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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혁명하는 여성들의 서사적 입지 The Status of Narrative on Revolutionizing Women
ABSTRACT
혁명하는 여성들의 서사적 입지
Summary

Since the recent ‘reboot’ or re-popularization of feminism, there has been a notable trend of relativizing Korea’s literature’s historical focus on ‘heterosexual love & elite & male’ and exploring the potential of female narrative. This paper states that defining female narratives as feminine stories about women written by female writers makes it more difficult to approach to particular female writers who are often regarded as “masculine” and have a more socialistic orientation. This has a historic context in which women and feminine things were presented as a culture to make up for politics prohibited in the colonial media field.

Revolutionary Women by Bae Sang-mi(Somyung, 2019) provides an overview of the wide-ranging expression of female labor in proletarian novels, defined broadly, without touching on the issue between KAPF literature and female writers. With this, proletarian narratives set in the period between 1925 and 1935 in line with the history of the KAPF organization can be extended to the early 1940s. Moreover, their scope can be expanded to include not only factory labor but also paid and unpaid reproductive labor and service labor. This evidently shows the will to read proletarian literature through the lens of female narrative rather than working to identify class narratives in female literature.

This also places the modern women as a part of female laborer, in turn relativizing the man=faced proletariat. It can also be noted that creating proletarian novels was impossible without going through women during the colonial period. This paper nevertheless expresses doubts over whether the female characters interpreted favorably in Revolutionary Women truly embody the "vision for a world where laborers become the owners of society.” Specifically, it is not clear how the female service worker highlighted at the end of the book can present an alternative future when the book itself exhibits an ascending “growth-conflict-outlook” structure.

This paper concludes that narratives in which women in certain occupations becomes immersed in men’s ideologies rather than their own may undermine the imperialistic/ colonial system, but they should not be interpreted as a defiant action against the dominant order. After all, the female workers addressed in this book seem to point towards an empty space in which revolutionary women who transform the pre-existing concept of labor and directly resist the imperialistic/colonial system can not be put forth. More time may be needed for narratives about revolutionizing women with theoretical background and systematic resources to come to the fore.

KEYWORD
혁명적 여성들 , 프롤레타리아 , 카프 , 프로문학 , 혁명 , 젠더 , 섹슈얼리티
  • 1. 식민지 여성서사, 살펴지지 않는 것들

    최근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다시금 근대의 매체 장에서 명멸했던 여성작가에 대한 관심이 활발해졌다. 자명해 보이는 한국문학사를 ‘이성애-엘리트-남성’ 중심의 것으로 심문하는 동시에, 그와 다른 여성서사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흐름이 거세다. 이는 범주로서의 젠더와 문화로서의 섹슈얼리티를 통해 정전으로서의 문학을 탈구축하려는 의도이기도 하다. 이때 우선 나혜석을 비롯해, 성적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했던 1세대 ‘배운녀자’ 작가들이 호명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식민지 문단에서 ‘여류문단’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또 해방기 탈식민 격동에서 이들 여성작가가 어떤 전신을 감행했는지 등은 연속적으로 파악되지는 않은 듯 하다.

    전위로서 도발적으로 활약했던 몇몇 여성작가 외에 체제 내에 자발적으로 자신을 투사하던 일군의 여성작가들은 대체로 현재적 관심에서 비켜나 있다. 예를 들어 소위 1940년대의 ‘친일’ 여성작가들이나 1950년대 ‘규수’ 혹은 ‘대중’ 여성작가들이 정력적으로 발표했던 다량의 작품들이 재차 읽혀지지는 않는다. ‘여류’ 명칭에 깃들인 멸칭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당대 문단에 이름을 기입하기 위해 누구보다도 애썼음은 자명하다. 이러한 열외는 여성서사에 대한 규정 자체를 단순히 ‘여성들이 생산했다’가 아니라,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의미 있게 독해할 수 있다’로 달리 하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1

    주지하듯 1990년대 이후 학술·비평계에서는 여성문학과 여성문학 연구의 흥기에 따라 여성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이 쉼없이 전개되어 왔다. 이때 선구자로서 1세대뿐 아니라, 최정희처럼 2세대 여성작가로서 일제에 협력한 흔적을 당대 매체 장에 새겨놓은 이들도 여실히 드러났다. 또 지하련처럼 식민이라는 조건에서 여성성을 전략적으로 내세운 3세대 여성작가들에 대해서도 두루 살펴졌다. 이들은 식민지 근대성의 산물로서 신여성의 정체성을 주로 구현했다. 여기에 속하는 여성작가들은 무엇보다 글로서 자신를 드러내고자 했기에 그들의 서사적 행위성이 여성적 글쓰기 등으로 주로 해석됐던 것이다.2

    그런데 여성작가들이 만들어낸 여성에 대한 이야기, 그것도 여성성과 관련해서 해석할만한 작품으로만 여성서사를 한정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소위 ‘남성적인 필치’로 고평됐던 박화성이나 ‘남성중심적 전망’을 제시한다는 강경애의 위치는 애매해진다. 이들은 2세대 여성작가에 속하면서, 때론 여성보다 계급을 고려해야하는 식민지적 조건을 드러낸다고 지목됐다. 그러나 이들 여성작가의 계급적 전망이 어떠한 젠더와 섹슈얼리티로 드러나는지, 그 교차적 양상에 대해서는 명확히 파악되지는 않았다. 사실 식민지 매체 장에서 이 여성작가들이 엮어내는 여성서사는 검열로 인해 양화되어, 즉 금지된 정치의 보충(supplement)으로 내세워지기도 했다.3

    이들 1, 2, 3세대 여성작가들은 고등교육의 수혜자로서 식민지 도시를 중심으로 언론과 교육 방면에서 활약했다. 대부분 이들이 쓴 소설은 자기 서사의 일환으로, 식민지 모더니티를 전위적으로 드러낸다고 받아들여졌다. 송계월과 임순득 정도가 식민지 매체 장에서 각기 기사와 비평으로 계급의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서사적 차원에서는 식민과 계급의 문제를 충분히 형상화하지는 않았다. 드물게 경성의 문단 중심에서 떨어져 만주에서 작품활동을 하면서 강경애가, 그리고 경북의 영천 지방에서 사회주의 활동가에서 작가로 전신한 백신애 정도가 특별히 궁핍하고 빈곤한 구여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4

    그럼에도 식민지 조선에서 이들 여성작가들의 작품은 식민지 매체 장의 가장 핵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여기에서 가시화된 여성작가들의 서사는 둘로 살펴진 듯하다. 첫째는 직접적인 정치와 관련이 없다고 여겨진 여성서사이고, 둘째는 다소 정치적이어서 여성적인 것이 아니라는 서사인 것이다. 강조컨대 한쪽은 양화되어 있고, 한쪽은 음각되어 있다. 여성적인 것이 정치적이지 않은 것으로 혹은 계급적인 것이 남성적인 것으로 말해질 뿐이라고 하면, 식민의 문제를 계급적 지평에서 다루고자 했던 여성작가들은 설사 여성 주인공을 핵심에 배치한대도 여성서사를 제출했다고 적극적으로 평가되지 않는다.5

    그리고 간과할 수 없는 것은 2세대 중 사회주의 성향을 드러내는 여성작가들의 서사 역시도 이미 검열을 통과한, 즉 합법적으로 생산된 것이 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이 여성작가들은 당대적 의미에서 혁명을 고수하는 ‘붉은 여성들’로 간주되지는 않았다. 사회주의 성향을 다소 드러냈다고 해도, 이들은 사회주의 여성서사를 제대로 창출했다고 평가되지 않았던 것이다.6 왜냐하면 식민지 조선의 문학 장에서 리얼리즘 문학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 이하 카프)의 결성과 관련한 작품들로 꼽혔기 때문이다. 대개의 여성작가들은 정식으로 카프에 속하여, 집단적인 문학운동이나 상호적인 문학논쟁에 연루되지는 않았다. 이들은 진정한 계급문학을 했다고 인정되지 않았고,7 다만 리얼리즘 혹은 동반자 성향의 작가로 더해질 뿐이었다.8

    그러나 초기 ‘여류문단’이 사회주의적 성향이 엿보이는 여성작가들을 중심으로 형성됐음은 이미 밝혀졌다.9 대표적으로 최정희는 신건설사 사건(1934)으로 9개월이나 수감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후 본인이 「정당한 스파이」(1931)가 등단작이 아니라며, 그 시절 자체를 도려냈던 것이다. 그리고 카프의 해산(1935)과 함께 여성작가들이 드러냈던 동반자성도 희미해진다고 했다. 검열의 강화와 그 속에서의 여성문단의 형성에 발 맞춰, 여성작가들의 전략도 여성적인 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달라졌다. 이렇게 카프문학과 여성문학 사이에 개입된 제국/식민지 체제와 남/여성적인 것의 교차는 식민지 여성서사에 대한 좁은 시야만을 허락했던 것이다.

    2. 『혁명적 여성들』, 여성서사로서 프로문학

    배상미의 『혁명적 여성들-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젠더, 노동, 섹슈얼리티』(소명출판, 2019)를 읽은 것은 바로 이즈음이었다. 페미니스트 독자들의 여성서사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면서 신여성으로서 여성작가들뿐 아니라, ‘지금-여기’ 신자유주의 상황에 참조가 될만한 혁명하는 여성들에 대한 힘 있는 이야기가 소구됐던 것이다. 그러나 신여성을 주로 서사의 대상으로 다룬 여성작가들과 달리 여성 사회주의자들은 스스로의 목소리를 기록하지 못했다. 이들은 당대 매체 장에서 사건의 인물이거나 스캔들의 주인공이기는 했지만, 소위 자기서사를 특장으로 한다는 여성작가처럼 자신에 대해서는 발화할 수 없었던 것이다.10 이렇듯 검열을 비롯한 식민지적 조건에서 계급문학으로서 여성서사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지, 그 곤란에 멈춰서 있었다.

    이 책은 이러한 식민지 조선의 여성작가와 그들의 서사가 가진 난국을 에두른다. 오히려 과감하게 젠더와 노동, 그리고 섹슈얼리티가 교차되는 지점을 전체적으로 살피겠다고 했다. 다시 말해 이는 여성문학에서 계급 서사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여성서사로서 계급문학을 진취적으로 보려는 것이다. 얼핏 이 역발상은 신선해보이지만, 한편으로 낯익게 느껴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1990년대 이후 여성문학 연구의 활발한 진전에서 여성/성과 계급, 그리고 여성노동과 문학이 연관되는 방식 등이 검토되기도 했기 때문이다.11 전자가 주로 1920, 30년대 카프(KAPF) 문학에서 여성재현이 어떠했는지를 비판적으로 분석했다면,12 후자는 1970, 8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글쓰기에 초점을 둔다고 할 수 있다.13

    이 책의 저자는 계급과 여성, 그리고 문학 사이에서 생성됐던 서사의 한계를 넘기 위해, 일단 프롤레타리아 소설이라는 개념을 재정의하는 듯 하다. 여기에는 카프에 소속됐던 남성 작가뿐 아니라, 비(非)카프 작가라고 하더라도 노동자들의 노동과 생활을 그렸다면 그들의 관련 작품이 논의의 대상에 포함된다. 물론 카프 문학을 논할 때 카프 단체 해체 이후의 상황까지를 고려해야 함은 이미 주장된 바 있다. 식민지 조선에서 혁명에 대해 상상했던 사회주의적 기획들을 프로문학과 그 주변으로 확장적으로 살핀 연구도 제출됐다. 이는 1980년대 후반 운동적 관점에서 추동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문학적 활동에 대한 관심을 잇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2000년대 이후 근대성 비판의 견지에서 문화론적인 관심으로 ‘지금-여기’를 상대화할 수 있는 사회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것이기도 했다.14

    그러나 이 책이 조금 더 밀어붙인 지점은 따로 있다. 바로 프로문학에서 드러나는 노동의 젠더구조를 밝히고, 그를 독해하는 섹슈얼리티 관점을 고수하는 것이다. 이때 여성작가도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 소설의 기준에 맞는 작품을 제출했으면 부분적으로 프로작가로 위치시킬 수 있다. 여기에서 기존에 사회주의 성향의 작가로 손꼽히는 박화성과 강경애, 그리고 송계월뿐 아니라, 새롭게 김말봉과 최정희도 분석될 만한 작품을 제시했다고 프로문학에서 제 자리를 얻는다. 식민지 매체 장과 ‘여류문단’의 상호적 구축, 그 속에서의 여성작가들의 모순적 입지를 떠올리자면, 이는 파격적이라고도 보인다. 소위 카프 대가들과 이들 ‘여류’들이 나란히 놓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텍스트들을 둘러싼 법과 제도, 그리고 담론과 행위를 널리 고려하는 문화비평의 맥락을 괄호치는 듯하다. ‘문화론적 전회’ 이후, 민족이나 계급 등 하나의 거대 카테고리를 모든 것의 원인으로 여기는 방식에 문제가 있음이 제기됐다. 무엇보다 이는 구조가 제시하는 제약들과 끊임없이 협상하는 개인의 정체성을 총체화된 역사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이때 서구적 기준에만 부합하는 하나의 근대성 대신 제국/식민의 효과를 아로새긴 복수의 식민지 근대성을 탐구하자고 했다. 그리고 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존재로서 각각의 신여성이 식민지 매체 장에서 의미있게 드러나는 순간이 다채롭게 조명됐던 것이다. 그런데 근대적 이분법에서 벗어나 식민지 근대성과 상호적으로 구성되는 주체들, 특히 여성들의 행위성에만 관심을 두자니, ‘제국/식민’체제의 억압적 계기로서 계급 자체에 대해 주목할 계기들은 이전보다 덜 마련되는 듯했다.

    이 책은 식민지 근대성에 대한 논의가 당대에 대한 풍속적 탐구에 기여했던 것으로부터 거리를 둔다. 그리고 다시 노동과 여성에 대한 텍스트를 면밀하게 분석하는 것으로 방법론적인 회귀를 재차 감행했다고도 느껴진다. 그리하여 노동의 문제를 다뤘다면 남성작가뿐 아니라 여성작가의 작품들까지를 프롤레타리아 소설이라고 확장시키고, 이 텍스트의 더미들을 일단 고르게 펼쳐놓는 것이다. 다음 단계로 여성노동의 방식들을 가능한 그 공간성을 고려해서 아우르려고 했다. 흥미롭게도 이 지점에서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분석 도구로 하여 앞선 연구들이 진행해왔던 계급문학의 여성재현에 대한 비판적 분석은 견제된다. 차라리 카프 문학을 포괄하는 프롤레타리아 소설 자체를 호의적으로 해석해서, 당대 여성노동과 관련한 맥락을 풍부하게 짚어내는 게 필요하다고 한다.

    이때 식민지 근대성의 총아로서 조선의 신여성만이 근대적 존재로서 가시화된 정황이 상대화된다.15 동시에 계급문학에서 공장만을 공적 노동의 공간으로 상정한 채 그 안의 여성노동자만을 진지한 재현의 대상으로 상정했던 것에도 미심쩍은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이는 E. P. 톰슨(Edward Palmer Thompson)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The making of the English working class)』 논의를 조안 스콧(Joan Wallach Scott)이 ‘영국 남성 노동계급의 형성’으로 비판적으로 패러디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했다. 조안 스콧에 따르자면 역사적 맥락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계급이라는 담론도 구성되는 것이며, 이때 카테고리로서 젠더가 개입한다는 것이다.16 식민지기에 형성된 남성의 얼굴을 한 공장노동자에 대한 관념,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신여성이라는 구도는 지금도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를 부르주아의 학문과 중산층 엘리트로서만 부정적으로 호명하는 효과를 가진다.

    이 책은 여성노동자를 남성의 얼굴을 한 노동자 리스트, 그 끝에 겨우 등록시키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반대로 아예 신여성을 포함해 기존 노동에 포함되지 않은 노동을 담당하던 여성 모두를 작심하고 여성노동자 내부로 끌고 들어온다. 이러한 시각은 다름 아니라 남성 공장노동자만을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안에 귀속시켰던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시각을 원천적으로 문제삼는 것이다. 이 책이 도발적으로 제시하는 “신여성과 여성노동자는 다른가”라는 질문은, 사실 위 의도에 따르자면 다시 “신여성은 노동자가 아닌가”로 거듭 고쳐 물어질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확장한 질문은 “여성은 어떻게 여성노동자가 되는가”일 텐데, 이는 이제까지의 젠더화된 노동의 개념에 균열을 낸다.

    사실 남성 노동자의 얼굴이란 여성 노동이 있었기에 내세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이 책은 명시하지는 않지만, 식민지 언론 장에서 노동의 문제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매개로 해서야 드러날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렇다고 할 때 이 책이 신여성 연구의 성취를 프롤레타리아 소설 연구에 접목시키는 선택을 한 것은 더할나위 없이 적절하다. 특히 신여성들이 주로 등장했던 여성 공간들, 즉 모성 공간, 가사노동 공간, 교육 공간, 소비 공간, 노동 공간들이 이 책에서 여성노동과 관련된 곳으로 적극적으로 재의미된다. 바로 첫째 (유사)사적 영역에서의 여/성노동, 둘째 공적 영역이라고 하는 공장에서의 여성노동, 셋째 새롭게 여성화된 영역으로서 서비스노동이 바로 그것이다.17

    이쯤에서 서평의 역할을 하기 위해 전체적인 논의를 간략히 추려볼 필요가 있다. 먼저 본론의 첫 번째 장은 사적영역에서 재생산노동에 종사하는 여성노동자들이 계급운동에 투신하는 방식을 다룬다. 여기에서 이재생산노동을 수행하는 여성노동자들이 차별과 낙인에 저항하는 이론으로 사회주의를 전유하는 것을 분석한다. 이때 이들 재생산노동자들이 스스로 계급적대를 감각하고 자기자신을 노동자로 인식하는 순간이 드러난다. 두 번째 장에서는 공장 생산직의 여성노동자들이 계급갈등을 성폭행과 관련해서 경험하는 양상을 고찰한다. 제 각기 다른 위치에서 불구하고, 이들 여성노동자는 서로 연대하여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마지막 장에서는 여성 서비스노동자들이 독자성을 추구하며 대안적인 미래를 지향하는 방식을 제시한다. 이들은 성적 대상화에 저항하며 섹슈얼리티와 계급 혁명의 관계를 보여준다.

    그런데 가장 중요하게는 이러한 여성노동과 그 공간과의 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다음과 같은 당대 프롤레타리아 소설에 나타난 여성서사가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첫 번째 장에서 「오수향」(송영, 1931)의 수향과 「망명녀」(김말봉, 1932)의 순애는 기생이지만, 모두 신여성들을 만나 긍·부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남성 사회주의자들의 지도를 받던 여성 재생산노동자들이 이들과 단절하고, 다른 여성들과 연대하는 운동가가 되는 것이다. 반면 「북극의 여명」(박화성, 1935)의 효순과 「인테리」(이북명, 1932)의 명숙은 교사와 여공이지만, 입옥자의 아내와 지식인의 부인으로서 서사적 입지를 가진다. 이들은 자·타의적으로 수행하는 재생산 노동을 통해서 자신의 계급의식을 드러낸다. 한편 「깨트려지는 홍등」(이효석, 1930)의 봉선과 「소금」(강경애, 1934)의 봉염이 어머니는 ‘창기’와 ‘여염집 여성’으로 다르지만, 공히 사람답게 살 법적 자격을 주장하게 된다.

    본론의 두 번째 장에서 「여공」(이북명, 1933)의 정희와 「교차선」(한설야, 1933)의 은순, 그리고 「여직공」(유진오, 19318)의 옥순과 순임은 공장의 남성관리자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그런데 이 중 반은 연대하는 노동자편이 되고, 반은 야합하는 관리자편으로 갈리게 된다. 이렇듯 여전히 ‘동지’와 ‘애인’을 갈라치는 방식은 공사구분에 근거한다. 그런데 「인간문제」(강경애, 1934)의 선비는 이와 달리 공장에서가 아닌 고향의 사적 친분으로 움직인다. 이는 「공장소식」(송계월, 1931)의 옥분이 성폭력과 얽힌 노동문제가 사적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했던 맥락과 같다. 이렇듯 공사에 걸쳐 있는 여성노동자의 애매모호한 입지에도 불구하고, 「고향」(이기영, 1933)의 여성들은 공장에서야 가족을 벗어난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음도 지적해야한다. 마찬가지로 「니나의 세토막기록」(최정희, 1931)의 여학생 니나도, 또 「인형의 집을 나와서」(채만식, 1933)의 주부 노라도 공장과 인쇄소 노동자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계급투쟁을 다짐하게 됐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론의 세 번째 장에서 「황혼」(한설야, 1936)의 여순은 고학력자이면서도 생산직 노동자와 함께 하리라 결심한다. 이는 「저회」(장덕조, 1932)의 영애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여성노동자의 성적 대상화에 저항하며 백화점 파업을 이끄는 인물이다. 또한 「탁류」(채만식, 1937∼1938)의 계봉은 서비스업 노동자로서 성적 대상화로 인해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는 사회구조를 무엇보다 빈곤문제로 상기시킨다. 그런데 이렇게 여성들에게 역할이 돌아간 계급투쟁은 마지막에는 대인업무를 수행하는 여성노동자에게서 실현되기도 한다. 즉 「바다로 간다」(김남천, 1940∼1941)의 영자와 「경영」(1940.1), 「낭비」(1940.2∼1941.2), 「맥」(1941.2)의 무경은 독자적인 생활을 꾸리려는 여성들로, 모두 남성 애인과 상관없는 다른 방식의 미래를 상상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이 세 공간에서 수행되는 여성노동에 대한 분석은 ‘관계, 노동, 저항’이라는 거의 유사한 구조로 나아가고 있다. 감독자와 교제하는 여성을 그의 섹슈얼리티를 억압하고 조롱함으로서 적대시하는 「교차선」에 대한 비평만이 예외이고, 대체로 이 책에서 다루는 작품들은 괜찮은 여성서사로 승인되고 있다. 다시 말해 여러 공간에서 여성노동을 다양하게 그린 작품들이 당대를 자세히 보여주는 의미있는 텍스트들로 판단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식민지 조선의 프롤레타리아 소설로서 이들 작품이 보여주지 않는 것, 혹은 왜 이렇게만 보여지는지에 대해서는 차후의 과제로 남는다. 그렇다면 다음은 프롤레타리아 소설에 대한 확장적 관심과 여성노동 재현에 대한 의도적 선해(善解) 너머, 어떤 울퉁불퉁한 단면들을 불편하나마 잠시 그대로 드러내볼 차례이다.

    3. 혁명‘하는’ 여성들이 드러나지 않는 곳

    여성노동을 보여주는 여성인물에 대한 이야기들이 반드시 혁명적일까. 혹은 혁명을 하는 여성들이 언제나 노동에 관한 이야기를 할까. 사실 이 책의 제목인 ‘혁명적 여성들(revolutionary women)’은 이 둘을 모두 포괄하도록 지시하지만, 전술했듯 식민지 조선에서 혁명‘하는’ 여성들은 검열이 작동하는 합법적 매체 장에 뚜렷히 각인되지 못했다. 이 책에서 기생 수향으로 시작한 노동하는 여성들, 즉 기존 노동의 개념에 균열을 내는 혁명적 여성들의 이야기는 고학력 여성 무경으로 끝난다. 사실 이 여성들은 공사영역의 구분에서 그 경계를 넘나들며 언제나 노동하는 주체들이다. 그리고 이 책에 따르면 이들은 현재적 억압을 드러내면서, 결국 미래적 대안으로 나아가는 행위성을 보인다고 한다.

    다소의 비약이 허락된다면, 저자가 제시하는 목차 자체가 애초 정의한 프로레타리아 소설에 맞게 매끈하게 진전하는 듯 보인다. 다시 말해 여성노동자들은 자신의 공간에서 젠더 역할에 반대하고 섹슈얼리티 억압에 저항하면서 성적 자기결정권을 주장한다. 그리고 성폭력에 반대하는 등 독립적인 여성연대를 이뤄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노동자들이 사회의 주인이 되는 세상에 대한 비전”을 전제한 ‘발전론적(?) 구성’은 식민지 여성공간에서의 여성노동들을 고루 조망하는 데 그치지는 않는다.18 즉 재생산 노동에서 산업 노동,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비스 노동까지, 산업구조의 발전이 있고, 시기적으로 나아갈수록 실질적인 전망을 제시하려는 듯 보이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이 카프 문학을 논할 때 주목하는 1920년대가 아니라, 확장된 의미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상정하기 위해 1930년대로 시선을 이동시켰음이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이 흐름의 끝에서 1940년대 초반의 문학이 새롭게 초점화되기 때문이다. 이때 기존 카프문학에서 자주 다뤄지지 않는 1930년대 후반과 1940년 초반, 즉 채만식의 「탁류」나 김남천의 전향 이후의 소설들이 재해석된다. 이 두 소설은 일종의 전통적 여성 수난기로서 1920년대 노라 붐의 후일담으로, 그리고 후자는 1930년대 중반 카프해산의 반향으로 독신여성의 생활에 집중한 것으로 읽혀지기도 했다. 둘 다 여성해방과 계급혁명에 대한 백래시로 읽힐 소지가 있는데, 그럼에도 이 책은 여성노동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두 작품 다 프롤레타리아 소설로 독해된다고 했다.

    이는 1930년대를 “근대화의 융성과 쇠퇴가 공존했던 시기”로 재조명하려는 이 책 전체의 의도와도 연결된다. 그러나 확장적 정의가 되려 초점을 좁히는 것은 궁극적으로 계급과 노동, 그리고 여성이 교차되는 면모를 전체적으로 살피겠다는 의도에 맞지 않는 듯 여겨지기도 한다. 관련해서 기존 카프문학에서 주로 다뤄졌던 1920년대 작품들이 아예 논외가 된 것은 1930년대만의 특징으로 서사화된 프롤레타리아 소설이 있음을 전제하게 한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는 1930년대라는 시기가 가지는 전체적인 의미만이 서술되어 있을 뿐, 이때 산출된 프롤레타리아 소설들이 1920년대와 비교해서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달라졌는지는 말해지지 않았다.

    정리하자면, 이 책은 카프의 설립과 해산을 기준으로 하는 ‘1925년에서 1935년까지’라는 한 시기를 ‘1920년대’와 ‘1930년대’로 달리 구분하면서, 그 서사적 특징이 어떻게 이 시기적 단절과 연동해서 차이를 가지는지를 설명하지 않았다. 1931년과 1934년 두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검거로 조직이 와해되었지만, 그와 상관없이(혹은 그 때문으로?) 관련 작가들의 작품 수는 더 많아진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책이 분석하는 작품들은 대체로 이를 전후한 서사로 기존 카프문학에서 제외시킨 여성작가의 작품들이 아니라면 비슷하게 1930년대 중후반으로 한정되어 있다. 다만 도드라지는 것은 전술했듯 다소의 간격을 두고 등장한 1940년과 1941년, 서비스업종에 종사하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과연 이 여성 서비스노동자들이 “노동자들이 사회의 주인이 되는 세상에 대한 비전”이라는 프롤레타리아 소설의 특징을 알맞게 드러낼 수 있는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서비스업종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식민지 근대성을 꼭 드러내는 신여성의 일부이기도 하면서, ‘모던 걸’로서 각종 매체에 늘 양화되어 등장해왔다. 원래 이들은 ‘신여자’이면서 ‘양처’를 꿈꾸기도 하는 연속적인 존재들이었던 것이다.19 이들은 원체 그 경계를 넘나들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바로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김남천의 연작소설에 등장하는 최무경이 그렇다. 그는 짐작컨대 일정한 교육을 받은 여성이면서, 동시에 아파트사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어느 정도 아버지의 유산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 부족한 형편 때문에 부득불 노동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짚어야하는 것은 박무경이라는 여성, 그가 노동을 하는 진짜 이유는 결혼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출옥할 애인과의 미래를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이러한 서비스 업종에 일하는 여성들이 어떻게 서사화되는지는 1930년대 말 카프의 해소와 검열의 강화와 함께 말해졌다. 즉 여성 공장노동자가 서사에서 사라지자, 그 빈 곳에서 떠오른 여성상 중 하나로서 그 전향자의 애인 혹은 부인이 그 남성이 상실한 정치적 전망을 대신하는 경제적 합리성으로 떠오른다는 것이다.20 때문에 이들은 카프의 전망과 상관없이, 나아가 때로는 검열의 효과로서도 독해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은 이 여성이 수행하는 노동에 주목하면서 이 이야기가 프롤레타리아 소설로 이해될 가능성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간과할 수 없는 점은 이 소설이 여성 서비스노동자 최무경의 모습에 초점을 두기보다, 애인의 옥바라지와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일터에 나오기 시작한 그의 내면에 더 몰두한다는 것이다.

    강조컨대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대동아공영권으로 발전될 동양론이 대두될 때, 이러한 전체주의적 사상에 회의를 드러내는 역할이 이 여성노동자에 주어지는 것이다. 분명 김남천의 이 연작에서 여성은 자신의 노동이 아니라 남성의 사상에 더 관련하는 모습으로 제시된다. 이 소설에서 일하는 존재로서 무경이 다른 여성노동자들과 만나는 경우는 도드라지지 않는다. 이 책에서 가장 힘쓴 부분은 새로운 사상의 예고로서이 여성노동자가 직접 철학에 입문하는 모습을 그려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지배질서에 포섭되지 않는 도전적 실천으로 말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특히 전체주의와의 대결을 드러내기 위해 여성노동자의 투쟁이 아니라, 그의 사상적 천착이 주목되는 것, 이는 어떻게 봐도 이 책이 제시한 프롤레타리아 소설의 정의로서 “노동자들이 사회의 주인이 되는 세상에 대한 비전”과는 멀어 보인다. 결국 최무경은 시대적 흐름에 동요하지 않는 인물이라기보다, 시대적 배경이 흐릿하게 처리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드러내는 징후적 존재는 아닌지.

    여전히 1930년대 후반, 그리고 그 연속으로서 1940년대 초의 소설이 노동과 계급,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투쟁 대신에 무엇인가를 배치한 정황들을 생각한다. 이때 여성서사로서 프롤레타리아 소설이 노동쟁의와 더불어 성폭행을 빈번하게 다뤘음을 지적하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21 이는 젠더화된 노동시장뿐 아니라, 나아가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핵심으로 언급하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다른 프롤레타리아 소설들이 성폭행을 계급적 각성과 관련해서 중요하게 장치화한 것과 달리, 오히려 최무경은 이를 염두에 두기라도 한 듯 섹슈얼리티와 관련해서는 재현되지 않았음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여성노동자의 서사, 특히 조선의 프롤레타리아 소설의 한 귀결로서 등장한 인물이 아니라, 식민지 남성 지식인이 드러내지 못하는 사상적 항변을 드러내기 위한 여성인물인 것이다.

    무엇보다 여성노동자를 포함해 여성인물을 내세울 때의 문단의 구조, 검열을 포함한 그 식민지적 한계를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검열의 포지티브한 형식으로, 그리고 양화된 방식으로 식민지 매체 장은 다양한 여성들을 각종 양식으로 무람없이 재현했다. 이때 조선의 프롤레타리아 소설도 여성을 중심에 두는 서사들을 다수로 마련했고, 이때 여성 섹슈얼리티를 전면화시킨 방식이 극적으로 활용된 것이다. 이 지점에서 식민지의 여성작가들이 카프 단체 혹은 프로문학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마치 최무경처럼 섹슈얼리티의 재현은 기피한 채 자신들만의 서사를 생성해내고자 했던 것을 상기한다. 식민지 매체 장에서 가시화된 이들의 여성서사와 관련해서 주목되는 이 점은 물론 카프의 남성 중심성, 혹은 ‘여류문단’의 식민지성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22

    이러한 탈섹슈얼의 전략은 다시 이 책이 주장하는 프롤레타리아 소설을 생산했던 여성작가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이는 저자성(authorship)의 성차를 고려하는 것인데, 여성 프로작가들이 남성작가들에 비해 어떤 특징을 가지는가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왜 강경애의 「인간문제」는 다른 남성작가들이 여성 섹슈얼리티를 다룬 방식과 다르게 쓰여졌을까. 이 책에서 이 작품은 공장노동자의 계급갈등을 여성을 향한 섹슈얼리티의 억압으로 드러냈던 작품 중 하나로 배치됐다. 그러나 이 소설의 히로인인 여성노동자 선비는 성적 위기에 노출되기는 하지만, 그로부터 재빨리 벗어난다. 도리어 작품의 위기는 성폭력을 둘러싼 상황이라기보다 갑작스럽다고 할만한 그의 병세 때문에 고조된다. 이는 사소하지만 간과될 수 없는 차이인데, 그는 성폭행의 장면을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기를 적극적으로 선택한 것이다.23

    이 빈 곳의 의미, 즉 계급과 여성, 그리고 프로문학과 여성작가가 교차할 때, 여성작가가 여성서사로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가지는 특성을 부러 기피하는 것은 무엇일까. 뒤집어서 이는 식민지 매체 장에서 계급서사로서 여성문학이 가능하지 않은 어떤 지점을 암시하는 듯도 하다. 그렇다면 계급을 말하는 서사가 불가능해진 시기에 여전히 노동하는 존재로서 여성이 어떻게 등장하는지가 중요하다. 이때 이 책이 마지막으로 배치하는 존재로서 최무경이 그 어떤 남성과도 성적 관계에 연루되지 않고, 반대로 그를 해소해내가는 방식으로 존재함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 여성노동자들은 여전히 이론적 배경과 조직적 자원을 가진 혁명하는 여성들로는 등장하지는 않는다. 식민지 매체 장에서 금지된 발화주체이자 재현대상으로서 여성 사회주의자는 여성노동자보다 짧게, 그리고 늦게 등장한다.

    정칠성, 박진홍, 유영준, 김명시 등이 관련 사건 혹은 가십에서가 아니라 혁명의 주체로, 또는 정치적 존재로 나타난 것은 해방 직후였다. 이때 김남천은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회 서기장으로 활동을 재개하면서, 해방 후 최초로 연재된 장편소설이었던 「1945년 8·15」(『자유신문』, 1945.10.15∼1946.6.28)을 내놓았다. 흥미롭게도 여기에서 여성 무경은 교육 노동자 문경으로 바뀌어 등장한다. 무경은 임정파 남성청년인 그의 남동생으로 사회주의 지향의 운동에 투신하는 문경과 대비되는 지점에서 반동적으로 등장한다. 아예 다른 이름을 취하지는 않은, 이 애매한 변형 혹은 모순된 전환은 그 자체로 탈/식민의 효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이는 식민지 여성작가들이 검열의 사슬로 대표되는 식민지적 억압에서 벗어난 후, 즉각적으로 여성 프롤레타리아 소설을 의욕적으로 그려내지 않은 것과도 관련한다.

    해방직후 여성작가들은 1, 2, 3세대의 특징에 따라 탈식민 문단에서 서로 다른 전략을 취하며 격동의 시대를 살아간다. 1세대 여성작가들은 종적이 묘연했고, 2세대 중 사회주의 지향의 여성작가들은 박화성을 제외하고는 안타깝게도 거의 세상을 등졌다. 잠시 계급문학을 할 수 있었던 이는 오히려 2세대 중 협력혐의가 있었던 최정희였다. 그의 해방 3부작은 민중과 여성, 그리고 농민의 이야기를 대대적으로 다루는데, 이는 우파가 승기를 잡은 1947년 이후 남한의 문단에서 자신의 입지를 만들어내려는 전략이기도 했다. 반면 3세대 중 여성적 목소리를 특장으로 했던 지하련은 그보다 일찍 1946년에는 좌파적 입지를 천명했지만, 그 자신의 쇄신을 위해 아예 여성이 아닌 남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이렇듯 식민에 이어 탈식민의 순간, 여성작가들의 서사들은 다시 한번 드라마틱한 굴곡을 겪을 수밖에 없다. 매한가지로 프롤레타리아 소설도 여성서사와 더불어 각 시대마다 가능한 형태로 등장한다. 그리고 식민지 근대성을 비판적으로 드러내는 노동에 대한 서사를 엮어낼 때, 이 제국/식민 구조에서 생성된 탈/식민의 효과를 젠더와 섹슈얼리티와 관련해서 고려해야했던 것이다. 이는 해방기 좌파 남성작가들이 여전히 여성노동자의 집단적인 형상에 주목했음에서도 관찰된다.24 여전히 계급적 상황을 드러내는 최적의 대상은 여성이었던 것인데, 여성작가의 경우에는 여전히 좌파적 지향에서도 계급서사로서 여성문학을 제출하는 선택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분단과 전쟁의 상황에서 또 다른 젠더 분할 혹은 섹슈얼리티 수행이 진전되는데, 이때 냉전의 영향으로 다시 소설의 창작에서 계급의 문제는 개입될 수 없었던 것이다.

    4. 결론을 대신하여

    식민지 조선의 프롤레타리아 소설에서 여성은 식민지 계급과 젠더의 교차를 보여주는 ‘혁명적’ 존재로 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식민지 근대성이라는 조건에서는 혁명‘하는’ 여성의 서사적 입지는 유예된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식민-분단-전쟁-냉전’에 이은 탈/식민의 반향에서 지구적 자본주의에 조응하는 지역적 개발주의가 내내 주장됐다. 이 끝자락에서 마침내 제도적 민주주의가 도래했지만, 곧 IMF 금융위기도 발발했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휘몰아친 신자유주의의 광풍은 이제 감염력이 강한 이 바이러스의 시대에 잠시 숨고르기를 하는 듯하다.

    다소 뜬금없지만 ‘지금-여기’ 여성노동의 문제를 말한다고 할 때, 최근의 ‘코로나’시대를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의미에 대해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앎과 삶의 방식으로 ‘네트워킹’과 ‘언컨택트’가 말해지면서, 그를 종합한 ‘비대면 관계형성’이 강조되고 있다. 이는 지금껏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던 노동의 영역들, 주로 여성들이 담당했던 재/생산과 돌봄, 그리고 친밀성과 관련한 노동이 얼마나 필수적이었는지를 훤히 드러낸다. 근대의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은 사실상 겹쳐져 있었고, 이 느슨한 솔기를 때때로 뜯고 연결하는 역할은 늘 여성들이 담당해왔던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이 책 『혁명적 여성들』의 발간은 시기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해 보인다.

    저자의 학위논문에 근거하여 출간한 이 책은 식민지 프롤레타리아 소설을 통해서 여성 노동의 양상을 성실하고 꼼꼼하게 그려냈다. 이 연구로 인해 노동으로 셈해지지 않던, 그러나 일상을 지탱하던 여성들의 일을 둘러싼 투쟁들을 잘 감각할 수 있는 서사적 계보로 정리될 수 있었다. 이 이야기에서 여성들은 재생산노동을 통해 계급운동에 참여하고, 성폭행의 경험을 통해서 계급갈등을 경험하기도 하면서도, 스스로 계급적 위치에서 연대하며 투쟁하는 주체로 거듭나는 데 성공했다. 여전히 저자가 드러내려는 비전은 모든 공간의 여성노동자들이 처한 지금의 현실에 조응할 수 있다. 그 자체로 프롤레타리아 소설의 낭만적 지향이라고 할만한 이 연구의 주지에 따르자면, 이들 여성노동자들은 분명 기존 협소한 노동개념에 저항하는 혁명적인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여전히 각종 재난에서 누구보다 먼저 해고를 비롯해 곤란에 처하는 이는 여성노동자들이다.

    그렇다면 이제 궁금한 것은 다음과 같다. 프롤레타리아 소설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여성노동의 다양한 서사적 사례들이 식민지 근대성의 핵심을 이루는 경제적 구조를 어떻게 균열시키고 변용하는지, 어떻게 혁명은 도래할 수 밖에 없는지 하는 것이다. 이 책이 재생산노동 자체를 노동의 주요영역으로 살펴봤듯이 이미 여성이 담당하는 노동은 푸코식의 혼인 장치와 섹슈얼리티 장치의 완고한 구분을 넘어서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 해결되지 못한 ‘위안부’ 문제가 그렇듯, 제국/식민지 체제에 더한 성차별적 사회의 기반에서 여성의 재/생산-섹슈얼리티 노동은 폭력적으로 분열되어 있기도 하다. 그렇기에 식민지 근대성까지를 포괄하는 근대성 비판에서 탈/식민의 지향이 어떻게 민족주의를 상대화시키면서 다시 제국주의까지를 비판적으로 볼 것인지도 고민이 필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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