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후반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대학에 묘한 사람들이 있었다. 전혀 세일즈와 어울리지 않는 복장과 태도의 아저씨들이 영어시사잡지 『TIME』지 몇 개를 들고 캠퍼스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간혹 이야기를 나누는 학생들한테 불쑥 책을 들이밀며 정기구독을 권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는 했지만, 실제로 책을 파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학생들은 어느 시점쯤 캠퍼스를 떠나버린 이 어울리지 않는 중년들이, 경찰이나 정보기관원들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했었다.
그런데 왜 『TIME』이었을까? 인터넷이 없던 시절, 영어시사잡지는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세계의 결정적 정보들을 남들보다 빠르게 획득할 수 있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이후 남한에서 『TIME』은 지식권력의 상징이었고, 한때 대학 새내기들이 많이 정기구독하기도 했었다. 그러다보니 학생운동을 감시하던 아저씨들도 이 잡지의 외판원을 가장하고 다녔던 것이고.
언제부터, 어떻게 우리의 삶은 이렇게 ‘세계’, 특히 국제정치와 직접 대면하게 된 것일까? 코로나 19 이후의 사태를 바라보며 문득 궁금해진다. 공임순의 새로운 책 『3·1과 반탁-한반도의 운명적 전환과 문화권력』은 한반도의 결정적 순간에 만나게 된 세계성을 흥미로운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3·1운동과 반탁을 ‘한반도의 운명과 직결된 핵심적인 두 사건’ 으로 설명한다. 이 두 사건이 인식과 실천의 모든 측면에서 세계와 한국이 교차하는 지점 이라는 것이다. 두 차례의 거대한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질서와 시대정신이 등장하는 시점이며, 이 구조에 의해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도 전환되었다.
저자는 3·1운동 전후, 그리고 해방 이후의 한반도를 세계사적 전환의 맥락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1부는 3·1운동 이후의 논의들이다. 그는 야마무로 신이치를 인용하여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의 세계가 새로운 국제질서와 문명에 대한 절절한 공감대 위에 구성되었으며, 레닌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의도치 않은 공존과 결합의 틀을 제공했다고 보았다. 식민지 지식인은 식민지의 일방적 흐름을 대체하는 세계어(세계지)로서 ‘개조’ 의 시대가 열렸다고 생각했으며, “개조의 참뜻을 살릴 때 조선이 (…중략…) 세계의 변방이 아니라 세계의 일부로 당당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으리라는 낙관과 기대”
두 번째는 ‘청산리전투’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는 일본 군부가 약 10년에 걸친 시베리아 전쟁의 확대 과정에서 소련과 중국, 한반도 접경에서 ‘불령선인’의 소탕과 척결에 나서게 되었고,이 와중에 청산리 전투가 발생한 것으로 보았다. 3·1운동의 적극적 결과물인 독립군 활동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일본군의 장기적 침략전쟁의 결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 점을 꼭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이 전투가 한국의 독립운동사에서 공식화되는 과정에서 이범석 등이 그 기억을 독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홍범도는 소외되고 잊혀졌다. 이범석이 이 전투의 기억을 독점하고 왜곡했다는 것은 타당한 지적이다.
그러나 저자의 표현처럼 “무장독립투쟁의 마지막 불꽃을 사르며” 남긴 “드문 승전의 기록”(68쪽)이라는 것 또한 순연히 믿기는 어렵다. 다수의 교전이 있었고 일본군이 큰 피해를 입은 것은 맞지만, 홍범도 부대가 주역인 빛나는 승리의 기록이라고 그대로 믿기도 어렵다. 역사학계에서는 최근 ‘청산리 전역’이라는 표현을 더 선호한다. 일본군과 독립군 부대들 간의 교전이 넓은 지역에서 크고 작은 수많은 충돌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포병과 항공기까지 동원한 일본군이 독립군 여러 부대를 포위하여 일망타진하려 압박하자, 독립군들이 유인전술로 대응하며 공격에서 벗어나 안전 지대로 이동하려 했던 것이 이 전역의 일반적 상황이었다. 일본군이 예상보다 빨리 진출하면서 독립군과 일본군이 청산리 지역에 흩어져 싸웠고, 10월이지만 눈이 내려 관측이 어려운 상황에서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3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던 이광수가 조선으로 돌아온 이후 「민족개조론」과 「혁명가의 아내」를 집필하며 급진적 행동주의에 대립하게 된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는 이광수가 훈춘사건과 경신참변에서 만주 지역 동포들의 피해에 큰 충격을 받았고, 이후 주전론을 부르짖는 급진주의자들을 비판하며 “식민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에 빌미를 주기보다 (…중략…) 교육과 산업의 육성과 투자에 힘쓰기를 주장”하게 되었으며, “그 근저에는, 간도사변이 초래한 방치된 자들의 벌거벗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있다고 보았다.(111쪽)
저자는 준비론, 외교론, 주전론이 임시정부 내에서 근본적인 노선 대립이었으며,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언한 것도 주전론과 외교론의 타협과 절충의 결과(124쪽, 각주 33)라고 본다. 이렇게 파악하면 3·1운동 이후의 정세와 민족운동가들의 대응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3·1운동의 출발점은 세계가 변화하고 있으며 그 변화가 조선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전제였다. 세계에 조선이 개입하기 위한 방식으로 지식인들은, ‘국제’세계의 회의체에 진정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선언’으로 나아갔고, 민족 전체가 참여하는 정치적 시위를 통해 민족의 정치적 역량을 보여주고 이를 근거로 세계 재편에 참여할 수 있는 정부를 구성한다는 데 공감했다. 시위가 대규모의 장기적 민중운동으로 발전하면서 민족의 실체를 발견한 것은 기획자들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지만, 결과적으로 임시정부는 더 강력한 기반을 얻을 수 있었다.
명백히 다른 전쟁과 외교, 준비의 노선들이 임시정부에 합류했던 것은, 임시정부 참여자들이 당시의 국제정세가 전쟁, 외교, 준비론이 함께 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광수의 사상적, 정치적 스승이었던 안창호는 평생 변하지 않는 준비론자, 수양론자였지만, 이때는 단호한 전쟁론자였다. 그는 1920년 1월 1일 임시정부 신년축하회에서 「신년은 전쟁의 年」라고 선언했고, 3일 상해 대한민단 신년축하회에서도 「우리 국민의 행할 6대사(六大事)」에서 군사, 외교, 교육 사법, 재정 통일 분야에서 독립전쟁의 준비를 역설했다.
물론 국제정세가 예상한 대로 변화하지 않으면서 무장투쟁과 외교론, 준비론은 더 이상 공존할 수 없었다. 그 상황에서 임시정부의 분열은 예정된 것이었지만, 왜 이광수는 1920년 한창 전쟁론이 부각되고 있을 때 이를 포기했던 것일까? 안창호의 신년축하회 연설을 보자. 그는 우리 ‘국민’이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그가 상정한 국민들은 민족 전체를 포함하겠지만, 실제로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해외 동포들이다. 안창호는 이미 민족국가와 그 국민들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당연히 이들을 동원하려 했다. 이에 반해 이광수는 민족국가의 국민들을 직접 실감할 경험도 강력한 의지도 없었다. 국민이 학살당한다면 그것은 국제법 위반이며 학살자들의 야만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 정부는 책임을 져야 하지만, 전쟁을 포기할 이유는 아니다. 그에게 조선인은 여전히 국민이 아니라 동포였던 것이다.
2부는 해방 이후의 이야기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셰계가 유럽 주권국가들의 배타적 주권에 기초한 국제법 질서와 규범에서 벗어나 구성되었다고 보았다. 탈식민화와 통국가화가 진행되면서 “보편주의적 이념과 질서에 근거한 통국가화의 역능이 신생국가들의 주권 만들기에 긴장과 모순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이념적 대립이 단일한 민족국가의 성립을 방해하는 요인이 될 수 있었다는 의미인듯하다. 해방된 한국은 이 대립이 폭발적으로 진행되었고, 그 핵심적 사건이 반탁이었다. 이 대결의 와중에 3·1운동은 공동 기억과 기념이 아니라 대립과 반목의 현장이 되었다.(135∼136쪽)
사회주의자들은 보편적 언어로서 민주주의를 내세웠다. 민주주의가 혁명의 언표와 결합하여 급진세력의 대명사로 통용되었고, 민주주의 혁명은 “민족공동체의 상상적 일체성과 통합성을 훼손시키는 날카로운 분단선”이 되었다.(142∼143쪽) 우파들은 임정법통을 내세워 3·1운동을 자산들의 상징적 자원으로 동원했고, 과거를 선점한 우파 진영에 대항해 좌파 진영은 보편주의적 규제력(민주주의 혁명)에 입각하여 3·1운동의 의미를 재구성했던 것이다.
저자는 실제로 토지개혁을 계기로 남북한의 적대화가 강화되었다고 보았다. 이북 지역에서 반파시즘과 민주주의의 이념 하에 진행된 토지개혁으로 김일성은 사회를 전반적으로 전체화하며 남한을 적대화했고, 영도자로 등극했다. 북한의 개혁은 남한을 압박했지만, 이승만 농지개혁을 통해 또한 소련식 민주주의에 대응하는 자유민주주의 지도자로 부각될 수 있었다.
저자는 정부의 수립 이후 우익 이념과 정통성의 강화과정을 날카롭게 분석한다. 조병옥의 여행기를 통해 국가의 독점적 승리 서사가 확립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있으며, 박종화와 김동리의 민족담론과 순수담론이 문단의 패권을 장악하는 양상을 서술했다. 마지막 9장에서 다루고 있는 ‘잊혀진 김구’에 대한 논의도 인상적이다. 1960년 4월혁명 이후 진보적통일론이 김구의 이미지를 협상을 중심으로 재구성하자 5.16 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이 이를 다시 점유하여 체제화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의 1부가 “3·1운동의 후예”, 그리고 2부는 “반탁운동의 후예”들의 이야기라고 했다.(8쪽) ‘후예’라는 표현이 낯설었다. 사전적인 정의로 후예는 “자신의 세대에서 여러 세대가 지난 뒤의 자녀를 통틀어 이르는 말”
정병준은 독립운동가 현순의 딸이며 사회주의 운동가였던 현앨리스에 대한 책에서 이렇게 서술했다. “그녀는 3·1운동의 후예였고, 그녀의 나머지 삶은 3·1운동의 후기였다 (…중략…) 3·1운동의 거대한 에너지가 한 소녀의 뇌리에 새겨졌고, 그녀가 상하이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나머지 인생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책 1부에 안확, 이범석, 홍범도, 이광수 등이 등장하는데, 안확을 제외하고는 실제 3·1운동 현장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은 아니다. 이광수는 2·8독립선언 이후에 국내를 거쳐 상하이로 갔으니, 3·1운동 현장에 없었고, 이범석이나 홍범도는 국외에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현앨리스에게 사용된 의미로 후예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들은 만세 이후에 등장한 민족운동의 핵심적 남성 주체들이면서, 오히려 만세의 현장에 없었던 사람들이다. 현앨리스는 당사자였고, 평생 그 현장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만세의 현장감을 한 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아마 대체로 ‘민족’ 혹은 ‘민중’이라고 하는 운동의 주체를 실감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청년의 선창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고 행진하고 일제 경찰과 싸운 그 경험은, 해방의 운동을 기획할 수 있는 ‘주체’의 근본적 감성 혹은 감각을 구성했을 것이다. 현앨리스는 그 경험을 공유했지만, 만세의 적자가 되지 못한, 그래서 ‘후예’였다. 이 책에서 다룬 사람들 중 이광수나 이범석은 실제 만세 현장의 민중 경험을 공유하지 않았지만, 운동의 적자가 된 사람들이었다. ‘후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반탁의 후예’라는 표현도 공감하기 쉽지 않다. 2부 1장은 해방 직후의 3·1운동 계승의식에 관한 것이니 논외로 하고, 이후 등장하는 인물들은 김일성, 이승만, 조병옥, 박종화, 김동리, 최정희 등이다. 이들 가운데 조병옥, 박종화, 김동리는 반탁운동의 주체들이지만, 나머지 사람들의 연결 고리는 모호하다. 또 마지막에 김구가 등장하지만, 여기서 김구는 활동의 주역이 아니라 인식된 대상으로서 김구다. 그런데 실제 김구는 반탁운동의 가장 중요한 기획자이자 주역이다. 주역이니 또 후예가 아닐 수도 있지만, 박종화나 김동리, 조병옥은 또 어떤가?
주체나 후예라는 정의보다는 저자가 주목하고 싶었던 것은, 근대정치의 세계성이 작동하는 방식이었던 것 같다. 정치적 삶의 근본적인 형태를 구성한 것이 3·1운동과 반탁과 같은 역사적 사건들이며, 그 사건들은 셰계적 전환의 계기들을 함축하고 있었다는 점을 밝히고, 그 전환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정병준이 그녀를 ‘후예’라고 한 표현이 왜 어색하지 않았는지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사자였지만 소외된, 그러나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현앨리스의 운명적 비극이었다. 이 책에서 등장한 많은 남성 주체들은 달랐다. 그들은 당사자가 아니면서 적자였다. 그래서 그들은 더 쉽게 벗어날 수 있었다. 근본적으로 내가 느끼는 3·1운동의 무게와, 저자가 판단하는 것은 많이 다른 듯하다. 역사적 사건의 중요성에 대한 판단은 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만, 나는 3·1운동이 ‘반탁’보다 훨씬 무겁다고 느낀다. 당대에서나 지금에서나 3·1은 한국 근대의 정치사회적 상상력의 틀을 만들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결정했다. 현앨리스는 여성 사회주의자이며 민족운동가로 살았고, 북한을 조국으로 선택했으며 미제의 스파이로 죽었다. 그녀가 결말을 알았다면 자기 삶의 궤적을 완전히 바꿀 수 있었을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그녀가 3·1운동의 ‘후예’인 이유다. 그리고 내가 이 책의 많은 등장인물들을 ‘후예’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