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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적(風水的) 자각의 현대시, 혹은 그 환경 인식 The Modern poetry of self-awakening as pung-su, and It’s environmental awareness
  • 비영리 CC BY-NC
ABSTRACT
풍수적(風水的) 자각의 현대시, 혹은 그 환경 인식

My thesis is concerned with tools that help in poetic writing application that provide good interactivity in the face of widely variable or unknown thoughts of pung-su. The literal meaning of the word pung-su is wind and water.

The first part of this paper addresses a poetic archetype about pung-su and a poetic discourse anti-pung-su. The second part of this paper addresses a ecological consciousness appeared in poetry which became the Cheongyecheon-subject matter for writing. The third part of this paper addresses traces of thoughts as shown in the recent poems by poet Kim-jiha.

KEYWORD
풍수 , 반(反)풍수 , 청계천 , 김지하 , 생태의식 , 환경 인식
  • 1. 들머리 : 풍수적 사유의 시적 담론

    본 연구는 현대시에서 논문의 성격으로 된 글에서 거의 볼 수 없었던 ‘풍수적 사유의 시적 담론’을 주제로 삼는다. 본 연구의 구성적인 체재(體裁)로는 (첫째) 풍수의 시적 원형과, 반(反)풍수의 시적 담론, (둘째) 청계천 소재의 시에 나타난 풍수적인 생태의식, (셋째) 김지하의 최근 시에 나타난 풍수적 사유의 자취로 미리 정해져 있다. ‘풍수의 시적 원형과, 반(反)풍수의 시적 담론’에서는 시와 풍수의 상호관련성에 관한 일반 원리, 소위 풍수시의 원형과 적례, 현대시에 나타난 풍수적인 무관심이나 반(反)풍수관의 사례들에 관해 밝힐 것이며, ‘청계천 소재의 시에 나타난 풍수적인 생태의식’에서는 극악하게 훼손된 청계천에 대한 문명비판적인 시, 반면에 청계천 복원이 가져다 준 생태학적 서정 시의 많은 사례에 대해 비평적으로 성찰할 것이며, ‘김지하의 최근 시에 나타난 풍수적 사유의 자취’에서는 시인 김지하의 시와 사상 가운데 풍수와 관련된 것을 가려서 그것이 동시대 문학의 환경 인식의 차원으로 수렴되고 있느냐 하는 문제를 잘 맞추어보려고 한다. 현대시 비평에 풍수적인 사유의 담론을 수용하는 문제는 앞으로 좀 더 확대, 심화되어야 할 것이다.

    2. 풍수의 시적 원형과, 반(反)풍수의 시적 담론

    이미 오래 전의 환경결정론자들은 자연환경의 요인이 문화적인 특성을 결정할 뿐만 아니라, 자연이 인간에게 문화의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 하였다. 반면에 문화결정론자들은 동일한 자연 조건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의미 부여와 상징체계를 통해 전혀 다른 문화를 조성하는 것이 가능 하다고 본다. 생태주의 시각에서 보자면, 환경결정론은 인간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이고, 문화결정론은 그것을 지나치게 과신하는 것이다. 문화는 인간과 자연을 만나게 하는 중개자일 수도 있다. 생태주의의 시각에 의하면, 자연과 문화는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오늘날은 생명의 악순환으로 인한 위기의 시대이다. 이것의 증폭을 차단하기 위해선 생명의 선순환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생명의 선순환이 진행되는 문화는 생태적으로 건전하면서도 지속이 가능한 문화이다.1)

    1990년대부터 문학을 창작하고 비평하는 쪽에서 생태주의에 근거한 관점에 대한 발상전환이 점진적으로 제고되어온 것이 사실이었다. 문학의 생태주의적인 관점의 생각 틀은 소설가 박경리 「토지」의 창작 과정과 시인 김지하의 생명사상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김지하는 사상적인 측면에서 이 관점에 심오한 자기 체계에서 시작된 사유의 틀을 형성해 왔다. 그가 생태라는 용어조차 생명이란 말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올 만큼, 그는 생태주의에 관한 한 급진주의자의 부류에 속하는 인물이다.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아니하는 풍수(학)에 관해서도 그는 희망적인 관점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언젠가 대담에서 그것에 관해 이렇게 말한 바 있었다.

    그 동안 분류학적인 차원에서 풍수설화를 인식해온 것은 있었지만, 문학의 사유와 담론을 풍수(학)의 패러다임에서 이해하려고 한 적은 없었다. 이 인용문은 문학의 사유와 담론 속에 풍수를 끌어들여야 한다는 최초의 (우회적인) 발언이 아닌가 한다.

    문학 중에서도 풍수와 깊이 상관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시 쪽이 아닌가 한다. 서정시와 풍수가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것의 사상 배경 중의 하나는 동기감응론(同氣感應論)이다. 서정시와 풍수는 이것을 공유하고 있다. 사람 속에 있는 기가 하늘, 땅, 우주 만물의 기와 통하게 되면 그와 같은 힘을 얻게 된다.3) 소우주와 대우주가 늘 상응한다는 것. 우주론적인 영성의 콤비네이션이다. 서정시가 만물조응의 결과라면, 풍수는 물활론적인 상징체계의 표상인 거다.

    김우창의 심미적 이성의 목록 가운데 생태의식이란 게 있다. 최근에 생태학적인 상상력에 깊은 사유와 폭넓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노대가의 생각 틀에도 동기감응론이 엿보인다, 이 동기감응의 결과가 바로 심미적 이성의 탁월하면서도 독창적인 가설로 연결된다. 그가 최근에 연구한 저술물에서 다음의 글을 따온다.

    김우창은 『풍경과 마음』에서 시와 풍수지리의 관계를 거대한 문화 사적인 맥락에서 담론과 표상의 체계 아래 두루 살피고 있다. 이에 관한 문제의 해명은 다음 기회로 돌리려고 한다. 요컨대 그에게 있어서 풍수란, 경험적이고 지리적인 차원에만 놓이는 것이 아니라 우주 전체와의 총체적 관련성의 문맥에 닿아있다는 것이다.

    소위 ‘풍수시(風水詩)’라는 개념이 존재한다면, 이것의 원형이라는 것이 존재할 것이다. 도연명이 노래한 무릉도원(武陵桃源)이나 주희가 노래한 무이구곡(武夷九曲) 같은 것이 풍수지리에서는 장풍국의 명당이라고 부른다. 이 두 사람이 남긴 표현적인 관습은 중국과 한국의 시인들에게 면면히 계승되었다. 한시를 읊조리는 은사(隱士)들은 승지(勝地)를 찬양하기에 결코 인색하지 않았다. 소동파의 여산진면목과 윤선도의 보길도 부용동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 한편 은사들은 자연 환경의 좋은 형국(形局)을 통해 인간의 생명계를 만들어가고자 했다. 이 생명계는 흔히 ‘복거(卜居)’라고 이름된다. 옛 시인들은 복거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았다. 자연 속에서 자족하는 자신의 위상을 늘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당나라 시대의 시인 두보에겐 옛 촉나라의 서울인 성도(成都)에 살았던 시기가 있었다. 오래된 절의 빈방에서 더부살이하면서 친구들의 녹으로 탄 쌀을 꾸어 먹거나, 이웃집의 채소를 얻어먹었다. 그 후 절에서 불경을 베끼는 일의 허락을 받았던 것으로 보아, 살림살이의 형편이 조금 나아졌던 것으로 짐작된다. 서기 760년에 쓴 시 「복거」에 보면 그는 드디어 자기 집을 가지게 된다.

    성도성은 산악지대이다. 여기저기 산이 많고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오죽 했으면 이백이 촉나라 가는 길의 어려움을 ‘푸른 하늘에 오르는 것보다 어렵다(難於上靑天)’라고 비유했을까. 그가 살던 곳에서 멀리는 아미산이란 명산도 있다. 멀리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물이 흐르는 곳이 두보의 복거인 것이다.

    이 시는 노계 박인로의 시 「노계복거(蘆溪卜居)」에서 따 왔다. 박인로 역시 은사였다. 그는 공직 생활을 마친 후에, 자신의 호이기도 한 노계에 집을 짓고 살았다. 산중(山中)과 태기(苔磯)는 산과 물의 조화로운 자연 환경을 가리킨다. 태기란, 이끼가 낀 돌들이 많은 물가이다. 원문의 ‘세류풍(細柳風)’을 두고, 필자는 ‘세버드바람’라고 풀이했다. 물론 사전에도 없는 시적인 조어이다. 세류가 세버들이니까, 세버드바람은 세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이란 뜻으로 구성된다.

    복거란, 살만한 집을 가려서 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사적 생활 단위로서의 집을 의미하는 오이코스(Oikos)에 해당되는 것이며, 또 행복이 보장된(점쳐진 : 卜) 장소로서의 생활공간인 레벤스벨트(Lebenswelt : 生命界)로 인식되는 것이다. 복거란 단어만큼, 풍수적인 자각의 관점에서 사람이 거주 공간을 확정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동북아시아권의 옛 시인들은 풍수적인 자각의 생각 틀 속에 알게 모르게 갇혀 있었다. 하지만 20세기의 현대시인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풍수 관념이 없는 것도 문제이지만 있다고 해도 본질적으로 반(反)풍수적인다.

    이 시는 시인이 용인을 지나면서 쓴 것이다. 용인은 주지하듯이 이 시를 쓴 1970년대만 해도 네 개의 공원묘지가 조성된 곳이다. 지금은 5만기 가까운 묘가 여기에 들어 서 있다. 이곳은 생자와 사자가 공존하는 곳이다. 예로부터 용인은 이른바 음택 풍수의 상징이 되었던 곳이다. 옛날 말에 이르기를, 생거진천(生居鎭川)이요, 사거용인(死居龍仁)이라 했다. 즉살아서는 진천 땅, 죽어서는 용인 땅이다. 산자에겐 진천이 가장 살기 좋고, 죽어선 용인에다 묏자리를 쓰면 후손에게 발복한다는 것이다. 이 시의 화자는 사실상 실향민이다. 시인 민영의 고향은 강원도 철원. 군사보호구역 내에 편입되어 민간인이 자유로이 드나들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시인은 용인 땅에서 사후에 편안히 쉴까, 즉 뼈를 묻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두고 온 고향을 생각하면 편안히 쉴 수도 없다고 한다. 죽은 다음에 고향에서나마 편히 쉴 수 없는 실향민의 비애가 잘 녹아져 있는 것이 인용시이다. 분단의 아픔을 자신의 사후 문제와 결부시켜 공감대를 확장시킨 좋은 작품인 듯하다. 시인 민영에겐 풍수적인 관념의 안식보다 현실적인 욕구의 충족이 더 중시되고 있다.

    이 시는 현대시 가운데 반(反)풍수의 시적 담론을 잘 보여준 모범적인 적례가 아닌가 한다. 시인 고은은 한 명(名)풍수의 죽음을 통해 기복 신앙적으로 기울어진 풍수학에 대해 강한 의혹의 눈초리를 던지고 있다. 명풍수의 상대 개념은 반(半)풍 수이다. 우리 속담에 반풍수가 집안 망친다고 했다. 지관 오창봉은 명풍수인가, 반풍수인가. 시인이 남긴 인용시에 의하면 이 둘의 차이는 없다고 본다. 풍수에 관한 한, 고은의 시적 담론은 현저하게도 현실주의적이다. 그에겐 어떠한 신비주의도 용납되지도 않을 뿐더러, 그는 결코 이를 수락하지도 않는다.

    1)한면희, 『초록문명론』, 동녘, 2004, 295~300쪽, 참고.  2)김지하, 『생명학(1)』, 화남, 2003, 79쪽.  3)최창조, 『좋은 땅이란 어디를 말함인가』, 서해문집, 1990, 178쪽, 참고.  4)문광훈, 『김우창의 인문주의』, 한길사, 2006, 328쪽.  5)민영, 『용인 지나는 길에』, 창작과비평사, 1977, 22~3쪽.  6)고은, 『만인보 ‧ 1』, 창작사, 1986, 99쪽.

    3. 청계천 소재의 시에 나타난 풍수적인 생태의식

    올해 초에 우리나라에서 아시아 풍수 학술대회가 있었다. 여기에서 나온 발언 중에서 의미 있는 발언들이 적지 않았으리라고 짐작된다. 이를테면, 풍수는 환경이란 용어의 원형이 된다는 것. 풍수는 중국에서 기원했지만 동아시아는 물론 말레이사아, 베트남까지 번져 나갔고, 지역에 따라 형태를 달리하며 응용됐다는 것. 풍수는 일본에서 문화 요소의 하나로 인식됐고, 오키나와나 베트남에선 공간적인 패러다임을 제공했다면, 한국은 그것을 통해 문명사적인 전환을 가져 왔다는 것. 한국적인 자생풍수의 특징은 허(虛)한 곳을 보완하는 비보풍수에 있다는 것. 그래서 한반도에서 꽃을 피운 풍수가 동아시아 전통의 지식 체계로 주목되고 있다는 것⋯⋯.7)

    풍수는 우리나라에서 매우 친숙한 용어이다. 이것은 집이나 무덤 따위의 방위와 지형이 좋고 나쁨과 사람의 화복이 절대적 관계를 가진다는 학설, 또는 그 방위와 지형을 두고 말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풍수를 살펴보는 지관(地官)을 가리켜 풍수라고도 한다. 풍수의 역사는 꽤 오래 되었다. 이것은 고대의 중국에서 기원했다. 전국 시대의 말기에 발생한 풍수적인 사고 관념이 한대(漢代)에 이르러 음양설이 도입되면서 그 논리 체계를 갖추었고 남북조 시대에서부터 음택(陰宅) 이론이 덧붙여지게 되었다는 것이다.8)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거주 장소인 양택(陽宅)에 대한 관심이 죽은 자들의 공간인 음택보다 기원적으로 앞선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풍수는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환경 적응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풍수 사상은 음택 풍수가 상대적으로 승하여 본질을 왜곡해가면서 스스로 타락해간 측면이 없지 않았다.

    풍수의 어원은 무엇일까? 과문한 탓에 잘은 모른지만, 장풍득수(藏風得水)라는 표현과 관련성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바람을 잘 갈무리하고 물을 얻는다는 것. 장풍득수라는 표현이 풍수보다 먼저라면 풍수의 어원인 것이 맞다. 하지만 장풍득수가 풍수에 대한 하나의 부연 설명이라면, 풍수의 어원은 또 다시 미궁에 빠진다.

    풍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이요, 그 다음이 바람이다. 풍수에는 생태 통로의 맥이 있다. 물과 산줄기와 바람이다. 물의 흐름과 바람이 흘러가 산줄기에 가두어지는 것은 기운이 생동하는 생명 에너지와 같다. 궁극적으로 볼 때, 풍수에서 물의 흐름이 으뜸이요, 바람을 가두는 게 버금이다.

    우리나라에서 풍수가 좋기로는 천 년 전의 도참 비결서에서 이미 정도(定都)를 예견한 데10)서 알 수 있듯이 서울이다. 풍수의 으뜸인 물이 풍부하고, 물의 흐름이 더 없이 좋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하천은 대체로 동쪽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흘러가는 형국을 보인다. 그런데 서울의 청계천은 서울 풍수의 주산인 백악(白岳)에서 나와서 내명당을 거쳐 동으로 흘러간다. 서출동류(西出東流)하는 역방향의 흐름새가 예사롭지 않아서 천하의 명당수로 손꼽히고 있다. 우리나라 수도 풍수의 핵심은 산보다도 물이며, 또 객수에 지나지 않는 한강보다는 명당수인 청계천에 있다.

    이 글을 통해 나는 청계천을 소재로 한 시 중에서 시인들의 풍수적인 생태관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살펴보려고 한다.

    이 시는 명화로 손꼽히는 「육체의 길」(1965) 등의 작품을 남긴 영화감독으로서 사회적으로 활동한 시인 이봉래가 남긴 연작시 「청계천」의 한 편이다. 여러 가지의 정황을 미루어 볼 때, 이 시는 1970년대 중반에 쓰인 것이다.

    이 시의 화자는 극심한 환경오염의 사회에 살고 있다. 본디 서정시는 ‘시자천지지심야(詩者天地之心也)’라고 하여 인간과 자연이 친화적이고 조화로운 지복(至福)의 상태에서 생의 의미를 캐는 것이다. 서정시의 동일성 이론에 의하면, 시의 향방은 다름 아니라 우주 생명의 조화와 질서를 추구하는 것에 있다. 옥타비오 파스 역시 오늘날 서정시의 역할을 두고 시의 우주적인 리듬을 배워야 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인용 시는 인간과 자연의 부조화의 표상인 청계천에 대한 문명비판적인 성찰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때의 청계천은 반(反)풍수적인 타락의 양상을 보이는 그런 자연 대상물이다. 오십 년을 살아온 ‘나’인 서정적 자아 와, 청계천이라는 이름의 타락한 세계가 어쩔 수 없이 맺어 있는 불화 관계는 우주 생명, 우주적 리듬에 반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용시는 진단시동인회에서 펴낸 사화집 『청계천은 흐른다』(진단시동인지 제27집)에 실려 있다. 이 사화집이 청계천 복원 기념호의 성격을 지닌 것인데, 이 시는 청계천 복원 이전에 발표한 구고(舊稿)임을 밝히고 있다. 이 시는 앞서 보았던 이봉래의 「청계천(3)」처럼 일종의 문명 비판적인 시로 읽힌다. 시인은 여기에서 맑은 시내 청계천은 어디에 있는가, 라고 탄식한다. 여기에서의 청계천은 보통명사가 아니다. 생태학적인 이데아를 가리키는 추상명사일 따름이다.

    왕십리 미나리꽝은 또 뭔가.

    미나리꽝으로 넘쳐나던 왕십리는 청계천과 중량천이 만나는 지점과 가깝다. 환경이 깨끗하지 않고선 왕십리 미나리가 서울의 전통 토산물이 될 수 없다. 중량천과 한강이 맞닿는 곳인 두모포(豆毛浦)의 콩나물도 마찬가지다. 청계천이 흐르는 곳의 말단에 토산물 산지들이 있었다.

    생태학적인 시의 과제를 다루는 시도 상이하고도 유다른 성격의 시가 있다. 하나는 생태학적 문명비판시라면, 다른 하나는 생태학적 서정시이다. 지금까지 본 두 편의 시들은 전자에 해당한다. 다음에 제시될 두 편의 시편들은 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다음에 인용될 시 두 편은 2005년 10월1일에 복원된 청계천 직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신협의 「다시 태어난 청계천」은 앞서 말한 진단시동인 제27집인 『청계천은 흐른다』에 실려 있는 자유시이며, 이지연의 「청계천은 다시 흐른다」는 자신의 시조집인 『청계천은 다시 흐른다』에 실려 있는 시조의 2연 형태 중에서 첫 번째 연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풍수는 기(氣)와 관련된 논리 체계를 스스로 가지고 있다. 기란 무엇인가. 이것은 서구적인 관점에서 분석이 되지 않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확인이 되지 않는다. 이 기란 것은 생활의 용어로서도 두루 쓰이고 있다. 예컨대, 기막히다, 기고만장하다 등과 같은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회남자(淮南子)』라는 책에 ‘기(氣)는 생(生)의 충(充)이다’라고 했듯이, 이것은 ‘생동의 충만’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에너지, 힘, 원기, 변화 등을 일컫는다.

    풍수의 사상적인 지향성은 크게 보아서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 것 같다. 하나는 기생태주의(Ch'i-ecology)요, 다른 하나는 천지코스몰로지 (Tiandi-cosmology)이다. 기생태주의에 의하면, 풍수관은 한의학적인 인체관을 지닌다. 사람의 인체는 기혈(氣血)이라는 에너지로 구성된다. 기와 혈이 흐르는 생명적인 통로의 맥은 경락과 혈맥이다. 풍수는 자연물인 지형과 물길에도 기혈과 같은 생명의 힘이 흐른다고 보고 있다.

    신협의 「다시 태어난 청계천」을 보면, 청계천 역시 한의학적인 인체관에 의거한 자연 형국으로 묘사된다. 여기에서는 청계천이 심장이요 혈맥인 것으로 비유되어 있다. 이지연의 「청계천은 다시 흐른다」도 풍수적인 사유의 흔적이 배어있다. 명당수라는 시어 자체가 풍수 용어가 아닌가. 앞서 말한 천지코스몰로지도 기생태주의와 상관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기생태주의가 한의학적인 인체관에 의거하고 있다면, 천지코스몰로지는 주역적인 우주관을 배경으로 삼는다. 기생태주의를 우주론적으로 확장한 것이 천지코스몰로지다.15)

    주역의 우주 체계는 천지인(天地人)이라는 삼재(三才)로부터 비롯한다. 천은 시간이요, 지는 공간이요, 인은 인간이다. 천지인의 조화는 여기에 간적(間的)인 존재의 관계성을 공유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풍수의 패러다임은 지(地)의 공간적인 사유를 특히 강조한다. 풍수에 있어서의 공간의 공은 관념적인 진공(vacuum)이 아니라, 기로 충만된 생명의 힘이 미치는 역장(力場)이다. 인용한 두 편의 작품―신협과 이지 연의―은 문학적인 성취도의 면에서 그리 높지 않아도 풍수적 관념의 생태주의 시학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적절성과 유효함이 있는 참고 작품으로 거론될 수도 있다.

    7)조흥섭 환경전문기자, 「지속가능한 토지 관리 ‘풍수’는 과학이다」, 한겨레신문, 2014. 1, 30, 참고.  8)권선정, 「풍수의 입장에서 본 취락입지」, 최창조 외, 『풍수, 그 삶의 지리생명의 지리』, 푸른 나무, 1993, 235쪽, 참고.  9)한면희, 앞의 책, 310쪽, 참고.  10)비결서에 ‘삼각남면임한강(三角南面臨漢江)’이란 예언이 있다고 하나, 나는 아직 확인하지 않았고, 다만 전언으로 들은 바 있다. 이 말의 뜻은 ‘(왕도를) 삼각산 남쪽을 면하게 하고, 또 한강을 임하게 하라.’는 것이다.  11)이봉래, 『역광의 신』, 서문당, 1982, 55~7쪽.  12)진단시동인회, 『청계천은 흐른다』, 진단시동인 제27집, 시문학사, 2006, 104~5쪽.  13)같은 책, 51쪽.  14)이지연, 『청계천은 다시 흐른다』, 마을, 2008, 13쪽.  15)이 대목에서 김용옥의 풍수관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에 의하면, 한의학의 인체관은 천지코스몰로지적인 기혈론(氣血論)으로 요약된다고 한다. 풍은 산의 형세에 따라 형성되는 기의 흐름이요, 수는 물의 흐름에 따라 형성되는 혈의 흐름이다. 기와 혈의 흐름은 경락상의 혈(穴)로 표현된다. 이 혈을 잡는 것을 두고 풍수에서는 정혈(定穴)이라고 한다. (김용옥, 『도올의 청계천 이야기』, 통나무, 2003, 46~7쪽, 참고.)

    4. 김지하의 최근 시에 나타난 풍수적 사유의 자취

    김지하의 시 중에서 풍수적 자각의 흔적이 드문드문 배어있는 게 있다. 그에게 있어서 풍수적인 관점은 비교적 오래 전부터 적층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의 생명사상에 관한 한 초유의 저서인 『생명과 자치』에도 그 흔적이 반영되어 있다. 그의 풍수적인 사고의 관념 체계는 이미 1990년대 초에 비롯해 있었던 것 같다.

    김지하의 풍수관은 우리의 풍수가 내외적인 요인에 의해 설 자리를 적잖이 상실했다고 보고 있다는 것이다. 내적으로는 소위 음택 풍수가 지닌바 신비적이며 기복신앙적인 비합리성에 기인하는 것이며, 한편 외적으로는 서양의 합리주의 사고가 지닌 지배적인 힘에 의한 것이다. 그의 풍수관이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풍수학이 생명 운동의 한 갈래가 될수 있다는 가설 때문이다. 그의 생명 사상은 학적(學的)인 이론의 체계보다는 운동성이 확보되는 실천 쪽에서부터 비롯되는 성격이 강하다. 그에게 있어서 생명 운동의 초기 형태는 1982년 원주 신협과 농협을 중심으로한 유기농 운동에서 출발하였고, 그 이후 ‘한살림’ 운동과의 관련성을 통해 발전해 나아갔다.17) 그의 풍수관 역시 그가 지속적으로 추진해간 (큰 테두리인) 생명 운동의 관련성 하에 놓이는 것이었다.

    한편 생각하기로는 김지하의 풍수관이 박경리의 「토지」에 내장되어 있는 산천(山川)의 사상에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토지」 제1부에서 선비 이동진이 망명하려고 하자 최치수가 그에게 묻는다. 누굴 위해서인가? 백성인가? 군왕인가? 하지만 이동진은 군왕도 백성도 아닌 이 산천을 위해서라고 한다. 민중 현실주의니, 왕정 복고주 의니 하는 것도 한낱 공소한 주의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보다 높은 단계에 산천이 놓인다. (이 산천을 두고 김윤식은 ‘태생대로 살아가기의 세계’라고 말한 바 있다.18) ) 산천은 무엇일까? 풍수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니었던가?

    박경리의 「토지」에 나타난 소설적인 주(主)무대는 경남 하동군 악양이다. 이곳은 조용헌이 「내가 살고 싶은 곳」이라는 제목의 신문 칼럼에서 사견임을 전제로 한다는 복선을 깔면서 풍수의 으뜸으로 손을 꼽았던 곳이다. 박경리의 「토지」에서 말하는 산천이 구체적으로 지리 산과 섬진강임을 암시해주는 대목이 되기도 한다.

    이상의 인용문은 하동군 악양의 풍수지리적인 조건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 온전한 산천의 풍수지리에서 박경리의 「토지」에서 보이는 저해한상생(解恨相生)의 생명사상이 나왔고, 또 이를 계승한 것이 김지하가 보여준 시적 직관의 또 다른 생명사상인 것이다. 그는 생명에 대해 참으로 편견이 없고 진솔한 생각과 체험과 지혜가 필요한 이 시대에. 박경리의 저서 『생명의 아픔』이야말로 이에 관해 가장 원만하고도 날카롭고 성실한 저술물이라고 높이 평가한 바 있었다.20) 시인 김지하의 풍수적 자각의 수준은 독문학 교수로서 풍수학 분야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김두규에 의해 고평된 바 있었다.

    김두규의 평판에 의하면 시인 김지하가 지닌 풍수적 자각의 수준은 천재, 아시아적인 탁월성, 현대적 재구성과 활용 등으로 연결된다. 김지하의 풍수적 자각은 자신의, 비교적 최근에 발표된 시에도 드문드문 나타나고 있다. 그의 풍수적인 소재의 시편들은 시사적인 성격이 적지 않다.

    산알(론)은 북한의 생물학자 김봉한이 발견한 독창적인 가설이다. 즉 이것은 경락의 실체를 연구한 결과, 인체 내에서 그물망 같은 시스템이 있다는 것에서 연유된 특별한 기호이다. 독이 있다면, 반드시 약이 있다. 그는 제한된 지역 내의 기(氣)의 확산과 수렴이 동시에 작용됨에 따라 독에는 이에 대응하는 효과적인 약이 있다는 소위 풍수학의 형국론(形 局論)을 연결시킨다.24) 특히 그는 풍수의 으뜸인 물에 관심을 촉발시킨다. 우리가 사는 시대를 물의 시대로 규정하면서 말이다.

    일본의 원폭 방사능은 인류를 위협하는 독성의 이물질에 해당한다. 이에 맞서는 것은 약수에 해당하는 바닷물이다. 물만이 산알, 즉 삶의 고갱이(정수)가 된다. 물이 산알이라는 주장은 현저히 풍수적이요, 독과 약이 공존한다는 것은 지맥에 길과 흉이 뒤섞여 있다는 풍수관에 근거한 생각 틀이 된다. 독과 약, 길과 흉을 잘 가리고 이용하는 것이 다름 아닌 풍수다. 그런 점에서 산알론과 풍수관은 서로 회통하는 패러다임이 다. 패러다임의 본래 의미는 사례이지만, 어떤 요인으로부터 다양하면서도 서로 무관한 듯해 보이는 사례(事例)가 나타나는 경우에 있어서, 다양한 관념을 서로 연관시켜 구조화, 체계화한 시스템을 두고 패러다임이 라고 한다. 김지하는 손가락 끝, 손바닥, 목덜미 등과 같은 데에도 서로 다른 세포계가 자기 구심력을 지닌 무언가가 있다고 언젠가 말했다. 풍수지리 같으면 형국(形局)이라고 불리는 것이다.27) 그 무언가가 소위 ‘산알’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인용시의 키 워드로 쓰인 ‘영구망해(靈龜望海)’로 인해 이 시는 문학 외적으로도 화제가 되었다. 김지하가 부산의 해운대가 세계적 도시가 되는 것이 필연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조선 중기 정조신이라는 학자가 그렇게 예언했다는 것. 정조신이 자신의 저서 『순수역수기』에서 '영구망해' 즉 '신령스러운 거북이 먼 바다를 바라보는 땅에서 우리나라의 국운을 융성시키는 새로운 길지가 생긴다'는 것인데, 김지하가 '영구망해' 의 땅을 바로 해운대 동백섬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29) 원로 시인의 영감이 깃든 예언이라고 해서 부산 지역의 사람들이 적잖이 고무되었다. 한 지역 신문의 기사에는 부산이 거북처럼 세상의 더러운 것을 삼키고 정화해 신령함을 토해낸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해석한 경우도 있었다.30)

    앞으로는 시에 있어서 풍수 담론은 이와 같은 문학 외적인 화젯거리로부터 벗어나야 하겠지만, 요컨대 김지하 시에 반영된 풍수적 자각의 자취는 그 자신의 화두인 동시대의 환경 인식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겠다.

    16)김지하, 『생명과 자치』, 솔, 1996, 103쪽.  17)김우창 외 엮음, 『103인의 현대 사상』, 민음사, 1996, 56~7쪽, 참고.  18)김윤식, 『박경리와 토지』, 강, 2009, 202쪽, 참고.  19)조선일보, 2014, 2. 17.  20)김지하, 『흰그늘의 산알 소식과 산알의 흰그늘 노래』, 천년의시작, 2010, 202쪽, 참고.  21)김두규, 『우리 풍수 이야기』, 북하우스, 2003, 199쪽.  22)김두규, 『김두규 교수의 풍수 강의』, 비봉출판사, 2008, 219쪽  23)김지하, 『흰그늘의 산알 소식과 산알의 흰그늘 노래』, 앞의 책, 356쪽.  24)같은 책, 122쪽.  25)김지하, 『시김새 ‧ 2』, 신생, 2012, 34쪽.  26)같은 책, 61쪽.  27)김지하, 『흰그늘의 미학을 찾아서』, 실천문학사, 2005, 15쪽, 참고.  28)같은 책, 53~4쪽.  29)국제신문, 2012, 8. 14, 참고.  30)부산일보, 2012, 4. 2, 참고.

    5. 마무리 : 약론 및 앞으로의 전망

    본 연구는 현대시의 비평적인 영역 속에서 풍수적 사유의 시적 담론을 중심으로 주제를 구성해 보았다. 본 연구는 우선 ‘풍수의 시적 원형 과, 반(反)풍수의 시적 담론’에서 시와 풍수의 상호관련성에 관한 일반 원리, 소위 풍수시의 원형과 적례, 현대시에 나타난 풍수적인 무관심이나 반(反)풍수관의 사례들에 관해 밝혀 보았다. 도 두 번째로는 ‘청계천 소재의 시에 나타난 풍수적인 생태의식’을 중심으로 극악하게 훼손된 청계천에 대한 문명비판적인 시에서 날카로운 성찰의 시(인)의식을 엿볼수 있었으며, 반면에 청계천 복원이 가져다 준 희망과 낙관의 전서를 생태학적 서정시의 많은 사례를 통해 비평적으로 성찰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김지하의 최근 시에 나타난 풍수적 사유의 자취’에서는 시인 김지하의 시와 사상 가운데 풍수와 관련된 것을 가려서 그것이 동시대 문학의 환경 인식의 차원으로 수렴되고 있느냐 하는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비평적 일련의 과정을 밟았다. 현대시 비평에 풍수적인 사유의 담론을 수용하는 문제는 앞으로 좀 더 확대, 심화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많은 시인-논객으로부터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했지만, 환경 인식의 간절한 바람에 따라 정치하게 비평적인 척도가 마련되리라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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