옛날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영웅을 소환하기 시작한다. 현실 세계에서 권선징악을 실현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법과 공권력의 역할이다. 따라서 이들이 제 기능을 못하거나 오히려 부정에 앞장설 때는 그것을 해결할 현실적 방법이 요원하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로 영웅인 것이다. 그것도 이러한 현실 세계의 한계를 가뿐히 극복할 수 있는 ‘초현실적’ 능력을 가진 영웅이 바로 그들이다.
앞서 인용한 가정폭력 사건에서 소윤이 “검사는 멍청하고 변호사는 영악하다”며 법을 불신하고 사적 복수를 계획한 것은 자신의 아버지가 이전에도 여러 차례 불기소 처분을 받은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또 한 번 가정폭력 사건이 일어나고 재찬이 그 사건을 다시 살펴보겠다고 하자 부장검사는 대충 처리하라고 지시하고, 이전에 불기소 처분을 내린 선배 검사 또한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정의와 인권을 바로 세우고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검사”가 되겠다며 선서하고 검사가 된 이들이 마주하는 현실은 기소율로 검사의 능력을 재단하는 관행과 폐쇄적이고 경직된 조직문화 그리고 상사의 일방적인 명령이다. 검찰 조직 내에서는 이런 관행에 맞서 행동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은 선택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결정적 증거인 진단서를 조작하고 피해자를 찾아가 협박을 하는 변호사 유범의 악행까지 더해져 재찬은 피의자 박준모를 기소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이러한 현실적 난관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바로 주인공들의 초능력이다.
보험금을 노리고 동생을 살해한 강대희 사건에서도 법은 범인의 죄를 밝히고 그에게 응분의 처벌을 내리기에는 한계가 많았다. 처음부터 강대희는 변호사 유범을 찾아가 거액의 돈을 내놓으며 자신이 동생을 죽였다고 털어놓는다. 범인의 자백을 통해 검사가 공소장에 명시한 교통사고가 아니라 청산가리로 살해한 사실을 알게 된 유범은 공소사실 전부를 부인하고, 결국 사망시간 불일치로 강대희는 무죄를 선고받는다. 미리 예단하고 수사를 한 검사의 잘못이지 자신은 변호사로서 자신의 일을 했을 뿐이라는 유범의 말은 법의 허점과 검사들의 잘못된 수사 관행을 또 한 번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이렇게 풀려난 강대희는 자신을 의심하는 여동생과 홍주까지 죽이려하는데, 이 위기의 순간에 홍주를 구하러 재찬이 나타나는 것 역시 초능력 덕분이다. 재찬은 홍주에게 위험에 처하는 상황이 오면 꿈에서 미리 알 수 있게 시간과 장소를 말해달라고 부탁한다. 이후 재찬의 꿈에 나타난 홍주가 자신이 위험에 처한 장소와 시간을 알려준 덕분에 재찬은 홍주를 구하러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여기까지는 전통적인 영웅 이야기 속 영웅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영웅 이야기에서 영웅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시선은 존경과 찬사, 감사로 가득한 반면,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영웅과 같은 활약을 펼친 괴력소녀 봉순과 예지몽을 꾸는 재찬, 홍주, 우탁,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수하를 향하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영웅들을 향한 기존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일단 이들은 영웅에게 주어지는 찬사와 존경은커녕 평범한 일상생활조차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또한 꿈에서 사고가 일어날 것을 예지하고도 아버지를 지키지 못하고 죽게 했다는 사실에 죄책감과 미안함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이런 꿈 꾸는 게 싫다.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나 싶기도 하고...”(
더 나아가 이들은 괴물로 취급받아 소외되고 거부당하기도 한다. 아버지가 죽은 후 고모부에게 맡겨진 어린 수하는 자신의 존재를 귀찮아했던 고모부가 수하에게 상당한 유산이 상속된 사실을 알고 좋아하는 속마음을 읽고는 자신에게 더 많은 유산이 있다고 말한다. 그 순간 자신의 속마음이 들킨 사실을 알고 당황한 고모부는 어린 수하를 보며 ‘괴물’같다는 생각을 한다. 고모부의 이런 속마음까지 읽은 어린 수하는 “저 괴물 아니에요”라고 말해보지만, 그럴수록 고모부는 더 놀라고 당황하며 자신의 속마음을 읽는 수하를 가까이오지 말라며 밀어내고, 급기야 놀이공원에 버리기까지 한다. 수하가 괴물로 취급받는 것은 이때만이 아니다. 오랫동안 찾아 헤매다 만난 혜성으로부터도 괴물 취급을 받는다. 성빈의 무죄를 주장하는 수하에게 혜성은 무죄를 입증할 증거를 요구하고, 이에 수하는 자신의 초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혜성의 속마음을 읽고 그대로 말한다. 수하의 남다른 능력을 알게 된 혜성이 처음으로 보인 반응 역시 어린 시절 고모부가 보인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수하: 그렇게 괴물처럼 보지마. 세상엔 아이큐가 200인 사람도 있고, 100m를 9초대에 뛰는 사람도 있어. 남들보다 특별하다고 괴물은 아니잖아.
혜성: 야, 읽지마. 몰카보다도 기분 더러워.
수하: 나도 남의 속 듣고 사는거 싫어. 근데 어떡해. 눈을 보면 들리는데.(
혜성 역시 수하를 괴물로 여기며 그를 피하려고 한다. 타인의 속마음을 읽는 능력은 남들과 그저 조금 다른 모습일 뿐 자신은 괴물이 아니라며 항변해보지만 혜성이 보이는 반응은 여전히 냉담하다. 그뿐만 아니라 혜성은 수하의 그런 능력이 성빈의 무죄를 입증하는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라고 수하의 특별한 능력을 무시해버린다.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기는커녕 부정당하거나 숨기며 살아야하는 신세는 봉순도 다르지 않다. 봉순은 말 그대로 ‘힘이 쎄다’는 이유만으로 괴물로, 비정상으로 취급받는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좀 많이 특별하다. 나에겐 비밀이 있다. 남들과 다른. 난 힘이 세다. 그것도 아주 많이. 이 비밀 유전자의 시조는 행주대첩 당시 치마로 나른 돌의 숫자보다 돌로 때려눕힌 적군의 숫자가 많았다던 조상 박개분님이다. 모계혈통으로 유전된 이 괴력에는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다. (…) 그후 내 조상 여인들은 이 괴력을 의롭지 않은 일에 쓰면 결국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주술에 준하는 징크스가 생겼다. (…) 내 힘을 숨기고 살면서 괴로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 참을 수 있는 건 비겁해도 참았다. 난 세상의 구경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 내 괴력을 숨기고 살아야 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남다른 재주임에도 불구하고 봉순이 자신의 특별한 능력을 숨기고 사는 이유는 세상의 구경거리, 즉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다. 전통적으로 힘은 남성성의 상징이었고, 또 그러해야만 했다. 따라서 여성이 남성성의 상징인 힘을 가지는 것은 예외적인 사건일 뿐 아니라 어떤 이들에게는 불편하고 성가신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자신의 특별한 능력을 숨기며 살던 봉순이 자신의 힘을 더욱 숨겨야했던 결정적인 계기는 짝사랑하던 국두로부터 “난 하늘하늘한 코스모스 같은 여자가 좋아. 지켜주고 싶게”(
이렇듯 한국 드라마 속 초능력 영웅들은 찬사나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괴물이나 비정상으로 취급받아 소외되고 배제되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괴물’이 되었는가? 일반적으로 ‘괴물’은 불편하고 꺼림칙한 존재를 비유하는 말이다. 이때 불편하고 꺼림칙한 감정을 유발하는 전제는 그 사회가 규정해놓은 ‘정상성’이다. 정상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이질적인 것들을 우리는 ‘괴물’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비정상’으로 규정된 괴물들을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더 나아가 그것들을 소외하고 배제하는 것이다.
사실 이들을 괴물로 만든 것은 이들이 가진 비현실적인 능력이 아니다. 낯설고 이질적인 것에 대해 경계하고 거부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것이 개인 혹은 공동체의 확고한 믿음과 규범, 관습과 문화, 평안한 일상, 기득권을 형성하는 가치체계를 위협하거나 부정한다고 느낄 때는 더욱 강하게 배제하고 경계하려 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수의 행동을 부정하고 비판하며 그와 ‘다른’ 선택과 행동을 하는 이들을 비정상으로, 괴물로 규정하여 배제하고 경계하는 것이다. 드라마 속 초능력 인물들이 괴물로 취급받는 것 또한 이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들을 괴물로 규정하는 것은 그들이 가진 초능력 자체가 낯설고 기이해서가 아니라 그 힘이 작용하는 방향이 두렵고 불편하기 때문이다.
봉순이 자신의 특별한 능력을 숨기며 살아야 했던 이유는 ‘힘쎈 여자’라는 기호가 우리 사회에서는 오랜 관습과 금기에 대한 도전의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남성은 보호해야 할 존재, 여성은 보호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이 오랫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관습이었다. 하지만 ‘힘쎈 여자’ 봉순은 살해협박에 시달리는 게임회사 대표 민혁의 경호원으로 취직해 남성인 민혁을 보호하고 위험으로부터 그를 지켜주며 이런 관습을 보기 좋게 깨버린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이 상황을 이력서를 쓰는 번번이 떨어지던 백수 봉순이 자신의 특기를 발휘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찾아 취업에 성공한 스토리로 보는 것이 아니라 국두가 보인 반응처럼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일로만 취급한다. 오랫동안 여성은 범죄의 대상이 될 정도로 약하고 결핍된 기호였을 뿐 누군가를 보호하고 지키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여성은 남성과 사회의 보호와 가르침을 받고 따라야 하는 존재여야 했다. 여성운전사가 운전이 서툴다는 이유로 남성운전자로부터 일방적으로 모욕을 당하는 상황, 현실에서라면 대개 피하거나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이런 상황에서 봉순은 남성운전자를 힘으로 보기 좋게 제압해 버리면서, 여성은 남성에게 가르침이나 도움을 받는 존재라는 고정관념을 또 한 번 통쾌하게 역전해버린다. 정상적인 여성상을 벗어난 봉순의 이런 예외적 행동이 기성의 관습에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에게 편하고 자연스러워 보일 수만은 없다.
한편
이렇듯 초능력자들이 불편하고 비정상적인 괴물로 낙인찍히는 것은 그들의 비현실적인 능력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사용되는 상황이나 목적, 그리고 그로 인한 결과 때문이다. ‘괴물’이라는 상징은 언제나 “‘정상성’과의 긴장 관계 속에서 판단”
그렇다면 텔레비전 드라마의 주인공인 초능력자들이 영웅이 아닌 괴물로 그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라는 범주의 바깥 혹은 경계에서 ‘우리’ 내부의 질서라 할 수 있는 ‘정상성’의 실체를 돌아보게 하고 그것의 모순과 한계를 직면하게 한다는 점에서 ‘괴물’은 ‘타자’의 또 다른 이름과도 같다. ‘타자’는 ‘나/우리’의 영역 바깥에 위치하는 존재를 의미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나/우리’와 ‘타자’가 분리될 수 없음을 확인하거나 ‘나/우리’를 조명하는 대상적 거울로 기능함으로써 ‘나/우리’의 영역으로 귀환한다.
실제로 세 편의 드라마는 모두 성장소설의 플롯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기본적으로 영웅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모두 성장소설의 플롯을 띠고 있다. 비정상적인 출생과 유년 시절의 시련, 조력자의 양육과 수련을 거쳐 투쟁으로 위업을 이루고 고귀한 지위와 명예를 획득하게 되는 일련의 이야기구조는 성장소설의 플롯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전통적인 영웅소설에서 성장의 주체는 주인공 영웅으로 한정되어 있는 데 반해, 세 편의 드라마에서의 성장은 모두 다른 양상으로 이루어진다.
세상을, 관계를 평화롭게 만드는 건 진실보다 거짓일 때가 많다. 거짓은 잠시 갈등을 봉합하고 불안을 잠재운다. 진실은 거짓보다 불편하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실을 외면하고 싶어 한다. 진실을 전하는 건 늘 고통스럽다. 그래서 나는 진실 앞에서 눈을 감는다. 그러나 어느새 나의 잔다르크는 진실을 보는 나보다 더 진실을 좇고 있었다. (
혜성의 이런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물론 수하의 초능력이다. 질투와 경쟁심, 속물적인 생각으로 가득한 자신의 속마음을 수하에게 들키고, 편견 때문에 제대로 살피지 못한 사건의 실체를 수하 덕분에 알게 되면서 혜성은 조금씩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게 된다. 결국 드라마의 마지막에는 진실을 보는 초능력을 가진 수하보다 더 적극적으로 진실을 좇는 ‘잔다르크’로 거듭나게 된다.
그러나 봉순이 초능력을 발휘해 사람들을 구하고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보면서 봉순의 부모나 국두와 같은 주변인들의 인식이 변하기 시작한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열등하거나 부족한 존재가 아니라 충분히 제 힘으로 자신을 지킬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을 보호하거나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결국 국두와 민혁이라는 두 남성 인물을 비롯해 ‘힘’으로 상징되던 다른 남성 인물들(봉순을 무시하고 위협하던 조폭들) 모두 봉순의 적극적인 조력자 역할을 하는 것으로 드라마는 끝이 난다. 이렇듯 봉순의 초능력은 ‘힘’을 남성의 상징으로만 제한했던 고정된 성역할에 갇혀 있던 주변 인물들의 인식과 행동을 변화시키는 역할로 기능한다.
이렇듯 세 편의 판타지 드라마는 주인공인 초능력자들을 전형적인 영웅이 아닌 괴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서 그 괴물들은 단지 부정적인 형태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낯설고 이질적인 타자로서의 그들은 우리가 부정하고 싶었던 것을 드러내보이게 하고, 정상이라는 이름으로 타성에 젖어 있던 우리의 모습을 마주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변화시키고 성장하게 만든다. 이처럼 초능력 영웅이 등장하는 판타지 영웅서사는 영웅 스스로가 강한 존재로 거듭나는 기존의 이야기공식에서 벗어나 주변의 다른 이들을 성장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세상 전체를 변화시켜 나가는 형태의 새로운 영웅서사를 만들었으며, 이 과정에서 판타지가 낳은 괴물은 그러한 변화와 성장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이야기 동력으로 작용한 것이다.
판타지는 부재와 상실로 경험되는 것들을 추구하는, 욕망에 관한 문학이다.
이렇듯 텔레비전 드라마 속 판타지적 요소는 결핍되고 부재한 것을 향한 욕망을 충족해주는 동시에 그런 결핍과 부재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마주하게 한다는 점에서 불편하고 거북한 존재로 재현된다. 그러나 이는 텔레비전 드라마 속 판타지만이 아니라 판타지라는 장르 자체의 태생적 속성이기도 하다. 판타지란 현실에서는 불가능하거나 억압된 욕망을 표출하는 공간이지만, 그러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의 균열과 결핍을 먼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신랄하게 비판하며, 더 나아가 현실을 견고하게 지탱하고 있던 ‘정상성’과 ‘당연의 세계’를 전복시켜야 하는 것이다. “현실이 은폐하거나 억압하고 있던 이면의 진실을 가시화함으로써 재현의 표상체계가 도달할 수 없었던 감추어진 세계, 배제된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표상체계를 구축”하는 판타지에 있어 “은폐와 억압의 현실적 질서에 대한 저항”은 당연한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태생적으로 “저항적이고 전복적인 장르”
판타지 드라마에서 초능력을 가진 주인공이 영웅이 아니라 괴물로 표현된 것은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의 특성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텔레비전 드라마의 미학은 현실 세계라는 일상성의 기반 위에서 성립”
이런 배경을 이유로 판타지 드라마들은 초능력자들에게 리얼리티 세계의 법칙을 덧씌운다. 초능력이라는 판타지적 요소를 활용해 멋지게 문제를 해결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전형적인 영웅서사의 플롯을 따르지 않는다. 대신 초능력자 영웅들 또한 상처와 한계가 많은 리얼리티 세계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존재임을 보여주거나, 혹은 그들을 괴물로 그림으로써 낯설고 이질적인 그들을 통해 주변의 다른 인물들이 자성하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영웅이라는 특별한 존재와 판타지라는 예외적 능력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영웅서사가 아니라 그들을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 그래서 불편하고 두려운 존재로 설정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그런 타자를 통해 현실 세계의 우리를 들여다보게 만들고 성장하게 만드는 것이다.
낯설고 이질적인 타자와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문제와 한계를 인정하고 반성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것은 분명 전형적이고 통속적인 성장소설의 이야기문법이다. 그러나 이 상투적인 서사 전략과 윤리 규범은 리얼리티의 문법에 익숙한 텔레비전 드라마 시청자들에게 더 쉽게, 더 많은 공감을 얻을 뿐 아니라 보다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데도 효과적이다. “적어도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라면 환상성의 크기도 인간 척도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서는 안 된다”
판타지는 결코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이면에 감추어진 균열의 공간이며, 이 틈새의 공간은 “현실에서 소외되고 억압된 존재들이 현실 질서를 위반하면서 출몰하는 곳”이다.
물론 이런 단편적인 현상만 두고 한국 판타지 드라마의 특징과 한계를 운운하는 것은 무리다. 앞서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본 연구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그 동안 상대적으로 낯선 영역이었던, 그러나 최근 들어 관심과 기대가 증가하고 있는 판타지 장르 중에서도 기존의 드라마 시청자들에게 가장 익숙한 모티프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에 연구의 첫 걸음을 뗀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보다 더 다양하고 세분화된 판타지적 요소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연구는 이후 과제로 남겨두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